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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에 e북으로 구입해서 읽은 소설이다. 노벨상을 받았다는 소식에 이 작가의 작품을 전부 찾아 읽었고 이 책뿐 아니라 모조리 만족감을 느꼈다고 기억한다. 어떤 기회가 있어 새로 종이책을 샀고 다시 읽었는데 어째 이렇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는 건지. 예전에 내가 쓴 리뷰를 봐도 감정만 떠오를 뿐이다.
좋은 건 다시 읽어도 좋다는 점이다. 완벽하게 잊어버린 내 기억력이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 어쩌면 나는 나의 이런 기억력을 장점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읽어도 읽어도 새롭고 좋아지는 이 감각을 위해서는. 좋은 것만 챙기고 취하기에도 모자란 세상, 굳이 좋지 않은 것에 시간을 뺏길 필요가 있나, 이런 생각도 들고.
A pale view of hills. 창백한 언덕 풍경과 언덕의 창백한 풍경. 나는 왜 이 번역이 내내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창백한 건 언덕이 아니라 풍경인 것 같은데, 또 언덕 풍경이 창백하다고 한다면 그것도 그럴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확한 표현은 아닌 것 같은데, 언덕 그 자체보다는 보이는 풍경이 창백하다고 말하려고 한 것 같은데, 전쟁을 겪고 모든 걸 잃어버린 뒤에 살아남은 사람의 시선으로는 세상이 온통 색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모르겠다. 내가 쓸데없이 깐깐해진 것인지. 그래도 나는 둘의 느낌이 다른 것만 같고 언덕의 창백한 풍경에 더 이끌린다. 가끔은 이렇게 예민해지는 내가 또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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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작가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이 충격적으로 좋았다. 이전에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그만큼은 아니었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읽은 것은 2015년 11월이었고, 그때는 박근혜의 교과서 국정화 계획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일본이 벌인 식민 전쟁과 마냥 무관한 것은 아닌 자들이 등장하는 소설이 객관적으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남아 있는 나날》을 읽고 국내에 출간된 작가의 소설을 모두 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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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를 산 그들의 창백한 이야기,
최선의 전쟁보다 최악의 평화가 낫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또 평화는 구걸하면 얻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선제타격을 주장하면서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잠꼬대도 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으면서 민간인들의 집과 재산이 파괴되고 사라졌다. 러시아 군인 7,000명이 전사했다는 소식도 들리고, 우크라이나 여기저기에서 민간인 사망자 소식이 전해진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국민이 똘똘 뭉쳐 어려운 전황을 극복해간다는 소식에 위안도 받지만, 애초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없애려는 노력은 부족하지 않았는지 아쉽기만 하다. 나토에 가입을 시켜 줄 가능성이 당초 없었다면 우크라이나는 왜 나토 가입 의지를 표명하여 러시아에게 침략의 핑계를 주었을까 아쉽기만 하다. 다행히 서방의 군사 지원과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자주국방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으로 전쟁을 도발했다. 전쟁준비를 위하여 군사 내각이 들어서고, 일본 내 반전 세력들을 억압하면서 군국주의의 길을 내달았다. 일본의 군국주의 반대의 역사는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다. 한반도가 병점 되고, 중국에 만주국 괴뢰정부가 들어서고 점령된 지역의 국민들은 일본을 위한 총과 방패가 되고, 노동인력이 되어 전쟁을 억지로 지원했다. 그리고 종전이 되면서 우리는 해방을 맞았다. 중국 사정을 얘기하자면 글이 한없이 길어질 수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사정만 보더라도 일제강점기 사람들은 세계 곳곳으로 살기 위해 부유했고, 해방이 되어서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운명을 맞았다. 일본이 벌인 전쟁의 인과 고리로 우리는 남북이 나뉘어 전쟁을 치렀다.
가족을 잃은 자가 한둘이 아니고, 재산을 잃은 것이 한두 푼이 아니다. 쓰러진 마음을 가누지 못한 한은 이 땅 여기저기, 해외 곳곳에 시퍼렇게 살아있다. 이들의 상실은 누가 위로할까?
삶의 여백에서 새어 나오는 그 숱한 말들을 일본 출신의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창백한 언덕 풍경’이라는 소설은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극찬을 한다고 한다. 일본인이 하고 싶고 하지 못한 말들 말이다.
전쟁의 직접 책임이 있었던 일본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을 맞고 항복을 한 후, 나가사키를 무대로 한 일본의 사회를 소개하는 소설이다. 작가의 지난 작품을 통해서도 느꼈지만 일본인 특유의 감성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왜 일본 드라마를 보면 느껴지는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이야기와 정서 말이다. 하도 책을 소개하는 문구가 화려하고, 노벨상도 수상한 작가라고 하기에 많이들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술집 접대부의 아메리칸드림과 가족들을 잃은 사람들, 일생동안 지켜온 신념체계의 와해와 정립되지 않은 새로운 사상의 급류에 정신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진다. 주인공 에츠코의 둘째 딸 니키는 편지로는 동거하는 남자와 사는 이야기를 어느 정도는 자세히 하지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면 엄마에게 얘기하기를 주저한다. 부모 세대의 과거와 니키의 현재, 과거와 현재의 인과론적인 미래와 얽혀 있지만 ‘아무것에도 묶이고 싶어 하지 않는’ 니키다. 김남주 씨는 니키가 작가가 말하는 우리의 미래라고 설명을 한다. 글쎄 그렇게 하면 될까
영국과 미국에서 극찬을 하는 거장 중 한 명이라고는 하지만 일전에 읽었던 ‘녹턴’도 그렇고 우울하고 심란하고 창백하고 잿빛의 이야기와 감성이 묻어 나오는 것이 일본인의 글에서 느끼다 보니, "이거 오버 아냐?"라는 반감이 스멀스멀 생기더라. 고백하건대, 일본에 대한 반감은 특별하게 없다. 적당히 일반화하여 한 묶음으로 싫어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한 상실의 시대를 산 일본인들이라니.... 공감이 잘 안 되었고, 그들 스스로 우울과 창백을 얘기하는 것에 반감이 생기더라.
만약 우리 시대, 누가 나서서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 전쟁을 일으킨 편의 사람들은 우울이니 창백하다느니 얘기할 건 아니라는 말이다. 러시아 국민들이 푸틴을 말리지 못했으면서, 전쟁 때문에 “우린 우울해”라고 말한다면 당신 생각은 어떨까? 물어볼 일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반전 운동이라도 하면, 우울해질 시간도 없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쫓겨다니기 바쁜데 우울할 시간이 어디 있을까
개인의 책임이 한정된 전쟁에서, 후유증을 개인이 고스란히 받는 것을 무시했다는 비난은 고스란히 나의 몫이겠지.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
| 창백한 언덕 풍경은 노벨상 수상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데뷔작이다. 이시구로의 작품을 많이 읽고 팬이지만 데뷔작은 참 남다른거 같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나가사키가 배경이다. 원폭이 터진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버섯구름, 참혹한 사람들의 모습등을 묘사한 원폭문학과는 달리, 참혹한 상황에 대한 묘사는 없으면서 절제되고 담담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특유의 시선과 문체가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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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데뷔작인 창백한 언덕 풍경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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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험이 남은 삶에 미치는 영향은 얼마만큼일까. 경험의 폭과 깊이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너무 크고 짙은 어떤 경험은 막무가내로 사람을 지치게 한다. 일본인들에게 원자폭탄은 그런 경험일 것 같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세월호 사건 때를 떠올렸고.
무기력이나 냉소나 자포자기 같은 마음들. 아무런 희망도 생기지 않고, 같이 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도 느껴지지 않고, 내일이 기다려지지도 않고, 아무렇게나 될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맥 놓고 그저 견디는 삶. 그런 순간의 연속. 분명히 살아는 있는데 사는 것 같지 않은 날들을 가만히 있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한 발 한 발 내딛어야 하는 막막한 기분. 이 소설을 읽으면서 느낀 내 기분이 그랬다.
소설은 참 난감했다. 서술은 정갈했는데 내 마음은 헝클어졌고, 등장인물들은 제 몫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나는 주저앉고 싶었다. 이게 무슨 삶이란 말인가 싶어서. 자신의 삶의 흐름과는 아무런 맥락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가족도 이웃도 사라져 버렸고, 남은 사람은 남아서 살아야 한다는데 이렇게 어떻게 게다가 왜 사나 싶어진다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말이다.
좋은 일만 있는 생은 없을 것이다. 나쁜 일만 일어나는 생도 없을 테지. 더할 수 없이 찬란한 생도 있겠지만 죽는 것보다 더 힘들 것 같은 삶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삶이 하나의 형태로만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니 그 사이사이 굴곡들은 어떻게든 넘어가야 할 일이고. 이 소설에서는 이렇게도 넘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도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어쩌면 우리 주변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있으리라는 것을. 창백한 생의 먼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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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의 저작 4권째다. 제목이 '창백한 언덕 풍경'인데, 본 독자는 번여가는 아니지만 제목이 내용을 담고 있지 못하다. 번역가의 노고야 이루말할 것 없지만 그래도 제목 번역은 아쉽다. 의역을 할 것 같았으면 완전 의역도 좋았을 것 같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pale과hill이다. 역자는 '창백한 언덕'이라 의역했다. 소설 내용 자체가 핏기있는 내용은 아니다. 이혼도 있고, 전쟁도 있고, 자살, 타살, 서대간 갈등등이 주로 다뤄진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단어도 꽤 나온다. 물론, 맹목적인 느낌이 드는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언덕이라는 공간은 객관적이다. 즉, 창백한이라는 형용사를 앞에 사용함으로써 소설전체가 역자가 의도한대로 읽혀질 여지가 있다. 'a pale view' 자체가 해석되면 된다. 희미한, 옅은, 창백한 그리고 풍경, 광경 등의 조합이 된다. 그리고 pale은 경계라는 또 다른 뜻도 있다. 물론, 제목에 어울리는 번역과 품사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소설은 시간을 나눈다. 그리고 가치관이 나뉜다. 그리고 전쟁전 후로 나뉜다. 주인공들의 반응도 부모 자식간이라할지라도 혹은 이웃일지라도 분명히 넘어서지 못하는 선이 존재한다. 작가는 pale의 이러한 뜻도 분명 고려했으리라 생각한다. 언덕은 영국이든 일본이든 회상 속의 공간이든 현재의 공간이든 시공 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리고 pale이 적절히 해석되고 번역 되면 될 것이다. 나를 보내지 마, 남겨진 나날, 녹턴등과 같이 작가의 처녀작임에도 불구하고 답답한 여운 혹은 깊은 탄식의 여운을 남긴다. 소설이지만 작가는 결말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안타까움이나 희열, 다행이나 탄식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주관적인 객관이라고 해야할까? 작가가 썼기에 작가의 것이지만 마침 이 후는 철저히 독자의 몫이다. 대단한 철학적인 사상이 반영된것도 아니고 사회적 비판이나 긍정따위를 보이고 있지도 않다. 주인공의 딸이 자살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담담하게 읽을 수 있고 회상 속에 등장하는 모녀와 주인공간의 관계에서의 답답함도 그럭저럭 참고 지켜볼 수 있다. pale의 희미한이라는 형용사가 반영되지만 독자는 소설에 감정이입 할 수 없기에 pale의 경계의 의미가 적용된다. 작가는 가공의 인물들을 통해 회상당시의 시대상과 갈등, 현재의 갈등을 다룬다. 부모와 달랐던 가치관에 대한 갈등이 자녀 세대와 또 다른 갈등으로 나타난다. 세대간의 갈등이지만 역시 경계가 있다. 분명 세대갈등이지만 갈등의 영역이 공적담론에서 사적담론의 영역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부모는 늘 자식의 행복을 기원한다고 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결론은 자식들의 죽음이 있다는 것. 여기서 작가의 소설 속 인물은 역자가 말하듯 자애보다 자기애가 더 강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자녀의 의견을 존중하자는 육아교육서의 한 가지 교훈을 더 첨가해 주는 것인가? 언덕은 hills다. 복수형이다. 소설은 주인공의 뷰인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른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본다면 또 다른 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 속에서 기억은 믿을것이 못된다고 하는 것이다. 같은 시공에 산다해도 경계가 있다. 그리고 각각의 생각이 다 모인다해도 장님 코끼리 만지는 수준이다. 누구의 생각이 옳은 것이 아니다. 그저 다양한 주체가 각기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복구되는 나가사키에서의 소음도 관점에 따라서는 삶의 의지를 주는 소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창백한 언덕 풍경이 역자의 해석이었다면 나는 존중한다. 하지만 언덕의 희미한 풍경들이 조금 더 소설을 반영한 제목일것이다. 단, 제목이 촌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요즘이기에 그럴것이다. 역시나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언덕은 지금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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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언덕 풍경 이시구로는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과 <창백한 언덕 풍경> 세 편을 두고 “같은 책을 세 번 썼다”고 한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작가는 제일 처음 쓴 소설이지만 난 세 소설 가운데 이 작품을 마지막에 읽은 것이 다행이다. 그의 분위기에 적응되고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녹턴>, <나를 보내지마>도 참 좋았는데 연작과 같은 이 세 작품은 확실히 결과 말하고싶은 바가 다르다. 신념이라 믿고 평생을 보낼 수도 있고 또 그 신념이 옳은 것이 아닐수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노년의 태도. 이런 작가의 시선이 좋다. ㆍ 소설의 인물들은 드러난 모습보다 그 모습이 드러나기 전,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날 감춰진 부분들이 더 깊고 넓다. 제목처럼... 선명하지 않은 창백한 풍경. 소리가 들리지 않고 그저 보이는 것 만으로 짐작해야 하는 풍경같은 소설이다. 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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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로 시작을 해야겠다. 사별한 전 남편의 딸 게이코와 함께 영국인인 두번째 남편을 따라 일본을 떠난 에츠코. 새로운 가정과 나라에 적응하지 못한 듯한 큰 딸의 죽음 이후 그녀는 과거를 회상한다. 그 중심에는 사연을 안고 나가사키로 흘러 들어온 모녀 사츠코와 마리코가 있다. 첫 딸을 임신한 몸이었지만 중산층의 삶을 누리는 자신에 비해 몰락해 버린 두 사람의 삶을 측은하게 여기고-아니 동질감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물심양면으로 도우려고 애 쓴다. 그러는 와중에 전개되는 '창백한 언덕 풍경' 주변의 이야기들. 결국 미국인 애인을 따라 나가사키를 떠나려는 사츠코와 저항하는 마리코. 그런 마리코를 달래기 위해 애 쓰는 것인지…. 잡으려고 추적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가는 에츠코. 이 시점에서 갑자기 에츠코와 사츠코의 경계가 사라지고 만다. 다시 돌아온 현재의 영국. 남편도 큰 딸도 떠나 보내고 홀로 집을 지키는 엄마를 만나러 온 둘째 딸 니키는 이제 런던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녀는 죽은 큰 딸과는 '비슷'하지만 지극히 다른 영국인 남편의 자식이다. 뭔가 빈 듯 하다. 하나는 사츠코와 마리코의 후일담, 다른 하나는 따분할 정도로 전형적일 것 같던 전 남편 지로와의 가정 생활이 어떻게 파탄이 나서 지금의 생활로 흘러 들어 왔는지에 대한 설명. 뭐 그런 것들. 하지만 에츠코의 회상은 이 두개의 공백을 채울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구분할 수 없다거나 외면하고 싶다는 편이 맞을 지도.
기억이란 믿을 만한 게 못 된다. 기억은 종종 그것을 떠올리는 현재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지금 말하는 이 이야기도 그럴 것이다. -p204
나무에 매달린 채 발견된 비극적인 어린 소녀의 시신은 그전의 아동 살인 사건보다 이웃 사람들에게 훨씬 큰 충격을 주었으므로, 그해 여름 그런 이미지들로 마음이 심란해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p204
"도대체 왜 그러니?" 내가 반복해서 물었다. 아이는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발소리가 나무 바닥을 쿵쿵 울렸다. 아이는 다리 끝에 이르러 멈춰 서서는 의심에 찬 눈길로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아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손전등을 집어 들었다. 아이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p227
"어떤 악몽이니?" 내가 물었다. "오, 그냥 악몽이에요." "뭐에 관한 악몽이냐고, 니키?" "그냥 악몽이라니까." 니키가 갑자기 신경을 곤두세우며 말했다. "뭐에 관한 건지가 왜 중요해요?" -p230
1954년생인 가즈오 이시구로는 1960년 아버지를 따라 영국으로 떠난 후 나가사키를 배경으로 한 일본인 화자에 관한 이야기로 데뷔작을 쓰기 전 일본을 가 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의 창백한 일본은 그의 혈통만큼 순수한 상상의 산물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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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나가사키의 풍경을 잔잔하게 잘 묘사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전쟁이 낳은 괴로움, 슬픔을 최소한으로 표현하고, 일상적인 가족의 모습과 생활을 자극적인 요소 없이 이야기한다. 덤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전쟁이 있던 시대나 없던 시대나 마찬가지의 우리네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은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이고, 그렇다고 해서 아주 건강한 음식만 같지는 않은 평범하게 점심식사 한끼 같다. 작가가 쓴 어떤 소설이나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