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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방영하는 사극을 보다 보면 왕비나 공주 혹은 후궁들이 아플 경우 의원들이 진맥하는 모습이 나온다. 의원과 환자 사이에 커다란 발이 처지고 환자와 연결된 실 끝을 통하여 의원이 진맥을 한다. 그런가 하면 TV에서 방영된 연속극 대장금이나 허균을 보면 의녀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녀들은 의원을 도와 환자를 돌보기도 했고, 약을 짓거나 또는 달여 환자에게 먹이기도 한다. 이런 의녀들은 언제 생겨났으며, 그녀들이 하는 일은 의원과 어떻게 달랐을까? 키워드 한국문화 11번째 책은 이런 의녀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팔방미인 조선 여의사’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의녀의 탄생부터 그녀들의 역할, 그리고 그녀들이 받은 교육, 대우 등 의녀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준다. 조선은 성리학을 지배사상으로 하는 유교국가이었다. 유교 이데올로기에 둘러 쌓인 조선시대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것은 출입을 통제하고, 다른 남성과 접촉하지 못하게 봉쇄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성이 아플 때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의원은 모두 남성이었고, 이데올로기로써 남녀가 유별하였기에 우리가 TV에서 보았던 진찰법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진찰은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고, 그래서 국가는 의녀제도를 만들어 국가차원에서 그녀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고려시대까지의 문헌에는 여의나 의녀의 대한 내용이 보이지 않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녀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 연유이다. 즉, 조선시대의 의녀는 신분제사회에서 천인일 수밖에 없었지만,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최초의 여성들 이었다. 태종14년 처음으로 제생원에서 의녀를 선발하였다. 각 지방에서 나이 어린 여종들을 뽑아 먼저 글을 깨우치게 하고, 그 다음에야 기초의학 과목을 배우게 하였다. 의녀교육은 제생원에서 담당하였지만, 후에 제생원이 혜민국과 병합되면서는 혜민서에서 담당했다. 당시 혜민서는 의약을 전매하고 서민들의 질병을 치료하던 기관이었다. 의녀의 교육과정은 3단계로 이루어졌다. 글을 깨우치고 책을 읽는 기초적인 공부를 하는 초학의는 오직 학업에만 전념하였으며, 기간은 대략 3년 정도 걸렸다고 한다. 간병의는 의원을 보조하여 환자들을 간병하며, 기술을 익혔다. 실력을 인정받으면 내의녀로 뽑혔지만, 마흔이 되도록 내의녀가 되지 못하면 원래의 역인 관비로 돌아가야 했다. 내의녀는 왕실사람들을 치료하는 내의원에서 근무하며 월급이 나왔다. 이처럼 의녀교육은 경쟁이 치열하였다. 무능한자는 탈락시키고, 잘하는 사람에게는 장려금을 주어 보상해주었다. 의녀가 되는 것도. 계속 의녀로 생활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교육받은 의녀들은 진맥, 침과 뜸, 그리고 약의 조제에 대해 다소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했지만, 전공에 따라 맥의녀, 침의녀, 약의녀로 구분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역할은 어디까지 의원을 보조하는 것이었다. 침의녀는 의원이 정해주는 곳에 침을 놓았고, 약의녀는 의원이 결정해주는 대로 약을 조제했을 뿐이다. 의녀는 여성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생겨났지만, 이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환자를 돌보았다. 이들은 남녀유별의 이데올로기가 적용되지 않는 여종, 즉 천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왕실여성이 아플 경우 이들에 대한 진맥은 의녀들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들에 대한 대우는 어떠했을까? 의관의 경우 어의는 정3품이었고, 심지어 당상관에 오르기도 했지만, 의녀에게는 기녀와 마찬가지로 품계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능력과 지위에 따라 급료로써 곡물을 지급받았고, 의녀집안은 양인이나 천민에게 부과하는 조세나 요역의 부담을 감면 받거나 면제받았다. 즉, 그녀들은 공로에 따라 물질적 포상을 받았으며, 그러한 포상중 으뜸은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이 되는 면천이었다. 비록 기회는 적었지만, 의녀는 신분상승의 장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의녀는 의료에 관한 일만을 했을까? 그녀들은 수사관이 되기도 했다. 여성범죄 혐의자나, 여성 피해자에 대한 수색이나 조사는 의녀들이 맡았다. 또한 사치여부를 단속 할 때는 그녀들이 규방까지 들어가 조사를 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들이 맡았던 또 다른 역할은 바로 기녀의 역할이었다. 연산군이 잔치의 흥을 돋우기 위해 기녀와 함께 의녀를 동원하였으며, 이후 의녀는 잔치나 연회 때마다 불려 갔다. 의녀들이 약생기생이라 불리게 된 배경이다. 그 후 그녀들은 국가연회뿐만이 아니라, 양반집 잔치에도 불려 다녔으며, 이는 사대부들이 나름대로 교양을 갖춘 의녀들을 통하여 잔치의 격을 뽐내려 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의녀, 그녀들은 분명 내외법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의해 탄생했다. 그렇지만 그녀들은 천민이며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유일한 집단이었다. 비록 의원을 보조하고, 본업 외에 수사관, 심지어 기생역할까지 했지만 말이다. 갑오개혁 이후 근대 서양의학이 도입되기 전까지, 오늘날의 간호사역할을 한 그녀들은 분명 조선시대 최고의 전문직 여성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듯 하다. 산업화 시기, 그녀들의 후예는 해외에 나가 외화를 벌어들이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는데 초석이 되었다.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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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조선시대에만 의녀(醫女)가 존재했을까? 조선시대에만 존재했던 특이한 직업가운데 하나가 의녀(醫女)다. 왜냐하면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남자의원이 여성을 치료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녀(醫女)가 절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1) 그런데 조선이 건국되면서 사정이 변했다. 성리학을 이념적 배경으로 탄생한 조선에서는 유교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해, 여성이 남성을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외법(內外法)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조선이 건국하고 14년 만인 태종 6년(1406)에 내외법(內外法)을 고수하면서도 여성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녀(醫女)를 양성하는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의녀(醫女)의 한계 문제는 의녀(醫女)가 되기 위해 선발한 이들이 관비(官婢)였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정3품 당하관인 내의원 정(內醫院 正)까지 승급할 수 있는 남자의사들과는 달리 여자의사인 의녀(醫女)는 별도의 품계 없이 일부가 급료를 받는 정도에 그쳤다. 그나마 의녀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능력에 따른 신분상승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면천(免賤)의 포상이다. 예컨대 이 책에서 언급한 숙종의 빈궁(嬪宮)이나 중전의 병을 치료한 공로로 면천(免賤)되는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현종 10년(1669) (현종의) 어머니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온천에 갈 때 수행한 것과 관련하여 의녀 단춘(丹春), 정옥(正玉), 지향(芝香) 등은 면천을 받았고, 같이 참여했던 의녀 국향(菊香), 예환(禮環) 등은 쌀과 면포만 지급받았다.2)”는 기록처럼 예외가 존재한다. 아마도 이러한 것들은 의녀(醫女)의 신분이 재물 취급 받는 노비였다는 점에서 오는 것에서 보이며, 그 때문에 연산군 이후 ‘약방기생(藥房妓生)’이라고 불리며 연회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러한 행태는 측근들의 반정(反正)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 이후에서 이어져, 의녀(醫女)들은 크고 작은 국가 연회에 동원되었고, 심지어 양반집 잔치에 불려 다니기도 했다. 의녀(醫女)는 어떻게 전문가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이런 의녀(醫女)는 어떤 방식으로 교육을 받을까? 내의원(內醫院) 등을 관할하는 예조(禮曹)에서는 먼저 의녀(醫女)가 되기 위해 뽑혀온 자들에게 <천자문(千字文)>, <효경(孝經)>, <정속편(正俗篇)> 등을 가르치게 하였다. 이는 “제생원(濟生院)에서 의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글자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의료인으로서 인품과 인성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였다.3)” 이를 초학의(初學醫)라고 하는데, 대략 3년의 기간 동안 진맥법, 약의 제조법, 침구법(鍼灸法) 등의 기초공부를 한다. 현대식으로 따지면 의대생에 해당한다. 이 다음 단계가 의원을 보조하며 여러 질병에 대해 익히는 과정인 간병의(看病醫)다. 오늘날 레지던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모두 20명을 두되 성적이 뛰어난 자 4명에게만 급료를 지급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간병의(看病醫)에는 일종의 연령정년제가 적용되었는데, 마흔 살이 지날 때까지 전문 분야(진맥, 침과 뜸, 약)를 갖지 못하면 관비(官婢)로 돌아가야 했다.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노비의 딸로 사는 것보다는 의녀로 사는 것이 나았다. 의관보다 대우받지 못하고 일의 성격에 따라 차별도 매우 심했지만, 경제력과 면천의 기회를 통해 사회적으로 보다 나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의녀는 사회 활동을 했으며 활동의 범위도 넓었다.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고4)”,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실력을 인정받으면 달마다 급료를 받는 내의(內醫)로 발탁될 수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의녀(醫女)가 되는 과정마다 경쟁이 치열했고, 수련 과정에서 탈락하는 이들도 많았다. 의녀(醫女)가 근무하는 곳 “의녀는 소속기관에 따라 크게 혜민서(惠民署) 의녀와 내의원(內醫院) 의녀로 구분된다. 혜민서는 궐 밖에 위치하기 때문에 궐 안의 내의원, 즉 내의사(內醫司)와 구분하여 외의사(外醫司)라 불렀다. 내의원 소속 의녀를 내의녀(內醫女)라 하였고 혜민서 소속 의녀는 외사의녀(外司醫女) 혹은 외의녀(外醫女)라고 하였다.5)” 이렇게 의녀는 약방(藥房)이라고 불리는 내의원(內醫院)이나 혜민서(惠民署)에서 근무하지만, 때에 따라 설치되는 특설 관청에 파견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산실청(産室廳)과 호산청(護産廳)을 들 수 있다. “산실청은 왕비의 출산을 위해 때에 맞춰 임시적으로 마련되는 산실로서 의관과 의녀가 배치되어 해산을 도왔다. 의녀는 분만에 직접 참여하여 산파 노릇을 하였다. 왕비나 세자빈이 아이를 낳을 때에는 산실청을 설치하고, 출산을 도운 경험이 있고 전문성을 갖추었으며 의술이 뛰어난 내의원 어의녀를 산실청 의녀로 뽑았다. 또한 후궁의 출산을 위해서는 호산청을 설치하였다. 이때도 역시 의녀가 참여하였다. 6)” 궁궐에서의 출산은 종묘사직의 안위와 직결되는 일이었으므로 중요시되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침이나 뜸에 뛰어난 의녀보다는 출산을 도운 경험이 많은 의녀가 필요했다. 그 밖에도 종기(腫氣) 치료를 위한 치종청(治腫廳)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종기(腫氣)가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질병이었다. “조선왕조 27명의 왕 가운데 종기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사망한 임금이 적어도 다섯 명에 이른다. 문종(文宗), 성종(成宗), 효종(孝宗), 현종(顯宗) 그리고 정조(正祖)7)”가 바로 그들이다. 게다가 노출된 털이 있는 부위에 잘 생기는 종기(腫氣)의 특성을 생각하면 그 치료를 위해 의녀가 파견될 수 밖에 없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의녀(醫女), 팔방미인(八方美人)이 되다. 의녀(醫女)는 진맥, 침과 뜸, 약을 다루는 의사역할뿐 아니라 여성을 대상으로 수사하고 조사하는 수사관 역할도 해야 했다. 즉, 범죄와 관련하여 여성의 상처를 조사해 사건 담당 기관에 보고하고, 때로는 여성의 시체를 검시하기도 했던 것이다. 심지어 여성 범죄 혐의자를 수색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는 방학기의 만화 <다모(茶母)>에서 나오는 조선 후기의 여형사 다모(茶母)와 영역이 일부 겹친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범죄행위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혼인집에 찾아가 사치품이나 부정한 폐물, 예물이 있는지 조사하는 일도 했다. 의녀들은 이 일을 무척 좋아했다. 천한 신분으로 부잣집에 가서 위세를 부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8)” 그 밖에도 친잠례(親蠶禮)에 참여하여 왕비를 시중드는 시녀(侍女)의 역할과 죽은 궁인의 제사 때 제문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연회에 참석하는 기녀에게 글과 시를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마저 해야 했다. 흔히 말하는 ‘르네상스적 만능인’이 되기를 요구한 것이다. 이처럼 의녀(醫女)는 ‘여성’과 ‘노비’라는 주홍글씨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통해 탄생한 당당한 전문직이었다. 비록 남존여비(男尊女卑)의 가부장적 성리학적 사회였기에 의녀(醫女)로서의 재능보다 기녀(妓女)로서의 재능이나 외모를 더 인정받는 한계를 가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녀(醫女)가 당대(當代)에 전문지식을 가진 직업여성이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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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여성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의녀'였다. 사극으로 잘 알려져있는 '장금'의 경우 중종 대 왕의 신임을 받은 '의녀'였다. 요즘으로 치면 여성들이 선망할 전문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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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 한 것은, 의녀가 등장하게 된 것은 조선의 유난한 남녀유별, 남녀를 분리시키는 풍조 때문이었다. 부인의 병을 남자 의원보는 것에 대해 사회적으로 문제가 제기 되면서 여성 질병의 편리성을 위해 시행된 것이다. 그렇다고 의녀가 여성들만 간호하거나 치료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교육을 받은 뒤 지방으로 내려가기도 해, 전염병 환자나 어려운 환자들을 돌보는 역할도 했다. 당시만 해도 일반 백성들은 의료혜택을 받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였다.무당을 통해 굿을 하거나 민간요법으로 치료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던 것을 보면, 의녀들은 일반 백성들도 의술의 혜택을 받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는 점에서도 의녀의 등장은 의미가 있었다.
의녀들은 신분은 미천했다. 관노 중에서 선발했는데, 그럼에도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 교육은 필수적일 수 밖에 없었다. 교육은 제법 체계적이었고, 시험을 통한 평가가 곁들여지면서 의녀가 되는 경쟁은 치열해졌다. 의녀가 되려면 문자해독력은 기본인데, 문자 교육으로서 뿐 아니라 사대부들의 기본 독서인 '사서'도 필독하게 하면서, 인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의학서적과 산서, 부인과 질병에 관한 학습이 이루어졌다. 즉 전문성 강화, 엄정한 평가, 잘하는 사람 장려하는 방식으로 교육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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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선의 의학은 남성들이 주도했다. 의녀는 어디까지나 보조적 역할밖에 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적지만 보수도 받았고, 아주 뛰어난 의녀의 경우에는 면천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체계가 잡히면서 의녀들도 궁궐에서 또는 현장에서 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차비대령의녀나 어의녀가 되면, 어의를 보조하여 왕의 진료하는데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전문성을 발휘해서 의료에도 참여했지만, 이외에도 수사,검시,왕실 시종 등 다양한 역할을 해냈다. 이책에서 팔방미인 조선여의사라는 부제가 붙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렇다 보니, 의녀의 역할은 사회적 기여도가 상당히 높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의녀들은 전문성이나 사회적 역할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기녀로 차출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니, 천민이라는 신분때문에 그들은 제대로 자신의 역할만을 해나가지 못했던 것이다.
실록에서 의녀에 대한 언급이 잦았던 것을 보면 궁궐 내에서 의녀의 활약이 아주 활발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렇지만 이들 또한 시대의 변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19세기 말 조선의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의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고, 근대적인 병원이 세워지면서, 그 역할은 간호부에게로 넘어가게 됐다. 그리고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터(본명 김점동)이 등장하게 되면서,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여성의료인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고, 이후 여성들 또한 의료 현장에서 주역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