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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욕망하는 행복 속에 '함정'이 있다.【행복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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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은 나에게 참 많은 일이 있었던 한 해였다. 그 중 가장 충격이 오래갔던 건 지인의 죽음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기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호탕하고 시원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더 그랬다.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지만 가족의 말에 의하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우울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가 겪고 있는 정신질환이다. 그 안에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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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은 나에게 참 많은 일이 있었던 한 해였다. 그 중 가장 충격이 오래갔던 건 지인의 죽음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기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호탕하고 시원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더 그랬다.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지만 가족의 말에 의하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우울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가 겪고 있는 정신질환이다. 그 안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을 극복하느냐 못하느냐는 순전히 자신의 의지에 달린 것이고 말이다. 아무튼 그때 지인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다가도 가족 앞에서는 사는 게 지겨운 듯, '불행하다'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한다. 돈이 없어서, 가족이 없어서, 직장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타인이 보기에는 모든 걸 가진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자기 안의 상실감에 사로잡힌 채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렀던 걸지도 모른다. 삶에는 희로애락이 적절히 공존해야 한다 생각한다. 수영 선수 이언 소프의 주장처럼 고통의 순간도 있어야 참다운 나를 볼 수 있다. 남들보다 뛰어나고 싶은 욕망, 시기, 질투가 현대 사회의 발전을 이룬 주요 원동력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항상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과잉으로 치달을 때 야기되는 폐해 또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과 부, 명예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물질적 수치는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완벽해지기를 열망하기에 더 갖지 못하고 남들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불행하다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게 아닐까. 불행의 반대는 행복이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의 문은 쉽사리 그 자물쇠를 끌러주지 않는다 여기기에 이토록 극단적인 선택,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일 테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몇 해째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그에 따라 올해 OECD가 발표한 국가별 행복지수는 36개국 중 24위로 지난해보다 두 단계 상승했지만 여전히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인구 70만의 히말라야산맥 기슭에 자리한 부탄이라는 작은 나라는 지난해 행복지수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이곳은 90년대에 들어서야 TV가 보급됐고 국민총소득이 2천 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이 나라 국민의 97%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통계적으로 나온 수치만으로도 '행복'의 척도가 결코 물질과 자본으로 충족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더 잘 살고 1인당 GNI(2만 달러)가 현저히 높음에도 불행한 삶을 대변하는 듯한 자살률은 매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가는 것일까? 이는 과잉욕망, 과잉경쟁이 초래한 마음의 빈곤 때문이다. 가졌으나 불행한 사람들이 늘어가는 곳, 그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현주소다.

 

 

그렇다면 우리는 꼭 행복해야 하나?

 

여기저기 행복론에 관한 책이 쏟아지더니 급기야 과잉 행복론에 빠진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행복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담은 책까지 세상에 나왔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행복이다. 행복은 곧 성공한 인생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행복하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의 전형이나 마찬가지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은 행복은 추구해야지만 얻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과한 욕심을 버려야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가? 같은 명제에 부딪힌다. 물욕, 소유와 무소유의 삶을 두고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선을 긋듯 단정할 수는 없다. 행복이라는 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감정의 만족에서 오는 게 1차적이고 기준과 척도는 2차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정적 행복에는 결여돼있으면서 외형적 기준 따라잡기에만 급급하다. 왜 행복해져야만 하는가? 행복하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인가? 같은 난제에 고립된 상태에 있는 내게 이 책은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게 하는 책이다. 과연 행복은 추구해야 이루어지는 것일까? 행복을 '추구'한다에서 이미 역설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행복은 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질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얻게 되는 충족이다. 이 책은 심리, 철학, 경제, 건축 분야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인간이 과잉추구하고 있는 것들을 조목조목 열거한다. 그만큼 행복이라는 화두가 인간이라면 추구해야 할 삶의 본질과 밀접하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적 현상으로 이어지는 문제를 되짚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 현상들 안에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무한 행복추구론에 따른 결핍과 모순, 함정이 산재해있다. 방법론을 제시하기보다는 현시대의 문제점을 꼬집고 읽는 이들이 성찰하고 각성하기를 바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책을 읽다 보면 끊임없이 왜.왜.왜. 같은 질문이 쏟아진다. 안락함을 추구해야 할 집의 비대화,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할 예술의 과장된 미적 추구, 잘 먹는 게 곧 부의 상징이라 여기는 척도에 따른 비만. 모든 것이 과하게 부영양화된 우리 삶의 한 단면을 나타내는 모습들이다. 행복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더 가지고 싶은 과잉욕망 앞에서 인간은 무너진다. 그리고 이 과잉욕망은 작은 성취, 만족에서 멈추기를 거부한다. 끝없는 과잉의 되풀이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욕망하는 행복 속에 함정이 있다.

 

"미래의 사람들은 자유의 부재가 아니라 자유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초고도 산업의 딜레마인 <과잉 선택>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43p

 

40여 년 전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말은 현실이 됐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사람은 그에 발맞춘다. 모두가 추구하는 건 행복이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그렇다면 그 행복의 척도와 기준은 어떻게 가늠하느냐가 주요 쟁점이다. 눈에 보이는 부유함만이 행복의 기준을 나누는 절대적 고지에 올라있다. 2~3시간이면 서울과 부산을 오가고 하루 이틀이면 지구 반대편에 당도할 수 있는 빠르고 편리한 시대다. 부유한 삶, 성공한 삶을 욕망하고 추구할수록 상대적으로 인간의 상실과 결핍은 축적돼간다. 거대한 부를 창출해냈고 해나가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행복에 대한 기대와 욕망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 기대 속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저자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 속 함정으로 앞서 언급한 예술과 건축에서 추구하는 과한 '미'를 꼽는다. 소박한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고 더 개성적이고 실험적이고 기하학적인 예술과 건축의 발전 앞에서 이를 '추함'이라 가리키며 난색을 보이고 있다. 미술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에서 비롯되고 건축은 인간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안식처 이상의 과한 기능으로 발전하고 있는 데 대해 강한 비판을 한다. 인간의 신체에서는 '비만'을 이 시대의 주요 질병이 된 데에 대해 이 또한 과한 욕망이 낳은 폐해라고 역설한다. 잘 먹고 잘 살자가 인간들의 모토 아닌 모토이다. 그런데 이도 소유하고 가진 만큼 과시하기 위해 더 잘 먹고 많이 먹음으로 인해 결국 범세계적 질환으로 떠오른 '비만의 시대'가 도래했다. 또한 행복해지기 위해 돈을 벌고 사회는 발전한다는 명목하에 오로지 '이익 창출'에만 급급해 있다. 행복과 반대되는 불행을 나타내는 기하학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예술을 높이 칭송하며 그 예술품을 사는 데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하길 서슴지 않는다. 예술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예술 자체를 즐기지 않고 그 예술품을 소장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 같은 게 행복의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인간은 이 시대(=인간)가 만들어낸 포퓰리즘에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눈에 보이지 않는 행복의 함정에 발을 들이는 격이다. 외형적인, 눈에 보이는 것들의 휘황찬란함에 매혹 당해 본질적인 가치는 잊고 있다. 그래서 경쟁한다. 남들만큼 성공하고 갖추어야 행복해진다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따라잡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이제 행복도 경쟁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현시대는 본질은 기만한 채 보이는 것에만 급급할 뿐이다.

 

 

과연 많이 소유한 삶이 행복한 삶일까. 

 

격변하는 시대상 안에서 파생되는 행복의 함정- 부영양화, 과잉욕망은 결국 우리를 더 불행의 늪으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 한 예로 모더니즘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변화해간 양상 안에는 사람들이 열광하는 하나의 진리이자 논리적 판단, 현실을 넘어선 다원주의, 탈 이성적 사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소비문화 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이 그 자유로움으로 인해 오히려 모더니즘의 폐해에서 탈피하고자 했던 추함을 부추기고 끊임없이 과잉행복에 목말라 하게끔 하고 있다. 과잉행복의 추구는 과잉욕구를 낳고 그것이 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폐단이다. 이는 즉 정신의 풍요를 넘은 물질적 풍요와 정상의 범주를 넘어 그로테스크하게 도식화된 행복의 함정이다. 저자는 과한 아름다움의 추구가 추함으로, 과한 물욕이 과대망상으로 변질해가고 있는 현시대에 와비 사비わび·さび 정신이 인간 그리고 살아가는 환경, 모든 것에서 필요하다 주장한다. 이를테면 소박한 것에서 찾는 행복, 세속적인 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미덕, 고유한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무소유의 정신 같은 것들 말이다. 쉬운듯하지만 참으로 쉽지 않은 건 분명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정 행복하다 말하기 불편한 게 아닐까. 행복하다 말하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해지는 거 아닐까. 마음속엔 항상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 게 현실이고 누구에게나 깃든 욕망이기 때문에 말이다. 행복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본질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남들과의 비교보다는 만족할 줄 아는,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게 최우선의 과제인 것 같다. 교과서적이고 진부한 말로 들리겠지만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행복과 불행의 간격은 절대 넓지도 않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조금 덜 욕심 내고 조금 더 배려하며 살면 행복의 문으로 다가가기 한층 더 쉬워진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우리는 너무 잊고 사는 것 같다. 행복이란 건 눈에 보이지 않기에 때론 함정 속으로 헛발을 디딜 수도 있다. 그것을 의식하고 자각했다면 외양적인 행복만 맹목적으로 좇아갈 것이 아니라 소박하나 가치 있는 '나의 행복'을 좇아가야 한다는 걸 명심해야겠다.

 

 

 

 



w*****8 2012.12.01. 신고 공감 18 댓글 15
리뷰 총점 종이책
당신의 욕망은 누구를 위한 욕망인가? 《행복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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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끝없는 욕망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 욕망을 마주해보면 ‘자아’의 욕망이 아닌 타인에게 길들여진 욕망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끊임없이 소비해야 돌아가는 사회이다. 한마디로 소비자사회. 소비의, 소비를 위한, 소비에 의한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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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끝없는 욕망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 욕망을 마주해보면 ‘자아’의 욕망이 아닌 타인에게 길들여진 욕망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끊임없이 소비해야 돌아가는 사회이다. 한마디로 소비자사회. 소비의, 소비를 위한, 소비에 의한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 살면서 무수한 유혹과 욕망이라는 그물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끊임없이 욕망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민낯이다. 이런 자본주의 사회를 빚 대어 파리의 시인 보들레르는 도시를 매춘부로 묘사하였으며  마르크스 또한 자본주의 사회를 보편적 매춘시대로 표현하였다. 모든 것을 사고파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말함이다. 점점 물질이 종교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종교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현재의 우리들의 모습은 행복을 잃고 배회하는 순례자의 모습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을 쓴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도대체 이 미친 인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알아나 보자는 열망 때문이다.

 

저자 엘리자베스 파렐리는 『행복의 경고』에서 이런 현대인에게 닥친 문제에 대해서 인문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다양한 사고로 행복에 대한 본질을 탐구 한다. 최근의 세계적인 석학들의 모임인 엣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데미안 허스트의 미술작품까지 무척 폭넓은 분야를 종횡무진하며 지적 허영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1장 <육체의 갈망>에서 욕망이 원하는 모든 종착점은 행복으로 만족은 기쁨과 기쁨은 행복과, 행복은 거의 모든 것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며 욕망=만족=기쁨=행복이라는 공식이 성립하여 왔지만, 저자는 이  논리의 연결 마디마디가 명백히 거짓이다라는 것으로 행복의 경고는 시작된다. 

 그 거짓인 것에 대해서 저자는 여러 가지의 연결 마디를 찾아보는 과정을 무척 흥미롭게 풀어가고 있는데 아름다움과 진리가 동일시되던 고대와는 달리 현대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한다. 과거에는 아름다움이 곧 진리로써 연결되었지만,현대는 아름다움이 중심 가치나 일상의 목표로 만드는데 실패하여 모든 것 -거리, 종교,음악 예술-에서의 아름다움을 거부하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다다이즘을 제창한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다다이스트 트리스탕 차라는 ‘아름다움을 별처럼 빛나는 미친 욕망’이라고 묘사한 적이 있다. 아름다움을 진리와 동일시하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미적 기준에 따른 광범위한 합의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움을 거부하며 흘러 온 현대는 불행한 시대이다. 요즘처럼 진리에 대해 모호한 적이 없듯이, 가끔 접하는 대중 매체에서도 진리에 대한 정의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회가 복잡하고 발달함에 따라 가치관의 다양성을 수용하게 된 사회는 확실한 개념이 불명확하다. 더군다나 인터넷의 확산은 현대인들을 현실의 삶보다 허구라는 가상의 세계를 선사하게 됨으로 그나마 있던 개념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개념들이 현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미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으로 사람들은 모두 말라깽이가 되어가고 있고 성형중독과 쇼핑중독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만족을 모르는 질주하는 폭주 기관차의 모습을 띠며 욕망이라는 거대한 불빛에 몰려드는 불나방이 되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 모습들은 가끔씩 보여주는 언론매체를 통해서만 접하곤 했는데 이제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삶을 더욱 피폐케 하는 것 같다. 며칠 전에는 한 지인이 자살을 하였다. 동네에 새로 길을 내고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장식된 멋진 다리를 만든 후 유서 한 장을 남기고 자살을 하였다.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화려하고 멋진 다리를 건널 때마다 그 친구가 생각이 난다. 삶과 죽음의 무상함이야 이제는 알 나이도 되었지만, 서서히 주변에서 죽음을 어떠한 형태로든 맞이하는 모습을 보게 되자 당혹스러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책에도 나와 있지만, 물질적인 부에 대한 강박관념의 증가와 소위 말하는 정보 혁명은 상승 곡선을 그렸다. 지난 40년간 쇼핑 센터는 12배 증가하였다. 쇼핑 센터가 증가한 만큼 자살율도 높아졌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는 삶 속에서 욕망이라는 그물망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사는 행위를 한다. 이런 사는 행위는 보여지기 위한, 타자의 욕망을 위한 것이다.  소비자사회는 이렇게 보여지는 것,모든 것이 전시의 목적을 하기 때문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나는 보여진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인간의 존재를 대변하게 된다고 하였다.

 

 

 

내가 자랄 때에는 연필 한 자루가 귀했던 시절이었다. 연필이 몽당연필이 되었을 때 더 오래 쓰기 위해서 볼펜에 몽당연필을 끼워 아껴쓰던 시절로 나는 지금도 연필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연필이 풍족한 시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연필의 귀함을 모른다. 식탁이나 책상위에 굴러다니는 연필을 볼 때마다 풍족함 속에서의 사물의 하찮아짐을 느끼곤 한다. 비단 이것은 연필이라는 사물만이 아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넘쳐나는 물질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면 모든 것이 풍족한 이 시대에 자살하는 사람도 없어야 할 것이다.  생활의 편리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면, 생활이 편리한 도시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야 한다. 그러나, 욕망이 행복으로, 만족은 기쁨과, 기쁨은 행복과, 행복은 거의 모든 것과 동등한 것(욕망=만족=기쁨=행복)은 아님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은 행복과 생활의 편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페르소나를 벗겨 민낯을 마주할 줄 알아야 우리가 진정 이 사회에서  무엇을 잃고 살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 내가 원하는 행복은 과연 누구를 향해 있는지를,나의 욕망은 누구를 위한 욕망인지를 깨달을 수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음을 저자는 과학,철학,영화,문학등 다양한 분야와  폭넓은 식견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행복의 경고》를 다 읽고 난 후, 내가 바라는 욕망 또한 과연 누구를 향해 있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싶고, 내년에는 차를 바꾸고 싶고, 평수를 더 늘려서 더 좋은 집으로 이사가고 싶다. 누구나 욕망하고 있는 소유에 대한 욕망은 내게도 있다. 그러나,이런 욕망이 행복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소유에 대한 욕망은 태어나면서 자연적으로 인지된, 습득된 욕망이다. 그렇다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타인을 위한 욕망이 아닌 , '나'의 욕망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행복의 경고는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인문학적 소양과 더불어 시대를 읽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넘치는 물질의 풍요 속에 점점 빈곤해지는 영혼의 시대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는데 있지 않고 얻은 것에 만족하는 데 있다." p273


*오타 p136 두번째줄 이렇기 →이렇게
YES마니아 : 로얄 k********2 2012.12.01. 신고 공감 7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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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만큼 행복해야 할까? 행복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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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만큼 행복해야 할까  행복의 경고   행복이 왜 우리에게 빨간 불을 켜면서 경고를 할까? 빨간 불이 켜졌으니, 일단 멈추고 우리의 현 상황을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행복, 하지만, 대부분 행복하지 못하기에 행복을 추구한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이 무언지를 잘 모른다. 과연 행복은 무얼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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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만큼 행복해야 할까  행복의 경고

 

행복이 왜 우리에게 빨간 불을 켜면서 경고를 할까? 빨간 불이 켜졌으니, 일단 멈추고 우리의 현 상황을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인 행복, 하지만, 대부분 행복하지 못하기에 행복을 추구한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이 무언지를 잘 모른다. 과연 행복은 무얼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임과 함께 한 백년 살고 싶네.

                     

이 이전의 유행가 가사처럼 살면 행복할까 생각을 해보았다. 조금은 편협한 시각일지는 모르지만, 저 푸른 초원에 그림 같은 집을 짓는 일은 환경파괴를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사랑하는 임이 있다면 자식들도 생기겠고, 그림 같은 집이 얼마나 실용적일지? 그 안에 원목가구가 놓여있다면 거대한 거목들을 얼마나 희생시켰을까? 자식들을 유치원이나 학교에 보내려면 크고 튼튼하고 안전한 차가 필요할 것 같고, 사랑하지만, 한 사람과 백 년을 살면 좀 지겨울지도 모르겠다. 이러니 계속 행복할 수 있을지, 하지만 이렇게 살고 싶기도 하다.

 

개인적인 행복.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소망과 그것을 이루는 노력이 아닐까? 막상 어떤 목표가 도달되면 다시 다른 목표(행복)을 찾아서 또 달려가야 하겠지만, 일단 그 성취를 위해 살아가고 있다. 또 개인적인 행복과 사회적인 행복이 일치한다면 사회가 통일적으로 나아가기에 불협화음이 적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의 원함과 필요는 모두 다를 것이고, 그것을 충족시키기는 엄청 어려울 것 같다. 만일 그것이 다 충족되면 행복할까? 아닐 것이다. 욕망이 만족이요 기쁨이며 행복이라면 결코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다.

 

현재는 개인의 행복이 큰 사업의 기회이기에,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고, 사고 파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행복을 사기 위해서 많은 노력과 재화를 들인다. 하지만, 어느 정도에서 만족할 것인가?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소비와 낭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까? 1970년대의 생활과 지금의 생활에서 어느 쪽에 더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선진국에서 행복하다는 국민이 적고, 후진국이라도 행복한 국민이 많은 나라가 있다. 물질이 우리를 결코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우리가 바라는 바는 점점 더 커지고 많아지기에 행복중독증에 걸린 것이 아닌지? 지금은 과잉만족의 시대이다. 무엇을 얼마나 가져야 우리가 만족할 수 있을까? 하지만, 만족이 채워지는 순간 우리의 창의성은 사라진다. 흔히 하는 말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행복하다. 무엇보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생에서 안전함을 얻고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많은 물질을 원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사서 모으는 쇼핑중독에 빠져 들기가 쉬운 것 같다. 클릭 몇 번하면 하면 우리가 원하는 상품이 배달되는 인터넷쇼핑,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홈쇼핑광고, 거리를 뒤덮는 광고 등을 통해 간단하게 많은 것들을 살수가 있다. 단지 돈이 좀 부족하기에 그 만족을 다 채울 수는 없기에 더 괴로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또 쇼핑중독의 고통 속에서 소유 자체가 짐이 되어버리고 있다. 집안에 얼마나 많은 물건이 있고, 그 중 얼마나 사용하는지, 그냥 우리의 공간을 잠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건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차근차근 성처럼 쌓아나간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현명하게 원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보통 기쁨은 욕망을 자극하고, 욕망은 행동을 자극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쁨을 위해 행동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욕망은 대부분 충족되지 않을 때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 쇼핑중독은 현대의 가장 중요한 질병이 되었다.

 

인간의 욕망, 진선미. 미스코리아를 뽑을 때도 진선미를 뽑는다. 아름다움에도 여러 가지가 있고, 차이가 있다. 물론 아름다움은 진리이며 늘 예외적이었으나 현재는 그 표면적 의미만 가진다. 이미 겉모습이나 외형이 아름다움을 차지해 버렸다. 무엇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위안을 우리에게 준다. 미학과 도덕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현대성으로 개인적인 아름다움이 상품화되고, 갈망의 대상인 아름다움이 연결성의 권력을 통해 권력화된다. 그리고 모더니즘은 아름다움을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을 접하는 것은 자아에서 벗어나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진실은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추함도 개성이다. 추함의 극대화는 진실을 추구하는 초월적인 아름다움이다. 불쾌한 것을 제거하는 것 자체, 겉치레, 과장과 왜곡이 아름다움일 수 없다.

 

변화가 보여주는 것들.

우리 주변의 환경은 끊임 없이 변한다. 항구풍경의 변화에서 보듯 이제 항구의 낭만은 사라졌다. 기계와 거대한 선박으로 꽉 채운 항만이 되어버렸다. 종교시설들은 신비주의, 상징주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무언가 영적이며, 미적 굶주림에 초점을 둔 모든 것들의 중심 건축물로써의 우리에게 신성함과 경건함을 제공했지만, 변화되어 가고 있다. 이제는 과학이 미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진리탐구를 강화하고 있다.

 

얼굴은 개인의 정체성과 개성을 보여주는 감정을 즉시 표현하는 곳이기에 우리가 꾸미며 가꾸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를 왜곡시킬 수 있는 성형수술 붐이 이는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옷도 우리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옷을 구입하고, 버리고를 반복하는 것 같다. 너무 외적인 요소에 집착하는 것 아닌지.

 

집은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이며 자아가 되고, 생산의 중심(자궁)이지만, 현대인들은 질 나쁜 건축기술에 중독되어 있다. 거대함이 현대인들을 사로 잡아 버렸다. 건축은 피난처와 전망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다. 하지만, 점점 증가하는 맥맨션(차를 4대를 주차할 차고가 있는 집), 큰 것 그리고 더 큰 집이 필요하다. 여기다 인간도 점점 더 살이 찌고 있다. 말랐다는 것은 결핍한 상태를 의미하기에 우리는 더욱 더 부풀어 나갈 것이다. 어떻게 보면 비만과 도시확장은 비슷한 의미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소비가 증가한다면 과연 지구가 몇 개가 있어야 이 욕구들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지.

 

도시와 교외생활. 도시도 점점 뻗어나가고 있다. 그래서 점점 교외생활이 증가하고 있으나, 교외생활의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다. 우리가 꿈꾸는 전원생활과 교외생활을 하려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녹색의 역설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가 원하는 자연은 진정한 자연이 아니라 귀찮은 것을 제거한 자연을 사랑한다. 그것은 자연이 아니다. 도시가 확산되면 자연이 사람에게 가까워진다. 하지만, 교외지역이 확산될수록 도시의 불행도 커지는 법이다. 교외생활의 필수품인 자동차, 자동차에서 자신만의 즉흥적인 욕망에 완전히 몰두하고 좌우된다. 사람들은 즐거움과 행복을 동일하게 여기고, 움직임과 속도를 동일하게 여긴다. 그 때문에 점점 커지고, 점점 빨리 운전을 한다. 그러나 사람의 신체 움직임을 확 줄어들었다. 신체활동이 줄어들면 기쁨도 함께 줄어들어 간다.

 

도시하면 떠오르는 것이 교통지옥, 매연, 소음 등 엄청난 사람의 홍수 그래서 도시를 떠나고 싶다. 하지만, 이제 도시는 적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 속에서 디뎌야 할 발판이다. 도시는 친환경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도시의 혼돈에서 창의력이 피어나고 친환경적인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여성의 역활. 이제까지 남성위주의 발전을 거듭해 왔고, 생활방식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활방식을 제 점검해보아야 한다. 지나친 낭비로 이루어진 우리의 삶은 후손들이 사용해야 할 자원들까지 싹 쓸어 모아서 없애 버린다. 수 천년 사용할 자원을 뽑아서 우리의 낭비와 욕망에 충당시킨다. 현재의 이런 방식을 변경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들이 앞장서야 한다. 대부분 여성들에게 쇼핑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무엇보다 필요한 것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 여성의 성욕과 소비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는 과정이다. 기분-위로-구매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어야 한다. 현대의 쇼핑몰은 초콜릿 같다. 달콤함과 기쁨을 제공하지만, 그 속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있다. 쇼핑몰은 자기만족의 거품 속에 넣기 위해 디자인되었다. 모든 것을 오직 소비에만 초점을 맞추었기에 이 유혹을 피하기는 힘든 일이다. 쇼핑 웹사이트, 자동차와 집의 소비, 양육(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하는 당근만이 존재) 등에서 여성의 역할은 점점 증가하고 있기에 여성의 변화가 많은 것을 이끌어 나간다. 사실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이 기대가 변하는 것이며 그렇게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점점 세계는 여성화되고 있다.

 

안전과 민주주의. 안전 중시 풍조로 재미가 감소되고 있다. 하지만, 위험은 우리에게 역경을 이겨내는 힘을 배우게 해준다. 물론 안전을 추구하는 것과 만족감을 채우려는 것은 본능적이 요소이다. 민주주의는 욕망(의지를 지배)으로 움직인다. 원하는 것과 권리의 갭, 욕망과 지구의 상황 한마디로 사람들의 양면성, 보행자 권리와 운전자 권리, 세금과 기다림 중에서 당신은 무엇을 우선시 하십니까? 민주주의의 모순은 개인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사사건건 집단적인 본능을 강화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잘못된 사람을 선출한다. 현대 교외의 시각적 부조화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직접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기에 민주주의는 효율적인 계획을 불가능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건축은? 건축은 예술이나 인간을 위한 집, 건물, 공공시설물을 만드는 것이기에 우리의 욕망이기도 하다. 우리는 욕망에 따라 춤을 춘다 그러기에 현대 건축은 돈의 지배에 춤을 춘다. 예술에서 예술성을 제거하고 기술만 남은 건물, 건축작업의 본질적인 완전성이 없다면 외적인 모습만으로는 절대로 건축이 될 수 없다. 건축은 공동체의 기본도구이기에 집이 아니라 가정이고, 부동산이 아니라 공동체이나 우리는 오직 돈으로 환산한다. 이런 건축이 미래의 대안인 여성에게 잘 맞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더 나아갈 수 있을까? 건축의 새로운 대안인 느린 건축이 필요하다. 느린 건축은 공간의 유기적인 일관성을 유지하는 효율적인 농촌마을 같은 것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공동체적, 이타적인 수준 문화의 조성이 필요하다. 건축은 무엇보다 아름다움(건축에 특유의 초연함과 내향성을 제공)과 실용적인 것 그리고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하고 이것은 건축가의 몫이고 디자인은 건축을 예술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러기에 건축을 보면 그 속에 숨겨진 우리의 욕망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지구는 하나 밖이다. “지구환경을 지키는 문제는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 납득할만한 목적을 가진다.” 두려움이 주도하는 사회는 용기를 찾고 변화를 꿈꾸기보다는 지금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수단을 이용한다. 세계의 도시는 점점 퍼져나간다. 이 지구를 위한 부모들은 어디에 있는가? 삶의 방식이 변해야 한다. 이제 기후변화는 현실이다. 인구이동과 환경난민은 현실이 되었다. 점점 귀해지는 물과 식량 등 생명을 유지시켜 줄 자연의 선물들은 점점 사라져 간다. 그것은 우리의 지나친 욕망과 소비 그리고 낭비로 우리가 초래한 결과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를 대비하는 일이다. 친환경적인 도시로 건설을 법규로 뒷받침 하여 에너지 사용 감소시켜야 하고,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해 이웃을 주목하여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이 이룰 수 없는 것이고, 우리가 함께해야만 하는 길이다.

 

다 읽고서.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철학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왜 행복에서 뜬금없이 아름다움이니 사랑이니, 욕망이 무엇인지를 다루면서 철학자들이 등장하여 그들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거기다 과학에서까지 답을 구하고 있다. 그래서 좀 의아했었다. 또한 저자의 약력을 보니 건축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것 같아서 더 의아했다. 하지만, 건축이 예술이라고 하니 이런 개념의 정립이 필요할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이게 우리 식 사고 아닐까? 인문과학은 인문학자가, 자연과학은 과학자들이. 전체적으로 인간의 미래 특히 저자의 전공인 도시의 건축의 미래를 말하고 있다. 그 길이 빙 둘러오는 길이지만, 기본적인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왜 우리가 아름다움을 알고, 욕망을 알아야 하는지 그것이 우리의 삶이고 삶을 이끌어가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욕망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개인의 무절제한 욕망 추구는 사회나 지구 차원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억제되어야 할 요소이다. 행복의 경고를 받아들여 이런 욕망의 추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것 같다. 이 지구는 우리만 사용하고 파괴되고 버려지는 쓰레기가 아니다. 우리와 후손들이 필요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책은 인문학적 배움과 과학적 가르침이 가득한 책인 것 같다. 이제는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구분이 필요치 않다. 다 인간의 길이다. 인간의 문제는 한가지 길로는 해결할 수 없다. 모든 지식들을 모아 미래를 대비해야 할 것 같다.

 



p*******t 2012.12.01. 신고 공감 5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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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경고 : 배부른 자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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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빈낙도 : [安貧樂道]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키며 즐김   이 책 " 행복의 경고 The danger of Happiness"는 현대인의 부영양화된 삶을 꼬집는다고 한다.  저자가 호주 사람이다. 제목을 봐서는 미국인 같았는데 호주인이다. 우리 생각에 호주는 그래도 미국보다는 더 사람 살만하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비슷한가 보다. 내용이 찡한것 혹은 쓰라린 것들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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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빈낙도 : [安貧樂道]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키며 즐김

 

이 책 " 행복의 경고 The danger of Happiness"는 현대인의 부영양화된 삶을 꼬집는다고 한다.  저자가 호주 사람이다. 제목을 봐서는 미국인 같았는데 호주인이다. 우리 생각에 호주는 그래도 미국보다는 더 사람 살만하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비슷한가 보다. 내용이 찡한것 혹은 쓰라린 것들은 없지만, 행복에 대해서 만족 못하고 더 큰것 더 좋은 것을 찾는 우리들을 잔잔하게 꾸짖고 있다.

 

그런데 뭔가 저자에 말에 "맞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가슴을 치면서 고해를 하기에는 삐딱한 마음이 든다.

저자는 우리가 과잉민족을 추구하는 원인으로 즐거움,시기심,안전함, 두려움,물질욕, 완벽함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앨빈 토플러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선택할게 너무 많아서 문제라고 말한다. 마트에 가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미래의 사람들은 자유의 부재가 아니라 자유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을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초고도 산업의 딜레마인 과잉선택의 희생자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즐거움과 시기심,안전함등에 대한 욕망은 우리를 지금 이 자리에 서있게 해준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저 멀리 선사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의 생존의 코드 아니던가? 더 멀리 올라가자면 몇십억년 전부터 우리 유전자에 DNA에 진하게 새겨진 코드이다. 그 코드명령에 의해  우리는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오직 우리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더 즐겁게, 안전하게 다른 존재보다 더 유리하게 번식을 하고자 맹장도 포기하고 태어날때 죽음의 공포를 무릎쓰고 두뇌 크기도 늘리고 디스크에 걸리는 약점에도 서서 걷고 있는데 이제 좀 먹고 살만하니까 우리가 너무 행복해서 문제라고?

 

과거 안빈낙도를 외치던 자들은 행복한 농민들이 아니라 배부른 사대부 양반들이었다. 행복의 과잉이 아니라 행복이 나누어 지지않은 것이 문제인것이다. 현대 신대륙에서 소들이 먹어치우는 곡류만 가지고도 인류의 기아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배룰러서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 시간에도 기아에 허덕이는 10억의 인구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생존에 성공한 유전자를 물려 받았다. 하지만 그 성동을 우리만 누리고 이 불균형한 행복의 시대를 산다면 곧 그 불균형한 행복의 역습이 올 것이다. 그 성공을 유지 번식하려면 현재의 성공을 널리 퍼트려야 하는것이다. 행복을 나눌때가 된것이다. 배부르다고 행복하다고 안빈낙도를 외치다가 저 멀리 절도 유배가서 정말 안빈낙도하게 된다.

 

좋은 책이나 이런 삐딱한 서평도 하나 쯤은 있어도 될 것이다.

P.S 이 글 다시 읽어 보니 개발 지상주의자로 보이겠는걸...ㅋㅋ

 



YES마니아 : 골드 l****0 2012.12.10. 신고 공감 3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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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는데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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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고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지 않더라고 가을에 추수한 쌀이 보리가 익기 전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먹거리 걱정이 심각할 무렵을 이르는 말입니다. 보리고개가 사라진지가 불과 얼마되지 않습니다만, 먹거리를 소홀하게 대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먹거리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먹거리 이외에도 많은 자원들을 별 생각없이 남용하는 경향이 점차 심해지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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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고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흉년이 들지 않더라고 가을에 추수한 쌀이 보리가 익기 전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서 먹거리 걱정이 심각할 무렵을 이르는 말입니다. 보리고개가 사라진지가 불과 얼마되지 않습니다만, 먹거리를 소홀하게 대하는 경향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먹거리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먹거리 이외에도 많은 자원들을 별 생각없이 남용하는 경향이 점차 심해지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습니다.

 

시드니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는 엘리자베스 파렐리 교수는 <행복의 경고>를 통하여 색다른 방법으로 지구자원을 아껴 써야 할 것이라는 점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서문을 보면, “당신과 마찬가지고 나 역시 운전을 지나치게 많이 한다. 지나치게 많은 물건을 사며 지나치게 많은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고 지나치게 많이 버린다. 아이들과 나 자신을 지나치게 방임하며 산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물과 에너지, 공기, 공간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 즉, 나란 존재는 지구가 내게 베풀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인다.(7쪽)”고 스스로를 진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다양한 것들을 점점 지나치게 사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자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욕망은 삶의 근본적인 힘(17쪽)”임에도 불구하고 욕망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인데, 저자는 행복감이라는 것이 함정일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나선 것입니다.

 

경제학적으로는 허만 고센(Hermann Heinrich Gossen)이 주장한 한계효용의 체감법칙으로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동일한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함에 따라 느끼는 주관적인 만족도(혹은 필요도)가 점차 감소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만족도를 느끼기 위하여 재화의 사용을 늘리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재화를 넘치도록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점차로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먹거리에서 부터 주거, 자동차 등 다양한 소비재 등을 주제로 하여 과소비에 빠져 있는 우리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역사, 문학, 철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건축학 등 다양한 시각에서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고, 풍부한 인용을 통하여 문제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원저의 제목 <Blubberland>에 나오는 블러버는 과거 물질적 풍요와 부의 상징으로 여기던 고래 기름을 말하는데, 전기가 상용되면서 일상에서 퇴출된 에너지원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블러버랜드는 가질수록 욕망이 커지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사는 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호주를 중심으로 한 서구문명의 재화낭비를 꼬집으면서 “행복은 원하는 것을 얻는데 있지 않고 얻은 것에 만족하는데 있다.(273쪽)”고 할머니께서 적어주신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문화에서 들어온 생각으로 유럽사람들로서는 쉽게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지구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노력을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며, 아무래도 남성보다는 여성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라는 해결방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대지의 여신을 숭배하고 자연 앞에 겸손하라는 내용이 핵심이 될 것 같습니다만 이런 인식을 종교로까지 승화시키는 것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호주가 이런 움직임의 선두에 서고 있음을 자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최근 호주사회에서 일고 있는 아시아 이주민을 배척하는 움직임은 지구자원을 공유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영적 성숙과 정치적 협동을 통하여 이미 줄어든 식량과 주거지와 영토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실험을 지구적 차원으로 확산시키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지구상에서 살아남아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할 길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y*****2 2012.12.09. 신고 공감 3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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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기만일 뿐인 통념의 행복에서 자유로워지기...
"거짓과 기만일 뿐인 통념의 행복에서 자유로워지기..." 내용보기
예금 인출에는 한도가 있지만 욕망의 충족엔 한도란 게 없습니다.  마치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무리 채워도 늘 조금 모자라기 때문에 자꾸만 더 채우게 만드는 악마의 항아리처럼 우리 역시도 가지면 가질수록, 채우면 채울수록 이상하게도 왠지 더 모자람만 느끼게 됩니다. 새로나온 옷이나 스마트폰을 가졌다 하더라도 행복한 느낌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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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금 인출에는 한도가 있지만 욕망의 충족엔 한도란 게 없습니다.

 마치 옛날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아무리 채워도 늘 조금 모자라기 때문에 자꾸만 더 채우게 만드는 악마의 항아리처럼 우리 역시도 가지면 가질수록, 채우면 채울수록 이상하게도 왠지 더 모자람만 느끼게 됩니다. 새로나온 옷이나 스마트폰을 가졌다 하더라도 행복한 느낌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고가일수록 그리고 정작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순간의 충동으로 아니면 그저 유행을 따라잡기 위해 구입할수록 반드시 그 잠깐의 기분 좋음 뒤엔 이런 자학을 하게 됩니다. 그것도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면서 말이죠.

 "아, 이걸 내가 왜 샀지?"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욕망하는 것 대부분은 정작 내게 꼭 필요하지도 않고 사실은 내가 정말 원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집, 좋은 차를 말하지만은 가만히 헤아려 보면 그들이 말하는 좋은 집과 좋은 차가 정말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 저의 경우를 들어보자면 아무리 넓은 집이 좋다고 해도 제가 보기엔 그저 넓어서 청소하기가 더 힘들 것만 같고 그 커다란 공간에 가득찰 휑함 때문에 더욱 을씨년스럽게만 느껴지거든요.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한 곳은 대중교통으로 충분히 오고 갈 수 있는 저로서는 지속적인 관리의 부담만 가중시키는 귀찮은 물건일 뿐입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리고 친구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수라고 말합니다. 제가 앞의 이유를 들어서 잘 모르겠다라고 하면 '자넨 아직 덜 자랐군.'하는 말을 듣거나 '네가 현실을 몰라서 그래.'하는 핀잔을 들을 뿐이죠. 그렇게 언젠가부터 물질의 충족이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연인을 만들어주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이제 물질적 조건에 대해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게 옛날과 달리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더군요. 아니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일로만 보였습니다.

 

 언젠가 하루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친구에게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원하냐고?

 그가 말하더군요. 돈이 자기가 뭐든지 가질 수 있다고 말해주는 증표이기에 그렇다고 말이죠.

 

 그가 많은 돈을 가지고 싶었던 건 그것을 통해 가지고 싶던 구체적인 뭔가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돈 자체를 원할 뿐이었습니다. 자신이 뭐든지 할 수 있다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알려주고 또 남들에게도 보여줄 그런 돈을 말이죠. 미국의 경제학자 베블렌은 '유한계급론'에서 부자들이 더 많은 재산에 집착하는 것은 정작 그 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대상 때문이 아니라 돈 자체로 남들에게 드러낼 수 있는 '과시 효과'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가치의 증명을 위해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 친구가 꼭 그랬습니다. 그러고 보니 마르크스가 '수전노'에 대해서 말했던 것도 생각납니다. 마르크스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전노는 우리가 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욕망이 사실은 도착적임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존재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도착적이란  말그대로 순서가 뒤바뀐 것을 말합니다. 바로 수단과 목적의 관계가 말이죠. 즉 '도착적'이 되면 수단이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단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수전노가 바로 그렇죠. 우리가 돈을 모으는 이유는 사실 그 돈으로 무언가를 바꾸기 위함인데 수전노는 오로지 돈 자체만을 모으니까요.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구두쇠 스쿠르지처럼 그는 그것을 절대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돈을 가졌으면서도 가난한 자들 만큼이나 궁색하게 살지요. 돈이 원래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풍요를 가져다주기 때문인데 수전노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더욱 가난에 찌들게 만드는 아이러니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말이죠. 왠지 이 수전노의 모습에서 저는 우리들 모습도 그리 다르지 않음을 느낍니다. 우리 역시도 무언가를 욕망하는 건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인데 사실 오히려 그 욕망 때문에 더욱 더 불행을 느끼니까요. 그것을 가지지 못해서 괴롭고 이루지 못해서 아픈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를 괴롭게 하고 아프게 만드는 욕망들은 정말 우리가 꼭 필요해서 원하는 것이 아닌게 또 대부분이지 않을까요?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탈리아가 아니라 이탈리아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제시되는 것이다' 라고...

 

 우리가 욕망하는 것도, 그 욕망을 통해 이루는 행복의 모습이란 것도 사실은 이렇지 않나 생각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탈리아에 대해서 아는 것은 직접 가서 보고 느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말이나 책 혹은 영상 같은 것을 통한 그렇게 간접적인 경로를 거쳐서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탈리아에 대한 담론을 알 뿐이지 진짜 이탈리아가 어떤지는 사실 알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설사 진짜로 이탈리아에 우리가 갔다고 해도 거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우리가 들었고 보았던 이탈리아의 확인일 뿐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우리는 그 어디를 가든, 상상속에서 꿈꾸던 여행지가 실제로 서 있게 되는 순간 '진짜 이 곳에 왔다는 잠깐의 희열 뒤에 '생각보다 그리 멋지지 않다'는 실망을 곱씹게 되는게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더욱 사진찍기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요? 진짜 이탈리아가 온전한 만족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만든 가상의 이미지로나마 대리 충족하려는 마음에서...

 

  우리가 아무리 욕망을 하더라도 그 진짜 대상을 얻었을 때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저 이탈리아와도 같이 진짜 우리가 필요하다고 느껴서 가진 욕망이 아니라 남들로부터 들었고 가지는 게 좋다는 걸 보아서 생겨난 욕망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남들로 부터 전이된, 사실은 나 자신에 있어서는 그저 잉여에 불과했던 욕망이기에 진짜 이탈리아에 갔을 때 남들이 본 이탈리아가 진짠지 가짠지 확인하는 게 다인 것처럼 정작 욕망 충족의 순간 그렇게 구경꾼의 자리로 떨어져 버리는 데서 오는 불만족인 것이죠. 욕망이나 이탈리아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진짜로 느껴보기 전에는 진짜인지 알 수 없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이탈리아가 있다는 증거가 제시될 뿐인데도 그것을 진짜라 여깁니다. 또한 모두가 다 상정하는 욕망이나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그런 걸 이루면 행복해질 수 있어!'라는 하나의 제시된 문장일 뿐인데도 그것의 진실 여부를 미처 따지지도 않고 덜컥 사실로 믿어버립니다. 그래서 수전노와 똑같이 도착적 욕망에 허우적 대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나의 진짜 행복이 아닌 오로지 나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저 잉여에 불과한 남들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말이죠.

 

 이건 잘못되었죠. 분명 잘못되었습니다. 이 잘못된 현대의 현실에 대해 분노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지금 호주 시드니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고 있는 엘리자베스 파렐리입니다. 그는 더 이상 현대인들을 그러한 모습으로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시된 이탈리아처럼 거짓된 행복에 한없이 노출된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우리가 찾아야 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한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경고'라는 책입니다.

 

 그는 '이탈리아가 아니라 그저 존재한다는 증거가 제시될 뿐이다.'라는 것을 알려주었던 아도르노처럼 우리가 가진 행복에 대한 관념, 욕망에 대한 개념등이 모두 사실은 진리가 아닌 그저 인위적으로 가공된 환영에 다름아님을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잉 욕망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서 더욱 사람들이 가열차게 추구하는 가치가 된 즐거움과 안전함 그리고 완벽함 거기다 그것들의 추구 때문에 가지게 되는 시기심, 두려움, 레이몬드 탈리스가 말하는 내가 상상하는 현실과 진짜 현실의 괴리에서 느끼게 되는 이른바 '4번째 굶주림'이 정말로 진정한 가치가 아니라 사실은 사회가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장한 것들 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이루지 못해서 가지는 부정적 감정이라 할 수 있는 시기심과 불안함 그리고 허기 조차도 그건 진짜 우리들의 감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누군가 우리를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조작된 매트릭스 속에 가두는 바로 그러한 인위적으로 조작되고 이제는 특권적인 가치마저 부여된 통념들을  엘리자베스 파렐리는 이 책을 통해 산산히 부수어 주는 것입니다.

 

  그는 건축학 교수이기 때문에 자신의 분야에서 무엇보다 중시되는 '아름다움'을 통해서 그것을 부수어 나갑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아름다움은 사실 근대에 들어와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는 모더니즘의 한계를 들어 우리에게 통념이 된 아름다움이 얼마나 빈약한 개념인지 공격합니다. 아름다움이란 다만 미적인 것만은 아닌 다양한 맥락에서 보다 넓고 풍부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대로 가지 쳐 버리고 오로지 표피적인 아름다움만 중요시하는 모더니즘은 바로 그 때문에 받아들이기 보다 배척하며 연결되기 보다는 잘라내 버림으로써 현대인들을 더욱 고립시켜 버렸다고 엘리자베스 파렐리는 비판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가치로써 16세기 일본의 미학인 와비 사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에 따르면 와비 사비는 이러합니다.

 

 와비 사비는 초라하고, 낡고, 모호하고, 공허하고, 버림받은 것들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현대 세계에 반대한다. (...) 모더니즘이 밀폐상자라면 와비 사비는 넓은 대접이다. 와비 사비는 시간을 아름다움으로 되돌려놓는다. 적이 아닌 친구의 시간, 죽음의 선고가 아닌 영원 속의 한 조각인 시간으로!(P. 108 ~ 109)

 

 즉 와비 사비의 미학이란 모더니즘과는 완전히 다른 포용과 연결의 미학인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파렐리는 이 포용과 연결이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데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망이란 앞서도 말했듯이 언제나 우리보다 높고 큰 것만을 원하고 있는데 이러한 포용은 그 보다 훨씬 낮은 가치 그리고 버려진 가치에 오히려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목을 욕망으로 '종(縱)'으로 늘이기 보단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더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가슴을 '횡(橫)'으로 열어 자족하는 가운데 보다 넓은 세상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나 자체로 내가 소중하다는 것과 나와 하나로 결부된 세상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연결은 세상이 나와 이어져 있다는 자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협소한 시야로 인해 오로지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나의 모태(母胎)가 되는 지구 환경을 파괴하기만 했던 잘못을 깨닫게 하고 진정한 행복이란 나 하나가 잘되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모두가 다 같이 잘 되는 것에 있다는 혜안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포용과 연결에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또한 엘리자베스 파렐리는 현대 문화 전반에 드리워져 있는 배제와 단절의 그림자를 하나하나 찾아내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지금 건축 분야에서 유행하고 있는 투명한 유리에의 집착입니다.  

 

 

 

 

 그는 사진에서 보듯이 우리들에게도 유명한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설계한 전면 유리로 개방되어 있는 이러한 판스워스 주택처럼 투명성에로의 집착이 사실은 정말 문제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투명성의 집착이란 다름아닌 타자를 사유하고 그를 통해 연결되려는 내면성의 제거에 있기 때문이죠.

 

 투명함이 진정으로 몰아내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내면성이다. 위험이 아니라 깊이이다. 부피가 아니라 신비이다. 투명함은 전통적으로 여성성과 관련이 있는, 특히 모성과 관련이 있는 공간적 특성을 몰아낸다. (p. 165)

 

 그는 여기서 특히 '모성'이라는 말을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하면 그가 보기에 집이란 궁극적으로 '모성'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근원적으로는 태아일 때의 우리가 그 속에서 양육되고 보호받을 수 있었던 자궁으로서의 공간을 말합니다. 즉 그 공간이 줄 수 있는 편안함 그리고 홀로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나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시간 마지막으로 그 때의 우리가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었듯이 나와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을 주는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어디까지나 집이란 공간은 그 개인 고유의 미학으로 빛나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공간 자체가 바로 거기에 거주하는 개인의 내면성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내면성이 아니라 그저 집단적 보편성만을 드러낼 뿐인 '맥맨션' 같은 규격화된 주택을 싫어합니다. 그에게 아파트란 더욱 혐오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 공간들 자체가 인간의 내면도, 욕망도 특정한 형태로 규격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규격화로 인해 세계와 단절시키고 오히려 그 바깥의 타인과 세계를 배척하게 만들뿐 만 아니라 우리들을 더욱 도착적 욕망으로 불타오르게 하여 그 대가로 지구 생태계 전체를 보다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기 전문 분야인 공간으로 시작해 현대 문화 전반으로 그 시야를 넓혀가면서 우리 고유의 내면성을 되살리는 일이야 말로 현재 우리들에게 거의 강압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거짓된 행복의 관념을 깨뜨리고 자신만의 진정한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첫 발걸음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허위와 기만으로 가득한 레이몬드 탈리스의 '4번째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것을 말이죠.

 

 '행복의 경고'는 이런 책이었습니다. 남이 주입한 거짓된 욕망에 콧두레를 꾄 채 질질 끌려만 다니던 우리들에게 과감히 그 줄을 끊고 끌고 가는 쪽의 세상이 아닌 우리 주위의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그 공간들 자체가 그대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자양분으로 넘쳐나는 곳임을 일러주는 동시에 거품처럼 곧 터질 것을 쫓기 보단 내가 지금 디디고 있는 이 단단한 대지를 통해 우리라는 존재가 정작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또 무엇을 통해 지탱되고 있는지를 깨달아 보다 넓은 세계로 시야를 넓히게 하고 보이는 그 모두를 나와 동등한 하나로써 받아들이도록 하는 책이었습니다. 그렇게 포용과 연결이야 말로 그 대지 위에 내가 직접 뿌려야 할 씨앗임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언젠가 밤에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우리나라를 내려다 본 적이 있습니다. 아래로 은하계의 별들만큼이나 무수하게 빛나고 있는 가지각색의 불빛들을 보면서 정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땅에 살고 있는지 새삼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두려움부터 느꼈습니다. 사회 초년생이라서 그랬는지 그 불빛들 하나하나가 그저 내가 경쟁해야 할 빛들로만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파엘리의 '행복의 경고'를 읽고 난 지금 이제 그 불빛들을 바라보는 제 느낌은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그 불빛들 하나하나가 내 욕망과 행복의 성취를 위해 경쟁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대로 내가 포용하고 연결되어야 할 존재들로 여길테니까요. 또한 분명히 깨달을 것 같습니다. 불빛 하나만 반짝일 때 보다 수많은 불빛들이 더불어 빛날 때 지구는 더욱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l****1 2012.12.01. 신고 공감 2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 행복의 경고 ], 하이브리드적인 건축학자가 들려주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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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적인 건축학자가 들려주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들   문외한의 분야였던 ‘건축’이 가깝게 다가오게 됐던 건 <건축학 개론>을 통해서였다. 건축이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랑의 촉진·매개체로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상업영화 한편에서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이 책 <행복의 경고>는 호주에 사는 건축학자이자 실력있는 저널리스트인 엘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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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적인 건축학자가 들려주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들

 

문외한의 분야였던 건축이 가깝게 다가오게 됐던 건 건축학 개론을 통해서였다. 건축이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랑의 촉진·매개체로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상업영화 한편에서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이 책 행복의 경고는 호주에 사는 건축학자이자 실력있는 저널리스트인 엘리자베스 파렐리 교수가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을 통섭하면서 현대 서양사회 문화를 깊이있게 파헤친 인문학적 비평서이다. 저자는 건축학의 안과 밖을 모두 아울러 심리학과 미학에서 시작하여 미시적인 사회학의 이슈들, 문명과 인류학적인 통찰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우리의 현재의 삶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교양의 수준으로만 대강 얕게 알고 있던 건축의 영역이 알고보니 참으로 많은 분야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 일상생활에서 크고 중요한 의미를 생산하기도 하고 알게모르게 삶의 보이지 않은 배후에서 영향을 주고 있는 인간 영혼의 집이 바로 건축이었다.

어느 분야 전문가던 마찬가지겠지만 사람은 자기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연구해온 부분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지식의 습득이란 차원뿐 아니라 나와 다른 눈으로 세계와 주변 환경을 관찰하고 그를 통해 사유하는 전문가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래서 새로운 동시에 몹시 흥미로운 경험을 던져 준다. 역사의 상징물인 개선문과 에펠탑을 구심점으로 드넓게 펼쳐진 계획 도시 파리의 유서깊은 건물들, 뉴욕의 현란하고 아찔한 고층 빌딩의 마천루 풍경들. 근사한 건축,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파렐리는 예술작품처럼 출발한 서양 건축이 점차 그들 스스로 내부에서와 건축가들의 끝없는 자아실현 욕구로 인해 철학이 사라지고 기표(겉 외양)만 남은 현실도 있는 그대로 기술한다. 1920년대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을 훌륭하고, 정확하고, 격조 높은 볼륨들이 빛 속에 모인 것이라 정의내린 이래 건축에서 모더니즘이 싹을 틔웠고 많은 건축가들의 최대 지상 과제는 투명함이 되었다고 한다. 전체에 통유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많고 개방성이 살아있는 이른바 투명한 건축은 많은 일반인들에게도 언젠가 살고 싶은 로망이 되었지만 이윽고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심리적으로 사람들에게 집이란 공간은 피난처와 안식처의 기능이 가장 필요한데 투명함 컨셉은 성인들에게 은밀히 내재한 어린아이같은 안전함에의 갈망을 철저히 도외시한 결과를 빚었다.

매해 발표되는 세계의 가장 살기좋은 도시에서 상위권에 드는 도시를 소유하고 있는 호주에 대해 파렐리는 냉정한 시선을 유지한다. 부유한 WASP와 상류층 일부가 호주 외곽과 바닷가에 맥 맨션(고급스러운 대형의 주택)을 즐비하게 짓고 있는 것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여전히 우월의식을 갖고 있는 일정 부류들이 번잡한 인구 밀집지역을 벗어나서 맥 맨션으로 이주하였으나, 획일화된 그 모습들은 어떻게보면 지중해풍과 유행 스타일을 별 생각없이 적용한 것으로써 키치로 보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파렐리가 보기에 건축은 자기만의 성채를 짓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고 소통의 도구이자 매개체여야만 한다. 영어의 person과 그에서 파생한 personality는 페르소나(persona)란 말에서 유래했고 이는 가면을 의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현대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가면을 하나씩 쓰고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호주 맥 맨션의 주거자들이 바닷가 근처 한적한 곳에서 안전한 경비 체계, 탁 트인 유리구조물, 최신 냉,난방장치를 두루 갖추고 살며 편안함과 안락함은 얻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안일함과 안주가 창의적 동기부여보다는 퇴보의 길을 걷게 할 위험이 크다고 진단했다.

유럽에 처음 여행을 갔을 때 짧은 기간동안 많은 나라와 도시들을 순례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이거 내가 건축 탐방 관광을 온건가 착각이 든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화려한 제국이 남긴 흔적과 발자취, 르네상스로 대표되는 예술사조가 낳은 온갖 건축물과 교회당, 성당들의 위용과 위엄에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건축사에 일가견이 있지 않는 이상은 바로크, 고딕, 로코코 양식을 아무리 설명으로 들어도 구분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럽의 건축들은 전통있는 역사와 찬란한 유산으로써 전 세계 방문객들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반면에 행복의 경고의 저자는 그렇게 알려지고 인기있는 건축들보다는 신비스럽고 아직도 건축 공학으로 풀기 힘든 경이로움을 담은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설파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인도 타지마할, 아프가니스탄 석불, 일본 와비 사비 문화가 탄생시킨 비 서구적인 동양의 미학에서 미래 건축의 가치를 찾고 있었다.

 

저자의 상황 인식과 조언들은 유토피아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현실적이어서 수긍하며 읽을 수 있었다. 재치있는 문장력과 논리의 설득력 그리고 간혹 보이는 신랄함은 이성적 사고를 지속적으로 자극하였다. 한편으로는 보편적이고 통상적으로 알고 있던 상식의 허점을 짚어내어서 깜짝 놀래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시드니에서 1901년에 전염병으로 인해서 질병에 취약한 빈곤층을 대도시 바깥으로 몰아내고 그들이 사라진 지역에 인구 집약적인 중심업무 지구를 건설하는 종합적 재개발이 있었기 때문에 하버 브릿지가 만들어졌다는 비화를 듣고 놀랐다.

 

시골과 교외 지역에 사는 라이프스타일이 번화한 밀집 지역에 사는 것보다 더 친환경적이고 에너지를 적게 쓰고 환경오염을 줄이는 것이라는 도식적인 사고도 수정을 가해야 한다는 점도 인상깊었다. 도심 변두리의 신도시 정착지에 몰려드는 것은 결국 출퇴근 시간의 교통 정체를 심각하게 일으킨다. 인적이 드문 외진 곳에서는 반드시 자기 승용차로 매일 이동하기 때문에 차량 연료를 더 사용할 뿐 아니라, 인구가 적어서 대중교통 정책도 원활하게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맨하튼에 사는 시민들이 오히려 에너지를 아끼고 교통과 제반 시설들을 서로 공유하려는 습관이 정착되어 있어서 미국 내에서 이산화탄소 배출율이 적다는 사실도 의외였다.

 

개인적인 자유의 궁극의 아이콘은 물론 자동차다.’(p.316)

현대 문명의 최고의 발명품으로 뽑히는 자동차를 움직이는 건축물이자 이동하는 공간으로 규정한 챕터는 새롭고 파격적이었다. 생각해보니 대도시에서 건물들만큼이나 분위기를 조성하는 물체가 바로 수많은 자동차들이니 건축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자동차는 모든 요소가 두루 쾌적한 공간이며, 갑옷이자, 확장할 수 있고 과장된 에고(ego)이다.” “자동차는 수많은 방식으로 우리를 통제하면서 거대한 개인적 통제의 환상을 제공하는 개인의 빛나는 거품이다.” (p.230~231) 미국인들이 일생 섭취하는 음식의 1/5을 자동차 안에서 먹으며 차에서 내리지 않고 업무를 보는 은행, 장례식장까지 있다니 굉장하게 여겨졌다.

 

허세와 거품이 지배하는 지대를 저자가 블러버랜드라 지칭하고 있는데 파렐리가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맥맨션주의의 문제는 도시의 공동체적인 역동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냥 편안히 교외로 나가 살자는 의도는 나쁜 것이 아니었으나 너도 나도 그것을 지향하면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과 작위적인 건축 형태들을 지적하고 있다.

수많은 문화적 차이점들을 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편협한 이기심에 굴하지 않고, 광범위하고 더욱 공동체적이며 더욱 이타적인 수준의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다.’ (p.327)

 

집단 무의식의 기저를 분석하면서, 도시에 그 어떤 혼돈도 없어야 하고 질서만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산층 이상 계층의 심리에 파렐리는 이의를 제기한다. 통제를 완전히 거부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역사 속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도시들은 모두 혼돈을 기꺼이 끌어안았을 때 가능했다는 실제하는 교훈이 있었다. ‘문명화는 끝없이 생성되는 혼돈에 의존하고, 혼돈에 의해 자라며, 끊임없이 혼돈을 만들어낸다. 혼돈은 위험이다. 하지만 혼돈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도시는 혼돈과 질서가 모두 필요하며 양자 사이의 적절한 균형에 의존한다. 지나치게 혼돈스러우면 아테네나 멕시코시티 같은 도시가 될 것이고, 지나치게 질서를 지키려다 보면 브라질리아, 캔버라, 싱가포르처럼 예술의 불모지가 될 것이다.’ (p.242~243)

 

작가 엘리자베스 파렐리의 성숙한 면모는 전부 여성학(페미니즘)에 할애한 7장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자신이 여성이고 건축학자이며 전방위문화비평가로서 그녀는 페미니즘의 허와 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흔히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진영에서 꼴통 페미라고 비하하는 고집스럽고 편향적인 모습이 없는 그녀는 쇼핑의 주체인 여성들 자신이 각성할 점은 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낸다. 한때 서구에서 시작된 페미니즘이 전 부문에서 여성의 자유를 쟁취하고 권익을 신장시킨 영향력이 있었지만 극도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치달은 현재에 과거의 기준으로 프리즘을 대면 지극히 순진한 발상이 되고 만다. 공격적인 마케팅이 여성들의 자존감을 부추겨 지갑을 열게 했고 쇼핑치료라는 웃지 못할 용어로 쇼핑이 여성들의 으뜸 취미의 위치를 획득한 것이 서구 사회의 현실이다. 지고지순한 아내, 헌신적인 엄마보다는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세련된 모습이자 최신 흐름처럼 되어 대중매체, 패션 산업은 갈수록 비대해져 가고 있다. 오죽하면 칙릿이라는 뭔가 떳떳하지만은 않은 장르까지 나왔을까 싶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공주놀이는 이제 그만!

 

건축가로서 저자는 쇼핑몰의 구조와 여성의 소비를 주목한다. 유럽에서 아케이드 형태로 시작된 쇼핑몰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상업 활동의 주요 공간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오늘날 미국에서 고등학교 숫자보다 쇼핑몰이 더 많다는 자료는 비평가가 쇼핑몰을 주제로 삼은 것이 어색하지 않게끔 한다. ‘쇼핑몰에는 현란하고 환상적인 내부 디자인은 존재하지만 거리도, 대중도, 건축도 없다. 쇼핑몰은 자동차 거품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자기만족의 거품 속에 넣기 위해 디자인되었다.’ (p.262 ) 과도하고 끝없는 쇼핑은 과잉 음식물 섭취와도 서로 연관을 짓고 있어서 비만 문제는 우울증과 더불어 서구의 가장 큰 난제(難題)임이 행복의 경고에서 계속 강조되고 있었다.

 

두려움이 주도하는 사회는 용기를 찾고 변화를 꿈꾸기보다는 지금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수단들을 이용한다. (p.315)’그렇다면 엘리자베스 파렐리가 꿈꾸는 도시의 미래상은 무엇일까. 30년후의 호주를 저자는 친환경 산업의 전 분야로의 급속한 확장, 교외와 도심의 균형 발전, 대체에너지가 널리 보급되어 태양열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도로를 누비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조금 이상적이긴 하지만 대도시에는 아예 개인 자가용이 사라졌고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고 심지어 예배당에서 순결한 물을 숭배하고 친환경 교리가 자리잡은 신흥 종교상까지 펼쳐보였다.

거대한 대형마트와 쇼핑몰들은 에어컨과, 냉장고, 화학 살충제, 화석 연료를 이용한 수송 등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음이 입증되면서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 자전거와 도보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고, 공기가 깨끗해지고, 비닐 사용이 줄고, 음식에 화학물질이 줄어든 이 단순한 체제는 국민의 건강도 크게 변화시켰다.’(p.345)

 

엘리자베스 파렐리가 비평서의 마지막 장에서 상상력을 동원해 표현한 이 가설들은 물론 SF소설적인 기법을 가미한 반어법으로 독자들을 보다 다른 차원의 생각으로 이끄는 것이다. 저자의 블러버랜드’(<행복의 경고원제)를 읽어내려가면서 아쉬웠던 부분은 호주에 대해 애정을 갖고 꾸준히 연구해온 것은 맞지만 역설적으로 외부에서 바라보는 호주의 문제점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호주가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펴서 한동안 다문화를 관용으로 수용해 새로운 대륙으로 부상한 것은 맞지만 이미 그것이 포화상태를 이루어 새로운 패러다임과 프레임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우려스럽게도 최근 몇 년전부터 10대를 중심으로 인종차별적으로 타 민족을 배격하는 일들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아무리 허구적인 발상이지만 중국의 미래를 암담하고 세계에 피해를 주는 주범으로 표현하고, 북미와 유럽은 여전히 문명인의 기본자세를 갖고 있는 듯 묘사한 몇 문단이 나로선 껄끄러웠다.

 

그럼에도, 건축을 중심으로 여러 사회, 문화현상을 자유로운 사고로 넘나들면서 우리들이 너무 많이 소비하고, 너무 많이 자연을 파괴하면서도 경각심조차 갖지 않고 이기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저자는 분명 깨닫게 했다. Blubberland는 마치 영화에 나왔던 매트릭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딴에는 치열하게 살아왔고,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열성적으로 추구하는 데에 열심인 2012년 한국의 대다수 소시민들에게도, 엘리자베스 파렐리가 통렬하게 자국을 비판한 후에 이를 통해 당당하게 제시하는 희망적인 호주의 청사진을 옆에 두고 자세히 들여다볼 이유, 충분하다.

 

 (보헤미안)

 

<행복의 경고> 리뷰 (베이직북스)

http://blog.yes24.com/bohemian75

 



b********5 2012.12.01. 신고 공감 2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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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에 빠진 현대인, 과잉의 덧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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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시대보다 극성을 부리는 단어, 매일 같이‘행복’을 말하는 책들이 제목을 달리하며 출간되어 서점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다. 모두 행복하다면 굳이 행복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 역사이래 가장 물질적 풍요와 편의를 누리는 시대에 냉랭하고 굳은 얼굴을 하고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오늘의 우리들 모습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그토록 쫓는 행복이란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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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느 시대보다 극성을 부리는 단어, 매일 같이‘행복’을 말하는 책들이 제목을 달리하며 출간되어 서점 진열대를 장식하고 있다. 모두 행복하다면 굳이 행복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 역사이래 가장 물질적 풍요와 편의를 누리는 시대에 냉랭하고 굳은 얼굴을 하고는 불행하다고 말하는 오늘의 우리들 모습은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그토록 쫓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하는 것에는 보편적인 어떤 개념의 합의가 있을 것이다. 언제 행복하다고 느끼고, 무엇으로 인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기쁨? 성취감? 순간적 쾌락? 아니면, 내면적 평온상태와 긴장된 정신에서의 해방인가?

 

만일 이 모두가 옳다면 우린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대의 우리들은 행복해 할 줄 모른다.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자화상이 있다. 우리들에게 습관화된 인지적 오류, 무언가에 대해 기뻐하고 만족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명백히 잘못된 논리적 거짓으로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저자의 지적이 그것이다. 만족감은 더 많이 성취하고 있지만 욕망 그 자체는 시들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행태가 이것을 입증한다. 끊임없이 만족하려는 이 만족에 대한 강박증이 행복 중독증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다. 가히 탐욕스러움 그 자체가 아닌가? 제아무리 가지고 성취해도 제어되지 않는 욕망의 고리 말이다. 그래서 더욱 나는‘행복’을 집요하게 추구하려는 이 사회의 언어가 혐오스럽고 그런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욕망 자체가 추하다거나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이 없다면, 즉 무언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역사는 이미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 것은 곧 소멸이고 죽음이자 무(無)의 상태 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저자의 지적처럼 잘못된 논리적 연결에 의해 만족과 행복을 등식화함으로써 욕망의 제동장치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지나치게 많은 것에 습관처럼 익숙해진 우리는 아무리 충족해도 항상 빈약함에 허우적거리고, 행복하지 않다고 푸념한다. 결국 지나친 것, 과잉의 추구가 우리들을 우울하게 하고, 행복 중독증으로 몰아대는 것이다. 물질의 과잉, 자유의 과잉, 쾌락의 과잉, 권력의 과잉, 정치의 과잉, 투명함의 과잉...모두 넘치는 과도함의 추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잉의 욕망이 우리들을 습관화시킨 근인은 무엇일까? 직관과 작용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착각, 이를테면 과시적 욕구에 기인하는 허위와 겉치레, 편견과 같은 것들이기도 하며, “뭔가 좋은 것이라면 많을수록 좋을 거야”와 같은 게걸스런 원시적 욕망 같은 것이다. 여기에 저자는 민주적 평등성의 이상, 합리성, 명료성, 객관성, 명백한 실용성과 같은 모더니즘의 분석적이고 분리적인 이성관의 구상성,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성의 제거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아름다움의 해체와 상대주의적 관념이 몰고 온 몰개념화가 빚어낸 개인주의와 나르시시즘을 더한다.

 

이와같은 과잉 추구에 대한 저자 ‘엘리자베스 파렐리’의 설명은“자기중심적, 질투, 시기, 자기도취, 타인과의 공감결여, 속임수 등으로 자기를 확장하려는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오늘의 사회, 주체성을 상실하고 타자의 욕망을 획득하는데 전전긍긍하는 우리들이라고‘베블런’이 쓴『유한 계급론』의 압축적인 문장을 떠 올리게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신분, 계층 상승의 무형적 가치, 즉 위신재(prestige goods)를 생산하려는 멈추지 못하는 중산층의 과시적 행동의 모순적 쳇바퀴의 지적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네 대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 수영장, 많은 방과 드넓은 거실을 자랑하는 교외의 맥 맨션처럼 미적 얼굴을 상실한 추한 건물들과 도시의 확장을 부추겨 자연을 침해하는 부자들의 행동처럼 더 많이, 더 큰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이미 필요의 범주와는 아무런 인과관계를 발견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편, 『행복의 경고(The danger of happiness)』라는 이 책의 차별점은 이처럼 부영양화 된 현대인의 삶에 대한 단순한 반성적 제안의 경계를 넘어서 현대적 욕망들이 구현된 양태들에서 욕망의 속성들을 인문학적으로 고찰하고 마침내 범지구적 생태계의 미래 전망을 제시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는 물질주의가 자의식의 취약함이나 타인의 존경에 지나치게 가치를 두려는 경향이며 전형적인 자기애의 특성이라는 진술이 새로운 해석은 아니지만 상실에 대한 두려움의 방어로서 물질의 소유에 매달리는 현대인들의 과잉욕망에 대한 행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것처럼, 근대성, 모더니티의 특성을 통한 도시확장, 거대 주택과 같은 도시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욕망의 해석은 ‘낙원 증후군’같은 욕망의 의식과 무의식 연결의 오류로 욕망과 도덕성의 균형 예측에 실패한 우리들의 모습을 관찰 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모더니티의 특성인 민주주의와 자유의 관념들이 공공의 영역을 해치고 개인의 영역화됨으로 인한 폐해와 선택의 자유와 같이 자유의 과잉이 마침내 현대인들 자신을 희생시키고 말 것이라는 예언들의 현실화를 목격하면서 현저성이라는 그릇된 욕망의 실체를 이해하게도 된다. 특히, 가장 욕망의 현시(顯示)성을 잘 보여주는 옷과 집을 가면이라는 거짓과 연결의 양면적 통찰을 통해 본래적 기능을 상실하고 나아가 인간성의 상실과 문화적 파괴에 이르는 현상들을 비범하게 포착해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자기연민과 이기주의로 치닫는 페미니즘의 자기모순이 탐욕스런 쇼핑과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입과 질의 유사성을 통한 섹스와 먹는 행위의 흥미로운 해석으로 자기절제를 집어치워버린 나르시시즘에 빠진 현대 여성을 냉철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사실 이러한 무절제한 욕망에 길든 우리들의 모습과 그 욕망에 내재한 혐오스러운 양태들, 그리고 이로 인한 자기 파괴의 결과를 이해하게 되지만 우린 항상 공공의 영역, 혹은 집단적 이익보다는 개인, 나를 위한 욕망에 더 끌리고, 이산화탄소배출과 같은 온난화가 나와는 직접 관련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다. 마치 “아무리 많이 소비하더라도 늘 더 많은 것이 통 안에 있으리라 믿는”것처럼 말이다. 끊임없는 비교의 잣대, 경쟁, 그것은 내게서 벗과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격리시킨다. 물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그 잘못된 쳇바퀴를 멈출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이제 만족과 쾌락과 행복의 잘못된 등식을 이탈하여 삶의 의미를 진정 풍부하게 하는 관계성, 유대감, 공동체와의 연대에 관심을 돌려야 할 터이다. 저자가 그리는 꿈의 도시, 꿈의 공동체를 그릴 수 있는 미래를 위해 우린 우리의 과잉 욕망을 통제하고 규제 할 수 없는 것일까? 정작의 의미를 강탈당한 욕망과잉의 사회,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을 다시금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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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라서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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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우리가 삶에서 즐기는 모든 것들에 형벌을 부과했다. 건강문제로 고통 받고, 영혼은 상처 입고, 육체는 살이 찐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본문 5장, 비만과 가정에서)   행복은 돈이나 물질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않을 만큼 옳다. 그러나 때때로 행복은 물질과 함께 오곤해 행복이 소유와 비례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버리기 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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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우리가 삶에서 즐기는 모든 것들에 형벌을 부과했다.

건강문제로 고통 받고, 영혼은 상처 입고, 육체는 살이 찐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본문 5장, 비만과 가정에서)

 

행복은 돈이나 물질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않을 만큼 옳다. 그러나 때때로 행복은 물질과 함께 오곤해 행복이 소유와 비례할지 모른다는 의심을 버리기 힘들다. 편안함, 편리함의 안락은 소유함으로써만 얻게 되는 부가가치가 아니던가.

소비와 소유를 통해 자주 기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나는 소비와 소유의 기쁨이 종종 죄책감으로 변질되곤해 곤혹스러워진다.  그러나 소비나 소유, 욕망의 충족이 행복과 관계된 것이라면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몹시 이율배반적이다. 혹시 나는 무엇인가를 소비하고 소유함으로서 얻는 순간의 만족을 행복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저 더 크고, 더 세련되고, 더 최신의 것을 소유하고 싶은 단순한 욕구를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욕망의 충족, 만족의 기쁨을 누리는 상태를 보통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행복하다'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만족하는 순간이 있기는 한 것일까. 더구나 욕구에 관해서라면 더더욱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가 드물다. 만족스러울 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몹시도 찰라여서 미처 행복을 느끼기도 전에 허망해지기 일수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본질적으로 욕구나 욕망과는 관계없는 보다 매사에 감사하는 내적인 평안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는 원론적 이야기는 참이 아닐까.

 

지은이는 그릇된 욕망인 과잉 만족은 행복과는 관계없는 비교심리나 모방심리, 그리고 시기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완벽하고 빛나는 대상을 소유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시기의 대상이 되고자하는 천박한 심리가 '행복감'으로 과포장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욕망의 충족은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고 끊임없이 주입하는 광고문화가 과잉만족을 강요하고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돈만 있다면 모두가 왕의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소비만능주의와 일맥상통하고, 이시대가 말하는 행복이란 일시적 자기만족을 위한 소비자의 의무를 다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비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삶은 어떤가. 더 많은 수입을 보장하는 고된 일을 계속하고, 고된 일자리를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며, 경쟁은 공동체적 삶을 무너뜨린다. 오로지 소비와 소유만으로 나를 표현하며 비교와 시기심으로 충족되는 삶을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극히 일시적인 소비와 소유의 행복을 반복해서 맛보기 위해 우리는 전력을 다해 전생애를 쏟아부으며 이것이 행복이라고 억지 주문을 외우고 있다.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40여 년 전, <미래 쇼크>를 쓴 앨빈 토플러는 '후세 사람들은 초고도 산업의 딜레마인 <과잉 선택>의 희생자가 될지 모른다'고 예언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다양한 물건들에 치여 오히려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될 것이라는 역설을 이야기한 것인데,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자유를 최대의 가치로 생각하는 인간의 다양한 삶, 다양한 가치는 세계화와 자본에 의해 갈수록 제한되고, 오로지 다양해지는 물건들 중에서 선택의 자유만을 누릴 수 있게 되어 가고 있다. 비슷한 얼굴로 비슷한 건물에서 비슷한 일을 하며, 비슷한 집에 비슷한 물건 들을 산더미같이 쌓아놓고도 조금더 최신의 것을 향한 비슷한 집념을 불태우는 비슷한 삶을 미래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행복이라고 이름하여도 좋은가.

욕망의 충족이 조작되고 조정되는 것이라고 본다면 빛나고 새로우며 세련된 것들로부터의 전염을 견디는 힘, 바로 그것이 행복이 아닐까. 결국 물질의 소유나 소비는 행복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말은 상투적이지만 여전히 옳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데, 지금 당장 전부를 원하는 1장을 지나 아름다움, 죽음, 집, 비만, 가정, 페미니즘, 식습관 등등으로 이야기가 산만해 좀처럼 집중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장의 정유가격과 물 가격이 오르고 육지가 줄어들며 비도 내리지 않는 가운데 새로 생겨난 도시의 이야기는 무척 매력적이였다. 그곳에서는 자전거와 도보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고, 육류 소비가 줄고, 공기가 깨끗해지고, 비닐 사용이 줄고, 음식에 화학물질이 줄어들어 국민의 건강이 크게 변하였으며, 우울증은 거의 드문 병이 되고, 알코올 관련 범죄나 질병도 이전보다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는 더 가난해졌지만 전체적으로는 행복지수가 더 높아졌다. 지은이는 이 이야기는 자신의 꿈이라고 했지만 얼만든지 올 수 있는 세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암흑의 시기'로 불리우는 소비만능시대가 지나야만 올 수 있는 미래이기도 하다. 소비만능 시대, 물질주의 시대는 각각의 개인들의 각성으로 끝낼 수 있다.

나는 오늘도 고민한다. 살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a*****0 2012.12.07.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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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해도 너~무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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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영장류 유인원의 뇌는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많을수록 좋은 거야. 많을수록 좋은 거야.' 모든 경제가 성장이라고 하는 불가침의 원칙에 기반을 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많을수록 좋다. 많을수록 좋다.'_(P.185)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끝도 없는 꿈을 꾸고 욕망하며 살진 않는다. 단지 자신이 획득할 가능성이 있는 것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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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영장류 유인원의 뇌는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많을수록 좋은 거야. 많을수록 좋은 거야.' 모든 경제가 성장이라고 하는 불가침의 원칙에 기반을 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많을수록 좋다. 많을수록 좋다.'_(P.185)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끝도 없는 꿈을 꾸고 욕망하며 살진 않는다. 단지 자신이 획득할 가능성이 있는 것에 대해서만 그렇다. 자신의 힘으로 혹은 운좋게라도 얻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욕심을 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게 한계가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간절히 바라던 일이 어쩌다 이루어지면 만족감이 극에 달하는 경우가 있다. 그게 순간이더란 얘기다. 만일 더 높은 차원의 만족을 주는 것이 생기면 만족과 행복의 방향침은 자동 상향조정된다. 그리고 문제는 이런 식으로 계속 상향조정되지 않으면 현재의 상태는 더 이상 만족한 상태가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더 많이 채우려고 하고 채우면 채울수록 행복의 기준은 높아진다. 이걸 경험하고 나면 만족이란 의미, 행복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다 운좋게도 진정한 행복이란 욕망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그 때가 바로 인간의 본능의 실체를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즉, 행위들이 완전히 무의식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이성적이지도 않은 무의식과 의지의 중간영역에서 우리는 이 행위들을 행할지 무시할지 선택할 수 있다._(P.51)

 

  문제는 스스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욕망을 자극받기 때문이다. 스스로 원하기도 하고 때론 환경의 자극을 받기도 한다. 기쁨이 욕망을 자극하기도 하고 때론 고통이 이를 자극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보다 더 좋은 차를 타는 사람, 더 넓은 집에 사는 사람, 더 잘 생긴 사람들 때문에 따라하고 싶은 자극을 받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자극들은 실제 내게 필요한 것을 넘어 무언가를 더 원하게 만든다. 이 책의 저자가 지적했듯 이런 것들은 우리가 가진 잘못된 욕구의 전형이다. 그 무엇도 인간이 숭배하는 것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이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술과 창의성이다. 저자는 '인간의 의식에 난 상처'에 최고의 치료는 음악과 미술, 문학,철학이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우리가 가진 본능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생각과 행복을 지배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러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무의식을 깨고 의지가 발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나란 존재는 지구가 내게 베풀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인다._(P.7)

 

 이외수작가는 《절대강자》에서 이런 얘길한다. 없으면 목숨이 끊어지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다 공짜로 주셨다. 공기, 물, 햇빛 등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 낸 것들 중에서 없으면 목숨이 끊어질 정도는 아닌데도 비싼 것들이 있다. 보석, 자동차, 아파트 등이 그렇다. 그리고 지금 그대가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언젠가는 그대 곁을 떠날 것이니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말한다.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 가진 것을 모두 싸들고 저 세상으로 갈 것도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 우리는 필요없는 것들에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산다. 단순히 욕망에 기대어 살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이 책 《행복의 경고》는 이런 현대인들의 욕망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해내고 있다.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대표적인 것이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다. 이로 인한 폐단과 우리 삶의 탐욕스러움을 잘 짚어내준 책이라 여겨진다. 온 몸에 불필요한 지방 덩어리로 둘러싸여 사는 현대인들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깨닫게 하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되새겨 볼 수 있게 해준다.

 

 최근 행복을 주제로 한 진부하게 느껴지는 책들과 차이가 있다면 저자의 인문학적 통찰이 녹아있는 책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문학적 식견이 부족한 내겐 다소 어려움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로인해 배운다는 자세로 읽을 수 밖에 없었던 책이다. 아름다움이나 예술, 자연과 문화, 건축과 페미니즘 등에 관한 인문학적 접근은 무척 흥미롭게 읽힌다. 책을 제대로 읽으면 현대인과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넓힐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YES마니아 : 골드 l*****j 2012.12.01. 신고 공감 2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