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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명저‘월든’에서 이런 말을 했다.“왜 우리는 허둥지둥 삶을 낭비하면서 살아야 하는가?”‘월든’에 적힌 숱한 명문(名文)들 가운데에서 이 말이 특별히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잘 알려진대로 소로우는 월든 호숫가에서 2년 2개월을 보낸 뒤 문명 생활권으로 돌아온 미국의 시인이자 철학자이다. 그가 쓴‘월든’이 아일랜드의 시인인 예이츠에게 영감을 주어 서정성과 아름다움 이상의 문명사적 의미가 들어 있는 이니스프리라는 공간을 노래하게 한 것은 유명하다.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처럼 대하는 산업 사회를 떠나 노동과 문명, 그리고 생명 등에 대해 성찰한 소로우는 시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전설(傳說)인 셈이다.
’월든‘은 150여년 전의 작품이지만 노동의 현재적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오늘날 노동은 인간을 소외시키거나 인간으로 하여금 동일시의 주체가 되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노동동일시란 자신의 본질이 일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현상이다. 이것은 당연히 허위의식의 한 유형이다. 이 노동동일시란 개념은 한병철 교수가 ’피로사회‘라는 책에서 주장한 자기착취사회의 문제의식과 통한다. 자기착취사회란 곳곳에서“넌 할 수 있다”고 외치는 과도한 긍정성 때문에 죽을 때까지 일하면서도 스스로 착취한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사회를 말한다. 한병철 교수의 자기착취사회는 강수돌 교수의 감성적 프롤레타리아화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경제적 프롤레타리아화에 대비되는 감성적 프롤레타리아화는 노동자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으로 노동과정에서 내면의 느낌, 정서, 감정 등의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해 노동중독이란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돈을 많이 받지만 건강이나 가족 관계, 친구 관계 등이 망가진 사람들은 노동 귀족이 아닌 노동에 중독된 사람들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돈을 많이 받는다고 노동귀족이 아니라 기업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어용노조 간부들, 고임금과 고복지를 누리면서“이 정도면 괜찮은 세상이지“라고 생각하며 다른 노동자가 겪는 불평등이나 차별에 눈감는 사람들이 노동귀족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과로사 비율과 노동 강도, 자살률 등에서 최고 수준을 보이고 있다. 이 문제는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생계강박증, 노사간 대화 부족 및 나눔의 부족 등을 답으로 들 수 있지만 구성원들을 무한 경쟁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거론하지 않는 한 어떤 답도 제한적이고 일면적일 수 밖에 없다.
강수돌 교수는 인간 노동의 2원적 성향을 말한다. 인간의 노동은 인간의 생명력이나 자연의 생명력을 이용해 자본을 축적하는 일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 생명 세계의 일부로서 살아 움직이는 역동성과 주체성을 바탕으로 자본에 저항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당연히 역동성과 주체성에 주목한다. 그것은 타자의 관점에 사로잡혀 주체성을 잃고 표류하는 자기착취적 면모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나는 역동성과 주체성을 바탕으로 자본에 저항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정녕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도 말했듯 노동에는 복잡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즐겁게 일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노동을 보는 눈‘의 출발점이라는 말을 입증하듯 '노동을 보는 눈'은 깊이와 진정성, 속도감을 두루 지닌 독특한 책으로 읽힌다.
한편 '노동을 보는 눈'의 문제의식을 뒷받침하는 사상가로 들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장 자크 루소와 칼 폴라니이다.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 불평등의 기원에 대해 밝혔다면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노동, 토지, 화폐 등을 상품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들로 규정했다. 물론 현실은 정반대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루소와 폴라니로부터 우리가 얻어낸 바는 사적 소유가 빈익빈, 부익부를 낳은 것처럼 노동의 상품화는 오늘날 노동 소외와 사회의 온갖 모순을 낳은 주 요인이라는 점이다. 저자에 의하면 재산을 가진 계급이 자기 재산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보장받고 그래서 노동력만 사서 잘 활용하면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야말로 노동력 상품화의 역사적 전제들이었으며 그런 바탕 위에서 자본주의가 제 발로 설 수 있었다.(45 페이지)
노동력 상품화란 노동력과 생산수단의 분리가 노동자에게 노동력을 팔도록 강제하는 현실을 의미한다. 현 체제는 구자유주의를 뒤이은 신자유주의 시대이다. 그것은“노동이 유연해질수록 노동자의 삶은 경직되어 가는”(75 페이지) 체제이다. 저자가 예로 든 우리나라의 모순적이고 왜곡된 노동 현실은“우리가 하는 정치가 민주주의라면 이럴 수는 없다.”(’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참조)는 최장집 교수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이런 모순적 노동 현실은 덴마크나 네덜란드의 그것과 너무도 극명하게 대비된다.(덴마크는 실업이 발생하면 최대 4년 동안 실업 전 소득의 최대 90%까지를 지급하며 네덜란드는 해고가 쉬운 대신 정규직, 비정규직의 차별 없이 현역 임금의 70%에 달하는 실업연금을 38개월간 지급한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노동 소외를 극복하고 노동의 인간화를 이루기 위한 다양한 실천 방안들이 논의되고 있다. 저자는 노사간의 합의가 대안의 하나이지만 이것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이윤 체제나 경쟁 체제를 넘어서야 설득력을 얻는다고 말한다.(153 페이지) 이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극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그 특성상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특수한 체제이다. 하지만 현재의 신자유주의 체제가 바탕하고 있는 세계화는 금융 부문에서 전례 없는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개방화, 탈규제화, 사유화, 유연화는 그 전례 없는 세계화의 구체적 양상들이다.
’노동을 보는 눈‘의 대안적 성격은 노동의 미래를 예측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이 챕터에서 논의된 내용은 두 가지이다. 기술 유토피아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과 절망적일 것이라는 전망이다. 나는 절망적일 것이라는 견해에 마음이 간다. 극단적 개인주의적 경향의 만연에 마음이 가기 때문이다. 자기 계발서와 처세술 서적의 범람은 그 한 증거이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은 필요하다. 하지만 냉철한 현실인식을 갖는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저자는“길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원래 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가다 보면 길이 생기는 법”이라는 중국의 사상가 루쉰 선생의 말을 인용한다.(223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기술 유토피아적 전망도, 절망적일 것이라는 견해도 모두 넘어서야 한다.
이는 저항과 대안의 변증법이라는 개념으로 집약 가능하다. 또한 루쉰 선생처럼 구체적인 긍정적 대안을 만들어 가는 것이기도 하다. 상호 이해와 공감 능력을 키우면서도 성찰적인 대화를 하는 유연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본서(本書)의 중간 부분에 나왔지만 인용된 루쉰의 사상은 물론 기술 유토피아적 전망도, 절망적일 것이라는 견해도 모두 넘어서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과도 상통하는 결론을 언급하고 싶다. 그것은 섣부른 낙관과 성급한 비관을 함께 지양(止揚)하고 나부터의 자세로 실천하고 소통과 연대, 토론과 학습을 통해 현 노동 현실이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여지(餘地)가 없어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세상은 나아져왔고 또 그럴 수 있다는 믿음을 갖자고 말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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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태어나 나이가 차게 되면 대부분 노동자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그러니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국민들에게 노동에 대한 교육을 해 그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전해 주어야 마땅한 일.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월급을 못 받는다던지 산재를 당하기라도 하게 되면 당사자들이 하나씩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상황. 그리하여 이를 보다 못한 일부 뜻있는 분들이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이렇게 책도 내고 강연도 하면서 교육 당국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노동을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를 이야기해야 하고 자본주의를 이야기하려면 다시 또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과학적인 분석이라는 자본론을 말해야만 한다. 자본과 노동을 말하려면 이야기는 다시 또 어느새 철학적인 담론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노동을 이야기하는 대부분의 책들이 철학의 향기를 풍기는 이유가 바로 그것. 이 책 역시 흡사 철학의 기초이론을 닮았다. 다만 보다 많은 이야기와 보다 깊이 있는 설명을 하려다 보니 조금 더 어려운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 다소 이론적인 것도 같고. 그렇지 않아도 자본을 가진 쪽에 비해 턱없이 약한 것이 노동자. 조금이라도 그 힘의 간격을 메우려면 법에 의해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라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이 그 역량을 길러줄 수 있다. 제도 교육에서 노동법 관련 시간을 반드시 확보해야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