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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라는 이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압살롬 압살롬' 등 번역이 된 책이 더러 있지만 사실 제대로 읽어본 책은 하나도 없다.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그의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역작 '소리와 분노'를 먼저 읽어보고 싶어서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역시 쉽게 읽히지 않는 책이었다. 이런 작품은 때로 발번역 논란에 휩싸이곤 하지만 사실 작품 자체가 난해한 경우에는 아무리 번역을 잘 따온다고 하더라도 쉽게 읽히지 않을 수 있을 뿐더러, 번역을 거치면 당연히 원문에서만큼의 매력과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래도 추천! |
|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는 한 가정의 몰락을 여러 인물의 시선을 통해 그린 작품입니다. 시간이 뒤섞인 구성이라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각 인물의 감정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벤지라는 인물을 통해 순수함과 슬픔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가족과 상실, 변화에 대한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소설로, 읽고 나면 진한 여운을 남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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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건 매우 싱겁고 사소한 순간이엇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어떤 작품을 읽고 맨 뒷장에 전집 목록을 보며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 표시된것만 몇개 랜덤으로 찝어서 그냥 구입했는 그 중 두 권이 포크너 작품이었다. 그리고는 더 시간이 지나서야 윌리엄포크너라는 작가의 위상을 알게됬다. 이 작가의 다른 모든 작품들을 읽어보고 싶어서 찾아보니 출판사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어서 어떤걸 구입해야 할지 복잡했다. 한 출판사에서 전집형태로 기획할 만 한데 어디서든 좀 멋지게 박스형으로 해서 만들어줬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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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를 읽고 적는 리뷰글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작품 관련 스포일러 및 결말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으니 예민하신 분들은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제목의 오역으로 유명한 고전 명작. 오랜만에 문득 생각이 나서 구매하려다가 문학동네 번역판이 가장 문체가 마음에 들어 구매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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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머튼 신부님이 쓰신 '구원의 빛, 원제 opening the bible' 을 읽었는데 그 중 한 챕터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소리와 분노'에 대한 설명을 하신다. 소설의 전체와 부분적인 내용들을 성서의 여러 관점으로 설명을 하셨으니 '구원의 빛'과 '성서'를 더 이해하기 위해 무조건 이 책을 구입했다.
읽으려고 보니 미국 모더니즘소설의 걸작이니, 의식의 흐름기법이니 하여 문학적으로도 상당히 접근하기 어려운 작품이라고 했다. 작가는 이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탔다고 하는데 정작 미국의 문학도들도 몇번을 읽어야 이해할수 있는 소설이라고 한다. 다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도전을 하니 번역가가 번역을 잘한 탓인지 몇 페이지 지나 수월하게 읽어졌고 내용도 흥미진진해서 2-3일만에 끝냈다.
그러나 정작 머튼신부님이 설명하신 마지막부분 부활예배의 감동은 밋밋하게 지나갔다. 그 대목을 기대했었는데 아마도 영어원문과 번역문의 차이일수도 있고 번역가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지 못할수도 있고 앞선 부분이 너무 난해해서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해서일수도 있다. 세가지 이유 모두 다이겠지만 여러번 읽으면 좀 다르게 느낌이 올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머튼 신부님이 '구원의 빛' 중에서 이 소설에 대해 언급하신 내용이며 성서적인 관점에서 깊이있게 설명을 하셨다.
현대의 예술작품 가운데 ‘말씀을 듣는’ 체험을 묘사한 작품중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를 살펴보자. 작가가 교회에 나가는 신자이거나 습관적으로 믿는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작품을 통하여 심오한 성서적 통찰력을 표현할수 있다는 사실을 알수있다. ‘소리와 분노’의 마지막 장에는 한 작은 흑인교회에서 부활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포크너는 심오한 성서체험을 아주 진실되고 감명깊게 드러낸 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 체험은 바로 단순하고 성실한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믿음으로 설교되고 수용되는 하느님의 메시지, 곧 성서의 메시지를 진정으로 귀담아 듣는다는 것이다. 성서에 담겨 온 인류에게 전해지고 있는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처럼 아주 설득력있게 통찰하여 보여준 미국작가는 거의, 아니 전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흑인 노예 딜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서 전적으로 기인하는 투명한 맑음으로 해서 그 모든 인물들에 비해 단연 돋보인다. 작중 인물중 그녀만이 온전하고 뚜렷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제이슨 콤슨 집안은 이 책의 제목을 그대로 확인시켜 준다. 소란함, 분노, 광기, 격정, 증오, 갈등 그리고 잔인함 등이 온 집안에 그득하다. 그러나 딜지가 친척과 함께 백치인 벤지 콤슨을 데리고 교회를 향할 때는 이 광포한 세상에서 단순하고 가난하며, 정직하고, 성서의 진리가 살아있는 세상으로 향해가는 장엄함 행렬을 보여준다. 이 모습은 깊숙한 곳에서 성서와 공명을 이룬다. 성서의 핵심부에는 죽음의 땅에서 광야로 빠져나가 약속된 나라를 향해가는 구원받은 자들의 행렬, 즉 파스카(건너감)와 탈출이라는 주제가 자리잡고 있다. 콤슨집안은 사실상 격렬하고 경망스런 언동이 횡행하는 일종의 이집트이며 자신의 변덕스런 뜻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제이슨은 곧 파라오에 해당된다. 흑인 교회는 세상 저 끝에 간신히 발붙이고 있는 신기하고 커다란 장난감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구원받은 무리를 나타내는 종말론적 상징이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온 방문 설교자가 학식있는 백인 설교가의 화려한 어투를 흉내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가 ‘어린 양’을 상기하고 그 양의 피를 보게 된 순간 체험의 전체 분위기가 완전히 변화된다. 다듬어지지는 않았으나 사랑이 넘치는 詩 그 자체가 된 설교는 단 몇분 사이에 사랑, 구속, 화해 속의 삶의 의미에 관한 그리스도교 메시지 전체 즉 구원의 역사 전부를 집약시킴으로써 신자 전체가 이를 듣고 응답하게 한다. 눈물을 흘리며 얼굴이 광채로 빛나는 딜지는 ‘처음과 마지막을 보게‘ 된다. 종교적 출세주의자에서 말씀의 예언자로 변화된 것은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한 문학적 기교만은 아니다. 이것은 매우 성서적이다. 어쩌면 포크너 자신이 의식적으로 나타내려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서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해방과 탈출을 신약성서적으로 더 깊게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말씀의 힘은 성서적으로 꿰뚫고 들어가 의례적인 종교가 갖는 위선과 지루한 자기 과시의 한가운데서 불꽃처럼 타오른다.
이 때 이루어진 딜지의 변모 역시 완전히 성서적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녀에게서 느낄수 있었던 내적 성숙의 결실이다. 이것은 그녀의 kairos, 결정적인 때이다. 빛이 비쳐져 깨닫는 순간이요, 무거운 짐을 벗는 순간이며, 성서 내용 전부를 한데 모아 ’처음과 마지막‘을 보여주는 생명의 창조력과 구원의 능력을 만나는 순간이다.
딜지가 이처럼 결정적인 시점을 경험할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시간감각 전체가 애초부터 성서적이었기 때문이다. ’소리와 분노‘를 이해하는 열쇠는 등장인물들이 지닌 시간감각의 대위법적 차이를 아는 데 있다. 이곳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순전히 본능적인 현재의 체험 속에 한 덩어리로 뒤엉켜있다. 시간감각에 관한 한 그는 종교 이전의, 문명 이전의 상태에 처해 있는 셈이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에 사로잡혀 버린 콤슨은 결국 시간에 쫓기고 시달리다 자살하게 되고 제이슨은 사업가로서 증권시세표과 시간표를 보고 전보를 띄운다. 이 두 사람은 순전히 추상적인 시간의 그물에 걸려있는 합리적인 문명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딜시의 시간감각은 전적으로 성서적이다. 곧 시간을 시계로 측정하지 않고(부엌에서 시계가 다섯 번을 치자 ’아 여덟시네‘하고 말한다) 생명체의 성장에 있어 생명이 충만한 정도로 측정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서서히 무르익어가는 삶 자체의 때이다. 이는 점차적으로 성숙되어가는 삶을 억지로 재촉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마침내 무르익어가는 삶 자체의 때이다.(제이슨은 시간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무리하게 재촉한다.) 딜지는 성서 그 자체에 가득 차있는 시간감각을 그대로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때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딜지만이 온전하고 분명하게 ’구원받은 자‘로서 때를 알고 있다. 이 점이 성서가 참으로 일러주고자 하는 바이다.
사건이나 돌연히 발생하는 상황의 맥락에서 이와 같이 듣고, 응답하고, 드러내고 짐을 덜게하는 역동성이야말로 성서의 특성이다. 특히 우리의 시간체험에 변혁을 가져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시간관념을 구체화시키는 방식에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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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두 페이지. 새롭다. 조금 과장해서 짜릿함을 느끼게 한다. 물론 내가 이책을 이해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지만 이렇게도 쓸수 있구나와 뭔가 새로운 경험, 소위 소설이란 새로운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방법이라는 그 말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계단을 뛰어올라 환한 차가움 밖으로 나와 어두운 차가움 속으로 들어갔다.’p14 벤지 - 엄마, 아버지, 캐디(누나) - 퀜틴(캐디에게 오빠), 제이슨(형제 막내? 누가 형인지?), 미스 퀜틴(조카) 딜지, 로스커스, 티피, 버시, 프로니, 러스터(손자) 쏟아지는 등장인물에 혼재된 시간으로 펜을 들고 쓰지 않을수가 없었다. 단편적 조각을 맞춰가는 것도 나름 즐겁다. 삼십삼세 벤지는 러스터가 돌본다. 러스터는 제이슨 삼촌이라 이야기 한다. 딜지는 러스터의 할머니이다. 이야기는 건너뛰기를 멈추지 않는다. ‘긴 철사가 내 어깨를 가로질러 왔고 불이 딴데로 갔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p78 ‘나는 불이 있던 데로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이 홱 뒤로 움직였고 나는 그것을 입에 넣었고 딜지가 나를 잡았다.’p79 모리… 벤지(벤저민)의 예전 이름.. 캐디가 만든건지 모르겠으나 성경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캐디는 딜지에게 설명한다.
슬프다. 아니 아프다 책을 읽으면서 그의 아픔이 느껴지는것 같다. ‘불이 있었다. 그게 벽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거울에 불이 또하나 있었다.’p81 캐디에게서는 나무 냄새, 아버지에게서는 비 냄새가 난다고 한다. 내게는 어떤 냄새가 날까? 내 아버지에게서는 담배냄새가 많이 났고 난 그 냄새가 좋았다. 아빠의 냄새였으니까. 이른 아침 아빠의 냄새와 까칠한 수염. 밤에는 아빠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그 시간은 내게 아빠를 허락하지 않았다. 난 어떤가?
사람...사람을 따라 기억이 떠오르고 그 기억을 따라 과거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문밖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p89 비소리인것 같다. 불을 좋아 한다. ‘구석은 어두웠지만 창문은 보였다. 나는 슬리퍼를 쥐고 거기에 웅크리고 앉았다. 나한테는 그게 보이지 않았지만 내손에는 그게 보였고 밤이 되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p95
어렵다면 어려우나 재밌고 새롭다는 생각에 내가 100% 이해했냐 아니냐에 대해 그다지 생각지 않게 되었고 주저했던 포크너의 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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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4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과 1910년 6월 2일 하루의 콤슨가 3형제와 흑인 여자 하인 1명의 시각을 중심으로 서술한 윌리엄 포크너의 역사상 명저 중 하나다. 이 책이 전세계적 명성을 얻은 주된 이유는 윌리엄 포크너가 결국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기 때문인 듯 하며, 그에 앞서 이 책을 의심의 흐름 기법으로 독특하게 완성한 기념비적 작품이기 때문인 듯 하다. 의식의 흐름기법은 자신의 경험, 생각, 기억 등을 화자가 떠올리는 내용 그대로 서술하는 기법인 듯 한데, 내가 그런 작품을 경험했던 것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후 이번이 두 번째 인 듯 하다. 평범한 사람은 정제되고 시간순으로 정리된 서사적 구조에 익숙해져 있다고 보는데, 인간의 의식에서 떠오른 즉석의 내용을 그대로 작품속에 글로 옮겼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혼동과 복잡함은 그 줄기를 파악하는 화자와 기억력이 좋은 몇몇 독자 외에는 글로 옮겨진 내용조차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정리하여 이해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되며, 오히려 흐르듯이 읽는 것이 방법인가 싶기도 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역시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작품성과 문학성을 인정받고 있는 걸작인데, 그 작품에 비해 이번 소리와 분노는 그나마 분량이 적어서 다행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권마다 상당한 분량의 내용으로 총 10권으로 구성된 정말 대작 중에 대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책을 읽다가 보면 내가 무슨 내용을 읽고 있었는지 혼동에 빠져 작품 내용조차 파악이 쉽지 않으며, 결국 다 읽었다고 해도 그 내용이 거의 기억조치 나지 않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소리와 분노도 분량만 적었지, 역시 책을 읽기도 쉽지 않았고, 그 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어려웠으며, 도대체 내가 무슨 내용의 책을 읽었는지 기억조차 쉽지 않은 작품이었다. 그래도 평가는 엄청난 작품이라고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읽은 척이라도 하고 싶긴 한데, 솔직히 내 기억과 느낌에 남아 있는 뭔가는 그리 많지가 않다.
1928년 4월 7일의 화자는 콤슨가의 막내 아들 지적장애인인 벤지이다. 그의 사고를 글로 그대로 옮긴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일단 문장구조가 거의 파악이 안되고, 도무지 무슨 생각이나 상황을 묘사하는 지 파악하기 어려우며, 더구나 어릴적 추억이나 현재의 상황 그리고 그런 것들이 혼재되어 화자의 생각으로 뒤죽박죽 섞여 등장하기 때문에 내가 계속 읽어나가야 하는지 계속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다. 일단 무슨말을 하는지 파악이라도 되어야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는지...두번째 내용은 1910년 6월 2일 콤슨가의 큰아들 퀸틴이 화자이다. 벤지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내용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역시나 기억, 생각, 서술당시 화자가 경험하는 사건들이 혼재되어 서술되고 있어 이것이 기억인지 생각인지 아니면 당시 경험하는 사실을 묘사하는 것인지 구분이 모호하고, 문장구조도 엉망이라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작품 속에서 그가 하버드 학생으로 등장하는 내용인데, 도무지 어떻게 그가 하버드 학생이 되었는지 이해되지 않았으며, 그가 겪는 어의없는 상황에 대처하는 그의 어의없는 어수룩함이 더해져 도대체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용에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책의 어디선가 그가 물에 빠져 자살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1910년 6월 2일은 그가 자살하는 시점 얼마전인 듯 하며, 그래서 의식적으로 혼란스럽고 정리되지 않은 심리상태를 이런 서술방식으로 혼란스럽게 묘사한 것이 아닌지 생각이 들긴했다. 1928년 4월 6일 셋째인 제이슨이 화자인 이 부분은 그의 누나 캐디가 낳았으나, 아버지가 집으로 데려온 조카이자 자기 형의 이름과 같은 퀸틴과의 사건이 주요 내용이다. 제이슨은 아버지와 형이 사망한 후 실질적으로 콤슨가를 이끄는 가장역할을 하나, 천성이 버릇없고 이기심이 강하며, 물질적 이득을 쫓는 속물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누나 캐디가 딸 퀸틴에게 보내는 돈을 중간에서 가로채고 있으며, 투자를 통하여 한방을 노리기도 한다. 결국 자신이 몰래 모아둔 돈을 조카인 퀸틴이 모두 훔쳐 달아나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된다.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는 1928년 4월 8일 부활절 당일의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콤슨가의 흑인 늙은 하녀 딜지가 주인공이긴 하나, 화자는 저자이다. 앞의 내용은 모두 화자가 나로 등장하나 이 부분 만은 내가 등장하지 않고, 딜지 중심의 이야기 전개로 구성되어 그나마 가장 이해가 쉽고, 작품의 상징은 그렇다치고, 무슨 얘기라도 하는지 파악이 되는 다행스런 부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책을 읽는 속도가 평상시의 다른 서사적 구조의 작품 수준으로 회복되어 작품이 종료되는 시점이 갑작스럽게 등장해 당황할 수도 있겠다 싶다. 실제로 나는 그랬다.
여기저기 찾아보다 작품의 명성만을 쫓아 선택한 책이 소리와 분노이다. 지금에서는 책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다. 4번에서 5번은 읽어야 한다는 글도 인터넷에서 찾아본 듯 한데, 이 책은 인내가 필요한 책이다. 책의 첫 번째 내용이 지적장애인인 벤지의 입장에서 서술한 내용을 배치한 것이 나는 저자의 의도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을 인내하고 견디지 못하면 어차피 책을 다 읽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니 차라리 처음에 배치하여 포기할 독자는 일찍 포기하라는 저자의 배려가 아닐는지...창작 활동으로 탄생한 창작물에서 저자의 숨은 의미와 상징을 찾아내는 것은 올바른 감상의 태도이며, 작품을 접하는 감상자의 책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래서 도무지 떠오르지 않을 그 무언가를 고민하며 작품을 접하곤 하는데, 이번 작품은 도처에 산재한 명성에 비해 내가 파악한 것은 많지가 않다. 그나마 책의 부록으로 해설해 놓은 내용을 읽어서 경험한 아 그렇구나 하는 느낌정도이다. 일독하려는 독자는 잘 판단해 봐야 할 것이며,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도전해보고, 의미를 찾았으면 좋겠다.
부록에선 이책 제목을 저자가 처음엔 우연히 생각했다고 하고 맥베스의 문구를 번역된 내용으로 인용한 설명이 등장하고, 여기저가 찾아보면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인용구에서 제목을 가져왔다는 내용만 등장한다.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삶은 단지 무대위서 그의 시간을 조바심치고 거들먹거리는 미천한 연기자나 엑스트라(단역)일 뿐이고, 그리고 더 이상 들리지 않아 아무것도 의미하는 것 없이 소리와 분노로 가득찬 바보가 얘기하는 이야기이다.“
책이 정말 그랬던 거 같다. 내가 바보인가 |
| 미국 남부의 명문가 콤슨 가의 20여 년에 걸친 정신적·계급적 몰락을 통해, 남북전쟁 이후 서서히 와해되어간 남부의 사회상을 그려낸 포크너 최고의 걸작 소설. 서구문명의 도덕적 기반과 영속성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되던 20세기 초, 전통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의식의 흐름, 분열된 서술, 복수의 서술 관점, 시간과 과거를 다룸에 있어 상충하는 관념들”을 사용해 “허무와 무질서의 광대한 파노라마”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시도했던 모더니즘 소설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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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전집을 고르더라도 늘 읽는 작가의 책만 선택하게 된다. 몇 백년에 걸쳐서 전 세계에서 고전으로 칭송받는 수 많은 책들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늘 어려운 문제다. 윌리엄 포크너는 이름만 알고 있다가 최근 영화 버닝을 보면서 각인된 작가였다. 그의 책을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서 여러권 고르다 선택한 것이 바로 소리와 분노이다. 1장에서 진도가 더디 나가고 있긴 하지만 이 고비를 넘기면 펼쳐질 큰 즐거움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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