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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벌어진 백년전쟁 사이에 태어난 헨리 5세는, 프랑스 침공 후 성공적인 아쟁쿠르 전투 대승으로 영국에겐 영웅으로 추앙, 프랑스에겐 포로들에 있어 자비 없는 잔혹한 처리 방식과 끝없는 마을의 방화 등으로 거의 악마나 다름 없는 면모를 보였다.
잉글랜드인 윌리엄 셰익스피어에게 있어 헨리 5세는 프랑스의 인식과는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오랜 세월, 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졌고 실제 유럽의 중심이었던 프랑스, 그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고 그의 미래에 태어날 아들(헨리 6세)이 차후 영국은 물론 프랑스까지 전부 통치한다는 걸 내세운 트루아 조약을 맺은 헨리 5세는 말 그대로 영웅극 쓰기 좋은 소재이기도 했다.
실제 정치적 목적과 종교적 목적이 합치되고 거기에 덧대어 반란의 싹을 외부(프랑스)로 돌릴 필요가 있던 헨리 5세는 군사를 이끌고 프랑스를 침공하는데 흡사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헨리 5세를 알려면 그의 아버지 헨리 4세로 관심을 돌릴 필요가 있다.
헨리 5세의 이전 왕 헨리 4세는 적법한 왕위를 찬탈한 자인데, 찬탈당한 대상은 사촌이었던 리처드 2세였다. 리처드 2세는 잔혹하면서도 몽상가적 기질이 있던 왕이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사촌 헨리 볼링브룩을 10년 간 추방하고 볼링브룩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숙부인 곤트의 존이 죽자 그의 영지를 몰수한다. 이에 추방당했던 헨리 볼링브룩이 그를 따르는 군세를 이끌고 리처드 2세를 폐위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리처드 2세』의 내용이다.
『리처드 2세』ㅡ『헨리 4세』 1, 2부ㅡ『헨리 5세』로 이어지는 시간 순의 네 편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빗대 '헨리아드'라고 일컫기도 한다. 4부작 내내 헨리 4세와 헨리 5세가 중점이 되는 헨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중간에 위치한 『헨리 4세』 1부와 2부에선 제목답게 헨리 4세가 등장하긴 하지만, 곧 왕위를 물려받을 핼 왕자(후에 헨리 5세)와 그의 뚱뚱한 광대 폴스태프가 진 주인공으로서 비중 있는 역할을 차지한다.
5막 5장으로 이루어진 이 사극은 핫스퍼의 책동을 필두로 도중도중 폴스태프와 그 일당ㅡ심지어 핼이 폴스태프를 속고 속이는 식의 이중극ㅡ의 희극적 난장을 집어넣어 분위기가 반란의 보이지 않는 위험과 번갈아 교차되는 특징이 있다.
영국에서 인기 있는 왕이다보니 많은 배우들이 핼 왕자(헨리 5세) 역을 맡았다. 케네스 브래너, 톰 히들스턴, 티모시 샬라메 등이 그러한데 『헨리 4세』의 일부 얼개를 현대의 뉴욕과 이탈리아로 옮긴 <아이다호> 같은 영화는 키아누 리브스를 핼 왕자의 모습에 배치하기도 했었다.
비극에 가까운 사극인 『리처드 2세』, 『헨리 6세』 3부작, 『리처드 3세』와 달리 『헨리 4세』 2부작은 그러한 면이 현저히 적다. 헨리 4세 치하 반란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을 다룬 『헨리 4세』 2부작에선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가장 유명한 익살꾼이자 유쾌한 광대인 폴스태프가 반란의 심각한 분위기를 희석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한때 아버지로부터 실패자로 치부되었던 헨리 왕자가 반란을 진압하고 『헨리 5세』의 성공적인 군주로 탈바꿈하는 데 비중이 큰 영웅서사이기 때문이다.
비록 실정을 했으나 정통성 있는 왕 리처드 2세를 폐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왕위에 오른 헨리 4세는 그 자체로 재위 내내 적법성 논란에 휘말렸다.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를 반란, 심지어 자신의 재위를 도운 세력에서도 자신을 배신할 거란 위기감이 고조됐는데, 『리처드 2세』에서도 잠시 등장하고 『헨리 4세』 1부의 주적으로 등장하는 노섬벌랜드 백작 파벌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노섬벌랜드 백작의 용감하고 다혈질인 아들 헨리 퍼시ㅡ성급한 자라 하여 '핫스퍼'란 별명이 붙었다ㅡ가 있다.
『헨리 4세』 1부의 첫 장은 헨리 4세의 근심으로 시작된다. 반란의 기운을 잠재우기 위해 그들의 관심을 프랑스 원정으로 돌려 해소해야 하는데, 그 원하지 않던 반란이 터진 것이다. 다행히 자신의 왕위 찬탈을 도운 최측근 노섬벌랜드의 아들 핫스퍼가 반란을 잠재우고 포로를 잡는 등 최대의 공을 세웠으나 결코 헨리 4세는 즐겁지 않다. 헨리 퍼시(핫스퍼)와 이름이 같은 장남 헨리(약칭 핼) 왕자가 시정잡배 폴스태프 패거리와 노점 등을 오가며 강도짓을 해대는 것이기에, 왕으로서 자신의 후계자의 타락을 매우 노심초사해 한다. 심지어 노섬벌랜드 백작과 자신의 아들이 바뀌었으면 하는 질투마저 내비친다.
헨리 4세ㅡ
질투가 나니 말이오. 나의 노섬벌랜드 경이
그토록 축복받은 아들의 아버지라는 것이
명예의 혀가 주제로 삼을 만한 아들 아니겠소,
(…)
반면 나는 그를 찬미하면서
보게 되는 것이오, 방종과 불명예가 더럽히는
내 아이 해리의 이마를. 오, 속설이 사실로 드러나
어떤 밤도둑 요정이
요람 옷의 우리 아이들 위치를 서로 바꾸어 놓고
내 아이를 퍼시로, 그의 아이를 플랜타저넷으로 부르게 한 거라면 좋으련만!
그렇담 난 그의 해리를, 그리고 그는 나의 해리를 아들로 둘 수 있을 텐데.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기대는ㅡ셰익스피어가 자주 구사하는 한 작품 내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반복하는 두 플롯ㅡ노섬벌랜드와 핫스퍼 사이에선 충족되지만, 헨리 4세와 핼 사이에선 삐그덕댄다. 하지만 1막 2장에서 핼 자신이 혼자 있을 때 독백으로 밝히는 바로는 자신의 기행과 일탈ㅡ폴스태프 패거리와 어울리며 행패부리거나 한량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ㅡ이 실은 위장된 쇼임을 천명한다.
핼ㅡ
너희 모두 잘 알기에 장난치고 싶은 만큼
기분대로 굴라고 한동안 놔두겠다.
하지만 이것은 해를 닮는 일이다.
지저분한 구름들이 해를 가려서
어여쁜 그 모습을 온 세상이 못 봐도
추악한 구름장을 불쑥 꿰뚫고
아름다운 자태를 다시 보일 때
사람들이 고대하던 햇빛이기에
더더욱 감격하여 해를 반긴다.
1년 동안 할 일 없이 노닥거리면
장난도 노동만큼 지겨울 테지.
좀처럼 안 생기는 휴일을 환영하듯
기대하지 않은 일은 환영받기 마련이다.
방종한 이 짓을 벗어던지고
갚겠다고 한 적 없는 빚을 갚으면
내가 말한 것보다 훌륭한 것을 보여서
그만큼 사람들의 기대를 깨뜨리겠다.
칙칙한 바탕 위에 빛나는 황금처럼
잘못 위에 번쩍이는 나의 변신이
훌륭하게 돋보이며, 바탕이 없기보다
뭇사람의 눈길을 더 많이 모으리라.
잘못을 저지르되 재주 있게 저질러서
낭비했던 시간을 예상 밖으로 살겠다.
핼과 폴스태프의 첫 대화는 '지금의 시간'을 묻는 것이었고, 시간의 덧없음을 설파한 핼은, 사실 자신의 위장이 드러낼 시기가 되면 그간 헛되이 보낸 시간을 단숨에 만회할 야심을 드러낸다.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아군(헨리 4세와 동생, 관료들)과 적(핫스퍼 일당)을 동시에 속이는 핼의 모습은 다분히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등장할 법한 인물의 정형이다.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헨리 4세』를 비롯, 셰익스피어가 쓴 열 편의 사극은 모두 정치적이다. 역사를 다룬 극, 그것도 권력의 흥망성쇠, 왕권의 교체를 다룬 극이니만큼 그러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노섬벌랜드와 핫스퍼는 『헨리 4세』의 전편이라 할 수 있는 『리처드 2세』에서도 잠깐 등장하며 거기에선 헨리 볼링브룩(헨리 4세)의 충실한 조력자이자 리처드 2세를 폐위하고 헨리를 왕으로 옹립하는 데 공이 큰 최측근이었다. 어쩌다 『헨리 4세』에 들어선 반기를 들게 된 걸까. 극 초반 그들의 대화에 답이 있다. 헨리 4세는 자신이 그들에게 빚을 졌다는 의식 때문에 그들의 권력 추구를 의심하며, 핫스퍼 가문 또한 그 이유 때문에 왕이 자신들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우스터 백작(핫스퍼의 백부)ㅡ
우리가 아무리 얌전하게 굴어도
왕은 빚졌다는 의식을 지울 수 없고,
우리 빚을 갚아버릴 기회를 찾기까지
불만을 가진 자들로 우리를 볼 테니까
봐라, 이미 친밀한 눈빛을 거두고
우리를 낯설게 대하기 시작했지.
(...)
우스터는 노섬벌랜드의 형이자 핫스퍼의 숙부로 왕과 다툰 1막 3장에선 위와 같이, 왕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고선 동료들과 논의하는 5막 2장에선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우스터 백작ㅡ
왕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약속을
지키기는 불가능하고 있을 수 없소.
항상 우리를 의심하여 다른 일을 잘못해도
이 일에 대해 벌할 핑계를 구할 것이며
평생토록 의심의 눈길을 가득 받겠소.
반역은 여우만큼 신뢰를 받을 것이오.
아무리 길들이고 사랑하고 가둬 길러도
여우는 조상 적 버릇을 잊어버리지 않소.
엄숙하든 즐겁든 무슨 표정을 져도
우리의 표정을 오해할 것이며
우사 안의 소처럼 여물을 먹이고
귀하게 여길수록 도살에 가깝소.
조카의 죄과는 잊힐 수 있겠소.
젊음과 혈기가 핑계가 되며
성미에 휩쓸리는 '핫스퍼'란 별명이
특권적 구실이 되는 것이오.
그의 모든 죄과가 부친과 나의
권력과 정치는 생물이어서 많은 돌발 변수가 있고, 이 극처럼 한때 운명을 같이 했으나 지금은 갈라선 왕과 노섬벌랜드ㅡ핫스퍼가 그러하다. 핫스퍼 가문이 책략하는 반정은 성공하면 보위에 오르겠지만 실패할 여지도 상당히 큰 목숨을 건 도박이다. 물론 반대 입장인 핼과 헨리 4세에게 있어서도 핫스퍼의 도발을 막아야 자신들의 안위가 무사할 테며 본때를 보여야 두 번 다시 이런 반란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두 세력 간엔 목숨을 걸 만한 이유가 있고, 이름이 헨리로 둘 다 같은 핼과 핫스퍼는 서로를 라이벌로 의식함과 동시에 왕관이란 명예를 원한다.
명예는 예로부터 중세 기사들이 가장 숭고한 가치로 여겼던 것이고 핼과 핫스퍼 또한 탐욕스럽게 그 가치를 원하나,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가장 기지 있는 인물 중 하나인 폴스태프는 여기에 의문을 표한다.
폴스태프ㅡ
나한테 독촉도 안 하는데 미리
나서서 껍적댈 필요 없잖아? 어쨌든 상관없어.
명예가 부추겨? 하지만 명예가 가까이 간 나를
튕기면 어떡해? 명예가 잘린 다리 붙일 줄 알아?
아니. 팔은? 아니. 상처의 통증을 없앨 줄 알아?
아니. 수술할 줄 모른단 말이지? 맞다. 명예가
뭔가? 말. 명예란 말 속에 뭐가 있어? 명예가 뭐야?
바람. 회계인즉 반듯하군.
(...)
명예는 싸구려 장식이야. 이거로 교리문답 끝!
폴스태프는 명예란 허풍이며 전쟁과 죽음 앞에서 명예를 위한 용기를 발하는 게 의문이라며 장황하게 말한다. 허나 폴스태프 또한 바로 뒤에 가선 핼이 죽인 핫스퍼의 시신을 직접 챙겨 자신이 공을 세웠다고 허풍을 떠는 인물이어서 그 자신의 말을 자신이 반박하는 이중의 풍자와 묘미를 준다.
핼의 모습이 마키아벨리가 쓴 '악행을 행해야 할 경우에는 한 번에 몰아서 해야 할 것'같이 보이진 않으되 순진하게 핼을 얌전한 한량이라 오판한 핫스퍼나 순전히 후일의 뒷배로만 여긴 폴스태프에겐 그러하다. 확실히 핼은 사자의 본심에 여우의 가면을 쓰고 자신이 쓴 각본대로 연기하여 거기에 왕, 친인척, 관료, 폴스태프 일당, 핫스퍼와 반란군 모두를 속이는 데 성공한다.
두 얼굴의 본심을 교묘하게 내비치는 미래의 군주 핼은 반란의 연속이었던 혼란한 시기, 국가를 두고 대립하는 외부의 강력한 라이벌 핫스퍼를, 이어질 2부에선 핼 그 자신과 한몸으로 여겨졌던 천방지축 폴스태프를 분리함으로써 마침내 헨리 5세로 등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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