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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지폐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면 적어도 전 국민적으로 존경받거나 그 나라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 천원권 지폐 속에 퇴계 이황 , 그리고 그가 세운 도산서원이 도안돼 있다는 것은 그만큼 퇴계나 도산서원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은 바로 도산서원이 우리 지성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인지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서원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정치적 색채를 지우고 학문을 생산하고, 지적 탐구를 하는 공간으로서의 서원으로 영남 학문 근거지로서의 도산사원으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도산서원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다녀온지 오래돼서 그 모습이 많이 지워졌지만, 그럼에도 산 속 경치도 좋고, 또 조용하고 기와 건물이 여러 채라 생각보다 넓구나했던 기억은 남아있다. 사색하기에도 공부하기에도 괜찮은 분위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림인물들을 배향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서원을 학문을 탐구하는 강학(講學), 장수(藏修) 공간으로 확립한 것이 이황이었다. 더욱이 서원에 대한 규범까지 마련함으로써 이황은 향촌사회를 교화시킬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장으로서의 서원을 전범화했고, 서원이 향촌에 튼튼히 뿌리 내리면서 그 일련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서원하면 철폐의 대상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서원의 수가 늘어나면서 정치적으로 폐단이 심해졌고,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된, 즉 사대부들의 이익만 대변한다는 그런 부정적 평가가 강하게 각인돼 있었다. 그 바람에 지적 탐구와 학문의 보급, 향촌 문화의 산실로서의 서원의 긍정적 역할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서원에 대한 평가를 조금은 다각도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원은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라, 학문탐구의 장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황이 세운 도산서원의 역할은 이황의 학통을 계승했다는 면에서나 영남지역 서원의 구심점이라는 점에서나 그 영향력은 더욱 도드라졌다. 타성에 젖은 관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서원은 지역문화의 중심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산서원에선 강론이 펼쳐지고 강회가 열리면서 영남 지역의 성리학의 전파를 이끌었다. 그리고 책을 발간하는가 하면 소장보관하고 있어서 열람이 가능한 일종의 도서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학문의 거점이자, 또 성리학을 보급하는 통로가 됐다. 이 중 강회가 인상적이었는데 , 서원의 강회는 3~4일간 집중적으로 특정 경전과 주제를 두고 선생과 학생간에 문답,토론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이었다고 한다. 요즘의 학회나 세미나가 연상되는데, 성리학하면 문구의 해석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고 여겼다가 역시 학문 연마에는 암기나 해석 수준에 그치지 않는 건 동서고금 마찬가지구나 싶었다. 강회는 현대에서 시도하고 있는 학습 방식과 유사해서, 서원에서의 지적 탐구 수준이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는 훨씬 높은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이 강회가 의미있는 것은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이견이 개진되지만 토론을 통해 퇴계학파의 학설을 합의하고, 외부에 퇴계 학파의 공식적인 학설로 내세우게 된다는 점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강회에 참석하고자 온 사대부들의 사이에 여론을 형성하는 자리가 될 수 있었다. 나아가 유림의 사회적 책무를 상기하고,유림을 결집해 유림들의 공론을 더욱 강력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강회는 단순히 토론의 장만이 아닌 여러 뜻을 지닌 자리가 될 수 있었다. 조선에서 책을 간행하는 곳이라야 왕실과 문중 그리고 서원이 고작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책의 생산이나 유통이 제한돼 있었는데, 특히 상업적인 출판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만큼 서원이 직접 책 간행을 하게 된 것은 지식 확산에 파급력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도산서원 구성원들이 발간 작업에 직접 참여하게 됨으로써 퇴계학파의 기반을 더욱 다지게 됐던 것이다. 도산서원이 퇴계의 학문을 잇는 중심지가 되면서 영남 전체 특히나 퇴계와 학문적 인연이 깊었던 예안과 안동은 도산서원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서원이 지역의 여러 문제를 판단하고 조정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관권에 버금가게 지역민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행사하는 힘을 갖게 됐다는 말이다.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을 읽으면서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서원에 대해 갖고 있던 부정적인 인식을 일부는 개선할 수 있었다. 서원은 사림들 교육의 장이었다. 과거시험 준비하는 것을 배제한 것을 보면 서원은 관료를 배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학문연구와 수양, 그럼으로써 향촌을 교화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원생의 입장에서는 과거를 외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림이 원하는 도덕사회를 만들고자하는 뜻을 펼치기 위해 서원은 사림들에게는 큰 힘이 됐다. 서원의 등장으로 사림이 원하던대로 조선사회에 성리학이 깊숙하게 자리잡는데 기여를 했다.지역민들에게 성리학을 보급시킴으로써 조선사회는 지방 구석구석 성리학의 세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도산서원은 서원 중에서 이런 역할을 가장 선도적으로 수행한 서원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날 안동의 문화와 분위기가 보수적이라는 소리가 많은 데에는 도산서원의 영향이 지대했을 것이다. 그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뒤 서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데에는 현실적인 이해가 개입됐다. 과거에 급제하지도, 중앙 정치와 연을 갖지 않고서도 향촌의 사대부들이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대부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게 된 것은 서원에 적을 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나 조선 후기 관직은 제한되고, 과거 응시할 수 있는 사대부의 숫자가 급증할 때, 즉 신분제도가 요동칠 때 서원은 책발행 과정을 통해서나 서원과 연을 맺고 있음으로써 그 신분을 외부에 드러내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원은 사대부, 특히 지방 사대부의 이익을 유지해주는 기반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서원에 부여된 특혜는 조선 경제에 심각한 부담을 주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후기로 갈수록 서원이 수행해온 긍정적인 역할은 빛이 바래갔고 부정적 측면이 누적되면서 서원은 혁파의 대상으로 전락해갔다. 서원의 몰락은 사림정신, 더 나아가 성리학의 몰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사림은 성리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고 대처할 수 있는 탄력을 잃어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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