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전 있는 그녀가 아름답다!
메일함을 열어 보니 작년 초부터 저자 은수미 선생과 주고받은 『날아라 노동』 관련 메일이 한 편의 역사처럼 주르륵 나온다. 어떤 내용을 담을지 아이템 구상안이 오고가다 얼개를 잡은 목차가 나오고도 여러 차례 메일을 주고받았다. 중간에 논문을 써야 하는 사정이 생기며 잠시 중단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도 있었다. 절반 정도 쓴 원고를 갖고 또 논의… 그런 지난한 과정 끝에 2012년 11월에야 책이 나왔으니 꽤 긴 시간이 걸린 셈이다.
저자를 처음 만나러 가던 날, 화창한 햇살을 받으며 여의도에 있는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실을 찾았다. 넓지 않은 공간이 많은 자료와 책
한구석에 자리한 책상에서 그녀는 안경 너머로 컴퓨터 자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자를 만나기 전에는 으레 어떤 사람인가 하는 설렘보다는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인데 말간 웃음으로 긴장을 눈 녹듯 풀어 주었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편안하고 따스한 표정의 그녀가 어떤 삶의 행로를 거쳐 온 사람인지를.
책을 만드는 동안 그녀는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에서 19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3번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그녀는 연일 언론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인물이 되었다. 첫 테이프는 모 매체가 끊었다. ‘사노맹 여전사, 19대 국회 기대주 되다’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인생을 길게 소개했다. 그것도 이틀에 걸쳐 그녀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색깔론’ 공세를 취하려 한 의도였지만 오히려 그녀를 띄워 준 감사한 일이 되었다.
고용노동부에서도 그녀가 19대 국회의원 명단에 있는 걸 보고 바짝 긴장했다고 하니 이쯤 되면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증이 생길 법하다. (은수미의원 인터뷰 더 보러가기 : 노컷뉴스 민주통합당 은수미 "85년, 봉제공장 공순이였다" )
그녀는 젊은 날 스스로 봉제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살았다. 미싱에 손톱이 찍혀 너덜너덜해진 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그녀를 가슴 아프게 한 일이 있었다. 16세 어린 여공이 아파서 쉰다는 말을 못하고 무단결근한 다음 날 관리자 2명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일, 지금도 그녀에게 후회로 남아 있다.
이후 사노맹을 결성하여 활동하다 구속되어 6년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오랜 독방생활, 안기부의 고문 후유증으로 결핵, 폐렴 등 각종 병을 앓았고 장을 잘라 내는 대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때 그녀에게 희망을 준 것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나의 어머니」라는 시(詩)였단다.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라는 구절에서 고통받는 이가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혹독한 수감 생활 가운데서도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내가 만난 그녀는 작고 부드러운 인상의 편안한 모습이었는데 그 이면에 이런 아픔이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그래서 그녀를 두고 ‘강철나비’라고 부르나 보다.
출소 후 제적당한 대학에 다시 들어가 노동 공부를 계속 하였고 이후 노동의 현장과 이론을 아우르는 노동전문가가 되었다. 줄곧 한길을 걸어온 그녀. 도대체 이토록 그녀를 노동문제에 헌신하게 한 추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녀에게 노동문제나 노동권은 아름다운 대의를 위해 자신을 불타오르게 하는 삶의 고갱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당선된 후 국회의사당 의원 사무실을 찾았을 때 그녀는 여전히 분주했다. 풀리지 않은 노동문제가 산적한 상황이라 그녀는 더욱 눈코 뜰 새 없어 보였다. 우리들 대부분이 노동자로 살아가는데 도대체 ‘노동’이라 하면 왜 이리 천시하고 관심 밖인지, 그녀는 그 궁금증부터 하나하나 풀어 나가려 한다.
노동이 행복한 세상, 권리가 춤추는 사회를 만드는 그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날아라 노동』에 담아 손을 내밀고 있다. 함께 하자고.
2012년 11월 6일 부키 편집부 바람돌이 씀.
바람돌이의 사진 설명 : 쌍용자동차 청문회에서 해고 노동자 중 고인이 된 분들의 성함을 한 분 한 분 부르다 끝내 눈물을 흘리는 저자 은수미. 누구보다 노동자발의 현실을 공감하고 아파할 줄 아는 뜨거운 가슴과 노동 현실을 철저히 분석하는 냉철한 이성을 가진 그녀가 아름다워 보인다! |
|
책을 읽던 중 스마트폰을 통해 뉴스가 하나 들어왔습니다. 부산교통공사 노사, 임.단협 타결이라는 소식입니다. 부산 교통공사 노사가 15일 오후 올해 임금 및 단체협상을 타결했다는 기사입니다.부산 교통공사 노사는 이날 오후 3시부터 부산 금정구 노포동 기지창에서 열린 최종 교섭(제19차)에서 89명 인원채용, 임금 3.5% 인상 등 주요 쟁점에 합의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부산지하철 노조는 교섭 결렬시 16일 오전부터 돌입하기로 한 파업을 철회했다고 합니다. 부산 시민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계시겠지요. 당장 출, 퇴근길이 걱정이셨을테니까 말입니다.
근로자에게 파업은 사실 최종적인 선택입니다. 규모가 크고, 작고를 떠나 파업이 일어나면 문을 닫고 말겠다는 사업주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문을 닫는다는 결정도 사업주에겐 쉬운 일이 아니겠습니다만, 그 내면에는 이 참에 물갈이를 해버리자는 못 된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부인 못하겠지요.
이 책의 키워드이자 화두인 '노동'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정의에서 '노동은 여전히 쾌락과는 다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부분이 큰 활자로 확대되어 눈에 들어옵니다. 왜 노동이 쾌락까지는 안가더라도 기쁨과 보람이 될 수 없는지요.
독일의 법률가, 정치가이자 정치,경제,사회학자로 족적을 남긴 막스 베버는 그가 남긴 유명한 저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노동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림으로 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노동이 신성하면 그 ‘대가인 돈도 신성하다는 것입니다. 고대와 중세에는 추잡한 탐욕과 상스러운 생각이라고 배척되었지만, 노동과 자본이 신성하다면, 그것을 비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축적하거나 낭비하는 대신, 철저하게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근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정신입니다. 어느 시대에도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직업(소명)’으로 연결시키지 않았으며, 이 경향은 종교적 교육이 전통주의적 구습을 타파한 예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정신'이란? 직업으로서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려는 정신적 태도라고 정의합니다.
이 책의 저자 은수미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대학에서 제적된 1984년부터 현재까지 '노동'을 화두처럼 붙들고 있습니다. 6년간 옥고를 치른 뒤 1998년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박사학위를 받고, 그 후 한국노동연구원에서 단독 저서나 공저, 수많은 논문을 통해 노동문제와 노동 정책을 제기해 왔으며 2012년 19대 국회위원에 당선된 뒤에도 불합리한 노동 현안을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면서 그녀의 화두인 '노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책의 장점은 '노동'에 대한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서술이 아닌 현장에서 눈물 흘리며 가슴을 두드려가며 얻어낸 이야기들이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책 제목을 '날아라 노동'이라고 지었을까요? 이제 노동자의 입장에서 날개를 달고 꿈을 펼치고 노동이 나의 소중한 일상이자 기쁨과 희망이 담겨져서 날개를 달고 힘차게 날아가자는 뜻이 포함되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화재가 나도 경찰이 추정하는 피해액과 실제 피해자가 산정하는 금액이 다르듯이 통계는 다분히 주관적인 면도 있습니다. 5%의 고용주가 있고, 95%의 고용자가 있다는 통계도 있는가하면, 10명 중 7명이 노동자이며 노동권은 시민의 중요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헌법과 노동법의 적용을 받는 사람은 20퍼센트를 넘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 수치를 떠나서 아직도 너무도 많은 사람이 일터에서 불이익과 불안한 나날을 고된 일을 해나가면서 하루 하루를 견뎌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사용자의 주장이 노동 이야기인 양 둔갑하고, 정부의 의무 회피조차 정당화되는 등 노동 이야기는 쏙 빠진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에서 노동은 정말 수수께끼다."
저자는 노동 일선에서 자행되는 여러 악행과 불합리한 점을 강도높게 고발하면서 그 해결책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내어 놓습니다. "보편적인 노동권을 중요한 가치로 인정하지 않는 한 또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일자리가 무너지며 사람이 죽는다. 노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복지국가는 없다." 복지국가를 위한 연대활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노동조합이 조합원의 이익만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와 국민의 권리 신장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는 길을 터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산별 노조 결성 및 산별 협약을 가로막는 법 제도나 기업과 정부의 불법적인 조치를 없애야 복지 동맹을 형성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노동 3권 확립을 위한 노동법 개정, 사회 안전망 확대, 좋은 일자리 확대와 '일자리 최소 기준' 확립(최저임금제도 개선 및 근로감독 강화, 사회보험료 지원 등 영세 사업장 대책, 공공조달 정책 개혁 및 기타 법제도 개선), 일자리 차별 철폐와 비정규직 제한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필자의 마지막 말은 우리 모두의 숙제입니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노동을 해야 먹고사는 모든 사람이 그것에 얽매여 말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잃지 않도록, 노동에의 속박을 넘어서도록 만드는 핵심은 무엇일까? 노동권의 확립 그다음은 무엇일까?" 필자는 스스로 던진 이 질문에 아직도 확실한 대답을 못하겠다고 합니다. 다만 함께 고민하다 보면 그 대답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민을 담아 이 책을 쓴 것이라고 합니다. 노동권이라도 확립되어야 자유롭게 고민이라도 해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
|
당신의 노동은 안녕하십니까? 과연 언제까지 안녕할지 자신할 수 없을까. 당신은 노동자입니까? 라는 물음에 과연 답이 어떨지! 대부분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노동자이다. 기업의 CEO에서부터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까지 모두가 노동자이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은 육체노동이 곧 노동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것은 과거 사농공상의 전통에 의한 안 좋은 관습 중 하나일 것이다. 시대는 변했지만, 사람들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문화의 무서운 점이다. 설령 자신이 노동자가 아니라도 형제나 가족 친지나 친구 등이 노동자이기에 우리의 가까이에 있다. 그러나 빨간 사상교육을 많이 받은 우리들은 노동하면 왠지 모르게 멀리하여야 할 적대적인 단어로 여기고, 불법점거농성이나 과격한 파업현장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매스컴의 일방적인 시각에 따라 그들의 의견을 마치 우리의 의견인양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 노동은 **주의보다는 우리의 삶을 있게 하는 원동력이고 무엇보다 남의 일이 아닌 나 자신의 일인 것이다. 미래를 그리는 소설은 대부분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경우가 많다. 점점 늘어나는 기계와 로봇, 노동은 기계와 로봇에게 맡기고 인간은 여가는 즐기는 그런 행복한 시절은 오질 않는다. 노동의 종말은 인간의 폐기화로 진행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생산하지 않는 자들이 소비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닐까? 과거의 러다이크운동처럼 앞으로 올 미래에는 제 2의 러타이크운동으로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다가오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기 보다는 현실로 눈을 돌려 보아야 할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미래는 노동사회에서 지식, 정보화 사회로 발전해 나간다고 한다. 하지만, 실물이나 현물이나 인간이 없는 이런 지식, 정보화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주목해야 할 것이다. 현물의 생산 없이 서비스나 정보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적다. 현실적으로 공장 등의 생산이 더 중요 될 것 같다. 생산이 밑바탕이 되어야 정보나 서비스는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생산직이나 농민 등 생산계층이 사회의 밑바닥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저학력층의 일자리는 거의 사라지거나 3D업종이고, 대학을 졸업해도 할 일이 없어서 편의점에 아르바이트, 공무원 준비나 취업준비 등으로 젊음은 사라지고 더불어 희망도 사라지는 상황이다.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질까? 기존의 직장인들도, 언제 구조조정이라는 칼날에 잘릴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줄어드는 일자리, 늘어나는 비정규직. 내가 정규직이라서 비정규직에 대한 관심과 협력을 멈추는 집단이기주의는 하나만 아는 단편적인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비정규직이 있지는 않았다. 정규직을 비정규직화 하였기에 지금 당신의 자리도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그때 후회하면 아무 소용없다. 이전에 파업은 소수 과격한 육체노동자들이 하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전 업종에 걸쳐 마트의 아줌마계산원에서부터 청소노동자, 공장 노동자의 구별 없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노동자와 시민이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리한 요구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규모 등을 보면 세계에서 앞쪽에 자리하지만, 노동정책이나 문화 등은 아직도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문화가 이미 자리했기에 이런 고정관념을 깨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에 대기업들의 실상을 고발하는 책들이 사회에 큰 파장을 던졌지만, 아직도 변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개발주의로 우리나라가 발전한 것도 사실이고, 정부와 대기업중심으로 우리의 경제를 이끌어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변해야 할 때이다. 엄청난 이익들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그들이 개인기업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성장 배경에는 정부와 국민들의 지원 없이 오늘의 대기업에 있을 수 있겠는지 노동자와 경쟁력, 이 시대, 흔히 세계화된 이 시대의 화두 ‘경쟁력’, 기술이니 생산성, 경영혁신을 외치만, 일방적으로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경쟁력은 정말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노동자들, 종업원들, 사원들이 협조하지 않는 업무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불 보듯 환하다. 우리의 사회는 아직까지 경쟁력 담론이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휴식이나 여가 등이 결코 생산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시각의 변화가 필요하다. “노동권을 생존권의 테두리에만 가두는 것은 중대한 오류”이다. 노동권은 기본권이기에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인 것이다. 또 노동자를 “임금이나 급료 및 기타 다양한 형태의 소득을 얻는 대가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노동자가 맞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노동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노동권에 관심을 가지고 배워야 할 것이다. 사내하청이나 아웃소싱이니, 파견근무니 하는 단어들이 빈번히 등장하는 시대. 바야흐로 공장이나 일자리가 저임금국가로 이동하는 시대이기에, 사업자(기업가)들의 궁색한 변명이 마치 사실인양 알려지고 있지만, 그럼 소비는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가난한 나라들에서의 소비로만 가능할까? 근로빈곤이라는 새로운 수렁.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 무언가 잘못된 것 아닌지? 저임금-실직-근로빈곤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세상에 희망도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노동 없는 복지는 허구다. 복지국가는 복지정책과 노동정책(노동권 확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노동 없는 경제성장이나 노동 없는 민주주의는 완전하지 못한 것 같다. 정부도 공기업 민영화, 청년인턴제, 희망근로제 등 비정규직만을 늘리지 말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 산별노동조합, 노동조합의 활동범위 확대, 노동자들의 경영참여 등 무엇보다 노동법을 개정하여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쉽게 만들고, 노동조합을 신고제로 전환하고, 교섭권에서 창구 단일화를 폐기하여야 할 것이다. 정리해고, 사내하청, 아웃소싱 등의 규제를 강화하고,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삶의 질 개선, 사회서비스노동의 공공성 강화와 좋은 일자리 확대 등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민주화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 안전망을 확대해나가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인식부족, 무엇보다 노동에 관해서 배우지 못했기에 자라나면서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노동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준다. 평온한 생활을 이끌 돈의 획득과 자아실현의 장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노동을 통해서 사람과 세상을 만나고 배워나가는 인간교류의 장이다. 우리가 비교적 관심을 갖지 않는 노동이란 주제에 대해서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노동과 관련된 전반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정리해 준다. 또 많은 노동자들을 인터뷰 했기에 현장의 목소리가 더 와 닿는다. 전세계적으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불평등의 심화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노동은 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인류보편의 과제인지도 모르겠다. 소수 인간의 부에 대한 추악한 탐욕은 “더 많은 부의 창출이 지구 온난화와 환경 파괴, 대량 실업과 빈곤, 탈가족화와 묻지마 살인, 전쟁, 민주주의의 해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위험을 동시에 만들어 낸다.”, 인류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우리는 결코 1%를 위해 99%를 희생시키는 세상을 만들어 가서는 안될 것이다. * 옥의 티. p. 42, 8줄. 7,000만 명만-> 7,000명만 |
|
추천 [서평] 은수미 저 <날아라 노동 : 꼭꼭 숨겨진 나와 당신의 권리>를 읽고 / 2012. 10., 240쪽, 부키
|
|
직장에서 하루를 보낸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왔을 때조차도 내 자신이 노동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하는 일과는 달리 직접 육체를 움직여가며 무거운 무언가를 나르는 등의 행위만을 노동으로 여겨온 탓이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고용돼 임금을 받으며 일을 하는 사람은 넘치지만 노동자는 없다. 자연스레 자신의 노동에 대해 말하는 이들도 드물었다. 오로지 잘 사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던 시절에는 더더욱 노동을 논하기가 버거웠다. 일단 파이를 키운 후에 개개인의 삶의 질은 따져보자며 다양한 화두를 먼 미래로 미뤘다. 이에 반기를 들면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는 손가락질에 시달려야만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노동자로 정의하고, 노동에 대해 말하려는 이는 드물 수밖에 없었다. 그때와 지금은 여러 모로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노동에 관해서만큼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는 드물고, 모든 논의는 자본의 측면에서만 이루어진다. 시장이 중요하다는 합의가 지나치다 못해 인간 소외까지 낳고 있건만, 이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이가 없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고삐풀린 망아지가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듯 좀 더 친자본적인 환경을 구축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규제개혁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이보다 더 불안정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안정적인 일자리가 없다. 눈을 낮추라는 조언이 난무하지만 그로 인해 평생 비정규직으로 살아야만 하는 이의 인생을 책임지려 드는 자는 아무도 없다. 비정규직의 천국 네덜란드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네덜란드의 상황도 우리보다는 훨씬 낫다. 다니던 직장을 관두는 순간 정체성의 상실을 경험하는 우리 사회에서의 비정규직을 재취업을 위한 각종 교육 등이 풍부한 네덜란드의 상황과 단순 비교해서는 곤란하다. 주변에 그토록 비정규직이 넘침에도 이상한 건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파업이 발생할 때마다 언론은 앞다투어 노조의 이기적 행태를 부각시킨다. 생존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돈을 적게 버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귀족이라 칭하고도 남을 만큼의 임금을 받으면서도 파업을 한다는 것이다. 생존과 직결되어야만 한다는 논리 하에서 노동권은 급격한 축소를 경험한다. 그렇다고 정말 생활이 힘겨워 파업을 벌이는 이들을 향한 옹호의 목소리가 높은 것도 아니다. 이러한 언론에 세뇌를 당한 것인지,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고려하면 분명 노동자에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언론의 목소리를 되풀이한다. 살만 할 텐데 왜 파업을 해 불편을 야기하는지 모르겠다는 차가운 시선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노동자여서는 안 된다는 식의 사고를 하고야 만다. 너는 노동자일지 몰라도 나는 아니다. 이미 비정규직이고, 내일 당장 어찌 될지 모를 정도로 불안을 체감하고 있다 하여도 자신이 노동자인 것만은 순순히 인정할 수가 없다. 제 목소리를 내도 부족한 노동자가 자신이 노동자가 아니라고 말하니 사회로서는 고맙다. 적은 임금만을 제공하고, 쓰다가 아니다 싶으면 버려도 그만인 게 우리 사회에서의 노동자다. 뜻한 바가 있어 오랜 시간 동안 ‘노동’을 화두로 붙잡고 살았다는 저자다. 많은 이들이 보다 참신한 주제를 권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장을 누비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왜 노동사회에 여전히 봄이 오질 않는가를 고민했다.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했던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우리 사회는 지금에 이르렀다. 그 노동자들이 우리의 부모라는 점은 분명한데 왜 스스로를 노동자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현실과 인식의 불일치는 언제 즈음 극복을 할 수 있을지, 조금은 갑갑한 마음도 들었다. 자신이 노동자임을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낮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 노동이 고귀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
|
날아라 노동 ‘노동’, ‘노동자’ 란 말을 들으면 어떤가? 혹시 공장에서 일하는 소위 말하는 ‘공순이’, ‘공돌이’ ‘노가다’ 가 떠오르지 않는가? 아니면 거리를 점거한 붉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시위하는 사람들, 더 나아가 좌익, 좌빨, 종북, 빨갱이란 말이 떠오르지는 않는지? 그렇다. 나는 그랬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나도 노동, 노동자란 말에서 깊이 풍기는 최루탄 냄새를 맡곤 했다. 나는 한번도 나 자신을 ‘노동자’ 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고, 내가 하는 일을 ‘노동’ 이라고 생각해 본적도 없다. 노사쟁의, 노사분규, 불법파업 등 부정적인 이미지의 말들과 노동이라는 말을 한 묶음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은 예술, 즉 고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거만함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나는 소위 말하는 지방 3류대 일지언정 대졸자여서 고졸, 중졸과는 ‘급’ 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이며, 노동은 ‘학력이 낮은 사람들이 하는 육체적인 일’로만 생각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또한 나는 고백한다. 나는 내가 ‘비정규직’ 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예술은 원래 가난한 거니까, 뜨고 유명해지면 금방 부자가 되니까, 내가 하는 일은 ‘아주 가끔’ 일이 들어오긴 하지만 시간당 그 대가는 꽤 높은 편이니까. 음악 하는 사람인데,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일이기에 음악 이외의 일을 함으로써 돈을 벌어 생활해야 하는 것도 음악을 하려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더 슬픈 현실은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활동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각 분야 예술가들에게는 ‘게으르다’ 는 딱지를 붙인다는 것이다. 나부터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살길을 마련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저 내가 ‘많은 대중들이 원하는 음악’을 하지 않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거기다 대중들이 나를 원하지 않는 것은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선입견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10대 20대의 거의 대부분을 연습실에서 보낸 나 자신에게, 몇 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내 청춘을 바친 음악에, 나를 싼값에 섭외하려는 기획자들에게, 나를 알아주지 않는 이 세상에게 마침내 막연한 분노까지 가지게 된 것은 몇 년간 나를 우울증이라는 고통 속에 나 자신을 던져 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시 노동으로 돌아와 보자. 그럼 왜 나는 ‘노동’ 이라는 말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느끼게 되었을까. 그것은 노동이라는 말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다. 고대부터 노동은 노예의 노동이나 농노의 노동을 의미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나 육체 노동을 하는 자가 하는 일은 ‘노동’ 이고, 장인이나 수공업자가 하는 일은 ‘작업’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한다. (p88)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었나?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노동은 종이나 소작인들의 것이었을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또한 노동력을 사고 판다는 것은 그 노동력을 가진 ‘인격’까지 사고 파는 것이었을 테니. 결국 그 먼 옛날의 구분이 아직도 우리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현대에서 ‘노동’은 어떠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가? 노동자의 지위는 법으로 엄격하게 정해져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발달과도 무관하지 않다. 노예주나 가부장이 아닌 근대적 사용자가 등장하게 된 것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노동을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노동으로 -즉 옷을 짓든, 차를 만들든- 불리게 되고, 노동이 생산, 이윤, 부의 원천이라는 ‘노동가치론’이 등장하게 되면서 노동은 시민권을 갖게 된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의 노동력과 인격을 구분하게 되고,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노동자는 소비자로도 재 탄생해야 했기에, 인격과 노동력을 구분하여 보호하여야 했고, 국가적 수준에서 법제도적 정비가 이루어 졌던 것이다. (p93) 또한 시민들의 의식변화는 노동권 확립, 민주주의, 권리 투쟁의 역사를 만들어 왔고, 그렇게 노동은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 행동권의 노동3권을 갖게 되었다. (p65) 그러면 나는 노동자인가? 이 책에 따르면 ‘임금이나 급료 및 기타 다양한 형태의 소득을 얻는 대가로 일하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다(p72) 즉 사용자, 혹은 자본가가 아닌 대부분의 일하는 사람은 모두 노동자다. 예술가도 노동자다. 나는 노동자이며 동시에 소비자이면서, 투자자이며, 여성이며 시민이다. 왜 나는 이 사실을 몰랐을까? 불행히도 우리는 입시위주의 교육 속에 기본적인 노동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취업을 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노동과 노동자의 권리를 어떻게 쟁취해 왔는지, 우리의 권리는 무엇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기에, 사용자는 이용하고 노동자는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노동3권이 잘 지켜지는 사회에 살고 있을까? 불행히도 전혀 아니다. 우리는 현재 대통령까지 나서서 이 권리를 부정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위해 정당한 방식으로 파업을 해도 그들이 통념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다들 욕한다. 그렇게 파업을 결의한 노동자들에게 민간 군사업체 용역들을 동원해 상해를 입혀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법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법을 집행할 ‘의지’의 문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는 모두 노동자의 입장이 아닌 ‘사용자’의 입장으로 노동을 대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기도 하다. 노동부를 고용노동부로 이름을 바꾸고 고용부로 불러달라고 하는 정부부처의 행태만을 봐도 알 수 있다.(p52) 노동과 노동자의 관련된 일은 모두 ‘고용’의 입장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경기가 침체되면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에서는 정규직을 마음대로 해고하고 반대로 비정규직을 뽑는데 이도 직접고용이 아닌 용역이나 파견의 형태를 띄고 있을 때, 사용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노동의 안정성은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지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 노동자가 책임을 호소 할 대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비정규직과 취업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 기업들과 정부는 젊은 이들에게 눈을 낮추면 할 일이 많다고 하지만 이 또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같은 일을 해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보수 차이가 배가 난다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보수가 배이상 차이가 난다면 그래도 그들에게 취업을 강요할 수가 있는가? 그나마 그 일밖에 할 수 없어서 선택했다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므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걸까? 이는 오로지 사용자의 입장에서만 하는 말이 아닌가? 정부가 나서서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정규직 사원이 많아지면 지출이 늘어나니 경영이 어려워 진다는 말은 우리는 너무나 쉽게 믿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러면 나는 왜 가난한가? 열심히 일하는데도? 왜 대학을 졸업하면 빚쟁이가 되는가? 누구는 말한다.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고.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저자는 그 문제 원인을 ‘구조’ 와 ‘체제’에서 찾는다.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노동자로 취업해도 사회 안전망이 갖추어져 있으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p192), 보편적 복지를 확대하여 시민이면 시민답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직접고용이든 간접고용이든 모든 노동자에게 노동3권을 부여하는 법개정이 시급하며, 작은 기업이든 큰 기업이든 동일지역이나 업종에 종사할 경우 하나의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한다.(p186)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미처 몰랐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많은 것들에 대해 알 수 있었다.물론 이 책은 문제점만 지적하고 끝나지는 않는다. 책의 후반에 이 많은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저자의 해결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노동법 개정 방안, 사회 안정망 확대, 좋은 일자리 확대와 일자리 최소기준 확립, 일자리 차별 철폐와 비정규지 제한등의 제안은 참으로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노동을 터부시 하지 않는다. 아직도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로써 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겠고, 나의 가난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찾지 못했지만, 또한 내 작품활동 외에 다른 일을 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이 현실을 벗어 날 수 있는 방법 또한 찾지 못했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시민의 각성만이 이 현실을 바꿀 수가 있다는 것이다. 노동은 우리의 권리이고 노동은 행복추구권이다. 나는 꿈꾼다. 예술 또한 노동이며, 예술 또한 사회 제반 시스템처럼 사회 구성원들이 누리는 권리이다. 권리를 행사하게 해주는 예술가들도 보편적 복지의 사회 안전 망의 보호를 받게 된다면 그 혜택은 시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며, 시민들은 그로 인해 더 나은 삶을 살 수가 있을 것이다.
|
|
지난 4.11 총선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명단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은수미씨였다. 노동운동으로 오랜 옥고를 지냈고, 출소하여 뛰어난 노동연구원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그가 민주통합당 비례 대표가 되었으니, 일각에서는 변절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은수미에 선택에 대해서 비판할 뿐이지, 그 누구도 은수미 개인에게는 화살을 쏘지 않았다. 은수미의 과거와 현재는 항상 치열하게 노동을 향해있기 때문이다.
노동은 삶의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노동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 모텔에서 일하는 류승호(36)씨는 자신을 노동자로 생각하느냐는 질문 앞에서 망설인다. "노동자인 것 같은데 사회보험이나 노동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75쪽)" 전체 노동자의 460만명이 사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한편으로 비정규직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11년 기준으로 통계청이 발표한 비정규직은 모두 599만 5000명. 전체 노동자의 34.2%다. 좀 더 광의의 기준을 적용하는 노동계 추산 비정규직 수는 무려 895만 3000명으로 전체 노동자의 절반인 49.4%에 달한다.
은수미씨는 이제 은수미 의원이되어, 정책입안자가 되었다. 은수미 의원 때문에 고용노동부에서는 은수미 TF가 꾸려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향력은 지대하다.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가장 고된 상임위라는 환경 노동위에 자리를 텄다. 쌍용차와 재능교육 노동자에게 다가갔다. 이제는 은수미는 노동가도, 연구원도, 아니다. 우리나라에 299명밖에 없는 정책입안자다. 보통 정치인의 책들이 자신의 일대기와 홍보에 치중하는 가운데, <날아라 노동은>의 눈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해있다. 그녀의 눈빛을 통해서, 낮은 곳에 있는 노동이 훨훨 날아오를 그날이 하루빨리 다가왔으면 한다. |
|
예전에 <닫힌 교문을 열며>라는 16미리 영화를 보면 영어 선생이 아이들에게 L자로 시작되는 아름다운 단어 3가지를 묻는다. 아이들이 Love, Liberty까지는 잘 찾지만 나머지 하나를 찾는 게 무척 힘들다. 그때 그 선생님이 바로 노동 Labor이라고 일러준다. 선생님은 노동이 세상을 만들고 그를 통해 인간이 더욱 인간다워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당연 아이들은 놀라게 된다. 20년 전 영화지만 지금도 노동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싶다. 노동을 이처럼 긍정적으로 보는 관점은 유럽에서는 제도교육에서 보편적으로 교육시키는 내용이라는데. 은수미 의원은 이 책을 통해 그런 노동에 대한 인식을 비롯해 위기에 빠진 한국의 노동현안을 아주 쉽게 이해시켜준다. 그녀가 최근 쌍용차 문제, 민간 군사기업 컨택터스, 노조파괴 창조 컨설팅 등 수많은 노동문제에 맞서 분투하고 있는데, 그렇게 바쁜 와중에서도 이렇게 책을 내놓았다는 것이 놀랍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자니 답답하기도 했다. 대부분 노동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왜 노동을 이렇게 이해하지 못했나 싶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특히 일자라 문제로 힘겨워하는 청년들이 많이 읽어봐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그 고난의 실체를 냉정하게 봐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힘들다고 말랑말랑하게 마음을 다스리면 다 잘된다는 생각은 독과 같다. 너무 두터운 벽이라도 켜켜이 벗겨내기 시작해야 한다. 이 책이 그러한 역할을 해주리라 믿는다. |
|
저자인 은수미 의원은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노동전문가입니다. 현재 국회에서 굉장히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의원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죠. 간단한 소개는 아래의 그림으로 대신합니다.
노동권은 헌법상의 자유권이고 사회권이라는 점에서 생존권을 넘어선다. 절대로 침해해선 안 되는 게 자유권이고, 정부가 존중하고 보호해 줘야 하는 것이 사회권이며, 노동권은 그 두 영역에 걸쳐 있는 권리다. 노동은 고용까지 포괄하는 훨씬 더 넓은 개념이다. 노동에서 중요한 것은 고용된 사람만이 아니라 일하는 모든 사람, 즉 노동자, 자영업자, 사용자 등이다. 노동은 고용과 달리 노동권에 기반한 관계, 즉 사용자나 기업의 주도권이 아니라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대등한 관계를 뜻하고 이를 위한 사회적, 국가적 책임을 강조한다. 노동조합이 '강성'이라는 것과 '강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노동조합이 약하기 때문에 저항이 강하다는 것이 오히려 적절한 표현이다. 노동조합이 강하면 파업이 오히려 적은데, 약하다 보니 극단적 투쟁이라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동의 문제를 풀어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데, 저자는 역시 노동전문가답게 노동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써내려갑니다. 여러 자료를 인용하는 것은 물론, 실제로 저자가 만난 사람들에 관한 사연을 덧붙여 현실과의 접점을 찾습니다. 글이 시대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고, 말랑말랑하게 읽히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일 겁니다. 물론 그 사연들은 결코 즐거운 이야기가 아닙니다만.. 눈여겨 봤던 부분은 work puzzle 2 노동 인권을 죽이는 말, 말, 말 work puzzle 3 나는 노동자, 너는 시민? work puzzle 4 우리는 대부분 노동자다 이었는데요. 역시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언어', 특히 '특정 어휘'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사용자 중심의 말들로 재구성되고 있는 노동 현실, 특히 '유연성'이라는 말이 IMF 체제 이후 들어서면서 지금은 일상화되어 있죠? 또, MB 정부 들어서(정확히는 2010년 7월 5일) '노동부'가 '고용노동부'로 바뀐 것도 심각히 생각해봐야 할 부분입니다. 주체가 '노동자'가 아니라 '고용자'로 바뀌어 버린 것이죠. 뭐, 애초부터 노동부가 노동자의 편에 선 적이 드물지만요. 마지막으로 책의 내용 중에서 가장 와닿았던 내용을 인용하는 것으로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노동자이고 근로 빈곤 · 비정규직 · 저임금 노동 · 양극화가 세계를 휩쓰는 것이 현실이지만 종종 노동문제는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 낡은 질문이고, 노동자의 파업은 알타미라 동굴 벽화처럼 오래된 유물로 취급된다. |
|
나는 내가 노동자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평소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가 생산직 노동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자에 대한 안 좋은 기사나 부정적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고는 했다. 한 번은 노조 파업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와 안 좋은 사람들의 댓글을 보고 펑펑 울었던 적도 있다. 우리 아버지가 너무 안쓰럽고 불쌍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 아버지의 삶이 매도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못마땅해서. 그렇지만 이 책을 읽어본 결과 나도 노동권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노동3권과 고용보험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노동조합은 누구를 대표하며 어떤 것을 주장할 수 있는지, 사용자는 노조를 어떤 식으로 파괴하는지, 그것이 2012년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음을. 그리고 비정규직과 노동자라는 이름이 주는 선입견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음을 시인하게 되었다. 특히 노동자의 노동 능력과 인격을 서로 분리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에는 신선한 문화 충격에 가까웠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평소 직장생활에서는 전혀 실천하지 못했다. '나의 사용자의 나의 24시간 중에 8시간만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 그 이외의 시간은 나에게 온전한 권리가 있다는 것.' 분명히 나의 근로 조건에 문서화되어있는 내용이지만 나의 머리 속에 입력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비록 이 책으로 인해 현실이 크게 바뀌지 않더라도 나에게 노동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나의, 그리고 너의 노동권이 충분히 보장받아야 우리네 삶이 좀 더 나은 질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노동권을 충분히 보장해 준 후에야 노동자에게 그 직업에 충실하고 헌신적인 삶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 99퍼센트의 나라를 만드는 데에는 나의 지식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노동자에 관련된 댓글에 악플을 다는 사람들, 친구들과 모여 노동자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자신이 노동자인지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