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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유교를 정치이상으로 삼은 군주제
나라였다. 유교정치의 이상은 혈통이 아니라 덕성에 근거한 왕위계승이었지만, 적어도 조선에서의 왕위계승은 실질적으로 덕보다 혈통을 중시했다. 그럼에도
왕실은 덕이 있는 이에게 왕위가 이어지고 있음을 부단히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 유교정치의 이상과 상징적으로
일치시킬 문화적 장치가 필요했고, 왕위계승자로써 세자는 왕정을 책임질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여러 의례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조선왕실의 의례는 단순한 통과의례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왕실은 언제나 사회의 모범과 표준이 되어야 했기에 왕실의 의례는 조선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선언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조선에서 왕세자의 의례는 국왕이 만들어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왕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자질이 필요했을까? 또 그 자질이 갖추어졌음을 공개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어떤 제도적 장치들을 가지고
있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왕가의 적자로 태어난 왕자가 왕위계승자로써 공식적인 자격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왕자 이순을 통해 알아보고 있다.
조선에서 왕세자가 치러야 할 의례로는
책례, 관례, 입학례가 있었다. 책례는 세자의 책봉의식으로 왕의 아들을 대통을 이어갈 후계자로 공인하는 의식이었고, 관례는 성인으로서의 기본 자질을 지니고 있음을, 마지막으로 입학례는
성인의 법도에 따르는 공부를 했는지의 여부에 대한 의식이었다. 숙종인 이순은 이러한 전형적인 통과의식을
거친 왕자였다.
조선시대에는 한 인물이 죽으면 그에
관한 기록들을 모아 개인의 역사를 쓰는데, 이를 행장이라 불렀다. 숙종의
행장도 숙종실록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 행장에는 탄생부터 즉위에 이르기까지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왕자 이순의 책봉의식은 1667년 1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세자 이순의 나이 일곱 살이었다고
한다. 책봉식에서 이순은 왕의 책봉 교명문을 쓴 교명과 죽책, 왕세자의
인(印),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를 표상하는 의장과 가마를
받았다. 책봉문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도의 마음을 기르고 여러 인간관계 속에서 이를 확장해 나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천명을 제대로 실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책봉식이 끝나면 춘방이 설치되어 세자로서의 공부, 즉 서연을 하기 시작했다.
책봉식을 거행한 2년후인 1669년 가을 세자 이순이 열살이 되었을 때 성균관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입학생은 왕세자 단 하나뿐이었다. 왕세자의 입학식은 왕세자가 주연이고, 성균관의 박사와 유생들이 조연, 그리고 백성들은 관객이 되는 한편의 연극이었다. 그러면 이런 입학식에서
주연인 왕세자는 관객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려 했을까? 입학식에서의 강의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공개수업에서 왕세자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서연에서 미리 강론을 하기도
했다. 이런 입학례의 핵심은 서치(나이)로 사양하는 것 이었다. 이는 세자의 지위는 높지만 입학하여 학교에서
나이로 양보하는 예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스승에 대한 존경과 연장자에 대한 예우를
통해 세자를 단련 시키는 동시에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 그들을 교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믿은 것이다.
성균관에서 입학식이 있던 다음해 3월
세자 이순은 관례를 행한다. 관례란 성인이 되어 예를 책임질 수 있음을 알리는 의식이었다. 세자 이순의 성인식은 조선시대 왕세자 관례의식에 대한 공적 기록물인 시민당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시민당이란 창경궁에 있는 동궁으로 관례가 거행되던 장소였으나, 178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인식을 올린 다음해 4월, 세자는 12세에 가례를 올렸으며,
열네살이 되었을 때 부왕 현종의 승하로 즉위했다.
왕세자의 의례는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를 제대로 실천한 것은 조선 이었다. 이는 학문과 예의를 중시하는 조선의 특징이 잘 나타난 국가전례이자, 다양한 목적을 가진 왕실행사 이었을 것이다. 비록 각기 일회성 행사에 그쳤을 지라도 장차 제왕이 될 세자에게 이러한 의례를 통한 교육을 시켰다는 것은 그만큼 인과 예를 중시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어떻게 보면 비판적인 시각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중세 우리 선조들의 위민사상의 일단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통과의식을 거친 숙종이었기에 조선조 후반 문예부흥군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겠지만, 재임초반기 환국정치로 나라를 운영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