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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재의 유혹 】- 한 지식인의 중국 깊이 읽기 | 글항아리 인문에세이 4 _쉬즈위안 / 글항아리 원제 : 極權的誘惑 “한 중국 지식인의 내면일기” “만약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독자라면 1980년 광주와 1989년 톈안먼 비극이 두 민족에게 가져다준 엄청난 상처와 아픔을 기억할 것이다. 중국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심지어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1988년 서울 올림픽처럼 중국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오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중국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전에 저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쉬즈위안(許知遠)은 베이징대 컴퓨터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전공인 컴퓨터와 인터넷 관련 활동에 깊이 빠져든 것 외에도 각종 유명 매체에 현실 비판적 기사를 기고하며 문명을 날렸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주로 2009년 여름에서 2010년 가을에 걸쳐 쓴 것이다. 그때 저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클레어홀에서 방문학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한국에선 2012년 번역출간). 이미 10년이나 지난 글들이지만, 책을 읽다보니 중국의 내적 상황은 달라진 점이 별로 없는 듯하다. 현 중국의 사정은 오히려 더 심각하지 않을까. 중국의 정치체제가 중국 외부에 알려지는 것은 매우 단편적일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제목 『독재의 유혹(極權的誘惑』을 프랑스 작가 장 프랑수와 르벨의 동명 작품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그는 전에 이 제목을 사용해 소련모델을 숭배하는 프랑스 지식인을 묘사했다. 현재 중국에서도 독재가 유혹하는 대상에는 경제의 고도성장을 숭배하는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중국인 자신까지 포함되어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중국의 이미지 변화, 검열제도, 사회 심리 그리고 개인 반항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국제무대에서 중국은 신속하게 굴기(?起)한 새로운 제국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중국 국내에선 다시 국가화를 강화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여러 부문에서 중국은 ‘만족을 모르는 괴수’처럼 변했다는 것이다. “진보의 신념, 전제의 왜곡, 자본주의, 산업화, 정보화 등의 현상이 엇섞이며 자원에 대한 재난성 약탈이 빈발하고 있고, 여기에 현란한 기술문명이 보태져서 조급하고 탐욕스러우며 물질숭배로 전락한 추악한 문화가 조성되고 있다.” 왜 마오쩌둥이 부활하고 있는가? 나의 예전 근무처가 천호동에 있을 때, 옆 건물엔 제법 큰 중식당이 있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 식당에 들어서면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가 벽면 하나를 차지하고 있기에 생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과 대기근으로 중국인민들이 참담한 시간들을 보내게 한 장본인인데, 주인장이 마오 가문인가?(식당이름도 마오였다)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현재 중국에는 마오가 부활하고 있다. 이미 중국 전역의 공공기관, 대학, 광장 등엔 수많은 마오쩌둥 전신상이 설치되어있지만, 창사(長沙)에도 100피트 높이의 마오쩌둥 (머리 부분)조각상이 설치되었다. 대중에게 익숙한 마오쩌둥의 실제모습과는 다른 이미지(젊은 시절 모습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 모습은 역사적 실존 인물의 모습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스핑크스랑 비슷하잖아”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가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중국인의 사상과 생활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하다. 마오쩌둥 신드롬은 1990년대 초에 전국을 휩쓸었다고 한다. 1980년대만 해도 사회적 분위기는 ‘사인방’ 못지않게 마오쩌둥 자신도 그 죗값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분위기였다. 지식인들은 과거를 반성하기 시작했고 마오쩌둥의 ‘개인숭배’가 온갖 재난의 원인이었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보통사람들에겐 마오쩌둥은 새로운 매력을 발산하는 인물이었다. “날개 돋친 물가, 곳곳에 만연한 부패, 정체된 임금, 신속하게 이뤄지는 빈부격차 등의 사회 현상에 많은 사람이 분노하며 불안해했다. 일부 사람들에게서 마오쩌둥 시대의 평등, 즉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큰 격차도 없었던 시절의 평등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났다.” 국가주의자들에겐 중국이 국제적으로 다시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하자 대외적으로 강경노선을 추구하던 마오쩌둥의 태도에 더욱 큰 동경심을 갖게 된다. 대중들은 사회가 붕괴, 분리되는 것을 느끼면서 과거의 이데올로기는 이미 효력을 잃었지만 미래도 애매모호하다고 느끼고는 사상적 혼란과 정서적 미망에 빠져든다. 이에 마오쩌둥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다는 이야기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은 정치적 인물일 뿐만 아니라 민족 영웅이며 반인반신(半人半神)의 대중적인 우상이기도 하다.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 마오쩌둥은 중국의 스탈린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레닌이기 때문에 그를 부정하는 것은 공산당 전체 역사의 합법성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공산당에서 공식적으로 표명된 마오쩌둥의 공과 과오를 70대 30으로 발표한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마오쩌둥처럼 ‘법도 없고 하늘도 없는’ 방종의 권력을 갈망한다. 식욕이나 성욕과 마찬가지로 권력욕도 인간 본연의 욕망이다. 그러나 중국 사회보다 더 집중되고(정치, 경제, 문화 권력이 늘 혼합되어있고, 뒤의 두 가지는 항상 전자에 종속된다) 더 불평등한 사회는 아주 드물다.” 심지어 중국인들은 이러한 형태를 습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지적을 하며 저자는 탄식한다. 즉 자신이 무한한 권력과 자유를 보유하든지 아니면 다른 권력에 비참하게 노역을 당하든지 둘 중 하나의 형태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글을 마무리 한다. “6년 전 나는 열정적으로 글 한편을 써서 1970년대에 태어난 우리 세대 사람들의 사명과 희망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인터넷과 소비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편협한 세계로부터 걸어 나와 이 진실한 사회를 영접해야 한다. 사회의 모든 전환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중국도 지난한 일과 마주하고 있다. 우리 이 세대와 미래의 몇 세대는 우리의 열정과 정력을 살아갈만한 가치가 있는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 쏟아 부어야 한다. 우리에겐 암흑을 폭로하는 신문기자, 정의감이 풍부한 변호사, 사회적 양심을 가진 상인, 개혁 추진을 원하는 관리, 존경받을 만한 비정부 조직 등이 필요하다. 그들은 각각 유사한 원칙을 고수하며 미래에 대해서 비슷한 동경을 품고 있다. 그들은 소극적인 조롱대신 적극적인 사고와 행동을 견지하고 있으며, 허망하게 절규하는 대신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행동하고 있다. 풍부한 격정은 오히려 충분한 냉정함을 보여주고 있다.” 쉬즈위안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1976년에 태어났다. 중국에서 신시기로 불리는 개혁, 개방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저자와 같은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층이 두터워지고 생명력이 길어진다면, 중국의 미래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더 보편적이고 평화적이며 세계적, 민주적)으로 발전해나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조금씩이라도 그렇게 변화된다면,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후세대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독재의유혹 #쉬즈위안 #글항아리 #쎄인트의책이야기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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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경제 대국으로 떠오른 중국, 아니 이젠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중국의 급속적인 경제 발전. 이 책의 저자 쉬즈위안은 <독재의 유혹>을 통해 경제대국의 모습 뒤에 가려진 중국 권력자의 독재 정치와 중국인들이 가지는 낙관적인 생각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중국은 1978년 덩샤오핑(邓小平)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전면 도입하는 개혁개방 정책추진 선언을 시작으로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 G2로써 확실한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물론 어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시장화로 향하는 과정에서 위기(천안문 사태 등)도 많았다. 또한 세계 강대국들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잃지 않기 위해 중국에 대해 찬사와 열광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중국에게 ‘G2(Group of Two)’의 의미는 무엇일까 중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 그리고 청일전쟁에 잇따라 패배하며 동아시아의 찬란한 문화대국으로써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또한 그들이 사회주의 최고의 모델로 삼았던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지는 광경을 그들은 직접 목격해야했다. 이로 인해 ‘이대로 중국도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중국인들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얻은 중국의 ‘G2'의 자리는 그들 스스로에게 중국만의 특수적 우월성을 만들었고 중국인들은 상당한 낙관론에 빠지게 된다. 자본주의의 최대 강대국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 섰다고 생각한 중국은 예전의 모든 굴욕과 사회주의의 붕괴를 제국주의 서구유럽의 탓으로 돌리며 그들과는 다른 더욱 우수한 특수성의 옷을 그들 스스로에게 만들어 입혔다.
쉬즈위안이 말하는 실제 중국은 ‘중국은 서구 자본주의보다 더욱 잔혹한 자본주의이다. 보통 사람들은 정부 권력과 시장 권력이라는 이중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145P)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태어나서 잘 느끼지는 못하는 것이겠지만 자본주의의 역사는 생각만큼 길지 않다. 산업혁명 이후로 보더라도 300년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우리나라는 100년을 넘지 않는다. 중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시작은 그보다 훨씬 짧은 3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짧은 시간에 비해 급속도로 성장한 중국의 경제는 과연 그들과 세계가 낙관하는 것만큼 안정적일까 다른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한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중국의 국민들은 대부분 시장경제체제 아래에서 상대적 빈곤 아니, 절대적인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더욱이 국민들은 정부의 독재 권력 속에서 그들의 부와 권력을 위한 도구로써 이용되어지고 있다. 극심한 부의 편중, 여론의 탄압, 검열 등으로 ‘이데올로기 앞에서 개인의 정직성과 독립성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왜곡된 역사의 먼지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213P)
하지만 많은 중국인들은 중국의 독재에 대한 중국 내부의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아마도 강대한 국가가 자신들에게 가져다준 영예를 막 향유하기 시작했는데, 이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그 영예에 먹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기이한 심리가 형성되고 있다.’(221P) 국가가 가져다준 영예는 무얼 말할까? 아마 개방경제로 인한 자유(실질적으로는 검열 등으로 가두어진 자유)와 부유한 삶에 대한 희망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 스스로는 정부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달콤한 자유에 빠져있다. 하지만 결국 그 달콤함은 자신들을 스스로 자유의 올가미로 옥죄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은 서구세력들과 무언가 다른 특수성을 만들어가려고 한다. 결코 그들의 자존심으로는 서구세력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가기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일환으로 자신들의 문화와 자신들의 가치관을 수출하려고 한다. 하지만 중국은 아직 그만한 가치관을 만들지 못했을 뿐더러 그 옛날의 문화적인 찬란함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역사를 왜곡하며 동북아공정을 시도하는 그들의 가치관만 봐도 그들은 엄청난 욕심을 드러내는 또 다른 제국주의일 뿐이다. 중국이 진정 세계의 강대국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도구로 생각하는 정신에서 벗어나 진정 찬란한 정신문화와 가치관을 만들어가야 한다. 내부적 모순을 안고 그들은 절대 세계에 제시할 사회구조를 만들어 갈 수 없다. 그들은 이제 관료시스템을 부수고 독재의 유혹에서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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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지식인의 중국 깊이 읽기>라는 표제에 눈이 간다. 틀린 말이 아니다. 중국만을 그야말로 깊이있게 읽어내려가는 책이었으니 말이다. 어찌나 중국 중국 중국 하던지...만약 중국이 한 나라가 아니라 일개 개인이었다면 나르시스트란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나 세세하고 깊게, 따져묻고, 토로하고 , 걱정하고, 자신을 더 설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작가의 그 격정이나 열정이 부럽기도 했지만서도, 어찌나 중국, 중국 하던지 , 그 끝없는 중국사랑에 종국엔 그만 지치고 말았다. 분명 자랑하는 투가 아니라 '중국 너무 너무 문제 많아해!' 라는 투였음에도 말이다. 중국 사람이 자기 나라에 대해 관심이 많은거야 당연한 것이고, 어떻게 표출이 되었건 간에 애국심의 발로라는 점에서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것임에도 묘하게도 반발심이 드는건 어떤 조화속인지 모르겠다. 이와 비슷한 류의 내용이었던 < 나는 가끔 속물일때가 있다>와 비교해보면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속물...>에서는 다른 나라(독일) 임에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공감을 느꼈던 반면에 이 책은 질린다는 생각만 들었으니 말이다. 물론 초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실 ㄱ그때만해도 깊이있는 작가 한 명을 만났구나 싶어 반가웠었다. 실은 난 중국 작가들을 무척 존경한다. (물론 어떤 작가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서도. ) 땅 덩어리가 워낙 넓고, 인간 수가 많아서 그런가 종종 글의 깊이나 통찰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적인 작가가 기적처럼 출현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뜬금없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중국 작가라면 일단 주의를 하고 본다. 어떤 글을 쓸지 들여다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저자 역시 대륙적인 깊이가 있군 싶어 처음엔 반색을 했었는데, 중반을 넘어서가면서부터는 질리고 말았다. 매 챕터마다 다른 분야를 다루고 있긴 했지만 실은 비슷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념만 조금씩 달랐지만 하고자 하는 기본은 같았다. 추려 보면 아마도 그것이 저자 개인이 중국을 바라보는 시선인 듯했다. 중국을 분석하는 그만의 틀이라고나 할까. 요약하자면 이렇다. 중국은 망한 나라라는 것, 그걸 타지인들은 모른다는 것, 해서 그 갭에 절망한 저자는 어떻게 이 사태를 바로 잡아야 할지 난감하다는 것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일단 저자는 중국에 왜 망한 나라인지 조목조목 설명한다. 그리곤 이런 현실과는 전혀 거리가 먼 책들이나 외신 기자들의 분석, 정치가들의 견해에 대해 태클을 건다. 중국에는 그런 장미빛 현실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런 분석이 힘을 얻는 것은 현실을 외면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왜 중국이 처한 현실을 바로 보고 있지 못하냐면서 한숨을 쉰다.
음...맞는 말이긴 하다. 중국 , 어쩌다 외신으로 들어오는 뉴스를 듣다보면 한심하게 생각되는 것이 오늘 어제의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회적이로건 문화적이로건 정치적이로건 인권면에서건 문제가 많은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문제들이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함으로써 외면되어지는 면이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다만 문제는, 이 작가가 어려서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즉, 너무 이상주의적이라서, 그럼에도 중국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즉, 어쩌면 지금의 중국은 지금의 중국 사람들이 만들어 낸 최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게 저자의 마음에 들건 아니건 간에, 지금의 중국으로써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정도로 변화하는 것조차 대단한 것이란 생각은 안 드나? 북한은 여전히 그러고 있는데 말이다. 비유가 적당하지 않다면 적어도 지금은 문혁 시대의 무지막지한 무지와 혼돈은 적어도 없지 않는가. 그것이 과거에도 가능했다면 지금 가능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랴. 내 보기엔 중국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나라인데 말이다. 한마디로 한 나라가 굴러가는데는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논리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주관적인 면에서 보자면, 즉 그 나라의 국민입장에서는 그런 현실이 너무도 부조리하고 분통 터지겠지만서도, 알고보면 사실 어떤 나라도 문제가 없는 곳은 없다. 다들 각자 자신의 문제를 떠안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산다. 이것이 좋을까 저것이 좋을까를 저울질 하면서...그러다가 운이 좋아 좋은 지도자가 나타나 조금은 인간답고 이성적인 해결책을 내어놓을 수도 있겠지만서도, 알다시피, 지도자 하나의 힘으로 역사가 바뀌지는 못한다. 나라를 움직여 가는 것은 국민의 거대한 힘이니 말이다. 그 국민이 깨인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고, 그것이 중국처럼 거대한데다 다민족간의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나라라면 훨씬 더 힘든 일일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즉, 중국의 지식인들이 나라의 진보가 더디다고 불평하는 것은 어쩜 당연한 것일 거라는 것이다. 보다 인간다운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무척이나 역동적이고 혼란스런 과정이니 말이다. 거거에 역사란 원래 더디게 전진하는 느림보 게으름뱅이다.그런 앞에서 왜 이렇게 무지하고 비이성적이며 부패투성이냐고 울분을 터뜨려봐야 소용이 없다. 간단한 문제가 원래 아니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선순위들이 다들 다른 터인데, 거기에 합의를 이끌어낸다는 것 자체가 그러하질 않겠는가. 하니, 생존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된 마당이니 인간다운 삶, 사회를 꿈꾸는 것은 아마 그들에겐 가장 후순위 관심사일지 모른다. 일단 살아 남아야 꿈을 꾸건 말건 할테니 말이다.
그렇다. 중국은 현재 독재의 유혹에 빠져 있단다. 다들 잘 사는데 혈안이 되어서 나라가 어찌 되어 가는지 도무지 관심이 없고, 인간적이고, 인권적인 나라에 대한 개념조차 없이, 그저 황금만이 대세라는 식으로 쫓아가는 중이란다. 저자는 그것이 고민이란다. 음...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 않는가.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물론 정도나 뉘앙스에서 차이가 있었겠지만서도, 기본 우려는 같았다. 저자는 현재 중국이 잘 산다고 외국들이 부러워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면서, 중국 사람 전체를 두고 봤을때는 오히려 더 비참해졌다고 말을 하고 있던데... 하지만 아무리 대충 본다해도 그건 아니지 싶었다. 확실히 중국은 과거보다 잘 사니 말이다. 빈부격차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긴다고 하지만서도, 그래도 모두가 비참하게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 훨씬 낫질 않나. 우리가 독재자 박정희를 미워 하면서도 그의 경제 실적에 대해선 입을 다무는게 왜 이겠는가. 잘 산다는게 그만큼 중요해서가 아니겠는가. 쫄쫄 굶고, 병들어도 의사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며, 비를 가릴 지붕이 없는 곳에서 살기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으니 말이다. 인권? 중요하긴 하지.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말이다. 우선 살아있어야 인권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역시 지금 독재나 인권이 문제라곤 하지만서도, 점차 나아질 것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면 사람들이 어느정도 산다 싶으면 그쪽으로 관심이 돌려지는건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면에서, 이 작가의 끊임없는 중국 망국 타령이 조금 심하다 싶었다. 중국 현실이 끔찍하다는건 알겠는데, 실은 그가 이런 책을 낼 수 있다는 것조차 중국이 과거보단 나아졌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하니, 쉬즈위안이여. 조금 인내심을 가지시길... 중국, 그다지 나쁘지 않다. 다들 그런 과정과 혼란을 거쳐 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없이 좋은 일만 생기는 성장을 바랐다면 그게 나이브한 사고인 것이다. 인간 사회가 그렇게 이성적으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은, 그렇게 못하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었지 않나. 그러게 인간을 너무 좋게만 봐도 문제다. 인간은 불완전한 동물이다. 부패하고 부정의하며 이기적이고 타락한 족속들이다. 잘 사는 나라에서도 그렇다. 그러니 못사는 나라에서 조금 잘 사는 나라로 가고 있는 중국의 혼란을 일정 부분은 이해해 줘야 할 것이다. 원래 그렇다는걸 이해한다면 아마도 중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태에 한결같이 비분강개만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모든 일에 미화를 하면서 미담으로 만들어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그저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는 것일 뿐이다.
어쨌거나 이 책을 보면서 난 내가 난 중국인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이 모든 것을 그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말이다. 다시 말해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간에, 냉정할 수 있었다. 하니, 중국에 굉장한 애정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 보시길...하지만 중국이 뭐라고? 라면서 별 관심이 없으셨던 분들은 아마 지루한 독서여정이 되지 않을까 한다. 각자 알아서 판단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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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른바 G2라 불리는 나라들의 최고 권력자를 뽑는 행사가 있었다. 한 쪽은 선거였고, 한 쪽은 그 동안의 권력투쟁과 논의를 통한 추대였다. 우리나라는 신문의 몇 면씩 사용하면서 어느 한 나라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 나라는 세계 강국이며, 우리에게도 중요한 나라란 얘기다. 그 중 한 쪽의 얘기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세계사의 무대에서 멀어졌다 순식간에 치고 올라온, 어느 나라도 그 힘을 무시하지 못하는 나라가 되어 버린 게 바로 중국이다. 내가 어렸을 적, 중공(中共)이라 불렸고, 수교 이후에는 한 동안 가난함의 대명사처럼 업신여기기도 했던 나라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고, 그들의 권력 동향에도 민감하지 않을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어쩌면 그 국토와 인구를 보았을 때 당연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중국을 바라보는 태도는 다양하다. 그 중 가장 막강한 것은, 그들의 발전에 대한 경이감인 듯하다. 그들의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권력 이양을 보면서도 선뜻 비판하는 나라가 없고, 그러한 권력 이양이 그들에게 가장 이상적이며, 그것을 통해서 현재의 경제 부흥이 이끌어지고 있다는 뉘앙스의 보도가 잇따른다. 가끔 들려오는 열악한 인권 상황(어떤 인사가 구금되었다든지, 하는 소식들)은 마치 가십처럼 여겨질 정도이니 그들의 발전은 압도적이라 평가되고 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보니까, 그럴 수도 있으려니 싶을 정도로. 쉬즈위안은 여기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GDP로만 해석되는 경제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무비판적인 중국 찬양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열악하기 짝이 없는 인권 상황에 대해서 절망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의 내용들은 사실, 웬만한 지식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베이징 올림픽의 그 화려함 뒤에 숨어 있던 사회 부조리와 무차별적 소외에 대해서 누구라도 알고 있던 사실 아닌가? 권력자들의 교체가 사실은 태자당과 공청단의 권력 투쟁 혹은 권력 나눠먹기라는 걸 누구라도 아는 것 아닌가? 그들의 경제 성장이라는 것이 실은 엄청난 수의 희생을 딛고 세워지는 것이란 걸, 티벳을 비롯한 소수 민족에 대한 탄압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는 걸 누구라도 알고 있는 것 아닌가? 다만 얘기를 안 할 뿐이라는 것이다. 쉬즈위안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은 그것을 하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그 다른 뿐인 것이 그저 ‘뿐’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나라도 권력 교체기이다. 독재 권력이라도 내 뱃 속만 불러지면 그만 아닌가,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욕심과 바램은 계속되어오고 있다. 그 독재 권력이 바로 내 목을 쳐 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말하자면 ‘독재의 유혹’이다. 그러나 그 독재의 칼끝은 항상 대부분의 국민을 향한다. 독재의 칼끝은 날카로우면서도 정말로 넓기 때문에. (2012. 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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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젊은 비평가. 나름의 시각으로 중국을 바라본다. 잔 네이비스트와 시몬 레이스,이둔바이. 중국을 찬양햇던 그들이지만 이둔바이와 시몬이 문혁과 천안문 사태를 겪으면서 중국에 대한 그 들의 환상을 접었지만 앨빈 토플러를 답습하던 megatrend의 네이비스트는 중구과 성공적으로 야합한다.
중국은 독특한 민주주의 체제이다. 환구시보와 인민일보가 서양에 던지는 메세지다.. 일본이 한국과 중국과 아시아를 침공한 것을 그들은 탈아입구를 위해 그들을 해방시켜 주려는 전쟁이었다 라고 해석한다.
비숫하다.각자 그들만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다. 중국의 굼적않는 검열과 사상통제, 이데올로기의 강화. 구글과 루퍼트 머독도 나가 떨어졋다. 소련과 1930년대 레몽 아롱과 샤르트르이 좌파논쟁, 마오쩌통의 영향력과 일본을 통해 중구을 비교해 본다. 다양한 시각이다. 저자가 한구이 88올림픽이후 민주화사회로 탄생햇지만 중궁은 베이지올림픽이후에도 더욱 더 탄탄한 사회주의 독재를 보여 준다 고 꼬집지만, 오히려 부럽다.
한국은 한심하다. 1930년대 사회주의와 민주주위 체제에 대한 우월논의는 소련과 동구, 쿠바의 몰락으로 끝낫지만 대처의 노동당도 아닌 민주노동당이나 이상주의 환상의 북한주장베끼기를 하는 인간들이 버젓이 한국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밥먹고 잘 산다.. 한국은 일본보다도 중국보다도 사회발전이 뒤 늦고 뒤 떨어져 있다. 한국이 더 한심하지 않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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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국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G2라든가 BRICs와 같은 신흥국가의 이미지일 것이다. 어떤 나라든 내부에 현정부나 과거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있고 동조하는 시각을 가진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흔히 폐쇄적인 국가일 것으로 생각되는 중국이라는 나라에도 찬성과 동조의 시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의 시각을 가진 전문가들이 많다는 점이 놀랍다. 물론 이집트나 리비아 등의 정권이 무너지는 사례들을 통해서 국민 개개인의 힘이 모였을 때 얼마나 큰 힘을 가지게 되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중국도 충분히 다양한 시각들을 가진 국민들의 의견이 표출될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동안 티벳과 같은 중국 내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이나 집단적인 반발에 관한 기사를 보고 있지만 그 영향력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인데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지게 된 새로운 중국의 모습이다. 얼마전 랑셴핑이 저술한 <벼랑 끝에 선 중국 경제>라는 책을 읽고 누구나 생각해왔던 중국의 발전해 가는 모습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내부 전문가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 <독재의 유혹>저자인 쉬즈위안의 경우도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였다. 랑셴핑의 저술이 정부의 경제정책에 국한되어 있다면 이 책은 다소 광범위하게 폐쇄적이고 독재적인 정권의 한계에 대해 상당히 소상히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중국의 발전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파헤치고자 한다. 중국의 이미지는 더욱 강력하고 선진적인 모습을 띄고 있지만 '발전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발전지향주의에는 그 밖의 문제들은 은폐되고 부패되어 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 국가는 오직 발전을 통해서만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자연스러운 합법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그 국가의 기타 문제는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든 간에 저절로 은폐될 수 밖에 없다. (중략) 그리하여 끊임없이 단순화되는 발전주의의 신념 속에서 GDP 성장은 중국인들에게 현란한 영광을 선사해 주었다. - p.36
책의 초반부에서는 중국의 성장만 바라보고 그 성장의 이면에 감추어진 모습에 대해 외면하는 여러 학자들과 그들의 저술들을 소개하고 있다. 존 나이스빗, 조슈아 라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성공적인 중국의 모습은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베이징 컨센서스란 중국은 자체적으로 독특한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만들었고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시스템이라는 것(p.29)이며, 더 나아가 중국의 경제적 성공은 정치적 성공으로 연결(p.41)되어 '메가트렌드 차이나'에 걸맞는 위상을 갖추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실제 중국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만약 중국에서 생활해본 사람이라면 관리들이 민주, 자유, 실사구시,창신(創新) 등과 관련된 주제를 이야기할 때, 그들의 마음은 이런 어휘의 진정한 의미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구호, 표어, 공문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제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른 논리를 다르고 있다. - p.33
너무나 신랄하고 파격적인 비판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비판한 중국의 모습은 또한 정치권력의 부패, 국유기업의 붕괴, 타이완 및 홍콩과의 마찰, 미국과의 긴장관계 등으로 인해 앞날이 불투명해진 중국(p.32)이다. 이와 같은 중국의 왜곡된 시각을 과거 소련을 바라보는 시각과 비교한다. 앙드레 지드는 소련을 방문하여 '역사상 전례가 없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고,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희망을 가득채워준다'고 하였고, 영국의 웹 부부는 소비에트 공산주의가 일종의 신문명이라고 공언하였다(p.46). 이러한 논조는 소련은 1917년 혁명 이후 계획체제를 창조하여 사회의 부를 통일적으로 분배하는 성과를 가져왔지만 미국은 대공황 이후이 쇄락해 가는 모습을 보였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자본주의가 정치, 경제 그리고 인간성의 위기로 빠져들자 소련의 집체주의와 평등사상이 참신해 보였기 때문에 등장했지만 정작 자본주의의 소외현상은 질책하면서도 소련이 저지른 갖가지 악행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p.45). 하지만 저자는 그들이 바라보았던 왜곡된 소련의 진실은 '발전 수준이 저급한 슈퍼 대국'에 불과하다(p.52)고 평한다.
소련은 늘 프롤레타리아를 대표한다고 말했지만, 관료 시스템이 모든 걸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련은 전면적인 인간 해방을 실현해야 한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간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아울러 소련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의 풍요로움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다고 호언장단했지만 사실은 드넓은 황무지를 창조했을 뿐이었다. - p.52
이러한 소련이 발산한 빛이 항성과 같았다고 한다면 베트남이나 쿠바 등에서 등장한 공산정권의 빛은 행성에 불과하여 미약했다. 이 소련이 빛을 잃어가자 그 대체자로서 가장 기대치가 높았던 나라는 바로 마오쩌둥의 중국(p.54)이었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왜곡된 모습을 가졌던 소련이 몰락해 갔던 것처럼 중국 역시 그런 수순을 밣지 않겠느냐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이런 심각한 주장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13억 시장을 보유한 황금국이며 미국 패권에 도전하는 나라라는 인식은 상상에 불과하며 이러한 상상 속에서 기본적인 가치 판단을 상실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오점이 되고 말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상속의 중국은 1930년대 소련의 또다른 판박이(p.58)일 뿐이다.
저자는 비판적 시각은 벨기에 학자인 '시몬 레이스'의 주장과 공감대를 형성한다. 시몬 레이스는 문화대혁명이 '세계에서 가장 총명한 인민을 바보로 타락시키는 거대한 프로젝트'라고 평가(p.62)했고,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압제가 심한 나라라는 판단(p.61)을 내린 사람이다. 저자의 생각도 이와 동일하다. 대부분의 중국인이 숭배하고 추앙하는 마오쩌둥에 대한 강력한 비판도 저자는 서슴지 않는다. 저자의 판단으로 마오쩌둥의 지상 최대의 방종의 인물이었고, 그 방종을 제약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p.84). 그는 야만적인 몽상가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그의 개인적인 오류들을 현대의 중국인들을 보고도 못 본 체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진정으로 마오쩌둥과 마오쩌둥 시대에 관한 반성이 시작된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러시아에서 스탈린이나 레닌을 부정하는 것과는 차별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련이 고르바초프의 '공개적인 정책'으로 붕괴되기 시작한 것처럼 갈수록 많은 비밀과 잔혹한 기억이 풀려나올 때 그것들은 해일과 같은 역량으로 현실을 뒤덮을 것이다(p.88). 중국은 이점을 교훈으로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독재적 권력은 외부의 제어장치도 없었고 내면의 반성도 부족했다(p.90).
몇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쑹훙빙의 <화폐전쟁>에 대해서도 저자는 놀라울 정도로 강도높은 비판을 한다. 저자는 쑹훙빙을 '아마추어 역사학자(p.101)'라고 평가절하하고 있으며, 그가 쓴 <화폐전쟁>은 '황당한 책(p.107)'이라고 조롱한다. 반면 랑셴핑은 '제대로 경제를 공부한 사람'으로 격상시킨다. 랑셴핑은 앞서 언급했던 <벼랑 끝에 선 중국 경제>와 함께 <부자 중국 가난한 중국인>, <누가 중국경제를 죽이는가> 등의 저자이며 그 이외에도 최근 1~2년 사이에 그의 많은 책들이 국내에 번역되어 있다.
중국의 경제시스템은 '서구 자본주의'보다 더욱 잔혹한 자본주의(p.145)를 추구한다. 중국의 국민들은 정부의 권력과 시장 권력이라는 이중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정책에 희생된 개인은 보지않고 추상적인 위대함으로 모든 것을 저울질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마오쩌둥의 개인적인 매력, 두 자리 숫자의 경제 성장, 공산당의 절대 권력,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중국 모델'이라는 놀라운 이론이 모든 것을 저울질하는 표준이라고 분석한다. 수천만 명의 사망과 생생한 개인 비극은 아주 짧은 언급에 그치고 있다. - p.145
따라서 중국의 유일한 목적은 서구 자본주의의 패권에 도전하여 그들 이론 창조자의 개인적인 야심을 만족시키는 것일 뿐(p.147)이라고 저자는 일축한다. 중국인들의 진실한 생활과 중국 사회의 보편적인 곤경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한다. 중국은 정치적이나 문화적 측면에서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특수성이 왜곡되고 과정되어 특수한 경험으로 보편적 경험을 은폐하게 되면 중국 사회는 결국 위험에 빠지게 될 것(p.149)이라는 저자의 지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우리는 중국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가져왔다. 다만 중국을 너무 무시해서도 안되겠지만 너무 경계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그들만의 독특한 특수성의 문화가 성공모델이 될지 실패모델이 될지는 좀더 지켜봐야되지 않을까 싶다. 중국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G2가 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숙제가 많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