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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것은 1989년부터이다. 그전에도 관광을 목적으로 여행을
할 수는 있었으나 은행에 거액의 돈을 예치해야 했고 그나마도 1년에 딱 한번 갈 수 있었을 뿐이다. 막상 해외여행을 간다고 해도 반공연맹에서 반공교육을 받아야 하는 등 여러가지로 복잡했다. 지금 생각하면 먼 옛날 이야기 같지만 불과 30여년 전의 일이다. 지금이야 온갖 기행문들이 넘쳐나지만 당시에는 갈 수가 없었기에 기행문이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조상들은 어떠했을까? 우리 조상들 역시 해외여행이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엄격한 신분제사회에서 일반 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관직을 가진
사람 이래도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했을 테니 말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해외여행을
기행문 위주로 찾아서 엮었다고 한다. 전통시대 해외여행의 시작은 중국 당나라의 개방정책과 맛물린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통일신라시대에는 나라에서 파견하는 사신이 아닌 많은 학자와 승려들이 당나라를 여행하기도
했지만, 우리 선조들의 해외여행은 유학과 사신이 주를 이루었다. 일반백성들의
경우 전쟁으로 인한 이주가 대부분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 시기 고구려와 백제유민들의 중국과 일본거주, 임진왜란이후 포로로 끌려간 도공들, 고려시대 원나라 간섭기와 병자호란이후
공녀로 차출된 여인들 그리고 전쟁포로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백성들은 자신의 처지를 기록으로 남길수도
없었지만, 유학과 사신으로 간 사람들도 그 여정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러한 해외여행 중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을 찾아 여행사적 관점에서 정리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기행문의 효시는 8세기 통일신라의 승려 혜초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이다. 혜초가 신라인이라는 기록은 없지만 책에 실린 그의 시로 그가
신라인 임을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수많은 승려와 학자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경전과
학문을 공부했지만 자신들이 직접 기록으로 남긴 것은 없다고 한다. 본격적인 해외여행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들어서이다. 그 기록도 연행사들의 중국 기행, 통신사들의
일본 기행이 주를 이루지만 말이다.
조선시대 사행은 크게 명나라로 가는 조천사와
청나라로 가는 연행사로 나눌 수가 있다. 조천사의 사행기록으로는 1574년
명나라 신종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허봉의 사행기록을 허균이 편찬한 [조천기], 1624년 이덕형이 명나라에 다녀온 과정을 담은 [죽천행록]이 있다. 이중 [죽천행록]은 한글 필사본 사행록으로 당시 부녀자와 일반백성에게 명나라의 실상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여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연행사의 사행기록으로는 당시 연행사를 수행한 자제군관들의 연행기가 대부분이다.
우리들이 잘 알고있는 김창업의 [가재연행록],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박제가의 [북학의], 박지원의 [열하일기], 서유문의
[무오연행록], 홍순학의 [연행가]가 그것이다. 이중 [을병연행록], [무오연행록], [연행가]는
한글로 기록되어 있으며, 홍대용의 [을병연행록]은 같은 내용이 한문으로 [담헌연기]와
[회우록]에 실려있고, 홍순학의
[연행가]는 가사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의 요청으로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조선통신사는 모두 열 세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임진왜란의 강화과정에서 전쟁의 마무리와 포로를 데려와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로 회답겸쇄환사로 불렸지만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통신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조선초기
송희경이 227편의 시로 쓴 [노송담 일본행록], 신숙주의 [해동제국기], 신유한의
[해유록], 조엄의 [해사일기], 김인겸의 [일동장유가] 등이
전해오고 있다. 그중 숙종 때 신유한이 기록한 [해유록]은 통신사행으로 일본으로 건너갈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읽혔으며, 김인겸의
[일동장유가]는 홍순학의 [연행가]와 쌍벽을 이루는 여행가사라고 한다.
이밖에 연행사들과 통신사들의 기록을 제외한
기행문으로는 몇가지가 눈에 띈다. 광해군 때 명의 요청으로 후금을 치기 위해 파견한 군사 중 심하전쟁에서
후금의 포로가 된 종사관 이민환의 [책중일록]이 있다. 이민환은 그의 책에서 출병 시부터 귀환할 때까지 종군과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을 기록했다고 한다. 또 15세기 제주 관리 최부는 부모상으로 육지로 건너오던 중 표류를
당해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바다에서 16일, 중국에서 135일의 기록을 [표해록]으로
남겼고,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심양일기]와 [심양장계]를,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왜에 억류된 강항, 노인, 정희득은 각기 [간양록], [금계일기, [월봉해상록]을
써서 자신들의 일본에서의 생활과 그들의 풍속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세계에 처음 알려진
것은 언제일까? 한반도가 서양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세기
몽골의 지배를 받던 고려시대라고 한다. 유럽의 가톨릭 수도사로 몽골제국을 여행한 카르피니와 루브룩에
의해서다. 지금의 프랑스 지역 폴랑드르 출신인 루브룩이 쓴 [몽골제국여행기]에 등장하는 ‘카울레’가
고려를 뜻하고, 이탈리아 선교사 카르피니의 [몽골제국의역사]에 나오는 ‘솔랑기’가
고려에서 온 사람들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보다 20~30년이 앞선 시기이다.
조선을 유럽에 알린 계기는 1668년의 [하멜표류기]이지만, 이보다 50여년을
앞선 1617년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는 [조선옷을 입은
남자]란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밖에 외국인들의
한반도 기행으로는 1116년 고려 예종이 죽자 조문사절로 온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이 있다. 서긍은
이 사행보고서에 고려의 일상을 기록했다고 한다. 근대에 접어들어서는 미국인 목사 윌리엄 그리피스가 쓴
[은둔의 나라 한국], 영국 여성여행작가인 이사벨라 비숍의
[한국과 이웃나라들]이 있지만, 당시 조선의 모습을 과장하여 표현하거나 왜곡으로 한국에 대한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전통시대의 해외여행은 대부분이
사신으로 간 것이었음에도 일반인을 위한 통역안내서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 말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노걸대]와 [박통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들은 중국어 발음과 우리말을 함께 적고 있는데
[노걸대]는 세명의 상인이 고려특산품인 인삼과 모시 등을
청의 연경에 가서 팔고 그곳의 특산물을 사서 되돌아 올 때까지의 내용을 회화체로 기록하고 있으며, [박통사]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새삼스레 생각나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지금은 수많은 사람들이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자신의 여행기록을 다양한 방법으로 남긴다. 단지 기록만이 아니라 사진으로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그런 기록이 아니래도 관심만 있다면 자신이 알고자 하는 지역을 알 수 있는 방법 또한 많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행문을 찾아서 읽는 까닭은 정보와 함께 기행문을 쓴 사람의 감정까지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통시대의 기행문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서 열광하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책은 우리에게 전통시대 기행문으로 어떤 것이 있으며 그 기록들이 쓰여진 배경까지 설명해준다. 책 제목 그대로 기록따라 떠나는 고전 기행인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