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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존엄하게 살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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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고, 어머니들의 산고와 의료진들의 도움, 가족의 기다림 속에 새로운 생명도 태어났다. 지금은 타인의 도움이 간절하지만 언젠가는 홀로 우뚝 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 시간을 살던 누군가는 이 세상과 이별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소멸한다. 예외는 없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는 건 결국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불운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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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고, 어머니들의 산고와 의료진들의 도움, 가족의 기다림 속에 새로운 생명도 태어났다. 지금은 타인의 도움이 간절하지만 언젠가는 홀로 우뚝 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삶의 마지막 시간을 살던 누군가는 이 세상과 이별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소멸한다. 예외는 없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사는 건 결국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불운으로 가득 찬 삶이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고, 그러다 보면 희망은 있다고 믿으며 살았다. 그런데

 

더 이상 내일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떻게야 해야 할까?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숨만 붙어 있는 것이라면? 더는 존엄하게 살지 못한다면?

 

미켈라 무르지마의 『아카바도라』는 입양으로 가족이 된 마리아 리스트루와 보나리아 우라이의 새로운 가족 관계에 관한 이야기이자 불구가 된 니콜라의 안락사 문제를 통해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해 말한다.

 

전쟁은 많은 미망인과 고아들을 만든다. 1950년대 이탈리아 사르데냐의 작은 마을 소레니에 사는 보나리아는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는데 미망인이 되었고, 안나 테레사 리스투르는 전쟁에서 부상으로 퇴역한 남편이 소작농으로 일하던 주인의 트랙터에 깔려 죽자 홀로 네 딸을 키워야 했다. 당시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가난한 여인의 아기를 영혼의 자식으로 부르며 기르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보나리아는 여섯 살 마리아를 영혼의 딸로 삼고 키웠다.

 

프란네 보에의 ‘경계선 사건’을 복수하려다 불구가 된 니콜라는 죽은 거나 다름없다며 보나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보나리아는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게 안락한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죽음의 어머니’ 아카바도라였다. 유년 시절 마리아는 도둑질과 거짓말을 하고도 죄악조차 느끼지 못했었다. 마리아는 낳아준 어머니가 있어 보나리아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실수로 태어난 아기가 아니라 존엄한 대상임을 알게 해준 진짜 어머니였다. 마리아는 보나리아가 아카바도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녀 곁을 떠났다.

 

보나리아는 마리아에게 “내가 마시지 않는 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마라.”라고 했다. 마리아는 보나리아에게 실망했지만, 보나리아에게 환자들을 편안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일은 아기가 태어날 때 사람들이 도와주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낯모르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 수풀 속으로 사라진 이후 누구도 믿지 못하는 아이가 된 피에르조르지오는 10여 년 만에 마리아에게 털어놓았고 위로받았다. 보나리아가 행한 일도 마리아가 행한 일도 인간애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은 그렇게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죽어간다.

 

여자와 남자들은 시신 주변을 계속해서 지켰다. 의식에 따라 번갈아 울음과 기도, 회상이 이어졌다. 그런 과정은 생략할 수도 없었고, 공동체 사회에서 부재와 존재 사이의 파열을 방지하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각자의 고통을 부정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서 각자가 지닌 삶의 본질적 비극과 화해하게 되는 것이다.(158쪽)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닌 부모의 선택이었다. 내 삶은 내가 선택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들여다보면 내 선택이라기보단 타인의 선택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내 선택이든 타인의 선택이든 죽음은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단지 숨만 붙어 있는, 더 이상 존엄하지 않은 상태라면, 스스로 비극을 끝내고 싶어 한다면 ‘그래도 무조건 살라’고 말하는 것이 적당한지는 모르겠다. 보나리아가 마리아에게 아카바도라의 일을 부탁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 살았던 것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일을 했으니 자신은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기보단 그렇게 사는 것은 절대 존엄하지 않다는 것을 마리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함께 불행하지 않고 혼자만 살아남는 것은 이기적인 사고일까? 죽음은 신의 권리이니 편안한 죽음을 맞는 것은 부리지 말아야 할 욕심일까?

 

니콜라의 선택에 대해, 보나리아의 동조에 대해, 아카바도라의 길을 시작한 마리아에 대해 옳거나 그르다는 판단을 내리기는 조심스럽고 어렵지만, 인간은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만큼은 잊지 말아야 할 듯싶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죽은 거와 다름없는 삶이 아닌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은 아름답기보단 고통으로 가득할지라도. 보고 말하고 손을 움직이고 걸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YES마니아 : 로얄 m****6 2013.01.0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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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삶 그리고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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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임을 책소개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미켈라 무르지아 작가의 대담한 용기에 알수 없는 기대감이 들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도 어떤식으로 이야기를 끌어낼지, 어떤 이야기로 결론이 날지 궁금했다.    소설은 한 아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아이는 바로 마리아로 안나 테레사 리스트루의 막내딸이다.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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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임을 책소개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미켈라 무르지아 작가의 대담한 용기에 알수 없는 기대감이 들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도 어떤식으로 이야기를 끌어낼지, 어떤 이야기로 결론이 날지 궁금했다. 

 

소설은 한 아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아이는 바로 마리아로 안나 테레사 리스트루의 막내딸이다.

안나는 무능하게 죽은 남편에 장성한 딸 셋과 막둥이 마리아 그리고 가난에 찌들어 있다.

그런 안나에게 보나리아의 제안은 매우 흥미로왔고, 여섯살난 막내 마리아를 보나리아 우라이에게 양녀로 주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마리아가 안나의 손에 의해서 보나리아에게 전달되는 그 순간에서 시작된다.

마리아는 보나리아에게 가는 것을 원했고, 혈연이라는 가족을 떠난다는 슬픔보다는 새로운 가족인 보나리아를 만나 시작될 새 삶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에서 마리아는 개미들에게 처참한 개미진흙과자를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소설은 마리아가 새로운 가족인 보나리아를 만나면서 마리아의 눈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마리아의 눈에 비친 보나리아는 바르고 빈틈없는 모습의 재봉사이다.

이런 보나리아의 모습은 신비롭고 알수 없는 거리감이 들게 만들었다.

마리아는 이런 보나리아에게 호기심과 호감을 갖게 되었다.

마리아에게 보나리와의 생활은 억지로 가족이 되도록 꾸미고 강요받지 않는 편안한 모습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친엄마인 안나 테레사 리스트루와의 삶보다 더 만족스럽다.

친엄마인 안나보다 새로운 가족인 보나리아와 더 편안하게 지내고 자신의 선택에 만족한다.

그런 어느날 마리아는 보나리아의 수상적은 행동을 알게 되고, 결국 충격적인 아카바도라라는 보나리아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그녀의 곁을 떠난다.

 

이 소설을 통해 미켈라 무르지아 작가는 "안락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안락사가 옳다, 아니다라는 논쟁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락사 찬성쪽의 느낌이 들 정도이다.

물론 안락사를 받아들이기에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반적인 반응은 마리아와 그녀의 친구 안드리아에게서 볼수 있다.

이를 통해서 안락사는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음을 암시하나.

그러나 마지막에 그들은 "안락사"를 받아들이는 결론으로 난 미켈라 무르지아 작가는가 안락사에 대해 반대적 입장이 아님을 알수 있었다.

작가는 찬반 논란의 여지를 그저 "용서와 이해"라는 단어로만 남겨두고 있었다.

 

삶의 시작은 탄생이고, 삶의 마무리와 끝이 죽음이다.

인생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만이 아니라,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느냐 역시 인생이다.

즉 삶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그래서 편안한 삶은 편안하게 맞이하는 죽음의 과정이라고도 볼수 있다.

그러나 안드리아의 형 니콜라의 죽음ㅇ느 편안하게 맞이하는 죽음이 아니다.

삶의 포기 자살로 느껴졌다.

작가가 "안락사"에 대해 제기하고 싶었던 문제는 바로 "삶을 포기하는 임의적인 선택"이었다.

이부분은 안락사보다는 "자살방조" 또는 "자살협조" 심지어 "살인"이기도 하다.

보나리아, 아카바도라의 삶을 통해서 삶, 죽음 그리고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m*******i 2013.01.1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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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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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꺼풀은 여전히 감겨 있고, 마리아가 잡고 있던 손도 움직임이 없었다. 마리아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죽음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 224p   워낙 커다란 사건들을 자주 겪으며 살아오다보니 조금은 덤덤해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독 올해 너무도 무참한, 황망한 죽음들이 많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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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꺼풀은 여전히 감겨 있고, 마리아가 잡고 있던 손도 움직임이 없었다. 마리아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죽음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 224p

 

워낙 커다란 사건들을 자주 겪으며 살아오다보니 조금은 덤덤해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독 올해 너무도 무참한, 황망한 죽음들이 많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이 그처럼 허망하게 가라앉았고, 그 상처는 여전히 현재를 맴돈다. 또 분단이 낳은 기형적인 병영문화가, 한창 자유를 누리고 꿈을 찾아 떠나야 할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 뿐 일까. 안타까운 죽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온다. 도대체 왜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잘 산다고 거들먹거리고 있는데, 이렇게 억울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죽음들은 멈추질 않는 것일까. 과연 우리는 얼마나 잘 살고 잘 죽고 있는 것일까.

 

후배 하나가 명절을 맞아 외가를 찾았다가, 그만 얼굴을 붉히며 흥분하게 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다름 아닌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었다. 후배에게 일장 훈계를 하신 외가의 어르신은 이런 논리로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가족들에게 일인당 40억 원이 넘는 보상금이 지급된다고 들었다. 그게 좀 큰돈이냐. 이제 할 만큼 했으니 보상금을 받는 선에서 끝내야 한다. 사실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진실을 밝히라는 것이 이 사회에서 가능한 일인가. 누구하나 관련되지 않은 집단이 없는데, 정치권이나 정부나 모두 연관이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을 끝까지 추적해 진실을 밝힌다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더 이상 세월호 문제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다른 모든 국정을 멈추게 하지 말고, 보상금을 받는 선에서 끝내야 한다.”

 

여기에 후배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내가 이야기를 듣고 느낀 첫 번째 감정은 분노가 아닌 슬픔이다. 40억 원이라는 현실로 못다 푼 과거를 묻어버리자는 논리, 그리고 무엇보다 죽은 아이들의 목숨 값으로 그 정도면 많은 것 아니냐는 생각.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순식간의 장사치, 흥정꾼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참함. 나는 슬펐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생명은 모두 똑같다. 똑같이 대우받아야 하고,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똑같이 아끼고 보호받아야 한다.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의 생명이 더 소중하고, 가난한 이들의 생명이 하찮을 수 없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사고를 당한 이들의 죽음과 배를 타고 가다 죽은 이들의 생명이 다르지 않다. 그게 맞다.

 

하지만 정말 어이없게도 돈에 환장하며 살아온 우리들에게 이미 죽음은 계산되어질 수 있는 금액에 다름 아니다. 보험회사들은 버젓이 사망보험을 광고하며, 미리 보험에 가입해, 죽은 뒤 가족들에게 큰돈을 남기라고 협박한다. 상조회사들은 미리 돈을 내어, 나중에 폼 나게 죽으라고 강요한다. 돈이 없다면 죽지도 못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 모두가 천대받고, 돈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이게 제대로 된 세상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렇게 삶과 죽음 모두를 천대시하며 살아갈 것이라면, 도대체 경제발전은 왜 하는 것일까, 왜 우리 국민들은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경제 살리기, 국가의 번영과 발전이라는 허명을 위해 개처럼 일해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누구에게나 삶이 존중받아야 하듯, 죽음 역시 소중히 다뤄져야 한다. 개죽음이라는 말이 더 이상 함부로 나오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그렇게 마지막을 맞아야 한다. 이것마저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국가, 정부는 없어져야 마땅하다. 망해야 한다. 철저히.

 

책은 안락사, 존엄사에 대한 이야기다. 이탈리아 사르데냐 방언으로 끝을 내는 여인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아카바도라. 그녀는 고통 속에 삶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병자가 편안히 마지막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선사하는 것은 죽음, 때문에 그녀는 필요악과 같은 존재다. 그녀의 역할이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유령처럼 사람들 사이에 떠돈다.

 

넉넉지 못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마리아, 이미 딸이 셋이나 있는 안나 리스트루에게 마리아는 달갑지 않은 혹과 같은 존재다. 이런 마리아를 눈 여겨 보던 재봉사 보나리아는 안나의 동의하에 마리아를 양녀로 받아들인다. 사르데냐 풍습 중 하나인 영혼의 딸을 통해서.

 

마리아는 성스럽기도 하고 무언가 비밀스러운 집안의 분위기에 차츰 적응해가며,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보나리아의 비정기적인, 갑작스런 외출을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외출을 다녀온 후에는 반드시 마을의 죽음이 닥쳤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소꿉친구의 형이 사고를 당해 장애를 얻게 되고, 갑작스런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가 죽음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된 마리아, 그리고 보나리아. 마리아가 보나리아의 정체를 어렴 풋 알아가며,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갈등이 만들어지고, 불안하게 이어지던 집안의 평화 역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안락사(euthanasia)라는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 eu(well)thanatos(death)라고 한다. 굳이 해석을 하면 좋은 죽음이나 아름다운 죽음정도가 될 것이다. 국내에서 안락사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2009년 이른 바 김 할머니 사건판결이었다. 식물인간 상태에 있던 할머니의 산소호흡기 제거를 허용한 당시의 판결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는데, 김 할머니는 산소호흡기를 제거한 뒤에도 201일을 더 살았다.

 

감히 누가 인간의 죽음에 관여할 수 있을까. 죽음은 늘 그래왔듯 인간의 의지를 초월하는 저 너머의 이야기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동안 안락사, 존엄사 등을 인정하지 않았고,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다루는 것은 오직 신의 영역이라 믿었다. 하지만 고통을 겪고 있는 당사자 혹은 그 가족들에겐 전혀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생명은 소중하지만, 때로 본인의 의지와 무관한 연장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안락사, 존엄사 보다는 의문사, 돌연사, 과로사 그리고 무참한 죽음이 더 가까운 우리들에게, 이 책은 전혀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죽음에 관여할 수 있을까, 또한 감당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은 안락사 문제를, 저자는 신화와 현실을 넘나들며 묵직하고도 날카롭게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도저히 선악으로 구분이 불가능한 안락사 문제에 대해 스스로 고민할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

 

유일하게 자살할 수 있는 동물이 바로 인간이라 한다. 그 누가 비난하고 폄하한다 해도 자살은 결국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인간만의 권리이자 본능이다. 물론 자살은 슬픈 결정이다. 아픔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자살을 방조하거나 부추기고 있는 이 사회의 무책임한 무자비한 시스템에 있지 않을까.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이 사회의 썩어빠진 영혼이 정화되지 않는다면, 자살률 세계 1~2위라는 오명에서, 우리는 좀처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세월호 사건도 그렇게 봐야 한다. 생명이다. 그 무엇보다 생명에 관한 문제이다. 그 생명을 제대로 보호하고 아껴주지 못한 우리들의 책임이다. 정부의 문제이다. 이 땅의 정치인들의 이야기다. 그것 외에 다른 것들은 전부 다 개소리다.

 

많지 않은 분량에 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죽음이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뤄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세월호를 떠올린다. 우리는 끝나지 않았다. 끝난 것은 단 하나도 없음을.

 

YES마니아 : 로얄 w*******7 2014.09.1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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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를 도와 주는 사람-아카바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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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내가 살았던 시골에는 백살쯤은 가볍게 넘겼다고 알려진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그 할머니의 아들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자주 논길을 걸어 우리 마을로 오곤 했었는데,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이 벼 사이로 보일때마다 우리는 할머니의 삶에 대해 수군거렸다. 백살은 넘었을거란 말부터, 온통 백발이던 머리카락이 다시 검어졌을때는 며느리에게 너무 악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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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내가 살았던 시골에는 백살쯤은 가볍게 넘겼다고 알려진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그 할머니의 아들이 우리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자주 논길을 걸어 우리 마을로 오곤 했었는데,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이 벼 사이로 보일때마다 우리는 할머니의 삶에 대해 수군거렸다. 백살은 넘었을거란 말부터, 온통 백발이던 머리카락이 다시 검어졌을때는 며느리에게 너무 악독하게 굴어서 죽지 못한다는 말까지 우리는 할머니가 들을새라 속닥거렸다. 흰 머리가 다시 검어진 것을 본 적이 없던 우리들인지라 할머니의 검은 머리카락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멀리서 논둑길 사이로 보이는 할머니의 머리만 보고 수군거렸지만 행여나 백살이나 넘은 사람의 신통력으로 우리가 주고받는 말들까지 다 들어버릴까 겁이 났다.

 

  할머니는 무수한 소문들을 달고 다녔다. 시장 가다가 뒤돌아보니 자기 집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어서 되돌아 가보니 며느리가 시어머니 없는 틈을 타 밥을 짓고 있었는데, 그 밥솥을 열고 잿가루를 뿌려 버렸다는 이야기는 그냥 가벼운 수다꺼리에 불과했다. 그런 수다꺼리에 더해 아득한 숫자 같았던 백살을 거뜬히 넘긴 할머니다 보니 어린 우리들에게 그 할머니는 숫제 동화에나 나오는 마귀할멈의 환신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문제는 늘 그 소름끼치도록 하얗던 백발과 백살이라는 숫자였다. 지금쯤에야 틀림없이 그 할머니도 세상을 떠났겠지만 나는 그 할머니가 윗마을에서 우리 마을로 내려올때마다 보이던 하얀 머리카락을 생각하면 마흔이 넘은 이 나이에도 살짝 한기가 드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어느 날 문득 태어나기도 했지만, 어느 날 문득 죽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태어남의 모양이 모두 다르듯이 죽음의 모양 또한 모두 다를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죽음과 친밀해진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한다.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던 어린 시절의 죽음에 대한 생각과 다르게 이젠 죽음이라는 것이 그리 무섭지도 낯설지도 않기 때문이다. 태어난 모든 것들은 죽는다는 숙명을 나도 모르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 소설 <아카바도라>는 우리 말로 하면 '안락사를 도와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안락사 문제가 한참 사회문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안락사는 범죄로 취급받는다. 한번도 안락사라는 문제에 직면해 보지 않아서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 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사회문제가 되는 것을 보면 인간사에서 참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중의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나보다. 그러나 하나의 단서는 최근에 시어머님을 요양병원으로 모실때 병원측에서 위급할때 생명연장시술을 하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우리 부부는 서로를 쳐다보면서 답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노년이란 것은 알지만 그 물음에 'NO'라고 대답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물음을 던진 사람이 다른 환자들은 거의 대부분 시술을 하지 않는데 동의했다고 해서 우리도 가까스레 양심의 가책을 덜어낸채 동의를 할 수 있었다. 아마 그 물음에 우리 단독으로 결정을 하라면 우리는 그날 그 병원에서 한참을 서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의 한 작은 섬에서 아카바도라를 하는 재봉사에게 입양된 마리아는 유복한 환경에서 그늘 없이 자라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기를 입양한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카바도라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없었던 마리아는 토리노로 떠나 버린다. 그때 자신을 입양한 보나리아는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지만 '내가 마시지 않는 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라'는 이야기만 전한다. 토리노에서 유모를 하던 마리아는 아카바도라였던 보나리아와 화해하지 못하고 외면하는 방법을 택한다.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던 중 자신이 돌보던 소년이 과거의 고통과 화해하는 것을 보고 보나리아를 떠올리는데 그때 보나리아가 위독하다는 전보가 날아든다. 망설임없이 고향으로 돌아온 마리아, 죽음앞에 서 있는 보나리아를 보며 그녀는 숱한 죽음의 모습을 생각한다. 고통속에서도 보나리아가 쉽게 죽지 못하는 것은 그동안 보나리아가 지은 죄, 즉 안락사를 도운 죄값을 치르지 못해서라고 생각한 마리아는 그동안 보나리아가 죽인 사람들의 가족을 찾아가 잘못을 빌 것을 제안한다. 그것을 거절하는 보나리아를 보면서 마리아는 역으로 보나리아가 죽인 사람의 가족을 찾아가 용서해 줄 것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보나리아가 맞이하는 죽음의 모습은 아니었다. 살아는 있지만 살아 있다고 하기 어려운 보나리아를 보면서 마리아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아카바도라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마리아는 보나리아와 화해하고, 자신이 거부했던 과거의 시간과도 화해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아카바도라라는 일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마리아가 보나리아의 아카바도라가 되었던 것은 그녀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존엄하지 못했다.' 보나리아가 더 이상 존엄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그때가 바로 삶을 마감할 때라고 마리아는 생각한 것이다.

 

  안락사 문제는 인간 삶의 존엄성 문제와 생명의 중요성 문제로 줄곧 대립한다. 세상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이 문제에는 수학의 '0'처럼 끝없는 논쟁만 있을뿐 정답이 없다. 이 책을 읽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내릴 수는 없지만 삶의 존엄성이라는 사유의 틀안에서는 비켜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번에 내가 간접적으로 겪어 보았던 잠깐의 경험도 큰 역할을 했다. 시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여러군데의 요양병원을 돌아보는동안 나는 줄곧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시달렸다. 지금도 그 물음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삶이 더 이상 존엄하지 않다면 안락사도 삶의 한 방법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생각 역시도 현재 진행형이다. 요양병원을 돌아보는 동안 숨을 쉰다는 것만으로 살아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나는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용기를 잃었기 때문이다.

 

 



h******0 2014.01.1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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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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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생을 끝낼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생의 시작(아이를 낳고 기르는)이 부모에게 속한 것과는 다르듯 말이다. 때때로 원하지 않은 생명이 태어나기도 한다.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부모들은 아무도 모르게 기관이나 아이를 원하는 집에 보내기도 한다. 반면, 양자라는 이름으로 친척이나 지인의 집에서 자라기도 한다. 모두 부모에 의한 결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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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의 생을 끝낼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생의 시작(아이를 낳고 기르는)이 부모에게 속한 것과는 다르듯 말이다. 때때로 원하지 않은 생명이 태어나기도 한다.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부모들은 아무도 모르게 기관이나 아이를 원하는 집에 보내기도 한다. 반면, 양자라는 이름으로 친척이나 지인의 집에서 자라기도 한다. 모두 부모에 의한 결정이다. 아이가 원해서 부모와 헤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말이다. 소설 아카바도라는 주인공 마리아가 양 어머니 보나리아와 처음 만나면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보나리아의 영혼의 자식이 된 것이다.

 

 소설은 1950년대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소레니를 배경으로 입양을 소재로 한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전쟁은 많은 과부를 남겼다.  보나리아와 마리아의 친모 역시 그러했다. 아이가 없던 보나리아는 넷 째 아이로 태어나 친모에게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된 마리아를입양하고 새로운 가족이 된다. 바느질을 하는 보나리아는 마리아를 여느 아이처럼 대한다. 특별히 애정을 쏟거나 하지 않는다. 마리아 역시 보나리아를 잘 따른다. 학교에 잘 다니고 보나리아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한 밤중에 보나리아가 외출을 한 후 마을에는 누군가의 죽는다는 것이 궁금하지만 마리아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는다. 마리아는 형제들과 어머니가 있는 집에 일이 있을 때마다 방문하며 자신의 생활에 만족한다. 버림 받았다는 걸 알지만 보나리아와 함께 지내는 일상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아이가 된 것이다.

 

 마리아의 친구 안드리아의 형 니콜라가 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게 된다. 니콜라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삶이 원망스럽고 더이상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니콜라는 자신을 보러 온 보나리아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말한다. 그는 보나리아가 아카바도라(끝내는 여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나리아는 니콜라의 간곡한 부탁을 끝내 수락한다.

 

 형의 방에서 나오는 보나리아를 본 안드리아는 형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고통스러운 그 사실을 마리아에게 말한다. 보나리아에게 모든 사실을 전해들은 마리아는 그녀를 떠난다. 삶에 대해 한 가닥의 희망도 남아 있지 않았던 니콜라에게 죽음은 유일한 선택이었을까. 보나리아의 행동은 과연 옳은 것일까. 마리아는 보나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집을 떠나 아이들의 보모로 일하던 마리아는 보나리아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돌아온다.

 

 ‘그녀는 밤에 보나리아의 방에 혼자 남아 있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리아는 두 사람 모두에게 감옥에 갇힌 것 같은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행동을 실천하는 자기의 모습을 떠올렸다. 적대감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오를 때마다 그 일을 스스로 정당화하려는 욕망 때문인지 신성을 모독한다는 느낌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231~232쪽

 

 죽음을 앞둔 보나리아를 간호하면서 마리아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생각한다. 보나리아를 편하게 보내줄 수 있는 이는 자신뿐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안락사라는 조심스럽고 불편한 주제를 담담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아쉬운 건 보나리아가 무슨 이유로 아카바도라의 삶을 살게 된 이유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혼자서 맞이해야 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나눠 줄 아카바도라의 생은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리아가 영혼의 자식이 된 것처럼 말이다.

 

 “네가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라, 마리아 리스트루. 살아가다 보면 네가 하기 싫은 것도 선택하게 될 거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

r*********s 2013.01.2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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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바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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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내가 서평을 쓸 때를 얘기하는 게 맞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유독 글을 쓸 때 첫 문장을 어떻게 해야 할까,아니면 첫 문단을 어떻게 써야 할까하는 고민을 자주 한다. 마치 한 번도 글을 못 써본 사람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내가 좋아하는 장르소설이나 인문책 같은 경우에는 그런 고민이 없지만 일반소설이나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책을 읽었을 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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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내가 서평을 쓸 때를 얘기하는 게 맞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유독 글을 쓸 때 첫 문장을 어떻게 해야 할까,아니면 첫 문단을 어떻게 써야 할까하는 고민을 자주 한다. 마치 한 번도 글을 못 써본 사람처럼 말하는 것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내가 좋아하는 장르소설이나 인문책 같은 경우에는 그런 고민이 없지만 일반소설이나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책을 읽었을 때 더 고민이 커지게 되는데,이번에 읽은 <아카바도라>라는 소설을 읽고 나서 어떻게 써야할 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그 고민을 한 이유가 바로 이 작품의 소재와 주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다 읽고나서 그런 고민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물론 제목의 뜻을 안다면 어느 정도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 지 알 수 있겠지만,이 책 제목 '아카바도라'는 이탈리아어로 '끝을 내는 여인','마무리하는 여인'이라는 뜻인데,이 책이 다루고 있는 안락사와 연관지어 안락사를 시켜주는 여인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작가 미켈라 무르지아의 고향인 사르데냐에 있었던 일명 '아카바도라'라는 풍습을 가진 한 여인과 관련된 안락사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보나리아 우라이는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인 마리아 리스트루를 입양한다. 처음에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지만 차츰 적응하며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부턴가 보나리아가 밤만 되면 어딘가로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다음날 마을에서 한 노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게 보나리아와 관련된 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리아의 이웃에 사는 바스티우 형제가 다른 이웃과 다투다가 그 이웃의 총에 맞고 다리를 절단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형인 니콜라가 죽은 그 다음날 마리아가 니콜라의 동생인 안드리아로부터 그녀의 어머니인 보나리아가 형 니콜라를 안락사시켰다는 말을 듣고 보나리아의 진짜 모습이 어떤 것인지 혼란스러워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 보나리아에게 비극이 찾아오게 되면서 이 두 사람은 또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죽음을 맞는다는 건 어찌보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죽음에 있어서도 어느 것이 진정한 죽음인지 이 작품을 통해서 어느 정도 깨달은 것 같다. 비록 보나리아가 안락사로 죽음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작품 말미에 그녀 자신이 죽게 되면서 마리아가 그녀를 이해하기 시작하고 '아카바도라'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결말 부분은 나로서는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 작품이 비록 '아카바도라'라는 풍습을 소재로 삼긴 했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관심을 가지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비록 그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장치가 작품 속 캐릭터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게 하는 결과로 이어지긴 했지만 이 작품이 안락사에 대한 찬반 논쟁을 다루지 않고 순수하게 인간 본연의 감정과 대화로 풀어가는 부분은 오히려 이 작품이 안락사라는 다소 충격적인 소재가 나옴에도 큰 무리 없이 읽을 수 있게 해 준 존재였다.

 

2013/1/13

l*****3 2013.01.1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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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바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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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전 딸아이와 대학로 소극장에서 그해 가장 인기였다는 <미러클>이란 연극을 본 적이 있다. 바로 이 책 에서 다루고 있는 안락사를 주제로 한 연극이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현실적인 문제  (가족의 경제적 부담, 기타) 두가지중 어떤 걸 우선 생각해야 하느냐는 대사는 이런저런 생각을 불러 일으켰었다.   16-7년전 친정엄마께서 뇌졸중으로 입원하셨다.  뇌졸중이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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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전 딸아이와 대학로 소극장에서 그해 가장 인기였다는 <미러클>이란 연극을 본 적이 있다.

바로 이 책 에서 다루고 있는 안락사를 주제로 한 연극이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현실적인 문제

 (가족의 경제적 부담, 기타) 두가지중 어떤 걸 우선 생각해야 하느냐는 대사는 이런저런 생각을 불러 일으켰었다.

 

16-7년전 친정엄마께서 뇌졸중으로 입원하셨다.  뇌졸중이 재발한 것인데 서울의 종합병원에서

 일년 넘게 입원해 계시면서 무려 4차례에 걸친 뇌수술을 받으셨음에도 차도가 없어 퇴원을 결정하였다.

엄마가 퇴원할 때 가족들은, 엄마가 다시 건강해 지기는 힘들거라고 단념했었다. 엄마는 퇴원 후 팔개월 뒤 돌아가셨다.

 침대에 누워 주무시는건지, 눈을 감고 계신건지  구분이 안가는 상태의 엄마를 보면서, 엄마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가족을 못 알아보시고, 자리에  누운채 일어나지도 못하셨다. 씹지를 못하셔서 식사는 환자식으로 드렸는데

준비한 재료를 모두 믹서에 넣고 갈아서  코에 연결한 호스에 부었다.24시간 누군가 엄마를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 엄마를 지켜 보는 건 가족 모두에게 고통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엄마가 안락사에 이르도록 조치를 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 책에 나오는  보나리아는 사랑하는 사람을 전쟁에 보낸 후,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여인이다. 그녀는 동네에서

재봉사 일을 하는 한편, 아카바도라 이기도 하다. 아카바도라란 <죽음의 어머니> 라고 하는데, 안락사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할수 있겠다. 보나리아는 노년에, 동네의 가난한 과부의 딸 마리아를 입양하여 키운다.

마리아는 영특한 아이였는데 보나리아가 니콜라의 죽음에 개입된 걸 알고 도시로 떠난다. 도시에서 지내던 마리아는

보나리아가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허약해 질대로 허약해진 보나리아를 돌보던 마리아는 드디어

보나리아를 편안히 보내려고 마음 먹는다.

 

나는 지금껏 안락사란 나이들어 건강이 나빠져 더이상 예전의 건강을 되찾기 어려운 상태일 때  그 사람이 목숨을 부지하려고

더 이상 품위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것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보나리아는 나이가 새파란 니콜라를

죽음에 이르도록 도와주고도 전혀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듯하여 무서웠다. 나이든 사람이던 청년이던 죽으면 그뿐이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니콜라의 부탁을 들어준게 마치 괴로와 하는 니콜라에게 은혜를 베풀기라도 한것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사실은 이 책의 내용이 실화가 아니고 소설이라 더 무서웠다. 소설은 작가의 생각에 따라 내용이 전개되는 것이니 말이다.

잊을만 하면 총기난사같은 사건이 일어나 예전에 비해 사람들이 생명을 경시하는 분위기다.  이 책의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확이 어떤 것일까 생각하며 책장을 덮었다. 세계적인 고령화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라면
안락사에 대한 좀더 구첵적이고 합당한 명분을 제시했어야 하지않나 싶다. 사람은 언제가는 죽는다.
세상에 태어날 때 혼자 태어난 것처럼 죽을 때도 혼자간다. 잠깐이지만 나도 고통없이 죽음을 맞이하였으면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런 생각은 처음해 본 것 인데, 이 책을 읽고나니 문득 죽음이 가까이 있는듯 느껴져서 말이다.
l*****1 2013.01.1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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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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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의 천덕꾸러기 막내딸이 혼자사는 노부인네 집에 양녀로 팔려간다. 노부인은 이따금 알 수 없는 외출을 하고, 마을에 만성 질환으로 임종을 앞둔 사람이 외출 다음날 장례를 치루는 일이 반복된다. 이웃의 젊은 남자가 사고로 다리를 잃게 되고 죽음을 끈질기게 요청하며, 노부인이 결국 죽음을 이루어주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주인공은 집을 떠나 먼 영국으로 떠난다. 영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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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의 천덕꾸러기 막내딸이 혼자사는 노부인네 집에 양녀로 팔려간다. 노부인은 이따금 알 수 없는 외출을 하고, 마을에 만성 질환으로 임종을 앞둔 사람이 외출 다음날 장례를 치루는 일이 반복된다. 이웃의 젊은 남자가 사고로 다리를 잃게 되고 죽음을 끈질기게 요청하며, 노부인이 결국 죽음을 이루어주는 광경을 목격하게 된 주인공은 집을 떠나 먼 영국으로 떠난다. 영국에서 돌보미 일을 하다가 집주인의 큰아들과 사랑에 빠져 쫒겨나고, 다시 오래된 집으로 돌아와 노부인의 임종을 지키게 된다. 결국 노부인은 자연사하게 되는데.. 그 광경을 지켜본 후 고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본인도 죽음을 가져오는자, 아카바도라가 되려고 하는 듯 하며 소설은 끝난다.

 

의료현장에서 자주 보는 자연사-안락사문제라 소재 자체가 쇼킹하지도 않고, 죽음이 일상이어서인지 집나간 주인공이 이해가 안가기도 한다. 그런데...

 

본인은 죽기를 원하지 않는 노인을 안락사하도록 종용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그린 장면이 있다. 내가 심심찮게 만나야만 하는 환자가족들과 바로 오버랩이 되었다. 입으로는 연세가 많으신데, 고통받으며 사시는게 자식된 도리로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결국은 이십여만원 병원비가 아까워서...인 경우가 많다. 죽는순간까지도 간절히 의사손을 잡으며 아픈 것을 낫게해달라는 환자가 사실은 훨씬 많은데. 겪어보지도 않고 가족들의 위선을 이렇게 생생하게 그려내기는 쉽지 않을 듯.

j******0 2015.07.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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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막 모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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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바도라'라는 이상한 제목보다 더 시선을 끌었던 것은 '안락사' 라는 말이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주제가 '안락사'와 '입양'이라는 것, 과연 세상은 '안락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 궁금했던 까닭이기도 했다.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와 그의 가족을 사랑으로 돌본다는 '호스피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이 묘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싶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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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바도라'라는 이상한 제목보다 더 시선을 끌었던 것은 '안락사' 라는 말이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싶어하는 주제가 '안락사'와 '입양'이라는 것, 과연 세상은 '안락사'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 궁금했던 까닭이기도 했다. 죽음을 앞둔 말기환자와 그의 가족을 사랑으로 돌본다는 '호스피스'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이 묘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있어야 한다는 자체가 쉽지않은 일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안고 마지막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간혹 우리는 듣고, 말한다. 죽음과 삶은 하나라고. 그래서 모두가 숭고하고 존엄하다고. 그런데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픈 몸과 싸워가며 처절하게 살아내는 그 짧은 동안의 삶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찾아낼 수 있을까?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과 그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의 느낌은? ..... 지금도 우리는 주변을 통해 '안락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래서는 안된다느니, 그래야 한다느니, 그럴 수 없는 일이라느니... 이 문제에 있어서 내 생각은 이렇다.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안락사'라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는 사고는 그들이 어떤 문화속에서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냐가 가장 큰 문제이지 싶다. 장례풍습만 보더라도 그렇지않은가 말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안락사'에 관한 문제는 오래도록 싸워야 할 과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내 삶의 마지막을 살고 싶진 않다. 가끔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미련없이 '안락사'쪽을 택하게 해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을 가족들에게 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반대에 부딪히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어도 주변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은 듯 하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환자의 고통보다는 자신들이 겪어내야 할 마음의 고통을 우선시하고 있다는 걸 보게 된다. 할 만큼은 해 봐야 한다는 그 말 한마디에 환자의 고통은 처절해진다. 그리고 비참해지기까지 한다. 그 인간성이라는 것을 모두 잃고난 후에야 죽음이 허락되어지는 모순은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오래전에 읽었던 김정현의 <아버지>라는 글이 생각났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준 의사와 가족들에게 책을 읽고 있던 나조차도 고마움을 느낄 수 있었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리다. 하지만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그 아버지의 마지막은 행복했을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랬기에 이 책속에서 상대방의 고통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기꺼이 내 주었던 보나리아에게 나는 진정한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비록 자신의 양녀에게 이해받지는 못했어도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양어머니의 곁을 떠났던 마리아가 결국 다시 돌아와 양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다는 설정속에서 알 수 없는 진한 느낌이 전해져왔다. "내가 마시지 않는 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마라"... 보나리아의 이 말을 이해하기까지 마리아에게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끝내는 평안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 보나리아의 마지막은 눈물겨웠다. 비록 양녀였으나 마지막까지 곁을 지킬 수 있었던 두사람사이의 끈끈함이 고여있는 듯 했다.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결국 자신의 몫이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 역시 자신의 몫이다. 그런 모든 일속에 상대에 대한 마음이 기본적인 배경으로 깔려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표현하지 못했던 마리아와 보나리아의 사랑, 서로에 대한 그 마음을 놓치지 않아 다행이다. /아이비생각 


i****9 2013.01.1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