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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의 마리오네트 인형이었나?
"조선공산당은 코민테른의 마리오네트 인형이었나?" 내용보기
분단이 낳은 비극 중의 하나는 절반의 가능성을 더 이상 꿈꿀 수 없게 된 것일 게다. 서로 다른 체제를 택했다는 이유로 인해 자신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확신을 사람들이 갖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상대가 택한 전략은 무조건 안 좋은 것으로 치부했고, 분명 기억하고 기념해야만 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망각하며 살아왔다. 중국 뤼순에서 눈을 감은 단재 신채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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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이 낳은 비극 중의 하나는 절반의 가능성을 더 이상 꿈꿀 수 없게 된 것일 게다. 서로 다른 체제를 택했다는 이유로 인해 자신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확신을 사람들이 갖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상대가 택한 전략은 무조건 안 좋은 것으로 치부했고, 분명 기억하고 기념해야만 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망각하며 살아왔다. 중국 뤼순에서 눈을 감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국적 문제가 오래도록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어쩌면 그가, 물론 일제가 만든 호적에 제 이름을 올리길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주창했던 사상이 다분히 무정부주의적 시선을 지녔기 때문일 듯하다. 평화 통일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간첩 취급을 받으며 죽어간 죽산 조봉암 선생 역시 단절된 시선이 낳은 희생양이었다.

이번에 읽은 ‘모스크바 밀사’는 조봉암과 조동호라는 인물의 행적을 쫓는다. 두 인물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낮은 상황에서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이라는 사건에 대해 주목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정규 교육과정을 충실히 밟은 사람이라 하여도 우리의 역사가 크게 비중 있게 다루질 않는 부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관심이 있어 좀 더 이를 살펴본 이라 하여도 마찬가지다. 코민테른은 독선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했으며 조선공산당은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치 못한 채 그 지시를 따르기 바빴다는 게 통설처럼 받아 들여지곤 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시선에 변화를 주고 싶어했다.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 조선공산당 스스로가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았는지를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전면에 등장한 것이 바로 조봉암과 조동호였다.

조봉암. 그는 박철환(朴鐵丸)이라는 이름으로 시베리아를 횡단해 모스크바에까지 이른다. 쇠 철(鐵)에 알 환(丸). 이는 쇠로 마든 총알과 대포알처럼 거침없이 조선의 혁명을 추진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반영된 가명이었다. 그는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을 대표하는 인물임을 나타내는 증명서를 몸에 소지한 상태였다. 종이 아닌 천 조각에 새겨진 증명서는 모스크바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옷자락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할 터였다. 조동호는 조봉암과 함께 밀사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조동호는 상해에 머물며 조봉암의 외교 추이를 지켜보았고, 국제공산당의 조선공산당 잠정 승인을 한 단계 격상시키는 역할을 추후 담당하게 된다.

왜 많고 많은 활동가들 중 두 인물이 선택을 받은 것일까? 두 인물은 모두 젊었으나 비교적 이른 시기에 사회주의를 접했으며,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으며, 조선공산당의 창립에 혁혁한 역할을 수행했다. 무엇다도 두 인물은 러시아 현지에 대한 경험 또한 갖추었다. 조동호의 경우 4개월 가량 러시아에 체류하며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으며, 이 자리에서 ‘조선의 경제, 농민, 노동자 상태와 노동자.농민 대중의 운동’에 대해 보고를 하기도 했다. 조봉암은 그보다 더 긴 10개월을 러시아에 머물렀고, 코민테른의 조선문제에 관한 1922년 12월결정서 채택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런 두 인물의 활동에 긍정적인 힘을 발휘해준 인물로 보이틴스키가 등장한다. 국제당 동방부의 6인 위원 중 하나였던 보이틴스키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이 두 인물을 지원한다. 동아시아 혁명운동의 전문가로서 그가 확고히 다져놓은 힘은 조선공산당의 불안했던 지위를 개선하는 데 분명 긍정적인 역할을 발휘한다. 바실리예프 역시 주목해야 할 인물 중 하나다. 조선문제에 관한 모든 우편물이 정치비서인 그의 손을 거쳤다. 조선문제에 관한 모든 고급정보는 그의 손을 거쳤다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들과의 협력관계는 수많은 경쟁자들로부터 조선공산당이 우위를 취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조선공산당과 일종의 경쟁관계를 형성한 집단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환영했던 건 아니었다. 고려공산당창립대회준비위원회 주도 그룹을 비롯하여 국민의회 그룹의 인사들과 스파르타쿠스당, 까엔당 등 조선공산당의 승인으로 인해 주도권을 빼앗긴 측에서는 격렬한 반대가 이어졌다. 그 중에는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동휘도 있었다. 이들이 느꼈을 감정은 상실감이었을 것이다.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들은 이제까지의 치열한 삶에도 불구하고 잊혀질 운명이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승자의 위치를 점했던 조선공산당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좌’로 지칭되는 집단 전체를 모조리 잊기로 작정한 우리의 결단(?)으로 인해 모두가 잊혀졌다.

조선공산당이 마치 코민테른에 종속적이었던 것처럼 그려진 바 역시 우리의 편의에 따른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대표는 각급 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인정받았다. 의결권의 배제 문제를 언급하는 이들도 있으나, 이는 분쟁의 당사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무엇보다도 조선공산당은 특정 지령을 받은 타자에 의해 피동적으로 탄생한 집단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공산당은 조선인들 스스로 치열히 고민하며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결과 탄생했다. 운동의 분열이 거듭되던 1920년대 통합적인 운동을 고민했던 신간회의 탄생에 조선공산당이 적지 않은 힘을 보탰던 사실은 부인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달의 사락 q*****2 2013.03.24. 신고 공감 4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