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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인한 펜데믹 상황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요즘 문득 여행이 가고싶어 집어든 책. "걸리버 여행기" 뜬금 없긴 하지만, "여행"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읽은 책이다. 참고로 나같은 사람이 있다면, 그 여행이 이 여행이 아니라는 점은 꼭 명심하시길. 걸리버여행기는 어렸을적 만화 속 우리모두가 기억하는 소인국에서 머리카락이 묶여 누워있는 거인 걸리버의 모습으로 기억되는 책이다. 물론 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그냥 그 장면 만을 기억할뿐. 그래서 드디어 읽은 이책은 대체 왜,,, 만화였는가..하는 생각이 들게했다. 말만 여행기이지,, 책의 소개 글 그대로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차있는 내용이기에 왜 어린이 만화로 나왔는가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였다.
첫번째 여행 릴리펏. 우리가 아는 소인국 이야기. 소인국에 떨어진 그는 그 소인국에서 나름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그곳의 이야기를 한다. 그냥 작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겠구나했지만, 두번째 여행 브롭딩낵 이야기(거인국)를 읽고 있다보면, 소인국의 사람이 걸리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그에게서 어떤 위협을 느낄수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책속의 걸리버는 타국에서 젠틀한 사람이였지만, 그는 소인국에서는 언제든 나라에 큰 위협이 되는 사람이였을 것이고, 거인국에서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한 사람이였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소인국을 떠났고, 거인국에서는 도망(?)아닌 도망으로 벗어난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내용은 개인적으로는 럭낵의 스트럴드브럭이라는 존재이다. 스트럴드브럭은 죽지않으나, 늙고, 늙기에 모든 활력과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불사를 사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어느순간 나라에서도, 가족에게서도 잊혀지는, 그 자신을 기억하지도, 말하는 방법도 잊어 누군가와 삶을 함께하지도 못하는 그저 불사를 사는 존재. 우리가 말하는 영생. 그 영생을 사는 사람이면서, 사람이지 않은, 태어나는것이 불길한 징조인 사람들. 저자 스위프트는 왜 이런 사람을 그린 것일까?! 불사나 불멸을 꿈꾸는 이들에 대한 조롱인 것일까? 어느 시대든 죽지 않는 삶을 그리는 이들은 존재했으니까. 책속의 영생은 말그대로 끔찍했다. 개인적으로 불멸의 삶을 꿈꾸지 않는다. 유한함이 있어야 소중한 것도 있고, 지금이라는 시간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사람마다 다를 것이나,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상상이 되지 않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으나, 스트럴드브럭의 불멸과 달리 영화 인타임속에서 그려지는 불사도 내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그냥 사는동안 아푸지만 않았으면 하는 작은 바램...ㅠ
그리고 후이늠국. 개인적으로 영화 혹성탈출이 생각나는 나라였다. (그냥 먹이사슬 꼭대기에서 먹이사슬 2-3단계로 내려간 느낌이 드는 챕터라..) 거짓말이라는 것이 없고, 인간이 가지는 모든 '악'으로 판명되는 감정이 없는, 완전한 이성으로써 다스려지는 나라. 그리고 그 이성이라는 것을 탑재한 이는 인간이 아닌 <말>이다. 그 나라에서는 야후라는 미개동물이 살고, 그 미개동물은 <인간>이다. 그러기에 걸리버는 야후 취급을 받았으나, 그를 구해준 그의 주인은 그를 야후이면서도 야후와 다른 이로 취급한다. 그에게 말을 가르치고, 다른 후이넘을 만나게 해주고, 걸리버가 살아온 세계의 문명에 대해 대화한다. 하지만 그 대화를 듣고 있다보면, 서로의 입장차, 내가 바라보는 내 문명속에서의 말, 그리고 후이넘이 바라보는 그들의 문명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다른지, 우리가 생명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아마도 저자 스위프트는 당시 가장 인간과 가까웠으면서, 우리에게 꼭 필요했던 동물인 말의 입을 통해 우리를 비판하고자 했던 것 아닐까?! 인간으로써 우리가 가진 이성이라고 믿는 것이 각자의 욕심 안에서 어떻게 무너지고, 폭력적이고 이기적으로 바뀌는지를. 보편적 진리를 우리 스스로 말하고 있음에도 내 욕심과 이기심에 눈 감아버리는 우리의 이성이 얼마나 얄팍한지 말하고 있었다. 스위프트가 살았던 당시가 근세 초반, 유럽이라는 복잡한 상황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든 상황들을 후이넘이라는 또다른 존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후이넘이 완전한 존재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신'은 아닌 것이다. 그저 유기체로써 존재하는 동물의 이상향이랄까. 뭐 그정도?! 결국 자신 생각의 범위를 넘어가지 못하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수용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점도 신선했다. 아마도 스위프트 본인이 사제서품을 받은 종교인이다보니, '신'과 같은 완전한 존재는 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걸리버 여행기는" 여러 여행기를 통해, 인간이 어떤 모습인지, 제 3자의 시선과 의견이 그려지고, 우리눈에 비친 그들의 문명이 우리와 무엇이 다른지를 그래서 무엇이 더 옳고 그른지, 더 나은 방향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는 책 같았다. 주인공은 후이늠에서 돌아와 인간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다소 황당한 모습을 보였으나, 개인적으로 그가 그길로 나아가 이상향을 위한 정치를 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이 들기도했다.(현실에 치여 좌절했을려나..... 개인적이 사견을 덧붙이자면 주인공은 후이늠을 떠난것을 슬퍼했으나, 나는 그 나라에 살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너무 감정적인 사람이라, 너무 이성적인 그들이 재미가 없었다....그냥 이건 내생각.) 재밌었다. 제3자가 바라본 인간 문명이. 결국 인간이 바라본 인간문명의 '악'한 측면을 인간 스스로 인지하고 있음에도 벗어날수 없었다는 것이 슬프지만. Good!
"후이늠들에게 우정과 박애는 두 가지 주된 미덕이다. 이런 미덕은 특정 대상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종족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아주 먼 곳에서 온 후이늠도 가장 가까운 이웃과 다를바 없는 대접을 받으며, 여행 온 후이늠도 고향에 있는 것과 똑같이 행동한다. 그들은 극도로 정중하며 품위 있지만 격식을 따지지 않는다. 그들은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이성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신경을 써 가며 자식을 교육한다. 또한 나는 주인이 이웃의 자식을 자기 자식과 다를 바 없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들은 자연의 가르침에 따라 후이늠이라는 종족 전체를 사랑하고, 이성에 의해서만 탁월한 미덕을 지닌 자를 구별 할 수 있다고 여긴다."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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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 나라의 국민들 대부분은 가장 해로운 자그마한 벌레 같은 족속일세. 자연이 일찍이 땅 위에 기어 다니도록 허용한 벌레들 중에서 말이야."(162쪽) 잔혹 동화가 유행을 했었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도 알고 보면 무섭고 끔찍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어릴적 TV에서 본 <걸리버 여행기>는 소인국에 간 걸리버가 요정처럼 작은 사람과 사는 이야기로 환상적이고 멋진 이야기였다. 커서 <걸리버 여행기>는 저자 당시의 사회와 정치를 풍자한 풍자문학이라는 정도만 알았지 이정도일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지독한 염세주의자라는 말에서 짐작했어야 했는데 '염세주의자'라는 말을 이 완역본을 읽고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표지 뒷장에 "이 작품의 의도는 세상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것이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는 것"이라는 저자의 말이 적혀있는데 화까지는 아니고 역한 감정까지는 들었으므로 어느 정도는 성공한 셈이다. 아무튼 <걸리버 여행기>를 다 읽고서 재밌고 즐거웠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1726년 출판 당시 인기와 논란을 일으켰고 신랄한 묘사로 내용이 삭제되거나 금서까지 되었다는 뒷표지의 글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19세기 초 <걸리버 여행기> 원작의 거친 표현과 풍자를 삭제해 아동문학으로 발표했다는데, 그 아동문학을 접하고 만화영화를 보며 걸리버와 소인국을 사랑했던 독자이자 시청자로서 소감을 말하자면, 아동문학으로 내놓은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신감과 실망감이 가득하다고나 할까.(이정도면 화가 난건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자신과 걸리버를 동일시한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책에서 각 나라를 여행하며 왕에게 걸리버가 전하는 말과 각 나라의 교육과 사회, 정치제도를 이상적으로 그리는 것을 보며 작가의 의사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걸리버가 전하는 온갖 부정적인 인간 세상의 모습에 맞장구치며 대단한 풍자라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는 공감하고 동의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까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가?! 왜 그렇게 불만이 많은가?! 라고 생각하는 쪽이랄까. 그리고 조너선이 냄새에 민감한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는데, 걸리버는 냄새에 굉장히 민감해서 사람의 냄새를 못견뎌한다. 후이늠국에서 돌아와서 아내나 자식들의 냄새까지도 견디지 못한다. 작가의 독설 중 가장 끔찍한 것은 인간을 풍자한 야후에 대한 묘사였다. 나는 야후를 다룰 때는 역겹다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이 참 싫었다. 그 다음에는 노인에 대한 독설이었는데 인간인 것이 비극인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야 했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부모가 계신데 노인을 모두가 작가의 독설처럼 생각한다면 사람인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사람인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이 책은 총 4부로 구성돼있다. 제 1부는 우리가 잘 아는 릴리펏(소인국) 여행기로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고, 이곳의 교육에 대한 묘사는 스위프트의 이상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은 귀족과 고관대작의 남자아이, 여자아이, 신분이 낮은 남자아이, 여자아이, 그리고 농부와 노동자들의 자녀의 교육으로 나누어 묘사를 하는데 남녀의 구별은 있지만, 차별은 하지 않는 것이 인산적이었고, 신분에 따른 차별적 교육은 당시 사회를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제 2부는 브롭딩낵(거인국) 여행기로 거인이기 때문에 걸리버는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거인국의 왕은 지적이고 호기심이 많아서 걸리버와 대화를 즐기는데 걸리버는 영국의 사회전반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거인국의 왕은 '가장 해로운 자그마한 벌레 같은 족속'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제 3부는 라퓨타(날아다니는 섬), 발비나비, 럭낵, 글럽덥드립, 일본 여행기로 이름도 아름다운 라퓨타에 대해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역주를 보니 스페인어로는 '창녀'라는 뜻이란다. 어디가서 라퓨타 참 아름다운 말이라고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변적인 사람을 풍자하는 나라로 이 나라의 왕을 비롯 귀족들과는 대화조차 하기가 힘들다. 너무 자신들의 생각에 빠져서 대화가 끊기기 마련이고 이 때마다 시종들이 깨워줘야 한다. 글럽덥드립은 '마법의 섬'인데 망자를 불러낼 수가 있고 죽은 자는 진실만을 말한다. 그리고 럭낵 왕국을 방문하는데 이곳의 스트럴드브럭에 대한 묘사로 노인을 풍자하는데 나는 슬픈 마음이 들었다. 제 4부는 후이늠국(말의 나라) 여행기로 인간에 대한 풍자로 야후가 등장한다. 선장 자격으로 출항을 하게 된 걸리버는 중간에 브리스 출신의 포콕 선장을 만나는 데 '그는 정직한 사람이고 훌륭한 뱃사람이었지만, 다소 지나치게 자신의 의견을 확신했다. 그와 같은 성격을 가진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그가 파멸한 원인이 되었다."(271~272쪽)라는 말이 나온다. 왠지 나의 파멸의 원인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지나치게 내 의견을 확신하는 일'을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말의 나라에 도착해서 말들과 지내게 된다. 이곳에서 야후(인간의 풍자)라는 짐승을 부리는데 야하우에 대한 묘사는 역겹기 그지 없다. 그 외에도 말과 영국의 사람들에 대한 대화는 당시 사회가 아무리 부패하고 그 것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다해도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것을 알았다는 것으로 이 책을 읽은 보람을 갖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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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XIV / 현대지성 10번째 리뷰] 고전은 왜 오랫동안 읽혔을까? 수 세기에 걸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또 읽었을텐데,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읽히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읽을 때마다 새로운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를 몇 번이나 읽었을까? 어릴 적 '소인국편'만 따로 있는 책까지 포함하면 꽤나 많이 읽었다. 어린이책으로 여러 출판사의 책이 나왔으며, '영어공부'를 위해서 영문판까지도 읽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대인국편'을 발견했을 때의 놀랍고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최고의 충격은 고등학교때 '완역본'이 출간된 것이다. 그 책에서 처음으로 접한 '천공성 라퓨타 여행기'와 '마인국 휴이넘 여행기'는 놀라자빠질 정도였다. 걸리버 본인뿐 아니라 '인류 전체'를 야후(사람짐승)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제서야 <걸리버 여행기>가 '어린이동화책'이 아니라 '풍자소설'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뒤로도 여러 출판사의 '완역본'을 거듭 읽을 때마다 그 느낌은 사뭇 달랐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개인적으로도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는데, 그간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읽을 때의 느낌은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정말 다채롭게 읽었을 것이다. 그렇게 다채로운 느낌을 시공간을 초월해서 서로 소통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재밌었을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고전은 바로 '이런 맛'으로 읽는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다채로운 느낌을 받는다고해도 고전에 대한 해박한 전문지식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고전읽기'는 수박 겉핥기로 끝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가 아무리 풍자소설이라고 해도 '300여 년전 영국사회'를 비꼬는 내용을 '문자, 그대로' 읽고서 단박에 깨우칠 현대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백과사전적 지식'으로 풀어 쓴 친절한 해설서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책 가운데 '현대지성'에서 출간한 <걸리버 여행기>를 추천한다. 여러 출판사 가운데 '가장 해박한 해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친절한 해설이라고 해도 '나의 견해'와 다르다면 그저 '참고사항'일 뿐이다. 다시 말해, '해설'은 해설일 뿐이지 결코 '정답'이나 '모범답안'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용감한 독자라면 '권위 있는 해설가'에게 주눅 들지 말고 저만의 느낌 충만하게 읽어나가면 그뿐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소개한 해설 가운데 한눈에 쏙 들어온 대목이 있어서 소개하려고 한다. 바로 '걸리버'란 이름에 감춰진 뜻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735년 영문판 <걸리버 여행기>에 걸리버가 그려진 삽화가 있는데, 그 삽화 밑부분에 '레뮤얼 걸리버 선장, 멋진 거짓말쟁이 선생(Hon. Splendide Mendax.)'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단다. 멋진 거짓말쟁이라니 무슨 뜻일까? 그건 'Gull(바보, 또는 잘 속는 사람)'과 'ver(진실, 또는 진리)'의 합성어가 'Gulliver(걸리버, 진실을 말하는 바보)'라는 뜻이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바보는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말이다. '어리숙한 사람이 솔직한 말을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바보가 말하는 것의 대부분이 거짓임에 틀림없다'는 뜻으로 '진실 vs 거짓'이 서로 대립하는 뜻으로 해석하여 '걸리버,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로 해석해야 하겠다. 한마디로 <걸리버 여행기>란 '진실과 거짓'이 한데 섞여있는 여행기란 말이니 독자가 알아서 잘 판단하라는 뜻일 것이다. 정말이지 '최고의 풍자소설'답지 않은가. 이렇게 '진실을 말하는 거짓말쟁이'가 전하는 여행기라고 해석을 하니 4편의 여행기가 새롭게 정립이 된다. '소인국 릴리펏 여행기'부터 '대인국 브롭딩낵 여행기', '천공성 라퓨타 및 여러 나라 여행기'와 대미를 장식한 '마인국 후이늠 여행기'가 뜻하는 바가 꽤나 의미심장해졌다. 먼저 '소인국'에서 걸리버는 무슨 진실과 거짓을 말한 것일까? 물론 인간보다 작은 소인들이 사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영국사회'를 비난하고 풍자한 내용이 한가득이다. 바로 이야기 자체는 '거짓'이지만, 이야기가 빗댄 내용은 '진실'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대인(거인)들이 사는 나라는 '거짓'이지만, 그 이야기가 빗댄 내용은 '진실'이며, 천공성도, 마인국도 모두 '거짓 속에 진실'을 감추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무슨 진실일까? 소인국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을 빗대며 사소한 원한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앙숙이 된 것을 신랄하게 비난한다. 더구나 겨우 '달걀깨는 방식의 차이' 때문에 영국에서 프랑스로 망명을 간 사람을 발본색원하여 처형하고자 하는 소인국 국왕의 째째함을 실컷 비웃어주고 있다. 대인국에서는 정반대로 영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한껏 뽐내는 걸리버가 대인국의 국왕 앞에서 심한 꾸지람을 듣고 크게 반성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여기서 대인국의 국왕이 '세계정복'이라도 꿈꾼다면 대영제국이 전세계를 식민지로 만들어버린 '전쟁'이라는 것을 귀띔해드리겠다고 말했다가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된다. 너처럼 작은 사람이 어찌 그리 방법을 알고 있느냐면서 참으로 못된 짓을 일삼는 소인들을 경멸하는 말을 걸리버에게 했기 때문이다. 한편, 천공성에서는 '최고의 지성'을 갖추고 있지만 '하는 일마다 비이성적인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다 마인국에 도착하면서 걸리버는 최고의 풍자를 남기게 된다. 바로 '후이늠(말)이 완벽한 존재'이며, '야후(인간)가 비참한 존재'라는 거짓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거짓'이라면 진실은 그 '반대'인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짐승은 말할 것도 없는 비천한 존재'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감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느냔 말이다. 오늘날의 인류는 지구에서 가장 '암(癌)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지 않았느냔 말이다. 오히려 '동물의 인권'이 급상승하면서 여객선이 침몰했을 때, 승객명단에 적혀 있는 구출순서는 '어린이, 여자, 노약자, 강아지, 그리고 나머지(남자 포함)'이라는 농담까지 유행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인 스위프트는 300년 뒤의 미래를 예측한 대단한 작가였던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파악한 '진실'조차 우리는 다시 한 번 '거짓'으로 판명할 수밖에 없게 된다. <걸리버 여행기>는 단순히 '풍자소설'이 아닌 '인간 혐오'에 입각해서 쓰여진 비정상적인 소설인 까닭이다. 이 책에서 '마인국 후이늠 여행기'를 중점적으로 보았을 때 작가는 모든 인류를 '야후(짐승)'으로 빗대고 말았다. 이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에게 경종을 울리면서 '개과천선'하라는 갱생의 기회마저 박탈한 채, 야후를 맹비난하며 걸리버 스스로 야후라는 것을 인정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아니, 스스로 짐승 같은 어리석음을 깨닫고 '후이늠'처럼 거듭날 수도 있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런데 걸리버는 '마인국'에서 추방 당하고서 '인간'이길 포기하고 고국으로 되돌아와 헛간에서 짐승처럼 변해버린 '말'과 대화를 나누며 여생을 보낸다. 스스로 인간으로 남길 포기한 것이다. 이렇게 따지다보면 이 책의 곳곳에 '인간 혐오'와 함께 '여성 혐오'가 아주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두고서 수많은 평론가들은 스위프트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도 사이가 별로 안 좋았던데다가 스위프트가 사랑했던 여인들마저 번번히 실패로 끝맺고, 영국 여왕에게서 심한 홀대까지 받은 영양 탓으로 돌리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런 경험을 했더라도 '성직자'이기도 했던 그가 '신의 섭리'에 따라 따뜻한 인간애를 앞장 서서 실천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지독한 염세주의로 가득찬 소설을 써내려갔다니 다시 한 번 놀랐던 까닭이다. 그럼에도 <걸리버 여행기>는 재밌다. 재밌는 소설은 언제든 다시 읽기 마련이다. 그리고 '고전'답게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다음에 다시 읽을 땐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 벌써 기대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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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 중순이었다. 연일 폭염주의보가 발령되던 무더운 날씨에 하필 에어컨이 고장 난 도서관 인문학 특강에서의 충격 때문이었다. 무더위를 가볍게 이길 정도의 충격이었다. 직접 읽고 그 풍자의 문학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걸리버의 여행 속으로 흥분을 가지고 따라가 본다.
조너선 스위프트는 1667년 11월 30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삼촌의 보호 아래 성장하여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교를 졸업했고, 복잡한 정세 속에 잉글랜드로 피신한 뒤 은퇴한 유명 정치가 윌리엄 템플 경의 비서로 취직했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영국 국교회의 사제 서품도 받았다. 그는 풍자적인 산문인 <통 이야기>를 통해 자신이 진가를 드러냈다. 이후의 정세 속에서 신랄한 대작 걸리버 여행기를 집필했다.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는 우리에게 익숙한 소인국 이야기이다. 2부는 거인국 이야기이고, 3부는 낯설지만 상상력과 풍자가 빛나는 날아다니는 섬 라퓨타에 관한 것이다. 4부는 충격적인 후이늠의 나라에 관한 이야기이다. 3부의 날아다니는 섬 라퓨타는 익숙한 느낌이 들었는데, 일본 애니메이션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17세기에 살았던 작가가 20세기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니... 충격과 놀라움으로 시작은 익숙한 소인국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릴리펏인들은 도덕성이 결여된 자는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더라도 그런 결핍을 결코 보충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런 위험한 자에게 공직을 맡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했다.(p70) 소인국에 가게 된 걸리버는 뛰어난 언어 습득력을 통해 릴리펏(소인)인들과 소통이 가능하게 된다. 소통이 가능해 지자 그 나라의 정치, 문화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걸리버는 영국의 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릴리펏 인들은 그 나라의 제도 등을 설명한다. 이 부분은 그들이 공직자를 뽑을 때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이 도덕성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공직자는 인간의 평범한 이해력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도덕성이 결여된 자는 공직에 쓸 수 없다고 말한다.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을 작가가 살던 때도 많이 기용했던 모양이다. 이 문제는 수 세기를 건너와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처럼 이어진다. 어쩌면 문제 인지도 인지하지 못하고 굳어져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도덕성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그 도리가 사람에 따라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니 명제가 틀린 것인가? 인간이 틀린 것인가? 제발 지나친 인신공격이 아니라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을 골라내는 인사 청문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욕심이겠지?
자네 나라의 국민들 대부분은 가장 해로운 자그마한 벌레 같은 족속 일세. 자연이 일찍이 땅 위에 기어 다니도록 허용한 벌레들 중에서 말이야.(p162) 2부 드롭딩낵(거인국)의 국왕과 이야기 중 국왕이 걸리버의 말을 듣고 인간을 정의하는 부분이다. 걸리버의 나라가 처음에는 용납될 만한 제도들도 있었지만 그 제도들의 절반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부정부패에 침식되어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었다고 국왕은 걸리버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한다. 귀족들과 사제들, 군인, 법관, 상의원들의 부족한 부분들을 일일이 설명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저자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장 해로운 자그마한 벌레로 규정한다. 가장 해로운 자그마한 벌레라니... 해로운 벌레가 되지 않으려면 도덕성을 가지고 있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풍자를 잘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래도 사람에게 희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고 긍정적인 희망을 품어 본다.
따라서 그들은 단어는 오로지 사물의 명칭이므로 어떤 일을 논하고자 한다면 사물을 지참하고 가서 그것으로 뜻을 표현하는 게 더 편리하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폐 손상으로 인한 수명 단축의 대책이라고 했다.(p226) 3부 나는 섬 라퓨타에 나오는 부분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약간의 패턴처럼 우연하게 혹은 의도하여 집을 나선 걸리버가 여행을 하게 되고, 그곳의 사람들의 언어를 익히고 그들과 소통하면서 걸리버 나라의 제도와 여행국의 제도나 문화 정치 등을 나눈다. 이섬에는 학자들이 여러 가지를 연구하는 방들이 나오고 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연구하거나 질병을 연구하는 방법, 영농 연구 등이 나오는데 그중 단어에 대한 설명이다. 단어는 사물의 명칭이라 그 사물을 가지고 가서 뜻을 표현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고 한다. 걸리버는 그 연구를 보면서 많은 말을 할 경우에는 사물을 지고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한다. 너무 많은 말을 해서 폐 건강이 나빠지려면 얼마나 많은 말을 해야 하는 걸까? 미세먼지도, 황사도 없던 시대에 이런 생각을 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당연한 사물과 사실들도 다르게 보고 인식하는 모양이다. 문득 아이들과 대화를 하려면 얼마나 많은 사물을 챙겨야 하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후이늠들에게 배운 미덕과 관련된 훌륭한 교훈을 나 자신에게 적용하고, 가족인 야휴들을 가르쳐 최대한 온순한 동물이 되도록 만들 것이다. 또한 자주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점차 인간의 모습이 되어가는 걸 능숙하게 견뎌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p360) 후이늠들과 6년가량을 보낸 저자는 인간들이 익숙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놀라게 된다. 후이늠들은 말인데, 그들의 고상함과 우아함, 품위 있음에 저자는 크게 감명받았으며,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싶어 하지만 돌려보내진다. 말들이 사는 나라에 원숭이를 닮은 야생 동물 야휴가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 말들이 지배하는 나라에 원숭이 야휴. 이 생각의 근원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저자는 처음 후이늠의 나라에 갔을 때 야휴로 오해를 받았는데, 그 후 야휴로 오해받는 것이 얼마나 모욕적인 것을 알게 된다. 이성도 없고, 무례하며 다스려지지도 않는 날것 야성을 가진 야휴를 닮았다는 말에 모욕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 후이늠의 나라에는 거짓말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 누구도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개념도 단어도 필요가 없던 것이다. 후이늠에서 살다 온 걸리버가 자신의 가족들을 야휴라고 표현하며 최대한 가르쳐 온순한 동물이 되도록 만들겠다고 한다. 이제 4부까지 읽어 오면 누가 인간인지가 헷갈릴 정도로 후이늠들은 자연스럽다. 조롱하는 자, 비난하는 자, 험담하는 자, 소매치기, 노상강도, 침입 강도, 변호사, 포주, 어릿광대, 노름꾼, 정치인, 재주꾼,... 이 모두는 후이늠의 날에 없는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없으니 걸리버가 계속 살고 싶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현실에서 꿈꾼다면 나는 공상가가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이 가능한 이야기 속이 있어 좋다. 현실에 발 딛고 서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꾼 저자가 있어 저자와 함께 고민해 보는 행운을 누린다.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감사하다.
책을 모두 읽고 나면 왜라는 단어가 생각을 꽉 막는 느낌을 받는다. 1부와 2부가 3,4부를 위한 일종의 마중물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1부와 2부에서 풍자와 재미, 상상력을 발휘해오던 저자는 4부에서는 말이 주인공인 나라를 만든다. 왜 말이 주인공인 걸까? 책을 모두 읽고 작품 해설까지 읽어도 이해가 쉽지 않다. 이 부분이 소설을 300년 동안 읽히게 하는 힘이라고 한다. 누구도 정확하게 설명하거나 이해시킬 수 없어서 많은 추측과 가능성들이 읽는 독자들마다 가능하다는 것이다. 조지 오웰이 극찬한 신랄한 풍자도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잉글랜드의 시대 상황과 정치 상황을 알아야만 깊이 공감할 수 있을 텐데, 이건 뉴스를 보지 않는 사람에게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해야 할 일들이 더 늘었다. 영국의 역사도 대강은 알아야겠다. 완벽한 이상 세계를 표현한 4부 후이늠의 나라는 플라톤의 국가가 배경이 되었다고 하니 국가도 읽어야 대충 무슨 소리인지는 알 것 같다. 한 권의 책이 얼마나 다양하게 사고와 독서를 확장 시키는지를 깨닫는다. 이런 점 때문에 고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도. 소인국과 거인국 이야기만 알고 있다면 온전한 걸리버를 만나 보기를 권한다. 때로 야휴인 나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게 되더라도 우리가 고민해야 할 방향과 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걸리버와 함께 여행을 떠나보자. 단단한 마음 하나만 가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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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던 스위프트의 대표작이자 당대의 최고 문학가 조지 오웰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작품이다. 대학교 때도 완역판이 없어 조그만 문고판으로 읽은 기억이 있었다. 딸아이와 함께 읽으려고 완역본을 구매했으나 어마어마한 페이지에 짓눌릴 듯.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보았던 장면인 난파된 배 옆에서 옷과 머리카락이 소인국 사람들에 의해 사방으로 바닥에 못박힌 겁부터 작가의 엄청난 상상력이 돋보였으나 그 이면에 숨겨진 풍자와 현실비판적 의도를 완역본을 읽으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의 세계관을 더 잘 들여다 보고 싶으면 완역본을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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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혁명 후 퇴위당한 제임스 2세가 아일랜드를 거점으로 왕국을 되찾으려는 내전을 벌이자, 스위프트는 잉글랜드로 피신한 뒤 은퇴한 유명 정치가 윌리엄 템플 경의 비서로 취직했다. 그동안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영국 국교회의 사제 서품도 받았다.스위프트는 산문, 특히 풍자적인 내용의 산문을 발표하면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1690년대 후반에 집필한 『통 이야기』는 스위프트의 대표적 논문으로 종교와 학문의 부정부패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풍자했다.1699년 템플 경이 세상을 떠나자 스위프트는 더블린으로 돌아갔다. 당시 영국은 휘그당과 토리당이 당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원래 휘그당이었다가 나중에는 토리당의 편에 서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714년 앤 여왕이 사망하고 조지 1세가 등극하면서 토리당 내각이 붕괴하였다. 스위프트는 아일랜드로 돌아갔고 평생 그곳에서 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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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걸리버 여행기』는 원작의 거친 표현과 풍자 등을 삭제하고 아동문학으로 발행되었는데, 이런 판본들이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 그러나 아동용 『걸리버 여행기』를 접한 사람은 원전의 풍자를 이해할 수 없다. 현대지성 클래식의 『걸리버 여행기』는 완역본으로 풍자문학의 진수를 느낄 수 있으며, 일러스트의 대가 아서 래컴의 삽화로 재미를 더했다. 또 꼼꼼한 해제를 수록해 작품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게 구성했다. 조지 오웰은 『걸리버 여행기』를 두고 “이 책은 아무리 읽어도 지겹지 않으며, 다른 모든 책들을 파괴하고 오로지 여섯 권만 골라야 한다면 그 중의 하나로 이 책을 고를 것이다.”라고 했으며, 영국 문학사가 조지 세인츠베리는 “스위프트는 세계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하고, 가장 완전한 재미의 원천이다.”라고 평했다. 당대의 부패한 사회와 짐승보다 못한 인간의 행태에 날리는 스위프트의 독설은 몇백 년의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다. 그의 날카로운 풍자는 오늘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즐거움과 깨달음을 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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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나 만화, 또는 영화로만 봐왔던 걸리버 여행기. 소인국과 대인국에 가게 된 걸리버의 생생한 여행담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이번 독립북클러버4기에 선정된 도서라 YES24에서 주문하고 책을 받았는데, 웬걸...책이 두.껍.다. 아주많이! 그리고 글자도 작다 ;;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두께와 내용에 조금 놀라며 책을 펼쳤다. 1부~4부로 나누어진 여행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알고 있는 소인국부터 시작이 된다. 소인국까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읽다가, 대인국의 왕과 걸리버가 대면하며 나누는 이야기부터는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내용을 400여년전에 썼다고? 이렇게 대담한 풍자를? 3부 날아다니는섬 라퓨타에서 학술원 계획자를 만날때 4부 말들의 나라 휴이넘과 야후가 나올때, 저자의 필력과 풍자 그리고 사백년이 지나도 전혀 바뀌지 않는 지금의 모습이 씁쓸하면서도 고전이, 이래서 고전이구나! 라는 감탄이. 저자의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조금이라도 훔쳐오고 싶다 ㅎㅎ
자네 나라의 국민들 대부분은 가장 해로운 자그만한 벌레 같은 족속일세. 자연이 일찍이 땅 위에 기어 다니도록 허용한 벌레들 중에서 말이야.
어쩌면, 저자는 400년 후에도 인간이 이렇게 해로운 벌레가 될꺼라는걸, 알고 있어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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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여행기의 오리지날 버전을 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니 한참 되었다. 그 당시에 처음 접한 걸리비여행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냥 거인국, 소인국 사람들이야기를 재미있게 했으려니 생각했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상상력과 기존 체제에 대한 풍자가 가득하였다. 사실 상당수 내용은 풍자인지도 모르고 넘어갔던 것 같다. 세월이 지나 다시 찾은 이 소설에서는 한층 더 많은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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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때 전체 번역본이 나왔다고 문학쌤이 추천해 읽었는데 그때는 소인국만 알던 나에겐 그저 신기하고 우와~~한데다가 영화로 만들어져 외국은 이렇게 돈들여 잘 만들어주는구나하고 생각했던 책이다.. 이번에 40대중반이 되어 다시 읽으니 고전은 그랬지.이런 문체지. 그런데도 계속 읽히고 동화가 되는건 이유가 있어. 설명이 어떻게 자르고 말투를 어떻게 바꾸는냐에 따라 환상과 꿈의 어린이 동화가 되는거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오즈의 마법사등... 어릴때 읽던 얇은 동화와 달리 진지하고 지루하지만 해리포터가 떠오르는건 시대가 다르다는거겠지. 그 시대 사람들은 지금의 해리포터를 읽는 우리처럼 와~~할수 있듯이. 풍자문학이라지만 나에겐 환상과 모험의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