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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삶을 이어가다보면 타인의 슬픔에 무감각해진다. 그 무감각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타인의 고통이다. 오늘과 다를 바 없는 내일이 온다할 지라도 희망을 품으라는 말은 바보 같은 말이다. 작년 무감각했던 나를 깨웠던 것은 다름 아닌 타인의 고통이었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친구에게 닥친 불행의 그림자는 너무도 깊고 암울하여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방어막 너머로 친구를 바라보며 타인의 불행이 때로는 무감각하였던 나의 모든 감각들을 깨워주는 일침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친구의 고통으로 나는 처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게 되었고 삶의 의미를 무던히도 찾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가끔은 타인의 고통이 무뎌진 감각을 깨워주는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몽테뉴의 저서 《수상록 또는 에세》 는 몽테뉴의 개인적인 사색과 성찰이 담겨져 있는 성찰집이다. 오래 전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와 세익스피어의 <세상을 보는 지혜>는 젊었을 때 내 삶을 지탱해주던 철학서이자 인생지침서였다. 지금은 자기계발서들이 잘사는 것이 곧 성공이라는 관점이었지만 과거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생에서의 성공은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가 먼저였다. 아마도 이것이 요즘의 자기계발서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몽테뉴의 수상집이 나오게 된 배경을 추적하며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위대한 철학자이자 세계적인 저작 <에세>가 나오게 몽테뉴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하는 호기심과 같은 책인데 아마도 멋진 책을 만났을 때 그 책을 쓴 저자의 마음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과 같지 않을까? 이런 관심으로 탄생하게 된 책이 바로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이다. 몽테뉴의 수상집이 위대한 이유를 저자는 서양 문학사 최초로 인간의 의식을 일관된 관점에서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몽테뉴는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얻은 경험을 통하여 살아가는 이유를 찾았던 최초의 철학자이였던 것이다. 금욕과 절제가 미덕이었던 시대에 인생의 참된 의미와 삶 그 자체의 체험을 일상에서 찾으며 주위의 모든 것이 인생의 의미가 되었다. 그러나, 몽테뉴는 처음부터 일상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태어나기도 부유하게 태어났고 이후 법관직을 하면서 상류층 사회에 익숙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닥친 불행의 그림자는 몽테뉴에게 인생을 다시 보는 눈을 선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완전한 사랑을 나눈 사람’이라고 말했던 친구 라 보에시의 죽음에 잇달은 아버지와 네 딸들의 죽음을 통해 몽테뉴는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전에 “더 오래 살아봤자 새롭게 얻을 낙은 없다” 했던 그가 일상의 모든 것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후 몽테뉴의 <에세>는 후대 문학가와 사상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책은 몽테뉴의 정신세계를 12가지(우정,죽음,회의,전쟁,여행,고통,섹스,관계,친구,자아)라는 프레임으로 추적하고 있다. 몽테뉴를 추적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12가지의 프레임을 일상으로 끌어와 삶에 적용하려는 무던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몽테뉴는 귀의 고통에서조차 또는 여행하는 동안 만나는 모든 것들, 고양이를 통해서조차 인생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이해는 다시 인간을 새로운 측면에서 다시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으로 변모하고 있다. 마치 동물을 보고 “한 인간과 다른 인간의 차이가 동물과 인간의 차이보다 더 큰 것처럼,” 인간 사회가 여러 파벌로 분열되어 있지만 이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작업으로 인생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몽테뉴는 “훌륭한 지성인이란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것을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는 사람” 이라고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진정한 지성인의 면모라는 것을 몽테뉴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몽테뉴의 이런 면모는 데카르트가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타인과 분리시키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정신과 육체와의 관계가 “인간의 보편적인 유형”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열어주고 결과적으로는 사회 전체로 이어준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최근에 읽은 브뤼노 나르노의 <과학인문학 편지>에서 말하는 코기카무스의 사고와 같다. 이런 자아 인식은 우리를 자기 자신으로 인도하지만, 나아가 타인들에게도 인도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몽테뉴는 “생각하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므로 나는 생각한다 " 라고 한다. 일상의 모든 체험에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치열하게 사색하는 과정의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는 어려운 철학이 아닌 일상의 철학을 담고 있다. 때론 불행이 일생일대의 전환점을 가져오는 기회를 제공하듯이 불행을 통해 인간과 삶에 깊숙이 다가간 몽테뉴의 철학을 만난다는 것은 다시한번 무뎌진 감각을 일깨워주는 경험이었다. 존재하기에 생각한다.. 너무 멋진 말 아닌가..
서로 공감하고 잘 어울리는 친구로부터 얻는 달콤함은 아무리 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혀 아깝지 않기 때문이다. 오 친구여 !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즐기는 법을 아는 것, 그것이 절대적으로 완벽하고 실질적으로 완벽하고 실질적으로 신성한 삶의 경지이다. 자기 자신의 용도를 모르기 때문에 다른 환경을 찾아 헤매고, 자신의 내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아 밖에서 떠도는 것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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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목이 참 흥미롭다.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이 제목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은 두가지이다. 내가 몽테뉴를 잘 알지 못하고 작가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책 제목을 보면서 참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제목이 잀아적이여서 참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거창한 '론'이나 '학'이 아닌 고양이를 제목으로 삼고 자신의 친근한 일상을 통해서 자신의 사유를 풀어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몽테뉴라는 사람은 자신의 삶과 자신을 사유의 재료로 삼아서 거창하게 철학이라기 보다는 삶의 에세이를 써내려간 사람이였다. 그리고 이 몽테뉴를 저자 솔 프램튼은 그의 한걸음 한걸음을 따라다니면서 몽테뉴가 가졌던 삶의 흔적들과 고민들은 잘 정리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저자는 16세기 철학자인 몽테뉴의 저서 <에세>를 바탕으로 그의 삶, 취향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인 배경도 분석해 내고 있다. 그렇다고 딱딱한 문체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친근하고 유려한 문체로 들려주고 있다. 나는 아직 몽테뉴의 관한 책을 한권도 읽어본 적이 없고 그에 대한 지식도 거의 전무하다. 특히 이 책이 주로 참고하고 정리하고 있는 몽테뉴의 대표작 <에세>에 대해서도 거의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얼마만큼 몽테뉴에대해서 잘 드러내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할수 없지만 이 책이 나처럼 몽테뉴를 몰랐거나 아직 <에세>를 읽어보지 못한 독자에게는 <에세>로 가는 하나의 길목이 되어둘 것이고, <에세>를 읽은 독자들에게는 정리와 재현의 의미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몽테뉴라는 인물에 대해서 매우 친근감있게 접근할 수 있었는데 이 책만 읽어도 그가 어떠한 인물이였는지에 대해서 잘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우아하고 현명하며 진지하고 사색적인 인물이였고, 일상의 비루함과 소중함을 함께 알고 있었던 사람이였다. 고전적이며 사색적인 인물이라고 할까.
몽테뉴가 살았던 시기는 16세기 프랑스로 그 당시 시대적인 풍경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전쟁이 있었던 시대였다. 몽테뉴가 보기에 그 당시 종교, 특히 그리스도교와 스토아 철학의 '아파테이아' 정신은 인간을 무자비하게 만드는 사상이였다. 이러한 배경을 지나면서 그는 회의적인 사람이 되었고 특히 자신의 개인사에 있어서 불행한 일들을 많이 겪었기에 그는 진정한 회의주의자가 되었다. 몽테뉴의 첫딸은 태어난지 불과 두달 만에 죽었고, 남동생은 테니스 공에 맞아 죽었으며, 가장 친한 친구였던 라 보에시는 30대 초반의 나이에 역병에 걸려 죽었고, 존경했던 아버지도 오랫동안 신장결석에 시달리다가 고통스럽게 죽었다. 이러한 고뇌와 개인적인 불행은 몽테뉴가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스토아철학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고 죽음 이후의 초월적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현재'의 소중함을 일깨운 삶의 철학자가 되었다. 이렇게 삶의 철학자가 된 몽테뉴는 자신을 사유의 재료로 삼으로 자신의 삶을 따라가 평범한 일상에서 건져올리는 사유의 단상들을 길러올리고 그것을 기록하여 자신의 일생의 대작인 <에세>를 완성시켰다. 그 당시 근대적 철학사상이 문을 열기되었는데 특히 데카르티의 사상이 모든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확실성에 바탕을 두면서 인간의 이상과 사물을 분리시키며 근대를 열어제쳤다면 몽테뉴는 시대적 주류 철학이였던 데카르트와는 달리 오히려 확실성이 분리를 낳고, 그 분리가 폭력과 인간의 불행을 낳는다고 보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몽테뉴 사유의 위대함과 주류 철학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보듬고 통합하는 삶의 철학을 만들어 나가는 그의 인간됨이 강하게 부각됨을 볼수 있었다. 이러한 친근하고 통합하는 그의 삶의 철학은 바로 제목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고양이를 보면서도 인간과 동물을 분리시키며 주체와 객체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서 신비하게 섞여 서로에게 주체적 영향을 미치는 그의 통합적이고 따뜻한 사유 방식을 알수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그 당시 주류 시대적 분위기와는 많이 동떨어진 것이였다.
이러한 그의 인간적이고 통합적 사유는 무자비하게 신대륙을 점령한 에스파냐인들을 비난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돈과 계급에 따른 차별이 없었던 원시부족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보는 것에서도 그의 사유는 잘 드러난다. 몽테뉴는 그 당시 유럽인들의 탐욕이 얼마나 크고 무자비했는지에 대해서 비판하였다. 그는 참으로 삶을 사랑하고 따뜻한 사상가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포도주와 여행을 좋아했고, 사람을 좋아했으며 무엇보다 '기록'에 집착했다. 매우 사소한 것까지도 적는 바람애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서 16세기의 자세한 분위기를 알수 있을 정도이다. 무엇보다 그는 확실성의 시대에 차이를 존중했으며 그 차이에서 오는 모호함과 불확실을 즐겼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그는 21세기 사상의 단초를 엿볼수 있다.
저자 솔 프램튼은 계속해서 16세기 근데의 주류 사상가였던 데카르트와 몽테뉴를 비교하여 몽테뉴가 강조한 존재의 중요성, 자아의 중요성, 현재의 중요성, 일상의 중요성들을 계속적으로 드러내주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까 참 따뜻해진다. 몽테뉴라는 사람이 얼마나 매력이 있는지 친구로 삼기에 좋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나를 친구로 받아들여줄지 모르지만 말이다. 어떤 계기로 인해 몽테뉴가 신봉했던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더 오래 살아도 새롭게 얻을 낙은 없다'라는 회의론에서 벗어나, '철학은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다'는 죽음의 철학에서 벗어나 '현재'의 삶과 주체로서의 확실성을 담보로하는 '자아'가 아니가 개별적인 '자아'를 존중하는 그의 '삶의 철학'은 참된 삶과 사유가 어떠해야 하면 그리고 삶을 향유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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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 지금 시대만큼 푸대접을 받고 있는 때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를 살다 보니 너도나도 지식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세계가 내 모니터 앞으로 펼쳐져더니 이제는 조그만 전화기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인문학은 더 이상 매력 있는 학문이 되지 못하고 있고 밥벌이가 되지 않는 학문 분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너도나도 TV에 나오면 전문가라고 떠벌인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하지만 서점에는 온갖 종류의 책으로 넘쳐난다. 기준이 없다. 그래서 헷갈린다. 전문가라는 양반들이 나와서 하는 얘기들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한동안 회자되던 우스개 중 “100분 토론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단 한 번도 토론의 결론이 내려진 적이 없다는 사실” 이라는 말이 있었다. 지금의 넘쳐나는 정보쓰나미 시대를 정확하게 함축하는 표현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80년대 후반 정도까지는 지식인, 지식인의 현실, 지식인의 고통, 지식인의 고민 따위의 담론이 멋있게 보이던 시대였으리라 짐작된다. 실제로 현실의 부조리를 몸으로 밀어내며 고민하고 고통하며 살아낸 지식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장의 내 밥벌이 보다 시대의 아픔과 고민, 열망과 분노에 참여하고 그것에 젊음을 투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삶을 담아낸 책이나 TV프로그램을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채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조금 더 이전 일제 식민시대를 사는 조선의 지식인들의 삶은 더욱 치열했을 것이다. 목숨을 담보하지 않으면 섣불리 나설 수 없는 시대적 상황에서 지식인의 정체성을 역사에 투영해 온전히 빼앗긴 나라와 민족, 해방과 독립을 위해 몸과 혼을 던진 이들이 있었다.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앞을 다투어 나와 말을 쏟아낸다. 혹시나 잘못 내뱉은 말이 있을까봐 조심스러워하는 기색도 없다. 당당하게 뱉는다. 그의 삶까지 이르는 치열한 자기 고백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행동이 선행되지 않음에도 떳떳하다.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다. 혹자는 ‘힐링이 필요하다.’ 혹자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한다.’ 혹자는 ‘더 큰 승리를 위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혹자는 ‘더 아파야 한다.’ 혹자는 ‘에라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뒤죽박죽 엉킬 대로 엉켜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만 갔다. 십여 년 전 고(故)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처음 접하며 받았던 지적인 충격과 쾌감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 싶다.
“독자여, 이 책은 선의로 쓴 것이다. 우선 이 책은 나의 집안일과 사사로운 일들을 기록해두기위해 쓴 것일 뿐, 독자를 의식하거나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 쓴 것이 아님을 밝힌다.” (p.344)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 명인 몽테뉴의 「에세」를 12가지 주제로 나누어 엮은 이 책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기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는 이후에 암흑의 시대로 기록된 16세기를 살았던 지식인 몽테뉴의 일기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몽테뉴가 「에세」를 끝마치며 남긴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에세」는 정밀한 논리와 사고로 시대를 베어내는 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법학자, 철학자, 영주, 시장, 거부 등 으리으리한 스펙을 가진 몽테뉴였지만 가까운 가족들과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경험하고 난 후 완전히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뀐 몽테뉴가 되었다. 철저한 스토아학파였던 그의 삶이 조금은 유연하게 바뀌는 과정을 담았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그를 괴롭히던 지병(요로결석)과 싸우는 병상기록이다. 그런 것들에 대한 일기이자 일지다. 이 책의 긴 제목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기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라는 문장도 몽테뉴의 「에세」에 있는 문장이다. 스토아 철학자 중 철학자였던 몽테뉴의 삶을 뒤바꾼 특별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기르던 고양이를 보고 저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공격에서 수비로 바뀌고 철저함에서 유연함으로 전환된 사람이라는 것을 함축하는 가장 적절한 문장을 제목으로 선택한 것 같다.
“16세기에는 죽음이 전면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몽테뉴는 세네카의 말을 빌려 ‘죽음이 도처에 있다.’ 고 말했고” (p.46) “총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야 할까, 아니면 몸을 숙여야 할까? 적에게 저항해야 할까, 아니면 항복해야 할까?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또한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전쟁터에서 확실히 알고 있는 것 하나는,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뿐. 16세기 프랑스의 종잡을 수 없는 싸움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러한 현실에 어떻게 잘 대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밖에 없었다.” (p.144) 앞서도 말했지만 16세기 유럽, 그 중에서도 프랑스는 격동의 장소였던 것 같다. 책의 곳곳에서도 몽테뉴가 가슴 아파하면서 표현하고 있는데 오랜 종교전쟁으로 인해 가까운 이웃과 친척, 한 집안에서 살고 있는 하인과도 한순간에 적이 되어버리는 암흑의 시대였다. 중세를 뒤덮은 종교의 어두운 장막을 간신히 벗어나 인간다움의 절정을 향해 달음질 하던 당시 지식인들에게 유럽 도처에서 벌어진 종교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터널도 다시 고꾸라지는 경험이었을 것 같다. 나와 종파가 다르고 종교적인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암살을 자행하고 마녀사냥을 하고 숙청을 가했다. 어느 한 편으로 서지 않을 수 없는 그 상황에 직면한 지식인들에게 명확한 것은 몽테뉴의 말대로 확실한 죽음뿐이었을 것이다. 총과 칼을 들어 전쟁에 참여하거나 그런 무기들보다 더 위력적일 수 있는 펜을 들어 한쪽의 민중과 추종자들을 격동시키는 시도와 의도가 지식인들에게는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상황이었을 것이다. 피해갈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장렬하게 산화(散華)하거나 꽁무니 빼 달아나거나 입 닫고 귀 막고 눈 감고 쥐 죽은 듯이 숨어 있거나, 어쨌든 한 가지는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팔을 들어 어떤 것을 후려치려고 하다가 잘못 휘둘러 허공만 치면 내가 오히려 아픈 것처럼, 정신이 혼란스럽게 동요할 때 마음을 붙일 데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갈 곳을 잃고 안으로 숨어버린다. 동물이 돌이나 쇠붙이에 맞으면 대드는 것처럼, 대상이 옳든 그르든 인간도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골라서 비난의 화살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p.82) 몽테뉴가 살았던 시대의 지식인과 지금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지식인은 개념적으로도 천양지차일 테고 실제로 시대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의 정도에 있어서도 천양지차일 것이다. 단순히 지지하고 응원하고 꼭 당선되기를 고대하던 후보가 낙선하고 지지하지 않고 응원하지 않았으며 절대로 당선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후보가 당선되는 시대에 대해서 절망하고 내팽개친 채 숨어버리는 것은 비겁한 짓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매일매일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던 몽테뉴나 일제 강점기의 지식인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하지 말고 도망가지 말고 꽁꽁 숨어있지 말고 나와야 한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사명과 소명으로 똘똘 뭉쳐 결연하게 목숨을 내던질 정도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몽테뉴가 그랬던 것처럼 유연하게. 그렇지만 단호하고 일정하게 삶을 기록하고 점검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단순히 싸워 이겨야 할 대상, 극복해야 할 대상, 넘어서야 할 대상만 두고 있으면 매일이 고달프다. 피곤하다. 적어도 내가 기르는 고양이, 강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몽테뉴처럼 게으른 듯 게으르지 않은 여유 있는 고민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굳이 핏대 올리며 뛰어들지 않아도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많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지식인입네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남을 인정하는 것에 인색하다. 남을 인정하는 것이 반사적으로 나보다 낫다는 자백을 하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굳이 내가 숟가락 얹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지난 연말 이후 계속되던 내 머릿속 실타래가 조금씩 풀어져 가고 있던 차에 이 책을 만나 다행이다. 몽테뉴를 만나 다행이다. 실타래를 풀어가는 또 하나의 방법을 배웠다. 내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이 내가 된 것인지 한참을 골똘히 생각했다. 몽테뉴를 한 번 따라 해보면 뭔가 새로운 사유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별다른 변화는 없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엉켜있는 실타래 옆에서 춤을 추고 있지만 골치가 아프지는 않다. 자극이 된다. 이 책에 소개된 몽테뉴는 자신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여러 상황(시대적 상황, 가정사, 절친한 친구의 죽음, 본인의 병)을 두고 그것을 회피하거나 미친 듯이 이겨내려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좀 더 멀리 떨어져서 관조하며 담담하게 기록했다. 삶의 작은 순간과 소소한 일상을 지나치지 않았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이 시대 지식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닌 가 싶다. 말 잘하는 사람 수두룩하고 똑똑한 사람 수두룩하다. 글 잘 쓰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너무 애쓰고 매달리면 절망도 크다.
나도 너무 애쓰지 않기로 했다. “몽테뉴의 집에서 발생한 사건은, 결국 데카르트의 태도와는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는 교훈을 준다. 진실이나 신뢰를 재구축하려면 다른 사람들을 피해 희귀한 형태의 이성으로 도피하지 말고, 사람들과 직접 대면하며 도덕성을 가까이에서 재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p.336) 나도 데카르트보다는 몽테뉴가 좋다. 어떤 책에서 본 이 문장이 지금의 내 실타래를 하나하나 풀어주고 있는 마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오랜 숙고와 성찰을 통해 이를 수 있지만, 진리에 대한 신실함은 가장 단순하고도 간결한 실천으로 담보된다] 몽테뉴가 봤어도 무릎을 탁! 쳤을 것 같다. 굳이 그렇게 애쓰지 말고 가장 단순하고 간결한 일상의 실천부터.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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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When I Am Playing with My Cat, How Do I Know That She Is Not Playing with Me? 부제 -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자 몽테뉴의 12가지 고민들 저자 - 솔 프램튼
제목이 무척이나 길어서, 처음에는 어떤 책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에 대한 얘기일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그러다가 부제를 보고는 ‘헉!’하고 놀랐다. 몽테뉴라니……설마 그 서양 철학가? 혹시라도 막 이해 못할 단어들이 마구 튀어나오는 책이 아닐까 걱정도 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웬걸? 너무도 재미있고, 몽테뉴라는 사람이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냥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한 아저씨의 일기가 책 속에 펼쳐져 있었다. 다만 그 아저씨가 전직 법관에, 전직 시장에 성을 가진 영주라는 게 많이 다를 뿐이다.
내가 나를 썼다는 부제의 말이 무엇인가 한참 고민했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 처음으로 객관적 또는 주관적으로 기록을 했다는 뜻이리라. 한국어는 참 어렵다. 16세기, 신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 중심으로 바뀌는 격변기이고 질병과 전쟁으로 요동치는 세상에서 지인과 가족 그리고 주변 상황에 대해 순수하게 자기 자신의 감정을 쓴 글은 몽테뉴가 처음이라는 뜻이라 해석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몽테뉴라는 사람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기도 하고, 병이 시달리면서 때로는 나약하고 또 어떨 때는 툴툴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친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섹스에 대해서 읽을 때는 ‘남자란…….’하면서 피식 웃음도 나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온전히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인데,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충실하게 일기를 적었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서 책으로까지 내놓았다.
물론 그럴 경우에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빼고, 좋은 쪽으로만 편집을 했을 수도 있다. 나 같으면 그럴 것이다, 아마.
그런데 이 사람, 그렇게 안 한 것 같다. 대놓고 그 당시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기도 하고, 자국은 물론 타국에 대해서도 혹독하게 평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제들까지도 그의 예리한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당시 아무리 가톨릭이 욕을 먹는다고 해도, 여전히 막강 파워를 자랑하는 신부와 사제인데!
이런 행동은 자기 자신에 대해 확고한 믿음이 있고, 주관이 뚜렷하며 확실한 소신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문득 그는 자존감이 무척이나 높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정, 죽음 , 회의, 동물, 전쟁, 여행, 고통, 섹스, 관계, 취향, 유년 그리고 자아에 이르기까지, 몽테뉴는 솔직하게 느낀 바를 쓴 것 같았다. 거기에 저자의 자세한 설명과 나름대로의 추측이 적절하게 곁들어져 있었다.
그가 마침내 평생을 믿어온 스토아학파에서 벗어나는 마지막 장인 ‘자아’를 읽으면서, 경험과 생각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깨달았다.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다양한 상황을 접하고, 때로는 위기를 맞닥뜨리기도 하고, 깊은 사고를 하고, 그러면서 성장하는 동물이다.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에 귀한 자식일수록 여행을 시키라하고,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한다는 말이 있나보다. 전에는 그냥 옛날에 살다가 죽은 사람의 글로만 여겼던 몽테뉴의 ‘에세’를 찬찬히 읽어보고 싶어졌다. 아주 오래 전에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평생을 치열하게 싸우고 충실히 살다간 한 사람의 마음을 느껴보고 싶다.
-인생은 그 자체가 목표이자 목적이다. 죽음은 분명히 끝이지만,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죽음은 마 지막이고 한계이지만, 목적은 아니다, p. 311 -우리의 삶을 올바르게 즐기는 법을 아는 것, 그것이 절대적으로 완벽하고 실질적으로 신성한 삶의 경지이다. 자기 자신의 용도를 모르기 때문에 다른 환경을 찾아 헤매고, 자신의 내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아 밖에서 떠도는 것이다. p.322
ps. 문득 몽테뉴는 어떻게 보면 그 시대의 영향력 있는 파워블로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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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그는 근대 이후 최초로 자기 자신을 텍스트로 삼아 철학적 난제를 풀어나갔던 데카르트 보다 그것도 약 70년 정도 앞서 스스로를 텍스트로 삼았던 인물이다. 사실 데카르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몽테뉴 덕분이었다. 자기 확실성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했던 데카르트의 방법은 그가 30세 때 몽테뉴의 '에세'를 읽은 탓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몽테뉴의 에세(우리나라에서는 '수상록'으로 알려져 있다.)를 그냥 한 개인의 사변을 모아 담은 책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알게 모르게 서향철학사에 끼친 영향은 컸다. 비단 근대만이 아니다. 현대철학에 이르러서도 몽테뉴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는데 우리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미셀 푸코 역시도 이 몽테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철학자다. 그가 하이데거에 반대해 천명했던 '경험적 인간학'은 바로 이 몽테뉴로 부터 나온 것이었다.(몽테뉴가 어떤 사물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경험, 즉 감각을 얼마나 중시했나 하는 것은 이 책, 솔 프램튼의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중 '회의' 편에 잘 나와 있으니 그걸 참고하면 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테뉴가 이렇게 단 한 권의 책만 남긴 탓인지 우리들에게 몽테뉴 사상의 전모 혹은 그 가치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 있어 솔 프램튼의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는 몽테뉴의 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모습과 그 가치를 모두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의 의의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솔 프램튼은 몽테뉴의 에세가 가지고 있는 철학사적 위치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당대의 철학적 지형을 세밀히 복원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는데 덕분에 독자인 우리는 데카르트를 위시하여 흔히들 우리가 근대철학이라 일컫는 당대의 철학들이 어떤 뿌리에서 자라나 어떻게 가지를 뻗어나갔는가 하는 그 계보 역시 훑을 수가 있게 된다. 즉 몽테뉴의 에세에 대한 이해 뿐만이 아니라 근대 철학 역시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여기서의 계보의 기보는 단순히 그 상황과 과정만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오늘의 이 상황과 관련하여 이 시대를 낳았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근대철학이 파생시킨 부정적 영향에 비추어 무엇이 문제였던가를 살펴보는데보다 더 중점을 두고 있으므로 여전히 어둠의 비가 그치지 않는 오늘의 상황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어떤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데 있어서도 많은 긍정적인 참조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즉 인문학적 소양을 통한 힐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인문이나 고전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다고 알고 있다. 많은 이들이 점점 더 혹한의 바람처럼 거세어지는 현실 앞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 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찾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 역시 솔 프램튼의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는 좋은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솔 프램튼이 새삼 몽테뉴에게 주목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점점 더 타인과 타자들에게 서로가 거대한 담벼락이 되어가는 요즘에 영혼과 육신을 철저히 분리하여 세계와 타자를 무시하여 영적 평온을 추구했던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사상에 영향을 받아 오로지 영혼의 육체에 대한 우위를, 인간의 동물에 대한 우위를 주장했던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으로 형성된 정신사적 지평에서는 지금 삶의 어려움에 대한 어떤 치유도 받을 수 없기에 그 데카르트와 가장 반대편에 있다고 보여지는 몽테뉴의 사상을 새로이 조망하여 그 치유할 무언가를 찾는 게 바로 이 책의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몽테뉴가 가진 치유적 자원을 솔 프램튼은 무엇보다 제목에서 바로 드러나는 것처럼 나 중심이 아니라 타자의 중심에서 생각하는 마음, 끊임없이 내가 아는 것이 과연 엇인가를 질문하고 그 속에서 나의 한계를 깨달아 어떤 진리도 절대일 수 없으며 현실이란 언제 어느 때 또 뒤집힐지 모르는 잠정적이며 근사치에 불과한 견해들로만 형성되는 것이며 그러니 더욱 타인과 타자들에게로 마음을 열어 내가 틀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온전히 그들에게 귀 기울이고 더 확고한 진리는 바로 들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는데서 나온다는, 몽테뉴가 '에세'에서 보여준 이러한 한결 같은 자세에서 찾아낸다.
그런데 문제는 몽테뉴가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다는데 있다. 솔 프램튼은 '에세'를 자세히 뜯어 읽어보고 책 전체에 걸쳐 몽테뉴 자신에게 분명한 입장 변화가 있었음을 알아낸다.(솔 프램튼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몽테뉴의 '에세'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그것을 숨김없이 드러낸 책이기 때문이다. 몽테뉴의 '에세'를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알겠지만 거기서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말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말이다. 그렇게 그는 죽음이나 전쟁 등 인간이나 세계에서 있어 가장 커다란 상황에서 부터 여행이나 독서 그리고 취향등 개인의 자잘한 삶의 행위들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그 자신만의 견해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사실 '에세'를 읽는다는 것은 몽테뉴 내면 그 자체를 읽는 것과도 같다. 그렇기에 솔 프램튼은 이러한 내적 변화의 계보를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분명 '우정에 대하여'에서 보여주었던 몽테뉴의 내면은 그 이후의 '취향'이나 '여행'에서 보여주는 몽테뉴의 내면과 다르다. 스토아적 분리주의에 충실하여 더없이 절대를 확신했던 그 마음은 서서히 허물어져 모든 것의 상대화와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로 흘러간다. 그런데 이 같은 과정은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도 일치한다. '우정에 대하여'에서 몽테뉴가 보여준 모습은 바로 지금 우리들 시대의 본질적인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솔 프램턴이 주목한 것도 이 것이다. 몽테뉴의 '에세'가 오늘의 시대가 처한 어려움에 대해 사상적 치유를 줄 수 있다고 여기게 된 것도 그 까닭이다. 몽테뉴가 이렇게 변할 수 있었다면 그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우리들 역시도 그런 변화가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몽테뉴는 어떻게 변화할 수 있었을까? 그 계기를 보다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참조해야 할 몽테뉴가 걸었던 치유의 여정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솔 프램턴은 이 책 자체를 그런 여정으로 만들었다. 몽테뉴의 '에세'를 해체하여 타자의 거부를 통한 절대적인 껍질 속에 들어있었던 '우정에 대하여'에서 시작하여 치유적 자아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자아'로 나아가게 되기까지의 단계별 과정을 보여주는 형식으로 만든 것이다. 과연 그리하여 몽테뉴가 그렇게 변화할 수 있었던 계기들은 확실해졌다. 일단 그것은 무엇보다 낙마 사고로 인해 몽테뉴가 당했던 신체적 고통이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마음으로 육체가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다고 보았으나 몽테뉴가 실제로 당해보니 달랐다. 육체적 고통 속에서 마음은 쉽게 허물어져 갔고 그것은 언제나 패배자일 뿐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계속 묻게 되었다. '과연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인가?'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온전히 충실해지자 이제껏 진실로 믿었던 세상이 말했던 진실들은 모두 풍문에 불과했고 그렇게 '회의'하는 것이야 말로 진실로 제대로 된 '앎'을 찾아 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보다 확실한 '앎'이란 사념이 아니라 오로지 감각적인 것, 경험적인 것에서 온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절대로 함부로 확신하지 않는 것이 가장 최상의 제대로 된 '앎'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나와 지금 놀고 있는 고양이가 어떤 존재인지 나는 모른다. 그 고양이의 내면을 내가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인류 전체가 단 한 번도 그들의 내면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오만하게도 고양이를 멋대로 단정해 왔다. 데카르트처럼 생각을 할 수 없는 존재다, 생각을 할 수 없으니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고양이란 그저 기계와도 같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고양이가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고! 지금 내가 고양이와 놀고 있지만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가 날 데리고 노는지 그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책의 제목이자 몽테뉴 '에세' 중 '레이몽 스봉의 변론'에 나오는 고양이에 관한 말은 경험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확신한다는 것은 그저 오만의 산물일 뿐임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아니다. 그리하여 몽테뉴는 풍문으로 들려오는 남들의 말과 판단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경험한 것을 기초로 앎을 이루어나가고 이런 식으로 독서와 취향 그리고 여행등에 대해서 스스로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밝혀가고 결국 '에세'는 '나'라는 말로 가득 넘치게 된다. 솔 프램튼은 이렇게 몽테뉴 변화의 궤적을, 그것도 당대를 지배했던 사상적 영토와 대비하여, 충실히 그려내면서 몽테뉴의 이러한 자세가 어떻게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 치유적 자원이 될 수 있을지 말해준다. 무엇보다 몽테뉴가 지녔던 '회의', '경험중시' 그리고 '타자에 대한 존중' 말이다. '회의'는 온갖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방법론이 되고 '경험중시'는 온갖 소문이 넘쳐나고 홍보기술이 발달한 요즘에 있어 그러한 소문과 선동에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준점이 되며 '타자에 대한 존중'은 지금처럼 더욱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는 세상에 있어 또한 서로에 대한 적대가 날로 심해지는 지금에 있어 섣부른 비극과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는 처세가 된다. 바로 이런 것을, 그것도 오늘의 우리들에게 있어 정말 필요한 것을, 몽테뉴가 줄 수 있다고 보았기에 솔 프램튼은 이 책을 이러한 형식으로 썼던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미덕이 참 많다. 몽테뉴의 사상에 대해 전면적으로 훑어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을뿐만 아니라 몽테뉴 내면 변화의 궤적을 너무도 충실히 보여주는 탓에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 정말 필요한 치유의 자원까지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몽테뉴에 대해서 알고자 했던 분들 뿐만 아니라 설령 몽테뉴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던 분들이라도 어떻게 하면 오늘을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을까 한번쯤 고민해보셨던 분들이라면 꼭 한 번 벗해보시기를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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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이 된 문장의 출처를 굳이 찾아보았다. 몽테뉴가 교조적 신학과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박 을 위해 자신의 수상록<<essai>> 1권에 추가한 <레몽 스봉의 변호>라는 에세이 중에서 가까스로 발견했다. 인간이 다른 종(種)에 비해 우월하다는‘당연한 추정’을 극복하려는 일화의 한 토막이다. 고양이가 사람을 데리고 노는 것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당대에 얼마나 전복적인 인식이었을까에 이르면 책의 제목으로 이 문장을 선정한‘솔 프램튼’의 관점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몽테뉴에 대한 선입견인 스토아 주의자, 회의론자, 그리고 말년에는 쾌락주의자라는 도식화된 이해를 뛰어넘어 새로운 들여다보기를 예견케 하는 대목이랄 수 있다. 물론 그의 지적처럼 “결론을 추출하는 과정이 아니라 성숙해지는 과정에 가까운” 몽테뉴의 『에세(essai)』에 대해 평생에 걸쳐 써진 글들이기에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초연한 부동(不動)의 경지라는 신념에서 에피쿠로스적 쾌락주의의 성향으로 변모하는 의식의 진행들을 선명하게 목격케 하고 있지만, 이보다는 “인간 이성의 역설적 한계를 집요하게 파고든” 진솔한 사상가의 진면목을 알아차리게 해주는 미덕에 더 큰 무게를 느끼게 한다.
그래서 16세기 프랑스의 시대 상황이 어둠과 죽음이 지배하는 암흑의 시대였다는 측면에서 몽테뉴 역시 대학살과 전쟁과 죽음이라는 시대의 명제를 피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 고난이나 죽음에서 조차 초연해야 하는 아파테이아(aphtheia)를 신조로 여기게 되었다는 기술들에는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또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와의 격렬한 종교분쟁으로 인한 그치지 않는 혼란이 야기한 지적확신의 상실이 사람들을 회의주의에 젖어들게 하였다는 점 역시 상식적 설명이랄 수 있다. 이러한 시대사적 배경의 해석이 몽테뉴의 에세를 독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역시 몽테뉴라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이해만큼 공감을 자아내지는 못한다.
솔 프램튼의 이 책은‘미셸 드 몽테뉴 참맛보기’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제격이지 싶다. 저자의 분석처럼 『에세(essai)』에는 ‘맛’이란 단어는 물론 관련 단어들이 엄청난 빈도로 등장한다고 하였듯이, 또한 몽테뉴 자신의 서문처럼 어떠한 사상적 결과물을 지향한 것이 아니며, 단지 자신의 후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인생을 가능한 여과없이 보여주고 몽테뉴라는 인물을 마음속에 그려주기를 바라는 작은 소망의 기록이듯이 한 사람의 진솔한 모습을 맛보고 음미하는 작업이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책을 보게 되면 설혹 몽테뉴의 일면 경박함이라든가 중용을 빙자한 모호한 처신, 천박함, 편협성, 그리고 시대적 괴리가 몰고 온 간극이 읽히지만 관용의 시선이 내면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면 소란스러운 내 비판의 눈초리는 사그라들고 몽테뉴란 인물을 순수하게 접하게 되고, 한 인간의 삶 전반을 스스럼없이 보여준 그에게 경외와 고마움의 마음과 같은 종(種)으로서의 공감의 연민마저 깃듦을 느끼게 된다. 뜬금없는 말(言) 같지만 사람은 자신의 경험의 경지를 넘어설 수 없는 모양이다. 냉정한 스토아주의자가 낙마(落馬)사고로 죽음의 순간을 경험하고서야 자신의 영혼에 대한 인식 유지능력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을 보면, 이러한 내면의 변화조차 드러내는 사상가의 솔직함이 몽테뉴란 인물에 더욱 매력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에세(essai)』는 테마별로 분류된 수상록이 물론 아니다. 때문에 읽다보면 방대한 분량이 산만하고 지루하기조차 하여 어떤 도달지를 알 수 없어 헤매게 되고 책을 물리게 된다. 해서 몽테뉴를 그야말로 맛만 보고 말게 되기가 일쑤다. 이것을 이 책이 어느 정도 해결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우정, 사랑, 전쟁, 죽음, 인간관계, 동물, 성, 여행, 직업...과 같은 주제들로 구분되어 비로소 한 인간의 생각을 어떤 지속성과 연관성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례로 동물과 관련한 에세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특히 말(馬)은 그것이 주제가 아니라도 빈번히 등장하면서 몽테뉴 삶의 관계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미처 알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했던 생각에 미치게 되는 것과 같다.
특히 당대로서는 가히 선도적이랄 수 있는, 아니 위험하기 그지없는 몽테뉴의 이교에 대한 종교적 평등성의 관점이라든가, 멕시코 원시부족에 대해 야만의 옷을 입힌 유럽인들이야말로 야만인이라고 말하는 그의 해학적 비평의식은 신선한 의외의 발견이랄 수 있다. 말을 탄 에스파냐 인에 패배한 아즈텍의 왕이 그들의 말(馬)에게 용서를 빌고, 말이 울음소리를 내자 화해와 휴전의 표시로 받아들였다면서 에스파냐인들은 원주민들이 자신들을 배제한 사실조차 몰랐다고 너스레를 떠는 몽테뉴의 표정에서 인간 우월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양양한 미소를 보는 것과 같다.
한편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몽테뉴 사후 2세기가 지나 18세기에 출간된 <<여행 일지>>의 소개가 부연(敷衍) 되면서 『에세(essai)』 내용들의 배경을 알게 되어 그 외연이 확장되는 것이고, 인간의 정신을 육체에서 분리한 근대 기계적 이성주의 효시랄 수 있는 데카르트와 대척점에 놓여 “확실성에 도달하고자 시도하지 않고 인생 그 자체를 정당화하려한” 인류 역사상 인간의식에 손을 댄 최초의 저술가로서의 몽테뉴의 발견이 아닐까 싶다. 아마 이 책을 통해, 아니 몽테뉴로 가는 길의 안내를 통해 “인생이라는 과수원을 거니는 속도를 늦추고 가능한 한 삶의 달콤함과 아름다움을 입안가득 무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 생각”한 인간과 속도를 맞추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 점일 것이다.
시치미 뚝 떼고 성(性)을 주제로 한 글들의 제목에 ‘베르길리우스의 시구에 붙여’라고 점잖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의 욕구를 솔직히 드러내는 그에게 점점 반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어지는 것처럼, 몽테뉴의 『에세(essai); 수상록』을 꼭 다시금 펼쳐들고 그와 같이 인생의 길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출렁거림을 느끼게 된다. 내 생의 지평을 천천히 지켜보는 여유를 선사하는 정말 맛있는 저술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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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관련 도서를 읽다 보면 글의 구성이 탄탄하고 내용이 오밀조밀하게 엮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또한 인용문이 곁들어져 글의 완성도를 높이고 독자는 이를 통하여 글의 행간의 의미와 전체적인 내용을 수용하고 통합해 가면서 지성인의 힘을 배양해 간다고 생각한다.이러한 인문 관련 도서가 역사적인 배경이 깔려 있는 경우라면 당대의 사회적 배경과 시대 상황,제도와 시스템까지도 미리 파악하고 읽어 내려 간다면 읽는 재미와 독서효율성도 제고될 거라 생각한다.
유럽은 중세 그리스 스토아 학파 및 영주를 기간으로 하는 봉건제 및 로마 카톨릭 교의가 르네상스 시대에도 이어지게 되는데,16세기 프랑스는 신구교 간의 갈등과 내전,불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모랄리스트로서 자신의 삶의 바탕을 근간으로 다양한 경험을 고백하고 있는 몽테뉴의 자서전격인 에쎄(Essais)는 한국에서는 수상록(隨想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그가 살았던 16세기 중.후반기에는 프로테스탄티즘과 카톨릭과의 갈등과 내전이 깊게 골이 패이면서 그는 신구교의 교의에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낸다.대신 그는 사람,사물에 대한 독단적인 견해보다는 건전한 비판을 내세우게 된다.에쎄는 그가 고뇌하고 갈등했던 다양한 체험 결과를 자신의 거울에 비춰 쓴 성찰력의 소산으로 보여진다.
몽테뉴보다 반세기 가량 늦게 태어난 데카르트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크게 대조가 되는데,데카르트가 열정과 배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금욕주의자처럼 지냈던 반면,몽테뉴는 신구교의 내전을 목도하면서 당시 프랑스의 사회 분열상을 치유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을 했으며,협상가로 활동하기도 했다.<방법서설>을 집필한 데카르트가 관념적인 소유자라면 몽테뉴는 현장 및 유람을 통해 보고 듣고 체득한 결과물이기에 시대 상황 및 몽테뉴 개인의 생각과 감정 등이 근접적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즉 그는 인간의 보편적인 유형으로 들어 가기 위해 힘을 쓰고 사회 전체로 연결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가 개인과 사회를 통해 밝히고 있는 대목은 절친인 보에시와의 깊은 우정을 비롯하여 죽음,회의,동물,전쟁,여행,고통,섹스,관계,취향,유년,자아(Egoism)으로 되어 있다.몽테뉴 부인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던 보에시의 임종까지도 지켜 보았던 몽테뉴는 죽어서도 우정은 살아 있다고 회상한다.뒤를 잇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도 "철학은 죽는 법을 배우는 학문이다"라고 할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고 순리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여인에게서 난 몸,수명은 짧고 혼란만 가득하다.꽃처럼 솟아났다가 시들고,그림자처럼 사라져 오래가지 못한다." - 욥기 14장 1~2절 -
낙마(落馬)의 후유증으로 시달리며 혼미한 상태에서 몽테뉴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회의주의적인 시각을 나타낸다.당시 스토아 학파를 비롯하여 신구교의 교의가 획일적이고 꽉 막힌 절제주의는 숨이 막힐 정도였을 것이다.그는 신장결석을 치료차 독일,이탈리아 등을 유람을 한다.여행을 통해 친척과 친구를 해후할 수 있는 즐거움과 그 지역의 인종학적 관심,각종 의식과 습관,동태,몸짓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여행에 대한 흥미로운 교훈이 아닐 수가 없다.
인간은 동물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하는 몽테뉴는 일이 어그러졌을 때 돼지,소,닭에 빗대어 욕을 퍼붓기도 한다.이것은 한국에서도 자주 쓰이고 통용되는 말이며,몽테뉴는 농사와 사냥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수탉이 언제 우는지를 관찰하고 영주 신분으로서 승마를 좋아하고 말을 분신으로 생각했을 정도이다.당시 교통수단이 말이었던 만큼 말과 관련한 단어가 많다는 점도 이색적으로 다가온다.전쟁에 관련해서는 고대 전략과 전술,화승총,창,장군들에 관한 이야기에 치중하고 있다.
신장결석을 치료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몽테뉴는 온천에서 자기 몸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멜론을 먹다가 그 고통에 시달리는 악몽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신장결석에 신경을 쓰면 쓸수록 감각기능이 발달하고,신장결석의 돌이 빠져나올 때의 느낌은 탄생할 때의 느낌,그리고 성행위가 최고 절절에 달했을 때의 오르가즘에 비유하고 있다.이를 섹스 문제로 연결하면 상대방에게 정신적 매력을 느끼지 못해도 성행위는 가능하지만 육체적 매력을 못 느끼면 할 수가 없다라고 하며,성행위 중에 사정을 참는 방법도 설명하고 있다."바로 그 순간에 다른 생각에 몰두하는 것이다".라는 등의 대범하고도 경험적인 체험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몽테뉴는 법관,보르도 시장 등의 공직 생활에서 물러난 뒤에도 외교계에서 계속 활동을 했다.물리적인 접촉을 통해 다른 사람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에 몰두 하는 것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일이라는 것이 그의 소신이고 관계라고 확신하고 있다.아울러 관계에서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의 차이를 인식하고,연인과 가족을 위해서는 사적인 공간을 마련하여 타인의 침범을 경계했으며,관계는 심리적인 관계 못지 않게 육체 간의 물리적 결합이 인간 본능이라고 말하고 있으며,일본의 와쓰지데쓰로는 관계를 사이(間柄: 아이다가라)로 보면서 아이를 잃은 엄마가 본능적으로 자석과 같이 아이의 뒤를 뒤쫓아 가는 자석과 같은 힘이라고 한다.
"사는 것이 곧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몽테뉴는 말한다.몽테뉴는 개인주의 문학 형식의 창시자로 인정을 받고 있으며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자신의 내면 세계에 침잠을 하고,행복의 근원은 우리의 부모,우리의 자녀,그리고 우리의 친구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라고 했다.결국 자신의 가까운 혈족부터 친우(親友)까지를 영혼의 동반자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한다.
정신적으로 인본주의(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던 몽테뉴는 인간의 언어 능력을 인간다움의 본질로 생각하고 이는 동물과 구분되는 특징으로 삼았다.또한 외부와 단절된 채 홀로 사색하고 관념적인 언어로 자신을 성찰한 것이 아닌 직접 오감으로 느끼고 체득한 것을 고뇌의 산물로 표출된 것이 그의 에쎄(수상록)에 여과없이 선연하게 드러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몽테뉴라는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당대 프랑스의 사회제도,종교간 갈등과 내전 등의 역사적 사실까지도 간파할 수가 있어서 유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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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몽테뉴라는 철학자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어떤 사고를 가지고 살고 있는지 별로 알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제목에서 왠지 모르게 이끌렸기 때문이다.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나는 그다지 의문스럽게 생각한 적 없는 주제를 가지고 몽테뉴라는 사람은 진지하게 궁금해 한 것이다. 처음으로 들었던 생각은 “왜?” 이런 것을 궁금해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나의 삶에 빗대어 생각해보니 신기하게 나에게서도 역시 궁금함이 떠올랐다.
“아롱이는 나를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아롱이는 내가 만 16년을 키운 반려견이다. 그 녀석은 2012년 초에 내가 유럽여행을 간 사이에 저 먼 하늘나라로 갔다. 우리는 16년을 함께 성장했고 서로를 지켜보았다. 그 때 문득 나에게 든 생각은 몽테뉴의 주장과 비슷한 것이다. 내가 아롱이에게 장난을 걸어서 뛰고 놀고 물기놀이를 한 적이 있었지만 아롱이가 먼저 내게 달려와서 장난을 건 적도 있었다. 내가 손을 바닥에 내려놓고 있으면 자기를 쓰다듬어 달라고 내 손바닥 안으로 머리를 들이 밀었던 적도 있었다. 결론이 나왔다. 내가 아롱이를 좌지우지 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진짜 신사도 비신사적으로 행동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55p
내 머릿속에서 적절한 결론이 나오자 몽테뉴라는 사람이 굉장히 재미있게 느껴지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 책에서는 각기 인생에 있어 중요한 주제인 우정, 죽음, 회의, 동물, 전쟁, 여행, 고통, 섹스, 관계, 취향, 유년, 자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언급한 12가지의 주제들은 모두 삶 자체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결코 떨어뜨려서 생각하기 어렵다. 이 책은 몽테뉴의 ‘에세’(=수상록)에 쓰인 내용을 바탕으로 그의 인생철학과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몽테뉴는 참 독특한 사람이다. 평생을 신장 결석으로 고생함으로써 고통이나 질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에세>에 자유롭게 기록하였고, 친구 라 보에시를 포함한 우정이나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며 생각한 것을 또 글로 적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관계는 무엇인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절친한 친구였던 라보에시의 죽음은 그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과 함께 의미 있는 경험으로 남는다. 그가 남긴 말들이나 사상에서 다소 엉뚱하지만 공감가는 구절을 많이 발견하였다.
너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에게 신경쓰지 말고
-240p
와 같은 말이 대표적이다. 그는 참 솔직하게 인생에 대해 서술하였다. 그래서 몽테뉴의 <에세>는 어찌보면 그의 마음대로 쓴 산문집같다. 그가 언급한 “인생의 맛”이라는 표현이나, “시간을 흘려보낸다” 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 또 그가 괴한을 만났을 때 보인 태도 등은 나에게 많은 생각할 것을 주었다. 몽테뉴의, 혹은 몽테뉴의 관한 책은 딱 호불호가 갈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싫어지거나 그의 매력에 듬뿍 빠지게 되거나.
자신의 생각에 꼬리를 물고 또 그 생각에 꼬리를 물고 궁금해 하고 질문을 던지고 나를 빗대어 보는 이러한 조금은 산만한 것 같으면서도 사람을 끌고 가는 힘이 몽테뉴의 사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자기만의 독특한 표현과 방식으로 세상에 내놓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러한 모습이 참 부럽고 그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 같다. 친구를 만나기전 카페에서 책을 들어 친구가 오고도 양해를 구하고 끝까지 읽어나간 책 이었다 (다행히 친구도 내가 빌려준 책이 있어 그걸 읽고 있었다)
몽테뉴에 관해 더 파헤치고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다. 「에세(수상록)」과 「여행일기」가 참 궁금하다. 몽테뉴에 관련한 좋은책을 아는 분이 있다면 추천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이다. 미셸 드 몽테뉴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어 기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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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팍팍하다. 하루 하루가 마치 전쟁을 치르는 느낌이다. TV나 신문 등 매스컴에서 연일 경제지표와 행복지수 등에 대해서 보도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이 와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허무주의와 절망에 빠져 극단적인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대인의 불안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현실의 불안을 떨쳐 버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이런 고민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16세기를 살았던 위대학 학자 “몽테뉴”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알고 있는 몽테뉴에 대한 기억은 그가 스토아주의자, 회의주의자였다는 것, 그리고 학창시절 멋부리던 읊조리던 그의 사상이 전부다. 그래서 이 책 제목만으로는 이 책이 몽테뉴에 대한 것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1570년, 절친한 친구와 아버지, 첫 딸의 연이은 죽음을 겪고 법관직을 버리고 성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이쯤되면 세상과 결별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추측과 달리 그는 몇 년 뒤 “에세(essai)”라는 책을 들고 사람들 속으로 돌아 오면서, 능동적인 삶을 살 것을 권했다고 한다. 뜻하지 않은 사건은 그의 생활과 삶을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에세”를 읽어보지 않은 입장에서 그 책의 내용을 가늠해 볼 수 없다. 하지만 솔 프램튼이 쓴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몽테뉴의 삶과 그의 사상, 그리고 “에세”가 출간된 배경에 대해서 알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책은 우정, 죽음, 회의, 동물, 전쟁, 여행, 고통, 섹스, 관계, 취향, 유년, 자아 등 12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에 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몽테뉴는 일상에서 겪은 소소한 것들을 자신의 삶과 생각 속으로 끌어들여서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 세계를 구축했다. 우리는 항상 자로 잰 듯한 삶을 살 수는 없다.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슬프게 그때 그때의 감정에 충실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우리 일상의 모습이 몽테뉴라는 위대한 사상가의 글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최근 경제가 어려워지자 자기계발서와 처세서가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다. 심지어 “힐링‘이라는 외피를 입고 우리들에게 달콤한 유혹을 건네고 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인생과 삶이 있다. 몽테뉴의 글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가 이룩한 업적이나 사상이 아니라, 그가 보여준 진솔한 모습이다. 결코 우리와 다르지 않은 그의 모습이 의미있는 이유다.
이쯤되면 그가 쓴 “에세”를 늦었지만 한 번쯤 들춰봐야만 예의일 것 같다. 지은이가 분류한 각각의 주제에 대해 내가 거쳐온 시간과 앞으로 지나가야 할 길을 몽테뉴의 삶과 생각에 비추어 보는 것도 재미날 것 같다. 몽테뉴처럼 항상 생각하고 고민하는 자세와 함께 때로는 깃털처럼 가볍게 부유할 수 있는 자세도 필요할 것 같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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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가 환생한 것 같다. 솔 프램튼의 사유와 언어 감각은 몽테뉴 뺨칠 정도이다. 우선 원전 [에세]의 저자 몽테뉴의 자유로운 사유와 기발한 표현은 우리의 상식선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구름 위를 거닐고 있다. 몽테뉴는 동작 하나를 묘사하더라도 가능한 경우의 수를 모두 떠올려 한 치의 누락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바닥까지 싹 훑고 있다. 어떻게 이런 항목들을 다 떠올릴 수 있는지 그 사유의 폭과 언어 구사의 다양성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손은 어떤가? 우리는 손을 다양한 모양으로 변화시켜 요청하고, 약속하고, 부르고, 사람을 물러가게 하고, 위협하고, 기도하고, 애걸복걸하고, 부정하고, 거절하고, 심문하고, 찬미하고, 셈을 하고, 고백하고, 뉘우치고, 겁을 내고, 부끄러워하고, 의심하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선동하고, 격려하고, 맹세하고, 증언하고, 비난하고, 저주하고, 용서하고, 모욕하고, 경멸하고, 도전하고, 조롱하고, 아첨하고, 칭찬하고, 축복하고, 창피를 주고, 비웃고, 화해라고, 권고하고, 찬양하고, 축하하고, 기뻐하고, 불평하고, 한탄하고, 체념하고, 기를 꺾고, 깜짝 놀라고, 외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한다. 손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다양해서 혀가 질투를 느낄 지경이다. 우리는 머리만 움직여서 초청, 해산, 맹세, 부인, 반박, 환영, 예우, 존경, 무시, 요구, 일축, 핥기, 애통, 애무, 질책, 복종, 반항, 촉구, 협박, 보장, 질문을 표시할 수 있다. 눈썹은 어떤가? 특정한 의미를 전하지 않는 동작은 하나도 없다. 동작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이고,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이다. 동작을 제외한 다른 언어는 다양하고 서로 다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며, 동작이야말로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진정한 언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11-112) 솔 프램튼도 몽테뉴의 치밀성을 교본으로 삼은 듯 어느 것 하나 소홀히 지나치는 법이 없다. 우정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소개한 홀바인의 그림에 대한 분석은 미술사가나 큐레이터의 설명 수준을 넘고 있다.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에 나오는 장 드 댕트빌과 조르주 드 셀브의 작별 순간을 기록한 그림을 보고 프램튼은 그들의 우정을 입증할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림의 전체적 구성에서부터 세밀한 소도구 배치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대상은 전혀 없는 듯 보인다. 학자들이 이 그림에서 주목하는 것은 분열의 상징들이다. 2단으로 구성된 탁자의 하단부에는 줄이 끊어진 류트와 피리 몇 개가 놓여 있다. 줄이 끊어진 류트는 전통적으로 불화의 상징으로, 피리는 전쟁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옆에는 로마를 세계의 중심으로 표시한 지구의가 놓여 있다. 그 반대편에는 루터교의 찬송가 책 한 권이 놓여 있어 신 구교의 분열을 암시하며, 독일 수학자 페터 아피안이 1527년에 발표한 [상업 계산에 관한 새롭고 완벽한 입문서]라는 수학책도 놓여 있는데 이 책 역시 종교 분열의 시작을 상징한다.(중략) (36) 솔 프램튼은 [에세]에 관하여 12편의 짧은 얘기들로 평설하고 있는데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이 제1장의 우정에 관한 대목이다. 몽테뉴와 라 보에시의 절절한 우정은 연령과 생사를 초월하여 이어졌다. 둘은 처음 만나자마자 단번에 정신적으로 교감하며 라 보에시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음 이후에도 우정을 지속한다. 라 보에시가 죽어가는 순간을 목도하면서 몽테뉴는 비애와 상실감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상실감의 깊이가 점점 깊어지면서 몽테뉴는 자신의 빈약한 고백을 펜으로 옮기며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둘의 우정은 “단지 그가 있었기 때문이고, 내가 있었기 때문”이라면서......(42) 그러니까 무조건적인 우정을 공유한 셈이다. 여기서 작가는 이들의 우정이 우정 이상의 그 무엇(?)이 아닌가하고 의심하기까지 할 정도이다. 절친 라 보에시의 죽음과 연이은 가족들의 비보에 몽테뉴는 마음 문을 닫고 서재에 칩거하며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몽테뉴는 우울한 몽상에서 벗어나 정신의 생기를 회복하고 [에세]를 저술하게 되었는데 그 계기가 바로 낙마 사고였다. 그 사고 이후 몽테뉴는 인간의 정신이 육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마음에만 침잠하여 있던 상태에서 육체의 경이로운 회복과 신선한 율동을 만끽하며 생명력을 되찾게 되었다. 이에 대해 프램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신이 마치 몽테뉴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 사고는 인간의 지식에 대한 그의 인식을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내세를 동경하는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자에서 벗어나, 인간의 육체 그리고 자연적인 것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에세] 최종판에서 보완한 [실천에 대하여]에서 자기 분석 과정을 “새롭고 특별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통제할 수 없지만 매력이 강한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그가 마지막으로 보충한 내용은 진솔하고 지적인 용기를 보여주고 있다). (69) 몽테뉴가 스토아학파의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으로 거듭 나게 된 것이 이런 우연한 사고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니 약간 의외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 외에도 죽음, 회의, 동물, 전쟁, 여행, 고통, 섹스, 관계, 취향, 유년 및 자아 등 몽테뉴가 다루었던 여러 주제들에 대해 프램튼이 멋들어지게 해설을 곁들인다. 앞서 말했듯 프램튼의 견해인지 몽테뉴의 생각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사유의 맥락이 닿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 원전인지 평설인지를 알려주는 인용 문구 표시를 눈여겨 잘 보고 누구의 입장인지 판단해야할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에세이를 원전으로 한 멋진 에세이라 하겠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