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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순희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인 《붉은사슴뿔버섯》으로부터 받은 감동에 이끌려, 이 소설의 앞 이야기 - 주인공인 장애인 소녀의 유년기를 다룬 《순비기꽃 언덕에서》를 읽게 되었다. 경제개발과 근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치는 대구의 70년대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붉은사슴뿔버섯》의 프롤로그 부분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순비기꽃 언덕에서》의 첫 문장은 시리도록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밀물 때가 되면 바다는 마을 앞까지 들어와 은빛으로 출렁거렸다. 납작하게 엎드린 집들이 금세라도 그 물빛에 녹아들 것 같았다. 이십여 가구쯤 되는 초가집들 사이는 드문드문 짠물이 고인 습지였다. 자갈과 모래가 섞인 그곳엔 사철쑥, 갯씀바귀, 통보리사초 같은 갯벌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마을 사람들은 근처 논밭에서 땅을 일구다가 썰물 때가 되면 드넓은 갯벌에 나가 갯것을 잡았다. 힘들여 잡은 것들을 이고 지고 노을 진 바다에서 순비기꽃이 핀 둔덕을 걸어 나오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 속에 사진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다. 순비기나무 줄기는 소금기가 있는 모래땅을 잘도 기면서 아무 데나 우거져 있었다. (9쪽)
작품의 무대는 충남 보령의 작은 바닷가 마을 수청구지(수청곶), 주인공은 소아마비로 다리를 쓰지 못하는 소녀 봉희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장애는 처음부터 가장 큰 비극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봉희에게 세상은 바다, 갯벌, 갈대밭, 순비기꽃, 할머니, 엄마, 언니, 삼촌, 이웃들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장애가 있지만 봉희를 둘러싼 세계는 아직 든든하고 따뜻하다.
-수청구지 사람들은 마을 앞바다를 ‘동틀’이라 불렀다. 물이 밀려오면 하늘보다 더 넓고 짙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던 그 바다, 거기서부터 먼저 동이 튼다고 그렇게 부른 것일까? (10쪽)
-모래밭을 따라가노라면, 갈대와 꼬마 부들이 지천으로 깔린 넓은 습지가 나왔다. 댕기물떼새들이 푸드덕거리는 그곳을 가로질러 논둑 밭둑을 걷다보면 (10쪽)
-은색 잎을 단 순비기나무 줄기가 텃밭 입구까지 무성하게 뻗어있었다. 땅바닥을 기듯이 낮게 벋은 가지마다 연보랏빛 꽃송이가 동글동글 맺혀있었다. (12쪽) -자꾸 칭얼거리며 이리저리 뒤척거리자, 언니는 밭둑 모래 언덕에 핀 갯완두 무더기 속에서 하얀 토끼풀꽃을 뜯어 손에 쥐어주었다. (12쪽)
-뒤꼍 화단엔 분꽃, 맨드라미, 백일홍, 해당화가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화단 옆 복숭아나무엔 진이 엉겨 붙은 복숭아가 가지마다 덩이덩이 붙어있었다. 장독대 둘레의 봉숭아꽃도 붉디붉었다. 머지않아 할머니는 그 꽃잎을 찧어 우리들 손톱에 얹고 아주까리 잎을 댄 다음 실로 칭칭 싸매어줄 것이다. (30쪽)
-마당에 흩어져있는 지푸라기를 치우던 삼촌이, 봉희 깼어? 잘 잤남? 하고 웃어주었다. 삼촌은 내가 아파 울 때마다 남루한 티셔츠 등판이 찌들고 해어지도록 업어주곤 했다. (33쪽)
-엄마는 나를 일으켜 안고, 가시를 발라낸 박대 살을 밥 수저 위에 얹어 입에 넣어주었다. 그렇게 먹여주어도 내 양은 몇 숟가락이 전부였다. 그래서 아홉 살 먹은 내 몸집은 다섯 살 어디쯤에서 성장이 멈춘 듯 아주 작았다. 엄마는 더 못 먹여 애를 태워 시무룩했다. (39쪽)
-삼촌은 나를 내려놓고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내가 다칠까봐 바닥에 널린 나뭇가지나 돌조각 따위를 치워 주었다. 나는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다니, 하고 깜짝 놀랐다. 그곳은 근방이 모두 바라다 보이는 벼랑 위였다. 늘 멀리서만 보던 풍경이 코앞에 있었다. 햇빛이 반사되어 기름칠을 한 듯 까맣게 번들거리는 갯벌은 오목하면서도 아주 넓었다. 바다 가장자리의 모래벌판도 선명하게 보였는데 곱고 하얀 모래가 유리조각처럼 반짝거렸다. 물총새와 갈매기들이 갯바람 속에 섞여 황홀하게 날고 있었다. (64쪽)
주인공은 비록 다리에 장애가 있어 제대로 걷지 못하지만 자연과 가족과 공동체 속에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아름다운 영혼으로 성장하며 살아간다. 독자로 하여금 ‘장애가 있을지라도 한 인간의 삶은 충분히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마을 앞에 화력발전소가 들어서게 되면서 바다와 바위산이 파괴되고, 마을 사람들은 개발을 둘러싸고 찬성과 반대로 갈라진다. 결국 봉희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장애가 아니라 산업화와 개발이며 봉희가 잃는 것은 단순하게 집 한 채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었던 세계 전체인 것이다.
-나는 새삼스레 바다를 보았다. 이젠 예전의 수청구지도 동틀 바다도 볼 수 없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니 무엇 하나 예사롭지 않았다. 바다는 오후의 햇살에 반사되어 연녹색 비단처럼 반짝거렸다. 멀리 수평선 너머 쪽빛 하늘에 구름이 목화솜처럼 평화롭게 떠 있었다. 그러나 여름이면 아이들이 멱을 감던, 하얀 모래와 동글동글한 자갈이 깔린 바위산 쪽 해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215쪽)
먹먹한 가슴으로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겨 ‘작가의 말’을 읽는다. -내 상처와 슬픔까지도 녹아있는 이 이야기가 실의에 빠졌거나 어려움에 처해있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소망한다. (232쪽) 앞 장으로 되돌아가 삼촌이 봉희에게 해준 말을 다시 읽어본다. -절대루 용기를 잃지 말어. 너만 힘든 게 아니니께……(230쪽)
자신의 상처와 슬픔이 자기연민과 분노에 갇히지 않고 타인의 상처와 슬픔을 보듬는 도구가 되기를 소망하며 이 작품을 완성했을 서순희 작가에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답하고자 한다. 충분히 위로가 되었노라고, 작가님 또한 자신의 작품을 통해 위로와 치유를 받았으리라 믿는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