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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자 생각한 것은 표지에서 보게 되는 드로잉의 역할이 컸다. 펜에 물을 묻혀 쓱쓱 그려낸 듯 생동감이 느껴지는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요즘들어 드로잉에 대한 열정이 시들어가고 있는데, 이 책을 보며 그 열정을 되살리는 시간을 갖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이 책은 나에게 다가왔다.
이 책의 저자, 존 버거에 대해 읽으면서 놀랐다. 1926년 런던 태생으로,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소개한다.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농촌 마을로 옮겨가 살면서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 해오고 있고, 저서도 다양하고 많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습으로 보여지나보다.
이 책을 읽고자 펼쳐들었는데, 저자의 말이 색다르게 담겨있다.
이 사랑스러운 파슬리 드로잉은 오직 이 책의 한국어판을 위한 작품입니다. - 존 버거
미소짓게 되는 서문이었다. 한국어판 서문을 대신하여, 존 버거가 글과 함께 보내온 드로잉이라고 한다. 백마디 말보다 한 눈에 들어오는 서문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의 구성은 독특했다. 지금껏 드로잉책은 드로잉 관련 기법을 알려주는 이야기가 담겨있거나, 여행 혹은 일상 속의 사색이 드로잉과 함께 구성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철학과 드로잉의 만남이었다. 드로잉과 스피노자, 그 조합이 글도 그림도 마음에 들어오게 한다. 꽤 괜찮다는 느낌을 받은 책이었다.
옮긴이의 말을 보면 존 버거는 영역본 <윤리학>을 인용하고 있고, 번역가는 라틴어판에서 직접 인용하는 길을 택했다고 한다. 다른 한글 번역판을 이용하거나, 적어도 존 버거의 영역본을 그대로 번역해도 되었을텐데, 노력이 대단하다. 기존의 번역판을 따르기보다는 좀더 <윤리학>의 원문에 가까운 번역을 새로 시도해보는 게 좋겠다는 것이 옮긴이 두 사람의 공통의 생각이었다.(180쪽) 그들의 노력 덕분에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면서 스피노자의 윤리학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다.
존 버거의 이야기도, 스피노자의 <윤리학>도, 드로잉과 함께 적절하게 어우러져서 종합적으로 내 마음에 파고든다. 철학과 드로잉, 함께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 따로, 글 따로가 아니라, 글에서 주는 느낌을 드로잉으로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고, 드로잉을 한 작품을 두고 거기에 부합하는 글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나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생동감 넘치는 힘을 주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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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닉네임인 ‘벤투의 스케치북’은 미술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의 ‘벤투의 스케치북(Bento's Sketchbook)‘에서 따온 이름이다. 벤투는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약칭이다. 벤투는 스피노자의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바루흐 스피노자라 불리기도 하는데 스피노자는 유대교로부터 파문(破門: herem)당한 뒤 이름을 히브리어 바루흐에서 라틴어 베네딕투스(벤투)로 바꾼다. 스피노자에 대한 회고에 의하면 스피노자는 드로잉을 즐겼고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다. 그러나 그림은 발견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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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mate3416/222158647601 < 책방 하고 싶은 면서기 >
아주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어제, 일요일 점심의 일이다. 단호박 무스가 얹힌 피자와 몸을 식혀 때를 기다린 맥주였다. 모처럼의 일이어서 기분이 꽤 좋았는데, 존 버거와 그의 『벤투의 스케치북』을 잠깐 생각했다. 차갑게 삼켜지는 맥주는 날카롭게 응시하고 정확하게 감각하는 그를 닮았다. 입안에서 구르는 단호박과 그의 드로잉 또는 문장, 혹은 그것의 형태로 빚어진 사유가 이어질 수 있을까도 궁금했는데 더 이상 사심을 품지 않기로 했다. 피자를 먹고 맥주를 마시자. 때와 장소를 가벼이 여긴 상념은 꼴이 우스워지기 십상이다.
오늘, 월요일 아침의 일찍, 존 버거와 그의 책을 다시 생각한다. 꼼꼼히 꽂아놓긴 했지만 북다트만으로는 부족하다. 밑줄을 긋고 생각을 오래 하고 낙서도 조금은 해야 할 책이어서, 다시 읽으면 다시 밑줄과 생각과 낙서를 하게 될 책이어서… 어쩔 수 없다, 사야지.
존 버거는 세상의 여러 구석을 살피며 살았다. 농사도 짓고 미술비평도 하고 사진이론도 연구하고 다큐멘터리도 쓰고 사회비평도 했는데 아무렇게나 둔 (그런데 멋지다) 곱슬의 흰 머리칼과 굵게 앉은 주름, 가득한 눈빛과 곧은 콧날은 그가 자신의 일들에 얼마나 단단히 임했는지 짐작케 해준다.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나는 무엇보다 먹먹하고 아름다운 이유로,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
그의 필체로 옮겨진 스피노자의 문장들을 상상해본다. 렌즈 세공으로 생계를 이은 철학자,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며 드로잉을 했던 철학자가 무엇을 관찰했을지 그려보는 그의 골똘한 표정도 상상한다. 매력적이다. 그는 철학자가 세상의 무엇을 관찰해 어떤 그림으로 남겼을지 오래도록 생각하다 철학자의 스케치북을 발견하는 상상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이내 친구가 근사한 스케치북을 선물하자 기쁜 마음으로 철학자의 이름을 담아 ‘벤투의 스케치북’이라 이름 붙인다. 그가 스피노자를 읽듯 내가 그를 읽지는 않았는데, 노력을 가장한 억지에 속지 않았다는 승리의 자만으로 게으른 독서를 감추도록 하겠다.
어쨌거나 어떤 맥脈을 타고 책을 읽었는데 오늘 아침 온라인 서점에 쓰인 책의 소개글에서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단어들을 발견하고 몹시도 기껍게 독서의 희열에 도취했다. 건달 같이 읽어도 내가 책을 읽기는 하는 모양이다, 때로 부연 시간들을 보내기도 하지만 어떤 단련이 이루어지고 있고 눈은 맑아지고 있는가보다 하는 안심에 정말이지 아주 흠뻑 기뻐하였다.
내가 더듬어 가며 읽은 줄기는 1) 본래의 것, 자연스러운 것, 질서, 그것들에 관한 욕구 2) 계속되는 삶, 포개짐, 옳은 형태를 만들어가는 것, 연장을 통한 연결, 공존 이다.
1) 필요한 곳마다 그림을 그려 넣어 글을 완성한 존 버거는 드로잉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동행하는 것, 비의식적인 것, 논리적 추론에 앞서는 것’이라 정의하는데, 추상의 말들을 앞세운 까닭은 드로잉의 대상이 당연한 것, 본능적인 것 그리하여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것에 덧붙은 ‘지향하는 실천, 찾으려는 욕구, 어딘가에 위치시키려는, 정의 내리고 묘사해 보고픈’ 같은 바람에서 본디 그러해야 마땅한 질서를 되찾고 그것에 편입되고픈 그의 간절함을 읽을 수 있다.
2) 좋은 모양으로 살고파 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응시’와 ‘수용’이 그가 택한 방법인 듯한데 그것은 다시 ‘행동’으로 모습을 바꿔 ‘노력’이 된다. 이는 다분히 나만의 생각이어서 그의 삶을 맞게 포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좋은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집에서 거리로 나오는, 이야기의 무엇을 남기는, 이야기를 떠나 삶을 계속해 살아가는’ 등에서 삶의 방식에 대한 그의 고민을 읽을 수 있으며, 이야기의 피가 독자의 그것과 만나 아주 먼 곳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를 읽은 우리는 사촌이 되리라는 낭만적 상상에서 나란한 발걸음의 연대와 마음을 잇는 공존에 대한 애착을 엿본다.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다. ‘제대로’가 무엇인지 모르니 어쩌면 나의 모든 독서가 끝날 때까지 영영 알 수 없는 일일지도. 그저 책을 읽는 내내 정확한 그의 이마와 눈매와 입매를 떠올렸다. 일렇게 읽는 책도 있군, 만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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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는 철학자 베네딕투스(벤투) 데 스피노자(1632-1677)를 말한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글과 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의 스케치북은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다. 존 버거는 스피노자의 스케치북을 발견하는 상상을 하며 새로 산 스케치북에 "벤투의 스케치북"이라 이름 붙이고 드로잉을 해 나가기 시작한다. 존 버거는 그림을 그리며 그의 깊은 사유를 글로 남겼는데 글이 쉽게 읽히는 편은 아니다. 더더군다나 스피노자의 글도 이 책에 중간중간 나오고 있어 그림이 있는 책이지만 빨리 읽히지는 않았다. 존 버거의 드로잉들은 꽤 인상적이다. 굉장히 자유로운 선을 쓰며 색을 쓸 때도 나뭇잎 등 자연의 색을 그대로 가져다 쓴다. 세밀히 관찰하고 사유하는 과정이 드러나 있다. 첫 장에 자두나무 열매를 아침에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아 오후에 다시 그리기로 했다. 아침에 그렸던 자두를 찾을 수 없어 난감해 하던 차에 아침의 달팽이를 발견하고 그 자두를 발견하는 글이 있다. 그리고 자두 나뭇잎의 색을 드로잉에 사용했다. 얼마나 느린 움직임인가 짐작이 간다. 드로잉과 달팽이의 느림 움직임. 그 더딘 과정이 사랑스럽다.
드로잉에 관한 위의 글이 두 개의 장에 걸쳐 마지막에 반복해서 나온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의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니... 보이지 않는 무언가는 대상의 속성(-관찰하면서 발견한 나의 이목을 잡아끄는 매력)일 수도 있고, 그리는 동안의 내 자신의 사유의 변화일 수도 있다. 수영장에서 만난 부부의 이야기, 60년이 넘는 자전거를 타는 옆집 사람 이야기 모두 일상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인데 존 버거에게는 사유의 대상이다. 그의 삶의 방식을, 생각하는 태도를 그리고 드로잉까지 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는 문제는 이제 나를 떠났다. 자유롭다. 스피노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가 더 궁금해 지는 시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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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그저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나고 지적이며 세련된 글이라고 밖에. 에세이라는 형태가 이렇게도 수준 높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스피노자의 저서를 인용하는 장치를 사용한, 사려 깊고 지적인 작가가 쓴 소설처럼 읽힙니다. 저자가 직접 그린 드로잉 또한 글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무심코 집어든 책인데 이래서 도서관이 좋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보물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별 3개는 과소평가한 것임을 밝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