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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이어집니다. ☞바로가기 : 1권 리뷰
"인간은 늘 그렇습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이 누구에게 어떻게 얼마나 큰 피해를 줄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신념이 옳으므로 자기 행동도 당연히 정의로울 거라고 믿고 삽니다." - 2권 38쪽
샤갈의 <미국의 창>(America Windows, 1977), 시카고 미술관
"수가 깨어나면서 눈꺼풀 사이로 느낀 것은 푸른빛이었다. 온화한 색조의 푸른색이었고 엷고 짙은 두 개의 명암이 하나의 가는 선을 중심으로 갈라져 있었다. 마치 하늘과 바다의 경계 같았다."
사람들은 '매트릭스'처럼 고도로 발달한 기술로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에서 진짜 실제인 것으로 믿고 살아간다. 누군가 세상의 진실을 깨닫고, 사람들을 설득하여 적과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건은) 이제껏 살아오며 진실이라고 믿었던 온갖 확신에 자신이 없어졌다. 가치관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다 그랬다. 뭐가 옳고 그른지 점점 더 알 수 없어졌고 영웅과 악당의 경계가 무너졌고 단지 상황만이 모호하게 남았는데 그 상황을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이 점차 무뎌졌다. 급기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테두리까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어 꿈을 꾸는 수가 등장한다. 고등학교 수학교사인 수는 자각몽을 꾼다. 자각몽. 꿈인 것을 자각한 채로 그 공간에 남아 그곳에서의 현실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의 세계를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 1권 125쪽
삶과 진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철학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주제였다. 나는 작품을 읽으며 장자의 ‘나비의 꿈’ 같은 선문답이 내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문득 나도 진짜 인생을 살고 싶어진다. 나의 목소리를 내고, 나의 정치를 하고 싶은, 그런 마음 말이다.
“그래서 잘 모르면 함부로 행동하질 말아야 하는 거야. 네가 아는 정의가 실은 정의가 아닐 수도 있거든.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 삼간을 태운다는 말이 괜히 있겠니? 경솔한 인간은 바로 눈앞에 보이는알량한 정의를 구현한답시고, 그 뒤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홀랑 다 태워버리지.” - 2권 132~133쪽
무사의 위 말은 곧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행하는 우리 사회의 모든 악과 폭력에 대해 작가가 보내는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모조 사회를 지탱하는 AI 퀸이 아수라 남작처럼 남자와 여성의 목소리를 반반 갖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우리 세계의 거의 모든 일상에 선과 악의 대결이 스며 있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허구임을 알지만 이야기에 깊이 빠져든다. 자각몽과 비슷한 읽기[자각독]가 아닐까? 결론이라면 "이분법적으로 사고"에서 벗어나기...
*『모조 사회』 리뷰 대회 2등상 수상. ☞바로가기 : 수상자 발표(2019.12.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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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조 사회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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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의심하는 마음. 이게 바로 포인트예요. 모듈에서는 인간이 끊임없이 자기를 의심해야만 컨트롤러가 돌발적인 오류를 일으켜도 모두 인간의 부정확성으로 덮어씌울 수가 있거든요. 물론 사람 스스로 오류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실은 컨트롤러에서 일으킨 오류가 훨씬 많습니다. 그걸 사람에게 고스란히 뒤집어씌우죠. 인간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은 오류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선천적으로 굉장히 놀라운 자각 능력과 통찰력을 가지고 태어나거든요. 그런데 모듈에선 그 능력들을 모두 지워버리죠.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건 그러니까 사실이 아니라 모듈에서 주입하는 하나의 프로파간다 같은 겁니다.”
도선우의 모조사회 1,2권을 나란히 놓으면 한 사람의 얼굴이 완성된다. 여성의 모습이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수의 얼굴이 아닐까 싶다. 어쩌면 외모만 그녀 일지도 모른다. 미래 사회에 대한 상상, 가능한 모든 것들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달리 과학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으니까. 지금 어딘가에서 나는 모르는 세상의 삶이 존재한다 해도 알 수 없다. 처음에는 투르먼 쇼가 생각나기도 했다. 나의 빈약한 상상력이 그랬다. 그러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는 진정 어떤 세상일까 생각했다. 영생을 얻는다면 과연 행복할까. 잘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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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선택, 사랑, 배신, 독선, 불완전한 정의 등 모조사회 2권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의 본질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는 것이다. 허울 좋은 명분으로 대재난(바이러스, 지진 등)도 인간이 만든 것이다. 자유의지도 선택도 사랑도 배신도, 독선, 불완전한 정의도 이 자신의 욕심이나 이익을 싸서 화려하게 포장하고 있는 당의정 같은 명분일 뿐이다.
충격적인 반전과 결말이었다. 기독교에서 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는 것과 같은 결말이다. 예수의 제자였던 가롯 유다가 자신의 욕심과 의지와 선택으로 배신을 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이 진행된 것을 보는 것 같은 이야기였다(재미를 떨어뜨릴 것 같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겠습니다).
인공지능(퀸)이 인간이 교육을 통한 세뇌보다 칩으로 유도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을 더 효율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말에 혹할 정도였다. 이런 비참하고 추악한(?) 인간의 본질을 인공지능이 폭로한다. 무엇이 진짜 인간의 모습 또는 존재의 방식이고, 인공지능의 존재의 방식은 어떠해야 할지 두려운 가운데 계속 곱씹게 된다.
진짜 인간의 본질을 사람은 보고 싶을까? 보는 것이 더 비참해지지 않을까?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그 아픔을 억압하고 직면하지 않는 것처럼, 진실을 마주하게 될 때 건이나 탄, 식민사회의 사람들이 무너질까 걱정했던 공동체 사람들처럼 성악설에 가깝게 그려지고 있는 인간의 본질을 아니라고 외면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