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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우연일까? 최근에 읽은 책들이 중학생 아이들의 왕따 문제를 소재로 한 것이 좀 있었다. 왕따가 우리 사회의 문제로 부각되면서 왕따를 집중 조명하는 책들이 많다. 지난번에 읽었던 ‘십자가’라는 책은 자살한 아이의 유서에 절친이라 적힌 아이의 입장에서 왕따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글을 썼다면, 이 책은 왕따 가해자의 부모 입장에서, 그 부모들 시선에서 왕따를 바라본 책이다. 두껍지도 않고 글씨가 작지도 않다. 사건에 대한 설명이 친절하지도 자세하지도 않지만 왕따를 바라보는 가해자 부모의 심리를 간결하면서도 깔끔하게 잘 표현했다고 하면 맞는 표현일까?
유명 사립 여중학교에서 한 아이가 자살을 했다. 죽은 아이의 유서가 발견되면서 유서에 적힌 아이들 부모가 학교에 모인다. 학부모들은 말한다. 우리 아이는.. 우리 아이는 결코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학교의 명예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학부모 한 명을 유서를 태우게 되고 유서는 없는 거라 말하게 되는데... 하지만 자살한 아이는 유서를 한 명에게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유서가 더 나타나고, 발뺌하던 학부모들은 하나 둘 사건의 진상을 말하기 시작하는데...
“아이가 잘못하면 부모가 혼내야지요. 네가 한 행동은 나쁜 짓이라고 가르쳐야지요. 죗값은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누구든 제 자식은 예쁜 법이지,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언제 어떻게 책임을 집니까?” “다섯 명이 친구를 괴롭히고 돈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매춘을 시키고 죽인 게 돼요. 아십니까? 이걸 어떻게 인정하게 합니까? 어떻게 반성하게 해요? 어떻게 보상하라고 하느냔 말입니다. 대체 뭘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우란 겁니까?” (116)
이 책을 읽으면서 ‘디너’라는 책이 생각났다. 그 책은 왕따가 주제는 아니었으나 아들의 범죄를 덮으려는 부모의 이야기였기에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 책도 그 책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죽은 아이가 남긴 유서를 불태우면서 이러면 증거는 없고 흔적도 없어진다고 말하는 학부모, 학교의 전통이 어떤 건데 이런 일(?)로 학교의 위상을 실추 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학부모, 사건의 진상을 알면서도 무조건 침묵하라 시킨 학부모. 인정하면 끝장이라고 말하는 학부모. 이런 사람들이 과연 부모 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일까?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에게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현직 교사 신분의 학부모였다. 생각해본다. 왕따를 인정하고 반성의 기회를 갖는 아이가 괜찮을까? 아님 무조건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이에게 괜찮을까? 분명 어떤 경우든 가해자 학생도 상처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고 나서 반성하지 않았던 아이의 심리적 부담감이 더 크지 않을까?
줄곧 궁금했거든요. 걔들 부모는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 (103)
이런 사건이 터지면 제일 궁금해 하는 것 중 하나가 아닐까? 모든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 나도 학부모이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입장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제 초등학생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런 책을 읽으면 답답하고 가슴 아프다. 학부모들에게 자기 자식은 누구보다 소중하다. 하지만 나의 아이가 소중하다면 남의 아이도 소중할 것이다. 나만 아니면 되고, 우리 아이는 아닐 거라는 생각. 이것만큼 이기적이고 무서운 생각은 없는 같다. 아이들 때문에 학부모들을 만나게 되는 일이 있다. 학교 행사에 거의 참석하진 않지만 1년에 한 번 새 학기 총회 때는 가끔 얼굴을 내밀게 되는데 그때 학부모들을 만나게 되면 유난히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다. 자기의 아이 허물을 결코 보려고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어떤 왕따 사건에 자신의 아이가 주동자로 연루가 되면 일단 화부터 낸다. 우리 아이는 그럴 아이가 아니고 00이를 만나 최근에 이상해 진 거라고... 하지만 그 아이의 소문은 그 전부터 있어왔다는 것... 부모만 모르고 다른 아이들은 다 아는 진실이 되고 만다.
맨 마지막... 현직 교사 부부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아니... 이기적이다. “빈소에 갈 거야?” “안 가.” “이상해?” “이상하지 않아. 살아야 하니까.” “그렇군” “살아야지.” “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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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경험해보지는 않았지만, TV나 책을 통해서 봤던, 심리치료 과정에서 서로의 처지를 바꿔놓고 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상처받은 사람은 그 정신적인 고통을 전문가와의 상담으로라도 덜어내야만 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상황극, 역할극 같은 것처럼 보인다. 아주 작은 무대(무대라고 할 것도 없는 어떤 장소) 위, 어떤 상황이 펼쳐진다. 언제 어느 때, 이런 일이 있었고, 나는 그 일로 이런 고통을 받았지. 대충 이런 내용의 연극이 펼쳐진다. 고통을 받았다고 여긴 사람은 그 반대의 관점을 연기한다. 실컷 흥분하며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과격해지기도 한다. 그 맞은편의 누군가는 침묵하거나 듣기만 하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서로에게 한발 더 다가서는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다. 보는 사람이 느끼는 그 감정이 진실일지 아니면 그 순간의 가면일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살아가는 동안에 꼭 한번은, 바뀐 그 입장에서 상대를 봐야 할 때가 너무 많다는 거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연극이 많이 생각났다. 연극으로 먼저 오르고 난 후 소설이 된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 낭독회로 진행되었을 때도 상당히 주목받았다고 한다. 비단 일본에서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증거다. 새삼 얘기하는 게 불필요한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익숙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너무 흔한 일상처럼 되어버렸다는 게 아픈 이야기라는 것. 이런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는, 계속되어야만 하는 이유도 같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 책이 조금은 다르게 다가오는 이유는 단순히 왕따 문제나 청소년의 자살 문제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 아이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는 부모의 진짜 얼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교실의 이른 아침. 한 여학생이 자기 반 교실에서 자살했다. 그리고 유서로 보이는 편지가 담임선생님에게 도착한다. 편지의 맨 끝에는 같은 반의 아이 다섯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학교에서는 이 다섯 명을 따로 대기시켜 놓고 아이들의 부모를 호출한다. 학교에 도착한 다섯 명의 학부모들은 저마다 자신의 아이가 그럴 리가 없다, 착한 아이들이다, 내 아이를 격리해 놓지 마라, 죽은 아이가 행실이 올바르지 못했다, 편지가 조작된 것이다, 등등. 자신의 자녀가 죽은 아이의 가해자라는 것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겠지. 부모에게는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인 줄도 모르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외침만 반복한다. 그런데 죽은 아이는 담임선생님, 그룹에서 외면당한 자신과 같이 밥을 먹어준 친구, 아르바이트하던 신문보급소의 소장에게 각각 편지를 보냈다. 감사의 말과 함께 편지의 끝에는 똑같이 다섯 명의 이름을 적어서...
가해자의 학부모가 모이기 시작한 그 순간, 즉 이 연극의 처음 부분부터 나는 숨이 턱턱 막혀왔다. 한 생명이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었다. 중학교 2학년, 소소한 수다에도 까르르 웃음이 날 것만 같은 가벼움마저 사랑스러운 나이, 인생의 큰 그림보다 당장 바로 앞의 유치한 우정이 소중하다고 여길 수 있는, 정말 순수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그 시간을 미처 다 반짝이지도 못하고 버린 것에 대해 아파해도 모자랄 고통일 텐데... 불태우고 찢어버린 편지를 앞에 두고 '이제는 없는 일이다.'라는 간단명료한 마침표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무서웠다. 같이 그룹을 만들어야만 유지되는 게 중학교 생활이라니 인정하고 싶지도, 믿고 싶지도 않지만 요즘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그런 모양이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 무리의 형성이나 유지되는 근거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를 동반한다. 그냥 미워, 그냥 싫어. 약해 보이니까, 만만하니까, 한번 찔러보니 말을 잘 들으니까. 또 어떤 이유가 더 있으려나...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룹 안에서 한 아이를 밀어내고, 왕따를 시키고, 횡포와 폭력, 협박을 일삼는 이유가 그저 무리와 한 개인이라는 차이 말고는 없던 것이다. 협박에 못 이겨 아르바이트해서 상납을 하고, 그것마저 채우지 못하니 가해자들이 나서서 원조교제를 시키는 것도 너무 당연한 것처럼 이루어진다.
그룹에 들지 못하면 외톨이가 되고, 아주 교묘한 따돌림으로 들키지도 않게 하는 고단수의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중학생이라니... 그 나이의 아이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볼 때마다 나는 그 아이들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상태로 되돌아가고는 한다. 현직 교사가 직접 쓴 이야기는, 그가 직접 경험한 내용이 아니지만 간접 경험으로 보고 듣고 상담한 많은 내용을 근거로 써졌기에 상당히 사실적이다. 그런 부분에서 결코 지나칠 수 없는 시선이 바로 부모의 입장에서 취해야 할 자세다. 그것도 가해자의 부모 처지에 놓였을 때 어떤 시선과 생각으로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보이는 가해자의 부모들은 한결같았다. 계속 드러나는 아이들의 이름 앞에서도 부정했고, 설사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오점만 찾아내려 했다. 피해자가 했던 그 불법적인 행동(중학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한다거나, 원조교제를 하는 것 같은)만 들춘다. 그러한 행동이 이루어져야 했던 배경에 자신의 아이, 가해자가 있었음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매일같이 얼굴 보고 지냈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에 아무런 감각도 없는 아이들. 겨우 십 년 조금 넘게 살아온 시간 동안 그 아이들에게 그런 인성이 갖추어진 것은 무슨 이유일까.
단숨에 속내를 끄집어낸 엔도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부모들을 휙 둘러보더니 조용히 곱씹듯이 말했다. "오늘은 운이 좋았네요. 소원을 이뤘습니다. 줄곧 궁금했거든요. 걔들 부모들은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 엔도는 다시 한 번 부모들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휴대전화 화면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어서 사과해. 미치코한테 사과해! 어서!" (103페이지)
밖에서 행동할 때 자주 나오는 말이면서, 그 말 때문에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에 부모가 있다. 아이가 밖에서 잘못된 행동을 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은 '집에서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할 것이다. 결혼한 여자의 입장에서, 시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은 '너희 친정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더냐, 하는 말이라고 했다. 그만큼 한 사람의 성장이나 인성에 있어서,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가장 먼저 관계를 형성하는 부모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잘못된 것에 지적하면서 굳이 그 배경에 부모를 대입해 판단하는 게 익숙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부모의 가르침이나 부모의 태도가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드러내는 부분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가 처음 상연되었던 연극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굳이 소설로 다시 써져야만 했던 이유가 이렇게 설명된다.
이야기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그 진실이 하나씩 드러난다. 누구나 그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다 꺼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미치코의 진실을 알고 있던 신문보급소의 소장은 하루 늦은 자신의 행동에 울분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들의 진실을 알고 있던 부모는 그 진실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처리하는 방법을 먼저 가르쳤다. 나의 예상은 여기서 빗나갔다. 연극의 막이 내려지기 전에 많은 것들이 제 자리를 찾아갈 기회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을까 했었는데... 긍정적인 다음 장면도, 가해자 부모의 태도가 달라질 거란 희망도, 가해자인 아이들의 인성에 대해서도, 온전하게 기대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 장 누군가의 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다음 행보를 가르쳤던 것일까.
연극이 끝나고, 단 하나의 조명만이 무대 위를 비추고 있는 듯하다. 시신이 되어 누워있는, 피해자인 미치코의 표정을. 마치, 이제야 좀 편하다는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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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희곡으로 썼던 것인데 소설로 고쳤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냥 소설하고는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희곡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희곡 같은 느낌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생생한 느낌이다. 실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썼다고도 하니 그럴 수밖에 없으려나. 갈수록 심해지기만 할 뿐 나아지지 않는 게 집단 따돌림이 아닌가 싶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은 학교가 많다고 하는데,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이 자라고 일을 하게 되면서 다시 그 일을 되풀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학생 때와는 조금 다르게. 이런 생각을 하니 세상이 조금 무섭기도 하구나. 사실 조금이 아니고 많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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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멍~하다. 누군가가 꽥꽥 내지르는 듯한 소음 속에 갇혀 있다가 겨우 빠져나온 기분이다.
한 아이가 죽었고, 다섯 명의 아이들의 부모가 학교에 소환(?)되었다. 그들은 우리 아이를 끝까지 믿어야 한다며, 죽은 아이를 비난하고, 모함하고, 이런 일이 생기도록 방치했다며 선생님을 탓한다. 그 와중에도 우리 아이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 하며..
사건의 내막을 알지만, 가만히 모르는 척 있으라 할 수 밖에 없었던 노도카의 할머니와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케하려 했던 미도리의 엄마 …어쩌면 나도 그 상황이면.. 후에 어떻게 될 지 모르게지만 일단은.. 일단은 그렇게라도 덮어둘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들이 이해가 된다. 근데, 머리로는 그런데..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어째서.. 어째서 이들은.. 죽은 미치코한테 미안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거지? 자기 아이를 위한 방어도 뭐도 다 좋지만, 일단은 사람이 죽었는데.. 아주 어리고 착한 아이가. 다 떠나서.. 일단은 먼저 안타까워하고 슬퍼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모르겠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다..
소름이 끼치고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이야기는 연극이 되어 공연되고, 소설로 쓰여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연극으로 올리기까지..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이런 얘긴.. 사람들이 그닥 보고 싶어할 이야기가 아니니까..
p.59 "부모는 마지막 보루니까요. 부모가 자신을 믿는다는 건 확실하게 아이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런 부모 자식이라면 갖가지 힘겨운 상황들을 이겨 낼 수 있지 않겠어요?"
p.115 "……적당히 좀 합시다. 조금 전에 왔던 젊은이 말이 옳아요. 아이가 잘못하면 부모가 혼내야지요. 네가 한 행동은 나쁜 짓이라고 가르쳐야지요. 죗값은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미도리 아버님 마음은 정말 잘 압니다. 누구든 제 자식은 예쁜 법이지.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언제 어떻게 책임을 집니까?"
p.135 "그 애들, 평소랑 다를 게 없어요. 그냥 있어요. 교실에요." "그게 어쨌다는 거죠?" 도다 선생은 표정 없이 다섯 소녀의 말을, 자신과 아이들의 대화를 되풀이했다. "나쓰키, 아직도 집에 가면 안 돼? 나쓰키, 화장실. 나쓰키, 배고파. 피자 시켜 줘, 피자. 너…… 알고 있니? 미치코가 죽었어. 알아? 아, 죽었구나. 있잖아, 그럼 우리 다 같이 장례식에 갈 거야? 나쓰키, 장례식 때 교복 입고 가면 안 돼?" 부모들은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고 부르르 떨었다. " 이 세상에서 그 아이들을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은 미치코 어머니가 아니에요. 바로 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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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도가니’라고 일컬어진 화제의 연극을 소설화한 책 사회성 짙은 소재, 묵직한 교육적 이슈를 긴장감 넘치는 상황으로 풀어내다 최근 눈에 들어온 영화 예고편이 있었는데 배우 설경구가 나오는 출연하며 학교폭력을 소재로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그들의 부모가 그려나가는 사건과 심리묘사를 통해 묵직한 교육적이슈와 메세지를 전달하는 영화였다. 그 영화의 원작소설로 연극으로 시작된 작품인데 화제를 일으키자 소설화가 된것이라고 한다. 예고편의 내용만으로도 임팩트 있고 결론이 궁금해지는 영화였는데 책으로 먼저 만나볼 기회가 생겨 단숨에 읽어내려간 책인것 같다. 1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며 , 10명 2명이 그 이유로 ‘ 학교폭력’을 언급할 정도로 이 책이 나오 2012년에 비해 현재는 그 문제가 더하면 더했지 나아졌다고 생각되지 않을정도로 매년 수위가 강해지는 학교폭력사건들이 뉴스를 통해 보도가 되고있다. 중2 학생이 자살하면서 유서에 쓴 다섯명의 가해학생들의 부모들이 학교 회의실에 소집되면서 학교측과 유서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소설 속 가해학생의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를 두둔하기에 급급하다. 잘못에대해서 명확하게 지적하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려 아이들이 깨닫고 반성하게 잘못을 고치고 바른길로 가도록 이끄는것이 어른들의 일인데.. 그저 숨기고 은폐하는것에 더 힘을 쓰는 그들을 보며 그들 밑에서 양육되어 자라는 저 아이들은 어떤 어른으로 크게 될것인가 생각만해도 무서운 일이었다. 무거운 이야기인 만큼 묵직한 메세지를 던져줌으로 어른으로서 어떻게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는것이 정의이고 최선이고 옳은 일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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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개 ▷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 하타사와 세이고/구도 치나쓰 ▷ 다른 ▷ 2012년 11월 10일 ▷ 160쪽 ∥ 200g ∥ 130*205*11mm ▷ 영화/연극/일본소설
◆ 후기 ▷내용《上》 편집《中》 추천《上》
하타사와 세이고(畑澤聖悟, 1964~) 일본의 공립 고교 교사이며 극작가, 각본가, 연출가, 방송 작가, 배우 등의 매우 다양한 일을 하는 작가이다. 2005년 <내 부대를 넘어가라>는 단편 연극 콩쿠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고, 2009년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로 제12회 쓰루야 남북희곡상에 노미네이트 된다. 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연극 무대에 올랐고, 2012년 한국의 극단신시에 의해 서울에서 성공적으로 오래 공연을 하였다. 공동저자가 구도 치나쓰는 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연극과 석사 과정을 수료하였는데, 하타사와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고 꾸준하게 연극무대에도 올랐는데 왜 이제야 화제가 되기 시작했을까? 학교폭력 문제는 이미 20년도 넘었는데 말이다. 2022년 04월 27일 김지훈 감독, 설경구·천우희·문소리·오달수·고창석·강신을·김홍파 등 쟁쟁한 배우들이 참여한 영화가 개봉되었기 때문이다. 네티즌 평점 또한 7.76으로 오락적이지 않음에도 높게 유지 중이다. 설경구와 문소리가 재결합한 것도 재미있지만, 등장하는 배우들이 연기력을 인정받고 시대상에 목소리를 내는 공통점이 있다. 책과 영화 모두 보길 추천하는 바이다.
여중생이 교실에서 목을 매 죽었다. 그날 오후 학교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된다. 목을 맨 아이가 보낸 유서인데, 편지에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학교폭력 가해 학생 다섯 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가해자 부모들이 교사의 주관 아래 학교 회의실에 모이게 되고, 피해자는 이미 죽었기에 되돌릴 방법이 없다며 자식들의 지키기 위한 추악한 변론을 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회의실에서 일어나는 몇 시간의 이야기가 책의 중심이다. 150쪽에 이르는 길지 않은 책을 읽고 나면 실제 얼굴이 보고 싶어질 것이고, 영화를 보고 감정이입을 심하게 하면 해당 역을 맡은 배우가 증오스러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P.055 “부모라면 자식의 유서를 백 퍼센트 믿을 겁니다. 당연하죠. 자기 딸이 쓴 유서니까요. 매스컴에 밝힐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게 누명이라면요?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되죠? 난리가 나겠죠? 누가 봐도 명예훼손이에요. 우린 피해자가 되는 거고요.”
P.071 “여기사 다 같이 단결하기로 하죠. 유서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다들 아시겠죠? 희외실 공기가 한 방향으로 흘렀다. 그러다 도다 선생 쪽은 아니었다…….미치코가 제게 보낸 마지막 편지예요. 료헤이는 흔들림이 없었다. 선생님 마음은 압니다. 하지만 포기하시는 게 여러모로 좋아요.”
P.131 “다마요는 말없이 도다 선생의 머리카락을 움켜지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억눌렸던 분노 전부를 쏟아붓듯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선생을 발로 찼다. 선생 또한 아픔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의 책무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없이 견뎠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회의실로 뛰쳐 들어온 나카와타리 교장과 하리다 선생도 회의실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누구 한 사람도 말리지 못했다. 《중략》 ‘가야겠어요…….미치고 장례를 치러야 하니까.’”
131쪽의 내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거운 감정이 느껴진다. 단순히 발로 차고 분을 삼키는 모습의 묘사로는 부족하다. 이것이 연극의 무대에 올랐을 때 배우들은 어떻게 표현할까? 영화에서는 어떻게 표현할까가 궁금해졌다. 이 책은 2006년 후코오카 현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한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 실제로 자살한 사건이라고 한다. 가해 학생은 피해 학생의 장례식에 조문을 가서 관 속을 들여다보며 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사람이 죽었지 않은가? 과연 피해 학생의 관을 보며 웃는 아이가 정상일까? 그런 아이를 키워낸 부모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을까
추천하는 독자 -자녀는 키우는 모든 부모
“이런 일이 설마 있을까? 현실은 연극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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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화가 나게 만드는 이야기.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설마 이런 일이 있을까? 싶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있다. 허구였으면 좋겠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왕따 이야기. 이 책은 독특하게 왕따를 당한 당사자와 가해자 아이들이 아닌 가해자 아이들의 부모가 등장한다. 아이들은 부모를 그대로 닮는다고 했던가. 그 아이에 그 부모!란 말이 딱 맞다. 확 뒤집어 버리고 싶어지는 이들의 모습이다. 정말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나는 정말 제대로 살아야겠다. 부모노릇 제대로 하면서. 아... 욱하고 올라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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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일단 눈에 들어와 보게 되었다. 제목도 표지그림도 그렇고 그냥 넘어갈 종류의 가벼운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에 덥석 손에 들고 보기 시작했다. 표지를 보면 교복을 입고 있는데 얼굴은 오리? 이거나 여우, 돼지의 얼굴을 하고 있다. 표지에서만 봐도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펼쳐질것을 보여주고 있다.
과연 다른 아이를 괴롭히고 왕따, 은따 시키는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못된 아이로 태어난 것일까? 이 책에는 그런 상황이 안타깝게 그려지고 있다. 괴롭힘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중학교 2학년의 여자아이가 자살을 하고 만다. 지금도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일이다. 어제도 고등학생 한명이 자살하면서 유서를 남겼는데 유서에 CCTV 가 설치되지 않았거나 잘 식별이 되지 않는곳에서는 여전히 그런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써놓았다.
아이는 세상과 이별하면서 자신을 괴롭혔던 다섯 아이들의 이름을 적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보낸다. 그리고 그 유서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증인이 되어 아이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괴롭혔던 아이들 부모들에게 낱낱이 밝힌다. 하지만 그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괴롭혔다는 사실이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절대 수긍하지 않는다. 심지어 괴롭혔던 아이들조차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는다.
읽는내내 너무나도 두렵고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내 아이들과 다르지 않는 청소년들인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인 그 아이들이 벌인 일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건 이야기속에만 나오는 일이니 그렇게 떨 필요없어~~라고 말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은 그 책속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기에 더 안타깝고 두려움을 갖게 된다.
내 안에 자라고 있는 그 어둠이 깨어날까봐 공포스러울 정도의 끔찍한 일이 우리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일들을 어떻게 해야할지...어른들인 우리는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고 관찰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얼룩진 아이들의 마음이 시킨일임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고등학교 다니는 딸아이는 이 책을 보더니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친구들도 이 책을 꼭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변하자!!라고 해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발짝씩, 아주 조금씩만 움직여도 아이들이 좀 수월하게 숨을 쉴수 있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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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원작은 희곡이다. 2012년 희곡낭독 공연장에서 발표된 후 입소문을 타고 화제가 된 후, 한 극단에서 정식 연극으로 발표되면서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 후 다른 출판사의 제안으로 원작인 희곡이 소설로 탄생하게 된다. 최근 영화로 개봉되면서 10여년만에 다시 한번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나도 이렇게 읽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한 여중생이 집단 따돌림으로 자살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가해자 학생들의 이름을 지목하는 유서를 남기고, 그로 인해 가해자의 부모들이 학교 회의실에 모이게 된다. 내 자식만은 아니겠지, 내 자식이 그럴 리가 없어. 내 자식은 누구보다 착하고 남을 괴롭힐 애가 아니야..이 세상의 모든 부모가 한결같이 가지고 있는 이 생각. 부모는 자기 자식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아마도 가장 알지 못하는 사람 또한 부모가 아닐까 싶다.
피해자는 이미 죽었기에, 자신의 자녀를 보호하려는 정말 이기적인 마음에 증거 인멸과 사건을 은폐하는데 여념이 없다. 자식을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다더니 바로 이런 경우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결코 소설로만 치부할 수 없는 부끄러운 부모의 현주소이다. 이 소설에서처럼 끝까지 자녀의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는, 아니 어쩌면 맘 속으로는 인정하지만 자녀의 장래, 그리고 자신들의 평판 등으로 부정하고픈 생각이 더 크기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모의 행동은 당연히 있어서는 안되지만, 그런 부모들의 반응에 질질 끌려 다니는 학교측의 대응 또한 상당히 문제가 많다. 결국 집단 따돌림, 학교 폭력은 단편적으로는 학생들 간의 문제이지만 더 크게 본다면 사회적인 문제, 우리 어른들의 잘못이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때마침, 최근에 총기사건 이후 가해자와 피해자의 부모가 만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영화 '매스'를 봤었는데, 그 영화를 보면서는 점차 가해자의 부모한테도 일말의 동정과 측은함을 느꼈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이런 뻔뻔함과 이기심을 가진 부모들의 행동에 가해자 학생들의 행동 못지 않게 치가 떨린다.
일본 고등학교의 교사이자 학교의 생활지도사로 근무하고 있는 저자가 25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일들이 작품 속에서 많이 인용되었다고 하는데, 저자가 한 학생에게 한 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집단 따돌림을 받고 괴로워한다면 나에게 아니면 다른 누구에게라도 상담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혹시 상담도 못하고 괴로움에 견딜 수 없게 되더라도 결코 죽지만은 말아달라고, 네가 죽어도 가해자 학생들은 반성 따위 하지 않으니 죽음으로 그들에게 앙갚음 할 수는 없다. 조금만 더 참고 졸업을 하게 되면 상상도 하지 못할 큰 세상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 집단 따돌림의 좁은 세계 따위 다 날아가버린다고..그러니 절대 죽지만 말아달라고..
집단 따돌림으로 괴로워하는 모든 학생들이 이 말로 큰 힘을 얻었으면 정말 좋겠다. 아니, 그 전에 무엇보다 이런 집단 따돌림이 발생하지 않는 학교 분위기가 조성되는게 최우선이겠다.
[ 다른 출판사에서 제공받아, 자유로운 느낌으로 써 내려간 내용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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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사립여중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던 학생 하나가 교실에서 목숨을 끊었다. 이를 최초 목격한 도다 선생은 신고하고, 반 아이들을 불러 사정 청취를 하던 중 편지가 한 통 도착한다.
도다 선생 앞으로 온 이노우에 미치코의 편지. 이윽고 유서에 담긴 같은 반의 다섯 아이의 부모가 소환된다. 편지에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고 사과도 해봤지만 따돌림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2학년 3반. 시노, 미도리, 노도카, 레이라, 아이리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소설 속에는 가해자로 지목된 다섯 아이의 부모와 교사만 등장한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배제되고 어른들의 목소리만 들린다. 부모들은 철저히 이기적이다. 내 아이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수 있는 유서를 마음대로 태워버려 없던 일도 하자고 한다. 학교 측 입장도 난처해지니 함구하자는 거래였다. 내 아이가 괴물이면 부모는 악마가 되어야만하는걸까.
설왕설래하던 시각. 2학년 1반의 이시이 가나코와 어머니가 도다 선생을 찾아왔다. 선생이 나가자 부모들끼리 호구조사며 죽은 아이 부모 폄하까지 하기 시작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따돌림당한 부모의 잘못까지 추궁하는 중이다.
그렇게 얼마 후 나갔던 도다와 교장선생은 그 학생에게도 고맙다는 말과 다섯 아이 이름이 적힌 편지가 왔다고 들고 왔다. 그걸 또 찢어 삼켜버리는 학부모. 어떻게든 내 아이의 허물은 없애고 싶은 비뚤어진 마음이다. 편지는 하나가 되었든 둘이 되었든 없었다고 말하자는 태도였다. 하지만 편지는 또 있었다. 미치코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신문보급소 점장도 편지를 들고 학교에 찾아왔다. 이에 따라 따돌림의 전말이 드러난다.
부모 중 한 사람은 내 자식이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괴롭혔다는 걸 납득할 수 없었는지, 부정하다 못해 미움받을 이유가 있다고 단언한다. 괴롭힘당해도 싸다니.. 부모 인성조차 제대로 생겨먹지 않았다. 그 부모에게 태어난 아이들이 뭘 보고 배웠을까.
더 나아가 애초에 집단 따돌림은 없었고 있었더라도 우리 애들과는 상관없다는 식. 인정하면 안 된다는 태도다. 자식이 잘못했다면 꾸짖고 혼내서 바른길로 안내해야지 허물 감싸기는 옳지 않다. 잘못이라면 죗값을 치러야 하고 반성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된다. 이 부모들은 왜 그게 힘든 걸까?
그나마 노도카의 할아버지인 시게노부만이 손녀가 힘들어했다는 말를 꺼내 사건을 반전시키지만. 할머니 도모코가 손녀에게 따로 입 다물란 말을 한 탓에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서로 모르쇠로 일관하자며 증거사진까지 지우고 함구하려 했던 거다. 조금 전까지 죽은 아이의 과대망상이라 주장했던 것도 빼도 박도 못하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부모들은 이제 어떻게 할까?
이제는 논점 자제가 옮겨졌다. 이 이야기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 애가 가해자로 의심받는 상황에서 마지막 보루인 부모는 잘잘못을 떠나 무조건 싸고 돌아야만 할까?부모의 정의의 새로운 시각을 던지며 큰 파장을 낸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정의로 내 아이를 지킬 수 없다면 갖은 편법이라도 써 지켜주는 게 맞는 걸까? 은폐하려는 갖은 방법으로 분노 유발이 장전되는 이야기다.
이 실화 같은 이야기는 먼저 일본 연극으로 만들어졌고 소설로도 각색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학교폭력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도 큰 파장이 될 작품이 되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가해 학생을 넷으로 줄이고 부모 직업을 수정, 한국 정서로 각색했다. 낭독 연극이란 독특한 콘셉트로 올려진 극을 영화로 풀어내는 데 장단점이 있을 것. 어떻게 했을지 몹시 궁금하다.
사실 영화는 5년 묵은 창고 영화다. 당시 출연 배우 사생활 논란과 팬데믹까지 겹쳐 5년 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유효한 이야기다. 내 자식만 중요, 은폐하려는 부모들의 추악한 민낯, 사라지지 않는 학교폭력은 진행형이기 때문.
김지훈 감독이 원작자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얻었던 데는 <화려한 휴가> 때문이라고 한다. 김지훈 감독은 <7광구>, <타워>, <화려한 휴가>, <싱크홀>을 만들었다. 일본에서도 영화화 논의가 많았지만 아무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 김지훈 감독의 영화를 보고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한다. 원작자 하타사와 세이고는 교사다. 우리나라에서도 동명의 연극이 올려진 바 있다. 깨어 있는 일본의 지식인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