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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런때가 있었다. 내앞에 놓인 삶이 너무 무겁고 힘겨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뭐에라도 기대고 싶은데 아무것도 나를 위로해주지 못할때 너무절망적이어서 딱 살기싫어질때 종교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난 믿음이 없는 자이고 그럴때 머릿속에 스친 한마디 신은 죽었다...니체가 한 말이었지. 그때는 딱 이말에 꽂혀서 어쩌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접하고 뒤적거리다가 당췌어려워서 읽기를 포기했었다. 그러다 최근에 여러가지 복합적으로 힘들어져서 구매하고 읽게되었는데 생각보다 술술 읽히고 공감가는 이야기이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위대한 정오란 인간이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길의 한가운데 서있을때이며, 저녁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길을 최고의 희망 으로서 축복하는 때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소망은 이렇다. "슬퍼하는자 모두를 굳건한 땅 위에 튼튼한 발로 다시 서게 하는 것."》 이제는 나도 내안에 초인을 만날때인가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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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을 말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왜소한 인간들이 사회의 전면에 나서서 선함을 강요하는 혼돈의 시기, 니체는 이런 자들과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글은 읽으며 시원함을 느꼈다. 자유를 즐기고 마음껏 살자.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의지로…
글의 내용이다. 진정한 삶을 찾아 나선 차라투스트라는 그 길을 찾고 다른 이들에게 가르친다. 많은 사람들이 시장의 이해관계에 매여 비열한 짓을 하거나, 잘못된 믿음에 매여 스스로를 괴롭힌다. 이해관계가 만들어내는 비루함은 그대로 드러나지만, 잘못된 믿음은 숨어서 우리를 갉아먹는다. 인간 속에서 우러나오는 의지를 억누르는 가르침은 화석이 되어 삶을 괴롭힌다. 신, 이웃사랑, 도덕 등 한 때 고귀한 삶을 표현하던 말들이 오히려 독수리의 날개를 꺽는데 사용된다. 믿음과 회개는 부정을 용인하는 말장난이 되고, 이웃사랑은 자신을 망각시키고 숙제처럼 짐이 된다. 또 한편에서는 더러운 세상이라며 허무를 속삭이고 죽음을 충동한다. 왕도 타락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생각은 없고 군중들에 야합하며 빌붙는다. 자신의 의지를 무너뜨리는 것을 과감히 부숴버려야 한다. 한 마리의 사자처럼 늠름하게 자신의 삶을 창조해야 한다. 덕이나 선으로 속삭이지 마라. 자유로운 의지가 없고 창조적 행위가 없다면 그것이 노예의 굴레이지 다른 무엇이겠는가. 세상은 영원회귀한다. 선도 악도 현존하며, 나는 고귀한 삶을 향해 나의 뜻을 알고 나아갈 따름이다. 누가 살인을 악이라 하며 피의 용솟음침을 막는가. 사악한 적을 죽이는 것은 영웅적 행위이다. 삶을 직시하고 거짓의 소리를 물리쳐 자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다름아닌 초인이다. 밖에서 주어지는 숙제를 까닭도 모르고 하면서 낙타처럼 무거운 짐에 눌려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순박한 아이처럼 행복을 즐기면 산다. 이제 그 빛을 잃은 신도 왕도 사상도 다 죽었다. 오직 의지의 창조만이 있다. 인간이 세운 서판을 부수어라. 우리를 억누르는 낡은 서판을 부수고 새로운 서판을 만들 때이다.
민주화, 언론자유, 참여와 연대. 인권, 자원봉사 등이 낡은 서판이 되어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 급급한 비루한 자들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낡은 언어에 빌붙은 사는 자들이 사람들을 검열하고, 낡은 언어에 매인 자들은 스스로 자기검열한다. 왜소한 자들이 판을 치니, 고귀한 사람들은 사소한 악들을 스쳐지나간다. 영원회귀이니, 사악하고 비굴한 자들은 늘 있다. 초인이 되어 고귀한 삶을 위해 독수리처럼 사자처럼 자유롭고 과감하며, 어린아이처럼 순박하게 살아간다. 지금 우리에게 니체가 외친다. 아침 태양처럼 솟아오르라. 거짓과 억압은 밝히기 쉽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은 정밀하고 어려운 작업이다. 하지만, 숨어있던 거짓과 억압이 벌거벗고 나설 때, 그것에 저항하는 용기를 내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니체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바로 그 용기이다. 억압과 거짓은 몸이 먼저 아니, 말싸움은 부질없는 짓, 과감히 거부하라. 고귀한 삶은 낡은 의식에 매이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고 도의 길은 미약하다.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살며, 진실로 그 중심을 잡아라.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 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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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북으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 보았지만 종이책으로 사서 읽고 싶었다. 계속해서 읽을 가치가 있거나 그러고 싶거나, 어려운 책들은 여전히 종이책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여전히 있다. 환경 오염으로 인해서 과제물이나 종이를 쓸일이 있어도 되도록이면 프린트도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죄책감이 들어서 줄이고 있음에도 종이책은 여전히 포기할 수 없다! 이북으로 읽을 때도 꽤나 긴 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이 도착하고 보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소설책도 아니라 니체의 책인데! 몇번을 읽고 내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을 해석본이나 논문, 다른 사람들의 감상문으로 채워넣고 해석하고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에! 친구들은 고전 학문에 미친 인간 같다며 놀리곤 하지만 이게 고전의 매력 아니겠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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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헤겔의 시대정신의 반대편에서 비시대정신은 이끌었고,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통해 서구사회가 종교에서 분리되는 것에마지막 정점을 찍은 위대한 철학자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책은 상당히 불온한 서적이 되겠지만, 니체는 이 책을 통해 또 한번 인류의 인식의 범위를 발전시켰다. 이해하기 다소 어려운 부분이 있어 구절의 의미에 대해 찾아 보았다. 필요한 것 단지 생각을 뒤집는 것, 그것뿐이다. 니체는 전체집합 U를 미지수 X로 바꾸는 데 능숙한 사람이다. 적혀 있던 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미지수가 들어서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위험하다’고 말한다. 미지수 X 위에서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문 부호를 들고 찾아온 한 사상가로 인해 우리의 삶이 대단한 위험에 빠진 듯 허둥댄다. 그러나 답이 사라질 때 오답도 함께 사라진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정해진 답에 삶을 꿰맞추는 건 끝났다. 이제 우리 삶을위해 답이 수정될 것이다. 당신의 삶도, 당신이 사는 세계도 말랑말랑한 진흙덩어리로 당신 앞에 놓여 있다. 니체는 그저 기대에 찬 눈으로 당신 작품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p.11,12 니체의 책, 매우 기대가 된다. 그의 책은 처음이지만 그의 위대한 이름 때문일 것이다. 니체의 삶은 일상에서 경험하는 연대기적 시간이 아니라 그의 변신을 통해 측정되는 시간, 곧 그가 체험한 시간에 맞추어 기술되어야 한다. 여기서 ‘체험’(Erlebnis)은 일반적인 ‘경험’(Erfahrung)과 구분되는 개념이다. 후설(E. Husserl)이나 딜타이(W. Dilthey)에 따르면, 체험은 개개인이 스스로 자기 삶을 형성하는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체험에는 그의 변신, 다시 말해 그의 시간이 들어 있다. p.22 나의 삶의 형성하는 경험이 체험이다. 나의 체험은 무엇이었나? 그렇다면 내가 좋은 삶을 가지고 싶다면 좋은 체험을 해야한다는 말이된다. 좋은 체험은 좋은 경험들 속에서 만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좋은 체험을 한번에 골라낼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본래 페르시아 예언자로서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창시자이다. ‘조로아스터’는 차라투스트라의 영어식 표기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자기 책의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정말 의아한 일이다. 왜냐하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와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 차라투스트라는 아주 상반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으로 유명한 종교다. 유대-기독교를 비롯해 서구의 몇몇 종교에 나타나고 있는 선과 악, 신과 악마의 강력한 대립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으로 간주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선악이라는 도덕적 세계관을 극복할 것을 설파하고 있다. 그렇다면 니체는 무엇 때문에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가를 끌어들인 것일까? 그는 그런 물음을 기다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p.64,65 차라투스트라는 정말 많이 들어본 말이지만 왜 니체가 그런 주인공을 가져왔는지는 정말 몰랐다. 무지의 상태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이제 광명이 드는 것 같다. 형이상학에 대한 니체의 비판은 확대된 의미에서 신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형이상학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세계???철학자들은 이것을 현상계라고 부른다???를 가능케 해주는 세계,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전형이나 본질이 되는 그런 세계???철학자들은 이것을 실재계라고 부른다???를 탐구한다. 형이상학자들은 가변적이고 유한한 우리의 경험 세계, 초자연적 세계(‘저 세계’, ‘실재계’)가 있다고 믿으며, 참된 진리나 아름다움이 바로 그 세계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 접근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버전들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세계’가 그렇고, 칸트가 말하는 ‘물 자체의 세계’가 그렇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알아챘겠지만 이러한 이분법은 기독교의 사고 방식과도 닮았다. 기독교도들도 죄 많은 ‘이 세계’와 천국이 있는 ‘저 세계’의 이분법을 가지고 있다. p.102 이분법의 기원을 형이상학에서 찾는 것은 좀 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어떤 사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가장 일반적인 분류법이다. 남자와 여자, 착한사람과 나쁜 사람, 나와 남, 세상엔 인간이 자연스럽게 이분법을 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있다. 결국 신의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신앙의 죽음이고, 신앙으로 존재하는 자인 인간의 죽음일 수밖에 없다. 신앙이 살아 있고, 신앙으로 존재하는 자인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신의 죽음 소식은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앙이 남아 있다면 신은 수백 가지 버전으로 출현할 수 있다. 국가와 민족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화폐를 숭배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시장을 우상화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따라서 신의 죽음은 인간적 형태의 온갖 우상 숭배의 종식을 의미한다. 차라투스트라가 신의 죽음을 전하는 곳에서 위버멘쉬를 가르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신의 죽음이란 곧바로 인간의 죽음이며, 위버멘쉬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과 위버멘쉬의 탄생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위버멘쉬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복음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항상 자기 가치를 두고 그것에 복종해 온 인간이 드디어 노예적인 생활을 끝내고 자기 가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p.107 이렇게 서구세계는 자신의 가치를 돌아볼 수 있는 문화적 토대를 만들어 갔구나. 어떤 숭배대상에도 휩쓸리지 않는 강력한 자아, 위버멘쉬! 좀더 파고들어가 보자.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강자와 약자, 혹은 귀족과 노예의 구분이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가치 판단 양식에서 서로 다르다. ‘좋음’(Gut)과 ‘나쁨’(Bose)을 지칭하는 말들에대한 어원학적 분석을 통해 니체는 귀족들의 가치 판단 양식이 노예들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설명한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특성들을 가리킬 때 ‘좋음’이라는 말을 썼다. 가령 그리스인들이 ‘좋음’을 지칭할 때 쓰는 단어인 ‘아가토스’(agathos)는 ‘태생이 훌륭한, 온화한, 용감한, 능력이 있는’ 등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품성이나 헤어 스타일, 피부색, 옷 입는 방식 등에 ‘좋음’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런 품성이나 스타일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 가령 겁이 많고 소심한 품성을 지녔거나 스타일이 엉망인 사람들에게 ‘나쁨’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라틴어에서 ‘나쁨’의 의미를 지닌 ‘멜라스’(melas)가 이탈리아 토착민의 피부색인 검정색을 뜻하고 있음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귀족들의 ‘나쁨’이라는 말에는 어떤 악의적 목적도 없었다. 그들의 ‘나쁨’에는 ‘어떻게 그렇게 감각이 없을 수 있냐’든지, ‘그렇게 소심해서야……’하는 식의 연민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노예들의 판단 양식은 전혀 다르다. 노예들은 자신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대상을 찾아 비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과 대립관계에 있는 것을 우선 ‘악’(Ubel)으로 규정하고, 반대편에 있는 자신들을 ‘선’(Gut)이라고 부른다. 귀족들이 ‘좋음’과 ‘나쁨’으로 불렀던 것을 노예들은 ‘선’과 ‘악’으로 부른다. 귀족들이 말하는 ‘나쁨’에는 연민과 동정이 담겼다면, 노예들이 말하는 ‘악’에는 저주와 원한이 담겨 있다. 귀족의 판단 양식과 노예의 판단 양식 사이에서 눈여겨볼 점은 가치 판단이 어디서 시작되는가이다. 귀족들은 자기 자신이 기준을 갖는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긍지로부터 ‘좋음’의 규정을 끌어낸다. 반면 노예들은 다른 자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선’을 끌어낸다. 귀족들이 자신들로부터 시작한다면 노예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들로부터 ‘좋음’을 규정하다보니 귀족들의 ‘좋음’에 대한 규정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들은 스스로 ‘미덕’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의 주인이다. 반면에 노예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에서 시작하다 보니 ‘선’에 대한 규정이 막연하고 모호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난받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뿐 스스로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p.119,120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 것이가? 다른 사람의 가치 판단 기준에 맞춰서 판단한다면 그것은 노예의 삶일 것이고, 내가 누군가의 가치판단의 노예인 것이다. 나는 나의 삶에 주인으로 살것인가? 그렇다면 나만의 가치판단기준은 무엇인가?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가? 무엇인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니체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좋은 결혼은 서로를 좋은 친구로서 계속 사랑하게 한다. 그러나 보통의 결혼은 이와는 정반대다. 많은 너무나도 -많은- 자들이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 아, 그것을 나는 어떻게 부를까?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궁핍함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더러움이여! 아, 짝을 이루고 싶어하는 영혼의 가엾은 안일함이여!(‘아이와 결혼에 대하여’) 무언가 서로에게 줄 것이 있어, 자신에게 넘쳐나는 것이 있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받고 싶은 것이있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어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결혼이다. 풍성한 토양에서 자라는 사랑의 식물은 서로를 선물하는 친구를 만들어주지만,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사랑의 식물은 상대방을 구속하는 가시 울타리로 자라난다. p.130,131 아주 적절한 구분이다. 무언가 줄 것이 있어서 관계를 맺는 것! 와우! 니체는 삶에 대한 사랑을 ‘운명애’(amor fati)라고 불렀다. 그는 그것을 ‘운명과 대결하지만 패하고 마는’ 터키 식 운명론이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복종하다 쓰러지는’ 러시아 식 운명론과 구분지었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도 아니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아름답게 창조해 주는 것이다. 물론 그 창조에는 고통이 따른다. 재창조되기 위해 하나의 삶은 다음 삶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p.148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는 니체의 ‘운명애’개념이다. 정확하게 알자. 인용 https://medium.com/reading-thinking-sharing-bookers/니체의-위험한-책-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말했다-1a07ccbabea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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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철학 사상이 집약된 책이라고 해서 각오하고 읽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한 챕터 한 챕터가 곰곰히 읽으면 이해는 갑니다. 다만 니체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아니었나 봐요.? 읽는 사람을 위한 글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 사상에 대해 설명만 주구장창 하는 느낌이에요. 그리고 니체가 신 대신에 주장하는 초인, 초인에 대한 잣대는 누가 규정할 것인지가 의문이 납네요. |
| 미디어에서 니체의 철학에 대해 강의를 하는 것을 보고는 매력을 느껴서 책을 검색하다가 사게 됐어요. 좋아하는 문구가 이 책에서 발췌돼서 인용됐길래 제일 먼저 사보았네요. 흥미롭게 읽고 있는 중입니다. 다 읽고나면 다른 책도 사려구요. 철학은 막연히 어렵고 나와 상관없는 얘긴줄 알았는데 철학이야말로 내 삶과 가장 밀접한 학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사고의 폭도 넓혀주고 생각이 방향을 잡지 못할 때 어느 쪽으로 가야할 지 방향을 제시해주는 역할도 하는 것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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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흔히 망치를 들고 기존의 모든 가치(특히 기독교적 가치)를 깨부순 철학자로 묘사하고, 철학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상가로 꼽는데,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드디어 읽게 되었다. 내용이 방대하고 철학적이라 이해하기 쉽지는 않았지만 현대사회에도 충분히 적용되는 니체의 혜안을 접할 수 있었다. "나의 눈물과 함께 그대의 고독 속으로 들어가라. 형제여. 자신을 넘어서 창조하려 하고, 그럼으로써 파멸하는 자를 나는 사랑한다" - 니체는 나를 넘어서는 의지를 사랑했고 이를 추구했다. 이것이 바로 초인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인식하는 자가 그 진리의 물 속으로 뛰어들기를 꺼리는 것은 그 물이 더러울 때가 아니라 얕을 때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아래와 같다. "고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것, 새로운 것, 낯선 것을 좋아하는 그대들, 그대들 모두는 자신을 견뎌내지 못하며, 그대들의 부지런함은 도피이자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다. 그대들이 삶을 좀더 믿었더라면. 순간에 자신을 내맡기는 일은 적었으련만. 그러나 그대들의 마음속에는 기다릴 만한 충분한 내용이 없다.아니, 게으름을 피울 만한 그런 내용조차도 없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치 정곡을 찔린 듯한 느낌을 받아 소름이 끼쳤던 기억이 난다. 니체는 이미 21세기 현대인들이 얼마나 워커홀릭이 되어 일에 매달려 달려나가고, 동시에 불행히도 그 속에는 충분한 내용(아마도 컨텐츠나 신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임)이 없다는 것을 예견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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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에 있는 서적들을 즐겨 보는 편인데 이번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서적을 구매 및 주문을 해서 보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이 책에서 작가의 필력이 돋보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생각날 때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이책을 가끔 꺼내어 읽어 보고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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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인생은 참 개인의 인생으로서 힘들었을 것 같은데 이런 업적을 남기기도 하니까요 참 인생이 무엇일까 생각을 들게 합니다 어쨌든 이 책에서 니체는 우리에게 또다른 감동을 선사합니다. 갠적으로는 니체 책 중에서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다른 책들도 봤지만 이 책이 주는 울림이 좋습니다 만약에 니체 전집 중 하나를 사야한다면 이 책을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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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철학서적이라 다소 어렵게 느껴질 것 같아서 사 놓고도 한동안 손이 가질 않았던 책이다. 하지만 대학 수업교재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의외로 어렵지 않고 아주 감동깊게 다가왔던 것 같다. 현재 내 삶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극복하고 견디어 내면 우리 삶에도 변화가 오고 그러면 자신의 사람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