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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래로 신(神)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운동이 일어나고 이는 세계관의 대변화와 그에 걸맞는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르네상스로 대변되는 인본주의 즉, 휴머니즘은 고대 인간 중심의 문예로의 회귀 뿐만 아니라 신이 아닌 인간이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추구하며 끊임 없이 발전해 가는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포함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인간다움"의 기준이나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이 아닌 비인간 대상에 대한 차별이나 독단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휴머니즘은 베이컨, 데카르트, 보일 등을 거치면서 수학, 과학과 결합하여 과학과 기술이 가진 합리성이 "인간다움"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후에 오히려 수학이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또는 반증으로 검증될 수 없는 것들은 모두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다시 예술과 문학등을 비인간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위치한 인간은 과학과 기술을 통해 합리적으로 비인간인 환경과 비인간 동물들을 수단화하고 정복하면서 인간으로써의 위상을 공고히 하며 이는 중심적 위치로써의 인간이 무엇을 하건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게 된다. 17세기 다윈 혁명은 인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과거 인간은 유인원과 같은 위치에 있다가 진화라는 과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으며 미래에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의 인간으로 진화해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진화 과정을 오랜 지질학적 시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뉴턴 혁명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와 인간이 무엇이든 정복하고 개발하고 이용할 수 있게 해 준 과학과 기술이 진화적 시간을 뛰어 넘어 인간을 현재의 인간을 초월한 인간으로 변화 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등장한다. 이들의 생각은 발달한 과학과 기술에 힘 입어 인간의 육체는 보다 강인하고, 질병의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고 수명은 연장되어 불사의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우리가 지금 과학과 기술을 통해 행하고 누리고 있는 대부분이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발전한 트랜스휴머니즘이다. 그런데 이런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정신적 능력 또한 향상 시키는 것이 가능할까에 대한 생각이 나타난다. 과학과 기술은 이에 부응하기라도 한듯 컴퓨터와 인공 지능을 탄생시켰다. 컴퓨터와 인공 지능은 복잡한 수학적 연산이나 패턴의 분석에서 인간의 지능을 보완하며 인간의 지적 능력의 일부분을 보조하고 있다. 그런데 컴퓨터의 등장과 인공 지능의 발전 역사를 살펴 보면 멀지 않은 미래에 단순히 체스나 바둑에서 인간을 능가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닌 인간의 지능으로 상상할 수 없는 초지능이 탄생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등장한다. 인류가 가장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부분이 만일 초지능이 인류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와 같은 일이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 반면에 이러한 기술들은 인간과 합리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면 월등히 더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결과들도 많이 있다. 그렇다면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은 인간과 과학 기술 그리고 비인간적 요소들 간의 촘촘하고 섬세한 네트워크를 통해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과학 기술이 공존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최근들어 재조명 되고 있는 지구가 인간과 환경 그리고 다른 생명체들과의 유기적 관계에서 진화하고 유지된다는 "가이아 이론"이나, 비인간 동물 즉, 우리가 흔히 가축이라고 부르는 동물들에 대한 동물권, 동물 해방, 생명권 등의 등장과 확신이 이런 네트워크를 구성해 나가는 하나의 시류이고 사상의 전환이라고 한다. 작가는 기후 변화, 에너지 문제, 인구, 쓰레기, 식량 문제와 같이 당면한 그리고 앞으로 점점 더 지구와 인류의 존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런 문제들은 보편적 인류애를 외치는 휴머니스트도, 과학 기술에 맹신하는 트랜스휴머니스트도 아닌 이것을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고 이런 변화에 "감수성"을 가진 포스트휴머니스트들이 연대하고 실천하고, 실천을 통해 연대하며 이 문제와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수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로 부터 시작하여 최근까지의 업적과 사건들을 일목 요연하게 또 휴머니즘부터 포스트휴며니즘에 이르기까지의 사상의 변화 과정들을 체계적이고 알기 쉽게 정리하고 설명해 준 홍성욱 선생님께 감사의 말을 전한다. 책에 소개된 방대한 분량의 이야기들을 심도있게 이해하려면 엄청난 양의 공부가 필요하리라. 곁에 두고 참고하면서 세계사의 큰 흐름을 공부하는데 훌륭한 길라잡이가 되리라 생각하며 특히 이공계에 종사하고 또 그 길을 가려는 젊은 청년들에게 필독하길 추천하는 바이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다윈의 진화론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완성형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냈고, 그리하여 미래의 인간은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금의 인간을 초월하자는 흐름을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우리가 발딛고 숨쉬고 있는 세계를 미래에도 지금과 같이 잘 관리하여야 한다는 흐름을 포스트휴머니즘으로 분류해서 각각의 형성과정을 친절하고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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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국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해당 국가의 역사나 사회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할텐데 현지시각 2019년 7월 15일 카니 영국은행 총재는 영국내 최고액권인 50파운드 지폐 뒷면에 새겨질 대상으로 이 인물의 선정이유를 밝히면서 “탁월한 수학자로 오늘날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컴퓨터 수학자, 인공지능의 아버지로, 또 전쟁영웅으로 광범위하면서 선구자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봄베라는 암호 해독기계의 발명을 통해 당시 연합군에게 근심거리였던 독일군의 암호 에니그마를 풀어내므로써 2차 세계대전 종전을 앞당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로서 2014년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그 활약상이 다뤄지기기도 했다. 이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튜링 테스트는 컴퓨터에 사회적 성역할을 흉내내는 임무를 부여해 인간과 컴퓨터를 구별하려 했고 남을 속이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페미니즘 철학자 주디스 제노바는 튜링이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가진 임의성을 남녀의 사회적 성별 구분에도 적용하므로써 서구사회가 오랫동안 당연시해온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하는 지적인 도전을 감행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튜링은 논문 발표 시점인 1950년을 기준으로 50년 이내로 자신의 테스트를 통과하는 기계가 만들어질 것으로 낙관했다. 이같은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은 다윈의 진화론을 바탕으로 진화가 미래에도 계속되기 때문에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미래인간이 나타날 것이라는 트랜스휴머니즘의 발전단계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어 초지능에까지 연결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트랜스휴머니즘에 내포된 ‘우리’밖의 존재를 배제하는 정복적 배타적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휴머니즘 이후를 지향하는 하나의 사조로서 포스트휴머니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기술의 진보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인간ㆍ동물, 인간ㆍ환경, 인간ㆍ인공지능 로봇이 상호 의존하는 관계임을 인식하는 한편, 모든 생명체에 인지 과정이 있다고 여기는 동시에 인간과 기계의 연결이 둘 모두에 새로은 가능성과 역할을 부여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그 기저에 깔려있는 핵심정신이 감수성인데 단순히 외부 세상을 받아들여서 인지하고 느끼는 능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잡하게 엉켜있는 세상을 포용하고 공감하며 애정하는 적극적 심성이다. 저자는 포스트휴머니즘의 흐름을 성찰적인 사이버네틱스, 느린 과학 등에서 찾으면서 인류세의 시대를 맞아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기후변화, 에너지, 쓰레기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 동력으로서 포스트휴머니즘의 역할에 주목한다.
최근 한 언론에서 2010년대의 과학기술은 세상을 어떻게 바꿨나라는 기사를 통해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3D프린팅, 자율주행차, 생명과학기술의 성과를 언급하면서 특히 인공지능의 약진이 두드러졌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딥러닝 기술 등이 기폭제 역할을 하고 이세돌과 알파고가 펼친 세기의 바둑 대결이 세계적인 인공지능의 붐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공지능이 거대 데이터에 기반한 분석과 추론을 넘어 인간 고유의 영역까지 넘보게 되면서 인간과 인공지능간의 관계에 대한 논란도 커지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지나친 낙관론이나 위협론이 아닌 유기체와 기계가 서로의 특성을 공유한다는 시각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감수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AI를 새로운 성장동력 발굴을 위해 세계적 발전 속도를 따라가야만 하는 신기술로만 여기는 한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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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밝힌 이 책의 목표는 “포스트휴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감수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왜 ‘감수성’일까? “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핵심정신을 포착하는 데 가장 적절한 용어가 무엇인지 오래 고민하다가 ‘감수성’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그럼 ‘감수성’이란 “감수성이란 외부 세상을 받아들여서 인지하고 느끼는 능력을 의미한다. 단순히 아는 것만이 아니라, 느끼고 몸으로 행하는 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감수성은 다양하고 복잡하게 엉켜 있는 세상을 포용하고 공감하며 애정하는 적극적인 심성이다.”
이러한 포스트휴먼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앞의 감수성에 대한 개념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일단 타인, 공동체, 동물, 자연 같은 외부 세상을 다르게 보고 느낀다. 어떻게? “나와 이 세상이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고, 타인과 동식물과 지구의 고통이 나의 고통임을 느낀다. 내가 먼저 존재하고, 이렇게 먼저 존재하는 내가 세상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가 나와 세상이 사이에 만들어지는 관계들의 총합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포스트휴머니즘과 우리가 알고 있는 휴머니즘은 어떻게 다른가 휴머니즘은 르네상스 시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인본주의, 즉 인간중심주의를 말한다. 인간 개개인의 가능성과 존엄성이 강조됐고, 모든 인간의 자유, 평등, 우애 같은 근대적인 인권론이 등장했다. 이렇게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인식되고, 인간 이성이 가진 힘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면서 인간 한계를 초월하는 상황을 꿈꾸게 된다. 이것이 트랜스휴머니즘이다. 20세기에 들어와 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대한 기대가 트랜스휴머니즘 사상과 중첩되었다. 문제는 인간중심을 강조하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과정에서 세상을 인간이 아닌 것들을 ‘착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배자는 피지배자를, 남성은 여성을, 인간은 환경과 동물을 착취했다. 한편으로 ‘우리’ 안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인간, 다른 종, 다른 개체를 배제하는 건강하지 못한 인간중심주의라는 탐욕은 결국 인간을 초월한 인간을 지향하는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이어졌다.
말 그대로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 이후를 지향하는 감수성이다. 첫째, 인간의 이성과 과학기술의 진보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인간과 동물, 인간과 환경,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이 서로를 형성하고 서로 의존하는 관계임을 강조한다. 둘째, 인간에게만 의식과 인식이 있다는 휴머니즘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체에 인지 과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의지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런 의지의 발현이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존재들의 관계에 상처를 내는 것을 경계한다. 셋째, 기계와 인간이 결합된 사이보그나 독자적인 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이 인간을 위협할 것이라는 전망에 유보적이거나 회의적이다. 대신 인간과 기계의 연결이 둘 모두에 새로운 가능성과 역량을 부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포스트휴머니즘 감수성은 20세기 이후 과학과, 공학, 철학이라는 서로 다른 지적 전통에서, 서로 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사상적 조류들이 결국 하나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다.
이 책은 이런 서로 다른 문제의식과 지적인 전통이 어떻게 서서히 결합해서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감수성의 전환을 이루었는지를 보여준다. 책 제목에 '오디세이'가 붙은 이유이다. 그 자체가 거대한 지적 모험의 과정이므로. [리뷰어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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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저자는 포스트휴머니즘을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이라 정의하면서 나와 이 세상이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고, 타인과 동식물과 지구의 고통이 나의 고통임을 느끼는 일이라 말한다. 인간의 이성과 과학기술의 진보에 대해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고, 인간과 동물, 인간과 환경,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이 서로를 형성하고 서로 의존하는 관계임을 강조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에 비해 인간을 초월한 인간을 지향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은 자연적인 진화나 기술적, 의학적 방법을 통해 지금의 인간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갖게 된 인간을 뜻하는 것이라 한다. 이 책은 전반부에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 후반부에는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선 진화론을 바탕으로 미래의 인간의 모습이 지금과는 필연적으로 달라진다면서 주창 되기 시작한 트랜스휴머니즘은 나중에 생명체의 움직임이 피드백에 의한 제어라는 기계적인 용어로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사이버네틱스 이론으로 만들어졌고, 인간과 기계가 결합한 혼종인 사이보그도 유행시켰다고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대학원 다닐 때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어느 정도 공부한 적이 있어서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이 낯설지 않았다. 또한 인공지능 관련 연구도 진행했었기에 사이버네틱스 이론과 상호 영향관계에 있었던 인공지능 이론들의 발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흥미로운 언급들 중에는 차페크가 만든 로봇이란 용어와 함께 거기에 담긴 의미가 인간 대 로봇의 갈등이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 대 노동하지 않는 인간의 대립이었다는 것, 튜링 테스트가 실은 성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이어서 포스트휴머니즘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철학, 생물학, 과학사, 엔지니어링, 사이버네틱스, 지구과학 등 여러 분야가 만나 가시화 된 분야이기에 이러한 분야들의 발전 과정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생명을 기본적으로 그 구성 요소들이 살아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내기 위해 상호작용을 하는 닫힌 네트워크로 보았다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또한 인간의 인지는 세상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인간 주체가 적극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며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구별 짓던 경계를 허물어 뜰이는 여러 이론적 방향들이 전개된다. 특히 인간은 이 세상에서 독자적으로 행위 하지 않는다면서, 기술과 관계를 맺으면서 인간의 동기, 목표, 행위가 달라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기술도 인간과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 방향과 그것이 미치는 영향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변하고, 이 과정에서 사람도 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휴먼 감수성에 따르면 우리는 기술을 마스터하는 방법이 아니라, 기술과 함께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면서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과 지능을 가진 기계의 상생적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