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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56]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내용보기
[ 수화(手話) ]   긴긴 술잠에 빠진 아버지 느리게 해독하는 여름 아버지의 발바닥엔 책처럼 두꺼운 각질이 쌓여 있다 가끔 무심히 만져본다 그것들을 깎아다 손바닥에 잘모아들고 볕 좋은 곳에 묻어놓으면 무언가 피어날 것 같다 내년 봄에, 아님 그후라도   아버지는 내가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자국이 생긴 채 한참을 나오지 않는다 손자국을 오래 견디다가 가까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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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手話) ]


 

긴긴 술잠에 빠진 아버지

느리게 해독하는 여름

아버지의 발바닥엔 책처럼 두꺼운 각질이 쌓여 있다

가끔 무심히 만져본다

그것들을 깎아다 손바닥에 잘모아들고

볕 좋은 곳에 묻어놓으면

무언가 피어날 것 같다

내년 봄에, 아님 그후라도

 

아버지는 내가 손가락으로 꾹, 누르면

자국이 생긴 채 한참을 나오지 않는다

손자국을 오래 견디다가

가까스로 원상태로 돌아온다

휴, 이제 살았다 난 괜찮아

아버지는 내 구두 속에다 대고 속삭인다


 

혼자 미소 짓다가 힘겨워지면

아버지는 내게 전화를 건다

내가 아빠 이제 난,

하고 끊을 채비를 하면

아버지는 그게 그래서 말이야,

망설이다 시작한다

전화를 끊고

내 귀는 여전히 흔들린다

 

끊어진 전화와 끊어진 마음 사이에서

도르래를 굴린다

 

 

[ 뱀이 된 아버지 ]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린단다

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애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 푸른 멍이 흰 잠이 되기까지 ]


 

날이 무디어진 칼

등이 굽은 파초라고 생각한다

 

지나갔다

무언가 거대한, 파도가 지나갔나?

솜털 하나하나 흰 숲이 되었다

 

문장을 끝내면 마침표를 찍고 싶은 욕구처럼

생각의 끝엔 항상 당신이 찍힌다

 

나는 그냥 태연하고,

태연한 척도 한다

 

살과 살이 분리되어 딴 길 가는 시간

우리는 플라나리아처럼 이별한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매 순간

흰 숲이 피어난다

 

[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


 

나는 공터다

구름이 한번씩 쓸고 가는

 

당신이 빠져나간 자리

푸르게 어둠 휘어지고

빈 그네 위로

쓸쓸히 엉키는 바람

힘없는 밤이 주먹을 펴자

스르르 등 떠밀려

피어나는 흰 달

길게 이어지던 징 소리 끝에

철없는 하루살이들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나는 지금

텅 빈 악보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이다

 

 

[ 마음 이사 ]


 

깨진 항아리 위에 마음을 올려놓고

가는 봄에 집착한다

창문 밖 감잎이 초록으로 초록으로 달리며

죽은 봄을 토해낼 때

마음에서 빛이 빠져나가길

 

계절이 다른 계절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휘어진 선(線) 위에서

오래 머뭇거리다


 

나는 주렁주렁 허공을 매단 나무로 선다

옆모습을 보인 채로 사라진다

 

 

 

...  소/라/향/기  ...

s******8 2021.04.09. 신고 공감 16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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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eBook]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내용보기
박연준 시인의 시를 좋아합니다.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느낌 때문에 처음 읽기가 망설여졌었는데, 읽다보니 역시 좋더군요. 박연준 시인의 빠르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표현들이 정말 좋았습니다. 하나하나 음미하느라 읽는데 시간은 들지만 그 시간들이 다 좋았어요. 몇 편 남은 시들은 또 얼마나 좋을지 기대 됩니다. ---------------빨간 구름
"[eBook]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내용보기

박연준 시인의 시를 좋아합니다.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느낌 때문에 처음 읽기가 망설여졌었는데, 읽다보니 역시 좋더군요. 박연준 시인의 빠르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표현들이 정말 좋았습니다. 하나하나 음미하느라 읽는데 시간은 들지만 그 시간들이 다 좋았어요. 몇 편 남은 시들은 또 얼마나 좋을지 기대 됩니다. 



---------------

빨간 구름


안녕, 나를 해독해보렴

일그러진 벽돌 같은 남자를 사랑하고 싶었어

으깨지는 가루를 분처럼 바르고

네 얼굴을 다 사용하고 싶었어


나는 조로(早老)하고 싶었으나

왜 자꾸 새로운 이빨이 돋아나는지


기억은 빨갛게 멍울 잡히고

네 외로움에 금이 갔나봐


펄펄 흩날리는 키스들아 

나를 해독해보렴

k*****3 2020.12.2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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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를 처제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나를 처제라고 불렀다" 내용보기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처제, 하고 불렀다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아버지는 나를 처제라고 불렀다" 내용보기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뱀이 된 아버지 /박연준)

 

 

남들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 참 살 만 하다는 요즘,

유독 힘 빠지고 쳐지던 날이 이어졌고,

거기다가

5월 8일이 턱하니 내 앞에 오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내내 살아낼 수 없을 것 같은 감정만 이어졌다.

그러던 날 다시 내 눈에 들어 온 이 시집. 

다시 이 시집을 꺼내 읽다가 먹먹했지만

그럼에도 위로가 되는 이 느낌이었다.

내 경우엔 슬픔이나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에는

시덥찮은 사람들의 말과 위로보다는  

이런 공감되는 시집 한 권이 낫다는 쪽이다.

 

박연준 시인 덕분에 조금은 덜어냈다.

 

 

 

 

h********o 2018.05.1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