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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지 아직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아이가 갑자기 아파 병원엘 다녀왔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지만 초보 아빠로서는 여간 놀란 것이 아니었다. 아빠의 급한 성격을 그대로 닮은 녀석은 자신의 소화기관이 아직 ‘신생아 사이즈’라는 것을 잊고 모유를 폭풍 흡입했는데, 결국 그것이 사달의 원인이 된 듯싶다.
진료를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기사님은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었다. 일단 그는 나와 아내, 장모님과 아이 등 적지 않은 인원이 차에 타자 그리 밝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게다가 병원에서 집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늦은 밤 갑자기 구토를 하며 자지러지는 아이에 놀라 119구급대를 불렀으니, 당연히 집에서 가장 인접한 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휴일을 지나 아침 일찍 다시 병원을 찾은 것이었다.
기사님은 가까운 목적지를 이야기하자 다시 한 번 얼굴이 굳어졌다. 짜증난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다만 간혹 주위의 차들에 경적을 울리며 다소 난폭하게 운전을 하셨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가 깰까 나와 아내, 장모님은 안절부절 하며 갈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솔직히 내가 예의범절이 바른(!)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때론 맞아가며(!) 배운 것이 두 가지 있었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과 역시 타인을 속이지 말 것이었다.
어려운 경제에 택시 기사님들의 고충이 적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내가 기사님의 입장이었다 해도, 신이 날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상당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고, 불쾌한 마음을 애써 진정시켜야만 했다. 나와 아이는 무임승차를 한 것이 아니었다. 기사님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었고, 다만 행선지가 가까운 것뿐이었다.
자신의 존엄성은 스스로 만든다는 말이 떠올랐다. 자기 직업의 품격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 단지 생물학적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해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마 그 택시기사 역시 자식과 손자․손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열심히 인생을 살아온 사람일 것이다. 나이 지긋한 우리나라의 택시기사님들이 보다 여유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내 첫 아이가 태어나기 정확히 한 달 전,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분노와 참여, 불의에 대한 저항을 외쳤던, ‘영원한 청년’ 스테판 에셀이 타계했다. 96세라는 나이는 단지 그의 생물학적 노화의 수치였을 뿐, 그는 눈감는 날까지 청년이었고, 레지스탕스였다.
아직 살날이 많이 남은 어린 녀석이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며 느낀다. 현명하게, 지혜롭게 늙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자 능력인지를. 스테판 에셀은 나를 비롯한 많은 우생들에게 진정한 ‘어른’이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줬다. 가슴 벅찬 인류애를 평생 실천하고 살아온 노 투사. 인권의 차원을 넘어 자연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호소는 여전히 ‘지속가능한 발전․성장’을 주문처럼 외워대는 우리들에게 매서운 죽비로 다가온다. ‘지탱가능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어느 누가 반대할 수 있을까? 지구가 존재하지 않는데 무슨 발전과 성장이 가능하단 말인가?
일생을 바쳐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된 신념을 고수하며 주변에 해악을 끼치는 것도 문제겠지만 말이다. 젊은 시절 민주주의와 반독재에 나섰던 이들이 수구세력과 결탁해 함께 아름답게 썩어가고, 저항의 시인은 어느새 수구의 들러리가 되었다. 그저 나이를 먹고 과거 어느 정권에서 한 자리 해먹었다는 것을 내세워 시건방을 떨며 사회의 원로 행세를 하기도 한다. 부끄러움과 성찰 따위는 애시당초 뇌 속에 없는 족속들. 자칭 멘토 행세를 하며 젊은이들에게 짐짓 훈계를 늘어놓는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구역질도 아깝다는 생각뿐이다.
그럼 우리에겐 온통 이처럼 생물학적 노화차원의 노인 밖에 없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 역시 스테판 에셀에 못지않은 ‘괜찮은 노장’들이 많이 계시다. 다만 우리가 무지해 그 분들을 못 볼 뿐이고, 언론 행세하는 장사치, 양아치들이 애써 그 어르신들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최근 멘토가 어쩌고, 힐링이 어쩌고 하며 참 많은 이들이 돈을 챙기셨고, 명예를 얻으셨다. 이는 지금까지 한심하게도, 우리 사회에 존경할만한, 배울 만한 이들을 찾기 힘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언론과 방송에서는 심히 의심스러운 이들이 버젓이 원로를 자처하며 일장 훈계를 하시고, 대통령을 비롯한 그 누구도 절대 본받고 싶지 않은 사람들뿐이다. 진심으로 MB를 존경하는 이가 과연 이 사회에, 아니 지구상에 얼마나 될까? 현 대통령은? 아쉽게도 전직 대통령 중에서도 존경할 만한 이들은 없어 보인다. 있다 하더라도 이미 고인이 되셨거나.
난 스테판 에셀을 읽으며 그의 철학과 신념에 공감하면서도, 그의 삶 자체에 더 큰 영감을 받는다. 현명하게, 지혜롭게, 추하지 않게 나이를 먹어가는 것. 그는 나에게 ‘멋지게’ 늙어가는 삶의 롤 모델이다. 그밖에도 하워드 진, 노암 촘스키(살아 계시는 분!), 리영희, 김대중, 노무현, 함세웅 신부(역시 강건하게 활동하시는 분!) 등….
아름답고, 지혜롭게, 떳떳하고, 누군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며 살아가다, 그렇게 눈감고 싶다. 많은 이들을 깨우고 떠난 스테판 에셀처럼. 그의 아름다운 삶을 다시 한 번 추모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감사하게 기억할 것이다.
잘 가시라! 청년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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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종종 시간이 남을 때가 있어 책을 읽곤 하는데, 그렇게 가져가는 책은 얇으면서도 너무 쉽지는 않은 책이 좋다. 그래서 가져가게된 문고판 대담집 "참여하라".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의 후속편처럼 출간된 신간이다. 방콕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개인 TV가 없는 바람에 폭풍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무려 박원순 시장님과 우석훈 교수님이 추천사를 써주셨으니 어떤 성향의 책인지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스테판 에셀의 말은 명쾌하고 하는 족족 맞는 말이다. 참 설득력 있다.
이 책에서 가장 기억해야할 메시지는 금방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절망하거나 주저앉지 말아라, 계속 분노하고 그 분노를 참여로 이어가야한다, 조금씩이라도 변화를 쌓아갈 때 미래에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100살이 되어 가는 노 운동가가 아직도 미래에 대해 진보적이고 희망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오히려 쉽게 절망하는 것은 젊은 세대가 아닌가 생각했다. 대선에서 정권 교체에 실패하고 세대간 갈등이 극에 달해 있는 이 시점에 읽기에 참 의미심장한 책이다.
이번에 여행가서 공교롭게 축산업을 공부하는 대학생을 또 만났다, 지난번 서유럽 단체배낭 때도 두 명이나 만났는데... 평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축산업 공부하는 학생들은 당연히 FTA를 반대하겠거니 싶어서. 그런데 의외로 아니라고 해서 뭔가 모순된 모습이 아닌가 싶어 충격을 받았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지금 우리 축산업자들은 비효율적으로 소를 키우고 있어서 가격이 비싸서 사람들이 고기를 잘 사먹지 못한다고. 축산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싼 가격에 양질의 소고기를 먹기를 바란다고, FTA가 체결되면 가격이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맥락인 것 같았다. 하지만 FTA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미국산 소고기(혹은 쌀, 농산물)가 싼 가격으로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우리 농민, 축산업자들이 생산을 포기했을 때 식량이 무기화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있다. 식량에 있어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어떤 상황에서든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을 안고 이 책을 읽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인상 깊었다. "그런데 근년에 개발도상국, 특히 주로 제조업과 수출을 위주로 하는 나라에서 행해지는 농업은 환경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런 농업은 식량 부족을 효과적으로 퇴치할 수도 없었거니와, 선진국 산 농작물의 수입을 조장하여 지역 농민들을 경쟁자로 만들고 파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지요. 그래서 농업 개혁이 필요한 것입니다... 곳곳에서 녹색 혁명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만 명이 계속해서 굶주려 죽고 있습니다. 이른바 녹색 혁명은 장점보다는 폐단이 더 많았지요.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겐 분명 이와는 다른 방식의 농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태농업'이 그 해결책 중 하나입니다. 생태농업은 환경과 식량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발전'이라는 말이 더욱 고도화된 기술이나 더욱 많은 에너지만을 뜻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벽에 부딪히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해 온 것들을 점점 더 많이 하자는 게 아니지요. 발전이 기술과 에너지에만 국한된 의미라면 현실적으로 우리는 더 많은 부존자원을 보유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을 뿐더러, 발전 또한 보유한 자원에만 기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우리의 자원들은 생태적 균형과 양립하여 개발되어야 합니다. 좀 더 지구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부유해진다는 것은 사용 에너지의 양이나 금전적 수익의 증가처럼 단지 양적인 결과로 드러나는 풍요로움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문화, 정신, 윤리 등이 풍부해져야 합니다. '항상 더 많이'라는 말로 촉발되는 생산 위주의 생각은 이제 끊어버려야 합니다." 42-44쪽.
스테판 에셀은 유대계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기도 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는 세계인권선언문 만들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 평생을 시민운동에 바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말년에 자신의 시각을 좀 더 넓혔다. 인간을 위한 '인권' 뿐만이 아니라 지구 생명체를 위한 '생태'로. 1학년 도덕 책에 여전히 '지속 가능한 개발development(요즘은 '발전'이라고도 쓴다)'이라는 용어가 나오기에 그 둘이 양립하는 것이 가능한지 항상 의문이었는데, 저자 역시 그러한 생각에 의문을 던진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두가 지속 가능하게 생존하기 위해서는 관점을 변화시켜야 한다.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급자족을 기반으로 하는 생태 공동체나 마을 운동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가 전통적인 시장 경제를 완전히 대신할 수 있다고 보면 결코 안 됩니다. 먼저 기존의 시장경제에 일정한 제한과 규제를 가하여 사회적 경제가 제대로 들어설 수 있도록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세계의 모든 문화에 설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것처럼, 한 나라 안의 사람살이에도 온갖 형태의 공존에 자리를 확보해주어야 합니다. 종교도 필요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종교와 무관한 세속성도 필요합니다(밑줄은 인용자). 결국 우리는 다양성의 공존이라는 난제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이지요...
...지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미래의 세계를 좀 더 정의로운 곳으로 또 살 만하고 현명한 세상으로 그릴 때는 글로벌한 관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한 실제 행동은 지역적일 수밖에 없지요." 70-71쪽. 이 부분에서 위에 밑줄친 부분이 뜬금없이 끼어들어 인상 깊었다. 기독교적인 역사가 깊고 많은 영향력을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 사람이기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요즘 한창 대립하고 있는 기독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겨냥한 것일까?? 마침 여행지에서 "창조 타락 구속"을 같이 읽고 있었는데, 그 책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성과 속으로 이분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버려야한다고 적혀있다. 기독교인인 나는 "창조 타락 구속"의 세계관을 따를 수밖에 없겠다.
너무 좋은 책이라 학생들에게 꼭 읽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경기도교육청에서 올해부터 서술형을 대폭 강화하고 논술도 많이 시키라는 지침이 내려왔기에 고전이나 좋은 책을 읽고 논술하는 훈련을 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는데 그 책의 목록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회를 이끌어가기에 깊은 생각을 가지고 조리있는 글로 그 생각을 표현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젊은이들로 커가기를 바라면서. "질(인터뷰를 담당한 질의자): 미래의 주인공이 될 세대들은 당장 발언권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결정은 현 세대가 내리게 마련입니다. 젊은 세대의 대표들을 한데 모으고, 이들을 고령의 '현자 賢者' 세대가 지원하는 '세대간 운동'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어디까지나 미래 세대의 이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확실히 해두는 일이 바람직한지,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에셀: ... 지금 진행되는 변화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도 일단 다행한 일이지요. 왜냐하면 그런 자각조차 없다면 "지금 당장 잘 사는 게 중요해.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라는 식의 태도를 가질 수도 있을 테니 말이지요. 이 시점에 '윤리적 자각'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앞날의 후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대간'이라는 말은 좀 막연합니다. 대신 인류 자체가 노령화한다고 표현해보겠습니다. 노인 혹은 초 고령자의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인들이 생생히 체험한 바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내지 않고, 어떤 기억은 더욱 유념하여 각별히 지켜갈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 입장에서 노인들과 접촉하는 일이나 노인들 입장에서 청년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는 일은 모두 다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선배 세대가 후배 세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 되겠지요..." 89-91쪽. 100살에 가까운 노인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특히 위의 강조된 부분이 통쾌하다. 이번 대선을 치르면서 기성세대들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너무 많이 갖게 되었다. 아마도 이제는 투명하지 못하게 대권을 잡은 그들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해도 의심부터 하고 들 것 같다. 정권에서는 반대편 지지자 47%를 끌어안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잡음이 심할 것이다. '너희는 어려운 시절을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닥치고 따라와라'라는 마인드를 가지고서는 젊은이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7, 80년대가 아닌 2010년대를 살고 있는 청춘에게는 지금 여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나름의 고민과 힘듦이 있다. 먼저 살아본 사람들로서 그러한 고민을 들어주고 거기에 맞는 조언과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 그 이후에야 연대든 협력이든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일단은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가 "분노하라"와 "참여하라"를 읽어보셨으면 좋겠는데.
대선 임박하여 출간한 책이라 그런지 책 뒷편에는 녹색당이 얼마나 착하고 톡톡 튀는 당인지를 보여주고 있다(스테판 에셀이 프랑스에서 녹색당을 지지하고 있기에 이 책에 우리 녹색당을 홍보하는 페이지가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공무원 신분으로 묶여있지만 않다면 당장 지지하면서 후원하고 싶어질 정도로 재미있는 부분. 알바비 쥐여주고 대학생 동원해서 젊은 척 하려고 노력하는 어느 당과는 참 다른 느낌이다. "녹색당에 있는 것, 녹색당에 없는 것
녹색당에 있는 것 청소년 당원, 고양이 발바닥에 대한 사랑, 채식주의자의 간지, 북극의 눈물, 절반이 여성당원, 남성당원의 남자친구, 여성당원의 여자친구, 트위터와 페이스북, 청년백수, 자전거
녹색당에 없는 것 돈봉투, 여의도의 멋지구리 당사, 모피, 남성엘리트꼰대, 가스통 할배들, 권위주의, 월화수목금금금, 핵발전소, 종이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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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아무리 거칠고 어두워도 희망은 우리를 빛으로 이끄는 힘임을 보여주는 책! 폴란드 시인 Adam Zagajewski이 쓴 "블레이크"를 연상시킵니다.
블레이크
날마다 나무 꼭대기에 내려앉은 천사들을 보고 자신의 작은 집 계단에서 하느님과 마주치고 누추한 뒷골목에서 빛을 발견한 블레이크를 보네--
매춘부, 해군 제독, 기적(奇蹟)으로 붐비는 런던에서 즐겁게 노래하며 죽어간 블레이크
가난 속에 살고 일했지만 절망하지 않았던 판화가 윌리엄 블레이크, 그는 바다와 별빛 찬란한 하늘에서 불타는 표지(標識)를 보았네
희망은 마치 숨결처럼 늘 되살아나는 것이기에 한 번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그이, 나는 여명의 거리에서 마치 그이처럼 장미빛 난초꽃 같은 새벽을 향해 걸어간 이들을 보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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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에셀 할아버지는 작년 '분노하라'라는 작은 책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90세가 넘은 할아버지로.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생활도 했으며 1948년에는 세계인권선언문 작성에도 참여했다.
그런 그가. 아직도 살아남아. 프랑스의 젊은이들에게 '분노하라'라고 선동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프랑스의 기득권층은 짜증이 났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에셀 할아버지 덕분인지 우리의 젊은 빠리지엥들은 집회도 많이 투쟁도 많이 해버렸다. 자동차까지 붙태우면서. 지나가는 뉴스에서 얼핏 본 기억이 난다.
한 프랑스의 흑인 10대 여자가 "우리 아버지 세대가 우리의 일자리를 뺏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한걸.
그리고 프랑스 대선에도 많이 참여해 정권교체를 해버렸다. 그 당시 언론은 프랑스에 좌파대통령이 탄생했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그가 이제 차분히 가라앉은 어조로 다시 말한다. "참여 하라"고
이 책은 질 방데르푸텐라는 작가이자 출판사의 기획자와의 대담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뭐 당연하지만 질문을 하면 에셀이 답변을 한다. 그런데 에셀의 말은 참 맑은 느낌을 준다. 아마 에셀이 이런 이야기를 한국에서 했다면 '빨갱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것이다.
지금의 공장식 농업은 잘못이 있다. GDP만 상승하는 국가경쟁력은 필요가 없다. 자신이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발전한게 아니다. 또 당돌한 좌파가 떠올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더군다나 에셀의 생각이 마음에 드는 점은 연대하는데 국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다는 점이다. 가난한 나라와 선진국의 젊은이가 연대할수있다. 라는 식의 글을 볼때면 그의 아나키즘적이 성향이 보있다. 또 녹색당을 옹호 하는 점이 그렇다. 이 책에는 녹색당에 대한 소개와 녹생당 하승수 변호사의 해제도 있어서 보는 재미도 있다.
만약 내가 유럽에 여행을 간다면 이런 할아버지 집에서 하룻밤 지내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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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를 통해 저자를 소개해드린 적이 있지요. 그리고 지금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속으로 남겨진 인물이라는 사실도 말입니다. 혹시 리뷰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95세의 노인은 여전히 젊은이들을 향해 이야기 합니다. "사회의 부당한 모습들이 있다면 분노하라!, 구석구석 잘 찾아내어서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을 찾아내라!" 사실, 신선한 충격이라는 말이 흔하게 사용되어서 그 의미가 좀 퇴색한 측면이 있지만, 말 그대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95세의 죽음을 면전에 두고 있는 노(老)병이 여전히 생생한 영적인 권위와 힘을 가지고 이 시대를 향해 외칠 수 있다는 사실이, 사회에서의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음에도 권력에 대하여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흔히 진보와 보수를 구분할 때, 기득권을 보수라고 칭하지요. 한국사회에서도 군부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해냈던 386세대가 이제는 한국사회의 보수층이 된 것처럼, 진보와 보수의 관계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라는 정의가 무색하리만치 스테판 에셀은 '레지스탕스'의 아젠다를 끝까지 지켜냅니다. 아-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진보주의적인 성향을 갖는다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모두들 아시는바와 같이 한 사람이 이토록 우직하게 자신의 정치적, 사상적 주관을 갖고 살다간 사례는 많지 않으니까요.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분노하라'에 이어 '참여하라'고 외치는 영원한 젊은이 스테판 에셀의 외침이! 책은 질 방데르푸덴이 스테판 에셀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인물 역시 프랑스에서 비정부기구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젊은 '레지스탕스'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요. 20대 청년과 90세 노인의 대화가 열띠게 진행된다라는 것만으로도 스테판 에셀이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으시겠지요? 질이 묻습니다. "과거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현대에 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레지스탕스는 말 그대로 '저항'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고유명사로 사용했을 경우, 과거 프랑스가 나치를 대항해 전개했던 저항운동을 뜻합니다. 질의 질문의 의도는 이것이지요. 과거와 같이 무력을 사용해서 단번에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시대적 배경이 아닌 현대에 어떻게 저항해야 합니까? 이 질문에 에셀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 불의에 저항하는 일은 나치 독일이 점령했던 시절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나치 독일 점령기에는 레지스탕스 활동가들이 집단행동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집단 전체가 힘을 모아 기차를 폭파하는 일 등을 도모했지요. 어찌 보면 그때가 오히려 쉬웠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지성적으로 상황을 개선하려면 깊은 성찰이 필요하고 설득력 있는 글을 써야 합니다. 또한 현명한 정치인이 당선되기를 바라며 민주적으로 선거에 참여해야 합니다. " 에셀의 이 답변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한 사상적 배경에 의해서 젊은 시절에 행했던 활동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에셀은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해내고 있습니다. 자신이 레지스탕스로 저항했던 사실을 긍정하며서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함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진정한 보수의 유전자를 지닌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깊은 성찰과 설득력 있는 글을 써야 함을 강조한 부분이 동의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무력으로 상대방 또는 타국가를 지배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깊은 성찰에서 오는 지혜, 그리고 사회를 더욱 정의롭게 만드는 사상적 배경에서 쓰여지는 글이 시대를 선도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방법은 바로 이것이지요. 에셀은 스스로 자연생태에 관한 문제에 뒤늦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생태문제에 관한 입장은 기존, 사람들이 공유하던 개념보다 진일보한 내용을 포함합니다. "저는 '지속가능한 발전'이라기보다는 '지탱가능한 발전'이라고 보아야 타당하다 생각합니다" 왜 그런것일까요? 지속가능한이라는 말의 의미에는 결국 한정된 자원이 고갈될때까지 이루어지는 발전을 말하지만, 지탱가능한 발전이라는 말은 기존의 사상적 동의를 포함하면서도 더 발전적인 함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음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더이상 야만적이고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연고갈을 멈추라는 것이지요. 발전에 대한 에셀의 말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싶습니다, "부유해진다는 것은 사용 에너지의 양이나 금전적 수익의 증가처럼 단지 양적인 결과로 드러나는 풍요로움이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문화, 정신, 윤리 등이 풍부해져야 합니다. '항상 더 많이'라는 말로 촉발되는 생산 위주의 생각은 이제 끊어버려야 합니다. " 우리의 미래는 낙관적으로만 바라보아서도 안돼고, 그렇다고 비관적인 관점으로 낙심해서도 안된다고 느껴집니다. 에셀역시 말하지요. 결국 역사는 진보할 것이지만, 무조건 적으로 미래 만세를 외칠 것이 아니라 미래 조심!, 미래 만세!를 함께 외쳐야 한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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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분노하라고 하시더니, 이번엔 참여하라고 하신다. 아주 간결한 메시지이나 간결하게 정리하여 분다. 현재 지구적인 이슈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경제적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이다. 이것은 하나의 국가 내에서도 나타나지만 지구적으로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이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나고만 있다. 두 번째는 생태문제이다. 지구의 환경문제,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더디다. 하나의 국가에서 진행하기도 어렵고, 전 지구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여러 국가의 결속체라봐야 EU 하나만 존재할 뿐이다. 시간을 두면 악화될 뿐이다. 이 분이 우리에게, 혹은 젊은이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지구적인 이슈인 경제적 불평등과 지구환경 문제에 대해서, 세계인들이 연대하여 참여하라는 것이다. 불매 운동을 하는 방법도 있고, 에너지를 줄이는 대안 생활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키워드는 연대와 참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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