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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문"이 열리다
군림천하 25권이 지난해 말 나왔다. 이제 "제4부 천하의 문"이 시작된 셈이다. 책의 결말을 기다리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그 끝을 보려면 10여권의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막이 열린 것이 반갑다. 그 25권의 제목은 "취와미인"이다. 계속된 쾌의당의 추격과 음모, 천광해와의 격렬한 싸움 끝에 소수마왕의 독수에 걸려 위기에 빠진 진산월은 개방의 은인을 만나 간신히 목숨을 구하고 다시 석곤이 맡긴 천룡궤를 모용대협에 전하기 위한 길을 떠난다. 물론 석곤의 부탁으로 천룡궤를 당대 최고의 무림인인 모용대협에게 전하는 것이 그 여정의 목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숨겨진 면에는 종남파 전장문인 임장홍의 하나뿐인 딸이자 현 장문인 진산월의 연인인 임영옥을 찾으러 가는 목적이 있다. 또한 그 와중에 있는 각 문파와 비무를 함으로써 종남파의 무공을 알리는 것도 빠질 수 없다.
변하지 않는 달빛처럼
2년의 약속! 무공이 모자라 연인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보다 무공이 뛰어난 구궁보의 모용공자에게 연인을 맡기고 올 수밖에 없었던 진산월이었다. 2년 안에 위기에 빠진 임영옥을 찾으로 오겠다고 진산월은 약속했으나 연인을 찾아올만한 무공을 키우는 데 걸린 시간은 이미 3년하고도 다시 반년이 지난 후였다. 그 동안 임영옥을 보호해 온 당대 최고의 모용봉, 모용공자와 임영옥 간의 혼인설도 있었고 그 세월의 간격 동안 진산월의 연인인 임영옥이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달빛처럼 그녀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진산월은 왠지 그동안 그녀가 무척이나 수척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아마도 달빛이 그녀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기 때문일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는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 또한 하염없이 그를 응시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달빛을 닮았다. 월광천추月光千秋 달빛은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의 눈빛 또한 그러할 것이다 - 재회지야 중에서 - 오랜 세월동안 서로를 그리던 연인이 그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본다. 4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연인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하늘에 떠 있는 달빛처럼 그녀의 눈빛도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을 그려내는 작가의 절제된 문장. 내가 "군림천하"를 추천하고 좋아하며 계속 찾아읽는 이유이다.
반전이 거듭되는 이야기 진행
"피는 붉었다."로 시작되는 "흑색지령"의 첫 장에서는 살인청부를 업으로 하는 두 명의 살수가 등장한다. 이어 그들은 철면호 노해광을 제거하라는 지령을 받고 서안으로 간다. "서안의 하늘은 뿌연 잿빛이었다."로 시작되는 두번째 단락에서는 앞서 말한 두 명의 살수와 철면호 노해광의 두뇌 싸움이 벌어진다. 전 장문인 임장홍의 사제이자 오랜 방황 끝에 종남파에 다시 돌아온 노해광, 그가 치밀한 지략과 예상치 못할 함정으로 두 명의 살수를 제거했다고 싶은 찰나, 독에 중독되어 꼼짝도 못하는 것 같았던 두 명의 살수가 번듯하게 살아 움직이며 노해광을 죽이려 다가온다. 순간 당황하는 듯 싶었으나 또 하나의 반전이 일어난다. 반전의 반전! 이것이 "군림천하"란 무협 소설에서 항상 등장하는 흐름이다. 그 반전은 우연히 일어난 것들이 없으며 첫 권에서부터 드문드문 등장하는 복선으로 죽 이어져 있다. 그 치밀한 구성은 정통 무협 소설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 또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지난 권부터 "군림천하"는 종남파에 다시 돌아온 철면호 노해광이 유력한 재력가인 손노태야와 어우러져 벌이는 일단의 움직임이 강남 무림을 종횡하는 진산월 일행의 이야기와 같이 진행된다. 이 두 이야기가 나중에 어떻게 이어질지 기대해보는 것도 이야기를 읽는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여기에 러브라인이 형성되는 듯 했던 옥면신권 낙일방과 엄쌍쌍의 이야기, 십이경맥을 타통하고 우쭐대는 손풍의 이야기 등등은 이야기의 흐름에 또다른 흐름을 만들고 잔가지를 쳐주어 더욱더 다양하게 한다. 그들의 비중도 결코 주연에 못지 않은 모습이다.
"옥의 주인"을 가리자
구궁보에 도착한 진산월에게 모용봉은 "옥의 주인을 가리자"는 제안을 한다. 자기의 생일날인 중추절까지 임영옥에게 비녀 모양인 봉황금시를 맡겼고 그 봉황금시로 열 수 있는 천룡궤는 진산월이 석곤의 부탁으로 모용봉의 아버지인 모용단죽, 모용대협에게 가져왔다. "옥의 주인을 가리자"는 말을 혹 임영옥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했던 진산월은 모용봉의 말을 들으며 천룡궤 안에 있는 "옥"의 주인을 말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무협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무림비급. 그것은 취와미인상이었다. 그 미인상에 새겨진 문양에 무림의 비급이 숨겨져 있었다. 모용대협이 구궁보를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그 비급이 천룡궤 안에 들어있으며 모용봉은 그 주인이 될 후보 중 하나가 진산월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나에게는 종남의 무공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그것이 진산월의 대답이었다.
지난 10여년의 세월, 이제 다시 "천하의 문"이 열리고 10여권의 세월, 무협지를 읽는 독자의 마음은 그 기나긴 흐름에 답답하기만 하나 작가의 절제된 문장과 치밀한 구성이 담긴 책 속에서 그저 또 기다리고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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