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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27일엔 진눈깨비가 날렸다. 함께 일하는 직원의 일부가 현장으로 나갔고, 나는 고요한 사무실에서 현장 소식을 궁금해했다. 도봉구 방학동에 그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 적이 과연 있었던가. 내가 거주하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개관한 시설에는 ‘김수영 문학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없어진 방학4동 주민센터 자리는 그렇게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는 위대한 시인을 위한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내가 그 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내 생일 바로 다음날이어서다. 단지 시설 개관 소식을 접했을 뿐이다. 거기서 조금 더 성의를 보여, 개관 후 시설을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시인의 시어를 조합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시를 짓는 일에 이따금씩 몰두하며 난 시인을 무척이나 잘 안다는 착각에 젖어 들었다. 그가 남긴 몇몇 시들은 교과서에 수록됐는지라, 제도권 교육 과정을 이수한 이라면 누구나 익히 읊는다. 인간의 창의력을 말살하기 위한 목적은 분명 아니었을 테지만, 나의 해석은 곧 너의 해석이자 우리의 해석인 이 곳 대한민국에서 시인 김수영의 저항정신은 널리 우러러봄직했다. 불의의 교통사고가 시인을 덮쳤다. 인간은 이름을 세상에 남긴다더니 시인은 이름에 시를 더했다. 도봉산 둘레길을 걷겠다며 집을 나설 적이면 그의 시가 새겨진 비를 도봉산 입구에서 지나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경험이 쌓이다 보니 난 시인이 내 삶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무언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 책을 읽었다. 작품도 겉핥아 왔지만 생애는 말할 것도 없음을 깨달았다. 물론 그의 삶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음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내가 제일 주목했던 건 포로 수용소에 수감된 김수영의 삶이었다. 그는 자유를 부르짖었지만 자유를 강탈당한 삶을 살았다. 그와 같은 역설적 경험 덕에 자유의 가치를 남들보다 더욱 절실히 느꼈던 것일 수도 있긴 하다. 나는 딱 거기까지였다. 책을 읽으며 한 번도 내가 생각해 보지 못한 삶의 측면을 접했다. 한 개인의 생은 시대와 사회로부터 결코 떼어낼 수 없다. 김수영의 삶은 일제강점기에 절반 가량 걸쳐 있다. 몰락까지는 아니지만 사대문 안에서 밀려나는 그의 가족사는 일제에 의해 잠식당했던 우리나라 경제와도 밀접한 연관을 보였다. 어린 김수영의 눈에 기우는 살림은 무엇으로 여겨졌을까. 존재하는 모순에 대해 그 무렵에 일찌감치 눈을 떴다 해도 하등 이상하지가 않았다. 김수영의 일본 거주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내용이었다. 많은 곳의 지명이 바뀌었고, 일부는 지역 사람들에 의해 달리 불렸던 터라 정확한 위치의 비정이 힘들었다. 하지만 끝끝내 어디라는 걸 밝혀냈으며, 그로부터 김수영의 생활도 끄집어냈다. 여러 명이 증언을 해준 덕에 촘촘한 복원이 가능했다. 김수영이 연극에 심취했었다? 아직은 시를 모르던 시기, 김수영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대는 시를 써야만 한다는 주변의 조언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과연 이 세상에 무얼 남길 수 있었을까. 오늘날에도 여전히 내겐 난해함으로 다가오는 시를 남긴 박인환을 평한 부분은 과연 김수영다웠다. 상대적으로 투박한 시어를 사용해가며, 마치 거친밥을 먹듯 세상을 노래한 김수영에게 박인환의 글은 혹평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읽다 보니 그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향한 바는 분명했고, 비슷한 방향을 바라본 이들은 꽤 여럿 존재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세계의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라는 다짐은 그렇게 현실이 되어갔다. 과연 김수영다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