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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라면 풍수지리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이는 없을 것이지만, 사실 풍수지리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다. 풍수지리란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산을 배후와 좌우로 두르고 강을 앞에 두는 '배산임수'의 '명당'에 도성이나 마을, 묘자리 등을 입지하는 것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풍수지리 하면 또한 떠오르는 것이 바로 '미신'이다. 조상의 묘자리를 풍수지리에 근거해서 잘 선정하면, 그 좋은 기운이 후손들에게 전해져 번창한다는 것이다. 이때 기운이라는 것이 과학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풍수지리를 믿고 조상의 묘를 이장하는 행동은 미신처럼 보인다. 그래서 풍수지리는 사이비라고 혹평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풍수지리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는, 풍수지리에 대한 우리의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저자들은 풍수지리를 우리 민족 고유의 환경사상으로 보고 있다. 중국 화북지방에서 처음 전파된 풍수지리 사상이, 천년 이상 우리 민족의 생활공간과 함께 상호작용하면서 체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풍수지리가 오랜 기간 유지된 것은, 조상들이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았든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풍수지리를 심층적으로 연구하면 우리 땅에서 살아가는 조상들의 지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저자들은 풍수지리의 생태적 의미와 '지속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저자들은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네 명의 저자는 생태학, 지형학, 문화지리학 등이고, 그 외 집담회에 참여한 학자들도 다양하다. 이들은 자신의 학문적 '안경'을 통해 풍수지리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것을 토론하면서, 풍수지리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환경대학원에서 생태학을 가르치는 이도원 교수는, 풍수지리에 근거하여 입지한 전통마을에서는 회복탄력성이 높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속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시스템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물질의 양이 적절하게 유지되고, 시스템 내의 여러 요소들이 다양하게 존재하면서 내부의 물질이 순환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전통마을의 배후산지 골짜기는 빗물이라는 물질을 받아들여 마을 앞 들로 모이게 한 뒤, 들판을 비옥하게 하여 수확물을 많게 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배출한 오물은 입구의 연못을 거치면서 정화되고, 들판의 거름이 되어 다시 마을에 수확물로 돌아오게 된다. 이처럼 풍수적 마을경관을 조성하면 내부의 건전한 물질 순환이 나타나면서 전체 마을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을의 지속성을 기원하는 행위가 마을숲 조성 등의 풍수적 경관 조성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여러 마을에서 나타나는 우물 고갈 사태는 전통마을의 생태를 이해하지 못한 자원 낭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마을경관의 생태적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형학 및 토양지리학을 가르치는 박수진 교수는, 풍수지리의 공간인식은 지형을 전체로 이해하고 시스템의 유지를 위한 토지이용을 지향하도록 한다고 본다. 먼저 한반도의 지형형성과정을 살펴보면, 융기와 해수면 하강이 반복되면서 계단상 지형이 반복되는 패턴을 보인다. 이 과정에서 미시적으로 보면, 명당으로 인식되는 사신사 지형이 형성되거나 혹은 개방적인 하천주변평탄지가 형성된다. 두 지형은 우연적 요인으로 발달하는, 지형의 '자기조직화'로 설명된다. 좀 더 넓은 범위에서 보면, 안동분지 및 춘천분지 등도 사신사 지형으로 볼 수 있고, 이는 좁은 골짜기와 대비된다. 이러한 사신사 지형은 중국에서 전래된 풍수사상과 결합되면서 살만한 땅으로 인지되었고, 우리나라 고유의 입지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형을 관리하는 방향은, 오랜 기간 그 지형을 관리해 온 풍수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사신사 지형을 전체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토지을 유지 및 보완해 나가는 지속가능성의 담보가 그것이다. ![]() 뉴질랜드에서 문화지리학과 환경사상을 연구하는 윤홍기 교수는, 풍수지리의 '생기 순환'에 주목하여 지속가능성과 안정지향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기가 살아서 순환한다는 사상은, 자연과학에서의 물 순환과 비슷한 과학적 원리를 지닌다고 본다. 형태는 다르지만 계속해서 우리 주위에 존재하면서 지속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지속가능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풍수지리에서는 생기를 모으고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 과정에서 마을의 안정지향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풍수지리는 한국인이 그 땅에 살아가면서 체득한, 본능적인 안정 지향의 환경지각이 집약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풍수지리 사상을 연구하다 보면, 의외로 과학적 근거가 내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행주형 형국인 평양에서는 우물을 파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포인트 바 지형에서 지반침하를 우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이러한 생기를 과학적으로 일반화하는 게 힘들다는 점과 풍수지리를 발복 사상으로만 접근한 최근의 풍조 때문에, 풍수가 한국인에게 부정적인 미신으로만 접근하는 점에 안타까워 한다. 그렇다고 풍수지리 전체를 매도해서는 안되고, 풍수지리를 과거 사람들의 소통방식으로 이해한 뒤 긍정적 의미를 찾아서 더욱 강조하는게 올바른 접근이라고 말한다.
비보 풍수를 주로 연구한 최원석 교수는, 전통 마을에서 풍수 및 비보 경관이 나타난 것이 주민들의 환경관리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우선 '풍수'라는 용어는 서양의 '환경'이라는 용어와 일맥상통하다는 점을 말한다. 그래서 풍수 사상은 즉 환경 사상에 대비되고, 풍수지리는 동아시아의 환경 인식, 평가, 관리를 위한 이론적 체계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풍수지리에 근거한 명당은 당대 사람들의 이상향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그러한 이상향으로 유지 및 관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배후산지를 조림하고, 산지의 맥을 연결하며, 하천이 돌아나가도록 하며, 수구에 비보림을 조성하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풍수적 상징경관 조성만이 아니라, 마을의 생태적인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행위가 되었다. 큰 강가가 아닌 계곡이 풍수지리적 명당이라는 점은, 하상계수가 높은 큰 강가에서 지속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내재한다. 또한 배후산지로 둘러싸인 지형은, 찬 바람을 막아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체계라는 것이다. 결국 풍수지리는 온대 계절풍지대에서의 농경문화를 지속가능하도록 하는 환경사상이라고 평가한다. 저자들의 관점과 접근방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로 수렴된다. 풍수지리 사상은 미신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름의 체계성과 합리성이 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풍수지리 사상에 내재한 환경인지와 환경관리는, 문명의 지속가능성이 화두인 현대사회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저자들의 이러한 풍수지리의 재조명을 위한 자리 마련은 의미가 있었다. 사실 과거에는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것을 기피했다. 그것은 서양의 근대 경험과학이라는 패러다임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전통 풍수지리는 비과학적인 것으로 매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수지리의 참모습과 의미를 조명할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리학에서도 최근 몇몇 문화지리학자들을 중심으로 풍수지리의 참모습을 재조명하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이 책의 시도처럼 학문적 통섭을 통한 풍수지리 연구가 나타나고 있다. 통섭을 통해 풍수지리의 의미와 중요성이 되살아난 것이다. 특히 두 자연과학자의 풍수지리 연구는 참신했다. "저런 자연과학적 관점으로도 인문학적인 풍수지리를 바라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풍수지리가 나름의 합리성과 체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반증이라고도 느껴졌다. 결국 다양한 학문들이 고유한 접근을 통해서 풍수지리를 바라보고 이것이 서로 교환하며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풍수지리의 현재적 의미를 조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이 책은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저자들이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는 내용이다. 집담회의 녹취를 옮겨 놓았기 때문에, 편안한 대화체로 쓰여 있어서 읽기 쉽다. 그리고 풍수지리 안내서로 쓰인 것은 아니라 기본개념의 선이해가 필수적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비전공자가 어렵게 읽을 정도는 아니다. 우리 전통 사상과 생활공간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풍수지리의 현재적 의미를 되새긴 뒤, 같은 저자들의 저서인 한국의 전통생태학, 땅의 마음 등을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리뷰 내 3번째 사진은 책을 직접 촬영했고, 1,2,4번째 사진은 http://ecotopia.hani.co.kr/65228 가 출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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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사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
솔직히 한국사는 일제식민사학의 계승같고 일본역사는 우익이 조작한 역사를 일본학생들은 배운다. 물론
지금 누구를 탓하고 비판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무슨사학이건 왜곡이건간에 전체적인 틀을 알아야 비판을하지 한국사는 전집만 4가지 읽고 여러종의 책
들을 몽창 다 읽었지만 일본사는 책도 없을뿐더러 읽어도 개념정립이 안된다.그러던중 성균관대학 구태
훈교수님의 '일본무사도'라는 책을 읽으니 이태껏 읽은 일본사의 내용들이 쫘르르 쥘부채 펴지듯 정립이
된다. 정말좋은 책이었다.
풍수책 몇년전부터 사기 시작했다. 세계의 풍수,개념,잡술,성공등 여러가지들 읽고 실생활에의 적용 남들
은 무심코 지나기지만 난 보니 어떤 건물, 어떤 집 어떤가게에주인이 어떤 것을 받기 위해 이런 술수를
도입했구나가 한 눈에 보인다. 어떤 건물은 최첨단의 석학들이 모인 곳인데도 풍수를 해놨다
이책을 사서 읽는다. 아직은 개안수준은 아니지만 '일본무사도'를 읽는 느낌이다.
거기다. 풍수와 생태환경을 연결시킨다.
저자분들께 한 권만 추천드리자면 '여우와 토종씨의 행방불명' 꼭 읽으시길 바란다.
페이지 152 풍수에서 생기는, 흙이 있는데에만 있고 바위만 있는 곳에는 없다.
이건 '돈버는 풍수'나 '부자되는 풍수테크'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페이지71 김용운교수님의 책'(한국어는 신라어 일본어는 백제어)나'(풍수화)참조 (물의 자연사','진화의 종
말)도 읽으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것이다.
풍수에서 이산화탄소를 강조하셨는데 매연보다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만드는 물질은 (아이 몸에 독이 쌓
이고 있다)나(중국 없는 세계)에 나와 있을 것입니다.
제목 : 미즈노교수와 종로 피맛골이야기
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생글생글 잘 웃던 미즈노교수가 방송에 잘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모여서 토론하던 곳에서 미즈노교수는 "저희 일본에서는 자식이 사업자금이 부족해
시골 부모님에게 가 가만히 있으면 말을 안해도 부모님이 알아서 주십니다. 또 연인들끼리도 사랑한다는
말을 안해도 다 압니다."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 말에 주변사람들은 "에! 그게 뭐야 말을 해야지" 하며
어이없어 했다.
이야기가 좀 다를진 몰라도 18세기 프랑스에선 자신의 문화의 우수성을 차등화하기 위해 `야만'이라는 말
을 만들어냈다.
타문화를 자신의 문화적 시각으로만 해석하려는 극단적인 예가 '야만'이라는 단어다.
12세기 한국과 일본에는 모두 무신정권이 같은 시기에 등장한다.
청기백기게임의 원형도 알고보면 운동회때의 청백전이 아니라
백강전투후 400년동안 일본에 존재했던 시대가 헤이안시대다
수도를 두 번씩이나 옮긴 간무천황이 794년에 헤이안쿄(교토)를 도읍으로 정착시킨후 1185년에 이르러서
야 미나모토가문이 다카모리왕의 손자 다이라씨와 전장에서 맞붙었을때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한쪽은 등
에 홍기를 꼽고 한쪽은 등에 백기를 꽂은데서 청백전이 유래한다.
이로인해 다이라씨가 궤멸하고 군사,경찰,행정권이 미야모토노 요리토모에게 넘어간다.
이 때 시작된 또 하나의 풍습이 무신정권의 호화로운 요리인 가이셰키요리와 승려들의 공양음식인 쇼진
요리가 합해져서 현재의 일식요리의 원형이 탄생되기도 한다.
이런 전통이 1868년 메이지천황의 시대가 도래할 때까지 700년 동안 무신들이 전국에서 할거하는 전국시
대가 계속된다.
우리나라에 군단위가 있다면 일본에서 군단위의 영주가 있어 그곳의 무사집단과 농민집단이 하나가 되어
서로 경쟁하는 시대를 그들은 700년이나 지속한다.
만일 거기속한 사람이 자신의 불만이나 억압에 대한 표출을 하게되면 그곳 집단에 해를 끼쳐 단결에 해가
된다하여 자신의 욕구불만을 자신의 내부로 내면화하는 뿌리를 내려 지금도 일본에선 제일 심한 욕이 우
리가 잘아는 '빠가야로'라는 바보란 말이 제일 심한 욕이다.
어느 기자가 그런다 한국과 일본의 고소고발 사건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이건 단순비교
가 아니라 원인을 역사적 유래를 놓고 비교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라마다의 문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건 무리가 따를 때도 있다.
그럼 한국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바보'는 욕도 아니다 그냥 애칭 정도일까
조선은 600년동안 양반중심의 중앙집권제가 뿌리를 내린다.
서민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멸시와 천대를 뒤에서 욕으로 푸는걸로 해결한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외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욕으로 푸는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고 일본은 외
부의 억압으로 인해 생기는 불만을 내면화하는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다 사대부의 발원지를 보자.
진,송시대이후 사대부라는 명칭의 직업은 비록 달랐지만 농,공,상이 같이 섞여 살았다가 후대에와서 사대
부들이 곧 문벌이 높은 집안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들이 사는 곳은 농,공,상과 완전히 구별되도록 서로 섞
여 거주하지 않게 된 것이다.
압구정도 중국 송나라의 정승 '한충헌'이 황제를 새로 세운 공을 세운뒤 압구정이라는 정자를 지은후 벼
슬을 버리고 갈매기와 함꼐 논다는 겸손의 뜻이다.
그 압구정이 조선으로 넘어와 '계유정난'을 기획한 한명회가 갈매기압로 불리던 강남의 땅에 정자를 지은
후 그곳의 뜻은 서민들에 의해 누를압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발원지를 알면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
한강의 발원지도 오대산 '우통수'와 태백 황지의 창죽동의 검룡소를 발원지로 보기도한다.
여기는 귀한 곳이기에 잘 보존되고 있다.
그럼 지금 한국은 발원지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문화유산은 또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을까
안압지,불국사,석굴암,첨성대,무녕왕릉,고인돌,장군총등 거의 다인 문화유산은 모두 귀족이나 왕족들을
위한 유산이다.
그럼 우린 이런 문화유산을 정말 잘 지키고 있을까
우리는 약간이라도 불편하거나 보기 싫으면 싹쓸어버리고 다시 짓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종로의 피맛골,중앙청,명성황후생가담,창덕궁산책로,천재시인 백석과 길상사 자야여사가 사랑을 나누던
집, 올림픽 메인스타디움과 국회의사당을 지은 건축가 김수근씨의 집도 싹 밀거나 밀려고했다.
이제껏 나온 문화유산중 95%인 서민들의 유일한 유산 한국에 욕이 왜 많은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가
종로의 '피맛골'이다.
우리는 지금 전통과 낙후를 구분못하는 혼돈에 빠져 있지않은지...
가난의 잔재를 지워버리고 싶었던 구시대적 발상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고 있는 것일까
1392년 조선은 개국했고 그 시절 숭례문을 만들게된다.
숭례문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떄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시절에도 있었고 김영삼대통령
이 치적이라고 내세우는 우를 범하며 주식회사와 보험을 탄생시킨 동인도회사의 대표적 건물양식이며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있는 중앙청을 부술때도 있었지만 69세 노인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고 그
노인은 국민들의 비난을 받으며 감옥으로 향했다.
종로의 피맛골은 1392년 조선의 개국시절 서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생기게된다.
피맛골은 한명회의 계유정난때도 있었고 임진왜란 때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시절에도 존재했고 김영삼대
통령이 치적이라고 자랑하며 주식회사와 보험을 탄생시킨 동인도회사의 대표적 건물양식이며
한국의 근현대사가 그대로 녹아있는 중앙청을 부술떄도 있었지만 한 정치인의 야망에 의해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그 정치인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청와대를 바라보고 있다.
몇몇 정치인의 생각만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도시를 통째로 바꾸려는 발상 이제는 좀 바꿀때도 되지 않았
을까
외국에서는 모짜르트생가 베토벤 생가에서 외국정상들과 칵테일 파티를 한다는데 왜 한국은 야만의 수준
을 벗어나지 못하는걸까
참고도서 몇권만 추려서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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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이란... 막 땡기다가 눈 앞에 들어오자마자 시들해 지는 경우가 있다. 술도 그렇고 음식도 그런 경우가 있다. 임신부의 입덧마냥... 그러다가 또 언젠가 땡기는 때가 있다. 이 책도 그런 경우다. 땡겨서 부랴부랴 샀는데 갑자기 시들해져서 읽지 않은 지가 어언 1년이 넘었다. 책꽂이 제일 잘 보이는 곳에서 줄곧 대기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땡겨서 3일만에 읽었다. 3일을 위해 1년 2개월을 책이 나를 기다린 셈이다. 우얗든 읽었다. 환경과 지리전공학자들의 전통생태와 풍수지리에 관한 세미나를 다듬어서 아마도 책으로 낸 것 같다.
우리 시골마을의 풍수를 생각 해 본다. 사각의 돌널 무덤이 발견되는 걸로 봐서 그것이 가야시대 것인가? 삼국시대 후반 것인가? 아니면 후기 신라, 혹은 고려? 확실히 모르겠다. 오래된 마을 인것만은 확실하다. 우리 성씨의 조상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 후기설과 조선초기설이 있는데 역시 확실한 것은 모르겠고 단지 오래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냇물이 양 산줄기 사이를 타고 내려오다가 호리병마냥 넓어지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우리 마을이 있고 다시 좁혀지면서 문이 닫히는 것 마냥 양쪽 산줄기가 붙을듯이 좁아진다. 인체로 본다면 위장처럼 생겼다. 아랫마을에서 우리마을로 들어 오려면 2킬로이상의 좁고 바람이 세고 음험한 길을 통과해야만 한다. 마지막 관문이 가장 무섭고 혼란스러운 '도깨비골'이고 그곳을 통과하면 비로소 시야가 열린다. 그곳에서 10여분을 걸어서 마루턱에 올라서야 비로소 마을이 눈앞에 들어 온다. 어릴적에는 마을입구에 조산과 소나무 여러그루가 지키고 있었고 입구마루턱에서 죽 위로 ㅇ올리며 우백호를 형성하면서 주산으로 올라가 붙고 그 줄기에 오래된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주산에서 줄기가 내려오다가 당산을 형성하고 당산아래에 마을이 동남방향을 보고 옹기종기 형성되어 있었다. 주산에서 역시 좌측으로 줄기가 죽 내려 오면서 좌청룡을 형성하는데 역시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냇물은 구불 구불 흐르는데 마을 바로 앞에서 마을쪽으로 향하다가 다시 외곽으로 굽이치면서 아랫마을로 빠져나간다. 그래서 지세가 마을편보다는 마을 건너편이 더 깊고 넓게 형성되어 있다. 그곳이 골도 깊고 농지도 넓다. 내물이 유입되는 북쪽과 마을 건너편 쪽에서 주요 생산물이 나왔다. 아주 작은 골짜기임에도 불구하고 수백, 수천(?)년간을 지속 해 온 걸로 봐서는 조상들의 지속성에 대한 노력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없어진지 오래고, 하천정비사업한다고 냇물을 인위적으로 변경시켜 물이 고속으로 마을을 빠져 나가게 만들고, 좁았던 '도깨비골'은 뻥 뚫어 버렸다.
'회복탄력성'과 '지속가능성',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읽은 주제다. 조상들은 우리 인간이 지속적가능적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주거를 정하고 마치 집을 짓듯이 주거환경을 조성하였다. 풍수의 형국이론으로 덧씌우고 금기사항을 만들어 지속가능케 했다. 예 공동체 사회의 힘이었고 지혜였다.
지금은? 물론 엉망진창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