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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의 예언'을 다 읽고 드는 생각은 이 소설은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보면 한 개인이 역사의 흐름에서 어쩔 수 없이 다양한 경험을 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는 역사 드라마같지만 정작 이 소설의 내용은 한 개인의 자아탐구라고 할 수 있다. 나란 누구인가? 한 개인이 알 수 있는 부분은 어디까지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종교를 통해 우리는 위안을 얻을 수 있는가와 하나님을 믿는 종교들이 서로 왜 그러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소설이 좋은 이유는 소설을 통해 우리는 전혀 접하지 않은 다양한 분야에 대해 알 수 있고 - 내용이 팩트인지 아닌지는 논외로 치고 - 생각을 해 보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가들은 특정분야의 전문가들보다는 깊고 심오한 지식은 없을지라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관련되어 벌어지는 사건을 특정분야와 결부하여 생각해 보게 만들고 고민하게 만들고 궁금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해 준다. 차라리 그들이 특정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서 오히려 더 참신하게 미처 눈여겨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 화두를 던져주기도 한다.
'루나의 예언'은 다빈치 코드라는 광고문구로 인해 완전히 착각을 하게 만든다. 심지어 어딘지 모르게 '루나의 예언'이라는 제목은 신비스럽고 중세시대라는 배경은 환상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만들지만 정작 소설은 예언을 보여주고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하나씩 보여주지만 예상을 했던 다빈치코드와 같은 추리, 탐정 소설류는 아니다. 그보다는 소설의 외피를 감싸안고 종교라는 것에 대해 종교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종교를 믿지 않거나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고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신이 있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서 도저히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나 혼자의 개인으로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칠 수 있지만 '왜 저토록 선한 사람들이 그 힘든 고생을 겪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지'에 대해서 진정 신의 뜻을 알 수 없다. 그런 질문에 대해 고민을 해 보지 않았다면 어쩌면 감히 말하건대 신을 믿고 있다고 말만 하는 사람일 것이다.
절대 악과 절대 선은 없겠지만 그래도 신이 있다면 저와 같은 사람이 저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거다. 또한, 저처럼 선한 사람이 저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해 할 수 없다. 지구상에 있는 종교중에 가장 숫자가 많은 기독교(카톨릭)와 이슬람이 결국에는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 가장 영향력 있는 유대교까지 - 서로 상대방에 대해 못 잡아 먹어 안달이고 모든 전쟁과 불화의 씨앗이 이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다.
종교의 본질을 더욱 강하게 만들고 효과의 지속력을 위해 하나씩 만들어지고 덧입혀진 것들이 어느덧 본질을 뛰어넘어 본말이 전도되는 현상을 지켜볼 때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내용과 형식중에 형식은 내용을 빛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을 해야 하는데 내용보다는 형식을 갖고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를 하고 제대로 된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는 논란은 진정으로 신이 원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만든다.
'루나의 예언'에는 루나라는 예지력을 지닌 인물이 한 사람에게 예언을 하고 그는 자유 의지를 갖고 살아가지만 예언대로 하나씩 실현이 된다. 그러는 와중에 지식을 쌓고 무력을 갈고 믿음에 대해 탐구하지만 예언은 하나 둘 씩 이뤄진다. 아무리 내가 발버둥쳐도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라는 것은 어느정도 정해져 있는가에 대해 깊은 번민과 좌절을 겪게 된다. 우리가 부자부모 밑에서 태어나느냐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냐에 따라 운명은 정해진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자유의지로 운명을 극복할 없는가에 대해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예언이 하나 둘씩 실현될 때마다 두려움을 느끼고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가에 대해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되지만 운명의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분명히 있고 그 선택의 판단은 순전히 본인의 몫이다. 예언이 이뤄진 후에 예언이 이뤄졌다고 두려워하지만 분명히 예언대로 하지 않을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다. 분노를 삭힐 수 있었고,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증오를 안 낼수 있었고 질투하지 않을 수 있다.
두려워 할 것인가 극복할 것인가, 누군가를 증오한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분노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질투할 것인가 이해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어떤 판단을 하건 간에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본인의 책임이다.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종교에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다. 인간은 결코 신의 꼭두가시가 아니기때문이다.
모든 종교에서는 온갖 좋은 말들과 깨달음을 우리에게 선사하지만 모든 종교는 결국 사랑이 아닌가한다. 문제는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고 저주할 수 있고 죽일 수 있고 분노할 수 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우리는 잘못된 행동을 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분명히 그런 것이 아닐진대 남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특히,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는 표현처럼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십자군전쟁이 벌어졌고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이슬람의 자살테러가 벌어진다. 과연, 이것들이 진정으로 신이 원한 것인지, 신의 이름을 빙자한 인간이 - 특정인간 - 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지식은 믿음의 정 반대 대착점에 있는 요상스러운 것이 아니라 진정 믿음을 더욱 밝혀주는 등대의 역할을 한다. 십자군 전쟁이나 자살테러를 자행한 사람들이 믿음으로 실행했지만 그들이 생각한 진정한 믿음을 지식이라는 매개체로 투영했다면 혹시 달라지지 않았을까싶기도 하다. 물론, 믿음과 지식은 어딘지 같이 공존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로 보인다.
지식인중에는 신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고 더욱 신에 귀의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신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모태 신앙인 기독교라 그럴 수 있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본다. 인간의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걸 신의 섭리로 간단하게 치부할 수 있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루나의 예언'에서도 지식이 쌓일수록 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존재유무에 대해 고민을 하지만 결론적으로 신을 믿는것처럼 솔직히 신을 믿는것이 난 더 좋다. 거창하고 대단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루나의 예언'은 버라이어티한 인생을 산 한 개인의 이야기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가르침을 받으며 신에 대해 자신에 대해 성찰하는 철학책이라 할 수 있다. 기도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실체에 대해 고민하고 믿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소설의 관점으로 책을 읽어도 지루하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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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작품. '다빈치 코드'의 댄 브라운을 뛰어넘는 프랑스 최고 지성의 15년 역작. 2008년 쓰여져 2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어 세계적인 화제작으로 떠오른 종교 역사 소설. 이제 막 2권을 펼쳐든 이 작품의 저자 프레데릭 르누아르. 철학자이며 종교사학자이자 작가로, 현재 프랑스 최고의 지성 가운데 한 명으로 일컬어진다. 프랑스 최고권위의 종교 간행물 '종교의 세계' 편집책임자이기도 한 저자는 종교와 철학, 그리고 일반 문학을 넘나들며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현대작가로 손꼽힌다.
한 남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사랑과 종교의 참된 의미를 철학적인 필치로 이야기하고 있는 작품, 프레데릭 르누아르의 '루나의 예언'. 루치우스 스승이 머무르던 곳으로 찾아가지만, 이미 복면을 쓴 무리에게 살해당한 지 오래였다. 그곳에 머무르던 중 조반니는 지선의 동맹이라는 비밀조직과 마주하게 된다. 루치우스 스승과 피에트로를 살해한 그들이 교황에게 전하려는 편지를 빼앗기 위해 조반니의 뒤를 추적한 것이다. 편지에는 바로 예수의 점성이 담겨 있었다. 일당은 교회의 거룩한 교리를 멋대로 왜곡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타락한 교황들이 얼빠진 신봉자들과 이교도들의 실용서로 신앙을 더럽혔다고 주장한다. 루나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조반니는 수도원에서 치료를 받는 도중 비밀조직의 일원인 수도사를 발견하고는 살해한다. 극심한 분노감에 한순간 몸을 내맡긴 것이다. 조반니는 스승의 복수를 위해 비밀조직의 본부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던 중 알제 사략선에 붙잡혀 노예가 된다. 알제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히지만, 유대인이자 카발라 철학자인 엘레아자르와 그의 딸 에스더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된다. 그는 절망의 순간 에스더를 통해 새로운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 속에서 신앙심을 되찾는다. 참된 신앙을 되찾은 조반니는 마음에 새겨진 끈질긴 증오를 떨치고 스승과 친구를 죽인 '원수'를 기꺼이 용서한다! <출판사 서평에 적혀있는 2권의 줄거리>
에필로그 하나님이 용서하시리라! 엘레나의 마음에 감동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촉촉이 젖은 눈으로 에스더를 보았다. 에스더 역시 눈물이 맺혀 있었다. 프레스코 아래 마리아의 성화가 나무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엘레나는 성화를 쳐다보았다. 동정녀 마리아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이 성화를 그렸는지 아세요? 신부는 엘레나를 바라보다 성화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엘레나으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놀란 빛이 역력했다. 혹시 조반니 트라토레가 그토록 사랑했던 베네치아 여인 아닙니까? 그녀의 잠자는 모습에 영감을 받아 그는 눈 감은 동정녀를 그렸습니다.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젊은 베네치아 여인이 바로 당신이군요! 엘레나는 눈물이 솟구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눈물이었다.
종교 역사 스릴러. 조금은 부담스러운 장르다. 저 세가지 중에 흥미를 가진 것을 꼽아보라면 그나마 역사인데.. 역사 중에서도 국사에 대한 관심만 큰 놈이니.. 단지 스릴러라는 장르를 어렵게 느끼지 않는다는 이유로 앞의 두 단어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종교와 철학의 갈등이 한창이던 16세기를 배경으로 하여 펼쳐지는 소설, 한가지만 생각하기로 했다.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그냥 인간적인 관점에서 읽자. 물론 오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특별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품이라면 작가가 굳이 '소설'로 써내지는 않았을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앞세웠다.
루나의 예언. 프롤로그는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살인 사건으로 시작된다. 칼에 찔리고 독약을 마신 채 죽어가는 수도사들.. 이 모든 사건은 마녀의 오두막에서 상처 입은 채 발견된 의문의 남자가 수도원에 옮겨져 온 뒤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야기는 한 시골청년 조반니로 시선을 돌린다. 베네치아 원수의 외손녀이자 키프로스 총독의 딸인 엘레나를 처음 본 순간, 사랑하게 된 그는 엘레나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작품의 제목이 전면에 등장한다.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 사랑에 이끌려 그 삶에서 뛰쳐나온 그의 목숨을 살려준 빨간 머리의 루나. 그녀는 그가 살인을 저지를 운명을 지녔다고 예언한다. 작품은 사랑을 쫓아 자라온 환경과는 전혀 다른 삶에 도전하게 된 조반니의 고민과 함께한다. 과연 인간의 미래는 창조자인 신이 정해놓은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 바꿀 수 있는 것인가. 고난과 역경이 함께하는 운명의 시나리오는 두권의 책에서 긴박하게 진행된다.
프랑스에서 3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이 작품은 조반니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종교의 참된 의미를 전하기"도 하지만, 종교역사 스릴러로서의 속도감을 지니고 있어 읽기에 큰 부담은 없다. 특히 베네치아 궁전에서 감옥, 아토스 산에서 알제의 수용소, 예루살렘에서 키프로스의 유대인 거주지까지 종교적으로 의미있는 공간들을 수차례 오가며 그의 모험담의 스케일을 키운 덕분에 철학과 종교의 이야기들 역시 편협하지 않은 자유로운 사고에서 접근토록 한다. 타 종교를 배척하는 가톨릭 일부 종파의 위선과 폭력 종교적 일탈을 비판하고, 신앙의 본질을 이야기 하려는 저자의 생각과 의도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라스무스, 마르틴 루터, 사도 바울, 알 킨디,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마르실리오 피치노 등 수많은 학자의 사상을 만나볼 수는 있었지만 방대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나의 인물이 겪는 경험을 통해 모두 보여주고자 하는 탓에 조반니의 삶이 무협지의 주인공과 같이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으로 비춰진다는게 조금은 아쉬웠.
프랑스의 '다빈치 코드'라고 불린다는 작품. 위에도 적어놓았지만 그걸 작품의 홍보에 이용하는게 왠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 이유가 있었다. 예수의 인성에 초점을 맞추는 쪽이었던 '다빈치 코드'와 달리 '예수의 신성'을 강조한 점이 특징인 이 작품.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가 선풍적 인기를 얻을 때 저자는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와 이야기들을 찾아 역사적 사실과 대조한 뒤 '추적-다빈치 코드의 진실과 거짓'을 펴낸 바 있다고 한다. 때문에 그런 비교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허나 그건 소설가의 잘못이 아니다. 그가 써낸 건 분명 소설이고, 문제가 되는건 그걸 사실로 받아들이는 독자에게 있다.
종교, 철학.. 거창한 이야기를 펼쳐갔지만 핵심은 하나였다. 에스더가 했던 대사에 집약되어 있다. 한 가지만 생각했어요. 사랑하라는, 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는 것. 오직 사랑만이 신앙의 가치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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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399페이지, 24줄, 26자.
이것도 다르게 해석하면 좀 허무합니다. 이른바 '산전수전 다 겪어서 성공했다'가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고, 마지막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니까요.
조반니의 입장에서 보면 짧지 않은 생은 뭔가를 이루는 것 같은 삶입니다. 시골에서 태어났으나 좋은 스승을 만나 마음것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스승은 불행하게도 조반니에게 조금 가르친 다음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조반니는 유언이 된 말을 지키지도 못했고, 여자를 만나 사랑을 불태웠으나 달아나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신앙마저 흔들리는 위기에 처하고, 복수를 꾀하다 노예 생활까지 합니다. 다시 한 여자를 만나 잠시 행복해지는가 했더니 처음 여자의 원한을 씻지 못하고 죽어버린 셈이지요. 이건 비관론적인 입장에서의 글입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저자가 하고 싶었던 다른 말들을 삽입할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라고 하면 됩니다. 여기저기에 참 좋은 말들이 많이 매몰되어 있거든요. 글이야 읽는 사람이 받아들이고 싶은 부분만 실제로 읽히는 것입니다. 나머진 눈을 거쳐는 갔으나 진정 읽히지는 않은 것이고요.
개인적으로는 스토리가 좀 약해서 그 말들이 매몰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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