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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는 아도르노를 이론적 길잡이로 삼아 R. 슈트라우스, 모차르트, 장 주네, 남페두사, 비스콘티, 글렌 굴드, 카바피, 브리스톤의 작품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국적과 표현양식이 이보다 더 다양할 수 없는데도 사이드는 이들 모두를 말년성이라는 개념 하나로 능숙하게 풀어낸다. 이들 중에는 말년의 특징을 보인 작품을 하나만 남긴 사람도 있고, 아예 삶 자체가 말년의 양식인 예술가도 있다. 말년의 양식은 예술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현실에 저항할 때 생겨난다. 말년의 양식은 달콤한 열매가 아니라 찌들어 있고 쓴 맛에 가시투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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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새로운 나라를, 또 다른 고향을 결코 발견하지 못할 거네. 이 도시가 항상 자네를 따라다닐 테니까. 자네는 같은 거리를 걷고 같은 동네에 살다가 나이를 먹고, 결국은 같은 집에서 늙어갈 테지. 자네는 이 도시에서 벗어나지 못하네. 그러니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펼칠 희망은 버리게. 자네를 실어다 줄 배는 없네, 자네에게 열린 길은 없어. 여기 이 좁은 모퉁이에서 이제까지 삶을 낭비했듯이, 세상 어디에 가든 마찬가지로 삶을 망칠 것이네. - 그리스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의 <도시> 중에서(205쪽 재인용)
이제 말년의 예술과 반대 방향으로 노화의 길에 접어든 현대 음악은 그저 “악보만 복잡할 뿐 사실상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공허하고 들뜬 여행”(아도르노, <<음악에세이>> 중에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말년의 양식에는 부르주아의 노화를 두고 보지 않고 계속 거리두기와 망명과 시대착오의 감각 - 말년의 양식은 바로 이런 것들을 표현하고, 더 중요하게는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이를 사용한다 - 을 고집하려는 긴장이 본질적으로 내재해 있다. - 41쪽 아도르노는 일차적으로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란 그에 따르면 “대상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것에 관심을 두는” 형식이며, “내밀한 형식적 법칙은 이단이다.” 아도르노의 의미로 볼 때 에세이스트라는 존재는 당대에 유행하는 모든 것에 영원히 맞서 싸우고 화해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그는 보통 “에세이가 당대에 갖는 의미는 시대착오에 있다”고 말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시대착오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월트 디즈니의 <판타지아>나 호세 이투르비와 오스카 레반트가 출연하여 멋지게 연주하는 할리우드 뮤지컬 등으로 음악 산업이 거대화되어 가는 시대에 여전히 고전 음악을 작곡한 인물이다. - 141쪽
모더니즘 문학은 조이스와 T.S. 엘리어트 같은 예술가들이 영감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시대를 떠나 신화와 서사시, 고대 종교 의식 같은 옛 형식들로 돌아가려 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말년의 양식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모더니즘은 역설적이게도 명칭과 달리 새로움을 내세운 운동이라기보다 늙어감, 종말의 운동이 된 것이다. - 194쪽
모차르트는 다 폰테와 함께 작업하면서 속죄나 변명의 기회가 아예 없는 세상, 유일한 법은 방탕함과 조작의 힘으로 표현되는 이동과 불안정이며, 죽음에 의해서만 영원한 안식을 맞이할 수 있는 세상을 제시하려 했는데, 이렇게 잠재적으로 끔찍한 견해에 <코시 판 투테>보다 더 가까이 다가간 작품은 결코 쓰지 못했다. 모차르트가 이 오페라에서 독보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이룩한 것은 그토록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음악과 그토록 부주의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이야기의 결합이다. - 110쪽
(* 지금은 절판된 구간으로 인용하였기 때문에, 쪽수가 다를 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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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도 발견의 연대는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만큼이나, 데이비드 흄을 처음 읽고 독단적인 무기력 상태에서 힘차게 깨어났다고 회고한 이마누엘 칸트 같은 사람에게도 중요하다. 서구문학사에서 소설의 형식은 17세기 말 부르주아의 등장과 같은 시대에 형성되었다. 그래서 처음 백 년 동안 소설은 출생, 고아 신세, 뿌리의 발견, 새로운 세상 창조, 경력과 사회 건설이라는 주제를 파고 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로빈슨 크루소, 톰 존스, 트리스트럼 샌디 다. 소급해서 시작 지점을 확인한다면, 그 대상은 항상 수정되게 마련인 시점에 놓이게 된다. 따라서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실현되거나, 아니면 이후 완전히 실패한 것을 드러나는 의도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수반된다.
두 번째 거대한 국면은 탄생 이후 벌어지는 연속적인 일들, 시작과 더불어 서서히 깝질이 벗겨지는 과정이며, 탄생, 청년기, 번식기, 성숙으로 이어지는 단계 내에 있다. 모든 문화는 체현의 변증법이라고 멋지게 명명된 이미지, 혹은 프랑수아 자콥의 말을 따르자면 생명체의 논리라고 하는 것을 제공하고 널리 퍼뜨린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폭넓고 복잡한 이미지를 제시하는 서양의 미적 형식은 소설이므로, 다시 소설의 역사에서 사례를 들자면, 교양 소설, 이상주의와 환멸의 소설, 미성숙과 친목의 소설이 있다. _ 감정 교육, 잃어바린 환상, 미들마치 음악과 회화 등의 다른 미적 형식도 비슷한 패턴을 따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간의 삶의 궤적을 닮은 패턴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사례들 또한 존재한다. 걸리버 여행기 죄와 벌, 심판 같은 작품은 나이가 들면서 삶의 연륜이 작품에 미적으로 반영되는 굳건한 동맹 관계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예술에서나 삶의 경과에 대한 사고에서나 일반적으로 적절한 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런 시의성의 개념은 가령 삶의 초기에 적절한 것이 훗날의 단계에 적절하기 않고, 그 반대도 모든 목적에는 태어날 때와 죽을 때가 있다는 성경의 구절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의 본분이기 때문이라, 그의 두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보게 하려고 그를 도로 데리고 올 자가 누구랴? ...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는 죄없는 이나 죄 있는 이,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깨끗한 사람이나 더러운 사람 모두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는 한 인간의 삶의 건강이 얼마나 시간에 잘 호응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 그래서 희극은 몰리에르나 초서에서 보듯 노인이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거나, 철학자가 아이처럼 군다거나, 멀쩡한 사람이 병자 행세를 한다거나 하는 엇박자 행위에서 재료를 구한다. 그러나 희극은 결국 젊은 연인들의 결혼으로 마무리되는 코모스를 통해 시의성을 회복하는 형식을 취한다. 26~27쪽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에드워드 사이드 지은이 이렇게 길고 빽빽한 글인줄 몰랐기에 도전했네요. 상당히 빽빽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글을 읽는 것이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왜 예수인가? 다음에 이 책을 고르게 된 우연에 대해 생각해보렵니다. 어째서 이런 우연이 벌어졌을까요? 다른 책을 골랐다고 해도 같은 생각을 했을꺄? 자못 궁금하지만 ...... 오늘의 결의가 있으니 이쯤에서 생각을 접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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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양식'은 사이드의 독창적인 개념언어가 아니다. 사이드가 ‘마지막 유대인 지식인’이라고 존경을 표한 아도르노의 용어다. 나는 이를 좀더 시적인 ‘황혼의 양식’으로 번역하고 싶은 욕망이 인다. 사이드가 '말년의 충동'을 운운할 때 '황혼의 충동'이라 말하면 더 그럴듯 하게 들린다. 말년의 양식을 개념화한 사상가가 바로 아도르노인데 사이드의 눈에는 아도르노 자신이 말년의 양식과 황혼의 충동을 보여준 일종의 예술가 전형이 된다. 아도르노는 베토벤의 양식의 독특함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저작 《미니마 모랄리아》등을 통해서 그런 말년의 양식을 드러냈다. 여기서 예술적 말년성은 조화와 해결의 징표가 아니라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을 드러낸다.
말년의 양식은 말년성을 표현하는 예술가들의 작품과 관계된다. '말년의 양식'을 화두로 사이드는 자신만의 말년성 형식을 창조한 예술가들을 고찰한다. 가령 아도르노의 베토벤 분석에 대한 오마주처럼, 사이드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한 분석이 전개된다.또한 콘서트 무대를 버리고 스튜디오 속으로 숨어 들어간 글렌 굴드, 장 주네와 람페두사, 그리고 특별하고도 아이러니한 표현성을 보여준 모차르트의 작품까지 등장한다. 예술가들의 노년에 발견되는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은 아도르노에게는 ‘파열된 풍경’이라고 명명된다.
“객관은 파열된 풍경이고, 주관은 그속에서 활활 타올라 홀로 생명을 부여받는 빛이다. 그(예술가)는 이들의 조화로운 종합을 끌어내지 않는다. 분열의 원동력으로서 그는 이들을 시간 속에 풀어헤쳐 둔다. 아마도 영원히 이들을 그 상태로 보존해두기 위함이다. 예술의 역사에서 말년의 작품은 파국이다.”(226쪽)
아도르노와 사이드가 강조하는 말년의 양식은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에게서 발견되는 초현세적인 차분함이나 대중적으로 ‘죽음’을 연상시키는 소멸과 쇠락과는 다른 개념이다. 말년의 양식이 아방가르드 예술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사이드에게 말년성은 망명의 형식, 시대착오의 의미이다. 말년성은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것에서 벗어나는 자발적 망명이다. 사이드는 파국과 망명이라고 해서 말년의 양식을 비극적인 측면만으로 국한하지는 않았다. 사이드는 재미와 즐거움, 때로는 아무런 걱정 없는 사치와 자유 역시 현상황이나 지배체제와 화해하지 않는 형식으로 포용한다.
사이드는 아도르노를 따라 화해되지 않은 개인의 비판적 사고가 지닌 ‘저항의 힘을 말년성 혹은 황혼성에서 찾고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침묵과 균열로 작업한다는 것은 포장과 관리를 피한다는 것이며, 사실상 자신의 말년성 지위를 수락하고 수행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깨달음과 즐거움 간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 둘 모두를 그대로 드러내는 힘도 말년의 양식의 특징이다. 여기서 모순을 견디는 힘은 오만한 태도를 버리고 오류가능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노년과 망명으로 인해 신중한 확신을 얻은 예술가가 가진 성숙한 주체성에 기반한다.
내가 비교적 관심있게 본 것은 아도르노와 주네의 공통점과 차이점이다.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와 프랑스 시인 주네의 공통점은 둘 모두 제국주의와 정체성의 정치에 반항한 반식민주의 저항가라는 점이다. 정체성은 우리가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 혹은 영적 존재로서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어떤 것이고, 문화의 논리와 가족의 논리가 여기에 더해져서 정체성의 위력을 증대시키는데 두 사람 모두에게 정체성은 일종의 억압이요 해체해야 할 위험물이다. 가령 주네에게 있어서, 정체성은 더 강력한 문화, 더 발전한 사회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판결된 사람들을 짓밟고 그 위에 자신을 부과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아도르노의 정체성에 대한 반감도 그리 다르지 않다.
“아도르노는 자신이 문화산업이라고 간주한 것과 타협하기를 거부했던 유럽 지식인의 표본과도 같은 존재다. 정체성 중심주의에 반대하는 그의 입장은 반율법주의자의 대항과 일치하며 해결되지 않는 모순을 강조한다.”(140쪽)
한 가지 공통점이 또 있는데 그건 아도르노와 주네 모두 유목적 에너지를 지닌 망명객이라는 사실이다. 아도르노가 파시즘의 박해에 의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목 지식인이라면, 주네는 이성애라는 가부장적 율법주의의 박해에 의해 추방당한 유목 지식인이었다. 사이드의 눈에, 주네는 “정체성을 넘나드는 여행자, 혁명적이고 끊임없이 선동적이기만 하다면 자신과 무관한 대의명분에 기꺼이 몸 바치려고 밖으로 떠나는 관광객이다.”
반면에 차이점은 아도르노는 최소주의자이지만 주네는 카니발주의자라는 점이다. 아도르노는 권위와 도덕을 고수한 엄숙한 엘리트주의자이지만, 주네는 비행을 저지르고 권위를 위반하는 외설적인 악한 유형이다.
“아도르노는 최소주의자이다. 총체성을 불신하고 혐오했던 그는 대신 단편과 아포리즘, 에세이, 여담으로만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도르노의 소형화 논리와는 달리, 주네는 디오니소스풍의 대규모 형식에 떠들썩한 축제의 화려함을 과시하는 시인이다.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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