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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수수밭 ]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윗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나는 몇번 머리를 흔들고 산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 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 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 동해행(行) ]
그는 지금 동해로 간다 차창 밖에서 누가 손을 밀어넣는다 그까짓 세상 같은 거 절망 같은 거 확 잡아채 강둑에 던진다 강물이 퍼렇게 눈을 뜨고 올려다본다 못난 몸 어디가 조금 젖는 것 같다 노을이 붉어지고 잔정에 붙들린 마음이 붉어져 낄룩낄룩 낄룩새처럼
경춘선은 왜 휘어지다 말다 이어지는가 차는 속이 거북한 듯 몇번 쿨럭거린다 건성으로 질주하는 직행버스 일사천리 질주만이 전부라는 듯 고속으로 달린다 지름길도 회전길도 후진시킨다 그는 비로소 어깨에 힘을 내린다 지정석에 앉아 이렇게 달리는 게 직진하는 生이냐, 그는 이정표 쪽을 물끄러미 본다 아득한 삶의 절벽, 비탈길 오르다 뒤축 닳은 세월 갈아 끼지 못했다 불시에 마주친 검문소 몇개
한계령을 와서야 겨우 속도를 늦춘다 저 고개를 넘어야, 결국 나를 넘어서야...... 지금 그는 동해로 간다.
[ 외동, 외등(外燈) ]
나는 오래 여기 서 있었습니다. 외동 1번지 다시는 저 다리 위에 저 정가장엔 가지 않으리라 내려가서 길바닥에 주저앉지 않으리라 갈퀴별자리 옮겨 앉는 날 밤이면 내 청춘의 붉은 바퀴 굴러가다 멈춘 것 보입니다 가슴을 조금 움직여 두근거려보지만 그 길 따라오는 사람 있겠습니까 나는 꿈을 가지지 않기로 합니다 날마다 골목이 나를 불러 꿈을 주고 세상 구석까지 따라가게 합니다 세상아, 너는 아프구나. 나는 얼굴을 돌리고 눈만 껌벅거렸습니다
어슬렁거리는 개들 옆으로 저 혼자 젖는 취객들이 많이 어두워져 돌아오고 있습니다 오늘밤 나는 신열에 들뜬 듯 머리를 싸매고 풀섶에 숨어 우는 벌레들의 울음을 사람의 말로 다 적기로 합니다 산간벽지 떠돌다 잔가지 생잎 쓸린 잡풀들 몰래 숨어든 외동1번지 느릅나무 곁에서.
[ 한계 ]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사이로 추위가 몰려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 말 ]
어느날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의 반만큼도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말의 성찬이나 말의 홍수 속에서 나는 오히려 말이 고팠다 고픈 말을 움켜쥐고 말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쉬운 말들과 놀고 싶어서 말의 공터를 한번 힐끗 본다 참말은 문득 예리한 혀끝으로 잘려나가고 씨가 된 말이 땅 끝으로 날아다닌다
말이 꽃을 피운다면 기쁘리 말이 길을 낸다면 웃으리 말은 누구에겐들 업(業)이 아니리
모든 말이 허망하여도 말의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냐 우리는 누구나 쌓인 말의 나무 밑으로 돌아간다.
[ 역(驛) ]
마음은 모르게
정거장 나온 몸이 다시 떠난다
가출(家出)하여, 굴러가는 바큇살 처처에 박히는, 때로 길가에 내어말리는 세월이여 가는 길은 도대체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갔다 가고 남은 길을 철길이 가린다 나, 평행선에 올라 밟는다 갈 길은 멀고 살 길은 짧아라
누군가 그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머릿속 석탄들이 꺼멓게 타고 있다 급정거에 밀린 등을 밀면 개찰구를 빠져나가 내 발자국을 따라가는 → 驛
... 소/라/향/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