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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 자본시리즈’ 제7권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다]는 마르크스 [자본] 1권의 제4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대해서 쓴 글 중 10장에서 12장까지의 읽기이다. 10장의 제목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개념’이고, 11장은 ‘협업’ 그리고 12장은 ‘분업과 매뉴팩처’이다. 자본이 잉여가치를 늘리기 위해서는 노동일이나 노동인구를 늘려야했으나 한계에 이르자 새로운 길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상대적 잉여가치를 늘리는 방법이었다. 앞 권인 6권에서 절대적 잉여가치에 대해 설명한 저자 고병권은 7권과 8권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근대정치학은 두 종류의 인간을 상정한다. 집합적 통일체로의 인간과 그 구성원인 개별인간이 그것이다. 주권자라 불리는 집합적 통일체로서의 인간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로 거인에 비유된다. 반면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군주나 정부의 돌봄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로 흔히 난쟁이로 비유되곤 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자본가에 고용될 때도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노동자는 독립된 개인의 자격으로 고용되지만 작업이 시작되면 결합된 노동력을 이루어 거대한 시스템을 구성한다. 그러나 임금을 받을 때는 전체 시스템의 한 부분인 개인으로 다시 돌아온다. 상대적 잉여가치란 바로 이런 구조 속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생산물의 가치(w)=생산수단의 가치(c)+노동력의 가치(v)+잉여가치(m)이다. 그리고 노동일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합이다. 잉여가치란 잉여노동이 대상화 된 것이며, 잉여가치율은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비율 즉 m/v이다. 따라서 잉여가치를 늘리기 위해서는 노동일을 늘리거나 고용을 늘려야 한다. (필요노동은 정해져 있기에 늘어난 시간만큼 잉여노동이 되거나, 고용의 증가로 잉여노동의 합이 커진다) 그러나 시간과 인구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자본은 새로운 길을 찾아냈는데 그것은 노동력의 가치하락을 통한 필요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이처럼 노동일을 연장하거나 고용을 증가시키지 않고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비율을 바꿈으로써 얻어지는 잉여가치를 바로 상대적 잉여가치라 부른다. 이는 자본가가 그것을 염두에 두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작업방식이나 노동수단을 혁신함으로써 경쟁업체보다 생산성을 높인다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혁신은 생산량 증가로 자본가의 눈앞에 직접적인 이익을 준다. 마르크스는 생산량 증가분이 주는 잉여가치를 추가 잉여가치라 부른다. 상대적 잉여가치가 전체 가치 생산물중 자본가와 노동자가 가져가는 몫의 비율을 바꾼 것이라면, 추가 잉여가치는 자본가들 사이에서 이익의 재분배가 일어난 것이다. 흔히 자본가들은 잉여가치율대신 이윤율(m)을 따진다. 이윤율(m=w-k)은 생산물의 가치(w)에서 비용가격(k=c+v)을 뺀 것이다. 그럼에도 마르크스가 잉여가치를 따지는 것은 비용과 이윤만을 가지고 따질 때 노동과의 관계는 사라지고 이윤이 자본 스스로의 운동으로 창조된 것이라는 환상을 품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다시 말해 자본가가 원하는 것은 가치가 아니라 잉여가치이고 노동이 아니라 잉여노동이란 것을 이해한다면 이윤이나 이윤율을 사용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또 마르크스는 이런 노동생산력 증대를 강화된 노동으로 이해했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연장된 노동의 형태를 취하고 상대적 잉여가치는 강화된 노동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자본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복리가 아니라 이윤만을 목적으로 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노동생산력을 증대함으로써 노동력가치의 상대적 비중을 줄이는 방법, 즉 상대적 잉여가치를 올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작업방식의 변화와 기계의 변화가 그것인데 저자는 작업방식의 변화가 이 책 7권의 주제라면 기계의 변화는 8권의 주제라고 말한다. 작업방식의 변화란 일정규모 이상의 노동자가 모여 ‘함께’ 일하는 것, 다시 말해 협업하는 것을 말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협업함으로써 자본가가 얻는 효과는 세 가지로 평균노동의 실현, 생산수단의 절약, 그리고 추가생산력의 창출이 그것이다. 이렇게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마르크스는 전체노동자 혹은 결합노동자라 했고 저자는 거인노동자라 부른다. 그리고 거인의 노동력에 대한 임금은 개별 노동자들에게 지불되지 않고 자본가의 차지가 된다. 노동자 추가생산력의 크기는 거인노동자가 얼마나 온전한 형태로 출현 하는가 즉 노동자들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결합하느냐에 좌우된다. 마르크스는 이를 위해 자본가의 지휘가 필요하며 이 지휘는 최대한의 노동을 짜내 노동생산력을 증대코자 하기 때문에 착취이며 억압을 띨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공장의 자본가는 지휘자이자 진압봉을 든 경찰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협업은 언제나 자본주의적 생산약식의 기본 형태이며, 따라서 자본주의적 협업은 전통적 협업의 발전 형태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의 생산방식은 매뉴팩처이다. 매뉴팩처는 생산과정에 기계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사람의 손이 주요한 노동수단이었다. 마르크스는 매뉴팩처가 두 가지 형태로 발생한다고 보았는데 하나는 서로 독립된 수공업 부문의 노동자를 하나의 작업장에 모으는 이종적 매뉴팩처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한 업종의 여러 수공업자를 한데 모은 유기적 매뉴팩처이다. 그리고 어떤 매뉴팩처가 되었든 간에 노동은 기본적으로 분업에 기초한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분업은 노동자들의 노동이 부분노동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들을 부분노동자라 부른다. 그 결과 노동자는 독립성을 잃게 되고 그만큼 유능한 매뉴팩처 노동자, 즉 숙련공이 된다. 이는 노동자가 전체 생산 메커니즘의 한 기관으로 전락하여 기계가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 가지 일밖에 하지 못하는 분업은 노동의 종류뿐만 아니라 등급의 분화를 촉진하고 노동의 가치하락에 기여하게 된다. 당시의 정치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매뉴팩처를 두고 사회적 분업이며 자연발생적인 분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사회적 분업이 독립된 다수 생산자를 전제로 한다면, 매뉴팩처 분업은 자본가에게 철저하게 예속된 부분노동자들 간의 협업이라며 매뉴팩처 분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특유의 창조물이라고 강조하며 자본가들의 이중성을 비판한다. 결론적으로 매뉴팩처는 자본의 원리 내지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 중 하나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방법이라는 것이다. 착취사회에서는 진보도 이렇게 착취의 진보가 되고 만다.
부분노동자들이 숙련되어 갈수록 이들의 저항도 거세진다. 거인노동자는 언제든 믿음직한 일꾼에서 무서운 투사로 돌변하기도 한다. 공장은 자본가가 전적으로 지배하는 공간임에도 매뉴팩처 생산형태에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본가들은 또 다시 고민한다. 그때 작업장 밖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있다. 저자가 다음 권에서 다루는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한 두 번째 방법 기계이다. 기계는 어떤 식으로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릴까? 다음 권을 읽어야겠다. |
![]() <가내수공업에서 매뉴팩처 공장으로 노동자들은 일터를 옮겨갔다> (출처: 나무위키)
홉스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만인의 주권을 한 사람(국왕)에게 위임하여 통치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만인은 각자를 위해서 투쟁적일 뿐이니 '정치전문가'인 국왕에게 주권을 일임하고 감시하는 역할로 물러나는 것이 국가를 위해 바람직하다며 초기 형태의 '사회계약론'을 주장했더랬다. 그런데 '매뉴팩처 시대'가 도래하면서 '거대공장'이 만들어지고 가내수공업에 머물러 있던 노동자를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듯 흡수하여, 마치 '한 사람의 거인'처럼 노동자들을 일사분란하게 일하도록 만들었다. 애덤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분업'을 통해서 생산을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따로' 일을 하는 난쟁이 노동자가 아닌 '일사분란'하게 공동의 작업을 해내는 '거인 노동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일의 효율적인 면에서 '거인 노동자'의 탄생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대량 생산체제를 구축해서 소비자에게 더 많이, 더 싸게 '상품'을 공급할 수 있으니 대단한 효율인 셈이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자본가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렇다. 노동자의 처지로 '거인 노동자'를 보았을 땐, '동일한 시간'을 일하며 생산량을 극대화하는 효율성을 낳았는데도 '임금'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아무런 이득도 없는 '노동 방식'이었던 셈이다. 노동자는 별다른 생산효율성을 얻지 못하고 자본가의 배만 불려주는 이런 방식의 착취는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자본가들은 '이윤창출'을 위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또 다른 잉여노동'을 찾아냈다. 이전의 '천재성'이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늘리는데 혈안이 되었다면, 이번의 '천재성'은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건드리지도 않고 '잉여가치'를 창출해내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나눌 수 있다. '필요노동시간'은 노동자가 받는 임금만큼의 생산을 한 시간이고, '잉여노동시간'은 노동자가 받는 임금을 초과한 만큼의 생산을 한 시간이다. 이를 더 쉽게 표현하면, '필요노동시간'은 자본가가 본전을 챙긴 노동시간이고, '잉여노동시간'은 자본가가 착취로 챙긴 노동시간이란 말이다.
그래서 자본가는 '잉여노동시간'을 최대한으로 늘리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건강이나 복지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루 16시간이고, 20시간이고, 필요하다면 연장근무를 통해서 40시간까지도 '합법적 노동시간'으로 만들어서 '잉여노동'을 늘려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체 노동시간'을 늘리지 않고도 '필요노동시간'은 줄이고, '잉여노동시간'을 늘리는 천재적인 발상을 해낸 것이다. 바로 일사분란하게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거인 노동자'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의 전부'가 아닌 '부분 노동'을 시키려 한다. 왜냐면 '분업'을 해야만 노동생산성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인 노동자들은 '전체의 공정'으로 나누어서 각자의 분업을 특화해서 할 뿐이다. 하나의 바늘을 만들기 위해 '철사를 자르는 사람'은 자르는 작업만, '구멍을 뚫는 사람'은 뚫는 작업만, '뾰족하게 가는 사람'은 가는 작업만 하게 된다. 이렇게 한 가지 작업에만 오랜 시간 하다보면 '신체가 특수하게 변해 버린 사람'이 된다. 쉽게 말해, '가위질을 잘 하는 노동자', '망치질을 잘하는 노동자', '숫돌을 잘 돌리는 노동자'로 점점 변하고 만다. 자신이 맡은 공정은 누구보다 잘하는 '전문가'가 되지만 다른 공정의 작업을 할 수가 없는 '불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단순 반복을 위한 작업에 특화된 '신체변형 노동자'가 되어 버린 뒤에는 노동의 보람이나 즐거움 따위는 느낄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노동의 가치'가 현저히 떨어져 버리고 만다. 커다란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노동자의 삶은 어떻게 될까. 하루가 다르게 피폐해지고 빠른 속도로 건강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더구나 힘들게 노동한 대가인 '임금' 또한 형편없다. 빈곤에 빠진 노동자계층은 어느새 자본가들이 마련해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니, '안달'이 아니라 '생존'일 것이다. 지금 일하고 있는 노동자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고도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을 하는 열악한 환경에 처해버린 노동환경이 자본가의 거대한 공장 '매뉴팩처'를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자본가들이 돈을 버는 길은 '상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은 '비싼 상품'이 아니라 '많은 이윤'인 탓에 상품을 '고가'에 파는 것이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고부가가치', 다른 말로 '고잉여가치'였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값싼 상품을 마구 만들어내는 '값싼 노동력'이 뒷받침이 되어야 했으며, 더 많고 더 넓은 시장의 확대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일손을 덜어주고, 안락한 노동환경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새로운 기계'를 도입하면서도 '노동강도'는 절대 낮출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아무리 힘든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혁신적인 기계'를 내놓는다고 해도 자본가들은 이런 기대를 허물어뜨리고 '고잉여가치'를 위해서 박차를 가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지취자 역할'만 맡는다. 이를 테면, 양계장 주인은 암탉의 달걀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방법을 고려하며 24시간 '백열등'을 켜놓는 것 대신에 '적색 LED등'으로 교체하는 것에 머뭇거리지 않지만, 늘어난 달걀 생산량만큼 지치고 힘들 암탉의 건강증진을 위한 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왜냐면 양계장 주인은 달걀을 직접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백열등'일 때보다 '적색 LED등'으로 교체하면 한 달에 약 8000만 원의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결과를 보면 더욱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자본가는 거인 노동자의 협업을 지휘하면서 '함께' 노동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리가 CEO라고 부르는 이들의 평균 연봉은 일반 노동자들의 약 40배나 된단다. 삼성전자의 경우에는 그 격차가 200배가 넘었고, 미국의 기업은 무려 270배 이상일 정도였다고 한다. 노동자간의 임금 차이는 그에 비하면 '새 발의 피'보다 훨씬 적었던 것을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에서 일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노동자일까? 아님 CEO일까? 물론 CEO도 기업을 운영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기업을 운영하는 일이 '전체 이득의 대부분'을 가져도 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걸까? 과연 CEO의 몫은 정당한 걸까? 혹시 '거인 노동자의 몫'을 공평하게 나누어주지 않고 독차지한 것은 아닐까? 마르크스는 이를 두고 '거인으로 일하고 난쟁이로 지불받는다'고 표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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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은 임금인상 요구에 대해 여러가지 거짓말을 합니다. 경제사정과 경영난 등 듣다보면 그런가 라고 충분히 속을만한 이야기들이죠. 개별사업장 뿐만아니라 국민 전체에 대한 거짓말도 종종 자행됩니다. 이런 거짓말은 각종 도표와 조작된 통계,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노동자들의 판단력을 마비시킵니다. 하지만 이 전집은 이러한 거짓말을 점점 설자리를 잃게 만듭니다. 물론 노동시장은 자본 입장에서는 국제적인 선택이 가능한 문제이므로 일국의 경제는 임금수준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이제 전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해야 할 때입니다. 아직은 이 전집을 모으고 있는 과정이고 예비 작업으로 일반 경제학 교과서와 국제무역, 환율에 대해 공부하고 있지만 그 공부가 끝나면 곧 자본 시리즈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