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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곧 여행이다. 어떤 삶이 이어질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여행을 떠나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계획을 세워왔지만 갑자기 생긴 사정에 따라 일정이 달라진다.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은행나무 숲길이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부근의 장소까지 찾아 떠났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은행잎들이 다 떨어져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있는 경우, 주변의 두번째 장소 또한 마찬가지일거라는 생각에 무거운 발걸음을 향하지만 역시 같은 느낌에 갑자기 일정을 취소하고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할때처럼. 삶 또한 이처럼 예기치 않은 일들 투성이다.
매일을 여행자처럼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아니하고 떠도는 삶.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 방랑자라 부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떠돌며 살고 있고, 어떤 이들은 그런 삶을 꿈꾼다. 100여 편의 짧은 이야기가 수록된 『방랑자』는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하다. 때로는 작가의 목소리로 때로는 타인들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점점 달아오르는 군중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정말 놀랍도록 즐거운 일이었다. (37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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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어느 경계선. 떠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어떤 여자의 삶처럼. 우리는 일종의 방랑자다. 소설의 아누슈카는 장애인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시어머니가 찾아와 자유 시간을 주지만, 그녀는 어딘가로 가서 마음껏 소리내어 울고 싶다. 거리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을 소리내어 말하는 여인을 바라보다 그녀는 탔던 열차를 내리고 다시 타기를 반복한다. 자기 아파트 앞에서 서성거렸다가 그 여자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가 느꼈을 고통, 아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거리를 떠도는 여자가 되어 있는 그녀. 그 또한 하나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쿠니츠키는 가족과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 아내가 아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조그만 섬에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애태우는 한 남자의 모습이다. 사라진 순간을 되새기지만 정확히 기억나는 건 없다. 어떻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가. 길을 헛갈렸을거라며 애써 마음을 다잡지만 쿠니츠키는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각자의 이야기이면서 또한 다음 이야기를 나타낸다. 하나의 장소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다른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별함을 만날 수 있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에게 보내는 어느 딸의 편지는 의미심장하다. 신하가 죽자 황제는 미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영혼이 숨쉬게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달라는 딸의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흑인이 아닌 백인이었어도 자신의 신하를 박제해 전시했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인간의 진정한 권력은 인간의 육신에 있는지, 영혼을 다스릴 수 있도록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말이었다. 몇 번의 간청을 거쳐 이제는 당당히 요구하겠다라고 말하는 딸에게서 삶의 방향을 배우기도 한다.
죽은 아이나,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의 시신을 사려는 샬로타는 해부학자의 딸이다. 알코올 속을 헤엄쳐 다니는 아름답고 창백한 표본들이 그녀에게는 자식이나 다름없다. 그런 그녀도 항구쪽을 걷다가 남자용 누더기를 걸치고 동인도 회사의 선원이 되는 상상을 한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겼음에도 떠나고 싶은 게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던 듯 하다. 아마도 여행의 경험과 취향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죽은 인간의 표본을 말하는 부분이 많았다. 신체의 한 부분을 표본으로 남기거나 해부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는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인간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까지 향하는 움직임 속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상태의 인간을 놓고 설득력이 부족한 설명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나'라는 존재를 이해함에 있어 관계성을 배제하는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듭니다. (11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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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여행자의 시간은 수없이 많은 시간이 하나로 모인 결합체다. 그것은 혼돈의 대양속에서 정리된 시간, 섬과 군도의 시간이다. 기차역의 시계가 만들어 내는 시간, 가는 곳마다 달라지는, 그때그때 약속된 시간이자 자오선의 시간이기에 그 시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시간이 사라져 버리고, 먼동이 트기가 무섭게 오후와 저녁의 발소리가 계단에서 들려온다. 그저 잠시 머무는 대도시에서의 빡빡한 시간은 하룻저녁을 송두리째 바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83페이지)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일상의 시간을 잊기 위해, 새로운 삶의 방향을 바라보기 위해. 현재의 것들을 잊고 낯선 장소에서 미래를 꿈꾼다.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떠나든, 옷가지와 다른 것들을 가득 담아 떠나든 우리는 언제나 시간을 달린다.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이 공간도 방랑하는 여행자의 한 공간임을 잊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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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많이 써본 사람이 쏟아낼 수 있는 문체였다. 편안하게 마치 눈으로 실제 풍광을 그저 무던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런 문체다. 수식어가 많고 화려하고 맵고 짜고 달다구리한 정리되지 못한 수도 없이 많은 글들과 각종 영상물이 쏟아지는 요즘, 2020년을 며칠 앞둔 2019년도 기준에서 볼때, 방랑자들 책 속에서 만나게 되는 문체는 허세가 없고 담백하다. 그래서 국제선 여객기를 타기 전, 대기시간을 멋드러지게 시간 보낼 수 있다. 아이를 픽업하고 다시 픽업하는 엄마들이 자가용 차 조수석에 놔두고 수시로 읽어도 좋고, 독박육아로 몸과 마음이 지치거나 혹은 산후우울증으로 자살충동까지 겪은 여성들이 자신의 심신을 치료하고자 책을 찾고 있다면, 흔하디 흔한 육아서적이 아닌 201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올라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을 조심스레 권해본다. 내공이 깃든 삶이 묻어있으니, 우리도 이 책 읽고 다시 일어서자. '나' 자신으로 다시 살아가기 위해 책을 읽으며 내공을 기르자. 나는 나일뿐, 그 누구도 내 인생 살아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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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생은 이동으로 채워진다. 존재하는 순간 움직이기 시작하여 끊임없이 이동한다. 공간을 이동하고 새로운 시간과 마주하며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나아간다. 삶은 그렇게 확장된다. 지나온 삶을 궤적을 우리는 ‘여행’이라 부르기도 한다. 떠나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이곳이 아닌 그곳, 그리고 경계에서 두 곳을 바라보는 일은 아닐까. 곳곳에서 경험하고 마주하는 삶의 조각들이 바로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에 담겨있다.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라는 목적이 여행의 시작이지만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일들은 누군가의 보통의 일상이다. 공항의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리는 일, 호텔에서 퇴실하면서 키를 반납하지 않는 일, 동행했던 이와 잠시 이별하는 일, 처음 본 이를 만나 한 공간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 안내사의 설명을 들으며 이곳저곳의 공간을 둘러보는 일.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상의 단면을 하나하나 만나는 일이었다. 소설 속 화자인 ‘나’의 여정을 함께 하는 일은 그들을 만나는 일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타인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삶을 공유한다. 단순히 ‘나’의 여행기라 여기면 안 된다. 소설을 통해 만나는 방대한 세상은 수많은 에피소드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공항, 유적지, 호텔, 유람선, 섬, 도시, 저마다 공간이 간직한 시간의 힘이 전해진다. 떠나지 않았다면 발견할 수 없는 생생한 삶의 현장. 그러니 방랑의 순환은 계속되어야 한다.
‘한 귀퉁이에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이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 그것들이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280쪽)
일시적이고 소모적인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세상이라는 유기체를 볼 수 있다는 기쁨, 방랑의 특권일 것이다. 이곳이 아닌 그곳으로 이동했을 때 볼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꿈꾼다. 그곳에 도착해야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계.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글쓰기가 바로 이 소설이다. 자동차, 비행기, 배, 이동하는 수단에 따라 풍경은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시선의 주체가 멈춰있다면 그저 풍경은 단면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진짜 풍경을 원한다면 떠나야 한다. ‘멈추는 자는 화석이 될 거야.’ (391쪽) ‘움직여, 계속 가, 떠나는 자에게 축복이 있으리니.’ (392쪽) 이동을 위한 멈춤만이 의미가 있을 뿐. 삶이 이동하지 않고 멈춘다는 건 인간의 심장이 멈춘다는 것과 같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추구하는 ‘방랑’(여행)이란 움직임을 통해서 체득할 수 있는 타인의 삶인지도 모른다. 이동해야만 볼 수 있는 풍경과 이야기들 말이다. 그건 물리적인 이동에 한정된 게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저 깊은 곳의 욕망을 꺼내 마주하고 움직임의 마지막인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소설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간의 몸과 장기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또 하나 방랑의 세계를 구축한다. 심장이 원활하게 움직이는 것, 가장 확실한 움직임이며 여행이라는 놀라운 사실. 그러므로 방랑자에겐 자유로운 사고의 전환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때문에 이 책 자체가 소설이라는 경계를 넘어 활발하게 이동하는 ‘방랑자’인 셈이다.
움직이는 건 사유하는 일이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을 읽는 일도 그러하다. 『방랑자들』을 읽기 전 내가 몰랐던 세상(지식, 정보, 기록)과 마주하게 되었으니까. 한 곳에 고여있어 멈췄던 마음이 이동하는 순간이다. 능동적으로 나를 이끄는 힘, 그게 바로 이 책의 가치다. 아무 곳이나 펼쳐 읽어도 상관없다. 유연한 사고로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떠날 채비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한 권의 책으로 모든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으니 얼마나 굉장한가. 이제 진짜 방랑자가 될 시간이 임박해왔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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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크기, 서로 다른 색상의 접착메모지 10종류에 길고 짧은 이야기들이 다른 글자체로 적혀 있는 100개가 넘는 이야기가 당신 눈앞에 펼쳐져 있다면? 이 책이 딱 그렇다.
"한 번이라도 소설 쓰기를 시도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안다. 그건 아마도 스스로에게 부과할 수 있는 가장 고약한 업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홀로 두고, 좁은 1인용 방에 가두고, 완전한 고독 속에 빠져 들어야만 하니까(p.27)." \ "마치 유령처럼 돌아다니면서 어깨너머로 사람들을 살피고 그들의 언쟁을 엿듣고, 그들이 배낭에 머리를 대고 자는 모습을 마음껏 관찰하고, 그들이 내 존재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입술을 움직여 단어를 모아 자신을 향해 혼잣말을 하면 나는 곧바로 그들의 이야기를 소리 내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p.36)." 자기고백적인 것 같은 이런 시작은 이 책이 어떤 이야기들일지 미리 알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글의 시각적 효과를 살려주는 지도나 그림이 몇 개 등장하는 것은 한 편의 글에 동참해서 무엇인가 관찰하고 판단하게 한다. 긴 수색에도 사라진 아내와 아이를 쿠니츠키는 발견할 수 없는가, 그리고 그들의 삶은 이후에 어떻게 진행되는가에 대해. 동시에 이 책은 심리학과 해부학의 어느 지점에서 독자를 관찰자로 세워놓는다. 특히, 쇼팽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예처럼 역사의 한 장면을 포착한 상태에서. 쇼팽의 누이가 쇼팽의 무덤과 쇼팽의 심장 사이에서 겪었을 초조는 그 시대 분위기, 모국이 폴란드여서 분노하면서도 한계에 부딪혔을 쇼팽의 모습을 단 몇 장으로 설명했다.
노벨상 수상작가, 그것도 폴란드의 여성작가가 하는 이야기에는 역사적으로 국가의 존재가 수시로 바뀌어야 했던, 그래서 개인이 어떤 것도 할 수 없던 모습부터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에서 개인이 펼칠 수 있는 상상 혹은 가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말한다. 그래서, 주인공이 어떻게 된 결말이 아니라, 관찰자였던 독자가 무엇인가 생각하고 행동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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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주의해 주세요.) 엄밀히 말하면2018년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 입니다. 민음사가 노벨 문학상 작가들 작품을 거의 선독점하다시피 해서 요즘 하는 말들이 있지요. 노벨상 주식 샀다고. 그만큼 요근래 민음사의 출간 감이 엄청 좋아졌어요. 개인적으로는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책은 진짜 표지가 다했어요. 띠지는 워낙 급하게 만든 티가 나서 무시하고요. 제가 노벨 문학상 발표난 후에 <방랑자들> 예약판매 창을 들어가 봤거든요. 표지를 보는 순간 안 살 수가 없었습니다. 여행 그리고 떠남과 관련된 100여 편이 넘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어요. 어떤 이유로든 지금 당장 떠날 수 없다면 책으로의 도피도 괜찮을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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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온라인 서점가에 이벤트로 걸린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명단을 생각해 보면, 얼마나 우리나라의 독자나 서점가가 독서의 폭과 안목이 좁은지 싶더군요. 페터 한트케를 이벤트 후보로 올린 서점들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게다가 올해의 수상자가 아닌 '2018년도'의 수상자를 예상해보라는 곳 역시 단 한 곳도 없었던 것 같군요. 한 해 건너 뛰고 말았던 수상자는 안중에 없었던 것일까요. '올가 토카르축. 2018 노벨 문학상 수상', 이라는 발표라는 소식에 아, 성추문 사건과 수상자 발표 보류, 하며 작년 이맘때를 떠올렸습니다. 늘 스마트 기기들을 손에 쥐고 24시간 접속되어 있는지라 최신 정보에 아주 밝고 유식한 듯 살아가고 있는 요즘 사람들이지만, 그런 저 역시도 불과 1년 전 들썩였던 이런 사건들도 까마득히 잊고 삽니다. <방랑자들>이라 이름 붙은 이 책 속에는 딱 우리 같은 이들이 휙휙 지나치며 사느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여 흘려버리는, 시선 뒤의 사람들이 연거푸 등장합니다. 그들은 끝도 없이 책속에 등장합니다. 시선 밖의 사람들. 그리고 여지없이 그 가운데 하나일 우리 자신들. 좀더 사소한 것들을 알아보는 눈을 가질 수 있게, 그리하여 작고 여린 것들을 알아보고 밝게 인사하는 사람이 되자, 하는 생각을 이 책을 읽어가며 지금 하고 있답니다. 삶에 있어서 '방랑'이 죄처럼 느껴지지 않는 시대를 한번쯤 살아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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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노벨문학상 작품이다. 일단 분량이 길다. 긴 분량에 이야기들이 이어져 있지 않다. 아니, 이어져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속은 이어져 있다, 이어져 있다고 한다. 읽는 사람의 적극적인 태도에 따라 이어져 있는 고리를 찾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어 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서사가 두드러지지 않은 소설들이 요즘 자꾸 잡힌다. 소설 구성의 3요소라고 하는 인물-사건-배경이나 소설 구성의 5단계라고 하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같은 용어들에 맞춰 읽기에 적절하지 않다. 이 과정에 익숙한 소설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어렵다거나 낯설다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반대로 이 책의 서술 형태에 재미를 느끼는 독자라면 본인의 소설 영역을 한층 넓힌 것이 될 것 같다. 나는 아직 실험 중이다. 이런 형식, 이렇게 흩어져 있는 조각들로 보이는 이야기들, 내 읽기 목록에 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책의 가장 큰 주제는 '여행과 방랑'이라고 생각한다. 사건 중심의 에피소드들보다 사색을 따라가는 글이 더 돋보이다 보니 소설보다 에세이처럼 여기는 독자들이 많은 것 같다. 소설 속 인물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대사가 아닌, 작가가 1인칭 화자로 직접 털어 놓는 말들에 밑줄을 긋고 이를 옮겨 놓은 내용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 어떤 독자는 여행을 통해 살펴보는 철학 혹은 심리학 에세이 같다고도 한다. 작가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소설로 여겨졌을 것이다. 사람의 삶, 이 자체를 소설의 재료로 삼은 것일 테니.
다른 이들에게는 뭐라고 못하겠고, 나는 나에게 이 책을 적어도 한번 더 읽으라고 권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못 보겠다면 마음대로 펼친 부분이라도. 그게 방랑의 한 형태일 테니. 그순간 내가 곧 방랑자일 테니.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은, 어제를 살았으나 오늘은 달라진, 온통 흩어져 있어서 갈무리할 수 없는 내 생에 절망하지 않는, 살아서 움직이고 떠돌 수 있는 것만으로 고마운, 내 앞의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과 모든 사랑과 모든 책들에 기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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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는 인생을 여행이라고 표현한다. 이 책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여행자, 순례자, 방랑자라고 표현하고 그 시각에서 주위를 둘러본다. 어디론가 떠나 새로운 경험을 하고 나를 버리고, 나를 채우는 그 시간과 여정을 여행,순례,방랑..등으로 이야기하는데 뭐라고 구체적으로 그 다름을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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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나에 대한 시험인가? 올해의 마지막 난관인가? 갖가지 생각들이 나를 스치운다... 내용은 난해하고 이야기는 길이 있었는지조차 의문이 들만큼 방랑을 거듭한다. 나에게 이 길이 맞는걸까 자문하며 읽었다 * 나는 기차와 호텔, 대기실에서, 그리고 비행기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글 쓰는 법을 익혔다. 밥을 먹다 식탁 밑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뭔가를 끄적이기도 한다. 박물관의 계단에서, 카페에서, 길가에 잠시 정차해놓은 자동차 안에서 글을 쓴다. 종이쪽지에, 수첩에, 엽서에, 손바닥에, 냅킨에, 책의 한 귀퉁이에 쓴다. * 책에 왜 낙서를 해.. 몬스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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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 죽는 날까지 모든 순간은 다르다. 우리는 특별한 행복이 오거나 불행이 빗겨갔다고 생각하면 지금을 감사히 생각하면서도 대부분 일상에 매여 있다고 감옥 같다고 여기며 매일을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재미, 몰두할 대상이나 취미를 찾으며 삶의 중압감과 권태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길 원한다. 삶이 이미 여행이지만 우리는 다른 여행을 꿈꾼다. 삶이 이미 고역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장 고약한 업무인 글쓰기를 스스로에게 부과하듯이.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라는 문장은 여행의 순간을 곰곰이 생각하게 했다. 사물과 장소가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도 있지만 100편이 넘는 이 에피소드에서 사람이 빠져 있다면 우리가 이 여행을 이토록 흥미로워 할 수 있을까. 아무도 아무것도 만나지 않는 여행을 우리는 여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신드롬’을 앓는 존재이자 ‘호기심의 방’이라 이야기와 구경과 수집에 열광한다. 전쟁, 전염병, 재난, 시체마저도 적당한 거리만 유지할 수 있다면 은밀한 혹은 노골적인 관객이 된다. 여행 중에는 타지의 쓰레기마저도 흥미롭지 않던가!
관광객이 되긴 쉽지만 유랑자나 순례자가 되는 건 어렵다. 여기 ‘재발성 해독 증후군’(어떤 이미지를 향해 끊임없이 돌아가려는 의식의 작용, 나아가 그러한 이미지에 대한 강박적인 추구)에 빠진 화자가 몸소 기록한 여행 지도가 있다. 희귀하고 괴상하고 기이한 것에 끌리고 전통적인 수집가들의 기호나 취향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외로운 순례자가 다른 순례자들에게 건네는 보고서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어떤 여행이든 가능하다. 우리는 섬처럼 만나고 섬을 떠나듯 멀어진다.
일관된 인과관계의 논리를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각자의 궤변과 저마다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이 세계는 하나의 서사로 이어지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겪고 본다. 아파트가 계속 허물어지고 고래가 뭍에 올라 자살을 하며 플라스틱이 온 대양을 누비는 동안 우리도 각양각색으로 떠돌다 어느 순간 멈춘다. 방향만을 가리킬 뿐, 목적지를 드러내지 않는 욕망을 엔진으로 삼고 있는 우리는 도처에 있다. 쿠니츠키는 섬 여행에서 아내와 아들이 실종되어 찾아야 하는 고생을 겪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돌아온 아내와 아들은 다시 사라져버렸고 그도 새로운 길을 떠나야 했다. 에릭은 『모비 딕』의 모험적 삶을 실제로 살아본다. 아누슈카는 병든 아들과 과묵한 남편과 억압적인 시어머니에게서 벗어나 거리의 삶을 살아보다가 결국 돌아간다. 독재적인 아버지의 시체 표본 수집 일을 도맡던 샬로타는 선원으로 떠나는 꿈도 꿔 보지만 현실에 안주한다. 여성 생물학자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옛 연인의 안락사를 돕기 위해 30년 만에 폴란드로 와 007 첩보전 같은 행보 뒤 떠난다. 18세기 제임스 쿡은 남쪽으로 탐사를 떠났고 20세기 토머스 쿡은 최초의 여행사를 만들었다. 17세기 해부학자 프레데릭 라위스 교수와 21세기 외과 의사 블라우 박사처럼 인체가 여행지인 사람도 있다. 박제된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요제피네 졸리만이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에게 보낸 비난 편지도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달된다. 쿠니츠키에게는 ‘카이로스’가 그리스신화 속 존재라는 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리스 문명 연구에 한평생을 바친 교수에게 ‘카이로스’는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 순환의 시간, 장소와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 다시 오지 않을 기회, 적절한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 아주 짧게 열리는 순간, 무에서 무로 달려가는 직선이 원과 맞닥뜨리는 지점’을 뜻했다. 교수는 그리스 문명에 열광하다 그 속에서 임종을 맞는다. 교수가 죽음을 맞는 의식의 여행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압축한 대목이어서 인용한다. 우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쇼팽은 죽어서 프랑스에 묻혔지만 그의 심장은 조국 폴란드에 묻혔다. 이 소설에서 떠다니는 유령섬처럼 등장하는 시체 표본들처럼 우리는 죽어서도 여행을 한다. 죽어서도 ‘나’는 나일까. 우리는 시간 속에 변화하는 모습일 뿐. 이 소설에 또 많이 등장하는 문장은 “여기 내가 있다”이다. 일상에서 ‘인간은 왜 살까’ 하는 물음처럼 여행지에서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나는 여기 왜 있을까?’ 늘 답은 ‘모르겠다’이다. 여행 심리학의 궁극적 최상ㅡ목적지가 어디건 간에, 우리는 항상 “내가 어디에 있든 중요치 않다.”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다. 여기 내가 있으므로ㅡ 단계는 우리가 삶에 임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계속 죽음을 품은 채 죽음과 함께 할 것이다. 또 다른 순례자가 “지금 플렉시 글라스 속에 담겨 있거나, 아니면 다른 방에서 플라스티네이션 처리가 된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잊힌 이야기 혹은 지금 태어나는 이야기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삶과 타인을 계속 만날 것이고, 한 줌의 재로 돌아갈 우리의 물음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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