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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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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의 세포는 매일 없어지고 새로 생긴다. 새로 생기기 위해 세포는 계속 죽어야만 한다. 새로운 세포는 죽은 세포보다 더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곧 또 새로운 세포를 위해 죽어야만 한다. 가끔 이것을 거부하는 세포들이 생기는 데 이것이 우리가 암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으면 우리 몸은 병들게 된다.    살기 위해 죽는다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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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몸의 세포는 매일 없어지고 새로 생긴다. 새로 생기기 위해 세포는 계속 죽어야만 한다. 새로운 세포는 죽은 세포보다 더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곧 또 새로운 세포를 위해 죽어야만 한다. 가끔 이것을 거부하는 세포들이 생기는 데 이것이 우리가 암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으면 우리 몸은 병들게 된다.

 

 살기 위해 죽는다는 것은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패러독스 즉 역설이 잘 나타난다. 생각해보면 역설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빛이 있으면 언제나 어둠이 생긴다. 동전의 앞면이 있으면 뒷면도 있고 오른쪽이 있으면 왼쪽도 있다.

 

 이 책에서는 빛과 어둠같은 또 이타적인 것과 이기적인 것같은 역설적인 현상들은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 책은 세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서 썼다고 한다. 이 말대로 전문지식이 많이 없는 일반인들도 읽기 쉽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자면 깊이 들어가지 않고 대략적인 이해만을 돕도록 했기 때문에 머리 아플 즈음 되면 다른 이야기를 한다. 넓은 독자들을 겨냥한 책들의 대개 아쉬운 점이 그렇듯이 너무 대략적이고 다양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뭔가 좀 허전하고 빠져있는 느낌도 든다.

 

사실 이 책에 대해 쓰기가 참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특별한 점을 발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특별하지 않은 주제로 특별해 보이는 책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일반인이 접하기 어려운 주제이고 또 패러독스라는 흥미로운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흥미롭고 좋은 책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해 보인다. 보는 내내 지루하진 않았다. 그리고 읽을 가치도 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아. 그래?'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한 번 쯤 읽어도 좋은 책이다. 하지만 주제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끼워 넣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눈에 역설이란 렌즈를 살짝 덮어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볼 수는 있지 않을까?



d****7 2012.12.25.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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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 역설이 존재한다. 생명에도
"모든 것에 역설이 존재한다. 생명에도" 내용보기
거창한 주제다.생명 뿐 아니라, 사회와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로서 ‘패러독스’, 즉 역설을 내세우고, 이를 통해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다.   모든 것에 역설이 존재한다. 자아와 타자, 삶과 죽음, 우연과 필연, 물질과 정신, 부분과 전체, 창조와 파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본성과 후천성, 서술과 설명 등등. 여기서 역설, 패러독스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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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주제다.

생명 뿐 아니라, 사회와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로서 패러독스’, 즉 역설을 내세우고, 이를 통해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시도다.

 

모든 것에 역설이 존재한다.

자아와 타자, 삶과 죽음, 우연과 필연, 물질과 정신, 부분과 전체, 창조와 파괴,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본성과 후천성, 서술과 설명 등등.

여기서 역설, 패러독스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엄마가 아기를 잘 돌보는 것은 아기를 위한 이타주의일 수 있지만, 자신의 자손(유전자)을 잘 보존하려는 이기주의의 한 방편일 수도 있다.

,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패러독스, 역설은 세계의 근본이며, 이런 역설적 관계를 파악해야만 세계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쯤에서 보면, 무슨 동양 철학 같은 얘기다.

저자도 한두 군데서 그런 관계들에 대한 인식의 단초가 동양 철학에 존재했다는 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고 모든 게 옳고, 모든 게 그르다는 식의 도사 같은 얘기를 펼치는 것은 아니다. (정말 허무한 얘기다!)

저자는 그 지점 위에 선택을 내놓고 있다.

부분을 보는 시각과 전체를 먼저 보는 시각이 존재하는데, 이 시각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그러니 선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은 어느 한쪽의 시각도 완전한 것은 아니라는 자각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게 저자의 주장이다 (“하나의 시각을 선택해야 한다”, 334).

 

세계를 패러독스 투성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기 위한 노력과 함께, 그러한 역설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천적 방안으로서 선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세계관 정립이라는 측면에서 완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의구심이 들고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우선은 비록 쉽게 쓰기 위한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과학적 증거들이 빈약하다. 몇 가지의 박테리아와 곤충, 그리고 과학사를 가지고 이 거창한 세계관을 설득하기에는 조금 지나친 도약인 듯하다.

그리고, ‘완전하지 않음을 인식하면서도 한 시각을 선택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사실 너무 안이하거나 너무 당연한 말이다. 거꾸로 한다면, 과학 활동에 있어서 부분적인 면, 즉 환원적인 시각으로 과학을 한다고 하더라도 전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얘기는 너무 당연하면서도 흔한 얘기다.

비록 흔하지 않은 얘기를 듣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안이하게 당연한 얘기를 듣는 것은 잔소리 같아 보인다.

또한 선택이라는 것을 과학에까지 적용할 때는 약간 무리가 가는 측면이 있다. 아인슈타인이나 베게너, 다윈이 새로운 세계관을 선택함으로써 과학의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는 것은 인정을 하지만, 그것이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은데 선택(여기선 강력한 선택이라는 용어로 차별화시키지만)했다는 것은 과학적 진실을 추구하는 과학적 활동을 너무 상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 이게 특히 과학자가 하는 말이라 더욱 그렇다.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에서 그 비슷한 논리를 보지만, ‘패러다임이 전체 과학자 사회를 상정한 것이라면, 여기선 오히려 과학자 개인을 상정하는 의미가 더욱 강하다. 과학에서 어떤 이론을 받아들이냐를 그저 개인의 선택정도로 낮출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적 진리에 대한 (접근하는) 시각(과학과 지식의 한계)과 과학에 있어서 설명과 서술에 대한 시각 등은 신선하다.

솔직하게 말해, 이런 정도만이라도 한 권의 책에서 얻을 수 있다면 충분히 값어치가 있는 독서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한 권을 읽으면 계속 감탄을 하고, 뭔가 가르침을 받는 것 같은 책이지만 나중에 가면 그 내용들을 다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고, 그저 한두 가지 인상 깊은 부분만 있고, 다른 부분은 그저 그랬던 책이지만, 나중에 그 인상 깊은 내용이 그 책에 대한 인상으로 깊게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이 책에 대해서, 지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로 도달 가능한 그 지점이란 것이 정확히 어디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지점에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알 도리가 없다. 우리가 두 개의 과학이론을 비교해서 어떤 것이 더 나은지를 보려는 소박한 목적을 추구한다 해도, 누구도 한 이론이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의 수를 세는 데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곧 난관에 빠지고 만다.” (312)



(2012. 12)

YES마니아 : 로얄 n*****m 2015.11.1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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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읽는 코드, 패러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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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독스.. 즉 역설이란 '참된 명제와 모순되는 결론을 낳는 추론'이라는 정의를 갖고 있다. [생명을 읽는 코드, 패러독스]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깊은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패러독스의 즐거움을 맘껏 보여주고 있다. 패러독스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쉽게 예로 들어지는 문장은 바로 "자유에는 자유를 포기할 자유도 포함된다" 라는 것이 아닐까? 이를 통해..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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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독스.. 즉 역설이란 '참된 명제와 모순되는 결론을 낳는 추론'이라는 정의를 갖고 있다. [생명을 읽는 코드, 패러독스]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깊은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패러독스의 즐거움을 맘껏 보여주고 있다. 패러독스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쉽게 예로 들어지는 문장은 바로 "자유에는 자유를 포기할 자유도 포함된다" 라는 것이 아닐까? 이를 통해.. 우리가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에 대한 또다른 사색이 가능해지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시사점이 특히나 많았다.
특히, 학창시절 [패러독스 이솝우화]라는 책을 상당히 좋아했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내내 생각의 범위가 넓어지고, 내가 알고 있던 이야기들에 끊임없이 제시되는 반론과 논증의 과정이 매우 흥미로웠다. 인간이나 유기체, 무생물뿐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 특히 인상적이던 정치.. 민주주의의 역설에 이르기까지 많은 패러독스를 만날수 있는 책은 정말 오래간만이다. 물론, 이솝우화를 패러독스로 해석한 책에 비해서는 그 난이도가 상당히 높아서 꽤 오랜시간 공들여 읽어야 하는 책이였지만.. 순간순간 지적 호기심이 자극되고 만족되는 행복감 또한 높아졌다.


가장 내가 이해하기 쉬웠던 이야기는 바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이다. 호모로퀜스라는 말이 있듯이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인간의 특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의 범위가 정말 무궁무진하고.. 다양한 종간의 대화나 심지어 유기체가 형성되는 과정.. 즉, 인간의 수정체가 분화되는 과정에까지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색적이였다. 이를 커뮤니케이션으로 인정할 것인지.. 아닌지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일수 있다. 과학에서까지 하나의 명제로 모든 것을 정의할 수 있는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고 한다. 선택하는 관점에 따라 그 해석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패러독스가 존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을 인간과 세상의 대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며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 떠올랐다.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 어떤 대답이 돌아오느냐에 따라 그 발전의 범위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는 세상과 인간의 대화뿐 아니라.. 인간의 내적대화에서도 의미가 있다. 우연과 필연의 패러독스를 읽으며.. 나는 내적대화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다양한 방향과 각도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와 자극이 끝없이 이루어진다는 것.. 

a******e 2012.12.3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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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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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 생명을 읽는 패러독스 저 자 : 안드레아스 바그너   “생명현상에서는 자아와 타자, 부분과 전체, 안전과 위험, 우연과 필연 등이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수렴된다. 상반된 두 개념은 ‘생명’창조 과정에 깊이 개입되어 있다. 분자적 관점에서 단세포 유기체가 하나의 복잡한 다세포 유기체로 창조되는 과정은 이들 패러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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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 생명을 읽는 패러독스

저 자 : 안드레아스 바그너

 

“생명현상에서는 자아와 타자, 부분과 전체, 안전과 위험, 우연과 필연 등이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수렴된다. 상반된 두 개념은 ‘생명’창조 과정에 깊이 개입되어 있다. 분자적 관점에서 단세포 유기체가 하나의 복잡한 다세포 유기체로 창조되는 과정은 이들 패러독스가 결코 분리될 수없음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패러독스는 생명창조 및 진화의 복잡한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다양한 목적을 향해 미세하게 조절되고 통합되며 우연적으로 완벽하게 맞아떨어져 진행된다. 미세 분자의 형태 (예로, DNA문자서열)가 세포군집, 더 나아가 한 개체, 친족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불확정성 원리가 지배하는 무수한 우연적인 현상들은 생명이라는 필연의 세계를 창조한다.” --> 과학책을 읽다보면 내가 과학을 읽는 것인지, 철학을 읽는 것인지 구별이 안 갈때가 많다. 이 책도 그렇다. 처음에는 생물학과 관련된 책인 줄 알았는 데, 지구상의 생명들이 얽히고 살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생존의 아주 깊은 가치들을 깨우쳐준다.

 

"세계는 역설로 가득차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역설에서 헤어나지 못할 수있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역설을 다루는 두 가지 규칙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역설에 직면하게 될 경우 이를 무시하지 말라. 역설은 지식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같아서 역설을 피하는 사람은 결코 지식의 세계에 들어갈 수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역설을 탐구하고, 발견한 역설에서 이상한 측면을 샅샅이 검토하고 역설에 몰입할 것을 권한다. 둘째 역설에 빠져 절망할 경우 역설의 한쪽을 선택해 그것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선택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 지 보라. 그러나 당신이 선택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저러한 역설속에서 우리의 선택 능력이 커질수록 얻는 것도 많지만, 동시에 포기해야할 것도 많아진다. 충분히 대담한 선택을 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우리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는 매우 두려운 일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엄청난 창조의 자유를 준다.“ -->역설이라는 단어가 전혀 얼토당토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는 사람들간의 대화가 재미있어졌다. 그렇다고 남의 말꼬리를 잡아서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모순간의 합일점을 찾는 것도 회사를 경영하는 과정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다세포 유기체들은 여러 면에서 단세포 유기체들과 달랐지만,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다세포 유기체가 죽으면 그의 세포들도 함께 죽는다는 것이었다. ...... 이제 빠르게 분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단세포 유기체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이 단세포 유기체는 빠르게 분열하라에만 매달릴 수없다. 이 단세포 유기체가 여러분이나 나같은 다세포 유기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포기해야 할까? 우선 단세포 유기체들이 만들어내는 분열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생명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 내 몸안에는 수조개의 세포가 구성되어있다. 이 수조개의 세포는 나라는 존재를 만들기 위해 태어나지만, 또 나를 위해 죽어야 한다. 자기를 죽여야만 내가 산다. 이 얼마나 멋진 모순인가!

 

“첫 째 가장 분명한 것은 위험은 가치의 문제라는 것이다. 위험한 결정을 할 때 잠재적인 이익 혹은 손실을 감수하는 이유는 그 결정이 결정자에게 중요한 가치를 갖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둘째, 결정자가 아닌 제3자의 시각으로 보는 것은 사실 기만이다. 사람이든 박테리아든 결정자의 시각에서 그리고 결정자의 위험 평가능력의 견지에서 문제를 봐야한다. 셋째, 완전한 정보를 갖는 것은 사람이든 박테리아든 원칙적으로도 불가능하다. ...... 위험은 확률을 알고 있는 경우에만 계산할 수있다. ....... 위험과 불확실성을 구분해 말하자면, 모든 실제 삶의 결정에는 불확실성이 도사리고 있다.” --> 갈수록 과학책이 재미있어지는 이유는 인문학처럼 뻔하지가 않아서 있다. 그 안에서의 놀라운 생명과 우주의 사례들이 있고, 그 때마다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d*****u 2013.10.0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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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독스로 읽는 자연과 인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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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동물의 왕국’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즐겨 봐왔다. 인간이 중심인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아닌 동물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생명의 신비는 항상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항상 인간 중심으로 생각한 탓에 인간들의 세계에서만 협력, 이해, 다툼, 공생, 삶, 죽음이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세포와 같은 작은 생명체에서부터 거대한 동물에 이르기까지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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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동물의 왕국’과 같은 다큐멘터리를 즐겨 봐왔다. 인간이 중심인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아닌 동물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생명의 신비는 항상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항상 인간 중심으로 생각한 탓에 인간들의 세계에서만 협력, 이해, 다툼, 공생, 삶, 죽음이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세포와 같은 작은 생명체에서부터 거대한 동물에 이르기까지 동물의 세계에서 읽는 자연의 신비로움은 한 편의 거대한 스펙타클을 보는 듯 흥미로웠다.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는다면 그냥 스쳐지나갈 법한 이야기들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모르고 지내온 엄청난 세상이 자연과 동물의 세계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는 자연과 동물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볼 수 없는 숨겨진 의미의 세계, 더 나아가 자연의 진리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지은이 안드레아스 바그너는 자연과 세계를 독특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패러독스(paradox)’의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세계는 패러독스로 가득 차 있으며, 패러독스를 기초로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패러독스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는 ‘역설(逆說)’이다. 서로 정반대되는 것들이 이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생각은 이제까지 인과론적 세계관에 길들여져 있는 나에게는 색다르게 와닿았다.

 

책은 총 10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자아와 타자, 부분과 전체, 번영과 멸종, 삶과 죽음, 우연과 필연 등에 관한 패러독스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결정론적 시각의 취약성과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발견한 자연법칙도 자연을 해석하는 하나의 확률법칙일 뿐 자연의 내적 적합성을 말해주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지은이는 자연과 세계의 모든 곳에 존재하는 역설적 관계의 상호성을 파악해야만 인간과 생명을 보다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역설적 관계에 관한 다양한 예시와 사례를 읽다보면, 자연과 생명의 패러독스에 관한 지은이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고 흥미롭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생명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범위와 정도를 훨씬 초월하는 세계였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간을 포함한 무수한 생명체와 과학 현상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존재하는 우연과 필연의 역설적 상호관계는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패러독스는 패러독스가 자연과 동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사회와 세계를 이해하는데도 하나의 틀이 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우리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지고 있지만, 자연과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도 매일 패러독스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에 관한 이야기여서 일반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들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는데 지은이의 풍부한 설명과 논증은 누구나 편하고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읽기 쉬운 점 과 함께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과학적인 관점을 뛰어 넘어 패러독스를 통해 인간 존재와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에 이르게 한다는 점이다.

 

이 책의 제목만 보면 과학에 대한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은이가 들려주는 생물학적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본성과 핵심에 대해 알 수 있고, 더 나아가 인간 사회와 세계에 대한 이해와 함께 철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이 지구상에는 인간만이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c*****1 2013.01.0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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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 曰 "모든 것은 은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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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굉장히 흥미로운 머리말로 시작한다. “근본적인 역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지식이 종말을 고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우리가 역설 앞에서 자신의 입장, 즉 자아와 타자, 본성과 양육, 물질과 정신을 놓고 어느 한쪽을 근본으로 보는지 선택해야 할 경우가 자주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선택한 진리들이 결국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고,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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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굉장히 흥미로운 머리말로 시작한다. “근본적인 역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지식이 종말을 고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우리가 역설 앞에서 자신의 입장, 즉 자아와 타자, 본성과 양육, 물질과 정신을 놓고 어느 한쪽을 근본으로 보는지 선택해야 할 경우가 자주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선택한 진리들이 결국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고, 그래서 우리의 지식에 한계가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어떤 진리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과연 자신을 버리고 타자를 위해 행동하는 유기체가 있을는지. 이것은 이타주의가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이어질 텐데 결국 우리는 앞서 말했다시피 이런 역설적인 상황 속에서 한쪽을 선택해야만 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비록 그 선택이 아무리 제한적이고 부적절하며 결국엔 틀린 선택이라고 해도. 이러한 유기체들 간의 상호작용 중 특별한 한 가지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는데 바로 섹스다. 섹스는 종족을 번식할 수 있는 개념이므로 섹스를 가능케 하는 두 유기체는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에 속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그 둘이 번식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살고 있는 유기체 집단인 군락(population)을 형성해야 한다. 그러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여기에는 경쟁이라는 요소가 작용하게 된다. 이 시점에서 저자가 적어놓은 탈무드의 구절을 볼 수가 있다 ㅡ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이것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법이며, 나머지 법령은 모두 이 법의 해설서다.” 그럼 생명의 목적은 뭘까(생명의 목적이 있을까). 삶의 양식에 대한 구속과 이에 따른 기회는 한 동전의 양면이다. 헌신과 구속은 기회를 낳고, 그 뒤에는 자유가 뒤따른다. 그런데 자유에는 구속이 필요하다. 무엇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유이기 때문에, 자유는 벗어날 그 무엇(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반대로 그렇게 해서 얻은 자유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은 그 선택에 대한 헌신과 구속을 창조한다.(p.203) 한 시각에서 보면 유기체들이 운명적으로 연결되었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데서 역설적 긴장이 발생한다. 우리는 두 시각을 동시에 인정할 수 없다. 이런 긴장 때문에 유기체가 다른 유기체를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지 아니면 모든 유기체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발생한다. 물론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역설을 피하는 존재’로 묘사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자유와 힘은 역설이 초래하는 혼란만큼이나 불안정한 결과를 하나 갖고 있다. 우리가 진정한 선택을 할 힘을 갖고 있다면 누구(무엇)도 뒤에서 우리를 받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이 궁극적인 권위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u******o 2012.12.3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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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패러독스"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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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부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삶의 많은 부분을 행복하지 않은 일에 바치는 것 같다. 이렇게 우리의 역설적인 삶들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인 삶을 강하게 의식하지 않는다면 우린 또 다시 관념에 사로잡히고, 역설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망각한다. 삶에 있어 패러독스를 의식하고 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과학이 객관적으로 정해준 지식과 의미를 그대로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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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부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삶의 많은 부분을 행복하지 않은 일에 바치는 것 같다. 이렇게 우리의 역설적인 삶들은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인 삶을 강하게 의식하지 않는다면 우린 또 다시 관념에 사로잡히고, 역설이 존재한다는 사실 또한 망각한다. 삶에 있어 패러독스를 의식하고 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과학이 객관적으로 정해준 지식과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좋을까? 분명 정답은 없다. 우리는 옳다는 것은 거짓이다는 역설의 대전제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우유부단한 성격은 항상 역설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문은 문이라는 것이 옳은 것일까? 벽돌을 양쪽으로 쌓아놓고 문을 그 위에 얹어 식탁으로 사용하면 그것은 문인가? 식탁인가? 이런 류의 생각을 자주 하게 된 것은 정치에 관해 명확하게 갈려진 의견들 때문이었다. 나 또한 진보나 보수 어느 쪽의 입장에 서있지만 주위사람들과의 만남에서 그들과 다른 쪽의 의견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입장의 말을 하면 그들은 거칠게 거부하고 그들의 입장에 한층 더 강한 벽을 쌓는다. 이렇게 해서는 요즘의 중요한 이슈인 통합자체가 있을 수 있을까? 그들이 옳다고 확신하는 그것들은 과연 옳은 것일까? 그것이 패러독스를 의식하지 않고 패러독스에 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난 서서히 회색분자란 말까지 듣게 된다. 하지만 난 분명히 한쪽 진영을 선택했다. 다만 상대방의 의견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

 

[생명을 읽는 코드, 패러독스]는 주로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의 패러독스적인 삶을 소개한다. 그것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소립자에서부터 광활한 우주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다룬다.(하지만 책에서 소개되어지는 생명체는 한정적이다. 주로 박테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책의 뒤편으로 갈수록 인문학적인 이야기들을 패러독스와 엮어나간다. 저자는 과학에서 얻은 패러독스를 인간들의 삶에 그려나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렇게 과학과 인문학은 다시 하나가 된다. 책과 관련 없는 말이지만 과학과 인문학이 분리된다면 과학이 존재할 의미나 있을까? 또한 과학이 없는 인문학은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 다는 브뤼노 라투르의 말이 새삼 생각난다. 이 또한 과학과 인문학이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어디까지가 과학이고 어디까지가 인문학인지 모를 역설을 품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이것을 어쩔 수 없다. 패러독스 자체가 답이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지금 서평을 쓰고 있는 이 나의 생각으로 쓰는 것일까? 아니면 내 안에 존재하는 세포들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쓰는 것일까?

자아와 타자는 분리 되어 있는 것일까? 오바마와 나,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아이들과 나는 분리되어 있는 것일까?

나는 전체인가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는가? 세포들에 의해 이동하는 박테리아는 전체가 움직이는 것인가 부분이 움직이는 것인가? 종족 번식과 먹이 수집 등 일의 구분이 나눠져 있는 개미집단은 전체인가 아니면 부분의 개미에 의해서 구성된 것인가?

엄마가 자식에게 희생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인가? 이타적인 것인가? 자식들이 부모의 세포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감안할 때 부모가 가진 세포의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해 분신하는 노동자와 친자식이 아닌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어른은 이기적일까? 이타적일까 

이 외에도 저자는 우연과 필연, 안전과 위험, 번영과 멸종 등에 관해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사실 이 책은 넓은 영역에서 협소한 개체들을 가지고 패러독스를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은 지면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억압되어야지만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 국민들의 선택에 의해 언제든지 독재정치로 바뀔 수 있는 민주주의 등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사회 속에서도 수많은 패러독스에 봉착해 있다. 어떤 사람은 칼 같은 선택에 의해 이를 숨기기도 하고 어떤 이는 패러독스에 빠져 위험에 봉착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수많은 패러독스의 질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자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럼 선택을 해버리면 그것이 관념이 되어 버리고 의식 속에서 패러독스는 사라지 것이 아닐까?

 

그런 선택은 우리가 선택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그리고 그런 선택을 궁극적인 진리와 혼동하지 않을 때 가장 강력해진다. 또한 그런 선택은 그것이 참여하는 대화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런 선택이 대화를 어떻게 진행시키느냐를 통해서만 정당해진다.” 이 책(334p)

 

우리는 선택을 하되 그것을 진리인양 혼동해서는 안 된다. 과학이 이루어야할 최종적인 지식이 없음의 인정 속에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진행시켜나가는 속에서 창조와 발전이 있을 것이다. 과학에 최종적인 지식이 있다면 분명 그 테두리의 벽이 있지만 패러독스를 인정하면 그 창조의 벽의 테두리는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유리막이지 않을까 

 

저번 주인가? 누나와 닭에 관한 이야기(닭 가슴살)를 하고 있었는데 TV를 보다가 우리의 말을 놓친 조카가 알이 낳은 닭? 그 닭?” 이란 말을 했다. 알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논하기는 하지만 알이 낳은 닭그 말은 굉장히 신선하게 들렸다. 그래서 난 한참 후에 그래 알이 닭을 낳는 것일 수도 있지.”라는 대답을 하며 한참 웃었었다. 이런 것이 사소하지만 역설 속에 숨겨진 창조의 힘이 아닐까? 우리는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고 갈수록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심화되어가고 있다. ‘너와 나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통합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으면 아래의 모든 말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은 은유다.” -괴테-

우주는 원자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뮤리엘 러카이저-

내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지우는 손만이 진실을 쓸 수 있다.”-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학문의 목적은 무한한 지혜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오류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w*******5 2012.12.28.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애송이 사회과학 덕후가 본 자연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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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경험, 지식, 정보 따위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있다. 습득된 교육과 노출되어 떠돌아다니는 미디어의 토사물들은 큰 의미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간절히 바라고 고대하던 일이 바라던 결과와는 딴판으로 귀결되었을 때 찾아오는 허탈함과 상실감은 말할 수 없다.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상에서부터 지구와 생명의 역사가 몇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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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경험, 지식, 정보 따위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때가 있다. 습득된 교육과 노출되어 떠돌아다니는 미디어의 토사물들은 큰 의미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간절히 바라고 고대하던 일이 바라던 결과와는 딴판으로 귀결되었을 때 찾아오는 허탈함과 상실감은 말할 수 없다.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일상에서부터 지구와 생명의 역사가 몇 천 년이건 수십 억 년이건 간에 생명의 역사는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 바로 내 눈앞에 펼쳐졌을 때 비로소 나는 나의 말할 수 없는 존재의 가소로움을 자각한다. 또한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 일견 가장 트렌디하고 세련되며 선구자적인 것 같아 보였던 팬덤에 가려져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의 고민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인가? 라는 고민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 책 「생명을 읽는 코드, 패러독스」는 꽤 어려운 책이다. 원래부터 자연과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일부러라도 이런 책은 펴보지도 않는데 어쩔 수 없다. 내가 이해한 이 책의 주제는 간단하다. ‘우리가 모조리 이해하고 있다고 하는 생명세계의 가장 미스터리는 우리가 모조리 이해하고 있다고 여기는 착각이다.’라는 것이다. 생명의 긴장과 신비로움과 경이로움과 다이내믹함은 그 어떤 최고 경지의 예술가, 과학자, 공학자가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꽤나 교만하고 어리석어서 마치 수십, 수 백년 만에 생명의 역사를 추월한 것처럼 생각한다.

 

“자연과 세계를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 하나를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패러독스’의 인식이다.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패러독스로 가득 차 있으며, 패러독스를 기초로 구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p.6)

“사람들이 정말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걸까? 아니면 결국 자기를 위한 걸까?” (p.66)

“완전히 우연의 문제다.” (p.77)

 

인간세계와 생명세계, 생물세계와 무생물세계. 우리가 인식하고 경험하는 거의 모든 세계에 내재된 패러독스를 비교하고 분석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물론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흥미를 느끼지도 못하며 호기심이 없는 자연과학 분야에 대한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하고 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나의 주된 관심 분야인 사회과학 분야의 책이라면 신이 나서 읽고 정리하고 쓰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이해하고 정리한 만큼만 쓸 수 있다. 자연과학 분야를 바라보는 애송이 사회과학 덕후의 서평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앞서 길게 늘어놓은 대로 모든 분야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개인적으로 정의한 ‘일상’에서는 여러 가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패러독스’의 개념일 수도 있다.


 

“생물 세계와 무생물 세계에는 매우 근본적인 ‘역설적 긴장들’이 존재하고 있다. 둘째, 이 역설적 긴장들은 인간에게 거대한 힘을 제공함으로써 지금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p.349)

 

저자는 ‘패러독스’라는 개념을 세계를 지탱하고 유지하는 중요한 구심점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면 애인 사이에도 이러한 적절한 ‘역설적 긴장’은 애인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더 발전된 관계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동인이 될 수 있다. 사람관계, 특히 남녀관계에서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영화 같은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주장한다. 확신한다. 그런 일방적인 사랑은 굉장히 위험하고 위태롭다. 인간은 그 어떤 생명세계의 존재보다 미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고받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다면 주고받는 것도 늘 좋기만 하나? 절대로 아니다. 때론 오해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삐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고 울고 웃고 질투하고 배려하고 지적하고 칭찬하고 지시하고 순종하고 약속시간에 맞춰가고 일부러 늦게 가고 하면서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늘 배려하고 져 주고 사랑을 쏟아내고 기다리고 참고 한다면 그 사람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가 꽉 움켜쥐면 타다 만 신문지 으스러지듯 사라져버릴 것이다.

친구관계, 직장 내 동료들과의 관계, 종교단체 안에서 구성원들 간의 관계, 온라인 안에서의 관계 등 인간이 맺고 속할 수 있는 모든 관계의 망 안에서 이러한 패러독스의 개념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을 거치며 지금의 생명세계를 만들어 낸 그 ‘역설적 긴장’의 찬란한 설계 도면을 우리가 살아내는 일상의 삶에서 그려내야 한다.

 

“오늘의 세상이 단세포 유기체들이 살았던 30억 년 전보다 더 안전하고, 더 예측 가능하며, 덜 위험할까? 우리가 하는 배팅이 유전자물질을 무작위로 바꾸는 식의 도박을 하는 박테리아의 배팅보다 안전할까? 우리가 하는 많은 도박이 다른 유기체들이 하는 도박보다 훨씬 위험할 수 있다. 우리의 도박은 종국엔 우리 목숨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성까지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p.205)

 

아주 작은 단세포 유기체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끈을 이어져 오기 위해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역경을 견뎌왔을 것이다. 때론 싸우기도 하고 투쟁하기도 하며, 또는 살아남기 위해 상대를 없애기도 하며 그렇게 살아남은 것일 게다. 그래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소중하고 고마워해야 한다. 오랜 시간을 이어 온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는 인간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생명을 건 단세포 유기체의 도박과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생명을 담보로 한 인간의 도박은 그 형태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결과는 아주 다를 것이다. 단세포 유기체의 도박은 생명의 진화를 거듭할 수 있는 이유와 동기가 되었지만 인간의 도박은 저자의 지적대로 인간 자체를 파괴하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기체, 무기체, 생물, 무생물들이 그려 온 생명의 도화지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l****h 2012.12.3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