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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신기루, 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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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친구한명이 소래에 살았다. 가끔 친구 집에 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갔다. 협궤열차의 풍경도 잊을 수 없지만 소래에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비릿한 냄새 또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당시에는 한적한 포구였던 소래가 어느 순간 유명 관광지가 되어버리면서 우리의 발길도 서서히 끊어졌지 싶다. 그러다 나이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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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다닐 때 친구한명이 소래에 살았다. 가끔 친구 집에 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갔다. 협궤열차의 풍경도 잊을 수 없지만 소래에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비릿한 냄새 또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당시에는 한적한 포구였던 소래가 어느 순간 유명 관광지가 되어버리면서 우리의 발길도 서서히 끊어졌지 싶다. 그러다 나이가 들고 김장을 하기위해 새우젖을 사러 간다는 집사람 때문에 다시금 소래를 떠올렸던 것 같다. 그만큼 소래의 새우젖은 유명했다.

 

   파시(波市)는 어류를 거래하기 위해 열리던 해상시장이다. 초기에는 바다위에서 이루어지던 것이 어획량이 늘어나면서 어선과 상선이 많아지자 차츰 어장근처의 섬이나 포구 등으로 옮겨 열렸다고 한다. 그런 파시는 어류와 어선들을 따라 이동하며 열렸기에 생성과 소멸을 반복했다. 파시가 열리면 수많은 배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따라서 음식점, 술집, 숙박시설 등이 갖춰진 임시촌락으로 발전했지만 무엇보다도 성시를 이룬 것은 유흥업소였다. 밤낮없이 술과 여자와 돈과 싸움질, 그리고 온갖 비린내가 진동했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포구에 어선이 들어오는 시간에 잠깐씩 열리는 파시를 제외하곤 모두 사라졌다. 회유하던 어류의 소멸과, 무분별한 남획에 따른 어획량 감소, 그리고 기술의 발달에 따라 중간 기항지가 필요 없게 된 것이 주 이유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파시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영광 파시평이 등장하고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그 기록이 나와있다고 한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파시의 속성상 유물이나 유적이 없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선주, 선원, 상인 등 파시의 주역들도 세상을 떠나고 있어 지금에 와서는 융성했던 어업문화의 흔적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고 있다. 이 책은 그렇게 사라져가는 우리의 어업문화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쓴 책이라고 한다. 파시가 열렸던 섬에 가면 간간이 노인들의 기억 속에 편린으로만 남아있는 파시의 모습을 그분들의 기억속에서 끌어낸 것이다. 저자는 과거 우리나라 최대어장 중의 하나이며 가장 중요한 파시의 무대였던 인천지역의 파시를 그렇게 복원했다. 연평도 조기파시, 덕적도 민어파시, 그리고 소래포구의 꽃게와 새우파시가 그것이다.

 

   서해안 3대파시라고 하면 흑산도, 영광 위도, 연평도 파시라고 한다. 이들 파시는 모두가 조기군단의 이동에 따라 형성되었다. 조기는 겨울에 동지나해에서 월동을 한 뒤, 봄이면 산란장으로 회유한다. 1월초부터 북상하기 시작하여 1월말경 흑산도 근해에 도착하며, 3월경에는 영광 근해의 칠산어장에 그리고 3월하순부터는 연평어장에 도착하여 산란을 시작한다고 한다. 이들 조기떼를 따라 파시가 형성된 것이다.

 

   조기가 산란을 위해 몰려오는 연평도 근해는 황해 최대의 조기어장이다. 따라서 연평도는 오랫동안 조기의 섬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910년에는 300여 척의 배들이 몰려들었고, 1930년경에는 2000여척, 그리고 1943년에는 무려 5000여척의 배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3월하순부터 6월초까지 두달 남짓한 파시가 들어서면 작은 섬 연평도는 수만명의 사람들로 밤낮없이 흥청거렸다. 요릿집이나 요정과 같은 색주가만 100여집 이상이 생겼고, 이들 색주가에는 술과 여자, 노름 등 선원들이 나락으로 떨어질 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었다. 선원들이 힘든 뱃일로 어렵게 번 돈을 쉽게 탕진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연평도에서는 파시라는 말대신 작사(作詐)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작사란 거짓과 사기가 판치는 무대라는 뜻으로 연평작사의 주인공은 조기잡이 선원들과 술 파는 작부들이지만 그들은 배우였을 뿐, 진짜이익을 챙기는 제작자와 감독은 전주의 객주, 선주와 색주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말, 조기떼가 황해에서 홀연히 사라지면서 파시도 끝이 났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미래에 눈감은 선주들의 욕심이 조기의 남획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조기들의 씨가 마른 것이다. 아직까지 조기잡이가 이루어지는 곳은 제주와 추자도이지만, 그나마 어린 조기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 곳에서도 조기들이 사라질 날이 멀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들고 있다며, 사람들의 욕심이 줄지않는 한 희망은 없다고 한다.

 

   덕적도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다 고려말 이후 왜구의 침략으로 공도(空島)가 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부터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덕적도에서 어업이 시작된 것은 1900년경 새우어장이 발견 되면서부터 이다. 음력 3월 중순이면 어선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여 파시가 섰고 새우가 중국으로 수출되면서 번창했으나, 1949년 당시 중공의 성립으로 수출길이 막히면서 새우파시도 막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덕적도는 신안의 타리와 함께 민어의 주어장이기도 했다. 지금은 민어가 귀한 고급어종이지만 옛날에는 백성들이 즐겨먹던 물고기였다. 민어의 산란장이었던 덕적바다. 지금은 조기가 연평바다를 떠났듯이 민어 역시 덕적바다를 떠난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덕적바다에서의 민어파시는 민어가 몰려오는 6월부터 8월까지 열렸다. 1923년에는 해일로 민어파시에 참가했던 200여척의 어선이 조난을 당해기도 했다. 1936년의 기사에 따르면 민어파시때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해 경찰이 들어와 치안을 유지하고 임시우체국이 서고 의료진도 파견되었다고 하니, 전성기 파시 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파시는 1930년대말까지 이어졌다. 해방후에도 덕적도 어업은 번창했으나 전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 말이 되자 민어가 사라졌다고 한다. 역시 남획의 결과이다.

 

   이런 파시는 우리나라 어업의 역사에서 나타난 사회현상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이야 어업기술의 발달로 그런 파시의 필요성이 없기에 사라져버렸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묻어 버리기엔 아까운 이야기라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파시가 열렸던 섬들과 포구를 찾아다니며 파시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고자 했다. 파시에 대한 기록을 한 줄이라도 더 남기기 위해 발품을 팔고, 귀동냥을 했다는 것이다. 저자와 같은 사람들의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우리의 역사가 더 풍부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런 풍부한 역사가 한류의 또 다른 스토리텔링으로 태어나길 기대해 본다.

k*****1 2017.08.05. 신고 공감 4 댓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