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축을 통한 길들이기 건축은 공간의 예술이다. 아니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과 생활 그리고 그 사회의 부대낌, 사회가 바라보는 미래의 모습을 담는 그릇1)”이다. 그렇기에 누군가 건축을 통해 공간을 의도적으로 조작하여 우리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을 이상현 교수는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의 말을 변형하여 “그들이 건물을 빚어내고, 건물은 우리를 빚어낸다2).”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가 ‘길들이기’다. 물론 ‘길들이기’는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여우간의 관계처럼 쌍방향적 속성이 강하다. 다시 저자의 표현을 빌려보면 “사람은 자신과 관계된 모든 대상을 자연스레 길들이는 속성이 있다. 관계가 처음과 다르게 점점 변했다면, 그 대상에 대해 길들이기가 이뤄진 것이다. 다시 말해 대상을 대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은 것이다. 길들이기를 통해 처음에는 어색하고 서툴렀던 관계가 편안하고 익숙한 관계로 변한 것은 길들이기의 결과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은 모든 대상과의 관계에서 길들임과 길들여짐을 반복하고 있다. 자신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요구하고, 거기에 맞춰 스스로 변해가기 때문이다.3)” 이러한 과정을 통해 ‘길들이기’는 “선택한 하나의 상태에 집중해서 그전에 가능했던 다양한 선택 항을 떠올리지 못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 후에는 선택의 기준으로 작용했던 선호만을 유일한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기준의 가능성은 부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4)”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건축을 통한 ‘길들이기’는 무시무시하다. 누군가에 의해 최초의 건축을 통한 ‘길들이기’가 시작되면 그 후대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의도에 ‘순치(馴致)’되어 따르게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전통 한옥’하면 떠올리는, 신분제사회에서 최상위 계층의 거주공간인 양반집을 생각해보자. “대문을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공간이 바로 (하인들이 거주하는 공간인) 행랑채이다. (행랑채와 안채 사이에 담장이 설치되어 있어) 행랑채와 안채가 시각적으로 단절되어 있고, 물리적 접근 역시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는데 반해, 행랑채와 (남자 주인의 거주공간인) 사랑채의 관계는 좀 덜 분리돼 보인다. (이것은) 바깥주인이 행랑채를 감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뿐만 아니라 사랑채는) 행랑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지어지도록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랑채 일부에 누마루를 만들어 사랑채 안에 더 높은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그 결과) 행랑마당에서 사랑채 누마루를 바라봤을 때, (하인들은) 고개를 들지 않는 이상 주인의 발 정도만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하인들에게는) 감히 주인과 눈을 마주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은 하인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용이하게 감시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랑채 누마루에서 가장 잘 내다보이는 곳에 바로 사랑채 주인이 소유한 농토가 있다. (결국 사랑채 누마루는) 앉아서 일꾼들이 일을 잘하는지 감시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랑채와 행랑채, 그리고 사랑채와 바깥 들녘 간의 공간 구조는 각각의 공간을 차지한 사람들의 역할을 확실하게 구분해준다. 공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대를 두고 길들이기를 하고 길들여지기를 반복한다.5)” 마치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노예제도를 자연의 섭리라고 강하게 주장했던, 변호사 아담 유윙(Adam Ewing)의 장인 하스켈 무어(Haskell Moore)처럼. 건축을 통한 탈(脫) 길들이기 우리가 모르고 있었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불평등한 관계를 길들이려는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꾸준히 계속해왔다. 그런 사례 가운데 하나가 ‘아서 왕의 원탁’이다. 상석(上席)이 존재하지 않는 “원탁에서는 (직사각형 탁자와 달리) 우월한 위치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아서 왕의 원탁은 ‘불평등한 관계를 길들이는 건축’을 부정하고 ‘평등한 관계를 길들이는 건축’적 장치를 고안한 좋은 사례6)”가 된다. 이러한 노력과 다시 방향이 다른 시도도 있어왔다. 특정 기능을 하는 건물을 그런 기능을 할 것처럼 보이게 짓는 행위를 통해 ‘길들이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 1893~1972)가 설계한 베를린필하모닉 콘서트홀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대형 공연장과 달리 주조(主調)를 확보하거나 대칭을 형성하는 대신, “작은 왕관 여러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듯한 느낌7)”을 주고, “의도적으로 낮아 보이게8)” 설계되었다. 이를 통해 나치즘으로 대표되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분위기를 철저하게 배제할 수 있었다. 프랭크 게리(Frank Gehry; 1929~)의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역시 이러한 경향을 보여준다. “(곡면으로 된) 여러 개의 매스를 무작위로 쌓아놓은 듯한 형상9)”의 이 건축물은 도저히 말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게리의 곡면 건축은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길들여서 미안하다는 반성과 길들여지지 않아도 좋다는 메시지를 전한다10)”고 한다. 무엇을 위해 건물을 짓는가 비교대상이 없기에 건축을 통한 ‘길들이기’를 알아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리하여 건축은 건축가가 공간으로 표현하는 시대정신이 되는 것이다.11)”라는 서현 교수의 말을 생각해보면 건축적 선택의 기준이 인간에 대한 사회적 이념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건축은 인간의 불평등을 구현하고, 유지하고 강화하는 도구12)”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하지만, “(건축은) 새로운 가치를 길들임으로써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는 일도 할 수 있다.13)” 불행히도 사람이 살아가는 한, 건축을 통한 길들이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방법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보다 나은 미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건축을 하는 것이 아마도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1) 서현,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개정판), (효형출판, 2004), p. 248 2) 이상현,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효형출판, 2013), p. 36 3) 이상현, 앞의 책, p. 19 4) 이상현, 앞의 책, p. 20 5) 이상현, 앞의 책, pp. 48~51 6) 이상현, 앞의 책, p. 177 7) 이상현, 앞의 책, p. 193 8) 이상현, 앞의 책, p. 194 9) 이상현, 앞의 책, p. 231 10) 이상현, 앞의 책, p. 219 11) 서현, 앞의 책, p. 248 12) 이상현, 앞의 책, p. 36 13) 이상현, 앞의 책, p. 294 |
|
시의 창작 기법 중 ‘낯설게 하기’가 있다. 너무나 익숙해서 재고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어떤 대상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고 묘사하는 것을 말한다. 낯설게 하기를 통해 바라보는 시적 대상은 그전까지 알고 있던 ‘그것’을 말 그대로 낯설게 만들어버린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처음 사용한 용어지만 근래에는 문학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두루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효형출판에서 출간한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을 읽었다. 원래 건축 관련 책을 잘 안 보는 편인데, 이 책은 건축과 인간의 관계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는 카피를 보고 솔깃해서 구입했다. 이 책이 의도하는 바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건축 낯설게 바라보기’다.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건축물이 사실은 나를, 우리를 길들이고 있었다는 것. 건축물은 사람이 지었으니 당연히 사람을 위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건축물을 지은 사람의 의도가 사용자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본문에도 언급되는 윈스턴 처칠의 명언 “우리는 건물을 만들고, 건물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를 저자는 다음과 같이 수정한다. “‘그들’이 건물을 빚어내고, 건물은 ‘우리’를 빚어낸다.” 건물을 지은 그들과 우리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이 사회이데올로기의 생산자들, 지배층들이고 우리가 그 이데올로기의 피지배자들이라는 사실은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건축을 매개로 사회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와 사례에 대해 이 책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다. 저자는 길들이는 건축의 대표적 예로 양반집과 궁궐을 꼽는다. 양반(주인)과 하인, 왕과 신하의 구분이 명확했던 시기에 지배자들의 거처였던 양반집과 궁궐은 여러 가지 건축적 장치를 통해 아랫사람을 자신에게 복속시키고 확실하게 신분 구분을 했음을 다양한 사례를 열거하며 설명한다. 가령 하인이 거주하는 행랑채 마당에서 양반의 공간인 사랑채를 바라보면 하인의 시선은 사랑채 누마루에 닿게 된다. 자연 지세와 인위적 수단을 통해 영역 간의 높이 차를 구현했기 때문이다. 하인이 고개를 들지 않는 이상 하인은 주인의 발 정도만 겨우 볼 수 있을 뿐이다. 궁궐로 가면 이러한 건축적 장치는 더욱 극대화된다. 경복궁 중간에 아예 금천(禁川)이라는 개천을 파서 왕과 신하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금천을 건널 수 있느냐 없느냐로 신분이 확연히 구분된다. 이것은 또 금천을 건널 수 있는 신하와 그렇지 못한 신하를 구분하는데, 절대 권력자인 왕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는 사람이 더 우월해지는 것이다. 작은 개천 하나로 이렇게 사람을 차별하다니, 생각하면 참 얍삽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궁궐이 갖고 있는 ‘사람을 길들이는 장치’는 그뿐만이 아니다. 조선 왕궁의 광화문-흥례문-근정문, 이 삼문 형식을 흩뜨리지 않기 위해 신하들이 지나다니는 문을 따로 만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대신 통문과 협문이라는 작은 문으로 드나들도록 함으로써 신하들로 하여금 자신의 신분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끔 했다는 대목에서 나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이 흥미로운 이유는, 건축으로 길들이기뿐 아니라 그 반대의 노력, 시도도 같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 이념에 봉사하는 건축이 있다면, 그 반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길들이기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는 건축도 있다. 독일 나치에 협조한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의 건축에 반대하고 나치의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로 건축된 베를린필하모닉 콘서트홀을 저자는 예로 들고 있다. 한 곳에 모여 공연을 관람하더라도, 그전과 같이 집단행동은 불가능하도록 설계된 이 콘서트홀을 설명하는 데 저자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또한 LA에 지은 프랭크 게리의 월트디즈니 콘서트홀도 건축의 길들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소개하고 있다. 건축을 통해 사회의 지배구조를 읽어내는 저자의 시선이 기발하고 날카롭다. 꼭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세상이 알게 모르게 행하고 있는 익숙한 억압의 징후를 느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읽어볼 만한 책이다. |
|
유사이래로 지배계층과 피지배 계층의 충돌은 늘 있어 왔습니다. ‘지금 이대로’를 외치면서 지배 상태를 공고히 하고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의지와,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를 외치면서 그러한 지배 계층의 의지에 맞서 싸우려는 피지배계층의 의지간의 충돌이 역사의 수많은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배계층입장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의지를 드러내 놓지 않고 피지배계층에 현재의 상태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시키고 정당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수많은 법과 훈육 제도, 매스 미디어가 활용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가 밝혔듯이, 지배 계층의 그러한 의지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건축물에서도 은밀하게 나타납니다. 책 제목만 본다면 건축물이 길들이는 주체가 되고, 사람이 길들여지는 객체라고 하지만, 건축물은 수단일 뿐이고, 실제 길들이는 주체는 지배계층이고, 길들여지는 객체는 피지배계층이라고 할 수 있지요. 스피노자는 신은 곳곳에 편재해 있다는 범신론을 폈습니다만, 이 책을 보면, 이 말을 지배자(또는 지배 계층)의 권력 의지는 건축물 곳곳에 편재 있다는 말로 응용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과거의 건축물과 현재의 건축물에서 나타난 은밀한 차별과 배제, 그리고 이에 반영된 사회 주류적인 이념이나 의지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가장 미시적이고 사적인 공간인 주택에서 시작해서 서원과, 향교, 궁궐, 도시, 그리고 가장 거시적인 공간인 국가의 수도에서 나타난 지배계층의 길들이기 의지가 실제적으로 어떻게 구조화되고 현실화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위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건축물로 길들이기에 대해서 서술하였다면, 책의 후반부에서는 건축물을 이용하여 길들여지지 않기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현대 미술 작품 중 종종 나타나는 것 중 하나가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느끼던 물건(변기, 화분, 사과 등)을 낯선 위치에 놓거나, 그 크기를 엄청나게 크게 함으로써 우리고 하여금 낯설게 느끼게 하려는 ‘낯설게 하기’를 의도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낯설게 하기’와 ‘관습 타파’를 위한 노력이 건축물에서도 반영되고, 이러한 건축물을 통해서 우리가 습관적이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던 주류 양식이나, 이념을 다른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예로서, 베를린 필 하모닉의 공연장의 구조나, 디즈니 콘서트홀의 특이한 구조, 그리고, 여러 유명한 건축가들의 자택 구조 등을 들고 있구요.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밝힌 것 처럼, 인간의 사고 체계는, 선택의 갈림길에 들어섰을 때 비판적이면서 숙고하는 ‘관리적 사고’과, 선택 이후에 그 선택의 길에서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익숙해져 습관적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적 사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항상 ‘관리적 사고’를 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겠지만, ‘습관적 사고’에만 젖어 있다면 나를 지배하는 지배 계층의 의지와 주류 이념을 극복하고 또 다른 세상과 나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만의 원형 감옥(판옵티콘)이 있고 빅브라더가 있으며, 이에 의해서 스스로 원형 감옥의 간수나 빅브라더의 의지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내면화된 원형 감옥의 간수나 빅브라더는 우리를 둘러싸는 건축물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더 강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몽땅 뒤엎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전에 당연하게만 여겨왔던 건축물을 한번이라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줬다는 점. 이것이 이 책이 우리한테 가지는 소중한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
|
나에게 건축은 신기한 체험이었다. 어렸을때 가끔 친구들 집에 놀러갈때면 제각각 다른 집구조에 늘 신기함을 느꼈다. 우리 동네는 도립공원아래에 있는 작은 시골동네였고 아파트같은 고층건물이 없고 제각각 다른 구조를 가진 건물들이 대다수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에게 맞게 직접 집을 만들어서 살았기 때문에 똑같은 구조의 집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와 내 동생이 태어나고 자랐던 집 또한 우리 가족에게 맞게 아버지께서 직접 지은 집이었다. 게다가 우리집은 과수원을 함께 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자연에 파묻힌 집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라온 나에게 건축이란 늘 신기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한두살씩 나이가 먹고 학교에 들어가고 집을 떠나 타지생활을 하면서 점점 획일화되고 정형화된 집들을 보며 어릴적 느꼈던 호기심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나에게 어릴적 느꼈던 호기심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매 학기마다 다녔던 답사때 보고 들어가보았던 전통한옥이나 절들이었다. 한옥은 그 자체만으로 오묘한 매력을 뿜어내며 나를 유혹했고, 가람배치라는 일정한 형식이 있는 절들은 제각기 지형에 맞게 그 생김새가 달랐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건축은 나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슴으로 느끼는 건축은 한계가 있었다. 감성적인 호기심은 충족이 되지만 이성적인 호기심은 충족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건축에 대해 이해하고 싶어 도서관에 가보아도 그곳엔 늘 나에게 어려운 책들 뿐이었다. 쉽게 손이 가지 않고 쉽게 책장이 넘겨지지 않았다. 그러던 가운데 만나게 된 이 책,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은 프롤로그에서 보여주는 건축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건축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은 그동안 늘 부족함을 느꼈던 나에게 좋은 정보가 되어주었다. 늘 가까이에 있었지만 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고 건축에 대해 더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항상 스치고 지나쳤던 건축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이 건축물은 인간을 어떻게 길들였고 인간은 이런 건축물에 길들여졌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더 이상 수동적인 호기심에 이끌리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호기심의 대상을 찾아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매일매일 스치고 지나쳤던 건축물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기로 했다. 모두 나름대로의 쓰임새를 가지고 있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쉬워 졌다. 그리고 이 책만을 보고 만족하기 보다는 조금 더 많은 책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궁궐건축과 사찰건축에 대해서는 더 알고싶다는 지적 욕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독서를 한 순간의 책읽기로만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이어 다른 독서로 연계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을 이 책을 통해 시작하려한다. |
|
우리는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때까지 일상의 대부분을 건축과 연관된 생활을 하고 있다. 건축은 인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의 건축은 인간을 위한 건축과는 다소 거리가 먼 상황이었다. 특히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는 살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의미보다는, 투기의 대상 내지는 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되어 버렸다. 최근 이런 주거환경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자신들만의 공간을 꾸미고자 하는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얼마전 한 필지에 두 개의 집이 벽을 맞대고 하나의 건축물을 이루고 있는 듀플렉스 건축물로 땅콩처럼 서로 붙어 있다고 해서 “땅콩집”이라 불린 집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도 그와 같은 사회적인 분위기의 변화와 맞물려 있지 않은가 한다. 건축은 어떠한 식으로든 그 사회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라는 반응이 많다. 이제까지 건축이라고 하면 인간이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주거공간이라고 생각한 것이 전부였다. 건축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은이는 색다른 면에서 건축과 인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지은이는 건축은 사람의 행동이 이루어지는 건물과 도시, 즉공간을 의도적으로 조작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편파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속에 사람들을 교묘히 길들이려는 사회학적 의도가 숨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1부 “건축으로 길들이기”에서는 건축이 어떻게 인간을 길들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다룬다. 양반집에서는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를 구분함으로써, 향교나 서원에서는 계단을 통해서, 궁궐에서는 영역을 나눔으로써 철저하게 신분을 구분했고, 영역 간에 이동하는 동선에 특별한 장치를 두어, 즉 왕에 가까기 다가가는 과정에서 길들이기를 시도하였다고 한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우리 옛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도시는 공간 구조를 계급 구조와 일치시킴으로써, 수도를 정하는 일에서는 수도에 물적․인적․시스템적 조건을 몰아줌으로써 길들이기를 수행하였다고 주장한다. 도시의 편안함과 안락함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생각해왔던 공간이 낯설게 다가온다. 건축이 인간을 길들여 온 역사를 되짚어 보는 지은이의 통찰력은 구체적 사례와 각종 건축적 기법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져서 설득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가 되었다. 2부 “건축으로 길들여지지 않기”에서는 1부의 주제와 반대로 건축이 인간으로 하여금 어떻게 길들이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집단적 광기로 표출된 나치즘에 대한 혐오와 거부 의지가 표현된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의 ‘베를린필하모닉 콘서트홀’, 1992년 LA폭동 이후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순화하고 수많은 민족이 살아가는 로스엔젤레스의 사회 통합을 위해 기존의 건축물과도 닮지 않고, 전혀 새로운 건축 형상을 필요로 했던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정할 때부터 고착돼온 세력 관계에 변화를 주려는 시도로 이루어진 정조의 화성 건설 등은 건축이 어떤 방식으로 기존의 사회적 이념에 맞서고, 건축물을 매개로 새로운 질서를 제시하는지를 보여주는 의미있는 내용이었다. 지은이는 세종시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있다. 최근 세종시로 대거 정부기관이 옮겨가고 있지만, 기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사람들이 많은 불편을 겪고 있다는 보도를 접한다. 앞으로 세종시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세종시 원안에는 전체 시민이 공유할 수 있는 공원이 시 중심부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앞으로 어떠한 가치를 우선시 하느냐에 따라 세종시 건축의 표정도 달라질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이제까지 건축에 관한 책들과 달리 건축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가지게 하는 책이다. 건축은 우리의 일상과 밀착되어 있어서 건축을 통한 길들이기를 인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저항을 받지 않는다. 인지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공간이 제공하는 여러 가지 기능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개인으로서는 자신의 생활공간을 대체할 수도 없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한번 길들여지면 길들여진 방식 이외에 다른 방식은 생각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강화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건축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다. 건축은 새로운 질서를 담아내는 건축물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질서가 가능하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건축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담론 형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
|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건축”을 ‘집이나 성, 다리 따위의 구조물을 그 목적에 따라 설계하여 흙이나 나무, 돌, 벽돌, 쇠 따위를 써서 세우거나 쌓아 만드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에서 보듯, 건축이란 행위는 ‘인간의 목적’이라는 의미를 자체적으로 이미 내포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를 놓고 볼 때, ‘건축’은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생산되고 소비되는 양면성을 갖는 셈이다.
또한 인간은 건축이라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 구조물을 생산해내는 ‘생산자’인 동시에, 그것을 향유하는 ‘소비자’이기도 하다. 그런만큼 건축과 인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이는 현대로 올수록 더욱 깊은 관계가 된다.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은 그런 인간과 건축의 관계에 대한 책이다. 건축에 대한 책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나와 있는데, 그 중 이 책은 인간과 건축에 대해 ‘길들인다’는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때문에 ‘길들이기를 위한 조작으로서의 건축’이라는 색다른 시각이 궁금해서 읽게 된 책이다. 저자인 이상현은 건축학자로서 ‘도시 공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프로필이 말해주듯 ‘공간과 인간의 관계’로서 양반 가옥과 궁궐, 도시를 바라보고, 베를린 필과 월트디즈니의 콘서트홀을 분석하고 있다.
1부에서 저자는 양반 가옥을 ‘주인 : 하인=지배 : 피지배’의 공식에 대입하여 풀어낸다. 가옥의 구조가 각자의 신분을 되새기게끔 ‘길들인다’는 시각으로 이해하고, 양반가옥의 구조를 신분 및 위계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역학적인 구조로 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 한옥의 사랑채나 중문간, 내삼문의 계단 및 대성전/명륜당 등을 예로 들고 있다. 또한 궁궐의 구조 또한 상하간의 인식을 일깨우고, 신분 상승의 욕구를 부추긴다는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어 2부에서는 역으로 ‘길들여지지 않기’로서의 건축을 보여준다. 아서왕의 원탁, 베를린 필과 월트디즈니 콘서트 홀 등이 그러한 예이다. 한옥과 서양 건축을 넘나드는 예가 조금 잡다한 듯해도, 저자는 전통 건축과 서양 건축을 일관된 논리로 풀어낸다.
그의 시각은 분명 건축을 보는 색다른 시각으로 느껴지고, 그것이 이 책을 읽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논리를 빌자면 건축이란 결국 ‘길들이고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작용과 반작용의 부산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견해가 꽤나 신선하고 일리 있게 느껴진다. 비교적 잘 알려진 아서 왕의 원탁이야기도 공감되는 부분이다. 우리네로 치면 여럿이 둘러먹는 두리반상이 그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저자의 시각이 한쪽으로 치우친 듯한 감이 꽤 있다. 오로지 ‘길들인다’는 시각으로 일관하며 모든 예를 끼워 맞추는 듯한 느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을 일컬어 종합 조형예술이라고 하듯, 건축은 더 넓고 풍부한 의미의 스펙트럼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면 한옥의 구조는 풍수와 차경(借景, appropriation), 채광 및 자연과의 어우러짐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서 봐야 할 것이다. 또한 궁궐이나 왕릉의 금천(禁川)은 상하 신분에 대한 구분보다는 경계의 의미, 성속(聖俗)의 구분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에 비해 베를린 필하모닉이나 월트디즈니 콘서트홀에 대한 부분은 새로운 측면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의 시각에 따르면 위 건물들은 나치 정권이나 LA폭동 등에 대한 트라우마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건축인 셈이다. 이 책은 건축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시각으로 접해보면 좋을듯하다. |
|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이상현 지음
건축과 인간의 관계를 길들임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길들임이라는 표현이 조금은 도발적인(?) 단어라는 생각이 들어 책을 펼쳤지만 생각보다 그 내용은 부드러움을 넘어 싱겁다. 건축을 기능적으로만 또는 경제적으로만 보는 눈에서 사회와 국가 또는 권력으로까지 확대해서 볼 수 있다. ‘돈’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구현되고 완성되는 것이 건축이기에 어느 정도 길들여짐에 익숙해지고 길들이는 수단으로 사용되리라는 생각을 했지만 하나하나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음을 보고 새삼 소름이 돋기도 하였다.
담의 높이에도 문의 크기에도 사람들의 생각이 들어 있고 시대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러시아에 가보면 6~70년대에 대규모로 지어졌다는 공장에서 찍어낸 것처럼 보이는 콘크리트건축물들인 2룸 또는 3룸(실상은 거실을 방으로 계산하기에 1룸이나 2룸이다.)들의 연립주택들을 보면 대부분의 시민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대리석들로 지어진 집들의 구조는 견고할 뿐 만 아니라 크기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도시가 형성되고 팽창하여 확대되면 그 중심부에 세력이 집중되고 외곽은 힘없는 자들이 밀려나 살아가게 되고 이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지속된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인위적으로 깨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할 때 얼마나 많은 저항을 받게 될까? 우리나라에서 박정희 정권 때 수도를 옮기고자 시도했다고 한다. 어느 노 교수는 이 이야기를 수 없이 반복했던 기억이 난다. 1979년 10·26사태만 아니었으면 역사가 바꿔졌을 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저자의 내용을 빌리면 그것은 애시 당초 실현 가능성이 떨어졌었던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시끄러웠던 행정수도이전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정조의 화성건설시도도 이처럼 길들여짐을 깨고 새로운 길들임을 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인 건축물들과 이러한 것들이 모여 있는 도시들. 여기에 스며있는 힘의 균형과 쏠림을 저자는 길들임이라는 단어들 사용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다소 학문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분량의 자료들로 독자들이 이해를 돕고 있다. 단순히 생활하는 공간이나 재산의 일부로만 보지 않고 사회의 한 공간으로 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색다른 재미와 유익을 가져다주리라 생각된다. 잠시 학창시절 열심히(?) 나름대로 생각하며 보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대학의 강의실에서 또는 설계실에서 밤을 새우며 씨름하고 있을 건축학도들에게 건투를 빈다. 시대에 남을 아름다운 건축물이 아니어도 그대들의 부단한 노력과 삶이 담겨져 있는 건축물들은 충분히 의미가 있음을 알기에 오늘도 박수를 보낸다. -누수가 되어 짜증스러운 것은 그대들의 잘못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장난임을 안다. |
|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건축은 3대 조형미술이며 동시에 도시를 이루는 기본적 공간 조성이다, 건축은 기본적
현재 베를린필하모닉 콘서트 홀은 권위와 전체주의를 부정하는 새롭게 지어진 건축물
그 유명한 르 코르뷔지예라든가 안도 다다오도 과연 길들여지는 건축술을 구사했던 것
도시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고, 그 도시에 서식하는 인간을 더 풍요롭게 더 행복하게
효형출판의 책들은 대체로 짭짤하다. 지나치게 요란한 장정이 없이도 와닿음이 폭넓은 |
|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 - 건축에 수동적인 인간 우리는 어쩌면 지극한 무지속에서 살면서 서로 아는척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세상은 다양한 방면으로 깊이있게 발전하였으며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배워도 한낱 작은 지식의 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세상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아무런 여과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정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판단이 없는 지식은 절대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고 어느 곳에도 활용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는 것 보다 더 적극적이고 객관적으로 정보를 선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건축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풀어놓은 책이다. 여지껏 살아오면서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건축의 일반, 과거와 현재 건축의 차이 등, 살아가면서 받아들인 자연스러운 현상들의 원리에 대해서 세세하게 풀어놓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현상들은 우리가 지극히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거나 혹은 아무런 판단없이 받아들인 과거의 건축물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단 한번 이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던가. 이 저자 역시 사람들이 주체적이지 못하고 무작위로 받아들임을 길들여진 인간 이라는 제목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건축의 시작은 사람이다. 이 세상 창조되는 그 어떠한 것과 동일하듯이 건축 역시 사람이 사용하기 위해서 나타났다. 그렇기에 건축은 사람을 기반으로 지어지고 또 무너진다. 저자가 원하는 바는 건축은 사람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시간이 흘러서 잊혀져버린 이 의도들을 밝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우리가 그냥 지나쳤던 건축의 의도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수 있다. 건축이라는 것이 사실 분야로 보면 전문적인 분야에 속한다. 용어 역시 건축용어가 따로 있을 만큼 꽤나 복잡하고 학문으로서는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는 한 이해하지 못할 분야이다. 하지만 이 책은 건축분야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한 부분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의도, 그 곳에서부터 비롯된 인간의 건축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건축에 대한 전문성을 요하지도 않으며 마음의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인간으로서 건축에 어떠한 의도가 담겨있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할 것이다.
사람은 자신과 관계된 모든 대상을 자연스레 길들이는 속성이 있다. 관계가 처음과 다르게 점점 변했다면, 그 대상에 대해 길들이기가 이뤄진 것이다. 다시 말해 대상을 대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은 것이다. 길들이기를 통해 처음에는 어색하고 서툴렀던 관계가 편안하고 익숙한 관계로 변한 것은 길들이기의 결과다. p19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일어나느 길들이기는 사람이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 항상 그대로 유지된다. 사람의 마음이나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사물이 변덕을 부리거나 배신을 할 리는 없다. 매일 샤워하는 우리집 샤워기가 처음에 불편하고 물살세기도 안 맞아 기분이 상했지만, 나중에는 더 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p215 |
|
집을 고를 때, 나에게 맞는 집을 내가 고른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가진 돈에 맞춰서 인테리어를 선택하고, 내 생활패턴에 맞게 집을 선택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집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집이 오히려 나를 길들이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 번도 침실이 왜 직사각형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보이는 건너편 집이 어떻게 건축되어 있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소한 곳에도 집이 나를 길들이려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은 인간이 만든 건축물들이 다시 인간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 흥미진진하게 제시하고 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이의 배치와 이를 통해 어떻게 감시가 이루어졌고, 안채가 어떻게 보호되었는지 설명되어 있다. 생각 없이 한옥 집에 갔다가도 이 책을 보면, 다시 한 번 한옥 집에 찾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된다. 궁궐에 대해서도 건축학적으로 공간구조와 동선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설명되어 있다. 궁궐의 서편에 있던 관리들의 일터가 한양에 사는 양반들의 집과의 관계도 설명되어 있다. 궁궐에서 가까운 집이 최고의 입지조건이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집이라는 것이 현재 위치에 있는 것이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그 집을 드나드는 길이나, 주변의 시선으로부터의 보호가 건축의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음도 알 수 있다. 다양한 인종의 바다인 미국에서 기존의 가치를 벗어난 새로운 가치를 드러내고자 했던 월트디즈니 콘서트홀이나,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군중의 집합장소인 공간을 해체시키는 베를린필하모닉 콘서트홀과 관련된 이야기를 보면, 건축가가 자신이 살던 시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건축가 자체가 하나의 시대정신을 만들어 내는 적극적인 존재임도 깨달을 수 있다. 건축물이 어떻게 설계되어 만들어졌느냐가 삶의 방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평소에 건축물에 대한 관심이 없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건물에 들어가게 되면, 이 건물은 어떠한 목적으로 설계가 되었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냥 생각 없이 건축물에 길들여지는 나약한 인간으로 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건축물을 이해하고, 그 건축물에 감긴 건축가의 생각을 읽어내는 적극적인 인간이 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