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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커가면서 순간순간 아슬아슬해지는 경우가 있다. 어린 시절 선택의 대부분을 부모가 결정지었다면, 이젠 대부분을 자신들이 선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읽었던 육아서도 있고, 나름의 내 교육관으로 나는,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가능하면 선택권을 주려고 했다. 다 같이 외식을 할 때도, 각자의 옷을 살 때도, 장난감을 살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심지어는 무엇을 배울지에 대한 선택도 대부분 아이들이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때론 서로의 선택을 놓지 않으려고 큰 녀석과 작은 녀석은 심하게 싸운다. 물론 중재는 부모인 나와 아이들 아빠가 하지만 그러는 상황 속에서 누구는 몇 번을 양보 했네, 양보를 하지 않았네, 말들이 많아서 피곤해 진다. 대신 어떤 선택을 했을 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아이들이 져야 하는 상황이라서 선택을 무조건 반겨하지는 않는다. 지금도 가끔은 생각한다. 조금은 강제성을 띠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하는 유혹과 그냥 자신들이 선택하게 하는 지금을 고수하는 것. 과연 어떤 것이 좋을까?
태봉이는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아버지 또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는 이유로 마음의 문을 닫는다. 무엇도 바라지 않고, 욕망하지도 않은 채 퀵서비스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같은 학교 친구 슬아는 입양아다. 슬아는 의욕도 많고, 욕심도 많은 전교 1등 모범생에 얼굴도 예쁜 아이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파양된 동생 상하를 생각하며, 자신도 엄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파양될 것이라는 불안함을 갖고 살아간다. 그 불안함에 슬아는 기면증이 생기게 된다. 혼란스러운 슬아는 웜홀에 빠진 배달원이 있음을 알게 되고, 자신도 그 웜홀을 통과하고 싶어 한다. 웜홀을 통해 슬아와 태봉이 본 것은 무엇이며, 진실이라 믿었던 사건 뒷면에 숨은 진심을 알게 되는데...
나의 열일곱. 나의 열일곱 머릿속은 모든 것이 혼란이자 모든 것이 호기심에 가득한 날들이었다. 공부를 강요한 부모님이 아니셨기에 어떤 날은 만화방에서 허리가 휘도록 책을 읽었고, 어떤 날은 헌책방 바닥에서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책을 읽었고, 어떤 날은 친구들의 소개팅 주선자로 빵집에 앉아 있었고, 어떤 날은 선배들의 호출로 강당에서 벌을 서기도 했으며, 탈춤에 미쳐서 탈춤을 추고, 야영 생활이 즐거워 방학이면 선배들과 활동을 나갔으며, 끊임없이 나에 대한 의문으로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지금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지하철에서의 엉뚱한 게임(람보 게임, 터미네이터 게임)을 했으며, 선생님께 반항도 해 보았고,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기 시작하면 그칠 줄을 몰랐고, 누군가의 눈물에 눈이 부을 정도로 같이 울어주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울적 하다가도, 맛있는 떡볶이 한 입에 배시시 웃는 배알(?)도 없는 단순하지만 엉뚱한 소녀이기도 했다.
형제자매가 많다보니 엄마는 나보다는 오빠와 언니에게 집중하셨고, 나는 늘 평소와 똑같이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고 책임졌으며,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그게 불만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건 축복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은 사실 참 무서운 일이다. 잘 되었을 때는 칭찬받을 수 있지만 혹시 실패 했을 때엔 모든 비난이 나에게 집중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내 선택이 모두 100% 성공으로 채워지지 않았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전했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 3박 4일을 눈물로 지새운 적도 있고, 모두가 안 된다는 일을 혼자의 고집으로 묵묵히 이뤄낸 적도 있다. 한 두 번의 실패는 긴 인생을 두고 봤을 때 그 어떤 흉도 남기지 않는다. 조금의 상처가 남았을지언정 그 자리가 깊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했으니까.
그런 면에서 태봉은 계란의 껍질에서 나온 병아리와 같다. 자신의 삶에 그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으려했고, 선택하지 않았던 아이였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은 모두 부모에게 있다고 부모 탓만 하던 아이였다. 하지만 없는 걸로 치면 태봉이 못 지 않은 근수는 자신의 상황을 그 누구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며, 그 삶을 위해 노력해 간다. 슬아 또한 엄마의 무거운 바람 속에서 점점 자신이 목소리를 내가며 삶을 선택하기 시작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늘 다른 사람의 탓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 역시 어린 시절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 아니었을까? 부모님의 그늘 아래서, 부모님의 품속에서 너는 공부만 해 엄마가 다른 건 다 해결해 줄게. 이런 말을 들으면서 컸던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은 호락호락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섭고 차가운 것만은 아니다. 내 인생은 그 누구의 것이 아니듯, 이 세상 역시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내 인생을 내가 만들어나가듯, 이 세상도 일부는 내가 만들어가는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외면하고 무시하지 말자. 당당하게 선택하고 책임지는 멋진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보는 것. 그것도 기쁨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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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버겁기만 한 '선택'의 책임을 아이들에게 요구한다는 것이 참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가 성장해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좀더 지혜롭게 받아들이고 책임지려고 할 수밖에... 내가 있는 이 자리에 만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단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자꾸 확인하고 감당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의 몫. EBS <라디오 연재소설>에 낭독되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를 알 수 있는 작품이었다. 작가는 또다시 우리 아이들에게 생각 꺼리를 던져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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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대학은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필요한 신분증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대학만 가면 된다는 생각에 성적 맞추어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학과로 진학했고 4년 후에는 대학 졸업장이라는 그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그러면 되는 거라고, 그때부터 시작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졸업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세상은 대학 졸업장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도, 대학 졸업장이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곳도 아니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잃어버린 채 세상 속에서 그렇게, 남들도 다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위로 아닌 위로로 나 자신을 방치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한번씩, 내 인생이 어긋나고 있다고 생각이 들 때마다 타임슬립하여 고등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한 친구는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간을 스무 살 때라고 말하던데, 나는 그것보다는 조금은 더 욕심을 부려 스무 살, 어른이라는 신분을 맞이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고등학교는 대학입학을 위해 잠시 거쳐 가는 버스정류장 같은 곳이 아니라 내 미래를 위해 상당히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지금은 알고 있기 때문일까. 졸업장을 위한 대학이 아니라, 내가 좋아해서, 내가 살아가고 싶은 나중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갖기 위해 나는 딱 고등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본 내 인생을 위해, 대학보다는 학과를 정하기 위해 고민하고 내 마음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이과가 아닌 문과로 진로를 정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주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조금씩 알아갔던, 내가 좋아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조금 더 일찍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에 사무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내가 만날 스무 살이라는 나이는, 내 미래를 위해 그 디딤돌을 더 단단하게 다지는 순간이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누구 때문이든지 무엇 때문이든지 결국 그 시간에 그러한 선택을 하고 그렇게 살아온 것은 온전하게 나 자신의 책임으로 이어지는 것이며, 그 시간으로 갈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시간’이란 개념을 매 순간 긴장하면서 써야 한다는 것을. 어렸다고, 미성년이었다는 이유로 내 시간을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 누구에게 책임 전가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태봉과 슬아가 웜홀을 통과하면서 자신들이 망각한 기억과 조우했을 때의 마음상태를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은 내 몫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때로는 벗어나고 싶다고 울부짖고, 이 시간을 피해가고자 애를 써 보기도 하지만, 운명이라 이름 붙여져 주어진 현실은 처음부터 내가 선택해온 것들의 축적물이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타의로 퇴직한 아버지와 집 나간 어머니, 그리고 점점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아버지를 참을 수 없었던 태봉은 스스로 잉여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앞으로’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자신이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싶어 한다. 반면 그 누구보다 잘 만들어진 가족이란 그림 안에서 자신에게 생긴 병을 숨기면서 살아가는 슬아는 입양아다. 엄마가 만들어놓은 그림에서 자신의 역할은 공부를 잘 하고 말 잘 듣는 딸의 색깔을 입고 있다. 점점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자 이미 파양당한 동생 상하와 같이 되지 않고자 스스로를 더 가두게 된다. 의미 없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태봉과 선택받은 인생이라 생각했던 슬아.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갔다고, 엄마가 자기를 선택했으면서 파양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태봉과 슬아의 마음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선택권이 없었던 나는 피해자인데, 왜 나를 선택한 당신들(태봉과 슬아의 부모)이 피해자인 것처럼 구는 것이냐’며 책임을 전가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래서 웜홀을 통과할 때 태봉과 슬아가 본 것은 두 아이를 혼란에 빠트렸을 것이다. 기억에도 없었던 일인데, 그것도 지금껏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던 것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마주했을 때의 감정은 분명 당황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았을 때 바로 사과를 해야 하는데, 그 타이밍을 놓쳐버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라고.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 시작이었는데, 그걸 자각하지 못한 채로 너무 많은 시간을 방치해왔다는 것을 상기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태봉과 슬아와 함께 웜홀을 통과해야만 했다.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나간 시간의 한때를 순간순간 그리워하고, 어른들이 그러라고 가르쳤기에 나는 그대로 정해진 길을 답습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내 안에 새겨야했다. 두 아이가 용기를 내어 떨어져 내리는 그 순간에 온몸을 내맡겼던 것처럼 나도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그 웜홀을 같이 통과해야만 했다. 슬아와 상하를 선택했던 순간의 의미를 다시 찾아야 할 슬아의 엄마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태봉의 아빠도,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건너가기 위해서 치러야할 통과의례 같았다. 이들과 내가 받아들여야 했던 것은, 자신들이 선택받아 수동적으로 끌려온 운명이 아니라 자신들의 선택으로 이어져온 운명이란 것을, 그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서라도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선택들로 채워져 흘러온 인생의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임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의 그릇된 기억이 아닌 지금 이 시간부터의 나 자신이 만날 운명을 위해 선택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자세를 다시 쓰는 것이다.
처음에, 자신이 좋아하는 비트박스를 하면서 퀵클리쌩 한 귀퉁이에 채소를 키우던 근수와 두 다리를 잃고서도 할리 데이비슨을 선택한 고래삼촌의 모습을 보면서 혹시 이 두 사람은 그 웜홀을 한번쯤 통과한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은 자신이 스스로 한 선택을 인정했느냐 아니냐의 차이를 나에게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태봉이나 슬아와 같은 입장에 서서 그 오토바이의 뒤를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뛰어내려야만 했던 순간을 그들은 이미 겪어온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부정하고 싶은 많은 순간들이나, ‘~했더라면’ 싶은 수많은 가정들이 의미 없음을 보여주는 매개체이기도 했다. 자신을 점검하고 싶은 순간에 한 번씩 뒤돌아보고 확인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지나간 시간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리워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이라는 것을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이... 앞으로 걸어가기 위해 지금의 시간을 위해 노력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은,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라고 말이다.
얼마 전에 봤던, 엄마가 즐겨보시는 아침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 주인공은 대학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길을 나서다가 이웃동생이 길가에서 아픔으로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그 아이를 먼저 돌보게 되고, 마치 예정된 일이었던 것처럼 시험장에 늦어서 시험도 치르지 못하게 된다. 그 상황이 안타깝고 미안했던 이웃 동생은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주인공은 그 이웃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내가 선택했어.” 자신이 선택했다는 한 마디로 상대방의 미안함과 자기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 번 다지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주인공이 그대로 대학을 포기할지 재수를 할지 아직은 모른다.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주인공의 인생도 끝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을 자신의 선택으로 인정했다는 것도, 다시 대학입학시험을 치르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두고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을 함께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작 『시간을 파는 상점』에서는 주인공 온조를 통해서 누군가의 시간을 대신 배달하는 듯, 다른 이의 시간을 대신 만나면서 그 시간의 흐름의 의미를 보게 하더니 이번 작품 『특별한 배달』에서는 꼭 만나야 할 한 지점 속으로 나를 배달해주는 것만 같았다. 내가 찾아가야할 나의 한 순간을, 내가 지금 이 타이밍에 만나야만 앞으로 나의 시간이 더욱 단단히 채워질 것만 같은 느낌으로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왜 서 있는 건지 그 이유를 냉정하게 만나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간의 흐름에 대한 과정과 책임을 다시 보게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어쩌면 전작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그 많은 과정이 시간과 함께 흐르고 있으며, 그 시간을 주관하는 주체는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시간이 마냥 흘러가게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간을 주관하는 위치에서 내 인생을 감독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있는 듯하다. 작가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연결 지어 들려주는 이유, 청소년문학이라는 장르로 다가오려 하는 이유, 분명하게 이 안에 담겨 있었다. 어른 이후의 시간이 아니라, 누구든지 처음부터 그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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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번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경우가 있으실 겁니다. 저는 정말 많이 그랬습니다. 인생이 초콜릿 상자와 같다는 말이있죠. 처음에 맛있는 것만 쏙쏙 골라 먹으면 나중엔 맛 없는 것만 남아있다고. 제 경우엔 그게 좀 빨랐던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제 인생의 맛있는 것은 이미 다 먹어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 제게 남아 있는 건 맛없는 것들 뿐. 그렇게 맛없는 것들을 매일 먹어야 한다면 연어처럼 시간을 거슬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요? 솔직히 김선영 작가의 '특별한 배달'을 읽으면서 놀랐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여주인공 슬하가 완전 제 모습의 판박이였기 때문입니다. 슬하는 매일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지내야 하는 현재의 삶이 너무도 고달파서 늘 지금과는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한 책들을 정말 닥치는 대로 찾아 읽습니다. 거기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미오 나의 미오'와 같은 판타지도 있고 미치오 가쿠가 쓴 '다차원 우주론인 평행우주'와 같은 책도 있습니다. 슬하는 그런 책들을 통해 늘 기면증을 일으키는 힘겨운 현실을 버텨 나갈 희망을 얻습니다. 하지만 슬하에게 그 희망이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상상이 아니라 꼭 현실로 이루어지길 바랐을만큼 절박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절박함이 슬하로 하여금 그 어려운 물리학 책까지 들여다 보게 한 것이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현실이 마치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가 된 마냥 질식할 정도로 갑갑하게 느껴질 때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과거로 정말 많이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슬하가 그 구멍에 가고 싶었던 마음 그대로 저 역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지금의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말해주는 책을 저 역시 닥치는대로 찾아 읽었습니다. 슬하가 읽었던 '미오 나의 미오'와 미치오 가쿠의 '평행우주'는 저 역시 읽은 책이었습니다. 그렇게 슬하와 저는 같은 꿈을 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슬하가 현실에서 느끼는 아픔 역시도 어떤지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저에게 이 소설 '특별한 배달'은 특별한 책이었습니다.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그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저에겐 그리 남 얘기 같지 않았습니다. 떠나간 엄마를 원망하고 서열화된 사회를 원망하며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 부르며 목적도, 소망도 없이 사는 태봉의 모습 또한 언젠가의 제 모습이었습니다. 현실이 주는 결핍이 너무도 크면 차라리 먼저 그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 생존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솝이야기에 나오는, 포도를 아무리해도 따지 못하자 저건 그냥 신포도일 뿐이야 하고 외면해 버리는 여우처럼 말이죠. 더 이상 결핍으로부터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아예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태봉이 잉여인간으로 자처했던 것도 그런 것이었겠죠. 사실은 더욱 제대로 살고 싶다는 절박한 바람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태봉은 남편이 투명인간으로 되어가는 것이 안타까워 자신이 먼저 사라져 버리겠다며 떠나간 엄마를 모순일 뿐이라며 이해하려고도 용서하려고도 하지 않지만 사실 삶에는 얼마든지 그런 모순이 있게 마련입니다. 노래 가사에 흔히 나오는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말처럼 말이죠. 엄마의 행동이 모순이라면 태봉 자신의 행동 역시도 모순 입니다. 모순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지금 우리가 가진 이해의 범주 바깥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경험이 쌓이고 지식이 넓어지면 그 모순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태봉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슬하는 이해할 수 있듯이 말이죠. 태봉에게 엄마의 사라짐은 그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바꾼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태봉은 그 엄마의 사라짐으로 세상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종종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은 우리의 원망을 낳습니다. 여우의 포도에 대한 태도는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오는 상처를 미연에 막기 위해 덮어놓고 부정하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슬하도 그랬습니다. 슬하도 태봉과 똑같이 사랑하는 한 존재의 사라짐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완전히 바꾸게 만드는 계기를 낳았습니다. 그 존재는 바로 동생 상하였습니다. 상하와 슬하는 입양된 아이였습니다. 슬하는 자신이 입양된 아이라는 것을 엄마가 미리 알렸기 때문에 원래부터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부모와 자식으로 맺어진 관계인 이상 이대로 내내 지속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런 생각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그게 바로 상하의 파양이었습니다. 상하가 엄마의 통제를 자꾸만 벗어나자 더 이상 엄마의 자식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슬하는 바로 거기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슬하는 엄마가 왜 승하를 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자식으로 여기며 키우겠다고 입양을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쉽게 내버리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엄마를 원망합니다. 자신에게 이해할 수 없는 행위로 자꾸만 불안하게 만들고 힘들게 하니까요. 그리고 자기 역시도 그 상하처럼 엄마의 기대를 채우지 못할 경우 떨어져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엄마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회마저 원망하게 됩니다. 엄마로 부터 버림받지 않으려면 늘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고 또 설령 했다고 한들 그걸 내내 지속하기란 정말 어려우니까요. 그렇게 태봉과 슬하는 사실 하나입니다. 태봉의 잉여인간 자처나 슬하의 다른 가능성 꿈꾸기는 그들이 가진 원망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슬하와 똑같이 과거로 되돌아가고픈 욕망을 무던히도 가졌던 저 역시 세상을 향한 원망의 굴절된 표현이었던 것이구요. 우리는 그렇게 늘 바깥을 원망합니다. 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가 바뀌어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까지나 우리는 태봉이 엄마가 찾아와 주기를 바라듯이, 슬하가 엄마와 세상이 바뀌길 바라듯이 원망에 대한 치유 역시 바깥으로 부터 와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특별한 배달'은 바로 그러한 우리의 생각이 이제 달라져야 한다고 말해주는 책입니다.
문제는 시야입니다. 생각해보면 원망 역시 모순과 마찬가지로 이해의 부족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망 역시도 다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바깥에 머물러 있을 뿐인 것이죠. 태봉이 엄마가 떠난 이유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의 삶은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또한 슬하가 자신이 어떻게 엄마에게 입양되었는지 또 상하가 어쩌다 파양되었는지 그 내력을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있었다면 슬하의 삶 역시도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 그것을 볼 수 없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 나름의 방법으로 세상을 원망하며 스스로의 존재 가치 또한 떨어뜨리고 맙니다. 이것을 통해 소설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지는 바깥에 대한 원망은 바로 그 시야의 좁음 때문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아마도 후반에 태봉 아버지의 일기나 슬하 입양에 대한 엄마의 고백, 그리고 상하 파양에 대한 한 수녀의 증언으로 밝혀지는 모든 진실들은 다름아니라 바로 이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 때 태봉과 슬하는 분명히 깨닫습니다.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더하여 저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태봉과 슬하만큼이나 저 역시 세상을 다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과연 제가 아는 것이 무엇일까요? 제가 볼 수 있는 것까지만 알 수 있을 뿐인데 말이죠.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하루살이 앞에서 메뚜기가 내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이야기를 그저 공상이라고만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메뚜기에게 곰은 사계절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하지만 여름 한 철 밖에는 살지 못하는 메뚜기는 무려 계절이 네 개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시야의 한계를 자신이 알 수 있는 절대라고 생각한 탓이죠. 저도 그렇습니다. 하루살이, 메뚜기와 별 반 다를 바 없습니다. 내게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것만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부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교만합니다. 사실 바로 이게 아닐까요? 우리가 가지는 원망은 어쩌면 우리가 너무 오만하기에 나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래서 이 소설에 슬하가 '웜홀'이라 부르는 구멍과 같이 다소 판타지적 소재가 들어간 것이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웜홀' 같은 것이 얼마든지 가능할 정도로 삶이란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말이죠. 태봉에게도, 슬하에게도 그랬듯이 삶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더 넓게 볼 수 있게되자 자신과 세상에 대한 원망도 누그러지게 되었습니다. 분명 우리에게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그 '너머'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왜 우리들은 그 '너머'를 그저 없는 것이라고만 생각할까요. 그 '너머'에 지금의 세상마저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는 다양하고도 풍부한 가능성이 존재할지도 모르는데 그저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좁은 내 시야를 내 전부로만 생각하고 살아갈까요? 그러므로 태봉과 슬하가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바깥으로 부터 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좀 무리해서 말하면 그 것들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내내 존재해 왔습니다. 다만 우리의 시야가 닿지않는 그 '너머'에 있었고 보이지 않는다고 그 '너머'를 보려는 노력을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바람에 찾지 못한 것이었죠. 행복을 준다는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떠돌아다녔지만 정작 자기 집에서 그 새를 찾은 치루치루와 미치루 처럼 말이죠. 무엇보다 태봉 아버지가 태봉에게 선물한 금괴가 이것을 단적으로 나타낸다고 보여집니다. 그 금괴의 의미에 대해 아버지는 쪽지로 이렇게 설명하죠.
아버지는 순도 100퍼센트의 금을 만들고 싶었다. 100퍼센트는 연금술로도 극복할 수 없다고 하더라만, 1퍼센트의 불순물, 그것은 허용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 미니바에는 1퍼센트 이상의 불순물이 있을 수 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빠는 버려진 것들 속에도 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맞습니다. 버려진 것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금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너머'를 볼 수 없는 우리들은 쉽게 그 가능성을 버려버리고 난 안된다며 잉여를 자처하거나 과거 회귀만 꿈꾸기에 급급하죠. 그러므로 진정한 길은 이러한 가능성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시야를 더 넓게 만드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물론 바깥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길은 물론 소설에 다 나와 있습니다. 먼저 오수의 자작시에 나오는 개망초 꽃처럼 더 이상 타인의 잣대로 자신을 재단하지 않고 스스로를 그대로 긍정하고 그러면서도 또한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을 버리고 보다 더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기 위해 나와 다른 생각들에게도 얼마든지 귀 기울여 듣는 것이죠. 김선영 작가의 '특별한 배달'은 바로 이러한 변화로 '나 자신'을 퀵으로 배달하는 작품입니다. 정말 제 자신이 태봉의 오토바이에 태워져 문득 전과는 다른 나로 도착한 느낌을 받았기에 얼마든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슬하가 자유로워졌듯이 저도 이제 자꾸만 과거로 달아나고 싶었던 마음으로 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 역시 얼마나 제 주위에 '웜홀'이 나타나길 바랐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을 꿈꾸지 않겠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것을 꿈꾸기 보다 더 많이 더 넓게 볼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소설의 끝은 '방방' 입니다. 높이 뛰어오를수록 더 많이 볼 수 있는 방방은 정말 결말에 어울리는 소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슬하가 그 방방에서 뛰어오를때 어딘가에서 동생 상하의 이런 말이 들려옵니다.
- 누나 떨어져도 무조건 받아주는 쿠션이 있잖아. 그냥 믿고 더 높이 뛰어올라. 겁먹지 말고.
저에게도 이 책이 그럴 것 같네요. 안심하고 더 멀리 볼 수 있도록 더 높이 뛰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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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배달 - 나도 배달 되었으면.. 나를 위한 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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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택에 의해서든 아니면 다른 사람의 선택에 의해서든 세월은 참 잘 간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선택을 했던, 선택을 받았던 그 세월의 깊이는 참 길고도 험난해 보인다. 솔직히 살짝 뒤돌아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많이 아파 하고 혼자만의 좌절과 혼돈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 좌절과 혼돈이 올바른 길로 가면 좋으련만 방황하고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청소년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면서 그들에게 이리 말해주고 싶다. 그 시기에 조금만 긍정이라는 단어와 '괜찮아' 하고 주문을 걸면 아무 일 없이 다 잘 지나갈 거야. 이리 생각하길 말이다.
당신이 점점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없어요. p10 태봉의 엄마는 어느 날 이 한 줄 편지를 쓰고 집을 나갔다. 그리고 태봉은 학교에서 장래희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잉여인간’이 되겠다고 말한다. 자기의 미래도 꿈도 희망도 엄마가 살아짐과 동시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살아진 것이다. 그리고 삶이 즐겁지 않고 불만에 싸여 산다. 선생님은 이런 태봉이 못마땅하다. 특히 고등학교 시작부터 친구와 다투기 시작하면서 학교에서 소문도 나쁘고 사업에 실패하고 힘든 시기를 겪은 아버지 또한 태봉에게서도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태봉에게는 근수라는 같은 반 친구가 있다. 그 친구가 태봉에게서 나오는 착함, 근성 그리고 초지일관에 반해서 친하게 된다. 역시 남자의 의리는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 다닐 때 특히 청소년기에 이런 친구가 있다는 자체 만으로 성공한 인생 같다.
슬아는 태봉과 같은 학교 여학생이다. 슬아는 상하라는 동생이 있었다. 두 남매는 입양아인데 상하는 양부모에게 파양되어 어딘가로 갔다. 슬아는 자기 자신이 상하 같이 엄마에게서 버림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산다. 공부도 최고여야하고 아프면 버림받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 슬아는 길 가다가 쓰러지면서 태봉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둘이 만나게 된다. 양부모가 자기를 선택했지만 버린 받는 것은 슬프고 무섭기에 슬아는 이렇게 갑자기 쓰러지는 병인 ‘기면증’이라는 걸 숨기고 산다. 기면증이라는 게 스트레스가 높으면 더 잘 일어나는 현상인가 보다. 높은 스트레스나 신경을 쓰면 일어나는 것 같다. 전에 읽은 김영리 저 『나는 랄라랜드로 간다』에서 용하라는 주인공 아이가 어릴 적에 부모님과 떨어져 살다가 같이 만나게 되는데 그때 수시로 발생했던 병이 기면증이었다. 이런 병이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청소년기의 아이들이 안타깝게 여겨진다. 스트레스 받지 않고 편안하게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슬아는 부모에게 버림받을까 두렵고 친부모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태봉은 슬아와 가까워지지만 자기는 자기 부모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런데 슬아의 제안으로 어느 곳 인가로 살아진 일구라는 사람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 사람이 땅이 꺼지면서 웜홀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슬아는 이렇게 믿고 있다. 과연 그 사람은 어디로 간 걸까? 슬아가 믿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이리라 말한다. 그리고 슬아가 가고 싶은 가장 그리워하는 곳이 어디 일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난 꼭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 죽었다면 시체라도 나와야 되는 거잖아. 만약에 말이야, 빛과 같은 순간에 다른 곳으로 간다면 어디로 갈 거 같냐? 난 그 사람이 가장 그리워하는 곳으로 갈 거 같아.” p 105 그 사람을 찾으면서 겪게 되는 무한대 우주의 신비, 평행 우주 이론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방황을 멈추고 자기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그 방황을 멈추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일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태봉은 아버지를 조금씩 발견하고 알아가게 된다.
나는 순도 높은 금을 만들고 싶다. 버려진 것들에 오히려 순금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p145 태봉의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돈이 떨어지고 친구들에게 멸시 당하고 가족에게 투명인간 취급받고, 등 돌림을 당하면서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런데 죽음의 문턱에 갔다 오니 삶이 이게 아니구나! 하면서 깨우치고,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기 같은 사람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태봉은 아버지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해 방황하고 살았지만 우연히 발견한 아버지의 일기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 탓으로 엄마 탓으로 생각하면서 살았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점점 변해가는 태봉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 졌다.
『특별한 배달』이라는 책 제목과 같이 슬아는 태봉에게 자기도 그 웜홀을 통과하는 것을 배달해 달라고 말한다. 불안한 슬아는 양부모에게 버림받기 실었고 상하는 어디로 갔을까? 궁금하고 다른 세계가 자기를 반길 것 같아서 그 부탁을 한다. 두 사람은 웜홀 속으로 들어간다. 그 속에서 태봉은 엄마가 집을 나가는 날 편지를 쓰고 같이 가자고 붙잡는 것을 본다. 그런데 자신이 아버지와 살겠다고 엄마 손을 거부한 것이다. 태봉의 선택은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슬아는 입양 받을 당시 양부모에게 기어서 간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양부모가 선택한 것이 나니라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상하의 얼굴을 보는데 왠지 불안하고 무섭고 슬프게 느껴진다. 이렇게 오토바이로의 특별한 배달을 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요즘 오토바이 퀵 배달을 하는 학생들을 보게 되는데 열심히 살려고 하는 마음이 착해 보이고 한편으로는 추운 날 안쓰러워 보이기 까지한다. 사고 같은 것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래 본다. 그래도 태봉같이 방황하지 않게 배달 일을 시켜준 삼촌도 너무 좋고 같이 아르바이트한 근수란 친구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이 든다.
“내가 널 선택한 게 아니라, 네가 날 선택한 거야.” p179 슬아 엄마가 말한 것이다. 누가 누구를 선택한다는 것 그것은 참 아이러니 하면서도 어렵다. 누가 누구를 선택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먼저 자신을 선택해 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나에게 말한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려고 하면 이 길이 아니야 다른 길로 가자고 말이다. 슬아 엄마는 슬아와 동생 상하를 입양하여 잘 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살았을 것이다. 잘 못 키우면 어쩌나 이 아이들의 인생이 있는데 그 길이 그래도 올바른 길로 갔으면 하는 그런 길 말이다. 동생 상하가 친아버지 때문에 파양 당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된다. 태봉이 아버지도 태봉이도 이제는 투명인간이 아닌 이해하는 그런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그런데 상하는 어느 날 평행이론, 아니면 우주의 신비 같이 어디론가 살아졌다. 상하는 과연 어디로 간 걸까? 아마 슬아의 마음속에 상하는 항상 살아 있을 것이다. 태봉은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된다. 부모를 믿지 못하고 삐뚤어진 생각을 한 점과 세상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 말이다. 태봉아 세상은 가만히 있었다. 너 자신이 너를 잠시 버린 것이지. 앞으로 너 자신을 버리지 말고 너의 인생을 멋지게 펼쳐 나가길 바란다. 서로 대화를 하고 깨닫게 되면서 아픈 상처를 위로해줘서 참 좋다.
저자인 김선영님의 책을 읽으면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해결점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조금은 황당하고 진실이 아니라도 좋다. 해결만 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시간을 파는 상점』에서는 은조가 시간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고, 해결해 준다. 그리고 친구들 간의 우정, 시간을 잘 쓰는 그런 인생을 보여준 것 같아서 좋았는데 이 책도 마찬가지로 배달이라는 것으로 태봉이 배달하고 슬아가 같이하며 근수가 그들을 지켜준다. 그래서 참 좋은 것 같다. 저자님께 감사를 드린다. 세상에 어떤 일로 혼자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청소년들에게 질문한다. 제발 그 방황 오래 하지 말고 방황 속에서 빨리 너를 찾고 너 자신의 길을 가기를 바란다고 말이다. 그대로 멈추면 너의 인생도 멈춘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더욱 발전하고 앞으로 낳아가는 그런 멋진 너를 그려 본다. 나는 청소년기를 아주 많이 지났다. 미리 이 책을 만났다면 새로운 삶을 살았을까? 아마 많은 도움이 됐을 거라 생각을 해보게 되고, 지금까지 속상하고 마음이 아플 때 마음속으로 남편, 아이들, 세상 사람들 탓만 하고 산 것 같다. 앞으로 좌절도, 욕망도, 포기도, 실패도 모든 것은 누구 탓도 아닌 내 탓으로 인한 나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내 인생 멋지게 선택해서 살아야겠다. 물론 좋은 선택이 많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내 인생은 내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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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는 이 자리는 나의 선택, 나의 책임 그래서 우린 가끔 물어야 한다.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운명이란, 나의 선택이 배제된 채 휩쓸려가는 거대한 물살로 보인다. 그러나 알고보면 운명은 나의 선택 위를 흘러가는 물결 같은 것. 『특별한 배달』은 인생에 놓인 후회 앞에서 책임을 묻는다. 과연 운명의 물살이 너를 휩쓸어버린걸까?
선택과 후회 책임의 싸이클은 돌고 돌며 웜홈을 만들어 낸다. 그 웜홀을 통과할 때 우리는 얼마 전의 우주와 완전 달라진 우주를 만날 수 있다. "한 번쯤은 자신을 돌아봐야 할 때가 있는 거 같아. 자신을 들여다보는 사람만이 다른 형태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자신에게 주는 거라고 생각해. 자꾸 그렇게 점검하며 길을 내는 게 제대로 사는 거 아닐까?" -『특별한 배달』, 김선영, 자음과모음, 2013, p.138 다른 형태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자신에게 주는 것이야말로 후회 앞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처신이 아닐까. 진정 용기 있는 자만이 후회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다른 형태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찾을 수 있다. 용기가 없으면 평생 '내 인생은 왜 이럴까' 신세한탄만 하다 정작 '왜 이런 지'는 알지도 못한 채 가겠지... 뜨끔 했다. 모든 일은 돌이켜 보면 어느 곳에나 내가 있다. 지금의 나 역시 가까운 미래든 먼 미래든 후회할 지점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이 순간을 후회없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후회하고 있다면, 이 후회를 만들어낸 것이 나라는 사실도 마주볼 줄 알아야 한다. 회피는 후회 앞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알면서도 항상 후회 앞에서는 탓 할 거리를 찾고 있지는 않은지, 가끔은 이렇게 알면서도 모르던 것들을 깨우쳐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특별한 배달』은 이렇게 잊기 쉽지만 잊으면 안 될 일들을 가르쳐준다. 선택과 후회, 책임 이 세 단어 사이에는 어떤 힘들이 있는걸까? 선택과 책임 사이, 혹은 이 사이에 후회 대신 다른 단어들이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청소년 시기까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있었나? 미성년이라는 말은 선택의 책임을 대신 들어주는 말이 아닌가? 뭘 알고 한 선택과 뭣도 모르고 한 선택의 책임이 같을까? 최선과 차선의 선택의 무게도?
"작가는 아무리 척박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인간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의지만으로는 어려운 일도 있다는 것을 우린 알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불가피의 무게조차 나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과연 후회가 없는 삶이라는 게 존재하긴 할까? 후회하지 않으려 후회하지 않는 척 하고 있지는 않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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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에는 의무가 따르는것처럼 선택에는 책임이 따라붙는다. 그것들은 하나로 묶어진 세트상품처럼 따로 떼어놓고서는 온전히 설 수 없는 동의어라고 볼 수 있을것이다. 선택을 한다는것, 우리는 매순간 순간마다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내가 한 선택은 다른 수많은 경우의 수와 만나 내게 예상했던 결과물을 가져다 주거나 혹은 전혀 뜻하지않았던 결과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결과물을 예상하지 못햇다하더라도 내 선택에 따른 결과라면 결국에는 내 책임이라는것은 분명한다. [특별한배달]은 [시간을 파는 상점]의 작가 김선영님이 바로 그 선택과 책임을 말하고자 하는 내용으로 기억된다.어떤일을 할때 내가 좋아서 내가 선택해서 한 일이라면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수있지만 자의의 선택이 아닌 타의에 의한 선택으로 잘못된 결과가 나오게된다면 아무런 갈등없이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기가 어려울것 같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큰 선택을 하게된다면 바로 그 자발성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될 것이다. 내가 원해서 사는 삶과 타인의 요구대로 사는 삶, 사이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거리가 있다.
태봉은 잉여인간을 꿈꾼다. 아니다 꿈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태봉의 꿈이 잉여인간이 아니라 이미 태봉은 잉여인간으로 분류가 되어버린지 오래이기때문에 그저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뿐이다. 그러나 어른들이 저들의 잣대로 소수의 엘리트그룹과 대다수의 잉여와 초잉여, 쓰레기로 분류를 해놓고도 그저 쉬쉬하기에 급급해 태봉이 장래의 꿈에 떡하니 써놓은 잉여인간이라는 말을 담임의 분노를 사고도 남음이 있었다. 거기에 보태서 잘나가는 진석구를 죽사발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벌어지자 담임은 수시로 태봉을 건드리는데 재미를 붙인 사람마냥 조용히 살고자하는 태봉을 내버려두지않았다.
어느날 쪽지한장 싸놓고 사라진 어머니와 갈수록 무력해지는 아버지 그 사이에서 태봉은 존재의 이유를 찾을수없었다. 그냥 살아있으니 사는것이지, 삶에 커다란 목적도 이유도 없이 어차피 트랙에서 제쳐진 상태였고 그 다음 수순은 운동장에서조차 퇴출되는 시기를 기다리는것, 그것이 태봉이 본인을 잉여인간으로 단정짓는 원인이었다. 한때는 잘나가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와 웃음이 떠나지않던 집, 공부며 태권도며 신나라고 하던때가 태봉에게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움츠려든 어깨는 점점 엄마를 힘들게했고 어느날 엄마는 아버지가 투명인간이 되는것을 지켜볼수 없다며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누가 투명인간인데? 나는 나는!!" 소리내지 못한 태봉은 절규는 조용히 스러져갔다.
완벽해야한다. 공개입양을 한 엄마의 기준에서 벗어난다면 언제 어느날 상하처럼 파양이라는 결과를 불러올지모른다. 엄마의 요구에 맞게 엄마의 눈높이에 맞게 엄마의 기준에서 조금도 벗어나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은 슬아에게 커다란 스트레스로 작용해 기면증이라는 병을 불러왔다.내 몸을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 이런 상태라면 엄마에게 들키는것은 순간이다. 그러기전에 나를 재조립해야한다는 생각이 슬아의 머리를 잠식하고 슬아는 태봉에게 손을 내민다. 하나의 선택은 다른 수많은 경우의 수를 양산하고 그 순간은 나를 또다른 나로 거듭나게 한다는 슬아의 주장은 신문에 난 기사와 함께 태봉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또다른 내가 있을수있다는 슬아의 주장은 얼마전 읽은 선자은님의 [제2우주]를 떠올리게 했다. 다른 공간에 또다른 선택을 한 내가 있을수 있다는 전제하에 주인공이 또다른 세계에서 나와는 전혀 다른 또다른 나를 만나게되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서 상이한 결과가 나오는것을 받아들인다는 설정의 글이 [특별한배달]의 슬아의 주장과 맞물려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나와 똑같은 내가 다른 시간에 존재한다..
중국집 배달원이 깜쪽같이 사라졌다. 도로에 남은 구멍만이 사고를 짐작하게할뿐 오토바이운전자는 형체도 없이 없어져버렸다. 슬아는 그 운전자가 웜홀을 통과해 다른 시공간에 다녀왔을것이란 확신이 든다. 꼭 그를 찾아서 그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고 그러기위해서는 태봉의 도움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툴툴대던 태봉이 결국 슬아의 요구를 받아들이게되고 실종됐던 오토바이운전자에게서 웜홀을 통과했었다는 확답을 받게되자 슬아는 이번에는 태봉과 함께 그 웜홀을 통과하자는 제안을 하게된다.
태봉은 무기력한 아버지가 싫었다. 언제부터인가 슬금슬금 태봉의 눈치를 살피게 된 아버지가 요즘 들어 하고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태봉의 눈에 들어온것은 금속탐지기, 아버지는 금광을 찾고 있는것일까.. 태봉은 아버지가 간직하고 있던 일기장을 읽으면서 아버지가 느끼는 마음들을 들여다보게 되고 아버지가 지금 하는 일이 폐휴대폰을 수거해 배터리를 분리하고 금속을 채취하는 일이라는것을, 버려진것에 순금이 더 많다는것을 확인해서 순금을 만들고싶어하는 아버지의 열망을 이해하게된다. 아버지에게 웜홀로 여행을 떠나기전 작은 선물이라도 하고싶었다. 근수에게 부탁해서 폐휴대폰을 수거하고 아버지를 위해 저녁밥을 짓는것, 그것일지라도.
이제 드디어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가장 특별한 배달을 하러 갈 시간이 되었다. 슬아와 함께 웜홀을 통과하는 시간, 태봉은 파노라마처럼 눈앞의 지난행적들이 스쳐지나는 것을 보아야했다. 엄마의 손을 외면하는 태봉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가 태봉의 손을 놓은것이 아니라 태봉이 엄마를 외면한것이었다. 그래놓고 늘 엄마를 원망했었다. 전화해서 태봉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엄마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그래야할것 같았다. 태봉의 순간들이 그랬다면 슬아에겐 슬아가 엄마를 처음 선택하던 순간의 모습이 보였다. 슬아는 늘 엄마의 요구때문에 슬아가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의 요구이전에 슬아는 슬아안에 있던 욕심이 참 많았었다.엄마의 선택이 아닌 슬아 자신의 선택이었었다. 그래놓고 힘들다고 엄마의 욕심때문에 숨이 막힌다고 소리를 질러대며 책임을 전가시키고 싶어했었다. 그래도 상하를 파양시킨것은 엄마의 잘못이다.그것은 엄마의 잘못이다..
보육원이 붕괴되고 보육원생 한명이 사망하고 한명이 실종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실종된 보육원생의 이름은 바로 상하였다. 믿을수없는 사실을 확인하기위해서 보육원을 찾은 슬아는 상하의 파양에 얽힌 진실을 들을수있었다. 친아버지가 상하를 데리고갔다는것과 그리고 친아버지의 친절뒤에 숨은 가증스러운 사실을 알고 상하가 이곳으로 도망쳐와 숨었었다는것.. 슬아는 실종된 상하가 웜홀을 통과해 다른곳에 있을것이라는 믿음을 가진다. 이곳과 상하는 맞지않았다. 온갖 규칙들이 난무하는 이곳은 자유로운 영혼이고자했던 상하에게는 숨막히는 공간이었을것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우주에서라면 자유로운 영혼 그대로의 느낌을 가지고 상하는 웃으면서 행복할것이라는 믿음만이 슬아를 버티게 해 줄 것이었다.
슬아와 태봉이 진짜로 웜홀을 통과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않다. 슬아와 태봉 그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돌아볼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고 그 계기가 발현된것이 바로 그 웜홀이라는 것이 중요할뿐이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태봉과 입양과 파양이라는 상처앞에서 힘겨워하는 슬아가 세상과 마주하기위해서는 그들안에 곪아있는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필요한 조처를 취하는것이 필요했고 그들은 그 해답을 웜홀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찾게된다. 폐휴대폰을 수거해서 분리된 금속으로 순도높은 미니바를 완성하게 된 태봉의 아버지가 태봉에게 그것을 선물로 주고 그 아버지의 마음을 받은 태봉이 붕괴된 보육원에 미니바를 성금으로 내놓는것..그것은 단순한 금이 아닌 아버지와 아들사이로 흐르는 애정이었다.우리는 살아가면서 꽤 많은 선택들을 하면서 살아갈것이다. 만족스러운 결과물로 다가오는 선택도 있을수 있겠고 때로는 상처로 남을 선택도 있겠지만 선택에 책임을 다하면서 사는것, 그것이 선택을 올바르게 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
![]() 일전에 자음과 모음의 제 1회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한 김선영 작가의 시간을 파는 상점이란 책을 흥미있게 읽은 적이있다. 아들이 커감에 독서할 책들을 살펴보다 보니 생각보다 청소년들이 읽을 책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만난 책이라 반가웠다.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지나는 아이들의 이야기라 그런지 아름답지 않은 모습도 그 일부임을 인정하며 읽었던 적이 있었는 데, 김선영 작가님의 청소년들에 힘이 되어주고 싶고 힘을 받는 소설을 쓰고 싶은 소망을 가진 작가가 또 새로운 책을 내었다고 하니 어떤책인지 궁금해졌다.자음과 모음에서 나온 청소년 문학 27번째 책.제목은 특별한 배달. EBS 라디오 연재소설을 통해 낭독되어 반응이 좋았다는 소설이기도 하다.헬멧을 쓴 소년의 모습과 그 뒤의 소녀의 모습뒤로 보이는 우주의 모습같은 표지의 그림은 마치 우주를 관통하는 듯한 모습이다. 마치 요즘 아들이 한참 빠져있는 sf물을 연상시키는 표지. 궁금증을 일으키는 책.소설속에서 아이들의 일상과 과학이 절묘하게 어울려 평행이론,웜홀 등의 어렵다면어려울수 있는 과학이 잘 스며들어 있었다. 주인공 태봉과 슬아의 일상은 둘다 평범하지는 않다.공통점이래야 찾아볼수 없고 만날일도 없는 그들이 슬아의 기면증으로 인해 태봉과 우연히 만나게 되고불우한 환경탓에 학습보다는 퀵서비스등의 하며 시간을 보내는 잉여인간이 되고 싶다는 태봉과 명품가정을 꿈꾸는 부모님을 두었고 전교일등에 모범생인 슬아는 알고보면 입양아에다 같이 입양된 남동생 상하가 갑자기 파양당하자 자신도 그럴지 모른다는 생각에 극도의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기면증으로까지 나타난다. 태봉의 아버지가 폐휴대폰에서 금을 찾아내어 아들에게 골드바를 선물하는 장면은 아들을 위하는 부정이 느껴져 찡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슬아의 엄마가 수녀님께 보낸 편지에서 보인 감정 또한 공감가는 바이기도 하다. 아이들만 불안한것이 아니라 어느새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들의 완벽하지 못한 모습에의 동조라고 할까? 태봉과 슬아의 불안감과 현재에 대한 고민들을 통해 성장의 통로로 택하게 된것은 웜홀이라는 공간.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타고 태봉과 슬아가 웜홀을 통과하면서 알고 싶었고 알게 되었던 것들은 스스로를 위한 특별한 배달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할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늘 자신의 인생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일이리라. 이렇게 질문을 해본다. 내가 있는 지금 이 자리는 나의 선택, 나의 책임 태봉과 슬아의 특별한 배달은 어느새 나에게도 배달이 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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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버린 어머니와 실직하여 무기력한 아버지 때문에 장래희망을 잉여인간이라고 말하는 태봉과 전교1등에 빼어난 미모를 가졌음에도 스트레스로 인해 기면증을 앓고 있는 입양소녀 슬아가 있어요. 이들은 버려지고 파양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힘들어하고, 지금의 현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태봉과 슬아는 웜홀을 통해 지금의 자기 모습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닌 오로지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주어진 현실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고 성찰하게 된답니다. 그와는 반대로 태봉의 친구 근수와 고래삼촌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다르네요. 지방에서 올라와 아르바이트를 하고, 농사도 지으면서 래퍼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근수와 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지만 사고 당일의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 고래삼촌은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어요. 아이들은 흔히 생각을 합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야’ ‘난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자신들이 선택할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어른들이 선택을 도와주고, 그것을 따라온 것 역시 아이들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그런 선택들이 모여 운명이 되고, 그 선택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져야한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책을 통해 알았으면 좋겠네요. 이 책은 선택과 책임, 운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건 비단 청소년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에 주어진 현재의 상황을 회피하지 말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혹 그 선택이 옳지 못한 결과를 낳더라도 거기에서 또 다른 교훈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