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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이 책은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진형준 교수가 축약하여 편집하여 세계문학컬렉션 시리즈 중 하나로 발간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투르게네프가 1861년에 탈고하고 1862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이 책의 내용은
먼저 등장인물을 살펴보자.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 (44세) 파벨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 (45세) : 니콜라이의 형 아르카디 : 니콜라이의 아들 (23세) 바자로프 (예브게니 바실리예프) : 아르카디의 친구 페도시아 니콜라에브나 (페네치카) : 니콜라이의 여자 바실리 이바니치 바자로프 : 바자로프의 아버지 오딘초바 (안나 세르게예브나) 카챠 (카타리나 세르게예브나) : 오딘초바 부인의 여동생
작품의 제목이 ‘아버지와 아들’인지라, 아무래도 ‘아버지인 니콜라이와 아들 아르카디’에 관심이 가며, 또한 ‘바자로프와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도 관심을 끈다.
해설을 읽어보니, 이런 말이 나온다, 이 책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라 생각되어 조금 인용해 본다. <처음부터 다른 소설과는 무언가 다르다. 마치 역사소설, 혹은 르포인 것처럼 작품 앞머리에 1859년 5월 20일이라고 명기되어 있다.......그것은 이 소설의 무대가 국가 전체가 격변기에 처한 러시아임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221쪽)
그러한 격변기이니까, 격변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아무래도 다르다. 아버지와 아들 간에 그것이 어떻게 보일지? 분명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일단 아버지와 아들간의 시각을 문제 삼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세대 갈등에 더하여 진보와 보수간의 갈등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 저자의 시각이 묻어나는 발언 찾아보자.
<내 방에 영국식 세면대가 있더군, 영국식 세면대는 장려할 만해, 그건 진보를 뜻하니까.> (28쪽) 바자로프가 아르카디에게 한 말이다.
<그 여자는 실내모를 쓰고 있었다. 이 집 주인이 진보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표시였다.> (70쪽)
그러한 진보와 보수가 아버지와 아들 세대 간에는 세대 갈등으로 나타난다.
<그날 저녁 식사 후, 서재에서 니콜라이는 형 파벨에게 말했다. “이제 형님과 저는 시대에 뒤떨어졌어요. 우리들의 시대는 끝났어요. 그래요, 바자로프의 말이 옳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한 가지 견디기 어려운 게 있어요. 이제 아르카디와 정말 가깝게 지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시대에 뒤떨어졌고 그 애는 저만치 앞서간다는 생각……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 > (47쪽)
이 책에서 애착이 가는 인물은 어찌 보면 우유부단한 아르카디 보다는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다. 그가 그의 형에게 하는 말 속에 그의 인격이 보인다.
<동생이 형에게 말했다. “형님, 전에 어머니와 말싸움했던 게 생각나네요. 어머니는 소리만 지르시면서 제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셨지요. 결국 저는 ‘어머니는 저를 이해하실 수 없어요. 우리는 세대가 다르니까요’라고 말해버렸죠. 그런데 이제 우리 차례가 된 셈이에요.” “자네는 너무 너그럽고 겸손해서 탈이야. 나는 자네나 내가 저 애들보다는 옳다고 확신해. 우리가 약간 낡은 언어를 쓰고 구식인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저 애들처럼 확신에 차 있지는 않지만…….” > (60쪽)
그러니 그는 시대가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과거 자기가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떠올린다. 어머니에게 세대 차이가 난다고 한 그 말을 지금 아들로부터 듣고 있다는 것,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 명의 아버지가 있다. 그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과 가까워지려고 한다. 그 눈물어린 정경을 살펴보자.
<아버지는 자신이 편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 자주 강조했다. 어떻게 해서든 젊은 아들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이었다.>(133쪽)
바자로프의 아버지 이야기다. 격변하는 세상에 아들은 어느새 훌쩍 커서 품안에 들지 않고 떠나 버리고, 이제 아버지를 구시대 한 물 간 뒷방 노인 취급하며 말도 제대로 붙이지 않는다. 그런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이 문장에 눈물겹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이 책은
또 하나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은 세대 차이, 진보와 보수간의 갈등만이 아니라, 남녀 간의 섬세한 감정의 흐름도 잘 보여주고 있다.
바자로프와 오딘초바 부인, 그리고 아르카디와 카챠의 관계. 그들 사이에 어떤 감정이 흐르고, 말들이 오가는지를 작가는 아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네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말들, 사랑스럽고 철학적인 말들, 몇 개 옮겨본다.
<시간이란 때로는 새처럼 날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벌레처럼 기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빨리 가든지 늦게 가든지 의식조차 못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법이다.> (97쪽)
<제가 불행하다고 하는 건.... 삶에 대한 욕망이나 열정이 없기 때문이에요.> (107쪽)
<인간은 한 오라기 실에 매달려 있는 존재이고, 그 아래는 깊은 심연이 입을 벌리고 있지.> (117쪽)
“당신 자신을 가져오셨잖아요.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어요.”(144쪽)
사랑의 밀어 속에 철학이 묻어나니, 사랑은 사람을 철학자로 만드는 모양이다.
이 책, 인생을 생각하게 하고, 시간의 흐름을 생각하게 하며, 사랑 또한 생각하게 만든다. 역시 투르게네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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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작품은 러시아 3대 문학가 중 한명인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의 작품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통해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과 대립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러시아 사회 격변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갈등의 양상을 소설로 탄생시킨 작품이자 당대의 현실을 치우침없이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없었던 작품이다. 평소 러시아 문학 특히 톨스토이 문학들에 관심이 많아서 이름을 알고 있었던 작가인데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의 작품은 [아버지와 아들]이 처음이다. 이반은 이 책의 작품의 배경처럼 러시아 사회 격변기를 살았던 작가로 그는 1852년에 농노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해 모스크바에 체포되어 한 달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 [아버지와 아들]에서도 아르카디의 아버지인 니콜라이가 농노해방의 조정관 임무를 맡게 되는 내용이 나오는데 실제로 이 책의 배경인 1859년 2년후에 농노제가 폐지되었다. 이렇게 이러한 시대적 역사적 배경을 알고 이 책을 읽는다면 갈등과 대립의 양상이 더 실감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은 [아버지와 아들]의 완역본이 아니다. 이 책은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시리즈 중에 하나로 [아버지와 아들]의 축역본이다. 그래서 온전한 이반의 문학을 느끼고 싶다면 조금 아쉬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봤을 때 어색함이 느껴지지는 않았고 문학의 주제와 인물들의 갈등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세계문학들을 읽어보고 싶지만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고 완역본이 아니지만 완역본만큼 작품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이 책을 통해 러시아 사회 격변기의 문학의 진수를 알게 되기를 바란다. 중간중간 불편한 성적 대상화하는 표현이 들어가 있어서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당대의 러시아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버지의 마음, 지나간 세대들의 마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좋은 작품이 될 것 같아 빠르게 [아버지와 아들]을 읽어보고싶다면 이 시리즈를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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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 이후 두 번째 접하는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 컬렉션이며 같은 작가의 작품인 《아버지와 아들》을 읽게 되었다. 생소한 러시아 문학을 《사냥꾼의 수기》를 통해서 처음 접하면서 1800년대 러시아의 농노 사회, 지주 문화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한 번 접한 적이 있는 작가의 다른 작품이다보니 배경에 빨리 적응되었다. 《사냥꾼의 수기》가 주인과 하인이 사냥을 나가는, 말을 고르는 등의 이야기였다면 《아버지와 아들》은 더욱 더 그 당시 시대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 같은 느낌이다. 평범한 일상 이야기는 아니고, 당시 '변화'가 꿈틀거리던 러시아의 시대에 구세대와 신세대간의 갈등 혹은 기싸음 그리고 어느 시대에서도 빠질 수 없는 '사랑'이야기가 담겨 있는 소설이다. 한 나라의 특정 시대의 배경이 있는 외국 소설을 원문 번역본을 그대로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배경의 지식이 부족하기에 이해가 떨어질 수도 있고 원문 양을 소화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멋진 고전 소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브릿지'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화 컬렉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번 책을 읽고 더더욱 들었다. 크게 두 세대의 이야기, 다양한 사랑 이야기, 소설 속에서 가장 튀는 캐릭터의 한 젊은 청년의 쓸쓸한 결론. 소설을 있는 그대로 읽고 끝내면 그렇게 끝낼 수도 있는데, 책의 마지막 부분, 즉 하이라이트인 이 소설의 사회적 배경과 부연 설명은 소설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이렇게 읽고 나니, 더 오리지널 스타일로도 찾아 읽어볼까, 이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어볼까 하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다. 가깝지만 잘 모르는 나라 러시아의 1800년대 이야기, 역사도 슬그머니 좀 더 궁금해지기도 한다. 익숙하지 않은 외국의 고전문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 배경 등의 지식이 없는 사람들, 청소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허들을 낮춘 좋은 교양 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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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갑자가 세상을 떠나시면서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게 쉽지 않았다.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버지, 아빠란 단어를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 온다. 용기를 내어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의 고전으로 유명한 '아버지와 아들'을 읽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인 아버지와 아르카디 아들과 바실리 아버지와 바자로프 아버지가 등장한다. 두 가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 않고 각자의 신념에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부모님들이 아들들의 눈치를 보는듯한 느낌이 강하다. 부모님들이 아들들을 짝사랑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식탁에 앉아서 이야기하지만 뭔가가 대화가 막혀있는듯한 느낌, 아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아버지가 아들 뒤에서 등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버지는 언제나 주는 존재이고, 아들은 언제나 받는 존재로 표현된다. 그 아들이 아버지가 되야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수 있을 듯하다. 부모님 말씀 안듣고 마음 아프게 했을때 부모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있다. "너도 결혼해서 아이 낳아보면 내 마음 알거다"라는 말씀이 자주 생각난다. 아이들이 나의 마음을 몰라주고, 속상하게 할때 부모님의 마음이 느껴져서 많이 아프고 슬프고 후회가 된다. 그때로 돌아가서 그 마음을 알아줄 수 없으니 더 마음이 아프다. 병상에 계셔도 좋으니 살아만 계셔주셔도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아드리고, 얘기를 들어드리고 싶다. 그때는 왜 그렇게 잔소리처럼 들려서 얘기를 들어드리지 못했을까? '아버지와 아들'을 읽으면서 후회 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생각나서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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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모세대와 자식세대는 격차가 있고 갈등이 있는 듯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의견을 더 믿어주고 관철되기를 바라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상황이 흘러가던 자식도 언젠가는 아버지가 되어 있다는 것이죠. 결국 이런 시대적인 차이는 돌고 도는 것이 현실인 듯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가 쓴 소설로 자연과학을 이야기 하는 니힐리스트(허무주의자로 모든 것을 비판적 관점으로 바라보며 권위와 원칙을 무시하는 사상)인 아들의 친구 바자로프로 인해 변화되는 아르카디를 못마땅 하게 여기는 아버지와 큰아버지 파벨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르카디의 집에 잠시 묵게되는 바자로프는 하인들과도 서로 농담을 주고 받으며, 권위에 대한 눈치없이 자신의 일을 하며 지낸다. 또한 자기 아들 아르카디는 그를 스승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직도 시와 예술을 사랑하고 권위와 자신의 것을 잃기 싫어하는 평범한 아버지였다. 하지만 아들의 생각을 이해하려 하는 아르카디의 아버지는 아들의 친구인 바자로프를 이해하려 하는 면도 있다. 하지만 바자로프는 파벨과 사사건건 대립이된다. 급기야 결투를 하는 일에 이르르는데 파벨은 이일로 부상을 당하게 된다. 이 일이 있고 바자로트는 이 집을 떠나 아버지가 사는 시골로 돌아간다. 하지만 티푸스 환자의 시체해부를 하다가 상처를 입어 결국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이 책의 변곡점은 바자로프로 아르카디의 사랑이라는 감정에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아들 아르카디는 사랑하는 카챠를 만나면서 바자로프의 사상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점도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이다.
역사적 변환기의 소설로 구세대인 부모님과 신세대인 아들의 대립이 있지만 투르게네프는 변화되는 시대의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 보다는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어떠한 사고관이던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며, 자신의 소신인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생각을 가끔 흑백논리로 보려고 하는 경향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논리가 위험한 것은 아닐까?
이런 이념과 생각의 변화는 우리 주변에서 많이 겪는다. 그리고 예전보다는 소수의 의견도 들어주는 조금은 여러 생각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이런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나의 흔들림 없는 신념이 아닌 여러 상황을 다 아우를 수 있는 힘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아르카디의 아버지가 그 역할을 해보려고 했지만 그 역시 그 상황 까지는 가지는 못해 아쉬웠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아르카디의 아버지의 역할처럼 이쪽 저쪽의 생각을 잘 들어주는 사람의 역할이 필요한 때인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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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혁명 그리고 가족-
지난번 읽었던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수기’ 이후 두 번째 접하는 투르게네프의 소설이다 생각해보니 사냥꾼의 수기라는 작품보다 이번 작품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작품의 제목을 더 많이 들어왔던 것도 같다. 그런데 왜 읽어보려 하지 않고 책장에만 꽂아두었을까. 어쩌면 한두 페이지를 읽어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책장에 꽂아두고서 애틋하게 들추어보지 않는 많은 책들에게 일일이 변명을 붙여주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닐 듯싶다. 흔하게 역자타령을 늘어놓고 있을 게 뻔했을 법하다. 이다지도 게으른 내게 축역본 ‘아버지와 아들’이 찾아왔다. 일반적으로는 축역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보통의 축역본에서 느껴지는 아쉬움이나 허전함 같은 느낌없이 몰입해서 잘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뭐랄까. 지난번 사냥꾼의 수기에서 경험했던 비슷한 느낌이었을까. 어쩐지 이번 축역본 시리즈에 개인적으로 욕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 서두는 그렇다는 말이다.
자, 이제 책 이야기를 해보자. 무겁지 않게 가볍게 풀어가보자. 작품 ‘아버지와 아들’을 어떤 방향으로 풀어가야 할까,를 고민했었다. 실은 심각하게 혹은 너무 진지모드로 가지는 말자고 다짐하는 중이다. 우선 살짝 줄거리를 소개하면 니힐리즘을 추종하는 젊은 두 사내. 두 집안의 아들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의 부모, 숙부 등 가족이 등장하고 몇 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가족소설인가하면 비슷하면서도 아니다, 라는 말을 해야한다. 그렇다면 연애소설인가? 라고 다시 묻는다고해도 이번에도 아니다, 라는 말을 다시 되풀이해야한다. 그렇다면 무슨 내용이란 말인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격변기였던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번 축역본 전집을 끌어오고 있는 진형준 교수의 해설 부분을 참고하면 좋겠다. 농노해방을 시행하기 전 후의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 그러니까 표면적으로는 당대 러시아가 겪고 있는 사회적 문제 즉 지주 혹은 귀족사회(혹은 집단)와 농노(노예 집단)사이의 크고 작은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귀족과 농노들의 이야기는 아니다. 작품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갈등을 소재로 하면서도 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 즉 기밀하고 친근하며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또한 가장 특수적인 가족이라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사회조직인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내부적 갈등을 다루면서 가족 구성원간의 사랑과 이해를 담아내는 이타적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갈등을 조작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혼돈을 일으키는 듯하지만, 작품에서 무엇보다 전제적으로 깔려져 있는 감정은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감정이 아닌 가장 숭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인간애이며 사랑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그 감정을 단순히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한정 짓기보다는 부모가 자식에게 갖는 애틋하면서도 헌신적인 사랑에 주목해보고 싶다.
‘니힐리즘. 모든 것을 부정한다.’ 그것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젊은 세대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신념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내 ‘바자로프’. 그를 정신적 스승으로 믿고 따르는 친구 ‘아르카디’. 두 젊은이는 서로의 집에 머물면서 이를테면 이상과 현실이 가져오는 괴리감에 대해 끊임없이 언쟁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묘하게도 작가 투르게네프는 두 인물을 각자가 상징하는 완벽한 이미지로 형상화하는데 실패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는 충분히 작가의 의도된 결과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유치한 감정놀이라고 평가절하하면서도 그 스스로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게 되는 바자로프는 실패한 니힐리스트인가? 바자로프를 스승으로 삼아 추종해왔으나 결국 카차라는 여인에게 청혼을 하게 되면서 바자로프와 서로 다른 길을 인정하는 인물 아르카디 역시 실패한 니힐리스트였던 것일까?
사실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패자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군상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들의 무덤 앞을 쓸쓸히 오고가는 늙은 부모조차도 말이다. 굳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자식들 세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조금은 쓸쓸하면서도 비굴한 속내를 꺼내 개인이 만들어내는 어떤 타당성으로 묶으려하지 않아도 딴은 괜찮다 괜찮다. 라는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어차피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깨닫고 이해하며 행동하기 때문이다. 신이 공평한 까닭은 인간을 유한의 존재로 만들었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해석은 개인의 몫이다. 딴은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살펴볼 때 의외로 인간적이고 평범한 삶을 쫒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연인들의 사랑, 늙은 부모가 지니는 자식에 대한 사랑, 형제간의 충정과 신뢰로 그려지는)보통의 모습들이 그 어떤 개혁의 급변하는 사상보다 더 값치가 있으며 더더욱 소중하다는 단순하면서도 진지한 하나의 생각을 갖게 하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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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40으로 나온 소설집입니다. 역자인 진교수는 30년 넘게 문학교수와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평론가이자 불문학자이기도 합니다.
이 책, ‘아버지와 아들’은 러시아작가인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의 작품입니다. 나는 러시아 작가라 하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가 떠오릅니다. 그만큼 이 책의 저자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 앞날개의 소개 글을 읽어 보면, 러시아 3대 작가로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세 사람을 소개하고 있고, 이 세 사람 중에 이 책의 저자인 투르게네프가 가장 먼저 세계에 알려졌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제를 폐기하기 2년 전을 배경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 ‘아버지와 아들’은 이 시대적 배경을 배경으로 읽어야 제대로된 의미를 포착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즉, 나의 경우, 이런 러시아의 시대적 상황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책을 읽으니, 그냥 밋밋하게만 느껴집니다. 이 책의 제목을 의식하며, 두 부자지간을 발견해 봅니다.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와 그 아들인 아르카디와 또 다른 아버지 바실리 이바니치 바자로프와 그의 아들인 바자로프입니다.
그러나 이들 부자지간은 유별나거나 특별한 것이 없어서 특히 기억에 남을만한 내용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나 러시아나 항상 부모와 자식 간은 사랑의 관계가 돋보입니다. 작가는 집을 나가 있는 아들을 기다리고, 하루라도 더 함께 있고픈 마음을 잘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아버지의 존재는 시대에 뒤떨어진 한 물간 시대의 사람을 하고, 세대 차이를 느끼는 극히 부조화된 관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당시 러시아는 농노제도가 있어서, 사회 변혁기를 겪고 있음을 이 책은 잘 설명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에는 또 하나의 축으로 로맨스가 있습니다. 바자로프와 오딘초바 부인의 어색하고 부자연스런 로맨스와 그 부인의 동생인 카챠와 아르카디의 사랑 이야기, 이들은 에필로그에 보면 정식 결혼을 하게 됩니다.
역자의 말대로 저자가 이 소설을 쓴 러시아의 형편과 그 당시의 사회상을 깊이 있게 모르는 상태에서 책에 나온 내용만 가지고는 깊은 감동을 받기에는 역부족임을 압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책을 읽기 전에 작가의 신상이나 역사 등을 먼저 세세히 알고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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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은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와 더불어 러시아 3대 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가 1862년에 발표한 소설입니다.
내가 읽은 소설은 원작을 진형준 교수님의 오랜 경험과 고전을 원전 그대로 읽기에는 힘들다는 사실로 축역본으로 완성한 세계문학컬렉션은 한 권입니다.
1862년은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2세가 농노제 폐지를 선언한 해이고, 작가는 급변하는 러시아 사회에 대한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자 이 작품을 저술합니다.
10년 전인 1852년 투르게네프는 농노제를 비판한 글을 작성하여, 당국의 체포되어 1년간 모스크바에서 형을 살고 고향으로 유배되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그 이후에 쓰여 농노제를 비판하는 동시에, 이러한 혁명을 이끄는 사람들 역시 아직 무지하고 혁명을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메시지를 던져 진보주의자, 보수주의자 양 측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당시 러시아 인구6700만 명 중 4000만 명이 농노였다고 하니 이 일이 러시아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났다고 봅니다.
등장인물 -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 : 우유부단한 영주이고, 농노제를 개혁하고 하는 인물 - 파벨 페트로비치 키르사노프 : 니콜라이의 형 - 아르카디 : 니콜라이의 아들 - 바자로프 : 아르카디의 친구, 니힐리스트(원칙과 권위를 믿지 않는 사람) 안나 오딘초바 : 바자로프의 연인
책 속으로 니콜라이는 퇴역한 장교인 아버지 덕분으로 대학도 마치고 군 생활을 한다. 부모님이 반대하던 결혼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하게 되고 부부는 아들은 아르카디를 낳는다. 아내가 또한 일찍 죽어 니콜라이는 아르카디와 시골에 머물면서 다소 무기력하지만 자신의 농지의 경영을 개선하고자 한다.
아들인 아르카디는 대학에 들어간 후 친구를 데리고 오는데 이 친구는 자연과학을 따르는 의학을 전공하는 어떠한 권위나 원칙을 따르지 않는 니힐리스트인 바자로프이다.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에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니콜라이는 이런 바자로프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보지만 니콜라이의 형인 파벨은 그런 바자로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르카디와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의 집과 친척집, 바자로프의 집으로 가는 도중 아르카디의 친척이자 마을의 부패한 지도자를 조사하러 나온 아르카디 삼촌인 콜라진의 초대라 무도회에 가고 그 곳에서 두 사람은 아름다운 과부이자 현명한 여인 안나 오딘초바를 만난다. 두 사람 모두 안나에게 빠지지만 안나는 바자로프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랑이라는 감정도 바자로프에게는 부정되어야 하는 흔들리는 감정이라고 거부하는 바자로프로 인해 이들의 사랑은 어는 지점을 향해 가는데...
소설은 기성세대로서 니콜라이와 파벨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개혁적인 모습을 가지려 노력하지만 이들은 차츰 뛰쳐지고 바자로프가 자신들에 대해 가지는 경멸을 인정하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 사회의 혼란함, 신분제의 동요, 세대 간의 갈등, 이데올로기의 혼재 속에서 소설은 가장 소중한 감정인 사랑조차 부정하는 바자로프가 받아들이는 운명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아버지와아들 #투르게네프 #러시아문학 #진형준 #책과콩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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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러시아의 3대 문호로 꼽히는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는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히스테리가 심한 어머니 때문에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지 못했다. 생애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지냈으며 그래서 러시아 작가중에서는 가장 먼저 외국에 알려지고, 또 외국에서 가장 많이 읽힌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투르게네프의 작품 중에는 농노제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데, 이 책 역시 그렇다. 이 작품은 작품 앞 머리에 '1859년 5월 20일' 이라는 날짜가 명기돼 있는데 이는 1861년 2월 1일, 러시아에서 농노제를 폐지한 날의 2년 전인 것에서 격변기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작품에는 극단적인 성향의 두 인물들이 스토리의 주축이 되고 있다. 새로운 사회와 사상을 선두해 가는 '바자로프'와 구시대의 전통을 상징하는 '파벨 페트로비치' 를 중심으로 다양한 중도성향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바자로프'를 열렬히 따라가고자 하면서도 결국 자신이 나고 자란 전통으로 되돌아는 '아르카디'를 통해 한 발자국 발걸음을 떼는 시대의 진보가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또 양 극단에 서있던 '바자로프'와 '파벨 페트로비치'는 정작 유명을 달리하거나, 러시아를 떠나게 되는 결말에서는 결국 사회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수많은 중도의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거시적인 안목에서가 아닌, 제목 그대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세대간 갈등으로도 이 도서를 이해해 볼 수 있다. 신세대인 자녀와 구세대인 아버지 세대와의 갈등은 현재, 지금도 흔히 일어나고 있는 갈등이다. 다만 '니콜라이 페르로비치'처럼 세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거나, '아르카디'처럼 새로운 시대와 구시대 모두를 이해하는 사람, '바실리'처럼 그저 사랑으로 아들을 껴안는 등의 다양한 형태의 이해와 사랑이 있어 갈등은 완화된다. 과거 1860년대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작품의 뒷부분에는 에필로그가 있어 작품에 대한 설명을 참고할 수 있고,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 봄직한 중요 주제를 질문하는 바칼로레아를 통해 다시 한번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메세지는 무엇인지 정리해 볼 수 있다.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시리즈의 하나인 이 책은 청소년들이 원문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색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다가와 읽을 수 있단 장점이 있다. 책을 통해 많은 분들이 '고전은 어렵다' 라는 생각에서 자유롭게 이 훌륭한 작품을 만나보시길 권한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해 주신 도서를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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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가 의대생인 그의 아들 아르카디와 오랜만에 만나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아르카디는 자연과학 전공인 그의 친구 바자로프를 집에 데려와 잠시 함께 지내게 되고, 니콜라이의 형이자 아르카디의 큰아버지인 파벨을 만나게 된다. 급진주의자인 바자로프는 '니힐리스트' 즉,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것에 비판적이며 "시대가 내게 달린거지 내가 시대에 달린 게 아니"라는 진보적 정신을 갖고 있다. 아르카디 역시 마찬가지다. 구세대(아버지세대)인 니콜라이, 파벨은 신세대(아들세대)인 아르카디, 바자로프와 사사건건 대립한다. 말뿐인 관념을 경계하는 행동주의인 신세대들과 달리 현재의 관습과 규칙에 보수적으로 긍정하는 구세대들은 마치 현재에도 늘 반복되는 세대차이를 보는 듯하다. 아르카디의 친척집을 방문한 바자로프와 아르카디는 우연히 무도회에서 기품있는 과부인 오딘초바 부인을 만나게 되고 그녀의 우아함에 빠지게 된다. 오딘초바 부인의 초대에 응한 그들은 그집에서 얼마간 지냈는데 오딘초바 부인을 사랑하게 된 바자로프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낭만적 감정을 억누르다 이를 주체하지 못하는 시점에 그녀의 집을 떠났고, 허무주의적인 자신이 그런 낭만을 느꼈다는 것에 죄의식같은 걸 느꼈다. 바자로프의 부모님 집으로 간 아르카디와 바자로프는 미사여구를 쓴 아르가디를 바자로프가 비난하다 다투게 되고 다시 아르카디의 집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니콜라이가 좋아하는(파벨도 좋아할지도 모를) 페네치카와 갑작스레 키스하게 되고 그것이 파벨에게 발각되어 파벨과의 결투 끝에 파벨이 다리에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파벨은 자신의 고집스러움을 꺾고 바자로프를 인정했으며 바자로프는 아르카디의 집을 떠난다. 한편, 아르카디는 오딘초바 부인의 동생 카챠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이 변화함을 느끼고 사랑에 빠져 청혼하였으며, 바자로프는 오딘초바 부인을 사랑했으나 결국 말하지 못하고 떠났고 친구인 아르카디와도 작별했다. 바자로프는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왔지만 예전의 패기넘치던 부정적 진보주의자, 행동주의자의 모습은 사라졌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염병이 걸려 오딘초바 부인에게 마지막 사랑을 고백하며 잠들었다. 이 소설은 뒷부분에 제시된 바칼로레아 이외에도 중간중간 생각할 문제를 많이 제시해주는 작품이다. 보수와 진보, 구세대와 신세대, 어느 쪽도 편들어 주지않는 철저한 중립적 시선이 느껴지는데, 결국 그렇게 허망한 죽음을 앞두고는 미사여구 거부, 낭만 혐오와 같은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친구에게 지식적으로 억압받는 것 같았던 아르카디는 자신을 잘 이해해주고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카챠로 인해 현실은 직시하고 날선 칼날같은 불안함을 거둔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건 지금, 여기인지도 모른다. 농부들을 얕보던 바자로프가 역으로 농부들에게 헛소리하고 뜬구름잡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아이러니는 아무리 행동주의를 표방하는 진보주의자라 할지라도 그 자신이 스스로 가장 경멸하던 탁상공론의 대표주자임을 깨닫게 해준다. 즉, 자신의 의견만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옳다고 타인을 경멸할 이유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우리 사회에도 늘 세대의 차이, 이념의 차이가 거센 파도처럼 일렁인다. 공감과 경청이 결여된 사회, 불안이 내재된 사회에서 지금 여기,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고 행복하며 그 기저에는 타인 존중, 공감, 경청, 배려 등의 기본적인 빛나는 가치가 존재함을 말해주는 소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