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여행책은 그곳이 어디든 읽는 사람으로 하여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기 마련인데 이번엔 시베리아다. 6개월간 세상과 단절된 채 2월의 한겨울부터 7월의 여름까지 바다만큼 넓은 바이칼 호수 옆 산림지대 외따로 떨어진 작은 오두막에서의 은둔 생활. 월든을 생각나게 하지만 생활 조건은 훨씬 가혹하다. 겨울엔 영하 30도를 오르내리고 가까운 마을은 100km도 더 떨어져 있고 이웃이래야 하루 종일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산림감시인의 오두막이 전부인 곳,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은 왕래가 있기 마련이고 6개월간 다양한 곳을 방문하기도 하고 손님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혼자 고립되어 있긴 하지만 문명과 완전 단절된 것은 아니다. 식표품과 태양열 전지를 비롯해 현대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물품들도 다수 있어 음악을 듣거나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한가로이 여가를 보내기도 하지만 장작을 패거나 필요에 따라 오두막을 보수하고 물고기를 낚는 등 혼자 살아남기 위해 해야 꼭 해야 할일도 많다. 물론 시베리아니만큼 보드카도 빠지지 않는다. 절대 고독과 절망적인 은둔 생활을 상상했지만 그런 나날들만 이어진 것은 아니다. 여행 베테랑인 작가가 은둔 성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파리지앵에 친구도 많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듯 한데(실제로 먼 곳에서 오두막으로 여러 친구들이 찾아온다) 왜 6개월씩이나 혹독한 시베라아에서의 은둔을 결심했을까.
p118
나는 너무 수다스러웠다 나는 침묵을 원했다 밀린 우편물과 만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로빈슨 크루소를 시샘했다 파리의 내 집보다는 여기가 훨씬 더 훈훈하다 장 보는 일이 지겨웠다 마음껏 소리지르고 벌거벗고 살고 싶었다 전화와 각종 모터 소리들이 끔찍이도 싫었다
하지만 시베리아에서의 은둔은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다. 수많은 상념과 철학적 생각이 떠도는 에세이지만 이 은둔 생활은 강한 정신력과 의지, 그리고 육체를 필요로 한다는 걸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부럽다. 어쩌면 그걸 실천할 수 있는 그 의지와 육체를 부러워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 달 정도 만이라도 이런 비슷한 흉내라도 내서 어딘가에서 사람들과 문명에서 떨어진 채 책과 음악만 들으며 사람 하나 없는 공간을 배회하고 산책하며 보냈으면 싶은 헛된 꿈을 꾸게 만든다. 희망은 시베리아에 있는 걸까. 시베리아를 꿈꾸는 그 마음에 있는 걸까? |
|
11월 중순부터 다음 해 2월까지는 호수가 꽝꽝 얼어 붙어 자동차 주행도 가능하다는 바이칼 호수의 겨울 장관은 생각만 해도 몸을 오싹 전율케 한다.자연 오염이 되지 않은 바이칼 호수는 밑바닥이 청량하게 내비칠 정도로 맑고 깨끗하며 자연 환경도 신이 내려 준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북위 54˚ 동경 108。에 위치해 있는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고 깊은 호수이기도 하다.
희뿌연 먼지와 각박한 삶을 살아 가는 현대인들에게 바이칼 호수는 지친 몸과 마음을 치료하고 삶의 재충전을 위해 떠나 그 곳의 나그네가 되어 바이칼 호수의 멋진 자연 경관,생태계의 모습 그리고 다양다종의 동.식물과의 만남을 통해 물질문명 속에 폐허가 된 정신을 위무하고 승화시키는 멋진 시간이 되고,삶과 일 속에 잃었던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하면서 고요한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연과 호흡을 하고 극히 미약하고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숭고한 자연 앞에 겸허한 자세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
프랑스 에세이스트인 실뱅 테송작가는 지구상에 그 많은 자연경관 가운데 바이칼 호수를 선택하여 몸과 마음을 그 곳으로 옮겨 놓는다.집과 고국을 떠나 장장 6개월 간을 바이칼 호수 북쪽 언저리에 오두막 한 칸에서 바이칼 호수의 견문기를 들려 준다.입고 먹고 자기 위한 최소한의 장비,부식물과 그가 마음의 벗으로 삼고 있는 몇 십권의 도서들 그리고 철따라 변화해 가는 바이칼 주변의 경관의 변화,그 곳에서 만난 러시아 친구들,동식물들과의 만남 등이 자연스러우며 맑은 영혼을 담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어 신선하면서도 울림이 있다.
영하 32도,수정같이 투명한 하늘,시베리아의 겨울은 얼음의 천장,불모(不毛)이며 순수하다.
인간의 물질문명이 침투하지 않은 덕분에 그 혜택은 모조리 인간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한다.우거진 산림과 초봄이 되면 나타나는 어슬렁거리는 곰,그리고 호수 위에서 재미삼아 낚아 올리는 물고기들의 파닥거림과 투박하지만 이방인을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 주는 바이칼 주변 이르쿠츠크인과의 만남이 작가의 일지 속에 솔직하고도 섬세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그가 원하는 것은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아나키 그리고 호수라고 한다.
작가는 6개월 간 거처했던 오두막을 이렇게 써 내려 간다.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나의 오두막은 알이 되기도 하고,자궁이 되기도 하고,관(棺)이 되기도 하고,나무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타자가 없으면 더 이상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그가 말하는 자유는 현실적인 삶에서 오는 무제한의 구속과 갈등,스트레스가 원인이 아닌가 싶다.그러나 그는 부인에게 남편으로서의 신뢰를 얻지 못한 탓인지 시베리아 오두막 생활 가운데 이별의 통보를 받게 된다.
이 글은 에세이 부문 메디치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진정한 방랑자는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고 자기가 버린 것에 대해서는 뒤돌아 보지 않으며 바깥의 부름에 대답할 수 있는 자라고 말한다.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너른 바이칼의 장관과 자연 생태계가 잘 보존된 바이칼 주변의 산림과 생태계는 결국 인간에게 마음의 평화와 삶의 희망을 안겨 주는 보고(寶庫)가 아닐까 한다. |
|
그가 떠나온 프랑스 파리, 그리고 그가 찾아간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우연히도 나 역시 이 두곳을 다 가본적이 있다. 그리고 그 두곳의 인상을 이야기하라면..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너무나 고요하여 아름답다.. 라고 할까? 첫인상은 달랐지만, 결국 나에게 남은 인상은 뜩같았던.. 두 곳에서 생활을 하며 글을 쓴 이 책의 저자가 조금은 부럽긴 하다. ㅎ
![]() 어쨋든 프랑스의 뛰어난 여행작가이자 에세이스트라는 수식어 답게 실뱅 테송의 일기는 고요한 바이칼 호수에서의 은둔의 기록이고 또 한편으로는 바이칼 호수가 나의 첫인상처럼 고요함을 넘어선 적막함으로만 감싸여져 있다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바이칼은 몽골어로 자연을 뜻하는 바이갈에서 유래되었다는 말이 딱 정답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의 글을 읽으며 내내 머리속에서는 고요하기만 했던 바이칼 호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시간이 멈추고 공간이 갇혀버린 듯한 그 곳에서 실뱅 테송이 책을 읽고 사색하는 시간들을 간접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워다. 그가 읽는 책들에 대한 이야기도.. 어쩌면 직접 자연속에서 홀로 살아가며 자연과 인간을 다룬 책과 함께 하기에 더욱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혼자 있으면 나 자신의 성분만을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라는 루소의 말을 실제로 경험하며 깨달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 특히.. 그가 갖고 있는 사람과 자연에 대한 태도가 나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자연을 관조하고 필요한 것을 얻지만 그것을 복속시키겠다는 야심은 품지 않는다는 은둔자, 은둔자로 즐길수는 있지만 개척자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오두막.. 그가 여러가지로 정의하던 은둔자와 오두막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난 한번이라도 그런 자세로 세상에 서있었던적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
|
늦은 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천.천.히. 읽어주고 싶은 책입니다. 오랫만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떠나고 싶다", "뛰쳐나가고 싶다"고 외치는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한 친구는 가족 모두가 잠든 사이에 무조건 차를 끌고 나와 강남대로를 달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아들 녀석 도시락 걱정에 새벽녘에 집에 들어갔는데, 가족이 아무도 모르더라며 허탈하게 웃었습니다. 벗어나고 싶다, 도망가고 싶다, 숨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한 번쯤은 느끼며 살 것 같은데, 시베리아의 숲에, 그것도 영하 30도를 왔다 갔다 하는 한 겨울에, 나 홀로 오두막 살이를 선택한 한 남자가 있습니다.
37살의 나이에 바이칼 호숫가에 위치한 한 오두막에 둥지를 틀었던 이 청년(?)은 여행 중독자인가 봅니다. "프랑스 문단의 뛰어난 여행작가이자 에세이스트"라고 소개되는 이 남자는 "어느 공항 터미널에서 죽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시간과의 해묵은 갈등을 해결하고 싶었다. 전부터 걸을 때면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다는 사실을 느꼈다. 또 여행의 연금술은 각 순간의 농도를 높여준다는 사실도 느꼈다. 길에서 보낸 순간들은 다른 순간들보다 덜 빠르게 흘러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열병에 걸려버렸고, 끊임없이 새로운 지평선들을 찾게 되었다. 그곳의 모든 것이 탈출과 출발을 권유하는 공항들에 열광하게 되었다. (...) 내 여행들은 탈출로 시작되어 결국에는 시간과의 경주로 끝나버리곤 했다"(37).
그리고 우연히 바이칼 호숫가에 위치한 한 오두막집에서 사흘을 보내게 된 이 남자는 "내게는 바로 이런 삶이 필요해"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여행이 내게 더 이상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 즉 평온함을 이 움직이지 않는 삶에서 얻을 수 있을 터였다(38). 그렇게 시베리아의 겨울과 봄, 2월부터 7월까지 6개월간 오두막 생활을 하리라 맹세했고, 그는 그 맹세를 지켰습니다. "야생의 숲에서 즐겁게 사는 것이 도시 한복판에서 시들어 죽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38)고 생각한 그는, "세계 최대의 담수호 기슭의 아름다운 숲에서 사는 사치"를 누립니다. "떠나는 것"에 중독되어 있었던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용기'가 아니라, 시베리아 숲에서 살아갈 단순한 '준비'뿐이었습니다.
시베리아 숲으로 찾아든 이 은둔자는 은둔자의 생활을 만끽합니다. 거추장스럽고 천박한 형편없는 취향의 문명의 때를 걷어내고, 신선하고 찬란한 아름다운 자연으로 그의 일상을 가득 채웁니다. 시베리아의 숲은 그에게 적응해야 할 곳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인구과잉과 온갖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오두막에서의 삶, 그곳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삶의 단순화였습니다. "오두막은 단순화의 왕국이다. 소나무 가지들을 지붕으로 삼는 삶은 본질적으로 몇 가지 활동으로 축소된다. 번잡한 일상잡사들로부터 해방된 시간은 휴식과 명상과 소소한 줄거움들로 채워진다. 해야 할 일들의 가짓수는 축소된다. 책 읽기, 물 긷기, 장작 패기, 글쓰기, 차 따르기 등이 전례가 된다"(41). 친구들은 그에게 "무료함은 너의 치명적인 적이 될 거야! 넌 심심해서 죽고 말 거야!"(109) 경고했지만, 은둔자는 단순한 삶이 가져다주는 자유와 숲이 주는 아름다움 속에서 마음껏 유영하며 삶의 생기로 충만합니다. "오두막은 간소함의 기반 위에 하나의 삶을 세우기 위한 완벽한 장소이다. 은둔자의 간소함이란 거추장스러운 물건들과 인간들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전의 잡다한 욕구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은둔자의 사치는 아름다움이다. 그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든지 더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 그는 기술이 창조하는 욕구의 굴레에 갇히지 않는다"(47).
은둔자가 시베리아 숲에서 발견한 자유는 어쩌면 '시간'으로부터의 자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은둔자의 고백을 읽으며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의 실체, 그것이 바로 '시간'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고, 드넓은 공간이라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나는 시간을 쫓아 달렸다. 그것이 지평선 저 끝에 숨어 있다고 믿었다. "시간이 너무도 급히 흘러가는 것을 그것의 강렬한 사용으로 보상할 것), 이것이 내가 달아나는 시간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자유로운 인간은 시간을 소유한다. 공간을 지배하는 인간은 단순히 강할 뿐이다. (...) 오두막에서는 시간이 진정된다. 그것은 착한 늙은 개처럼 당신의 발치에 엎드려 있고, 어느 순간 당신은 그것이 여기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된다. 내가 자유로운 까닭은 나의 나들이 자유롭기 때문이다"(75-76).
"친구야, 우리도 숲으로 한 번 떠나볼까?" 웃으며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숲은 혼자서 가야 하는 곳입니다. 그럴 용기가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각오해야 하는 여행이 될지도 모릅니다. 3월 17일, 서른일곱의 이 남자는 오두막 생활을 시작하며 자신에게 세 가지 의문을 품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견뎌낼 수 있을까? 나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다른 존재로 바뀔 수 있을까? 왜 나는 그리운 것이 전혀 없을까?"(111) 그런 그가 숲 속에서 경험한 가장 큰 고통은 아름다운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의 부재였고, 아내로부터 헤어지자는 다섯 줄의 문자를 받고 무너져내렸습니다. 숲 속에서 한 없이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다가, "이별 메시지를 받고 난 후 가장 슬픈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친구에게 꼭 읽어주고 싶은 부분은 7월 26일의 일기입니다. 왜 숲에서의 생활이 시작되는 시점이 아니라, 그곳에서의 생활을 마치며 쓴 일기를 읽어주고 싶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의 자유는 6개월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 있었다는 것, 언젠가는 돌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있었기에 그의 6개월이 그토록 아름답고 자유로웠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우리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하는 일상, 떠나고 싶어하는 현실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사랑스럽게 다가옵니다. 문명의 대비가 존재하기에 숲의 숨결을 호흡하고 달의 운행을 좇는 숲에서의 삶이 특별해지는 것이라고요. 이 은둔자는 숲에서의 생활은 받아들임이라고 했습니다.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반항하는 인간은 쓸데없는 것이다. 숲의 나라에서 의미가 있는 유일한 미덕은 '받아들임'이다"(70). 받아들임은 숲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여기 이곳에서도 필요한 미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은둔자는 오두막 생활을 하며 시간에 경의를 표하는 세 가지 방식을 배웠습니다. "글쓰기, 그리기, 고기잡기"(263). 벗어나고 싶어를 외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것, 시간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식 배우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우리의 삶이 따분하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우리에게 있다. 세상이 칙칙한 잿빛이라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무미건조하기 때문이다. 삶이 창백하게만 보인다면? 삶의 방식을 바꾸어보자. 오두막에 가보라. 만일 숲속으로 들어갔는데도 여전히 세상이 칙칙하고 주변 사람들이 견딜 수 없이 느껴진다면, 판결은 명확하다. 당신 자신이 끔찍한 것이다! 그렇다면 필요한 조처를 취하라"(237-238).
|
|
2011년 메디치상 에세이 부문 수상작 [희망의 발견 - 시베리아의 숲에서]는 여행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실뱅 테송의 작품이다. 그는 물질문명에서 한발 빗겨선 삶을 희망하고 그 장소로 바이칼 호수를 선택한다. 그는 거기서 자신이 기거할 오두막 한채에 자신의 삶을 맡긴채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인간 또한 위대한 자연의 한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일기형식으로 이글을 적는다.
그는 6개월동안, 계절로는 겨울과 봄을 이곳 오두막에서 지내게 된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더 누리려고 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이상하리만크 바보같은 선택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선택은 우리에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일기 형식의 이 글을 읽으면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이 떠오른다. 소로우의 삶과 실뱅 테송의 삶, 또한 그 둘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숲속의 삶은 우리에게 부채를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우리는 공기를 마시고, 과일을 먹고, 꽃을 따고, 강물에 멱을 감으며 살다가는, 어느날 우리의 행성에 이 모든 것들의 값을 치르지도 않은 채로 죽어간다. 이 경우 삶은 뻔뻔스러운 무전취식이다." p 40
우리가 과연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이 자연의 섭리로 비쳐볼때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선뜻 답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늘 우리의 욕망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파괴하고는 있지는 않은걸까? 이 물음에도 답을 할수가 없다. 우리에게 자연은 너그러이 그들의 품을 내어주었고, 그들의 살점도 아낌없이 내어주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의 숨통을 끊으려고 달려들고는 있지 않은지 반성하게 된다. 오두막으로 찾아와주는 박새한마리에 감사하고, 아름다운 눈의 결정을 보면서도 감사해 하는 삶을 보여주는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으리라.
"이미지에 강박된 세계는 삶에서 발산되는 신비한 것들을 맛보지 못한다. 어떤 경치 앞에서 우리의 마음에 떠오르는 그 어렴풋한 추억들을 그 어떤 사진기가 포착할수 있을까? p 112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움을 보고도 우리는 그것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채, 이 아름다움을 한장의 사진으로 추억하려고 부산을 떨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렇게 부산을 떠는 사이에 아름다움은 온데간데 없고, 사진을 찍으려는 한사람의 욕망만이 남아 있게 된다. 우리의 삶이 이렇지은 않은지 생각해보게 한다. 아름다움 그 자체, 행복 그 자체, 감사 그 자체를 생각하기 보다, 그 넘어 다른 부수적인 것들에 얽매여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저자는 오두막에 난 창문하나로 물안개의 아름다움, 새들의 향연들을 보고 느낀다.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위해서 말이다. 보이는 것 뒤 이면에, 우리가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진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은 37세의 작가가 문명세계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을 우리에게 아주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읽었을때의 감동을 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창문 밖의 풍경만이 이 세상의 전부이고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속담처럼 "우물안 개구리"의 모습일 것이다. 내가 가진 창을 통해 바라보는 모습이 있듯, 전혀 새로운 곳에서 바라보는 세계가 있음을 알고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내 삶의 한부분이 온전히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모든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야 할 듯 하다.
"여행의 그의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테송은 "Wanderer(방랑자)"라는 괴테의 별명 중의 하나를 빌려서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고, 자기가 버리라는 것에 눈길 한번 던지지 않고 바깥의 부름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진정한 방랑자로 살 수 있다" p 310(역자후기중)
바이칼 호숫가 오두막집에서 생활하면서 저자는 아내로 부터 이별 통보를 받기도 한다. 그는 새로운 삶의 장소에서 희망과 기쁨과 행복도 만났으며, 이겨내기 힘든 엄청난 시련과 아픔도 겪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삶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깨달아 간다. 그는 그가 그토록 바라는, 그가 이 생활을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된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분이듯, 기쁨과 슬픔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 아니던가? 결국 저자 실벵 테송이 시베리아 숲, 바이칼 호숫가 오두막집에서 얻은 것은 바로 "희망"이였던 것이다.
|
|
희망의 발견:시베리아의 숲에서 저자:실뱅 테송 번역:임호경
프랑스인의 쓴 책을 읽어 본적은 없는 것 같다. 이름도 생소하고 거기다 시베리아라, 어떤 느낌의 책일지 사실 책장을 넘기기 전에는 그렇게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펼치면서부터 흥미진진한 게 오랜만에 찾은 나의 도서보물 목록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그는 시베리아 오두막으로 가져갈 음식들을 쇼핑하면서 15가지나 되는 종류의 케첩을 놓고 이런 것 때문에 이 세계를 떠나는 거라고 했다. 올해 다이어리를 인터넷으로 고르고 고르다 포기한 나의 심정도 그랬다. 바이칼 호수를 앞에 두고 영하 30도의 날씨와 강풍 속에서도 그는 오두막 난롯불 앞에서 식사를 하고 보드카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그가 가져간 도서목록들 중 내가 읽어 본 책은 하나도 없는 듯하다. 하지만 그가 거론했던 잭 런던, 그레이 아울, 알도 레오폴드, 페니모어 쿠퍼 등 야생과 자연을 그렸던 이들의 작품은 나도 한번 접해 보고 싶은 욕심이 난다.
그의 오두막에서 조금 떨어지긴 했어도 이곳 타이가의 밀렵 감시원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함께 보드카와 맥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는 이들을 약간은 귀찮아하는 듯 하지만 그래도 맘은 잘 통하는지 만나기만 하면 술들을 그렇게 마셔대는데 내가 볼 땐 다들 알코올 중독이 아닌가 싶다. 또한 그의 오두막에는 지나가던 관광객들도 찾아오는데 호주의 한 여자는 그에게 간단한 영어로 티비가 있냐? 자동차는 있냐? 음식을 구입할 마을은 있냐? 저 궤짝에 있는 책들은 당신이 쓴 책들이냐? 는 식의 질문에 그는 간단히 "NO"로 일관하는데 이 장면이 난 너무 웃겼다. 인간들의 세상에서 막 나온 관광객과 인간 세상을 막 등진 그와의 사이에 커다란 벽같은 게 느껴져 그의 대답은 모든 것을 달관한 수도승 같았다.
이렇게 평화롭게 자연을 만끽하며 지내는 그에게 청청 벽력같은 아내의 이별 통보를 받게 되고 그는 아주 침울해 한다. 함께 지내던 강아지 2마리가 아니었으면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부부 둘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현실적으로 봤을 때 이런 남편은 부인을 행복하게 해주진 못할 것 같아 부인이 그런 결정을 했을 거란 추측이 든다. 이 책으로 2011년 메디치상 에세이 부문에서 수상했다는데 그 뒤 둘은 화해를 했을지 궁금해진다.
|
|
나는 바이칼 호숫가, 세상과 멀리 떨어진 곳에 오두막 한 채를 얻었다. 외따로 떨어진 그곳에서 나는 행복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행복에 이른 것 같다. 장작 난로 하나, 개 두 마리, 그리고 호수를 향해서 열린 창문 하나로 나의 삶은 충분하다.-저자의 말 중에서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함께 있으면서도 그렇지 못한 시간. 그런데 이상한것은 가끔씩 혼자 있으면 너무 조용한게 오히려 불안하고 잠깐 동안의 외로움을 견딜수 없어서 텔레비젼 소리라도 크게 키워놔야 안심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도 완벽한 나만의 공간, 혼자만의 시간을 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지... 그동안 알게모르게 내 안에 잠재해있던 소망 하나를 대리만족할 수 있는 시간을 꿈꾸며 선뜻 손을 내민 책이었다. 고맙게도 완벽한 조건, 경험, 생각, 일상들로 가득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새해 첫 주를 보냈다. 만약 내가 장소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너~~무 추운 시베리아가 아닌 다른 곳으로 정했을것이 분명하지만, 저자와 함께 지내면서 혹한의 시베리아여야하는 까닭을 충분히 이해했고 공감하고 즐기게 되었다.
얼마 전 실수를 핸드폰을 사무실에 두고와서 빈 손으로 주말을 보낸 적이 있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고 무료함에 어쩔줄 몰랐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자유, 여유를 되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족들 모두 핸드폰이 있으니 집 전화마저도 없애버렸기에 가까운 몇몇 사람외엔 나와 연락할 길이 없어진 것이다. 불쑥불쑥 혹시나하는 마음에 불안하고 궁금해질 때도 있었지만 견딜만 했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켰을 때 시간이 지난 문자와 카톡들이 줄줄이 따라와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어쩌면 주말내내 아무도 날 찾지 않았을 수도 있지않은가.
저 작은 창을 통해서 호수와 하늘 쳐다보기, 무심하게 햇살따라 시선 움직이기, 그저 책만 읽기, 주변 숲 속 탐색하기, 장작패기 등등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없는 숲 속에서 저자가 누릴수 있는 행복은 의외로 많았다. 나도 저자와 함께 필요한 생필품이 뭘까 생각해보았고, 6개월이란 긴 시간동안 읽을 책 목록도 적어봤다. 작은 오두막에서 나와 함께 지낼 최소한의 물건들이지만 내 목숨과 같을 목록들을. 저자가 작은 오두막 창으로 꽁꽁 얼어붙은 바이칼 호수, 하늘을 내다보고 시시각각 변해가는 숲을 바라보듯, 나는 넓은 거실 창을 통해 하늘과 거리를 보았고, 추위라면 질색하니까 분명히 좁은 오두막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들에 젖어 혼자 웃기도 하며 함께 보낸 시간이었다. 처음 책을 펼쳐들었을 땐 사진이 한 장도 없음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에서 봄을 맞기까지 그와 보낸 단조로운 시간 속에서 함께 누렸던 모습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게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
로빈슨 크루소가 28년간 무인도에 있으면서 그 속에서 구출될 수 있다는 희망의 끝을 놓치 않고 있었다면 이 책의 주인공은 의도적으로 바이칼 호수 옆 오두막에서 혼자 지내면서 사회와 그 속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그리고 자연을 대하는 법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놓치지 않고 자신이 갖게 된 상처에 대해 치유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였던 6개월 동안의 이야기를 일기형식을 빌려 엮어내었다.
그는 왜 은둔자가 되고 싶어한 걸까?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그냥 단순히 자신이 사회속에서 얻게된 상처를 치유하고 싶어서 의도적인 은둔자가 되거나 아나키스트가 되고 싶어 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그는 역동적이고 행동하는 자연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필요하게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얽매는 사회적 규제 등 인간성을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자연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것, 그는 숲이 인간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면서 숲에서 내적자유의 감정을 되찾고자 했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던 것같다. 내적자유의 감정을 찾아보는것.. 그 내적자유를 찾는 것을 성공하고 6개월이 지난 후에도 계속 그 자유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한번 찾아본다는 것.. 그것에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나 역시 좀 더 자유로운 생활을 위해서 서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조그마한 소도시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다. 뭔가에 얽매여서 살기 싫었는데 싫다고 생각하면 할 수록 늘 그 생활에 얽매여지는 것같다. 만화속 주인공 위에 말풍선처럼...
어쩔 수 없나보다. 인간이기에... 내적자유의 감정을 찾아보는 건 언제나 사회적 울타리 속에서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아마 그래서 실뱅태송도 6개월 후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지 않을까? |
|
실뱅 테송이 6개월 동안 살기로 한 바이칼-레나 자연보호구역 북부에 위치해 있는 오두막은 1980년대에 지질학자들의 대피소로 지은 집이다. 시베리아의 숲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또 어떤 용기가 필요한 일일까. 여행을 꿈꾸는 이들 중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한 번쯤 염두에 두지 않은 이 없다지만, 잠깐 스쳐지나가는 여행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개월을 혼자 숲으로 들어가 산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더군다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면, 이 6개월은 산다기 보다는 거의 자발적 고립이라고 해야 맞다. 프랑스 문단의 뛰어난 여행작가이자 에세이스트인 그가 굳이 시베리아의 고립된 오두막으로, 그것도 6개월을 살러간 까닭은 무엇일까. 문명과 비문명(이라 불리는 것들)이 교차 혹은 전복되고, 외로움과 쓸쓸함은 인간 본연의 성질이며, 행여 맞닥뜨릴 위험한 순간은 자연의 축복 아래 그저 또 하나의 추억이 되어버린다.
역사 속 유형지 시베리아. 누군가는 '자살하기에 기가 막히게 좋은 장소'라 하고, 쓸쓸하면서도 지독하게 아름다운 곳. 바이칼 호수의 물 위를 달리는, 광박한 대지, 창백한 미광, 수의 같은 얼음 위의 시베리아 겨울의 한복판에 떠있는 자동차. 이 책은 저자 실뱅 테송의 시베리아 겨울과 봄, 6개월에 관한 일상의 기록이자, 내밀한 일기이고, 꿈결같은 평온이다. 또 평화와 사랑을 상징하는 모든 것의 절절한 외침이요, 낙원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태의 에세이로, 몸과 마음이 다소 고생스런 여행 대신 읽으면 적절한 긴장과 안도, 고독과 행복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는 치유와 위안의 힘을 얻게 된다. 밤만이 존재하는 긴 겨울, 비로소 땅과 하늘이 깨어나 생명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호수의 봄. 방문객도, 이웃도, 도로도 없이 오로지 자연과 나만 존재하는 듯한 기운 속에서 그가 어떻게 6개월을 살았는지, 어떻게 생활하고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 가장 투명한 형태로 담았다.
장비와 양식은 물론 빼놓을 수 없는 가장 단순하고도 중요한 형태의 준비물이지만, 나는 책에 더 주목한다. 길고 긴 고립의 계절을 나기 위해서, 시간은 물론 공간의 의미까지 죽여야 하는 시베리아의 한겨울을 통과하기 위해 이보다 더 적절하고 정직한 방법은 찾을 수 없을테니 말이다. 명상과 공상과 상상의 시간들. 고립과 고독과 외로움과 쓸쓸함의 계절들. 오롯이 혼자인 공간들. 자연을 관찰하고 음식을 먹고 책을 읽고 잠이 드는 일련의 단순한 삶 속에 반복되는 일상과 통찰이 고스란히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게다가 훌륭한 에세이스트다운 문학적 통찰과 멘트, 문체까지 더해져 가려운 곳을 척척 긁어준다. 그는 [시베리아 숲에서의 6개월간의 체류에 대비하여 파리에서 공들여 작성한 이상적인 독서목록]이라는 이름으로 양초 불빛 아래 총총대며 단숨에 읽어내릴 평생의 리스트를 작성해왔다.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많기도 하고, 나로서는 솔직히 "시베리아+고립"이 아니라면 평생에 걸쳐 가능할까 싶은 목록도 종종 보인다.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바실리 페스코프, <아가피아의 소식>/미셸 트루니에, <방드르디>/미셸 데옹, <보랏빛 택시>/사드, <규방철학>/드리외 라 로셸, <질>/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트루먼 커포티, <냉혈한>/카뮈, <결혼>, <전락>/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카사노바, <회상록>/지오노, <세상의 노래>/보들레르, <악의 꽃>/제임스 M. 케인,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마이클 코넬리, <시인>/제임스 엘로이, <피어린 달>/제임스 해들리 체이스, <에바>/<스토아 철학자들>/대실 해밋, <붉은 수확>/루크레티우스,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미르체아 엘리아데, <영원회귀의 신화>/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콘래드, <태풍>/샤토브리앙, <랑세의 생애>/노자, <도덕경>/괴테, <마리엔바트의 비가>/헤밍웨이 단편소설집/니체, <이 사람을 보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상의 황혼>/그레이 아울, <마지막 변방의 사나이>/앙투안 마르셀, <외로운 오두막에 대한 시론>/휘트먼, <풀잎>/알도 레오폴드, <모래 군의 열두 달> /유르스나르, <흑의 과정>/<천일야화>/셰익스피어, <한 여름밤의 꿈>,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십이야>/크레티앵 드 트루아, <그라알 이야기>/B. E. 엘리스, <아메리칸 사이코>/소로, <월든>/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미시마 유키오, <금각사>/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카렌 블릭센, <아프리카 여인>
외부적인 것들이 차단되면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빙판은 물고기, 꽃과 수초, 수서 포유류, 절지동물, 미생물을 차단하고, 생명과 별들 사이를 가로막는다. 시베리아의 영하 30도 겨울 밤에는 오두막의 주철난로 하나가 생활의 중심, 세계의 축이다. 바슐라르가 <불의 정신분석>에서 했다는 말을 들어보면 이 춥고 삭막한 곳에서의 불은 가히 신의 축복처럼 여겨질 정도다. 나무 막대기 2개를 문질러 삼 부스러기에 불을 붙인다는 생각은 사랑의 마찰행위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인간이 섹스를 하다 불에 대한 직관을 얻었을 거라고 하는 부분은 흥미롭게 읽힌다. 세상이 온통 뿌옇고 깨끗하기에 나무들이 더 비스듬히 눕는 곳, 탁자 너머 유리창으로 언제고 가만히 앉아 몽상과 독서를 번갈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얼마나 황홀할까. 굽이치는 대지의 어깨에 걸린 은빛 모피 같은 겨울 숲에서 눈의 결정 보다 추상적인 환상에 더 목매는 인간의 사유성에 대해 의문하는 것은 덤이다.
시간과의 갈등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긴긴 추위와 밤과 싸우는 것 또한 간절히 원했다고는 해도, 야생의 숲에서의 삶이 온전히 행복하기만 할 것인가. 설경과 슈베르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저녁낚시 끝에 피우는 하바나 한 대, 단순화되는 삶의 아름다움은 시간을 해방시키고 휴식과 명상, 소소한 즐거움들로 시공간을 가득 채운다. 하늘과 땅, 오두막과 난로, 숲에 존재하는 혹은 보이지 않는 생물체와 나라는 존재만이 세계에 부어진다. 인간이 돌아가고 짐승이 나오는 시간은 언제일까. 단단하고 순수해 뵈는 얼음성 속에 갇힌 존재라는 이름, 음악 없는 숲에서 음악이 들려오고, 나무가 스러지는 소리,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짐승이 잠드는 소리가 귓가에 머문다. 시간은 멈추는 법이 없고, 은둔자는 시간을 붙잡지 못한다. 시베리아의 숲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 "나를 견딜 수 있을까?"에만 골몰한다. 자연이 얼마나 약속을 잘 지키는가에만 관심을 둔다. 겨울은 길고 밤은 배신하지 않는다.
기록은 찬란하게 남아 게으른 시간들을 초토화시킨다. 모든 밤들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파스텔톤의 대기와 강박적 독서의 깨달음, 해방된 시간과 자연의 평화를 일깨운다. 자유는 시간을 온전히 소유하는 것. 오직 나만을 시간이 통과해나가는 것을 응시하는 것. 죽을 때까지 오두막에 혼자 살게 될 날은 내 생애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시간을 나 혼자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자유, 자유를 위해 오두막에 자신을 고립시킨 젊은 에세이스트, 눈부시게 화려한 시베리아의 숲속 오두막과 바이칼 호수. 꽝꽝 언 얼음이 녹아 봄이 될 때까지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나는 은빛 세계를 상상하며 그의 일기를 읽는다. 이보다 더 좋은 주말은 한동안 없을 것 같다. |
|
은둔에도 요령이 필요하다. 항해에 나침반과 지도가 필요하듯 은둔에도 필요한 장비와 절차가 있다. 그리고 은둔의 목적과 의미를 보다 면밀히 추궁해야 한다. 스스로 물어야 한다. '과연 무엇을 위한 은둔인가?' 일반적으로 은둔은 문명을 멀리하여 대자연의 품으로 거침없이 뛰어드는 행위다. 그래서 은둔은 눈요기 여행도 아니고 낭만적인 방랑도 아니다. 은둔자는 일종의 겨울잠을 자는 칩거자다. 어쩌면 은둔은 한국인에게, 특히 한국 남자들에게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니다. 적어도 신체건강한 사내라면 군복무라는 2년의 은둔기를 보내기 때문이다. 도시와 학업으로부터의 시공간적 일탈 말이다. 다만 그다지 자발적인 결심이 아니라는 게 양심에 걸릴 뿐이다.
은거의 형식은 반항이요 저항이요, 그 내용은 고독이다. 속세에 대한 반항이 사막 신비주의자들의 고독를 불렀고, 권력에 대한 저항이 지하 아나키스트들의 고독을 불렀다. 그리고, 문명의 진보에 대한 고발을 위해 초절주의자들은 탈속적 고독을 자청했다. 고독은 평등하다. 그것이 고독의 가장 기본적인 미덕이 아닐까 싶다.
"도시에서는 자유주의자, 급진주의자, 혁명가, 부자 할 것 없이 누구나 빵과 휘발유를 얻기 위해서 돈을 내고, 세금을 납부한다. 반면 은둔자는 국가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그는 숲속에 파묻혀 거기에서 필요한 것을 얻는다. 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은둔자는 한 명의 놓친 손님이 되는 셈이다. 놓친 손님 되기, 혁명가들의 진정한 목표는 바로 이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구운 생선과 숲에서 따온 월귤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나키스트의 검은 깃발을 흔드는 시위보다 더 반국가적인 행위인 것이다."(132쪽)
삶의 재충천을 위한, 희망의 재발견을 우한 제2의 정착지인 은둔처를 과연 어디로 정할 것인가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 일단 산과 물, 추운 지방과 더운 지방, 동양과 서양 등, 은둔을 위한 지리적인 혹은 기후적인 좌표부터 설정해야 한다. 은둔이 도피적인 형태일수록 도시와 문명에서 가장 먼 곳을 찾기 마련이다. 프랑스 여행작가 실뱅 테송도 그러했다. 다만 따스한 남유럽의 휴양도시가 아니고, 아프리카의 사막지대도 아닌 혹독한 겨울로 유명한 시베리아 동남부의 바이칼 호반에 칩거하게 된 것이 다를 뿐이다. 저자는 2003년 처음 바이칼 호숫가의 오두막을 찾는데 그 때 반 년간의 은둔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7년 후에야 비로소 바이칼호 숲에서 6개월간 오두막 생활을 실행하게 된다. 우리는 바이칼호에 잘 모른다. 일단 물리적인 정보부터 적어보자. 바이칼호, 길이 700킬로미터, 너비 80킬로미터에 수심 1.5킬로미터. 2,500만 년 전에 형성. 겨울철의 얼음두께 1.2미터. 완벽한 고독을 위한 천연의 요새가 아닐 수 없다!
유난히 추운 임진년 겨울, 혹한기로 시작한 계사년 벽초에 이 책을 읽으니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을 보듯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 30도 이하로 내려가는 시베리아의 겨울밤이 연상된다. 그리고 나 역시 이렇게 고백하고픈 생각이 든다. "장작 난로 하나, 개 두 마리, 그리고 호수를 향해서 열린 창문 하나로 나의 삶은 충분하다"고. 고독한 오두막은 저자에게 일종의 온실이 된다.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온 불청객이 잠시 머물다 갈 수도 있고, 인간의 기척을 느끼려면 6일이나 걸어야 비로소 한두 명 찾게 되는 그런 곳이지만 말이다.
"몰아치는 폭풍의 격렬함에 비하면, 오두막은 한 통의 성냥갑일 뿐이다. 그것은 썪어 없어질 운명으로 태어난 숲의 자식이다. 그 벽을 이루는 통나무들도 빈터의 나무들에서 나온 것들이다. 주인이 버리고 떠나면, 숲의 부식토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 소박한 오두막은 한겨울의 혹한으로부터 거주자를 보호해주는 완벽한 은신처가 되어준다. 그리고 그것을 품어주는 주위의 숲을 흉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유르트와 이글루와 더불어, 러시아인의 오두막은 환경이 부과하는 시련에 대해서 인간이 내놓은 가장 아름다운 대답 중의 하나이다."(26-7쪽)
친구에게 둘러싸여 있어야 위안과 웃음을 찾게 되는 이들도 있지만, 반면에 고독을 만나야 비로소 위안과 평화를 느끼는 이들도 있다. 저자가 굳이 가장 가까운 마을과도 100킬로미터, 이르쿠츠크 시에서는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의 생활을 결심하게 된 것도 바로 고독을 통해 자기와의 내면과 직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물론 도수가 높은 술의 힘을 빌려서 말이다. 그것도 매일. 일기를 읽어나가며 저자가 술주정뱅이가 되는 것은 아닌지 살짝 걱정되었다. 날마다 독주를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려고 일부러 혹한의 눈보라와 얼음으로 뒤덮인 이 곳을 골랐나 싶었다.
여행 중독자는 은둔자가 될 수 없다. 여행중독자에게는 여행이 여유와 휴식이 아니라 일종의 작업이니깐 그러하다. 저자가 단지 반 년만 시베리아 숲속에 체류한 까닭도 과거 자신과의 약속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부정할 수 없는 저자의 방랑객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내로부터 헤어지자는 문자가 바로 저자가 숨기고픈 은둔의 깊숙한 배경과 저자의 삶에 대한 어떤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저자가 은둔생활을 접고 다시 파리의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과연 저자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책은 아무런 단서를 남기고 있지 않다. 은둔 후의 영향력에 대한 그 어떤 설명이나 감상도 칼로 개끗하게 도려내고 있어 책을 덮으며 다소 성급한 결말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저자가 결코 완벽하게 은둔 전의 생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시베리아 숲속에서의 은둔이 미래의 삶에 깊은 영향을 남기게 되리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