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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베를린》 이은정 지음 | [창비]
【한 겨울의 재스민차를 떠올리며】
구동독 출신의 시인 라이너 쿤체는 자신이 몸담고 있던 체제에 비판적이었지만, 그의 시는 매우 서정적이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독일 자유대학교에서 정치사상분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이은정 교수의 신간 《베를린, 베를린》을 읽으면서 쿤체 시인의 <한잔 재스민차에의 초대>라는 제목의 짧은 시 한편을 생각했다.
들어오셔요, 벗어놓으셔요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
동독과 서독이 분단되어 대치하고 있던 시절, 동독 정부에 저항적이었던 사람들은 이 시를 집 문에 붙여 놓아 눈에 띄지 않는 저항의 표시로 삼았다고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가 《시인의 집》에서 언급한 바 있다. 쿤체 시인이 한국을 방문하여 국내 대학생과 함께 시와 음악을 통한 교감을 나누는 자리에서 학생이 시인의 연애담을 물었다. 시인이 학생의 질문에 본인의 연애담을 이야기해준 대목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시인이 정치적인 이유로 학위를 받기 전에 대학을 떠나 자물쇠 제작 보조공으로 일하고 있을 당시(1959년), 베를린의 한 라디오 방송국은 쿤체 시인의 금지된 시 몇 편을 방송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미래의 부인이 될 엘리자베트 쿤체 여사는 체코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감자를 깎고 있었다고 한다. 쿤체 여사는 체코에서 의사로 지내고 있었다. 방송이 나간 지 여러 달이 지나 쿤체 여사가 보낸 우편이 먼 길을 돌아 쿤체 시인에게 도착했고, 이후 이 두 사람은 시와 음악에 대해서 장문의 편지를 주고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기 직전이었지만, 두 사람은 직접 만날 수 없었다. 체코와 접하고 있던 국경은 폐쇄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쿤체 부부가 경험한 삶의 한 단면을 끌어와 냉전과 분단의 맥락에서 바라보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연합국이 구축해 놓은 새로운 정치질서의 구도 하에 개개인의 삶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를 실감나게 짐작해볼 수 있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특수성】
승전 연합국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세계대전 이후 독일 지역을 동독(소련)과 서독의 연방정부(미국, 영국, 프랑스)의 영역으로 분할 통치하게 되었는데, 베를린 역시 도심 지역을 4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공동 관리하게 되었다. 특히 베를린은 동독의 영토 한 가운데에 위치한 대도시로서 소련이 점령하던 동독에 완벽하게 둘러싸인 일종의 섬과 같은 지역적 특수성을 지닌다. 오늘날 베를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베를린은 ‘분단체제의 상징이면서 분단 극복의 상징’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바로 베를린 장벽으로 상징되는 분단의 역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냉전 구도의 산물이다. 이 부분은 우리의 분단 현실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다만 독일이라는 공간이 대한민국과 달리 분할 통치 과정에서 전쟁이 없었다는 점은 이후의 나라 재건에 다행한 일이었다. 수백만 명의 사망자와 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을 양산한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와는 이렇게 다른 현실이 있었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 건물의 3분의 1이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독일 영역 내의 모든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음을 감안하면 이 부분은 베를린만의 특수한 경험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동독 영역 내부에 섬처럼 존재했던 이 도시는 50년대 말, 60년대 초에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두 진영 사이의 대립과 기싸움으로 위기감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설치 된 후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이라는 이 특별한 공간은 ‘정치적으로 분단되었으나, 사실상 완전히 분리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민간 차원에서 엽서 한 장 왕래하기 힘들고 사실상 단절되다시피 했던, 그리고 이 현실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우리의 경우를 비추어볼 때 어떻게 이런 조건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저자는 이 책 《베를린, 베를린》에서 정치사적 관심에서 베를린의 과거와 현재를 들여다보고 있으며, 동서 양측이 제한적이나마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던 정황과 우리의 상황을 곁들여 비교해보고 있기도 한다.
【베를린 장벽의 등장과 이후 상황】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 13일 새벽에 철조망 형태로 설치되기 시작하여, 곧이어 콘크리트 벽을 세웠고, 만 28년이 넘은 1989년 11월 9일에 붕괴되었다. 베를린 장벽은 동독 정부가 소련의 승인을 받아 기습적이고 일방적으로 구축하며 시작되었다. 장벽 설치의 주 목적은 당시에 늘어나던 동독 주민들의 동독 탈출을 막고 이들을 가두기 위함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독일 영역이 베를린과 더불어 분할통치된 1945년 이후부터 1952년 11월 까지는 베를린 주민들도 왕래가 가능했고, 생필품도 구하러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벽이 설치 후 동서 양측의 왕래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여기서 저자가 더욱 주목하는 부분은 ‘정치적으로 제한적이나마 삶의 연결고리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다’는 부분이었다. 경제나 우편, 통신이나 문화교류는 여전히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정학적인 조건을 고려해볼 때 섬과 같았던 서베를린은 이러한 교류가 사실 대안이 아니라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보장받는 ‘유일한 기회’였을 것이다.
저자가 동서 양측의 교류가 반드시 필요했다고 언급하는 사례 중에서 지하 연결망인 하수도를 들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형성된 하수터널은 상당한 규모와 효율을 발휘하는 사회기반 시설이었다. 서베를린 하수의 대다수가 동베를린으로 흘러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장벽 설치 후 민간 차원에서 동서 양측의 기술적, 실리적 협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정치적으로 두 공간이 분리되었어도, 분리되지 않은 사회기반 시설을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두 진영의 접촉과 협업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느 한 진영이 하수터널을 막거나 폭파시켜서 모든 것을 분리시키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국민의 혈세를 모아 새로운 하수터널을 건설하는데 오랜 시간과 자금을 쏟아부었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우리의 상황과 견주어 아쉬워하는 부분과 더불어 이런 부분들에 대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우리의 과오가 안타까웠다. 베를린의 역사를 통해 다른 진영에 있더라도 실리적인 결정을 위해 타협과 합리적 선택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우리는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우리가 눈여겨보고 고민할만한 부분이라고 본다.
장벽이 설치된 이후에도 동독 주민이 탈출하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고, 그 과정에서 탈출하는 사람들에게 총격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쿤체 시인처럼 체제에 비판적이던 시민들에 대한 압박도 물론 이루어졌다. 제한적이나마 우편 서비스가 유지되었지만, 모든 우편물은 검열당해야 했다. 저자는 80년대 초에 동독 주민들이 비밀경찰의 도청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했다. 특히 국제 전화는 이미 50년대 부터 도청당했던 모양이다. 쿤체 시인의 이야기가 담긴 《시인의 집》에서는 동독에 있던 시인이 체코에 있던 미래의 아내 엘리자베트 쿤체 여사에게 청혼하기 위해 국제전화를 했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당시(1959년)만 해도 모든 국제전화가 도청당했다고 쿤체 시인은 언급한다. 특히 정보국은 시인처럼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일거수일투족 감시했다. 당시에 시인이 휴가로 시골에 갔을 때 ‘물을 몇 시에 몇 양동이를 우물에서 길었는지’까지 구동독 정보부의 기록에 남아있었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정보국이 남긴 자신에 대한 모든 기록과 증거물들로 작성된 자료집을 참고하여 낸 시집이 《파일명 “서정시”》(1990) 라고 한다. 쿤체 시인의 사례를 떠올리는 이유는 베를린을 둘러싼 정치사적 장면에서 시인으로 대표되는 한 인간의 삶이 어떠했는지 상상해보고 싶어서였다.
【장벽의 구멍들】
암울하고 억압적인 조건 속에서도 삶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우리는 이제 장벽이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당시의 정황을 되돌아보고 있는데, 이 장벽의 붕괴에 영향을 주는 요소들은 이미 삶 속에 다양하게 내재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민간차원의 문화교류를 가능하게 해주었던 독일 최대의 라이프치히 박람회나 17세기부터 이어진 독일 최대의 라이프치히 도서전은 ‘장벽의 구멍’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앞서 말한 하수터널과 같은 사회 기반시설에 대한 동서 양측의 협력을 포함하여 민간차원에서의 물적, 비물질적 교류는 거의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왔다는 것이다.
책의 전반에서 저자는 이 ‘장벽의 구멍’이 막히는 것을 방지하고 보다 많은 구멍을 만든 정치인으로서 브란트 전 수상을 주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당시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아데나워 수상의 단절 정책과 달리 서베를린 시장 시절부터 브란트는 ‘공존 정책’을 강조하고 ‘접근을 통한 변화’, ‘작은 걸음 정책’을 통해 베를린 주민들의 고통 완화를 위한 실용주의 노선을 택했다. 브란트 전 수상에 대한 저자의 일방적인 평가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란트 전 수상의 행보는 분단 독일의 통일과정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61년에 장벽이 설치된 이후, 63년 말에 이루어진 제1차 및 제2차 통행증협정을 통해 동서 베를린 시민 간의 왕래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려는 브란트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분명히 당시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의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와 노력은 이런 결과를 낳을 수 있도록 한 그의 리더쉽에 있었다고 보인다. 물론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한쪽의 바람만으로 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당연히 동서 양측의 실용적인 협력의 태도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런 행동의 바탕에는 무엇보다 ‘베를린 시민의 고통 완화’를 우선 순위에 놓았던 정치인이 있었음을 독일인들은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경우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북정책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대화의 시도와 단절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독일의 경우, 1970년대 초에도 여러 가지 협력의 분위기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4대국 협정’(1971년 9월)을 통해 무력 사용을 금지하고 평화적 수단으로 분쟁을 해결하려고 했으며, ‘통과협정’(1971년 12월)을 통해 서독과 서베를린 사이의 동독 지역을 통해 민간인 및 화물통과를 가능하게 한 바 있다. 나아가 ‘여행방문협정’(1971년 12월)으로 66년 이후 거의 중단되어버린 동독 및 동베를린 방문을 허용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번 독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전쟁이 서독의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50년대 이후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으로불리는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지구 반대편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내게는 새로웠다. 다시 정리해보면, 60-70년대를 거치며 베를린이란 공간을 둘러싼 동서 양측의 접촉과 실용주의적인 문제 해결 시도 노력을 저자는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라는 표현으로 정리한다. 특히 경제적으로 더욱 성장한 서독은 동독에 다양한 방식으로 재정적인 지원을 해왔고, 동독에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본다. 분명히 우리의 정서와는 많이 다른 부분이 이러한 점들이다. 단순히 정서의 차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한 부분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 ‘장벽의 구멍’에 한편으로 큰 영향을 주었던 요소는 ‘68운동’이었다. 저자가 근무하고 있는 독일 자유대학교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독일의 68운동은 ‘독일 민주주의가 질적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특히 당시의 68세대 젊은이들은 나치 협조자들에 대한 침묵을 유지하는 부모 세대에 반대하여 더욱 목소리를 높인 세대라고 한다.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과 비슷한 면이 있을까하는 의문도 가져본다. 저자는 독일의 68운동이 대한민국의 1987년과 비교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은 점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독일의 68운동과 우리의 1987년의 상황과 간단히라도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들여다보았으면 좋았을 부분이었다. 특히 이런 부분은 교과서에 자세히 나오지 않는 현대사의 한 장면이기에 더욱 아쉬웠다.
독일의 68세대의 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독일의 작가 W.G. 제발트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1968년 당시 24살의 청년이었을 제발트는 부모 세대의 침묵에 분명히 불만을 품고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게 된 청년이 아니었을까. 소설을 비롯한 그의 다양한 글에서 직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은정 교수가 ‘나치 전력으로 인해 경질되었던 인사들도 원래의 사회적 지위를 되찾았다’고 전하는 말에서처럼, 독일 사회에도 과거사 정리에 대한 침묵과 한계가 동시에 존재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부조리한 모습들은 제발트와 같은 젊은 세대들이 비판적인 시각을 갖도록 하고, 이는 부모세대와 68세대 간에 갈등을 유발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동서 양측의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던 것처럼 이 68운동의 저항적 요소가 동독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이 68운동은 이후 70년대를 거쳐 신사회운동 및 녹색당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게 된 요인은 1989년 여름, 동유럽의 서독 대사관에 동독 주민들이 대거 진입한 ‘대사관 난민’ 문제가 결정적이었다. 이 상황에서 동독과 서독, 체코슬로바키아(동독 옹호)와 헝가리(서독 옹호) 사이의 긴박한 외교협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때에도 서독 정부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동독의 요구를 최대한 고려하여 수용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한 정황을 볼 수 있다. 서독 정부 측의 합리적이고 성숙한 접근법을 주목해보게 된다. 나아가 이 대사관 난민 문제의 해결과정에서 이어진 대규모 촛불시위(1989년 10월)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 같다.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시작된 촛불시위가 대규모 정치 집회로 발전하면서 동독 주민들의 바람이 모이고 이는 다시 동독 당국이 여행 자유화 조치를 내리도록 하는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베를린 장벽의 붕괴 과정에는 오랜 기간을 거쳐 쌓여온 ‘구멍’의 요소들이 존재했고 이 요소들이 모여 장벽의 붕괴를 가져왔다.
【베를린의 현재를 살펴보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꽤 오랜 시간동안 분리된 조직과 행정 단위의 통합, 그리고 사회기반 시설의 복구와 재정리 문제등은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주요 문제들이었다. 베를린을 통일 독일의 수도로 정하는 과정에서도 이를 둘러싼 논란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독일 정치인들은 수도의 최종 결정 문제를 당론을 기본 입장으로 내세우고 고집을 부린 것이 아니라 의원 개개인의 ‘합리적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한 점이 돋보인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역시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이런 모습들을 우리 상황과 비교해보면 안타까운 점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현재 할 수 있는 일과 조건을 들여다보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일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양측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중요해질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목표를 관철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이를 수단화하는 것이 아니라, 해결하려는 문제를 양측이 분명히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오늘날 베를린은 테크노 음악 팬들의 성지이기도하고, 유명 건축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젊은 인구가 늘어나고 예술가들이 모여 활동하며, 스타트업의 메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내가 또 한차례 놀란 점은 독일에서 수많은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2015년에만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독일로 유입되었고, 그 중 5만 5천명이 베를린에 도착했다고 한다. 세계의 어느 대도시가 순식간에 늘어나는 인구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행정인력이 있을까. 내가 놀랐던 점은 많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운 사실이다. 많은 시민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난민의 정착을 도왔다고 한다. 우리는 점점 늘어나는 탈북자들도 제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사회에 새로 등장하는 구성원들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시민들이 없을 순 없다. 하지만 베를린 시민들은 시리아와 중동 지여에서 몰려든 난민들을 받아들였다. 우려나 두려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결국 실천했다는 점이다. 우리의 탈북자 문제만 하더라도 우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름을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이들을 우리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행동해야한다. 이미 어려운 여건에서 봉사하는 시민들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은 분단과 통합을 동시에 상징하는 도시이다. 특히 정치인 브란트가 서베를린 시장과 서독 연방정부의 수상을 지내며 ‘접근을 통한 변화’의 철학을 반영한 ‘신동방정책’으로 평화와 공존을 추구한 행보에 주목해보게 된다. 물론 한 사람의 지도력 이면에 양측의 협력과 민간 차원에서 사실상 교류가 끊이지 않았던 점은 무엇보다 핵심적인 요소이다. 서독은 상당한 재정지원을 하며 그 대가를 요구하지 않은 반면, 동독은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를 위한 조건을 완화했다는 저자의 지적도 우리가 귀기울여 들을 만하다. 다만 개인적으로 저자가 베를린을 바라보는 여러 방식과 정치사적인 국면을 우리의 경우와 보다 대등하게 비교하며 제시하는 작업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다양한 시대적 사건이나 요소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좀 더 유기적인 연결이 가능하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아울러 라이너 쿤체 시인의 삶을 일부 들여다본 것처럼 개별적인 주체들이 역사 속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도 곁들여 조명했다면 이들의 겪은 삶을 좀 더 깊이 이해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어느 나라든 정치라는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인간의 다양한 삶을 이해하여 이를 조화시키고 조율함으로써 최적의 공존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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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베를린'이라는 이름을 접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생경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베를린 땅에 내 두발을 내디뎌 보지도 못했고, 친구들과 모여 부루마불을 할 때도 우리의 승패에 베를린이라는 영토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않았으니까(나는 주사위를 굴리는 재주가 없어 늘 무인도로 직행했고, 하물며 서울이나 우주여행은 고사하고 베를린이라도 나와 내 영토라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허나 무엇보다 큰 이유는 나름대로 품어왔던 베를린을 향한 동경 때문이었다고, 이제는 이야기할 수 있다. 암울한 단절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자유와 평화를 되찾은 희망의 도시베를린을 부러워했던 것이다. 비단 분단국가의 구성원으로서 품은 부러움만은 아니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냉전의 중심지에서, 활기찬 자유의 상징으로 변모한 베를린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2019년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주년이 되는 날이었고, 이은정 교수의 <베를린, 베를린>은 장벽 붕괴 30주년을 기념하며 출간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미국 · 영국 · 프랑스 · 소련 4대 승전연합국의 분할통치를 받게 된 독일의 이야기로 본격적인 서막을 알리는 책은, 분단의 중심지이자 강대국 간의 알력다툼의 장이었던 베를린이 어떻게 해서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를 흥미롭게 서술한다. 1949년 동독과 서독이 두개의 국가로 건국된 이후에도 여전히 베를린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경계를 넘어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분단되었지만 삶의 연결고리는 완전히 끊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일상으로 접하면서 살 수 있었다. (…) 베를린장벽 건설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브란트는 '분단으로 인해 주민들이 겪는 고통을 감소하는 것이 정치인의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갈라진 땅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짊어질 고통의 무게를 제대로 알고 있는 정치인이었다. p. 69-70 1952년에 동독은 "소련과 스딸린으로부터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방법을 배우자"라는 문구를 서독으로 보내는 우편물에 찍게 했다. 이에 대해 서독은 동독으로 보내는우편물에 "그래서 나온 결과는?"이라는 문구를 찍어서 보냈다. p. 78-79 당시 독일에서는 "주민들이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와 빌헬름 피크의 초상화가 들어 있는 우표를 편지에 많이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하고 물으면 "반대쪽에다 침을 뱉었기 때문"이라고 답하는 유머가 유행했다고 한다. 주민들도 정치선전을 위한 우표 사용을 아주 지겨워한 것이다. p. 79 다소 딱딱하다고 느낄 수 있는 내용이지만 과감하게 책을 펼쳤던 것은,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떤지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장에 담겨 있을 평화로운 독일과 베를린의 모습을 보기 위해 나머지는 감수하자는 입장이었는데, 예상 외로 처음부터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원치 않은 분단 이후에도 끊임없이 교류를 이어나간 동독과 서독의 모습에 이상하게도 애절함 비슷한 감정을 느꼈고, 정치사상이 다른 두 국가만이 할 수 있는 유머에 웃음이 나왔다. 또한 머릿속에 인상 깊게 자리 잡았던 것은 정치인 빌리 브란트였다.
원치 않은 분단, 강대국의 힘겨루기 장으로 둔갑하여 쪼개져 버린 서베를린의 시장으로 취임하며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나선 빌리 브란트는 서독 연방 총리로 취임한 뒤, 서유럽과 동유럽을 아우르는 동방정책을 통해 분단된 독일을 하나로 만들고자 애썼다. 동시에 나치즘을 경계하고,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로부터 피해를 입은 국가에 진심 어린 반성과 사죄를 전했다. 전쟁범죄를 (누구처럼) 그저 옛날 일로 치부하지 않고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현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경각심을 안긴 것이다. 한 나라의 총리가 갑작스럽게 꿇은 무릎에 '혹시 현기증으로 쓰러진 건 아닐까?'라는 의구심마저 자아냈던 위 사진은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2차 세계대전 시기에 희생된 유태인을 기리는 위령탑에서 빌리 브란트가 희생자들을 향해 진심 어린 사죄를 하는 모습이다. 빌리 브란트가 보여준 진심은, 여태껏 '전범 국가'라는 틀에 박혀 있었던 독일이 그 틀을 어느 정도 부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본격적인 '동방정책'의 시작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서베를린 시장에서 서독 연방 총리에 이르기까지. 빌리 브란트가 중요시 여겼던 것은 교류와 소통이었다. 분단과 베를린 장벽으로 인해 자칫 모든 소통 창구가 막힐 위기에서, 그는 협상과 대화를 통해 이를 열어두게 만들었다. 동유럽과의 소통을 외면하고 할슈타인 정책을 고집했던 아데나워와 정반대의 정책을 펼쳐, 결과적으로는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독일 통일을 지켜보는 등 그 염원을 이룰 수 있던 것이었다. 이런 훌륭한 지도자를 둘 수 있었던 독일이 내심 부러우면서도, 분단의 상황에서 서로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소통했다는 그 상황 자체에 또 다시 생경함을 느꼈다. 서로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함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교류와 협상 자체를 중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로 견해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합의할 수 있는 실질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협상을 진행했다. 정치적 이해가 대립하는 민감한 내용은 처음부터 협상 테이블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협상 방식을 두고 독일의 학자들은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라고 부른다. p. 124 베를린은 정치적으로는 분단되었지만 사실상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었다. (…) 이 과정에서 서베를린과 동독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접근 방법으로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고, 정치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사안은 배제한 채 기술적 교류에 집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독과 서독이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에도 베를린에서는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p. 125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졌다. 당장은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실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게 자유이고 평화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또한 베를린처럼 '분단 극복의 희망'이 되는 원대한 소망을 품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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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마침내 한반도에 종전 선언과 함께 평화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북미 정상 회담 결렬, 북한의 금강산 관광 남측 배제 선언 및 미사일 발사 등 연이은 뉴스로 인해 다시 남북 관계가 경색되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북한을 비방하는 정치권과 보수의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습니다. 퇴로에 막힌 듯한 남북관계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말해주는 책 「베를린, 베를린」이 출간되었습니다. 「베를린, 베를린」의 저자 이은정 교수는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한국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으며 같은 분단의 역사가 있는 베를린이 2차 세계대전 후 분단 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하나가 되기까지의 역사를 통해 한반도가 나아가야 할 과제를 보여줍니다. 먼저 저자는 베를린과 한반도는 국제적인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2차 세계대전 독일의 패배 후 소련이 통치하는 동독에 위치한 베를린은 소련의 지배 하에 있는 동베를린, 그리고 서방연합군이 관할하는 서베를린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비록 열강에 의해 분단이 되었지만 이는 차단이 아닌 분단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한반도의 경우 남북 교류, 우편 교환등 전면적인 모든 관계가 차단된 데 비해 베를린은 비록 분단이 되었지만 서베를린에 거주하는 주민이 동베를린으로 출근할 수 있고 우편을 교환이 가능하는 등 왕래가 가능했습니다. 또한 복잡한 하수 정화시설을 위해 서로 협조해야 하는 관계임을 인정하고 실무자들이 만나 협조해가는 과정 등은 서로가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관계임을 인지하기에 실행해 나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남북한이 미,소련의 영향이 불가피한 것처럼 베를린 또한 4개국 (미,소,영,프)의 정세에 따라 동,서베를린의 관계에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 저자는 브란트 수상의 의지를 통해 베를린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되어 가는 가를 보여줍니다. 브란트는 독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련과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고, 장벽을 제거할 수 없다면 장벽을 쉽게 넘나들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작은 걸음 정책'으로 '보통 작은 걸음보타 큰 걸음이 낫지만, 한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는 작은 걸음이라도 떼는 것이 낫다'는 그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었다. 브란트에게 가장 중요했던 목표는 베를린 주민들의 고통을 최대한 완화시키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실용주의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장벽이 세워지고 모든 상황이 더 어려워져가는 정세 속에서도 다른 대안책을 찾아가며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가려는 한 정치인의 의지가 동독과의 통행협정을 이뤄내는 모습은 현재 남북간의 관계를 관망만 하는 한국 정치인들의 무사안일한 행태와 많은 대조를 이룹니다. 비록 국제적, 국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나아가려는 정치인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베를린의 역사를 통해 저자는 보여줍니다. 부유했던 서베를린에 비해 동베를린은 전문 인력 노동 감소 및 많은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서베를린에 하수 처리 시설 및 쓰레기 처리를 해 주는 대신 서베를린에 자금을 청구하며 어려움을 해결해나갔습니다. 또한 동베를린 통행증을 받기 위한 경비 또한 동베를린에 재정적인 도움이 되어줍니다. 하지만 이를 서베를린은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일상으로 여기며 동베를린에 돈을 지불하는 것을 기꺼이 감당해 줍니다. 자유를 위해서라면, 자유롭게 동베를린의 가족과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일상에 대가를 지불하는 서베를린의 조치는 결국 독일 분단체제의 조그마한 출발이 되어 줍니다. 남한의 햇볕 정책 후 북한이 그 자금으로 미사일을 만들었다는 수많은 비난이 있었습니다. 서베를린은 평화를 위해 비용을 감당해냈지만 한반도는 모든 것이 차단되고 이를 악용하는 정치권의 특성상 평화를 위한 비용을 감당하길 꺼립니다. 그 공고한 적대감 속에 남북한의 틈새가 열리지 않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 서독과 서베를린은 다양한 명목으로 동독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 대가로 큰 어려움 없이 동베를린과 동독의 가족과 친척, 친구를 만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간단한 절차만 거치고 동베를린에 가서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고, 서점에 들러 책을 사서 커피 한잔 마시고 돌아오는 것이 서베를린 주민들의 일상이 될 수 있었다. 분명 베를린과 한반도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교류를 멈추지 않았던 베를린과 모든 것이 차단된 한반도.. 하지만 베를린의 역사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정부의 노력과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열린 마음이 결코 멈추지 않으면 평화의 길은 다시 놓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단 상황에서 힘들어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름을 인정한 합의를 이끌어낸 브란트 수상처럼 남과 북 모두 합의할 수 있는 부분 먼저 주목하여 결과를 도출해 나갈 때 평화는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습니다. 브란트 수상이 말한 작은 걸음이라도 떼려는 정치권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또한 베를린 국민들의 열린 마음처럼 평화를 위해 우리가 양보하는 것이 지금 당장은 퍼주기처럼 보여도 결국 그 시작이 작은 걸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국제적인 정세는 다르지만 이 평화를 위한 전제조건은 한반도도 다르지 않습니다. 경색된 한반도의 관계는 끝까지 문을 두드리는 걸 포기하지 않을 때 다시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에서 보여줍니다. 작은 한 발짝이라도 떼야 한다는 철학이 다시 한 번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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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이 이뤄졌을 때 설렜던 기분을 잊을 수 없었다. 설마, 진짜? 통일이 될 것 같다는 분위기가 온나라를 가득 메웠다. 하지만 다시 그 분위기는 가라앉고 말았다. 물론 지금도 진행 중이기는 하다. 통일이 되려면 정말 세세한 부분까지 합의가 필요하기에 쉽지 않은 대공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는 통일의 경험이 있는 독일에 대해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 물론 지금은 합쳐져 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부작용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부작용을 최소화할 것인가. 전반적인 이야기에 대한 책이다. 저자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 학과장 이은정 교수는 1980년대부터 독일에 거주하며 독일 통일의 역사 속에 있었다. 1945년 2차대전 종료부터 2019년 현재까지 독일 통일의 역사적 순간을 두루 살피면서 시간적 순서로 서술해 현장감을 더했다. 또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궁금했었던 베를린 주민들의 생활과 동서독 교류의 모습, 당국 간 협상의 상황을 볼 수 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장 독일의 분단과 베를린 첫번째 위기, 베를린 봉쇄 두번째 위기, 베를린 최후통첩 2장 차단이 아닌 분단 경계를 넘어 통근하는 사람들 중단되지 않은 우편통신 3장 막을 수 없는 흐름 지하의 연결망, 하수도 지상의 연결망, 대중교통 4장 장벽, 접근을 통한 변화의 시작 분단으로 인한 고통의 극복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 5장 장벽을 넘어 부는 바람 베를린을 위한 콘서트 무너진 장벽 6장 다시 하나가 된 베를린의 열망 통일독일의 수도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 통일 후 베를린은 세계인의 집중을 받고 가고 싶은 도시로 떠올랐다. 베를린의 역사를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여 기억하게 한다. 잊지 말고 성찰해야 한다는 독일의 강력한 의지를 품은 도시로 말이다. 이는 역사관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의 교육은 주입식이 아닌 스스로의 판단에 맡긴다. 전범국가의 오명을 어느정도 씻겨내면서 여전히 올바른 역사와 사과를 동반한다. 일본과는 전혀 다른 행보다. 우리나라는 어떤 자세로 통일을 맞이해야 하는가? 먼저 내부의 분열부터 잠재워야 할 것이다. 보수같지 않은 보수들이 판을 치고 자기와 의견이 맞지 않으면 빨갱이로 몬다. 뉴스는 끊임없이 쏟아지지만 해결책이 없어보인다. 이는 아마 해결이 안 될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숙제를 풀어야 하고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역사는 되풀이될 것이고 우리는 그 해답을 독일을 공부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혜안으로 현재와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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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10여명이 베트남으로 입국하려 시도하던 중 발각돼 중국으로 추방됐다. 이들은 북한으로 강제송환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한다. 11월 30일자 뉴스다. 뉴스화되는 경우 이외에 숨겨진 탈북민의 수는 얼마나 많을지 짐작하도 가지 않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고대가요처럼 느껴진다.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진심으로 동의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도 의문이다. 이산가족은 통일을 진심으로 바라는 거의 유일한 사람들일 것이다. 분단 후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 이산의 아픔을 몸에 새긴 분들은 상당수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고령으로 생의 마지막 날을 살고 있을 것이다. 이 분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그때 우리는 통일을 어떻게 바라보게 될까. 한 민족이라는 환상이 전무한 때에 통일은 어떤 방법으로 이뤄야 할까.
「베를린, 베를린」은 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 학과장 이은정 교수의 책이다. 저자는 1980년대부터 독일에 거주하며 독일 통일 과정과 통일 독일의 발전 과정을 함께했다. 때문에 이 책에서 다루는 통일 이전과 이후의 독일에 대한 이야기가 더 가깝게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얼마되지 않는 1992년 겨울 베를린 거리에서 시작한다. 무거울 수도 어려울 수도 있는 역사를 책임에도 독일 거리 곳곳을 생생히 묘사하며 서술을 이어가는 덕분에 수월히 읽힌다. 저자는 이 책에서 분단이전에 베를린에 대해 쓰는 이유를 “분단이 완전한 차단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작년에 나온 박한식 교수의 「선을 넘어 생각한다」를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박한식 박사가 제시한 통일의 방법 역시 ‘충돌의 가능성을 최소화한 상태에서의 소통’이었다. 그렇게 ‘동질성을 회복함’으로써 통일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했다. 이은정 교수 역시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를 강조한다. 베를린은 ‘정치적 충돌을 야기할 사안을 배제한 기술적 교류에 집중’하면서 동?서의 연결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를린은 정치적으로는 분단되었지만 사실상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었다. (…) 분리되지 않은 인프라망을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상호 접촉과 협업이 불가피했다. 이 과정에서 서베를린과 동독은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접근 방법으로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고, 정치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사안은 배제한 채 기술적 교류에 집중했다. (…) 누구도 협상을 깨면서까지 자신의 입장을 포기할 수 없다고 고집하지 않았다. 결국 협상에 임하는 당사자들의 합리적인 사고가 냉전 중에도 교류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p.125
저자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동?서독 젊은이들이 한 역할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 대학생과 좌파 지식인을 중심으로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거부한 움직임이 68운동이다. 독일의 민주주의는 68운동을 기점으로 질적으로 변화를 겪었으며 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데 일정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자유를 향한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역사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나라의 1987년과 68운동을 비교하는 저자의 시각에 공감이 갔다.
독일의 현대사에서 68운동의 사회적?정치적 의미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1987년이 갖는 의미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 실제로 68운동 이후 서독사회는 그 이전의 서독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회가 되었다. 모든 형태의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거부하며,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대안문화도 정착되었다. p.185
통일된 독일의 연방외무부는 보위의 사망소식이 알려진 2016년 1월 11일 SNS를 통해 장벽을 무너뜨리는 데 도움을 주어서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동베를린 쪽에서 “장벽이 없어져야만 한다”라고 외치다가 경찰에 무자비하게 체포되었던 사람들에게 통일 후에 누군가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다. 역사는 항상 ‘영웅’만 기억하려 한다. 그런데 장벽을 넘어 부는 바람에 응답하한 것은 그 자리에 있었던 수천명의 젊은이들이었다. p.196
통일 후의 베를린은 ‘천의 얼굴을 가진 도시’가 되었다. 저자는 과거를 망각하는 것이 아닌 기억으로 만든 베를린으로 재건될 수 있었던 이유를 ‘교육에 대한 사유’에서 찾는다. 정형화된 해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말이다.
건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곳에 담긴 역사가 잊힌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통일 이후 베를린은 역사를 잊은 공간이 아니라 기억을 품을 도시가 되었다. (…) 이 공간들은 누구에게도 역사의 한 단면을 특정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기억의 공간으로서, 잊지 말고 성찰해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줄 뿐이다. 거기에서 독일 시민교육의 근간이 되는 ‘사유’가 그대로 드러난다. 어떤 방식의 교육이든 사실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받는 사람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보는 비판적 시각과 함께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만 나치체제와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견해가 이런 사유를 뒷받침하고 있다. pp.239-240
한국의 분단에 대한 해답을 독일의 사례에서 찾을 수는 없다. 분단의 과정도 달랐거니와 동족 전쟁과 서베를린이라는 섬 같은 도시의 유무에서도 차이가 있다. 그들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지 않았다. 그러므로 서로 간에 적대감정이 깊어졌던 적이 없다. 또 공산주의 국가 동독 땅 한가운데 자리한 서베를린이란 존재로 인해 동?서독은 끊임없이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분단 70년 동안 천혜의 자연적 경계선이 되어 버린 38선을 두고 서로가 완전한 단절 상태에 놓여있다. ‘빨갱이’라는 말이 여전히 통하는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다. 대한민국은 어쩌면 이런 최악의 조건 때문에 지구 최후의 분단국으로 남은 것일까.
2차 대전 후부터 현재까지 도시 베를린의 역사를 통해 저자는 우리나라의 통일을 위한 시사점을 짚고 있다. ‘통일을 꿈꾸기 이전에 먼저 평화를 만들었던 동서베를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베를린의 과거가 우리의 현재라면 베를린의 현재가 우리의 미래이길 바라본다.
저자의 매끄러운 문장 덕에 암울한 시기에 대한 책을 수월히 읽고 분단국가로서의 우리나라에 대해 여러 생각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다만 독일과 베를린의 사례만 제시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현실적인 문제에 대입해보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박한식 교수의 「선을 넘어 생각한다」같은 책을 함께 읽으면 균형잡힌 독서가 될 것 같다. 이 책은 남북 분단상황에 대한 분석과 함께 실행 가능한 ‘평화’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좋은 글을 쓰는 저자의 다른 책이 있나 싶어 찾아봤지만 검색되지 않았다. 이 분야의 전문가로서 다른 저서를 기대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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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베를린
책을 좋아하다 보니, 거의 매주 시내 교보문고나 영풍문고를 방문하게 되는 것 같다. 서점에 가면 우선은 관심 분야의 신간 서적을 살펴보며 구입할 책을 고르게 되는데, 독자들마다 책을 고르고 선택하는 기준이 모두 다를 것이다. 나 또한 책을 구입할 때 나름의 기준이 있다. 우선은 책 제목을 살펴본다. 그러고 나서 책의 서문과 목차를 훑어본다. 서문과 목차를 훑어보고 나면 저자의 약력과 이력에 대해 꼼꼼하게 살펴본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꼭 확인하게 되는 것이 바로 출판사이다. 좋은 출판사는 좋은 작가의 좋은 책만을 만들기 때문에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창비, 창작과 비평사의 책은 오래전서부터 매우 신뢰하는 출판사이다. 학술논문과 이론 등을 다루었던 창비신서의 책들 중에 특히 좋은 책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창비신서의 책들은 거의 품절, 절판이 되었는데, 개정판이 새로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크다. 이은정 교수의 <베를린, 베를린>도 창비신서의 성격이 짙은 책이다.(창비신서가 계속 꾸준히 발간되었다면, 아마도 그 시리즈에 포함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2차 대전에서 패전한 후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대 승전연합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베를린에 대한 전승국들의 공동 관리는 원할히 이루어지지 못했다.…양 진영의 대립은 분할점령 된 한반도와 독일에서 가장 첨예하게 드러났다.(22면)…베를린을 둘러싼 미국와 소련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미국과 소련 모두 어느 한쪽이든 공격을 하게 되면 제3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야기하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는 미군과 소련군이 직접 대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발생했던 것일까? 1949년 독일에서는 최후에 양보하고 베를린 봉쇄를 해제한 소련의 지도차 이오시프 스탈린이 한반도에서 김일성이 공격을 개시하는 것을 동의한 이유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위험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일까? 결과적으로 보면 베를린 봉쇄로 인해 서베를린 주민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그로 인해서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던 것은 독일인에게 큰 행운이었다.…1949년 동독과 서독이 건국된 이후, 독일 영토에 정치적, 행정적으로 분리된 두 개의 국가가 실제로 존재했다.(~37면) 동독과 서독, 서로 이념이 달랐던 두 나라가 어떻게 하나의 독일로 통일이 될 수 있었는지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베를린 베를린>를 통해 그 궁금증을 풀 수 있다. 독일의 통일로 인해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가 바로 남과 북이다. 만약 당시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또한 애초에 분단국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가 만약 6·25전쟁으로 인한 분단국가 안 되었다면, 지금 우리나라의 위상은 어떠했을까? 종종 그런 생각을 해 본다. 고려 왕건이 삼국을 통일한 이후, 우리는 고려 500년, 조선 500년 무려 1,000년이란 세월동안 하나의 국가로 이어져 내려왔다. 하지만 1950년 서구 열강에 의해 우리나라는 분단 국가 되었다. 한 민족이 분단 국가로 살아온 지 70년이 다 되어간다.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베를린 베를린> 읽으면서 독일이 통일 준비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였고, 또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 엿 볼 수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독일 방문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는데, 케네디 대통령의 서베를린 방문은 고작 8시간 남짓 이지만 그날은 독일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고 한다. 정오경 45만명의 군중이 운집한 서베를린 시청 앞 광장에서 연단에 오른 케네디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라고 독일어로 답했다.…미국은 유사사에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서베를린을 지키겠지만 모스크바와의 협상 없이는 당장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자리에 모인 2만여 명의 교수, 학생, 시민들은 케네디의 연설을 들으면서 구원자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당시 자유대학교 의과 대학생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던 폴머 슈나이더는 장벽 건설 이후 암울했던 서베를린에 미국의 젊은 대통령이 희망을 가져다주었다고 회고했다. 케네디는 위대하면서도 훌륭한 대통령이었다.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었지만, 동시에 세계만민의 지도자였음을 이 책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통일을 위한 준비에 앞서 서베를린 주민이 동베를린에 사는 가족과 친척을 안전하게 방문할 수 있도록 한 통행증 협상과 다름을 인정하는 합의 구제 조항은 당시 독일의 정치인들이 분단된 조국의 국민들을 얼마나 생각하고 위하는지 그 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 <베를린 베를린>을 통해 분단에서 통일까지 가는 과정을 굉장히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독일의 분단 상황을 보여주는 다양한 지도 같은 것들이 있었으면 훨씬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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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국가 독일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와 함께 세계에서 분단된 단 두 국가 중 하나였던 독일이 통일된지도 벌써 29년의 세월이 흘렀다. 통일 후 커진 국력으로 EU의 맹주가 된 독일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의 상황이 대입되어 참 희비가 교차된다. 특히 북미 정상 회담을 거치며 평화 모드 분위기를 물씬 풍기던 남북 관계가 다시 경색되며 교착 상태에 빠진 모습을 보며 예전보다 조금 더 가깝게 느껴졌던 한민족의 통일이 다시금 멀어지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독일과 우리나라의 상황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요즘 같은 시국에 독일의 분단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통일의 과정을 다룬 책이 나와 읽어 보게 되었다.
◆1장 독일의 분단과 베를린
공교롭게도 독일도 1945년 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승전국인 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의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고, 이는 베를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원래 소련은 독일과 베를린을 분단시키려는 것은 아니었고, 베를린 전체를 통제함으로써 독일 전역을 자신의 영향권에 두려고 했지만 서방 연합국이 이를 허용하지 않게 되자,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동독과 동베를린의 통치권을 공고히 해 나갔고, 이는 자연스럽게 분단의 시작점이 되었다. 독일은 물론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원흉이긴 하지만, 외세에 의해 분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와 너무나 똑같은 상황에 힘없는 민족의 서러움이 얼마나 컸을지 가히 짐작이 된다. ◆2장 차단이 아닌 분단
베를린이 분할 통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 서베를린의 경계를 넘나들며 통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얘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지하 우편 수송관을 통해서 편지와 소포의 교류도 있었는데 분단 이후 전쟁을 거치면서 서로를 원수처럼 대하게 되면서 인적, 물적 교류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던 우리를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2장의 제목처럼 분단이지만 차단은 아니었기에 훗날 비교적 짧은 시기에 통일을 이룰 수 있었으리라. ◆3장 막을 수 없는 흐름
동, 서베를린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망 중 하나인 지하철과 도시철도도 분단 후 차단과 폐쇄를 거치지만, 사실상 완전히 분리된 적은 없었다. 정치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사안의 배제한 채 기술적 교류에 집중하며 냉전 중에도 교류를 이어갔다. ◆ 4장 장벽, 접근을 통한 변화의 시작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면서 동, 서베를린의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한다. 장벽 설치 전에 철조망이 설치되었는데, 이 분위기를 감지한 사람들의 탈출이 이어지면서 유혈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결국 장벽까지 완성되지만 그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브란트 시장의 '보통 작은 걸음 보다 큰 걸음이 낫지만,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는 것보다는 작은 걸음이라도 떼는 것이 낫다'라는 그의 철학을 기반으로 동독과 통행증 협정을 맺게 되고 이후 여행 방문 협정으로 확대되어 친척 방문뿐만 아니라 사업 및 관광 목적으로 방문할 수 있게 된다. ◆5장 장벽을 넘어 부는 바람
1987년 6월 7일 밤 10시, 록스타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역사적인 서베를린이 공연이 시작된다. 장벽 넘어 동베를린 사람들도 들을 수 있도록 동쪽으로도 스피커를 설치했고, 이 공연을 보러 오기 위해 수많은 동베를린 사람들이 장벽에 모이게 되면서 장벽이 없어져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 시발점이 된 역사적인 이벤트로 기록된 날이다. 결국 2년 뒤인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많은 동독 주민들이 동독을 탈출하여 서독으로 이동하게 된다. ◆6장 다시 하나가 된 베를린의 열망
결국 1990년 독일 통일 기념식이 열리게 되고, 91년에는 투표를 통해 베를린이 정식으로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된다. 이후 베를린의 많은 변화를 겪게 되지만 유럽의 관광 중심지, 문화의 도시, 스타트업의 메카가 된다. 독일의 분단과 베를린 장벽 설치, 장벽 붕괴 및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다양한 에피소드와 사진을 통해 그 시대의 굴곡진 역사와 삶에 대해 생생히 느낄 수가 있었다. 냉전 시대 극한의 대치 속에서도 최소한의 교류를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고, 우리도 남북한의 대치를 당리당략을 위한 제물로 쓰지 말고 한민족 교류의 물꼬를 트고 이를 이어갈 수 있다면 현 세대에서의 통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으로 확신한다. 세계적인 투자가인 짐 로저스의 말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머지않아 남북이 통일되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곳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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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떠나고 싶었고 이왕이면 이곳으로부터 많이 멀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여전히 많은 생각을 하지않고 표를 끊었고, 눈을 떠보니 베를린에 도착해 있었다. 낯선 이방인 기분을 느끼기 딱좋은 그런 늦은 밤이었다. 적당히 축축한 습기를 느낄수 있는, 한겨울의 베를린. 난 베를린에 와있다. 숙소를 찾아 헤매야 할 시간. 난 폰맹에 길치인데.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어두운그림자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춰갈때쯤 설렘은 어느새 두려움으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늘 그렇듯 커다란 짐가방이 야속하기만 할뿐. 차창밖의 베를린은 어두웠고, (물론 밤이라 그랬겠지만) 인적이 매우 드물었다. 버스차창 밖으로는 어두운 가죽잠바를 단체로 맞춘듯한 검은형체들이 습기와 뒤섞여 왠지 모를 스산함까지 자아내는 - 그렇게 나는 베를린에 와있었다. 베를린의 첫인상은 습기, 안개, 어두움, 미지- 이번 창비의 신간 <베를린베를린> 은 일찍 베를린으로 떠나 오래 그곳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이은정 교수가 쓴 베를린역사기다. 지금의 베를린과 비교하며 사진까지 첨부되어 제 2차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베를린의 민낯까지 섬세하게 들여다 볼수 있어 좋았다. 더욱이 우린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지 않나. 장차 우리가 통일된 모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많은 생각도 하게 되고. 베를린에 가보면 여러 박물관이 섬처럼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꽤 인상적이었다. 관광객의 입장에선 한번에 그 많은 곳을 다 관람하기에 하루이틀 날잡고 편히 돌수 있는 것도 매력적인 루트였고. 또 개인적으로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도시라는 느낌을 받은게 도시구석구석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느낄수 있게 그대로 놓아둔것. 꾸미거나 재해석 없이 그냥 남아있는 그 모습 그대로 - 그건 인정의 다른 이름이었다. 건널목 하나를 두고 베를린장벽과 위용을 뽐내고 있는 벤츠나 BMW회사건물들 지금의 삶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않고 우리가 먹고 마시고 숨쉬는 곳곳에서 지난 분단역사를 오롯히 느낄수 있던 점이 참 신선했다. 그리고 이 책을 보다보면 내가 받았던 그 설명하지 못했던 느낌들의 이유를 온전히 알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역사의 문외한인 나도 베를린과 단박에 사랑에 빠졌는데 누군들 이 도시를 그냥 지나칠까- 분단이 되었어도 장벽이 있기 전까진 소통과 왕래 , 서신까지 주고 받고 서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로 출퇴근까지 했던 이 특이한 도시. 당시 전쟁의 폐해로 가난함에 허덕여 감자로 연명해야했지만 지금은 세계최대 강대국이 되어 위상을 드높이고 있는 나라, 독일. 그안에 베를린은 그때나 지금이나 흙속의 진주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곳을 떠날때 나. 울었던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던 베를린의 묘한 마력의 의미를 제대로 추적해보고 싶은 자에게 추천. 베를린의 역사와 그 당시의 상황, 분단의 아픔과 우리에게 들려줄 희망의 메세지까지 < 베를린,베를린>에 모두 담겨있다. 오늘은 그유명한 불금. 베를린 영화나 깊숙히 파고들어야겠다. 아, 그립구나 그 축축함. 그 습기. 그 어둠속의 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