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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언제부턴가 친숙해진 이름이다. 며칠 전에는 MIT대학생이 찍은 강남스타일 동영상에 등장하여 화제가 될 정도로 일반인들에게도 주목을 받게 된 ‘촘스키 스타일’도 있었다.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이자 ‘인류 역사상 자주 인용되는 여덟 번째 인물’이기 때문인지 촘스키의 저서를 읽어보지 않았어도 너무나 많이 들었던 이름이다. 이 책은 물리학 교수 장 브릭몽과 촘스키의 인터뷰로 장 브릭몽이 질문을 하고 촘스키가 답을 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장 브릭몽의 질문이 무척 예리하고 날카롭다. 질문은 세 가지 장으로 나누어 ‘권력’과 ‘인간 본성과 이성’, ‘과학과 철학’에 대한 촘스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전 세계에 불어 닥친 금융위기에 대한 시선들은 불안하다. 자본주의의 종말이라든지, 사회 변혁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고 , 세계적인 지성인들-석학들은 여러 시스템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과는 전혀 다른 대안을 촘스키에게서 볼 수 있었다. 바로 사회주의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남아있다면 지금의 혼란을 바로 잡을 주역은 국민밖에 없다. 서구 세계의 프로파간다 시스템은 사회주의를 헐뜯을 목적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동유럽의 프로파간다 시스템은 진정한 사회주의의 매력을 이용해 민중의 지원을 끌어낼 목적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런 암묵적인 협조가 빚어낸 족쇄에서 아직도 많은 이들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p53 최근에 <코뮤니스트>를 읽고 나서부터 사회주의에 대해 무척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공산주의는 어쩌면 매우 혁신적이고 매혹적인 사회 변혁의 이상을 반영한 사회주의의 형태를 띠고 있었을지 모르나 , 결국은 실패라는 이름을 남겨준 체제이다. 하지만, 촘스키는 그런 사회주의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사회주의라는 이름에 덧붙여진 프로파간다인 것이다. 사회주의에 대하여 촘스키는 ‘생산을 비롯해 삶의 여러 부분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제도’가 사회주의라고 한다. 이런 사회주의는 이제껏 시도되지 않은 사회주의이다. 미래는 노동자와 일반 시민이 이끌어 가는 사회가 되어야 희망이 있다. 이제껏 모든 체제의 실패는 인간본성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정치체제 역시 없었다는 것이 촘스키의 설명이다.
“역사의 어떤 시기에 발달한 특정한 사회제도가 인간 본성의 필연적인 반영이라고 단정할 만한 증거는 역사와 과학,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특별한 형태로 나타난 심각한 병리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입니다.”
책의 제목 《권력에 맞선 이성》 처럼 세 장의 짧다면 짧은 인터뷰를 통해 촘스키의 사상을 요약하여 보여주는 대담들은 무척이나 수준높은 지적인 사유들이다. 그리고 그런 지적인 이성의 바탕은 노학자의 겸허함에서 비롯되고 있다. 노벨상을 수상한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노벨상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겸허함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촘스키 또한 세상의 모든 이치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성을 가지고 있는 세계의 역사와 문명을 짧은 학문에서 말하고자 한다는 것자체가 어쩌면 인류 최고의 아이러니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역사를 살펴보고 더 나은 대안으로서의 미래에 촘스키는 어떤 프로파간다에도 휘둘리지 않고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는 이성을 갖추고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인권과 자유가 꾸준히 확대되어 왔고, 고통과 억압은 꾸준히 감소해왔듯이 우리가 가고 있는 위기라는 길목은 유토피아로 가는 길목에서 마주한 장애물일 뿐이다. 우리가 미래를 섣불리 낙관하거나 비관할 필요없이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면 상황은 개선(5p)될 수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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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신한 것을 보면 가슴이 두근대고 흥분됩니다. 나는 자연과학이나 수학에 관련된 전문 잡지를 들척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대단한 것을 얻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더 깊이 알고 싶은 것이 눈에 띄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압니다. 그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가,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내 수준에 맞게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촘스키의 지성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시절 전공 수업을 통해서였다. 원래 언어학자로 더 유명했던 그의 생득적 언어이론은 교육학과 청각장애 교육 수업의 주요 텍스트로 활용되었다. 당시엔 막연히 유명한 언어학자 인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 분이 당대의 유명 과학자이자 철학자 촘스키 교수였다. 이 책은 MIT 언어·철학과 명예교수 노엄 촘스키 교수와 벨기에 루벵 대학교 이론 물리학 교수 장 브릭몽 교수의 대담집을 엮은 것이다. 책은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금융위기와 세계화에 빗대어 무관심학고 무기력한 지식인에게 이성의 힘을 설파한 1장 남용되는 권력에 대하여. 무정부주의와 개량주의, 사회주의와 고전자유주의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역사적 배경을 살피고, 교묘한 이론과 거짓 프로파간다로 현혹하는 세계 정부와 반세계화 운동의 내막을 알아보고 촘스키 교수의 세계화에 대한 다른 견해를 들어 보는 2장 인간 본성과 정치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생득론적 관점과 진화론적 관점으로 과학과 철학에 대하여 들어보는 3장 과학과 철학에 대하여.
이렇게 3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대담집은 작정한 채 까발리고, 들춰내어 고발하는 본격적인 사회 이론서이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촘스키 교수가 하고픈 말 중에 50%만 체득하여도 큰 수확이 될 것 같다. 15년 전만 하더라도 이 책은 우리나라에선 출간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을 위시한 세계 정치 경제 질서의 정점에 선 나라들을 작정하고 까대는 촘스키 교수의 논리적인 언변이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 같다. 촘스키 교수의 곧고 과격한 사상에 힘을 실어 주는 미국 시민 사회와, 정부에 유리하든 불리하든 귀를 기울이는 미국 사회가 새삼 부러워지기도 하였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다.” 노엄 촘스키.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들이 꼭 한 번 알아 가면 좋을 주옥같은 투쟁과 삶의 기록들을 만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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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엄 촘스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학자이다. 사회주의자로써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비판, 즉 불의한 권력에 대한 비판은 그를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양심으로 칭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촘스키 자신의 철학, 과학, 종교 등에 대한 생각은 대중에게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책은 물리학자인 벨기에 루뱅대학교 교수 장 브릭몽이 그 동안 덜 알려진 촘스키의 생각을 탐색하기 위하여 그와 인터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고 한다. 책 제목 [권력에 맞선 이성]은 촘스키의 저작과 삶 자체를 요약한 말이라고 브릭몽은 이야기 한다. 또한 지식인에게 이성이라는 무기는 유일한 전투수단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식인들은 너무 쉽게 포기하지만, 촘스키가 그들과 다른 이유는 이성을 저항의 무기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브릭몽은 촘스키와의 인터뷰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진보, 철학과 지식인, 그리고 과학과 종교 등에 대해 촘스키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금융위기와 세계화의 실패에 따라 새로운 변혁이 이야기 되고 있다. 여러 사람들이, 여러 대안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촘스키는 사회주의만이 그 대안이라고 못박는다. 알다시피 촘스키는 사회주의자이다. 그는 사회주의가 동유럽과 서유럽 모두에서 실패한 체제의 이름이 된 것에 대해 그것들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었으며, 프로파간다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서유럽의 프로파간다는 사회주의를 헐뜯을 목적으로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동유럽의 프로파간다 시스템은 진정한 사회주의의 매력을 이용하여 민중의 지원을 이끌어 낼 목적으로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촘스키는 말한다. 이는 결국 사회주의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린 문제로, 촘스키는 사회주의를 ‘생산을 비롯해 삶의 여러 부분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제도’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동유럽에서는 사회주의가 시도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촘스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도 우리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기존의 사회시스템을 바꾸려면 인간의 본성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교묘한 이론과 거짓 프로파간다에 우리는 혹하여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단지 주관적인 반응일 뿐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만 할까?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복지는 상호보완적이라고 촘스키는 말한다.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투쟁을 통하여 쟁취한 자유와 성과를 포기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와 자유, 해방, 소수자, 여성, 그리고 미래 세대의 권리와 환경을 위한 운동이 일어날 때, 이것이 진보의 징후이며, 그 권위에 의문을 제기할 때 바로 그것이 진보라고 한다. 바로 여기가 촘스키가 말하는 이성이라는 무기가 필요한 지점이 아닐까 싶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도전, 즉 권력에 맞서는 이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식인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우리사회에서도 지식인에 대한 논란은 많았다. 나 역시 대학 새내기 때, 한완상 교수의 [민중과 지식인]이란 책을 읽으면서, 우리사회에서 지식인은 누구일까, 또 지식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고민했던 기억이 새롭다. 또한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지식인이라던 고 리영희 교수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실천과 비판이 참 지식인의 조건임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촘스키가 말하는 이성이 아닌가 싶다. 힘이 곧 정의인 시대. 우리는 어떤 프로파간다에도 흔들리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의 미래를 섣불리 낙관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더불어 희망을 잃지 않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비록 불의한 사회라 할지라도 상황은 개선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 다. 이 시대, 이 땅 위에는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들은 어떤 이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이성이라는 무기를 불의에 저항하는 전투수단으로 삼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더욱이 얼마 남지 않은 대선이라는 장터에서 지식인이라는 그들의 이성이 어떻게 사용 되는지 지켜볼 따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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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 역사의 흐름에 대해 거창하게 선언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습니다. 겸허한 자세로 역사를 보고 교훈을 얻어 현실적으로 가능한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지요. - 29쪽
처음 노란 표지에 싸인 작은 이 책을 보고 쉽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크나큰 오산이었습니다. 저는 평소 국제 경제와 정치에 익숙지 않았던 터라, 일련의 사건들을 유기적으로 짜맞추어 판단을 내리는 촘스키의 이성에 전혀 근접하지 못했습니다. 이 책에는 정치, 경제, 과학 등 인류가 발전시켜 온 여러 분야에 대한 촘스키의 생각이 요약되어 있는데, 얇은 두께의 책을 얕잡아 보았다가 한 방 맞고, 더 얇디얇은 과학의 장에 이르러서 카운터 펀치를 맞고 말았습니다. 정치는 물론이요, 과학, 철학이 이토록 생소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제 경우에는 책을 어찌 한 번 읽을 수는 있지만, 읽은 책을 다시 손에 잡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번 읽고 촘스키의 생각을 제가 조금이나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두 번째로 정독하고 나서도 제 복잡한 머리를 정리할 수 없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도인들의 곁에 무릎 꿇고 앉아 그들의 선문선답을 경청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노엄 촘스키와 나눈 두 번의 서면 인터뷰를 엮은 것이다. 1장은 2009년, 2장과 3장은 2001년에 이루어진 인터뷰 내용이다. - 장 브릭몽의 서문, 5~6쪽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 장 브릭몽 교수의 질문은 촘스키의 세밀한 사유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논리를 정연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전적으로 정치와 인간의 본성, 과학 등에 대한 촘스키의 생각을 풀어놓은 것이라 봐도 좋을 듯합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무언가를 판단한다는 것은,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자신의 주관에 따라 무엇에 대한 결론을 마음속에 정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논리를 세우려고 하지만, 자국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과 현재 상황 등 때문에 감정을 배제하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촘스키는 나름의 고증을 통해 자신의 이론이나 생각을 객관적으로 정립해 나갑니다.
촘스키 : 나는 어떤 것에도 절대주의적 관점을 취하지 않습니다. 표현의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표현의 자유가 합법적으로 제한될 수 있는 상황도 상상해볼 수 있고, 때로는 현실적인 상황도 있습니다. - 93 ~ 94쪽
그는 문헌 조사와 현지답사를 하는 한편, 여러 관계자의 자문과 인터뷰를 통해 사실을 탐구하여 결론을 도출합니다. 그가 보고 느끼는 사실들은, 분명히 있었지만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특정 사건의 사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의 원인은 워낙 복잡한 것이어서 원인과 결과를 쉽사리 밝혀내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이렇게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연구에 매진하다 보니, 촘스키는 특정 상황에 대한 의견이 아닌 일반론을 제기하는 편이 드문 것 같습니다. 서면 대담 여러 곳에서 드러나듯이, 촘스키는 몇몇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알 수 있는 것은 드뭅니다.' 라는 견해를 보입니다. 하지만 정치, 특히 권력에 대해서는 최근에 일어난 여러 사건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확고하게 드러납니다.
브릭몽 : 선생님이 미군의 개입을 항상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권을 지키겠다는 미국 정부의 의도가 말처럼 순수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촘스키 : 국제법을 무지막지하게 위반했던 미국의 개입을 반대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국제법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약소국들을 조금이나마 보호해주는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예부터 피해자들이 강력하게 요구하던 국제법은, 전통적인 제국주의 국가들에게는 웃음거리에 불과합니다. - 33~34쪽
촘스키 :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개인(예컨대 애덤 스미스)이나 사상(예컨대 고전자유주의)을 추상적인 범주에 억지로 끼워 넣어, 받아들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 또 좋아할 것이냐 싫어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분류는 무의미합니다! - 84쪽
그렇다면, 우리가 분류해 놓은 수많은 지식과 이론과 역사적 사건들은 어떤 기준에 의해 나누어진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제가 정확히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촘스키가 이야기한 것처럼, 구체적 사실이나 지식, 또는 이론 등을 추상적인 상위 범주에 속하게 하여 편을 가르는 것 역시 일종의 권력에 다름 아닌가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보았습니다. 학자나 정치가들은 논문이나 언론 기고 등의 저술로 많은 것을 확립합니다. 그것을 권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권위인지 권력인지에 대한 판단은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진실은 언제나 저 너머에 있기 마련이라 생각합니다. 철학과 과학,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치에 있어서는 말이지요. 이 책을 읽고 제 짧은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만, 무엇보다 이 책은 제가 가타부타 평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있습니다. 그저 저는 읽고 배울 뿐입니다. 한 글자도 놓치기 싫은, 작고 귀여운 책에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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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루뱅 대학교 이론물리학 교수 장 브릭몽이 이제는 새삼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이자 가장 실천적인 지식인인 노엄 촘스키를 인터뷰한 이 책의 부제는 'PASCAL'S WAGER', 즉 '파스칼의 내기' 이다. 파스칼은 그의 주저인 '팡세'에서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기를 한 적이 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물론 그것은 확실히 모른다.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도박과 같다. 문제는 어느 쪽에 걸 것인가 이다. 신이 없다는 쪽에 걸었다고 상상해 보자. 그랬을 경우 만일 죽어서 내기한 것과는 달리 신이 있으면 아주 곤란해질 것이다. 당신이 선택한 무신론 때문에 그야말로 지옥으로 직행할 테니까. 그렇다면 신이 있다는 쪽에 걸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일 죽어서 내기한 것과 달리 신이 없다면 어차피 신이 없으니 설령 내기에 졌다고 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기한 대로 신이 있다면 그 내기로 인해 천국으로 가게 될테니 이것은 금상첨화가 아닌가! 그러니 신이 없다는 쪽 보다는 있다는 쪽에 거는 것이 여러모로 나은 도박이다. 이것이 무신론 보다 유신론이 더 나은 이유다.
이것이 바로 너무도 유명한 파스칼의 내기이다. 그렇다면 노엄 촘스키에게 질문하고 그 대답을 정리한 장 브뤽몽은 왜 하필이면 이 책의 제목을 그렇게 달았을까? 그건 바로 촘스키의 태도가 단적으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장 브뤽몽은 여기서 모두 세 개의 파트로 나누어 촘스키의 대답을 정리하고 있다. 그렇게 그 처음인 1장 '남용되는 권력에 대하여'가 누구보다 강도높게 강대국의 정치적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해왔던 촘스키가 서브프라임에서 야기된 금융 위기가 전세계적으로 가시화 되고 있던 2009년 당시의 세계 정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말해준다면, 2장 '인간본성과 정치에 대하여'는 점점 심각해지는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세계적 불평등에 대하여 원래 인간이 본성이 그러하므로 아무런 대안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정치적 비관론이 득세하는 것을 앞에 두고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인지 만일 그릇되다면 어떻게 그 비관론을 관통해나갈 것인지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촘스키의 태도를 하나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정치이든 철학이든 그 무엇이든, 뭔가 진리라고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언제나 잠정적으로 유보하는 태도이다. 즉 그 어떤 이념이든 이론이든 그것이 스스로의 이성적 사유를 통하여 명확한 진리라고 인정되기 전까지는 무턱대고 진리라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오류일 수 있는 가능성까지 모두 포함하여 여타의 다른 가능성들을 함부로 배척하지 않으며 그것들 모두에게 스스로를 온전히 개방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작 그 개방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 개방까지 나아가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그 개방이라는 것이 감이 뚝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그저 입만 벌리고 넋놓고 있는 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촘스키에게 그 '개방'이란 하나의 촉발이자 결과이다. 촘스키는 지식인의 의무란 무엇보다 자신의 이성을 최대한 사용하는 것이라 말했는데, 바로 그렇게 자기 이성의 사용을 촉발시키는 계기이자 그렇게 이성을 최대한 사용한 결과가 또한 개방인 것이다. 즉 촘스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주어진 개념이나 사실이 진리인지 아닌지 따져보는 것, 그 것 자체이다. 한 점 얼룩도 없는 종국적인 진실을 찾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자기 스스로 이성을 사용하여 끝까지 의심해보고 적극적으로 다른 가능성까지 타진해 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촘스키가 보여주는 모든 잠정적 유보의 핵심인 것이며 그것을 통한 모든 가능성에로의 개방이란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하여 타진해 보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이든 섣불리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암묵적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앞사람이 성큼성큼 건너갔더라도 자신의 머리로 직접 살펴보고 두들겨 보지 않고서는 돌다리를 섣불리 건너가지 않는 사람. 그가 바로 촘스키이며, 촘스키는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촘스키에게서 데카르트의 그림자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촘스키의 태도는 확실한 사실들로만 이루어진다고 흔히들 여겨지는 과학 앞에서라면 과연 어떨까?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도출된 과학적 사실과 이론 앞에서도 스스로의 이성을 통한 검증이라는 촘스키의 태도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브릭몽은 바로 이 의문을 마지막 3장 '과학과 철학에 대하여'에서 풀어나가며 그를 통해 더욱 확실하게 보여준다. 즉 아무리 과학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또한 그것이 아무리 권위있는 전문가의 견해라 하더라도 촘스키는 스스로의 이성을 끝까지 사용하여 납득할 수 없는 것이면 받아들이지 않으며 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을 가능성을 향해 항상 스스로를 열어놓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렇게 촘스키는 한결같다. 달리 말하면 그 어떤 것이든 무엇보다 먼저 제 머리로 그 타당성 여부를 생각해보는 것을 최우선시 한다. 그는 전통적인 믿음이든, 공식적인 견해든, 일반적인 상식이든 아무것도 쉽게 수긍하거나 용납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이성이 '타당하다'라는 신호를 보내올 때까지 모든 것은 다만 의심과 회의가 당연한 잠정적 재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 우리는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는 왜 이리 자신의 이성을 과신하는 것인가? 하는.
당연히 그에겐 타당한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사회진화론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촘스키 스스로 발견한 이론이기도 한, '보편문법'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혹시 보편문법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하여 간단히 설명하자면 촘스키는 우리의 언어 습득이 오로지 외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로크가 말하는 대로 타불라 라사, 즉 빈 백지 상태에서 바깥에서 주어지면 주어지는 대로 언어를 마냥 받아들인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겐 이미 선천적으로 주어진 언어 인식과 활용 능력이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쓰는 언어란 우리 내면에 미리부터 존재하는 바로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산물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그 우리가 태어날 때 부터 가지고 있는 것을 촘스키는 이름하여 '보편문법'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지금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언어들을 낳게 한 인류 보편적이면서 선천적으로 주어진 문법이 바로 보편문법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어, 한국어, 일본어, 불어, 중국어를 비롯한 모든 언어들은 바로 그 보편문법을 활용한 양상에 불과하다. 그렇게 언어란 우리가 수동적으로 습득한 존재가 아니라 창조적 능동적으로 활용한 끝에 나온 결과물에 불과했다. 그럼으로 촘스키에게 있어 사람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보편문법이란 한 마디로 자기 스스로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결코 아무것도 없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바로 이 보편문법에 대한 믿음이 그대로 이성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즉 보편문법에 있어 세계란 것이 그저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조화롭게 창조해나가는 대상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념을 비롯하며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사변적 산물 역시 이성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촘스키에게 진리를 알아가는 방식은 무엇보다 '대화'의 형식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대화를 할 때 우리들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또 거기에 대해 나는 어떻게 응답을 해야 할지 항상 세심하게 살피고 최대한 이성을 사용하여 생각해보곤 하지 않는가? 바로 그것이 촘스키의 방식인 것이다. 이렇게 이성을 통한 참여가 무엇보다 대화의 형식을 띠게 되므로 브릭몽 역시 권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이성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을 단적으로 정의하자면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도 하도록 만드는 강요적인 힘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권력은 타인의 의지에 반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힘이다. 권력은 말하는 입만 있을 뿐, 들으려는 귀는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권력은 모노로그, 즉 독백이다. 그것은 권위로 무장하고 강요만 하는 독백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사유를 통해 납득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이성은 권력을 다만 대화의 상대방으로 만들어 버린다. 대화란 어디까지나 대등한 관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렇게 이성이 권력을 대화의 상대방으로 만든다는 것은 권력에게서 권위를 벗겨내고 대화에 참여하는 이성과 동등한 존재로 만든다는 것을 말한다. 권력은 오로지 우월한 존재로서 지배할 수 있을 때라야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성이 대화의 상대방으로 참여시키는 순간 권력은 더 이상 권력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촘스키는 그 자신의 태도로써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 이성이 권력에게 맞설 수 있는 무기가 되는지, 그리고 스스로 이성을 통해 사유한다는 것이 어째서 의무여야 하는지 말이다.
보는 쪽에서 왼쪽이 노엄 촘스키이고 오른쪽이 인터뷰한 장 브릭몽이다.
들뢰즈는 현대화의 진전을 무엇보다 사유의 마비로 정의했다. 사회주의 몰락과 더불어 더욱 하나의 이념으로 동일화되어 버린 세계는 사람들마저 공장에서 똑같은 틀에 찍혀 생산되는 기성품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갔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근대가 정립될 때만 해도 내가 보다 자유로워지고 그만큼 해방될 수 있다는 긍정적 신호였지만 이제는 오로지 고립과 패배의 예감만 잔뜩 드리우는 불안의 근거가 될 뿐이다. 아웃사이더는 한 때 낭만적 이상의 하나였으나 이제 사람들은 아웃사이더가 되기를 두려워한다. 그렇게 생각이든 패션이든 사는 모습이든 유행에 따라가려 애쓰고 남과 같은 모습, 남과 같은 생각을 하려 한다. 이성이 사유가 아니라 그저 살아가기 위한 단순한 생존 도구가 된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전혀 행복하지가 않다. 행복해지기 위해 남을 따라 잡으려하고 남과 같아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오히려 더욱 불안하고 우울하기만 하다. 세상이 동일화되면 될수록 어쩐지 행복이란 것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다. 세계 최강대국이자 세계를 하나의 이념으로 동일화시킨 선봉장인 미국이 행복지수에 있어 또한 세계 최하위라는 것은 여기에 대한 단적인 상징이지 않을까!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너무 단순화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모방할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존재나 권위에 기댐이 없이 오로지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것만이, 그 고유의 가치를 기반으로 자신의 삶을 세워나가는 것이 유일한 행복의 창구라는 말은 아닐까? 그러므로 더욱 사유란 의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닐런지. 물론 촘스키적 태도를 견지하자면 이 말 역시도 그저 당신 스스로의 사유를 촉발할 하나의 계기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는 당신이 탐정이라면 풀어야 할 미스터리를 위해 우연히 주어진 단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떨까?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시작해 보는 것이.
과연 스스로의 이성을 통한 사유가 정말 행복을 주는지 아닌지 검증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행복이란 개념 자체가 굉장히 주관적인 것이라 그 평가를 어떻게 적합하게 할 것인가 의문이 남는다. 결국 우리들은 다시 파스칼의 내기로 돌아가게 된다. 이 경로를 브릭몽은 예측했던 것일까> 그래서 아예 부제로도 썼던 것일까? 아무튼 브릭몽은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촘스키가 말한 '파스칼의 내기'를 이렇게 인용해두고 있다.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면, 그래서 체념하고 소극적으로 처신하면 최악의 결과를 좌초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면 상황은 개선될 수 있습니다."(P.6)
중요한 건 희망이다. 실천이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길이 있어서 사람들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아가서 만들어지는 게 바로 길이다'라는 말 그대로이다. 당신의 사유가 궁극적으로 당신에게 좋은 것을 주고 상황을 개선시키리라는 것을 믿고 거기에 내기를 걸고 직접 해 보는 것. 그 뿐이다. 사랑과 헤엄의 공통점은 뭘까? 빠져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닌가. 사유 역시도 그러하다. 단순하면서도 소박하지만 이것이 촘스키의 진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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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라는 이름은 익히 들어보았으니 그의 책을 어렵다고 생각하거나 처음 접하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촘스키는 매우 유명하고 많은 독자들에게 읽힌다. 촘스키는 어렵지 않다.
그의 주장은 단순, 명쾌하며, 그의 책은 어떤 독자든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을 사용한다.
이 책의 원제는 "Reason vs. Power: Pascal's Wager, An interview with Jean Brincmont"이다. 언뜻 길어보이지만, "이성 대 권력: 파스칼의 도박(내기)" 장 브릭몽 교수가 촘스키 교수와 나눈 두 번의 서면 대담을 한 내용을 세 장에 걸쳐서 정리한 책으로 1장은 2009년, 2장과 3장은 2001년에 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이 두 교수의 특징은 두 분 다 정치를 전공하거나 정치절학을 전공한 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촘스키는 대단히 유명한 언어학자이며, 장 브릭몽은 벨기에의 이론 물리학 교수이다. 그러나, 이 두 분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두 분 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문제점에 관심을 갖고 비판하는 실천적 행동주의자라는 것이다.
첫번째 장: 남용되는 권력에 대하여
" 효율적인 시장과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신화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앞장서서 권장했지만, 정작 그들은 그것을 그대로 믿을만큼 어리석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국가의 지원에 크게 의존합니다" (책 14-15쪽")
촘스키는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국가와 부자, 권력자들의 방식을 비판한다. 금융공동체의 경찰이라는 IMF는 시티그룹을 회생시키고, 신케인즈주의는 실패한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 것은 국가나 지배계급이 아니라 참여경제이다. 노동자들이 직접 생산과 경영에 참여하는 방식만이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며, 진보적 발전 가능성을 위하여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개선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강대국이 소위 '보호책임'이라는 미명하에 내정 불간섭주의를 위반하고 다른 국가에 침략한다면 이는 잘못된 범죄라는 그의 주장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촘스키가 세계화와 강대국의 패권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와 신케인즈주의의 표리부동함을 비판하는 내용에는 공감이 가는 점이 많다. 가난한 자이든 약소국이든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실천하고 행동해야 하지만, 그 길은 멀고 험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두번째 장: 인간 본성과 정치에 대하여
" 타인을 향한 연민과 타인의 행복에 대한 염려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아담 스미스, 에이비드 흄)" (44쪽)
생득론을 주장하는 촘스키는 인간의 본성은 동정심이라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세계는 너무나 큰 불평등과 이기심과 자유시장의 문제점으로 인해 고통받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혁명이나 투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촘스키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기 보다 사유를 통한 진리를 탐구하는 편을 선택한다. 섣부른 판단이나 대안은 금물이다.
세번째 장: 과학과 철학에 대하여
" 타인을 향한 연민과 타인의 행복에 대한 염려가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아담 스미스, 에이비드 흄)" (44쪽) 촘스키는 논리실증주의자이다. 그는 과학의 논리적 분석방법을 철학에 적용하여 합리적인 조사방법을 활용하고자 한다. 그가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른 사회과학을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하다. 촘스키는 대담을 통해 세계의 금융위기, 세계화와 전쟁으로 인한 문제들에 대한 서방 강대국들과 힘과 부를 지닌 권력자들을 향해 예리한 시각과 비판을 드러내며, 특히 서방강대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한다. 우리는 촘스키의 시각을 통해 세계의 사회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게 되고 사고의 폭을 넓히게 된다. 촘스키는 최근의 세계의 이슈들과 그로 인한 변화와 개선, 앞으로의 방향등을 통해 희망적인 믿음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촘스키의 책은 어렵지 않다. 이 책뿐 아니라 다른 책들도 그는 대담 방식을 선호하며 권력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며, 군대도 부도 무기도 경찰도 힘도 없는 지식인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이성이므로 이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희망을 가지고 개선을 위한 참여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명확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지만, 사유가 중요함을 알려준다. 사유를 통한 진리 탐구..그 안에 잘못된 세계의 질서와 권력의 남용을 치유할 진리와 그것을 실행할 이성은 작동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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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Raison Contre Pouvoir 부제 - 지식인은 왜 이성이라는 무기로 싸우지 않는가 저자 - 노엄 촘스키, 장 브릭몽
언젠가도 살짝 말했던 것 같지만, 난 상당히 귀가 얇다. 그리고 얼마나 가벼운 지, 아주 팔랑팔랑 날아다닐 정도이다. 특히 유명한 누가 말한 거라고 하면, 100%는 아니지만 반 정도는 믿는 편이다. 그런데 웃기게도 그러면서 동시에 ‘그건 그쪽 생각이지요.’라고 빈정대기도 한다. 물론 속으로만. 대놓고 말하기엔 난 너무 소심하고 속물적인 인간이다.
어쩌면 익명성을 핑계 삼아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댓글을 달고 사라지는 족속들과 비슷할 지도 모르겠다. 차이를 따진다면, 난 속으로만 생각하고 그들은 기록을 남긴다는 것 정도? 아니면 내 말에 대한 확실한 증거도 없고, 그러니까 증명하기도 싫고, 게다가 논리적으로 내 의견을 전개할 능력이 없어서 혼자서 꿍얼대는 불평주의자일수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를 보았을 때, ‘아, 이 사람의 말에 그냥 훅하고 넘어가겠구나.’라는 생각이 팍 들었다. 노엄 촘스키는 서점에 가면 아주 많이 볼 수 있는 이름이다. 그는 두꺼운 책 표지에서 안경을 끼고 카리스마 있는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책장을 넘기면 어쩐지 어려운 용어가 막 튀어나와서 내 혼이 안드로메다로 피신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다행히도 이 책은 얇았다. 거기다 크기도 작고. 어머나, 이건 행운이야! 책을 받자마자 안도의 탄성이 절로 나왔다. 서점에서 본 다른 책들에 비하면,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처음에는…….
책은 두 저자의 대화로 이루어져있다. 장 브릭몽이 질문을 하면, 노엄 촘스키가 그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내용이었다. 서면 대화라고 하니, 질문과 대답이 다 심사숙고해서 나온 것이리라 생각했다.
구성은 총 3장으로 되어 있다.
1장 남용되는 권력에 대하여 2장 인간 본성과 정치에 대하여 3장 과학과 철학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강대국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그에 침묵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강대국이지만 툭 까놓고 말하면, 미국이다. 물론 영국이나 다른 나라들도 언급하지만, 주요 대상은 미국이다. 어쩐지 그는 유럽에는 관대하고 미국에만 깐깐한 것 같다. 그 밥에 그 나물일 텐데 말이다.
1장에서는 침묵하는 사람들로 인해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미국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 대한 그들의 지나친 간섭을 비난한다. 그리고 2장에서는 인간이 이성적이지 않다는 브릭몽의 5가지 이유에 대해, 촘스키가 반론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3장은 정신과 육체 그리고 진화론에 대한 그의 입장을 얘기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는 상당히 인간의 이성을 믿는 낙관주의자라는 인상이 들었다. 인간의 이기심은 본성이 아니라는 그의 말에서 성선설을 주장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득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사이코패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전체 지구인간의 수에 비하면 낮은 비율이라, 언급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몇몇 소수의 예를 일반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믿고 있는 이성을 가진 인간의 현실을 보니, 과연 이성이라는 것이 뭘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이성과 지식과 논리와 지성은 동일하지 않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현실과 이성이 충돌하면, 결국 다수의 사람들은 편함을 선택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즘 사회가 이 모양인 것이다. 지식인들이라는 사람이 부패와 권력 남용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게 다 그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화가 나면서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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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노암 촘스키'의 책을 드디어 만났다. 그의 많은 저서들이 있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았는데 이번에 만난 [권력에 맞선 이성]은 부담없이 만날 수 있었다. 많은 페이지가 아니라는 점이 크게 한목 했다. 150여 페이지 정도여서 손에 들면 마지막 까지 앉은 자리에서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오랫만에 유익한 독서의 시간을 갖게 해준 책이다.
이책이 출간하게 딘 배경은 공저자인 장 브릭몽 때문이라고 할수있다. 장 브릭몽은 불의한 권력을 비판하며, 미국의 대외정책을 누구못지않게 강력하게 비판하는 학자로 유명한 노암 촘스키의 다채롭고 폭넓은 생각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생각에 그를 인터뷰 하게 되면서다. 이 책에 실린 인터뷰는 2001년의 인터뷰와 2009년에 이루어진 두번의 서면 인터뷰를 엮은 것으로 저명한 지식인들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기 힘든 격식과 예절을 지키는 인터뷰가 아니라 저명한 촘스키의 대한 의견에 반론들로 가득차 있기에 나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지성인들에게 이성이라는 무기는 유일한 전투수단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이성인들은 이성이라는 무기를, 무기로 생각하지 않고 쉽게 포기한다고 한다. 이건 미국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들이 마찬가지 일것이다. 먼 나라를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만 봐도 그렇다. 지성인들이 나서야 할때 나서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기에 이 책이 더 끌렸는지 모르겠다.
촘스키는 현재의 사회,경제적 시스템과 정치 시스템을 규탄하는데 더이상의 이유가 필요없을 지경이라고 하며, 서양 강대국들이 습관적을 국제 법을 위반하고 세계의 여론을 무시하면서 범죄를 저지르지만 지식인들은 무관심을 보이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데, 지식인은 권력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꼬집는다. 촘스키는 많은 글들을 통해 실직적으로 대안들을 제시하고 직접적인 행동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국내도 촘스키 같은 권력에 비판하고 실직적인 행동을 하는 지성인이 있었으면, 아니 지금까지는 없었을지 몰라도 앞으로는 언제될지는 모르겠지만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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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이며 철학자인 노엄 촘스키의 사상과 글들은 여러 사람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선생님이 영문법을 가르치면서 촘스키를 여러 번 언급하셨습니다. 그 때, ‘놈 촌스키’라고 들어서, ‘촌스러운 놈’이라고 연상하며 이분의 이름을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탁월한 언어학자이지만, 그가 많이 인용되는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접 참여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한국의 촛불 운동에 지지를 보내고, 한진중공업의 크레인 농성에도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MIT 학생들의 강남스타일 유튜브에 등장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유명하한 분인데, 그의 책을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접하는 책, 「권력에 맞선 이성」도 두 번의 서면 인터뷰를 요약한 대담집이라니, 부끄럽습니다. 그래도 이 책, 읽기를 잘했다 싶습니다. 이 책은 노엄 촘스키가 전 세계의 사회, 정치, 경제, 역사, 문화 등 다방면에 지대한 관심과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살짝 보여줍니다. 그리고 언어 논리 철학자답게 명쾌한 해석과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금융위기와 세계화’의 문제를 대담하면서, 정부가 금융기관의 이익을 해치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는데, 이유는 정치지도자가 금융 산업의 막대한 지원으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는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권장하지만, 자신들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융기관을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수조 달러를 투입하지만, 영양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겨우 10억 달러는 들였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2015년까지 극도의 빈곤을 없애려는 목표는 재원의 부족이 아니라, 관심 부족 때문에 달성되지 못할 것이라고 봅니다. ‘전쟁’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미국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미국은 소위 ‘보호책임’ (responsibility to protect)이란 미명 아래 국제법을 무시하고 많은 나라의 내정에 간섭했습니다. 그는 지식인은 권력을 비판하고 자신의 이론에 따라 대안을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대담집의 타이틀을 「권력에 맞선 이성」이라고 붙인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노엄 촘스키의 사상과 삶을 요약한 말이니까요. 이 책 2장에서 다룬 ‘인간의 본성’에 관한 담론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인간은 불합리한 믿음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지만, 이성에 충실하기도 합니다. 우두머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경향이 있지만, 때로 추종하기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억압을 내재화하기도 하지만, 저항하기도 합니다. 이기심도 많지만, 타인을 향안 연민과 타인의 행복에 관심을 갖기도 합니다. 따라서 촘스키는 낙관주의적 관점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조언합니다. 희망을 포기하면 최악의 결과를 자초하는 셈이니, 희망을 가지고 희망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글들은 기득권자들과 권력자들에게 매우 비판적이지만, 인간 사회의 성숙과 행복을 희망하는 자들에게 매우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의 책들이 얼마나 번역되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지식인의 책무」,「불량국가」,「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경제민주화를 말하다」,「세상의 권력을 말하다」,「점령하라 시위를 말하다」,「우리가 모르는 미국 그리고 세계」,「실패한 교육과 거짓말」등등. 너무 많네요. 관심 주제부터 시작해서 한 권씩 사서 읽으며 노엄 촌스키를 사숙(私淑)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다 이 책 덕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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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교수의 이름은 다들 한번씩 들어봤을 것이다. 의미없는 전쟁을 강행했던 부시정부를 향해 대놓고 쓴소리를 했다던가, 일본의 쇼와텐노를 향해 진정한 전쟁범죄자라는 발언을 했다던가, 며칠전 이야기지만 MIT생들이 만든 강남스타일 패러디 동영상에 출연해 한국어로 '오빤 촘스키 스타일'이라 했다던지.....(사실 우리에게 그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학자로 잘 알고 있지만 그가 비판하는 대상은 미국뿐만이 아니다ㅎㅎ) 이 분은 저명한 언어학자이지만, 상아탑에 박혀있는 대부분의 학자들과는 크게 다르다. 나 역시 처음에는 촘스키교수가 사회평론가나 사회운동가인 줄 알았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정작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를 것이다.(......라고 나만 무식한 것이 아니라 믿고 싶다.) 이 책 '권력에 맞선 이성'은 촘스키교수와 장 브릭몽과의 대담집을 엮은 책이다. 2009년에 이루어진 인터뷰내용을 엮은 1장 <남용되는 권력에 대하여>에서는 금융위기와 세계화, 사회 변화와 그 주역, 추악한 전쟁, 무관심한 혹은 무기력한 지식인을 주제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으며, 2001년에 이루어진 인터뷰내용을 엮은 2장 <인간 본성과 정치에 대하여>, 3장 <과학과 철학에 대하여> 에서는 인간 본성, 반세계화 운동, 거짓 프로파간다, 정신과 육체 등을 주제로, 촘스키교수의 정치적 견해가 아닌 사회전반에 관한 그의 의견과 그가 가진 철학에 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2009년이면, 미국 월스트리트발 경제 위기가 차츰차츰 전 세계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된 해이다. 하지만 어딘가 낙관적인(나는 방관적인 이라 믿고 싶다.) 전망이 팽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이 경제위기라면 대유럽, 대중국 수출을 늘리자 라며 우리나라도 낙수효과운운하며 내수경제의 기반을 새로 다지기 보다는 수출위주의 정책을 더욱 강경하게 밀고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3년전의 그 누구도 그리스가 파산하고, 유럽 각국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그 결과 EU가 붕괴될 위기에 처해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3년 전의 인터뷰어가 촘스키에게 내던진 질문의 답들이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하는 지금, 2009년의 인터뷰내용을 읽는 다는 것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특히, 1930년 대공황 당시에도 대규모 시위는 수년 후에나 있었다고 말하는 그의 답변에, 작년의 occupy wallstreet운동이 생각나 순간 오싹하기도 했다. 우리는 왜 신문과 뉴스를 보는가...군대와 정치얘기를 싫어하는 많은 여성들처럼, 그냥 연예뉴스나 스포츠뉴스만 보고, 드라마만 보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좀 더 편해지지는 않을까...(사실, 알고보면 요즘 정치뉴스가 왠만한 코미디 프로그램 뺨 칠 만큼 웃기기는 하다. 정치가 장난인 줄 아는 몇몇분들로 인해...) 어째서 수많은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정치얘기를 하다가 무력한 자기자신을 탓하며 습관처럼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하는걸까. 촘스키는 책의 서두에서 '우리가 희망을 포기하면, 그래서 체념하고 소극적으로 처신하면 최악의 결과를 자초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면 상황은 개선될 수 있습니다.'라 말한다. 오늘은 빼빼로 데이이다. 나는 오늘 하루도 혼자 책을 읽고 시간을 보내다가, 인터넷 뉴스를 보며 욕을하고 좌절하다가 저녁을 먹고 그냥 잠들겠지. 하지만 오늘은 간만에 페이스북 업데이트를 해야겠다. '장군님 빼빼로 주세요'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