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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러버] 말할 수 없는 불안함
"[북클러버] 말할 수 없는 불안함" 내용보기
이전에 꽤 유명한 골키퍼였던 요제프 블로흐는 건축 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하러 가서는 자신이 해고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꾼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마침 오전 새참을 먹고 있던 현장감독이 그를 힐끗 올려다보는 순간 그는 그것을 해고 표시로 이해하고 공사장을 떠났다.9p블로흐는 방황을 시작한다. 여관과 술집을 전전하던 그
"[북클러버] 말할 수 없는 불안함" 내용보기
이전에 꽤 유명한 골키퍼였던 요제프 블로흐는 건축 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일하러 가서는 자신이 해고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일꾼들이 모여 있는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마침 오전 새참을 먹고 있던 현장감독이 그를 힐끗 올려다보는 순간 그는 그것을 해고 표시로 이해하고 공사장을 떠났다.


9p

블로흐는 방황을 시작한다. 

여관과 술집을 전전하던 그는 극장 매표소 직원과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에 거침없이 끼어드는 그녀에게 불쾌함을 느끼고 계속된 대화에서도 불쾌감을 느낀 블로흐는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라는 물음에 그녀를 살해한다. 이후의 내용은 블로흐가 도피하며 방황하는 내용이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묘사되는데, 매우 난잡하고 정신이 없다. 다양한 인물과 만나 대화를 나누지만 그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술집에서는 남자들과 주먹다짐까지 한다. 그러다 그는 축구 경기를 보러 가고, 골키퍼라는 위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소설의 내용은 매우 정신이 없고 일관성이 부족하며 독자와의 소통을 거부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는 작가의 의도적인 서술로, '불안'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작용한다. 매표소 직원을 살해한 후 자신에 대한 수사가 이루어지는 신문을 보며 초조함을 유발하는 것을 기반으로 다양한 죽음에 대한 묘사와 다툼들로 불안을 증폭시킨다. 그는 범죄자로서 도망치며 주변부로 밀려나지만 여자관계에서, 일반적인 관계에서도 계속해서 어디론가 밀려난다. 배제와 소외, 부적응의 모습을 보인다. 더불어 소설에서는 대체로 단정적 표현이나 말끔한 서술이 사용되지 않는다. 해고된 순간을 묘사할 때도 매표소 여직원을 살해했을 때도 단정적 표현이 쓰이지 않아 독자에게 오해를 일으킬 정도다.

 

이런 서술의 특징 또한 작가의 의도로 볼 수 있다. 언어와 소통의 오류, 단어와 뜻의 부정확한 전달과 의미의 실패, 주인공의 무기력함과 신경과민, 정신없음. 그는 시체를 보아도 그냥 지나치거나 떨어지는 케이크 상자를 보고도 가만히 있는 등 무기력함을 드러낸다. 소통의 실패와 무기력은 현대사회의 상징으로 볼 수 있겠다.

 

말없이 그렇게 누워있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작이자 쓸모없는 일이었다. (..) 그는 방어력 없이 저항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욕지기가 나면서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낯선 것은 아니었지만 좀 혐오스러웠다.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그는 이상해져 버렸고 일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아무런 가능성도 없이 그곳에 누워 있었다. 비교할 것도 없었다.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만은 너무 강렬해서 불안스러웠다.

75-76p


주인공은 종종 주변의 것들이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가 바라보는 것들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아이가 세상을 인식하는 듯한 묘사 같은데, 이런 면에선 주인공이 어두운 배경과 불안한 심리 속에서 세상과 소통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안타까움이 든다. 한편 주체성을 되찾아가는 하나의 희망적인 모습으로도 볼 수 있다. 사람들에게, 혹은 혼잣말로 질문을 계속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소통 자체를 포기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자기 뒤처리는 잘하고 다녀야지", "블로흐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떨어뜨리는 버릇이 있다고 대답했다."(105p) 행동을 하고 그 이후를 생각하지 못하는 어떤 현대인의 초상으로 그릴 수 있지만, 동전과 단추를 자주 떨어뜨리는 행동은 이 불안함의 의식, 자기의식 혹은 경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후반부에 주인공은 공허함과 '구토'감, '수치심'을 느낀다. 사르트르의<구토> 떠오르는 장면이다. 사르트르의 구토가 인간 존재의 의미와 무질서에 대한 사유를 던지듯, 한트케의 작품에서는 불안함으로 요동치는 인간 존재가 보인다. 계속해서 세상에 대한 해석이 어긋나면서 인간의 근본적 소통의 한계성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 소통의 대상은 세상이자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주인공 블로흐는 소통에 실패하며 불안함을 해소하지 못한다.



사실 그들 모두는,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언어 장애자들이에요.
95p

주인공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과 의미들을 생각하면, 언어를 포함한 인식론적 문제에 다다른다. 주인공 블로흐는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언어로써 다가오는 의미들이 유사한 단어들과 혼동되거나 그 자체가 이해되지 못한다. 블로호가 술집에서 한바탕 싸우고 난 뒤 피곤해지는데, 그는 피곤해질수록 모든 것이 선명하게 인식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인간 의식, 어떤 이성적 사고방식은 틀을 규정한다. 이런 세상의 규칙이 블로흐에게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길에서 모르는 사람을 마주쳤을 때, 처음에는 어떻게 그를 파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요. 처음엔 제대로 알 수가 없죠. 올바로 알려면, 상대를 잘 관찰하고 있어야 합니다. 상대는 그에 대항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도망을 가 버리니까요."  이 대사는 주인공이 마지막에 만나 대화한 세관의 말인데, 골키퍼의 처지와 비교되면서 어떤 계속된 준비의 의무와 긴장감이 돋보인다. 세관은 규율의 상징으로서 불안함에 대항한다. 한편으로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그들이 의미하는 것들이 블로호의 불안을 형상화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독자와의 소통을 거부하며 부정적 감정을 이끌고 가지만 긴장감이 부족해 작품성이 아쉬운 소설이다. 게다가 가독성이 좋지는 않다. 그럼에도 인간의 무기력함과 수동성을 밝히고 인간의 본질을 불안에서 찾았다는 점, 인간의 소통의 근본적 한계와 계속해서 어긋나는 현대의 소통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겠다. 외부 대상이 보내는 신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겪는 언어적 갈등, 지속된 불안함의 충동적 발산, 무기력함과 수동성은 현대인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저자는 키커가 공을 쏠 때에만 존재하는 듯한 골키퍼의 모습에서 수동성과 불안함을 포착해 블로흐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골키퍼이자 수동적 불안함을 갖고 사는 블로흐는 말한다.

 


 

공을 차기 위해 키커가 달려 나오면, 골키퍼는 무의식적으로 슈팅도 되기 전에 이미 키커가 공을 창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 키커는 침착하게 다른 방향으로 공을 차게 됩니다. 골키퍼에게는 한 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것과 똑같아요

120p

YES마니아 : 로얄 d********9 2024.09.30. 신고 공감 15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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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해 쓰는 작가 [외국소설-소망 없는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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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 작가의 글에 대해 뭐라고 말을 못하겠다. 읽기는 읽었으나 술술 잘 읽히지는 않고, 그런데 쉽게 놓아버리게 내버려두지는 않고, 읽는 마음을 막 끌어당기는 것 같지는 않은데 슬쩍 붙잡고 있는 것 같고. 앞서 산문집을 읽은 느낌이 애매하게 좋아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노벨상도 받았다고 하니 제대로 볼까 하고 본 건데.  두 편이 실려 있다. '소망 없는 불행'은 엄마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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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 작가의 글에 대해 뭐라고 말을 못하겠다. 읽기는 읽었으나 술술 잘 읽히지는 않고, 그런데 쉽게 놓아버리게 내버려두지는 않고, 읽는 마음을 막 끌어당기는 것 같지는 않은데 슬쩍 붙잡고 있는 것 같고. 앞서 산문집을 읽은 느낌이 애매하게 좋아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노벨상도 받았다고 하니 제대로 볼까 하고 본 건데.

 

두 편이 실려 있다. '소망 없는 불행'은 엄마에 대해서, '아이 이야기'는 아이에 대해서. 작가가 남자라는 편견을 버리려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읽는 내내 남자가, 남자로서, 남자이면서, 하는 조건을 잊을 수가 없었으니까. 아들이 보는 엄마, 아빠가 보는 딸, 여자인 나와는 같은 듯 달랐다. 그게 재미가 있었던가? 그건 또 아니었다. 재미라고 할 만한 성격은 아닌 다른 점이었으니. 그럼, 뭔가? 이걸 생각해 보는 재미가 특별했다고 해야겠다.

 

이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고 한다. 자신의 것만 쓴다고도 한다. 얼마만큼? 얼마나 사실과 가깝게? 아니면 얼마나 사실을 감추면서? 이 또한 어떤 작가에게는 숙명인 걸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하고 싶고 해야 하는 것으로? 그런데 이걸 마냥 담백하게 풀어 놓기에는 어쩐지 모자란 듯 여겨져서 쉽게 읽히지 않도록 까다로운 서술 방식을 택한 걸까? '나를 알고 싶은 사람은 이 계단만큼은 올라서야 내가 보일 것이오.' 하는 것처럼.

 

작가가 그려 놓은 그 시절 '엄마'의 생은 고달파 보였다.(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지만) 독일에서도 엄마들은 우리 사정이나 비슷했던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 엄마라기보다는 여자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글을 페미니즘과 연결지어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고. 독특하게 묘사하고 있기는 하다. 제 엄마의 이야기를 하면서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것도 대단해 보이고. 그게 또 작가의 장점이기도 개성이기도 하겠지만.

 

'아이'를 보는 눈은 '엄마'를 볼 때와 좀 다르다. 더 애틋하고 좀더 깊어 보인다. 아이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게 훨씬 정감 있게 느껴진다. 내 마음에 썩 들었던 부분이다. 아이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이라니, 기본적인 믿음이 들 정도로.(그랬는데 금방 간섭해 오는 외부 요건, 작가와 유고슬라비아와의 일화로) 아이를 이렇게 키우는 사람이 인종학살에 대해서는 그런 관점을 갖고 있다고? 아, 성가시다. 온전히 글을 글만으로 읽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자신에 대한 글만 쓰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일에 대해 쓴 글이 있을까?  

 

모처럼 작가와 작품과 독자와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았구나. 작품은 어디까지 작품인가, 작가도 작품 안에 포함되는가, 독자로서는 작가와 작품을 어떻게 나누고 일치시키면서 보아야 하는가, 독자는 어떤 평가로 작가를 응원하거나 비판해야 하는가, 우리 삶을 더 가치 있고 풍요롭게 하는 데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 권 더 봐야겠다는 것. 

 

YES마니아 : 로얄 j***6 2019.12.08. 신고 공감 4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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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안다는 것 [외국소설-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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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 대한 탐구는 어떤 과정을 거쳐 나를 살게 할까. 이 작가의 글을 몇 편 읽으면서 생각해 보는 물음이다. 나를 만난다는 것, 나를 안다는 것, 내가 누구인지 파악한다는 것, 답도 없는 물음의 끝을 향해 끝없이 글을 쓰는 일. 작가는 이 물음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기만 할 뿐, 아무런 답도 힌트도 주지 않는다. 아니지, 읽는 내가 미처 알아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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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에 대한 탐구는 어떤 과정을 거쳐 나를 살게 할까. 이 작가의 글을 몇 편 읽으면서 생각해 보는 물음이다. 나를 만난다는 것, 나를 안다는 것, 내가 누구인지 파악한다는 것, 답도 없는 물음의 끝을 향해 끝없이 글을 쓰는 일. 작가는 이 물음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기만 할 뿐, 아무런 답도 힌트도 주지 않는다. 아니지, 읽는 내가 미처 알아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 '나는 쓰면서 나를 계속 알아보고자 하는데 너는 읽기만 하는데도 어찌 알지 못하니?' 하는 듯.

 

글쎄, 내가 나를 왜 알아야 하나. 친절하지 못한 이끌림에 작은 반항을 해 본다. 나를 모르고도 잘 살아 온 것 같은데, 저를 모르고도 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것 같은데, 알려는 사람들이 알려는 의지 때문에 도리어 힘들어 하는 것만 같은데. 그래서 고개를 팩 돌리고 싶은데 이게 또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이 물음 안으로 들어섰고 한번 들어서고 나면 모르면 몰랐지 모른 상태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만큼은 알겠다. 블로흐처럼 되어 가는 것일까.  

 

글의 분량은 길지 않다. 이 작가의 글이 가진 장점이라고 본다. 이런 의식을 오랜 시간 붙잡고 있어야 한다면 읽다가 포기하기 쉬울 것 같으니까. 그나마 글이라도 짧은 편이니 몽롱한 상태로도 견딜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고. 골키퍼가 주인공인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라니, 설정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다. 작가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여기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골키퍼, 쉬운 듯 보여도 쉽지 않은 역할이다. 축구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지만, 주요 경기가 있을 때의 페널티킥 장면에서 느낀 조바심만큼은 기억한다. 나는 이 장면을 실시간으로는 못 본다. 끝난 뒤에야 볼 수 있다. 공을 차는 선수도 공을 막는 선수도 가엽고 딱하다. 이게 무슨 게임이라는 말인지. 잔인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한번 글쎄, 이 또한 우리 삶의 형태일까. 강하고 약하고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제 삶의 페널티킥 앞에 선 선수가 되는 일. 차든지 막든지. 부담감이나 압박감은 양측이 다르지 않을 테고 기회라는 면에서는 다르겠지만 결과값을 받아들여야 하는 몫 또한 같을 테고. 적나라한 대결의 상태, 나는 이걸 좀처럼 견디지 못하는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소설의 주인공 블로흐의 심정을 아주 조금은 헤아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렇게 자신이 없는 이유는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고 있는 탓이고.  

 

눈 앞의 시간이 애매하고, 장차 일어날 상황이 두렵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답답하고, 아무도 나를 몰라 주는 것도 누군가 나를 알아 주는 것도 동시에 불안하고, 눈을 뜨는 것도 눈을 감는 것도 어느 쪽도 편하지 않고, 참으로 날카로운 신경이다. 이래서야 하루라도 제대로 살아 있을 수 있겠나.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기라도 하면 해결책이 있을까. 알면 또 좀 나아질까. 별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원인을 알아내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 원인으로 해결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모르면서 하는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막연히 그럴 것 같다고 여기는 내 심정이 증거다.  

 

작가의 의도는 어디까지였을까. 이 글을 쓰면서, 이 글을 읽을 사람들을 어느 선까지 끌어들이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작가가 그어 놓은 선에 어느 정도 다가간 것일까. 내가 바란 대로 넘어서 들어갔을까. 살아 가는 일이 이토록 암담하고 답답하면서도 끝없어 보이는 이 느낌을 어쩌자고 함께 나누려고 한 것일까. 그도 외로웠을까. 아무리 글을 쓰고 또 써도 이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더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읽은 나는, 이렇게 궁시렁거리고 있는 나는 이 책을 읽기 전보다 나아진 상태가 된 걸까. 더 외로워졌나? 노벨상은 왜 받아서 나를 자꾸만 궁시렁거리게 하는 것인지.

 

날이 흐리고 춥다. 2019년에도 기억에는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더 많이 남는다. 기억의 한계라느니 오류라느니 해도 어쩔 수 없다. 마음을 바꿔서 좋은 것만 기억해 보려고 하지만, 평범한 생은 평범한 대로 흐를 뿐이다. 멀리 독일에서 오래 전에 헤매고 있었을 블로흐가 요즘의 우리 주변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짧았든 길었든 잘 나갔던 영광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고, 그 시절을 지난 후에 만나는 나날들은 한순간도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 속 블로흐는 자수를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떠도는 블로흐들은 더 이상 숨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저쪽의 블로흐가 전화를 해 올 때 이쪽의 블로흐도 마음을 여는 게 먼저일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이 방법밖에 없을 것만 같으니.  

 

YES마니아 : 로얄 j***6 2019.12.17. 신고 공감 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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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더 자세히 보라 - 페터 한트케 『소망 없는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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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는 데뷔 때부터 반서사적 글쓰기를 추구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전통적 서술 방식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실제 인물의 삶이 문학적 허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불가피하다. 두 주인공 어머니와 아이를 위해서도. 물론 이 작업은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 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자살과 아이의 탄생은 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절박한 욕망과 말문이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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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는 데뷔 때부터 반서사적 글쓰기를 추구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전통적 서술 방식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실제 인물의 삶이 문학적 허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불가피하다. 두 주인공 어머니와 아이를 위해서도. 물론 이 작업은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 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자살과 아이의 탄생은 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절박한 욕망과 말문이 완전히 막히는 것’이 만나는 문학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 소망 없는 불행  ▒

 


*

글을 쓸 때는 난 반드시 옛날에 대해, 적어도 쓰고 있는 시간 동안은 지나가버린 일에 대해 쓴다. 늘 그렇듯이 난 문학적으로 대상에 몰두하며 나 자신을 회상하고, 문장을 만드는 기계로 피상화시키고 객관화시킨다. 나는 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종교적이니 심리학적이니 사회학적인 꿈 해석 운운하며 이 흥미로운 자살 사건을 어렵지 않게 설명할 수도 있을 어떤 낯선 인터뷰 기자보다는, 내가 그녀에 대해서, 또 그녀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내 개인적인 관심 때문이다. 가령 무언가 할 일이 있으면 나는 기운을 얻는다. 마지막 이유는, 방식은 좀 다르겠지만 마치 인터뷰 기자처럼 이 자살을 하나의 사건으로 재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모든 이유들은 아주 임의적인 것들이고, 역시 임의적일 뿐인 다른 이유들로 대치될 수도 있다. 어쨌든 완전히 말문이 막혀버렸던 짧은 순간들과 그런 순간들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고 옛날부터 내게는 이런 욕망들이 글을 쓰게 하는 동기였다.


**

이렇게 한 인물을 추상화하고 형식화하는 데 위험한 점은 물론 그 추상화 및 형식화 작업이 독립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작 이야기되고 있는 그 인물이 잊히고 꿈속의 이미지들처럼 구절들과 문장들이 연쇄 작용을 일으켜 한 개인의 삶이 동기 이상의 어떤 것도 되지 못하는 문학적 의식(儀式)이 된다.

이 두 가지 위험들은 ㅡ 즉 일어난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위험과 한 인물이 시적 문장들 속으로 고통 없이 용해되어 버리는 위험 ㅡ 나의 글 쓰는 작업을 더디게 한다. 왜냐하면 문장을 쓸 때마다 나는 평형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건 물론 어떤 문학적 창작에나 다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특히 그러한데 그 이유는 사실들이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무언가 허구로 생각해 낼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처음에는 사실들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그다음에 그 사실들을 서술하는 형식들을 모색했다. 그런데 서술 형식들을 찾는 동안 어느 틈에 내가 사실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사실이 아니라 이미 써오던 서술 형식들, 즉 인간의 사회적 경험 속에 들어 있는 언어군을 출발점으로 삼는 새로운 접근 방법을 택했다. 그러고서 나는 이 서술 형식들에 들어맞는 사건들을 나의 어머니의 삶에서 추려냈다. 왜냐하면 이미 통용되는 대중의 언어를 가지고서 그녀의 삶에서 일어난 모든 사소한 사건들 중에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몇 사실을 골라내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문장마다 여자의 전기에 흔히 쓰이는 보편화된 형식들과 나의 어머니가 살았던 삶의 특수성을 비교했다. 결국 그 둘을 비교했을 때 일치되는 것과 상치되는 것으로부터 실질적으로 글 쓰는 작업이 따라나오게 된다.



태어난 곳과 똑같은 곳에서 자살한 어머니. 가난한 시골 살림에서 여자아이로 태어난 어머니에게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능성은 없었다. …(중략)… 그저 더위와 추위, 축축함과 건조함, 편안함과 불편함 사이의 변화만 있었을 뿐이었다.”

 


***

빨랫줄 위에 매달리는 물방울, 어둠 속에서 길을 가는 사람 앞으로 펄쩍 뛰어드는 두꺼비들, 모기들, 곤충들, 낮에도 날아다니는 나방들, 통나무 헛간의 널빤지들 속에 있는 벌레들과 지네들, 누구나 이런 것들에 길들여져야 했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소망 없이 사는 게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며, 소망 없이 사는 걸 모두가 불행하게 생각했다. 다른 삶의 형태와 비교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욕망도 없었을까?

문제는 어머니가 갑자기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배우고 싶어 했다. 그건 그녀가 아이였을 때 무언가를 배우면서 자기 자신에 관해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건 사람들이 ‘난 나 자신을 느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건 최초로 가진 소망이었고, 그 소망을 끊임없이 말하다 보니 급기야는 고정 관념이 되어버렸다. 어머니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할아버지께 무엇인가 배우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할아버지껜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손짓 몇 번으로 거절당했고 그 이후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가출, 돈을 벌며 잠깐 누린 청춘의 맛, 전쟁, 유부남과의 첫사랑, 임신, 아이 때문에 한 다른 남자와의 결혼, 남편의 외도, 주정뱅이가 된 남편, 손찌검, 임신, 낙태, 누구에게도 흠 잡히지 않고 싶은 공허한 일상, 국경 탈출, 임신, 고향에서 똑같은 반복 …… “그녀는 성(性)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고, 일상의 사소함 속에 자신을 묻어버렸다.”

 


 

****

이 모든 것들은 다른 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타입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전쟁 전의 타입에서 전쟁 후의 타입으로, 시골 처녀에서 도시 여인으로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적절한 말로 표현하자면 크고, 날씬하고, 검은 머리를 한 도시 여자로 말이다.

그런 타입으로 묘사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의 내력에서 해방된 듯 느꼈다. 왜냐하면 이제 에로틱하게 바라보는 어떤 사람의 낯선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코 시민적으로 평온해질 가능성이 없었던 정서 생활은 겉으로는 여자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모임의 시민적 체계를 서툴게 흉내 냄으로써 안정되어 갔다. 그 체계 속에선 ‘이러저러한 사람은 내 타입이지만 난 그의 타입이 아니야’, 혹은 ‘난 그의 타입이지만 그는 나의 타입이 아니야’, 혹은 ‘우린 서로 잘 맞아’라거나 ‘우린 서로 쳐다보는 것도 견딜 수 없어’라는 말들이나 상투적인 말들이 구속력 있는 규칙들로 간주되었기에 어떤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약간 주의를 기울이는 반응조차 모두 이 규칙들에서 벗어난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사실 그 사람은 내 타입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이런저런 유형(類型)에 따라 살면서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객관적 느낌을 가졌으며 자신의 출신이라든지, 비듬이 떨어져 괴롭다든지, 발에 땀이 난다든지 하는 개인적 특성이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등 매일매일 반복되는 문제들 따위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하나의 유형에 들어감으로써 개인은 부끄럽게 여겨졌던 외로움과 고독감으로부터 벗어났고 스스로를 망각했으며 비록 잠깐이긴 하지만 때로는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되었다.

(중략)

그녀는 언제나 계산을 틀리게 했다. 집에서는 소시민적인 해결책조차도 그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단칸방에다 날마다 하는 빵 걱정,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나는 제스처와 억지 표정, 그리고 의사소통이라곤 김빠진 성행위밖에 하지 않는 동거인과의 생활 여건들이 시민적이랄 수 있기 이전의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삶에서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밖에서는 승리자 타입, 안에서는 약한 반쪽, 영원한 패배자였다. 그건 삶이 아니었다!

(중략)

그녀는 존재했고 성장해 갔지만 아무것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

사사로운 걱정, 무언가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갈증, 무언가 하고 싶은 욕망, 단 한 번뿐이라는 느낌, 먼 곳에 대한 동경, 성적 충동 등등 머릿속의 생각들이 어느 것 할 것 없이 역할이 뒤바뀐 듯한 전도된 세계와 함께 이런 의식 속으로 녹아들어가 버렸다. 결국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이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유 의지에 따라 사는 것, 가령 평일에 산보를 간다든지, 두 번째로 사랑에 빠진다든지, 여자가 혼자 술집에서 과일주를 마신다든지 하는 등의 일은 말할 것도 없이 괴물이나 하는 짓이었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노래를 같이 하자거나 춤을 추자고 요청할 때나 ‘자유 의지로’ 할 뿐이었다. 자기 자신의 내력과 감정을 속이기 위해 사람들은 말[馬]과 같은 가축들에 관해 말할 때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서먹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숫기가 없어졌고 거의 말을 하지 않거나 약간 정신이 돌아버려 집 안 여기저기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므로 이미 언급된 의식(儀式)에는 위안의 기능이 있다. 이 위안은 어떤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으로 소멸되는 것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개인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어쨌든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


“기분 좋은 가난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완성된 궁핍”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다른 삶은 오지 않았다. ‘소유권이란 구체화된 자유’라는 말처럼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유, 자유의지는 비참함을 알려주는 공소장 같다. 참아낼 수는 있지만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가난 속에서 취미도, 오락도, 활동적인 공공생활도 없이 닥쳐오는 삶을 받아들였던 어머니는 병이 들자 ‘난 이제 인간도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난 나 자신과 얘길 한다. 그건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지’라고 한 말은 한트케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과 똑같다. 사실 이건 우리 모두의 속내 아닌가. 유언장에서 자살 선택에 대해 ‘행복하다’고 남겼지만 그도 우리도 진심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자살을 선택하는 상황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는 “가능한 한 적합한 문장들로 기억에 접근해 가려고 노력함으로써 공포의 상태에서 작은 쾌감을 얻어내고, 공포의 쾌감에서 회상의 쾌감을 완성해 내는 것”으로 이 소설을 완성했다. 작가라면 누구나 부모에 대해 이런 글을 써보고 싶을 것이다. 이 작품을 에세이로 보든 소설로 보든 한트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고 끝맺음이었다.

 




 ▒  아이 이야기 ▒


*

소망한다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또한 소망하는 것에 시한(時限)을 두어야 한다는 의식도 가능하리라. 근데 그런 의식은 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소망이 있었다. 아이, 운명의 여인,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직업. 이 세 가지가 그에게 다 왔지만 그것은 하나의 상으로 모이지 않았다. 작가도 되었고 아이도 생겼지만 아내와의 불화는 그 때문에 더욱 커졌다. 아내와 별거 후 아이와 살게 된 그는 틀에 짜인 습관들로 가득했던 어머니의 시간을 조금 이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

아이의 생활 리듬에 따라 흐르는 일상을 잔인하고도 무의미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더 강도 높게 체험했다. 물건들은 무기처럼 비스듬하게, 악의를 품고 비현실적으로 놓여 있었다. 물건들 사이에는 무기 창고 속에 무기가 쟁여져 있는 것처럼 공기 한 점의 여지도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 묶여 있는 자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그 혼란 속에서 어디를 보나 적대적인 무질서만이 있었다. 훨씬 나중 에야 비로소 그는 아이가 어질러놓은 잡동사니를 참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아무렇게나, 심지어는 형편없이 흩어져 있는 듯 보이더라도 무질서 속의 질서를 깨닫고선 그 속에서 아이와 똑같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을 배웠다. 단지 자유로운 순간과 꾸준히 지켜봐 주는 것만이 필요했다.

(중략)

집에 묶여 있으면서도 거의 안정을 찾지 못하던 남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색깔과 형태에 대한 모든 감각과 사물 간의 거리와 등급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렸고, 시야는 흐려지고 불유쾌한 여명 속에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아이는 여러 물건과 섞여 있어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물건처럼 돌아다녔다. 그것은 비현실적이었다. 비현실이란 상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는 광기와 구별되지 않는 야만이었다. 활기를 잃은 남자는 더 이상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고 불안감이 그의 의지를 더욱 빼앗아갔다. 


대작을 쓰고 싶다는 열망과 아이 양육 사이에서 그는 시종일관 고민에 휩싸였다. 자신의 재능과 업적을 위해 아이를 버린 아내를 그는 비난하지 않았던가. 그에게 아이는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진리의 척도’였다. 처음에 그는 아이의 감독자나 상급 명령자처럼 대했지만 아이를 통해 무조건적인 신뢰감을 배웠고, 그가 비난해왔던 위대한 말들도 아이와 함께 하며 이해하게 되었다. 나중에 아내, 아이와 함께 피크닉도 가지만 그들은 끝내 ‘가족’이 되지 못했다.

 

 

어머니도, 그도, 그의 아이도 자신만의 소망이 있었을 테지만 그것은 다른 무엇에 의해 비밀처럼 덮인다. 우리가 가진 소망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건 아닐 것이다. 소망은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삶이 삶을 키우듯 소망이 소망을 키운다. 소망 없는 것이 불행이 아니라 우리가 소망이 끝났다고 매듭짓는 순간이 불행 아닐지. 소망을 더 자세히 보아야 하리라. 그가 아이를 보았듯.

 

 

g******i 2019.10.30. 신고 공감 3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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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날들의 기록) 소망 없는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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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 51세에 자살한 어머니의 이야기. 강의의 질문은: 어머니는 왜 자살하고 말았을까' 강의의 마지막 결론은 '여자는 언어가 없는 존재다'(....)"/40쪽   <조용한 날들의 기록>을 어떤식으로 읽어야지,하는 생각은 없었다.그러나..그럼에도 자연스럽게 시선은 책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 될때마다 반가웠다. 소개 된 책을 한 권씩 리스트에 담아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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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 51세에 자살한 어머니의 이야기. 강의의 질문은: 어머니는 왜 자살하고 말았을까' 강의의 마지막 결론은 '여자는 언어가 없는 존재다'(....)"/40쪽

 


<조용한 날들의 기록>을 어떤식으로 읽어야지,하는 생각은 없었다.그러나..그럼에도 자연스럽게 시선은 책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 될때마다 반가웠다. 소개 된 책을 한 권씩 리스트에 담아 놓았다가, 기회가 될 때마다 읽는 것으로, <조용한 날들의 기록>에 관한 기억을 간직해야지 하는 바람... 그러나 <소망 없는 불행>을 언급된 부분에서 냉큼, 읽고 싶어졌다. 노벨상을 받았으나, 내게 번번이 포기하게 만든 작가라서, 내심 오기도 발동했지만,<조용한 날들의 기록>에서 언급한 부분을 어떻게 나는 이해하게 될까 궁금했다."문학은 그녀에게 자신에 대해 생각하도록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58쪽 어머니의 자살이야기를 산문으로 남긴 글이라고 했다. 시작부터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은 있었지만,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간 가장 구체적(?) 이유를 듣고 싶었다.(어쩔수 없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남기려 함을 고백하는 가운데, 허구와 사실에 관한 주제를  문학을 통해 예시로 설명하는 부분은 흥미로웠다.어머니가 살아온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들, 여성이 한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던 시대..그러나 스스로  여성도 사람이란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자괴감은..어머니를 짓누르는 무엇이었게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체험은,경험하지 않은 입장에서 함부로 말할수 없는 거니깐."체험에 대해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나는 다시금 지루해지고 갑자기 모든 것이 근거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그런데도 나는 때때로 이유도 없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의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일에 대해 무언가 언급하려 들면 화를 낸다(...)"/11쪽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최근에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보다 더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읽혀져도 될 만한 소설이라 생각했다. 작가는 어머니를 죽음으로 이끈 이유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싶었던 거라 이해했다. 최근 영화 '마더'를 주제로 한 방송을 보면서 왜 그녀의 이름은 오로지 '마더'로 밖에 불릴수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덕분에, 한트케의 소설 속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기분도 느껴졌다.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꿈이 좌절되었을 때...무얼 할 수 있을까? <소망 없는 불행> 덕분에 한트케의 소설은 모두 어렵다는 편견을 깰 수 있게 되었다. 가볍지 않은 주제임에도 길지 않은 분량이라 그런지 잘 읽혀져서 놀랄정도였다. 가끔 <이방인>의 뫼르소가 떠오르기도 했다. 어머니의 자살에 대해 객관적 이유들을 조곤조곤 설명할수 없었던 뫼르소가 애처롭게 느껴져서... (그가 소환될 줄은 예상도 못했는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기 보다 오로지 어머니의 시선으로 <소망 없는 불행>을 읽게 된다면 <조용한 날들의 기록>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 언어 없는 여자가 마지막으로 도착할 수 밖에 없는 곳은 어디일까"/41쪽 <조용한 날들의 기록> 

w*******i 2023.04.25.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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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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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적인 언어를 통해 인간 경험의 주변부와 특수성을 탐구했다"라는 평가와 함께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인물.페터 한트케 Peter Handke <관객모독>은 순수하게,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라서 읽게 되었어요.앗, 이 작품은 희곡이었어요. 아니 이것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희곡~물론 제가 희곡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구성 요소가 있잖아요.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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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적인 언어를 통해 인간 경험의 주변부와 특수성을 탐구했다"라는 평가와 함께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인물.

페터 한트케 Peter Handke 


<관객모독>은 순수하게,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라서 읽게 되었어요.

앗, 이 작품은 희곡이었어요. 

아니 이것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희곡~

물론 제가 희곡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구성 요소가 있잖아요.

등장인물과 배경에 대한 설명 그리고 대사와 지문 등등.

<관객모독>에는 그런 요소들이 없어요. 기존 희곡의 틀을 벗어난 작품인 거죠.


등장인물은 배우 네 명.

첫 페이지는 《배우를 위한 규칙들》이 자유분방하게 적혀 있어요.


가톨릭 성당에서 신부와 신자들이 번갈아 올리는 기도를 귀 기울여 들을 것.

축구장에서 외쳐대는 응원 소리와 야유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것.

데모하는 군중들의 구호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것.

안장이 땅을 향해 거꾸로 세워진 자전거에서 돌아가는 바퀴살이 조용해질 때까지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멈추어 설 때까지 바퀴살을 자세히 관찰할 것.

콘크리트 믹서 엔진을 켜고 점점 커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것.

논쟁 때 오고 가는 말들을 귀 기울여 들을 것.

롤링 스톤스가 부르는 「텔 미」란 노래를 귀 기울여 들을 것.

기차들이 동시에 출발하고 도착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것.

라디오 룩셈부르크의 히트퍼레이드를 귀 기울여 들을 것.

유엔 회의를 동시에 중계하는 아나운서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들을 것.

「툴라의 함정」이란 영화에서 미녀가 보스에게 앞으로 몇 명이나 더 죽이겠느냐고 질문하자,  

보스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아직 몇 명이나 더 남았지? 라고 묻는다.

범죄 조직 보스(리 제이 콥)와 미녀의 이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동시에 보스를 자세히 관찰할 것.

비틀스 영화들을 자세히 관찰할 것.

최초의 비틀스 영화에서 링고 스타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롱당한 후 드럼 앞에 앉아 드럼을 두들기기 시작하는 그 순간의 미소를 자세히 관찰할 것.

「서부에서 온 사나이」라는 영화에서 게리 쿠퍼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할 것. 

위의 영화에서 몸에 총을 맞고 폐허가 된 도시의 황량한 거리를 절뚝거리며 한참을 달려가다 쓰러지면서

날카롭게 고함을 지르는 벙어리의 죽음을 자세히 관찰할 것.

동물원에서 인간을 흉내 내는 원숭이들과 침을 흘리는 라마들을 자세히 관찰할 것.

건달이나 게으름뱅이들이 거리를 걸어다니는 모습이나 슬롯 머신 앞에서 도박하는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것.   (11-12p)


텅 빈 무대에 배우 넷이 등장하면서 곧바로 관객들을 쳐다보지 않아요. 그들은 걸으면서 연습하고, 말을 하지만 관객을 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다른 이미지가 나타나서는 안 되고, 욕설을 하더라도 누구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의 말투가 어떤 의미를 나타내서는 안 돼요.

그들은 욕설 연습이 끝나기 전에 무대 앞쪽에 도착하여 자유롭게 서 있어요. 이제 관객을 바라보지만 관객 중 어느 누구도 주시하지 않고, 잠시 말없이 서 있어요.

그다음... 그들은 말하기 시작해요. 말하는 순서는 자유롭고, 모두가 대략 같은 분량으로 대단히 열심히 말해요.


<관객모독>은 매우 짧은 희곡이라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요.

그러나 읽는다고 해서 그 내용을 다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어요. 저 역시, 이게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했어요.

정말 아이러니한 것 같아요. 마치 '파랑 코끼리'를 절대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자꾸만 떠오르는 것처럼.

<관객모독>은 어떤 사건이나 줄거리가 없어요. 배우들은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아요. 단지 말만 해요. 

이 희곡에는 무대 위의 불빛도, 배우들이 입고 있는 옷도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밝히고 있어요.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는다고.

관객들은 언어의 희극을 즐기는 거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관객들은 연극을 체험하는 것이며, 연극 관객의 역할이 되는 거예요.

이제껏 관객은 연극 무대를 지켜보는 관찰자 입장이었다면, <관객모독>에서는 무대 위쪽과 아래쪽이라는 두 세계가 존재하면서 관객의 역할을 맡게 돼요.

그러나 관객이 연극에 참여하지는 않아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앉아 있어요. 관객이 주제이고, 관객이 한 사건이지만 어떤 유형일 필요는 없어요.

 "여러분은 발견됩니다. 여러분은 오늘 저녁 발견된 것입니다." (27p)


제가 <관객모독>을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뛰어난 작품성이 아니에요. 

1966년 6월 8일 프랑크푸르트 탑 극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고 해요. 와우, 이 희곡으로 공연이 가능하다고? 솔직히 배우들이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당시 흥행기획자들과 연극 평론가들은 "이야깃거리가 없는 현학적인 서술"이라는 혹독한 평가를 했대요. <관객모독> 이전에 발표했던 첫 소설 『말벌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니 <관객모독>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거죠. 그러나 반전!

실제 공연된 <관객모독>은 관객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한트케가 문학적 명성을 얻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해요. 

<관객모독>에 관한 작품해설을 읽은 후에 《배우를 위한 규칙들》 다시 읽어보았어요.

아주 진지하게, 좀 더 깊이 있게... 그러자 '귀 기울여 들을 것'과 '관찰할 것'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 마냥 또렷하게 보였어요.

결국 <관객모독>은 어떤 관객이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질 수 있는 작품인 것 같아요. 


한트케는 1966년에 쓴 「문학은 낭만적이다」라는 소론에서

 "한 단어의 중요성은 그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 (......) 그 단어가 언어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것"이라는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인용했다. 

이 언어 철학으로부터 한트케는 한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유희의 가능성을 배웠다. (76p)

 

 

YES마니아 : 로얄 이달의 사락 a*****7 2019.11.08.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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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페터 한트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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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페터 한트케의 왼손잡이 여인을 읽고 오래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이후에 소망없는 불행을 읽으며 지루했고 빔벤더스의 베를린천사의 시를 보며 울먹였던 기억이 있네요..책은 술술 읽힙니다만 사건이 날 즈음엔 뭔가 비몽사몽하더군요..책의 뒷부분을 참고하니 페터 한트케가 스물 여덟에 쓴 소설이고 이미 빔벤더스와 작업을 한 작품이네요..젊어 건방지고 그러니 영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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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페터 한트케의 왼손잡이 여인을 읽고 오래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이후에 소망없는 불행을 읽으며 지루했고 빔벤더스의 베를린천사의 시를 보며 울먹였던 기억이 있네요..책은 술술 읽힙니다만 사건이 날 즈음엔 뭔가 비몽사몽하더군요..책의 뒷부분을 참고하니 페터 한트케가 스물 여덟에 쓴 소설이고 이미 빔벤더스와 작업을 한 작품이네요..젊어 건방지고 그러니 영화로 주목받았을거란 뻔한 생각도 듭니다..소설의 처음에는 어딘지 함순의 굶주림이 떠오르다가 사건이 나니 이방인인가?싶었습니다..함순씨 까뮈씨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네요..책 페이지수가 적은게 다행인 소설입니다..여전히 팬이지만요..
a***z 2019.10.29.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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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없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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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연극을 보러 가도 공연장의 분위기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내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집중하지 못하고 자주 땅바닥을 보곤 했다. 혹시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어색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지금은 꽤 유명해진 배우가 나온 연극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좀 튀는 걸 좋아해서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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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연극을 보러 가도 공연장의 분위기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내 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집중하지 못하고 자주 땅바닥을 보곤 했다. 혹시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어색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지금은 꽤 유명해진 배우가 나온 연극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좀 튀는 걸 좋아해서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이제 막 연기를 끝낸 배우에게 내가 뭐라고.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의 시작은 흥미롭다. 기존 희곡의 서술의 방식에서 벗어난다. 배우를 위한 규칙들로 시작된다. 연극을 준비하는 배우들은 한트케가 지시하는 규칙을 이행해야 한다. 사물의 소리를 듣고 현상을 목도하는 일. 발성을 가다듬고 호흡법을 연습하고 얼굴 표정을 짓는 일이 아닌 소리를 들으며 의식의 밑바닥에 있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네 명의 배우는 대사를 따로 나누지 않고 원하는 방식으로 극을 이끌어 간다.

여러분으로 시작해서 너희들로 끝나는 기괴한 연극. 배우의 음성이 아닌 활자로 된 언어로 『관객모독』을 보면서 무대를 상상했다. 그 안에는 숨을 자유롭게 쉬고 어색하게 눈치를 보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잘 차려입고 오랜만에 문화적 허영심을 충족하러 온 관객을 향해서 독설을 날린다. 기존에 봐 왔던 연극이 아니어서 관객들은 당황할 것이다. 관객을 무대로 끌어들여 그들의 의식을 허세를 낱낱이 까발린다. 『관객모독』은 줄거리가 따로 없는 희곡이다. 


연기를 하지 않는 연기를 하며 대사가 아닌 대사를 한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배우의 움직임과 대사의 상징을 찾는 일은 의미 없는 일이다. 시간의 흐름이 있다고 믿는 관객에게. 지금 무대의 시간이 흘러 다음이 있다고 믿는 관객에게 이곳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고 아무것도 흉내 내지 않는 연극을 한다고 당당히 말한다.

허구의 세계 안에서 환상은 실종된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환상이 되어 사라진다. 시간은 정지하고 언어는 소멸한다. 『관객모독』은 언어로써 시간의 부재를 증명하려 한다. 실컷 모욕과 모독을 보여주고 안녕히 돌아가시라는 끝인사를 하는 연극. 당신은 201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터 한트케가 궁금해서 이 글을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의미 없는 일.

『관객모독』은 의미 없음의 의미를 찾아간다. 당신이 찾고자 하는 의미는 이 세계에 어디를 둘러봐도 없으며 결국 의미 없음으로 귀결되는 결과를 받아들고 쓸쓸히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에서 퇴장할 일만 남았다. 한밤중 들려오는 개와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막힌 수챗구멍을 들여다보는 일. 문학은 존재하지 않는 구멍에 나를 끼워 보는 일.



s*****m 2019.10.25.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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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 세계문학전집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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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 작품은 자전적이거나 다소 에세이의 문체 같은 '어느 작가의 오후'나 '소망 없는 불행'을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줄거리가 있는 서사일 텐데 주인공 남성의 정신세계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 인부로 일하고 있는 그가 왜 윗사람의 눈치만으로 자신이 해고되었다고 상정하는지 등등, 은 썩 아귀가 맞는, 이치에 맞는 전통적인 룰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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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 작품은 자전적이거나 다소 에세이의 문체 같은 '어느 작가의 오후'나 '소망 없는 불행'을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줄거리가 있는 서사일 텐데 주인공 남성의 정신세계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 인부로 일하고 있는 그가 왜 윗사람의 눈치만으로 자신이 해고되었다고 상정하는지 등등, 은 썩 아귀가 맞는, 이치에 맞는 전통적인 룰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영화화된 빔 벤더스의 영화를 클립만 본 적이 있지만 소설을 읽으니 미묘하게 난해해 영화화가 어려웠으리란 생각이 들었어요.

g*******5 2023.05.01.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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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는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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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트케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소망 없는 불행`과 `아이 이야기`가 그런 주제 의식에 부합하는 가장 전형적인 작품이다.    `소망 없는 불행`은 1971년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하고 자살한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후 쓴 산문으로 어머니의 일생을 회상하면서 한 인간이 자아에 눈떠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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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트케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소망 없는 불행``아이 이야기`가 그런 주제 의식에 부합하는 가장 전형적인 작품이다.  

 `소망 없는 불행`1971년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하고 자살한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후 쓴 산문으로 어머니의 일생을 회상하면서 한 인간이 자아에 눈떠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불행했던 작가 자신의 이야기, 오스트리아의 역사 및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분모를 찾아볼 수 있는 여자의 일생까지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작가의 작업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잃고 감성적으로 몰입하려 하는 자신을 작가로서 엄격히 제어하며 글쓰기에 임하는 한트케의 작가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아이 이야기`는 작가가 연극 배우였던 첫번째 부인과 헤어진 후, 딸 아미나를 맡아 기른 경험을 토대로 하여 쓴 작품이다. 그는 파리와 독일의 여러 도시로 거주지를 옮겨다니며 남자로서 아이를 키우며 겪는 이야기들을 매우 담담하게 서술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러 의미에서 폐허로 가득 찬 자신의 어린 시절로 인해 가정 생활이라든가 가족 관계 등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자신이 딸을 키우며 그것들의 소중함을 인식해 가고 마침내는 한 인간 속의 소우주까지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 이 작품에 담겨 있다. (옮긴이의 말에서)

k****6 2019.12.13.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