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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켜지지 않은 어둠의 등불처럼 더 이상 찾는 이 없는 온기 잃은 식탁처럼 어떤 기억은 기억을 위해 기억을 먹고 산다.
400쪽 남짓한 책 속엔 그가 찾아내어 불러낸 치열한 침묵의 수도원과 순수한 고요가 아름다운 자연 경관, 그 속에 원래부터 함께 있었던 듯 어울리는 사람들의 향취가 배어있다. 저자가 찾은 알프스의 자연은 어느 곳에 카메라를 들이대어도 달력 사진 같은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빛은 순간에 떠나가고 어둠은 천천히 떠나간다. 나는 이런 어둠이 좋다. 천천히 젖어들고 만져지는. 책을 볼 때도, 활자가 보일 정도로 최소한의 조명만을 밝혀둔다. 자연광이면 더 좋지만, 자연 어둠도 좋아한다. 어둠은 침묵이니까. 소란스러운 것들, 시끄러운 장면들로부터 나를 감춘다. 그렇게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안심이 되고, 내 안의 나를 더 세심하게 바라볼 수 있다. 비로소 안식이다. 작가의 사진을 통해 침묵을 보았다. 사진 속의 어둠을 통해 안식을 찾았다. 작가의 말대로 나 역시 ‘셀 수 없는 날을 혼자였다’고 고백하지만 철저히 혼자 남는 것이 즐거움이 될 수 있고, 축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의 수도원 기행을 통해 배운다. 수도원 둘러 늘어선 묘지를 지날 때 먼저 간 존재들이 말을 건다. ‘영원히 혼자이고 만다고. 그러니 미리 혼자일 필요는 없다고.’ 모나쿠스 옴니버스. 혼자이되 혼자가 아닌, 홀로 존재하되 함께 엮어가는 존재들. 어떤 여행이건 익숙한 것과의 결별, 낯선 곳으로의 떠남은 작은 죽음이다. 익숙한 삶으로부터의 이별은 때론 슬픔, 때론 후회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조상은 원래 유랑민이었기에 길 위에서의 삶과 죽음이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작가는 왜 하필 수도원을 찾아다녔을까? 수도원 여행은 단지 수도원을 찾아가는 공간 탐색의 여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목표이고 좌표일 뿐 수도원을 찾아간 여행이었다기보다는 수행이 되어버린 여행이었다. 작가는 알프스 산을 돌아, 베네치아의 수로를 건너며 수백 년의 침묵 속에서 안식을 허락한 수도원의 회색빛 그림자 속에서 전율했고, 아무도 없다는 데서 편안함을 느꼈다. 사랑하는 것들이 내 주변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이 밀려왔다. 그리하여 지금껏 한 번도 주님을 찾은 적이 없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그 분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문을 찾게 해 주셔서, 어둠으로 안내해 주셔서, 특히 이 고요를 느끼도록 허락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작가의 수도원 기행을 따라가며 부러운 것이 있었다. 그 곳의 사람들은 자연과 인간이 마치 한 몸인 듯 서로에게 두 팔 벌려 날 것 그대로의 자연으로 방치해 두었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것에 최소한의 손길만을 허락한 그들의 심미안에 비하면, 자연 위에 각종 캐릭터니, 벽화 같은 것들로 덧씌워 인간이 창조한 아름다움이라고 우기는 우리나라 지자체의 무지함은 실소를 머금게 한다. 누군가 말했다. 디자인은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이라고.. 지금에 와서 고백하자면, 난 이 책의 서평을 쓰기 싫었다. 책의 구석구석 침묵으로, 절제된 언어로 고요함을 보여준 이 책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 왠지 책이 주는 침묵의 안식에 반反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색깔을 최대한 자제하고 싶다. 이 책이 주는 고요한 회색이 너무 강렬하면서도 평화롭기 때문이다. 지금 삶이 너무 시끄럽다면, 이 책과 함께 허물어진 수도원 안 뜰에서 침묵으로의 여행을 떠나보길 권한다.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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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앞에 두고 있다. 침묵의 여행. 이 책의 제목을 보고, 다큐멘터리(영화) "위대한 침묵"이 떠올랐다. 말이 없는 화면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갔었다. 한편으로는 정말 답답한 영상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말이 사리지게 되면 어떤 풍경이 될지를 보여주었다. 삶에서 대화나 말이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종교인의 성당순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저자는 기독교나 천주교를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왜 이역만리의 성당을 택하고, 그 길을 떠났을까? 침묵의 여행은 글보다는 사진으로 많은 것을 보여준다. 인간에게 사진이라 무얼까? 나에게 사진은 무얼까 인간은 순간을 강렬하게 받아들이지만, 그 기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글과 책이었고, 그 장면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사진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인간의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흑백사진들은 빛과 어둠의 대조를 이루는 작품이 다수를 차지한다. 빛이 없다면 어둠이 없을까? 아니다 어둠은 빛이 없어도 존재한다. 어둠 속에 빛이 양념처럼 가미되는 사진들, 느낌이 그렇게 밝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어둡지도 않다. 차분함이라고 생각된다. 종교의 생각들이 침참된 깊은 침묵, 그것은 신에 대한 사랑이며, 나에 대한 사랑이었으리. 수도원, 성당 그리고 길 위에서 그는 많은 장면들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것은 종교를 떠나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느낌이 아닐까? 수도원 여행, 모나스트리가 혼자라는 뜻이었다니.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사원들을 대개 모나스트리나 템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혼자가 되기 위해 그곳으로 간 사람들, 그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1120년의 엥겔베르크(천사의 산)수도원에서부터 작은 시골마을에 있는 수도원까지, 프랑스와 스위스 등지를 거쳐간다. 작가는 모든 여행은 백일몽 같은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여행은 머리 속에 조금이나마 남아있으니,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아닐까? 거기다 사진을 더하면, 더 오랜 기간 우리에게 그 시절, 그 순간을 선물로 주는 것이리. 세월은 흘러가고, 나도 변해가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신성이 사라진 개방수도원, 친대중적인 수도원교회, 아직도 그 시절의 영화를 간진한 채 굳건히 서있는 수도원들. 사진은 빛과 어두움이리, “세잔은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존재를 투영했고 오브제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질서와 관계를 옮김.” 이 얼마나 광오한 말인가? 우주를 캔버스에 옮겼다. 저자는 수도원의 깊은 빛과 어둠에 집중한다. 그의 사진은 어둠이다. 그 어둠 속에 빛이 있다. 세상에 빛의 그림이 아닌 것은 없지만, 그의 사진은 빛이 휘 둔 그림같이 어둠과 밝음이 대비를 이룬다. 빛이냐 그림자냐? 사진과 글로써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사진첩 같은 책, 글도 저자의 생각을 잘 표현하고 있지만, 사진이 더 그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누구든 지치고 힘든 이들, 사색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곳이 수도원이다. 나만의 수도원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는 수도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순간을 찾기 위한 여행 속에 자연과 마을은 밝게 펼쳐지고, 수도원의 영혼이 깊어지는 어둠 속에 빛의 구원이 찾아온다. *사진이 주를 이루기에 직접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판형이 좀 작아서 사진의 크기가 좀 더 크면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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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산에 큰 바위 근처에는 도 닦는 분들이 많이 있답니다. 절이나 암자에서 수행하는 분 혹은 무당 등 수도하는 분들이 많이 기거한다고 합니다. 풍수지리상 큰 바위에는 많은 기가 흐르기 때문에 그 기를 이길 수 있는 도인, 수도승들만이 살 수 있고 그 기를 활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알프스라는 거대한 산맥을 둘러싼 스위스, 프랑스,이탈리아에도 당연히 수도승들이 살고 있겠죠. 유럽이니 수도승이 아니라 카톨릭 수사들이겠군요. 사진작가 진동선님이 그 곳으로 사진 여행 아니 수행을 다녀왔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침묵으로 기도하고 침묵으로 세상에 외치는 그곳 수도원에 다녀 왔습니다. 알프스를 끼고 있는 주요 4개국 가운데서 독일을 뺀 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를 선택해 알프스에서 반경300km내에 있는 주요 도시의 수도원을 찾아가기로 막연하게 정했다. 완전 봉쇄수도원인지 준봉쇄수도원인지, 완전개방수도원인지 준개방수도원인지 사전 지식도 전혀 없는 채로 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작가는 26군데의 수도원을 하나 하나 찾아가서 풍경과 침묵을 카메라 렌즈에 담아와 우리 눈앞에 보여줍니다. 사진을 보면 저절로 조용해 지면서 명상에 잠기게 됩니다. 카톨릭의 수도원은 불교에서의 수행하는 암자와 비슷합니다. 민가속에서 포교를 하는 일반 절이나 성당이 아니라 , 속세에서 떠나 기도와 수행을 하는 공간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최근에는 일부 엄격한 규칙아래에서 출입을 허용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벗어나 신과 마주하면서 노동과 기도로 일생을 보내는 분들이지요. 어떤 수도원은 대침묵기간이 있어 같은 수도사들끼리도 일체의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신하고만 대화를 하게 되지요. 그런 수도원에 가면 그것도 역사가 몇백년 된 공간에 가게 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게 될까요? 지금도 확신할 수 없다 그만 떠나가라는 손짓이었는지, 어서 따라오라는 손짓이었는지... 따라가지는 않았으나 결국 나는 저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았다. 천년 수도원이 품은 빛과 어둠을 지독한 고요 혹은 속삭임을. 컴퓨터, 스마트폰, TV, 거리의 음악 소리로 어느 시대보다 많은 소리로 가득찬 세상을 사는 우리는 정말 침묵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나쿠스 옴니버스. 혼자이되 혼자가 아닌, 홀로 존재하되 함께 엮어가는 존재들. 찰칵하고 삶의 마디마다 뎅거덩 부러지는, 부러지면서 다음 것으로 옮겨 타는 모나쿠스 옴니버스. 책을 덮으면서 이 좋은 곳을 다녀왔으면서 아름다운 자연과 수도원을 컬러로 안 보여주고 죄다 흑백사진으로 보여주나 투덜대고 있으니 작가가 조용히 말합니다. 어둠을 통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법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법 세상을 사랑하는 법 P.S. 평소에 책 읽을 때 줄 치면서 읽는데 이 책은 줄은 커녕 구겨질까 조심스럽게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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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수도복이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이 책은 검색어 '침묵'으로 만났다. 유심히 보지 않았다면 무슨옷인지 몰랐을 것이다. 부제목을 보고서야 수도원 기행문이라는 것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수도원은 수사님이나 수녀님이 일정한 규율 아래 공동생활을 하면서 수행하는 곳으로 '침묵' 그리고 '고요'가 존재하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내 안에 침묵과 고요가 필요했는지 책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음을 느꼈다. 하루를 보내다 보면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누군가와 많은 말을 주고 받게 된다. 오고 가는 말이 서로에게 항상 유익이 된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한 살 씩 나이를 먹을 때 마다 나에게 늘어가는 것은 침묵보다는 불필요한 말이다.
[신약성경 마태오 복음서] 5장 37절에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란 말씀이 떠올랐다. 불필요한 말과 필요한 말을 가려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겠다. 또한 침묵이 필요할 때 침묵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본다. 저자는 여러 수도원을 여행하면서 침묵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
어떤 여행이건 익숙한 것과의 결별, 낯선 곳으로의 떠남은 작은 죽음과 같다. 편안했던 삶과 익숙했던 삶으로부터 이별하는 순간부터 작은 죽음이다. 그 작은 죽음 속에서 예기치않게 아파하기도 하고 때론 슬퍼하기도 하고 때론 떠나오기 직전의 시간과 이미 떠나온 시간에 대해서 원망하기도 한다. 44p
어느 신부님의 특강 말씀이 생각났다. "여행은 죽음과 탄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낯선 곳으로의 떠남은 죽음이요, 새로운 곳에서의 만남은 탄생입니다."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 것은 큰 경험이다. 죽음과 탄생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출산 등이다. 그렇기에 여행은 사람을 성장하게 만드는 것 같다. 모든 일정이 계획되어 있는 관광상품 보다는 저자처럼 여행을 직접 계획하고 준비한다면 더더욱 그렇지 않을까?
수도원 여행은 단지 수도원을 찾아가는 공간 탐색의 여정이 아니다. 수도원이라는 공간은 하나의 목표이고 좌표일 뿐 수도원 자체가 목적이나 의미인 것은 아니다. 매일 부딪히는 낯선 삶에서 아파하고 상처받고 위로받는 과정, 그리고 여행 속에서 내 안으로 품게 되는 성찰과 참회 속에 수도원이라는 장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 여행을 다시 돌아보니 '수도원을 찾아간' 여행이었다기보다는 '수행'이 되어버린 여행이었다. 94p
저자가 밝힌 수도원 여행의 목적은 '여행'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수행'에 가깝다. 저자의 글에서 느껴지는 것은 신을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적 존재와의 일치를 점차 추구해 간다는 점이었다. 그래서일까? 이어서 나오는 저자의 고백은 마치 신앙 고백문처럼 들렸다.
천년의 시공에 전율했고, 아무도 없다는 데서 편안함을 느꼈고, 오직 사랑하는 것들이 내 주변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이 밀려왔다. 그리하여 한 번도 주님을 찾은 적 없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그분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문을 찾게 해주셔서, 어둠으로 안내해주셔서, 특히 이 깊은 고요를 느끼도록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이것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수도원 여행의 의미는. 356p
뮈스테어의 성 요한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저자는 그동안 수도원을 여행했던 의미를 찾는다. 무신론자인 저자가 이 수도원에서 보고 느꼈던 것을 유신론자인 내가 느껴보고 싶을만큼 궁금했다. 무엇이 저자로 하여금 신에게 감사하도록 한 것일까? 수도원의 어둠과 고요는 사진과 저자의 글로 대강 유추만이 가능할 뿐이다. 스위스에 갈 기회가 있다면 꼭 들러보라고 추천하고 있었다. 나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수도원을 꼭 가보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여행은 결국 순간이듯이 삶도 순간이다. 풍경의 '풍'자는 바람 풍風이다. 풍경은 바람 같은 것. 수도원 여행은 특별한 공간을 찾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순간을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어느새 아득하게 멀어져간 시간들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아! 삶은 순간.' 특정 종교의 공간을 찾은 여행이 아닌, 홀로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여행이라는 점에서 수도자, 수도원의 어원인 '모나쿠스monachus'인 셈이다. 378p
저자는 수도원이라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어둠과 빛에 집중하고 어둠을 찾고 어둠을 향해 찾아 들어간다. 그리고 그 어둠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고 만난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일까? 대부분의 수도원이나 성당 그리고 교회 사진은 흑백이다. 그렇다고 건물의 전체나 구석구석을 시원하게 자세히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로지 저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의미있는 것들만 담겨져 있다. 저자에게 수도원은 공간을 찾는 여행이 아닌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여행이기 때문이다.
항상 사진은 화제이고 저자의 글은 화제에서 비롯된다. 스위스에서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26개의 수도원 여행은 풍경에서는 컬러 사진으로, 수도원에서는 흑백 사진으로 표현된다. 수도원에서 수도원으로 이동하다가 일탈(?)을 하기도 한다. 생레미드프로방스에서 고흐를 만나러 가고, 노스트라다무스와 사드 후작의 집을 방문하기도 한다. 엑상프로방스에서는 세잔을 만나고,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도 한다.
저자가 담은 풍경과 마을 사진들은 참 아름다웠다. 스위스 로잔의 그림 같은 풍경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고, 프랑스의 라사라즈 마을은 풍경화 그 자체였다. 푸보의 프로방스풍 마을과 이탈리아의 베르나차 마을도 참 예뻤다. 수행과 같았던 수도원 여행에 이곳 마을들의 방문은 아마도 저자에게 수행에 도움이 되는 청량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눈을 통하여 잠시나마 '침묵'과 '고요'에 잠길 수 있었다. 삶과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여행. 그 여행이 수도원 여행이라면 천주교 신자인 나로서는 더욱 매력적인 여행일 것이다. 그 여행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나 자신과 대면하며 기도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여행이 어디 있을까? 그런 시간이 허락된다면 나에게는 진정으로 피정(避靜)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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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빛으로 이루어진 그의 사진을 보는 순간 말없이 내게 다가오는 침묵의 무게감. 어둠을 타고 내려앉는 평화의 순간을 맞닥드렸을 때 느끼는 시간은 모든것이 멈추어 버리는 듯하다.
진동선은 알스프를 중심으로 스위스와 남 프랑스, 북이탈리아등의 수도원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이름만 들어도 평화로울 것 같은 그의 여행은 아마도 자신을 찾아가는 고행의 길이었던 것 같다.
흑백으로 처리된 사진은 빛과 그림자의 음영으로 인간의 깊은 내면을 감추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게된다.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내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일이다.
마치 유령의 도시처럼 텅빈 거리의 생모리셍트리베, 하루종일 걸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은 거리 생레미드프로방스길, 고흐의 애잔한 눈길과 마주칠 것 같은 생폴 정신병원, 건물자체가 그림과 예술이 되는 푸보의 프로방스풍거리,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정감있어 보이는 친퀘테레, 아름다움이라는 표현이 적당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돌아 진동선이 마지막으로 들른 장크트칼렌 수도원을 따라 걸으며 굳이 글로 표현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사진을 보며 그와 함께 공감하게 된다.
'여행은 결국 순간이듯이 삶도 순간이다. 풍경의 '풍'자는 바람풍(風)이다. 풍경은 바람 같은 것, 수도원의 여행은 특별한 공간을 찾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순간을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P378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여행을 이제는 알것 같다.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 내가 그곳을 가는 것은 특별한 공간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순간이 소중해서 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수도원의 침묵에서 찾는 어둠은 결국 밝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한 본질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모두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삶이 그만큼 녹녹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군가를 위해 참아야하고, 침묵해야하고, 때로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 복잡한 삶의 모습이 한 장의 흑백사진속에 담겨있다.
아름다운 모습과 웅장한 모습을 따라 가는 수도원을 찾는 여행에 마음과 함께 떠나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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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그 자체로 의사소통의 중요한 표현이다. 몇 년 전 나는 정독도서관 앞의 CineCode 선재에서 알프스에 있는 한 수도원의 일상을 찍은 다큐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았다. 두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영화에서는 마당의 눈을 쓸어내는 소리, 바람에 낙엽이 지는 소리, 의자를 당기는 소리 따위 외에는 아무런 음향도 없이 길게 길게 이어지던 장면을 간간히 기억한다. 그 외에도 수도사들의 기도소리가 들렸던 듯도 하지만 정확하게 기억 나지 않는다. 다만 기도 소리가 들렸더라도, 그것은 침묵의 하나로 받아들여질 만큼 어둠 깊숙히 침잠한 조용한 몸짓의 하나로 보여졌다. 수도사는 오랜 기도와 오랜 노동 끝에 문틀에 기대 앉아 마른 빵을 걸죽한 스프에 찍어먹었는데, 그 모습마저도 너무도 숭고해서 나는 숨쉬는 소리조차도 몹시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 책 <침묵으로의 여행>을 보면서, 영화 <위대한 침묵>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순서였다. 무엇보다 수도원 기행이기에 그랬고, 작가가 쫓고자 한 것이 '침묵'이였기 때문에도 그랬다. 작가는 부족한 수도원 정보때문에 알프스를 끼고있는 주요 4개국의 수도원을 무작정 몸으로 부딪힐 각오로 덤벼들 수 밖에 없었다고 적었다. 결과적으로 '무작정'의 시도는 '운명적 발걸음'을 재촉했고, 무신론자인 작가에게 '깊은 영성'을 느끼게 했다. 그것이 이 책의 의미일 것이다. 만든이에게도 보는이에게도 은연중에 깃드는 마음의 평화, 안식, 그리고 신성.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위대한 침묵>의 촬영장소인 카르투시오 수도원은 볼 수 없었다. 작가는 교회의 건축이나 조각, 그림보다는 오로지 수도원의 깊은 빛과 어둠에 집중해 사진에 담았다. 빛과 어둠은 침묵을 담보로 한다. 사진 속 수도원의 어둠을 보고있노라면 어디선가 수도사의 기도소리가 들릴 듯 하다. 책의 판형이 조금 더 컸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이유이다. 작가는 코모 호수에서 사진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다운 왜곡'이기 때문에 실제 눈으로 본 것보다 더 멋있게, 더 그럴듯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고백한다. 나는 실제로 작가 본 수도원과 알프스의 풍경을 볼 수 없기에 이 아름다운 장면들이 얼마만큼이나 왜곡된 것인지 알 지못하지만, 청량한 공기와 신록과 아찔한 매혹의 들판을 알프스에만 선물한 신의 편파적인 애정에 대한 작가의 질투를 지극한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침묵으로의 여행>을 보면서, 침묵보다는 탄성을 쏟아내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을 보며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과,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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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으로의 여행이라는 책 제목처럼 이 책은 여행기이지만, 뭔가 즐거움이나 멋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이 아닌 삶의 고통, 어두움, 고요한 부분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기입니다. 장소는 스위스의 루째른부터 시작해서 프랑스, 이탈리아로 수도원들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습니다. 주위 풍경만 놓고 본다면 스위스도 정말 아름답고 프랑스, 이탈리아도 아름다운 장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런 멋진 풍경위주는 아닙니다. 단지 고요하고 아무소리도 나지 않는 공간에서 찍은 사진들만 있었습니다. 사람이 나오더라도 수도원의 수도자나 수녀님 같은 한 사람이 나올정도입니다. 지은이도 여행을 마치며 여행하면서 고통을 느끼며 즐겁게 다녀온 여행이 결코 아니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도 간접적으로 삶의 고요하고 정적인 느낌들이 잘 전달되는 것 같습니다. 그림자 어둠과 같은 단어들이 자주 나오는 것과 같이 이 기행기 속에는 침묵과 고요한 것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여행중 기차를 반대방향을 탔다던지 하는 에피소드도 아주 약간 나왔습니다. 그리고 중세에 대한 지은이의 지식도 많이 있어서 수도원의 역사와 관련된 설명도 기행기를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유럽여행을 하면 누구나 수도원이나 종교적인 건물 한군데 쯤은 누구나 경험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을 한권 다 읽었더니 그런 장소를 침묵과 같은 느낌에 더욱 집중하여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유럽여행을 가서 수도원을 찾게 된다면, 현실세계를 잠시 벗어나 수도원의 고요한 세계로 마음이 빠져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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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으로의 여행..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에서 다도와 하이쿠, 이케바나같은 것을 배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겉보기와 달리 절대 조용한 성격이 아닌걸 아는 친구들은 그걸 왜 배우냐고 묻곤 했었다. 하지만.. 그걸 배우는 동안 시간만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나, 자연속으로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 자신을 내려놓는지에 대해서 맛볼수 있는 것들이 즐거웠다. 또한, 하이쿠를 배우면서.. 움직이는 것들, 변화하는 것들에 더 큰 관심을 두던 것에서 벗어나 그 자리를 여전히 그 대로 지키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사색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 덕분에, 알프스를 중심으로 유럽의 위치한 수도원들을 찾아 떠난 이 여행기를 읽으며.. 침묵으로 떠난 여행이긴 하지만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받는 기분이 들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수도원.. 특히, 대부분 흑백으로 이루어진 수많은 사진속에서도 그 어떤 화려한 혹은 극적인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 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받는 기분이 들었다. 가끔 등장하는 색감을 잘 살려낸 칼라 사진에, 아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구나.. 하며 눈을 뗄 수 없었다. 내려놓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채울수 있다는 말과 비슷한 느낌이다. 절제하고, 때로는 무심하게 까지 느껴지는 글임에도 참 긴 시간 동안 읽어야 했고, 어쩌면 휘리릭 넘길 수 있는 책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많은 분량의 사진을 보면서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이런 독서는 참 특별한 경험이였다. 사실.. 사진을 더 크게 보고 싶은 욕심에.. 이 책이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책을 읽는 내내 하곤 했다. 하지만 행여 사진이 구겨질새라 조심조심 넘기는 내 손길과 또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사진들을 유심히 바라보던 내 눈길을 느끼게 해준 것이 아니였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자신이 좀더 세심하고 깊이있어진 기분은 착각만이 아닐듯 하다. 왜.. 하필 수도원이였을까..? 아마도 그것은 사람이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 저자는 유럽 교회의 화려한 건축이나, 조각, 그림이 아니라 오로지 수도원으로만 찾아다닌다. 그 곳의 어둠은 정말 깊다고 한다. "어둠에 숨으면 내 안의 또 다른 눈이 나 자신을 본다" 그는 어쩌면 이 여행을 통해서 자신을 찾아나갓던 것이 아닐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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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의 사진을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장씩 넘겨가면서 사진과 프롤로그를 읽으며 매력적인 나만의 여행이 시작될거라는 예감을 할 수 있었다. 하나의 글귀들마다 저마다 혼자서 잠시 그 질문들을 다시금 받아서 대답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해주는 글들이다. 그리고 사진들이 함축적으로 의미하면서 던져주는 그 이미지에 빠져들게 된다
사진작가. 그 분의 기행에세이. 때론 수도원에 있는 분들이 떠오를때가 있다. 삶속에서 각박한 도시생활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감은 채울 수 없는 그 공간을 찾게된다. 표현할 수 없는 고요함과 신이 주는 크나큰 깨달음의 경지를 더 깊이있게 맛보고 싶을때가 뜨문뜨문 있다. 그때 떠오르는 수도원의 모습. 독자들은 조용히 그 수도원으로 함께 여행하게 된다.
한 장의 사진과 짧은 글귀들조차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그리고 더 깊은 사색으로 초대한다.
간절히 기도하며 간구하는 존재인가? 나에게 묻게되는 순간들을 사진들은 되묻는다. 이국적인 풍경을 아름답게 담은 사진들과 에세이는 어울어진다. 그리고 더 겸허해지게 만든다.
무채색으로 전해지는 풍경들은 색이 주는 아름다움 그 이상으로 매료되어가는 사진들이다. 제목과 어울어진 사진들은 어느새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세상으로 초대된다.
바쁜 일상속에서도 잠시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볼때 이 한 권의 책은 깊은 사색의 여행으로 초대해준답니다. 따사로운 햇살을 가득담은 거실에서 음악과 차와 함께 이 한 권을 넘겨가면서 더 행복해지는 오후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신을 떠나지 않는 이유를 다시금 떠올리며... 함께 침묵으로의 여행을 즐겼던 것 같다. 돌아보는 시간들과 의미있는 것들을 다시금 머리속으로 나열해보면서 좋은 책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는 것에도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였다.
더 나 자신을 낮아지게 해주는 여행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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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부터 베네치아까지 내 안의 수도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삶 속에서 ‘침묵’이란 단어를 만나기가 힘들어졌다. 아니 사라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듯 싶다. 거리엘 나가도, 카페엘 들려봐도, 심지어 집에서조차 침묵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침묵이 사라져버린 걸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침묵은 금이였던 시대에서 침묵하면 바보가 되어버리는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을 변화시킨 우리들의 잘못된 인식들이 세상을 이렇게나 시끄럽고 소란스럽게 변화시켜버린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아는 세상에서 침묵은 수도원의 수도자나 절에서 묵언수행을 하는 스님들에게 필요한 단어가 되어버린 지금의 상황이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
책의 첫 장부터의 분위가가 심상치 않다. 어둡고, 캄캄하다. 그 캄캄함 속에 갇힌듯한 분위기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 캄캄했던 부분에서 햇빛이 점점 새어 나오더니 시나브로 내 가슴속을 훤히 비춰줌에 따스함을 느낀다. 스위스의 알프스를 중심으로 엥겔베르크 수도원부터 시작된 진동선 사진작가의 침묵으로의 여행은 마지막 종착역인 장크트갈렌 수도원을 마지막으로 그 기나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지만 그 마침표가 도돌이표가 되어 우리들의 가슴을 마구 흔들어 댈 것이기에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1120년에 창건된 베네딕도회 수도원부터 1269년에 건립된 성 마리아 프란치스카 수도원, 그리고 735년에 베네딕도 교회, 수도원과 함께 건립된 호프 베네딕도 수도원 등 이 책에 소개된 수도원들의 역사는 그야말로 지나온 역사를 벗 삼고 세월을 친구삼아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존경을 표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만든다. 이렇듯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오랜 시간을 견디고 인내한 수도원들의 모습 자체를 보면서 우리에게 위안과 마음의 상처에 대해 치유를 해주는 수도원 여행이 지금 내 마음을 마구 설레게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끊임없이 찾고 있었던 것은 지독한 어둠이었다. 또 고요였고 침묵이었고 은밀함이었다. 사진의 근원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다. 어둠이 품고 잉태한 빛의 씨앗이다. 카메라는 어둠의 방이며, 사진은 어둠의 방이 품고 탄생시킨 빛의 그림자다. 그 문으로 들어간 나는 비로소 거대한 어둠의 카메라 속으로 들어왔음을 느꼈다. 또 비로소 모든 탄생은, 씨앗은, 출몰은, 어둠이 지배하는 하데스의 영역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두려움을 떨치고 그 품에 안긴다면 그곳이 얼마나 안온하고 너그러운지도 알게 되었다. (본문 354쪽, ‘성 요한 수도원의 어둠과 고요’ 中)
진동선 사진작가의 덕분으로 세계의 내로라하는 수도원을 눈과 글귀로 느낀 것에 대해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의 사진들을 보면서 어둠이 무서움과 공포를 대변하지만 그 무서움과 공포의 이면 속에는 포근하고 아늑한 면도 있다는 걸 알 게 된 것에 다시 한 번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이 책 『침묵으로의 여행』 을 읽으면서 수도원이라는 공간이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속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내 안에 숨겨진 수도원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수도자를 꿈꾸지만, 그 꿈을 이루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내 안의 감춰진 물욕과 번잡스러움을 떨쳐버릴 때 그 꿈이 내 앞으로 한 발짝 다가 올 것이며, 내 안의 수도원을 찾아 침묵으로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 꿈은 이미 이루어졌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