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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은 모든 것을 수용할 것 같은 따뜻함이 있다. 또한 모든 것을 품어줄 것 같은 엄마의 품속이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족간의 갈등이 없잖아 있는 걸 알 수 있다. 한 가족이 집안에 모여 있지만 어떨 때 보면 각자의 방에 들어앉아 자신만의 공간속에서 자신만의 생각을 한다. 아무리 가족이어도 속을 다 알 수는 없는 법이다. 모든 것을 다 말할 것 같은 가족도 한두 가지의 비밀을 간직하기도 하고, 마음 속엔 저마다의 생각들로 가득차 있다. 한 가족이되 가족의 속마음까지는 다 알수는 없는 법. 고종석 작가의 신작은 우리들에게 가족에 대한 내밀한 이야기를 각자의 독백 형식을 빌어 들려주고 있다.
사회과학 서적과 외국어소설을 펴내는 출판사의 편집장으로 있는 한민형이 첫번째로 말하는 인물이다. 그는 '책은 세상에서 나를 격리하는, 아니 보호해주는 벽이다. 책속의 추함이 현실의 추함을 따라잡는 법은 거의 없다. 책속의 비참함이 현실의 비참함을 넘어서는 법도 거의 없다. 책은 내 아편이다. 술만큼이나.' (9페이지) 라고 자조를 하며 프랑수아즈 파리스의 『행복한 가족』이란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다. 그가 이 책을 읽는 이유, 과연 행복한 가족이란 존재하는 것인가를 묻는다. 행복해 보이는 부부지만 각자 마음속엔 다른 마음을 조금쯤 숨겨두고 있다는 걸. 민형이 만나는 사람들은 술친구들이다. 마음을 터놓는 이들도 술친구들 밖에 없다. 어머니를 보지 않은지는 오래고 아버지도 회사에서만 업무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는 술로 자신의 마음을 달랜다. 하지만 24시간 술을 마셔도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달랠 길이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그들은 서로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독백을 읽고 있다보면 그들은 민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용서할 수 없었고, 잊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민희를 추억한다. 그러면서 각자의 생각에 골몰한다. 이어 독백하는 사람은 민형의 아버지와 민형의 어머니, 민형의 아내 순으로 이어진다. 또한 그 집에 입양되었던 민형의 또다른 동생 영미와 영미와 같은 나이인 민주, 또는 민형의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민형의 후배와 민형의 장모, 민형의 딸, 마지막엔 이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민희가 남은 이야기를 마친다.
내 위선은 지혜로운 위선이다. 가족들 사이에 평화를 만들어내는 위선. 가족들 사이에 사랑을 만들어내는 위선. 비록 그 평화가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듯 위태위태한 것이고, 그 사랑이 보기에만 아름다운 치장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82페이지)
하기야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어떻게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153페이지)
내 마음은 탈옥중이지만, 그 탈옥은 미완료 상태다. 아니 내 몸은 마음의 감옥에서 탈옥중이지만, 그 탈옥은 아직 진행중이다. 마음의 감옥은 완전히 허물어지지 않았다. (155페이지)
![]() 제목이 제대로 찍혀있지 않는 책이 왔다. 왠지 일부러 그런것 같지 않는가.
책 속에서 그들이 말하는 독백은 자신의 이야기에서부터 마지막에는 늘 민형에게로 향하고 있다. 또한 민희에게로. 사람은 다 자신의 일이 먼저인 법이고, 모든 생각들도 자신의 위주로 이어진다. 책에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나오고, 어쩌면 우리가 우려한 일들이 이어지기도 한다. 한 가족이어도 자신이 먼저인 가족,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때 그에 대처하는 법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위선으로 가족을 대하고, 또는 불편한 진심을 내비치기도 한다. 서로 다른 곳에 살면서 마음의 허무를 느껴도 결국엔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게 또한 가족이 아닐까 한다. 따로 또 같이 제각각 다른 삶을 사는 것 처럼 보이지만, 독백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져 있듯 그들의 마음은 조금씩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 두꺼운 책은 아니지만 고종석 작가가 말한 특별한 단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른 작품에서 보지 못한, 생소한 아름다운 단어들이 자주 사용되고 있었다. 그 단어들이 주는 생소함을 찾아보는 기쁨이 컸고, 새로운 단어들이 나올 때마다 색연필로 밑줄을 치고 있었다. 그만큼 문장과 함께 새로운 단어를 알수 있는 책 읽는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나는 다만 작가의 절필 선언이 안타까울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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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하고 수용하기만을 바라는 건 나의 숨구멍을 죄여오는 것과 같다. 핏줄이니까 으레 그러는게 당연하다는 당위성은 마치 하나의 사회적 규범으로 천착 되어 사람들의 숨을 막히게 한다. 나 역시 '가족이니까' 라는 당위성을 갖다 붙이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살다 보니 그게 아닐 때도 많더라는 것이다. 이게 아닌데 싶은 부정의 의미는 상대방의 당위 앞에서 철저히 파괴되고 말아버리지만 말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족이라는 이름 뒤에 그럴듯한 허울을 부여한 채 표리부동한 자세를 고수해왔는가. 이제 조금은 자유로울 때도 되지 않았나. 그렇다고 해서 가족과 척을 지라는 건 아니다. 다만 조금은 이 갑갑한 굴레를 벗어버릴 필요성이 있다는 거다. 脫가족화가 가속화되는 사회적 현상을 대놓고 비난할 필요는 없다. 기름과 물처럼 섞이지 못하는 반대성질의 물질이 있는 것처럼 사람 사이에도, 그런 경우는 허다하다. 심지어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다. 한 개인의 모태는 가정이라는 울타리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울타리가 때로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자신을 사정없이 찌를 때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알지 않나. 관습적인 가족주의만 고집할 게 아니라 다각도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가는 게 우리가 가족 안에서 원하는 진정한 '가족주의'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행여 오해를 낳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 작품이 이런 점을 부각하고 있는 건 아니다. 순전히 나의 개인적 견해이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이 가족에게 닥친 아픔은 무엇일까. 시종일관 나를 점령했던 물음이다. 빨리 알아내고 싶어서 페이지가 휙휙 넘어가다가도 멈칫거리기를 반복했다. 알고 싶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대체 무엇이 이 가족을 이토록 단절하고 폐쇄적으로 만들었을까 궁금하다가도 너무도 아픈 진실을 엿보기 싫은 양가적인 감정이 들쑥날쑥이었다. 저마다의 목소리와 관점과 시선으로 서로를 말하는 고백 형식의 글은 『해피 패밀리』라는 제목과는 역설적인 구도를 띈다. 나와 당신의 거리를 수치로 환산할 수 없듯이 가족의 거리 또한 비슷하더라. 가장 잘 아는 이들이 핏줄로 엮인 가족이라지만 실상은 남보다 못한 가족도 허다한 게 현실이다.『해피 패밀리』 속 가족이 남보다 못하다는 건 아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각자의 기준에서는 최선을 다해 서로를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보인다. 다만 속 안에 곪아있는 상처는 모르는 체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외상에만 골몰하는 모습들이 안쓰러웠을 뿐이다. 하나같이 자신의 아픔이 먼저 보이는 게 현실이다. 아무리 상대방을 위한다 해도 우선시되는 건 나의 상처, 나의 아픔, 나의 안위다. 한민형부터 시작해서 부모님, 누이, 아내까지, 그들 개인이 훑는 궤적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보다 더 예리한 아픔과 고통을 수반하고 있다. 개인이 될수록 철저한 고립 속으로 빠져드는 이들의 상처는 그래서 보는 나에게도 아프게 다가왔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으로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마음이다. -80p
자주,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의 모든 게 마음먹은 대로, 일사천리로 움직여주길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마음은 모질게 현실은 뜨뜻미지근하게, 마음은 순하게 현실은 찬바람이 쌩쌩 불어대는 살얼음판과 같은 양립적 상태가 지속된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든 손가락 하나로 조종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마음이라는 감정을 가진 덕분에 누구를 미워하고 상처 주고 반대로 정을 주고 사랑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마음을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인간미 없는 세상이 또 있을까. 소설은 이성과 감성, 머리와 심장이 따로 노는 이중구조를 가족 개개인을 통해 적나라하게 투사하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평화로운 일상 뒤에 가리어진 이 가족이 겪은 상처는 삭을 대로 삭아서 이제는 먹지 못할 정도로 상해버린 음식을 바라보는 심정과 같았다. 꼭 한번 맛보고 싶은데 먹어버리면 큰 탈이 날 것 같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상을 지울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의 지속은, 상해버린 음식은 냅다 갖다버리고 새로 장만을 해야지 같은 잠깐의 희망을 품게도 한다. 그런데 열심히 요리해서 막상 입안으로 넣어본 그 음식은 상상했던 그 맛이 아니었을 때, 우리는 젓가락 놓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뭘까.... 진짜 모르겠다... 저마다의 가족과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내밀한 고백 앞에서 그리고 이 가족이, 혹은 친척이라고 해야 할까? 한민형의 딸 지현이의 궁금증처럼. 아무튼 그들을 처절한 개인적 고립 상태로 내몬 사건이 결국은 가족에 의해서라는 게 당연하다 받아들이면서도 섬뜩하다. 가족의 경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그리고 가족은 어디까지 허용되고 침묵하며 순응하고 묵인할 수 있을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명백히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묻어두며 가는 이들의 독백이 한 여인의 소거로 가능했던 이유조차 '가족'이어서라는 게 왜 이리 가슴 아릴까. 난 여전히 모르겠다. 가족을 향한 나의 수용범위, 이해의 경계선. 아마도 이런 물음이 무색하리만치 경계의 끝은 없겠지만 말이다. 참, 답답함과 동시에 착잡한 우리 시대 가족을 보는듯하다. 언제 터져버릴지 모를 시한폭탄(물론 한민형의 가족처럼 거북하진 않을지라도)을 안고서 담담하게 서로를 관조하며 살아가는 감정의 상실과 결여로 하루하루를 아프게 연명해가는 이들.... 소설의 엔딩을 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마 최소 몇 가닥에서 몇십 가닥은 나와 안녕을 고했을 것이다. 답답하다. 책 한 권을 읽고 숨 쉬는 게 이리 답답하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왜 숨을 쉬는 걸까. 내가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겠다고 들이마시고 내쉬는 반복운동을 참 무던히도 하고 있구나 싶었다. 아, 어쩌지. 이 소설을 어떻게 '이야기 해야할까' 같은 부담만이 며칠 내내 나의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그저 답답하다. 묵직한 돌덩이를 척하니 올려둔 듯. 가족이잖아. 그래 가족이라서 얼마나 많은 모순과 부조리와 비윤리적인 행태를 우리는 묵과하고 지나치던가. 그럼에도 가족이니까 눈 한 번 꼭 감을 뿐이다. 가족, 가족... 어쩌면 이들보다 더한 상처와 아픔을 가진 가족도 세상에는 너무 많을 것이다. 그리고는 깊숙한 흙구덩이에 관을 묻듯이 영영 묻어두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 한숨만 나온다. 뭐든 안고 가야 하는 생生의 무게가 갑자기 나를 훅 덮쳐오는 기분이다.
내가 읽어본 가족소설 중 가장 가족소설다우면서도 허무하고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이 소설 안에서 그래도 가족의 따뜻함을 보았네 같은 마음에 없는 소리는 하지 못하겠다. 가족의 이야기를 누가, 고종석보다 더 차갑고 지리멸렬하고 깊고 임펙트 있게 쓸 수 있을까. 아쉽다. 자신의 글이 세상을 바꾸지 못함을 알기에 절필 선언을 한 그가, 이제서야 만난 그의 글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세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가족 구성원의 한 사람, 독자의 마음을 흔들었다는 것은 알아주었으면 감사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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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해피 패밀리>를 읽고
<해피 패밀리>라…. 도대체 모노가미에 찬성표를 던질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이 전투적 자유주의자가 하필 무슨 패밀리 얘기를 들고 나왔을까. 트위터에서 고종석을 먼저 안 이들은, 그를 반대하거나 팔로우하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그의 <해피 패밀리>(문학동네, 2013)를 읽어보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오늘 종일 집에서 어제의 숙취를 달래면서 어제 시작한 이걸 후딱 다 읽었다.
고종석이 아무리 못되게 얘기를 하고, <노빠> <문빠>들을 사납게 조지고, 드잡이하듯 <박빠>들을 윽박지르더라도, 그는 우선 휴머니스트이다. 가령 그가 최근 상재한 이 소설 108쪽 같은 곳을 보라. 나는 지하철에서 그만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휴머니즘이라는 게 인간중심주의를 뜻하는 것이라면 고종석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가령 이 아름다운 소설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런 구절을 보면. “그렇지만 꽁치가 내 식구라구? 어떡하지…… 나 꽁치구이 좋아하는데……” 문득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부 박동환의 물음을 떠올렸다. “나의 입 안에 들어 있는 생선구이는 즐거움인가 고통인가?”(<안티 호모에렉투스>) 이 정도의 휴머니즘이라면 그건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우주로 무한 확장하는 우애이다.
내 멋대로 평하자면, 이 소설은 <우애>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족처럼 아주 가까운 살붙이에서부터 온 우주까지 확장해갈 수 있는 <우애>에 관한 서늘한 열정…. 나는 그렇게 읽었다. 그 <우애>는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휴머니즘>일 수도 있지만, 우리를 옭아매는 신경증적인 관습에 적대하는, 우주를 바라보는 작고 푸른 점의 관점일 수도 있다. 그 열정이 왜 서늘한가. 어떤 우애는 인습으로부터 공격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묻는 것이다. 우애가 신경증인가, 인습이 신경증인가.
<해피 패밀리>의 목차를 열고, 나는 잠깐 멋대로 상상했다. 쿤데라의 <농담>같은 다중 화자 소설처럼,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이름이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지은이는 여기에 등장인물의 생몰연대를 괄호 안에 더해놓았다. 가령 ‘한민형(1980~)’, ‘한진규(1950~)’ 이런 식이다. 모든 인물이 <생>만 있고 뒤가 열려있는데, 마지막 ‘한민희(1977~2006)’만 <몰>의 숫자로 닫혀 있다. 이건 기호학을 공부한 이의 취향이자 놀이일 것이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이 목차를 열고 이 시니피앙들의 시니피에를 상상해보는 게 재미있다. 한씨 성을 가진 이들은 물론 한씨 패밀리일 것이다. 친절한 생몰연대는 누가 아빠이고 누가 누나, 오빠, 여동생일지 짐작하게 해준다. 심지어 엄마도 짐작이 간다. 아빠로 추정되는 이와 생몰연대가 근접한 여자 이름. 그런데 그 생몰연대 비슷한 시기에 여자 이름이 하나 더 있다. 또, 한씨 패밀리일 것 같은데 돌림자를 쓰지 않은 여자 이름이 하나 더 있다. 이 패밀리의 비밀은 이들의 삶 어딘가와 얽혀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빚은 사건의 심연에는, 유일하게 <몰>로 닫혀 있는 스물아홉 살 민희의 죽음이 놓여 있을 것이다. 상상이 여기까지 이르자, 잠깐 등골이 오싹한다. 그러니까 고종석은 한씨 패밀리와 주변 두서넛 인물의 이름과 생몰 연대라는 기호를 통해,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의 첫 머리에서 들려준 것(“복수는 나의 것” 말고)과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고종석이 목차에 정성껏 배열해놓은 시니피앙에 이런 시니피에가 담겨 있다는, 좀 속물스러운 상상에 바탕한 이 해석은 지지될 수 있을까? 궁금하다면, 소설의 목차를 넘겨야 한다.
세상의 모든 가족은 죽음을 적어도 몇 개씩은 안고 살아간다. 어차피 가족을 구성한 이들은 시간의 부름에 따라 죽음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새로운 가족의 이력을 만들어가는 게 우리의 운명이니까. 이 소설은 내용을 요약하면 영화의 스포일링처럼 독자와 지은이에게 큰 실례를 저지르는 일이 된다. 서로 다른 등장인물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한걸음씩 <그 일>로 다가가는 다중 화자 구성이 이 소설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그 일>이 궁금하다면, 수고스럽지만 책장을 마지막까지 다 넘겨야 한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만 섞이는 게 아니라, 프랑수아즈 파리스라는 정체불명의 작가가 쓴, 소설 속에서 출판사 편집장 한민형이 출간한 소설인 <행복한 가족>의 몇 페이지들도 다중 화자들이 펼쳐 읽는 형식으로 섞여 들어온다. (프랑수아즈 파리스는, <Paris>가 지명일 때는 파리로 읽지만 인명일 때는 파리스로 읽는다는, 고종석의 언어학적 지식에 관한 수집벽이 배어 있는 그의 프랑스 국적 아바타이다. 하마터면 나는, 이것 참 재미있겠다 싶어 인터넷 서점에 이 책을 주문할 뻔했다.)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괄호로 생이 막혀 있는 유일한 인물인 한민희에 관한 장은 일기체 문장이다. 죽은 사람의 일기장을 뒤적거리는 듯한 섬뜩함으로 인해 가슴 한 켠을 아리게 만드는, 신산하고 서늘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더 이야기할 게 없다. 절대 뒤쪽부터 뒤적거리면, 망한다.
군더더기 한 가지. 개인의 편견이지만, 나는 더러 전지적 작가의 소설에 대해 소심한 불만을 품고 있다. 나는 거기서 <신이 만든 세계의 비대칭성>이 잘 읽히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그건 고종석뿐 아니라 다중 화자의 구성을 취한 쿤데라의 <농담>을 읽으면서도 똑같이 느낀 난점이었다. 가령 루드빅과 헬레나와 야로슬라브가 같은 어법으로 고민하고 흔하다고 할 수 없는 언어 표현을 공유할 때, 이들은 <신이 만든 세계의 비대칭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대신 전지적 작가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아바타가 아닐까, 하는 혐의를 걸고 싶어진다. 하긴, 이건 쓸데없는 불만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지닌 선의 공통분모가 곧 신이듯, 다중 화자의 공통분모가 전지적 작가의 세계관이 되지 말란 법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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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가족이라는 말 앞의 꿈밈말에 우리는 누구나 해피..행복한.. 이란 말을 붙이고 싶어할 것이다. 이 '행복한'이란 수식어를 자연스럽게 붙이기 위해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며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족이라는 말 속에는 사랑과 따듯함 포용.. 이러한 안식처라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녹아있지만 반면 가족이기때문에..라는 관계에 매어 그저 그렇게 그 끈을 놓치 못한 채 인내하고 견뎌야하는 것 또한 가족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를 만났다. 여기에 한 가족이 있다.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철저히 자신의 입장을 얘기한다.그렇기에 솔직하고 어찌보면 이기적인 그들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10명의 식구(?)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독백의 형식을 빌어 솔직하게 이야기해나간다. 그들이 얘기하고 있는 가족은 어찌보면 '같이' '함께'라는 대명사로 대변되어왔던 가족의 의미들이 점점 개인적이면서도 이기적인 관계가 되고 있는 현실을 얘기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외면하고 싶지만 가족이기에 외면할 수 없었던 한 사건이 모두의 맘속에 들어앉아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웬지 그 사건으로 모든 원인을 돌리는 듯 한 느낌.. 과연 어떤 일이있었기에..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하지만 가족이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사건으로 자신을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또한 하게 되었다.
고종석은 <독고준>으로 만났었다. 소설이었지만 소설이라는 생각보다 작가의 다양한 가치관이나 사상을 엿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는 기억이다. 그 소설에서도 한 가족이 나오는데 그 가족 또한 일반적인 이력을 가진 가족은 아니었다. 일흔넷의 나이에 베란다에서 투신을 해 자살을 택한 아버지 독고준,레즈비언인 큰딸과 이혼남과 함께 살고 있는 작은 딸..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에게 건네 받게 된 아버지의 일기장의 내용이 바로 독고준 소설의 내용이었다. 가족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이 40여년간 느꼈던 , 옳다고 믿었던 그날그날의 흔적들.. 그것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해피패밀리>에서는 가족의 불편한 진실들을 말하고 있다. 아들 한민형.. 사람보다 책을 더 좋아한다.. 핏줄은 사랑의 통로가 아니다.. 라는 생각에 가족들에게 조차 맘을 열지 않는다. 사람들에게서 그 사람의 악과 어리석음을 먼저 본다. 그러면서 사람의 선과 현명함을 먼저 보려는 낙관적인 아내를 유일하게 사랑한다.이러한 그의 성향은 원래부터 그런것이었다기보다 그 사건 이후 더욱 그렇게 되어버린 듯 하다. 이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한진규..자식에게 기대를 거는 것, 세속적으로 자신보다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을 인지상정이라 생각한다. 아이에게 자신을 투사해 자신의 좌절된 욕심을 채워보고 싶었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위장된 대리만족을 위한 사랑.. 사랑이라는 말에 결코 값하지 못하는 사랑이었다고.. 담담히 고백을 한다. 어머니 민경화..자신의 동창이 죽음을 당하자 그 딸을 입양해 키우는 그녀.. 하지만 그녀를 자식으로 대하기보다는 필요에 의한 객식구처럼 대하는 그녀.. 그러면서도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모습.. 남편이 법조인이 되지 않아 대학동창모임에도 나가지 않는 . 인격이나 취향도 조건이라는 생각에 자신이 신분이나 계습을 조건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또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속물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한민형의 부인인 서현주..거의 부모와 인연을 끊고 지내는 남편 한민형과 시댁의 사이에서 현명하게 잘 처신하여 양쪽의 신뢰를 모두 얻고 있는 그녀.. 그녀 또한 자신의 그러한 행동들을 위선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자신의 위선은 '지혜로운 위선'이라고 말한다.. 가족들 사이에 사랑을 만들어내는 위선.. 그 사랑이 보기에만 아름다운 치장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들의 딸들인 한민주와 한영미.. 영미는 입양이 된 딸이고 민주는 민경화의 딸이니지만 민주의 출생에 대한 진실은 그 누구구도 모른다.. 어머니 민경화 자신도 혹시..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동갑내기였지만 자라면서 민주는 영미에게 고약하게 굴었고 그러한 상황은 식구들은 그저 모른 척 그려려니 한다. 다만 한민형만이 영미에 대한 부당한 식구들의 처사에 손을 들어 주었을 뿐이다. 결국 영미는 대학을 졸업하고 행시에 합격하면서 소위 말하는 고급공무원이 되었고 그때부터 어머니 민경화의 시선은 좀 더 부드러워진 듯 하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큰딸 한민희와 한민형의 딸 한지현... 그들 모두는 가족이기에 그 사건을 받아들이고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자위한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가족의 열기는 식어가고 균열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위태롭게 그들 가족의 울타리는 지탱되고 있는 듯 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자신들의 상황이나 입장을 정당화하며 합리화하고 있다는 느낌때문에 맘이 불편하지만 또 어찌보면 혹시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지만 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부분을 대신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기도 한다. 지극히 속물적인 모습을 보이는 이들의 모습속에서 나 또한 그런부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생각말이다.
어린 지현이가 궁금해서 아빠에게 엄마에게 그리고 외할머니인 강희숙에게 물어본다. "우리 식구는 몇 명이에요?" 그 질문에 대해 아버지인 한민형은 지금 엄마 아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우리 다섯이 식구라고 하고 엄마 서현주는 고모들 친할머니 할아버지들 모두가 식구라고 말하지만 식구와 친적이라는 애매한 경계때문에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못한다. 그러자 외할머니는 말한다..따지고 보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식구라고.. 위로 올라가면 조상이다 똑같을 테니까.. 어린 지현이는 이런 할머니의 말을 잘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할머니는 아빠, 엄마와는 다르게 바보가 아닌 듯 했다. 식구.. 가족..그것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 하나하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외로운 존재들인 듯 하다. 그들이 비로소 함께..한다는 것이 가족이라는 울타리일 것이다. 하지만 피를 나눈 우리들뿐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함께라고 말하는 듯한 그리고 그것이 제일 맘에 와 닿는 대답이라는 듯한 이 손녀와 할머니와의 대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생각을 또 한번 하게 해 준다. 점점 그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는 듯한 가족이라는 관계.. 그것을 끝까지 놓치않기를 바라는 우리의 맘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절필을 선언한 작가의 마지막 소설.. 그렇기에 이 작품을 작가는 막내자식이라고 말한다. 저널리스트로 더 알려진 그의 기사나 다른 글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직접적이고 간결한 그의 이야기들이 많이 아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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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늘 아래, 일반적인 중산층의 가정. 중산층이 어느 정도의 소득 수준인지 요즈음은 가늠할 수 없지만, 부모 모두 대학을 나왔고, 자식들 중 모두 대학을 나왔고, 자신의 일을 한다. 심지어 친구의 딸을 입양해 자식(?)처럼 키우는 가정은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하고, 화목한 집안이라 생각할 것이다. 출판사 사장인 아버지와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친 어머니. 아름다운 누나와 공부 잘하는 아들 그리고 천방지축이지만 귀여운 여동생까지. 어쩜 저렇게 자식들을 잘 키웠냐고 3자들은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까지 들어다 본다면... 과연 그들은 화목한 가족의 본보기였을까?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는 한민형은 명문대를 나왔음에도 평범(?)한 편집장의 인생에 만족한다.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야망이 없었던 한민형은 24시간 술을 마시라고 하면 마실 수 있는 사람이다. 누나의 친구와 결혼한 한민형의 목소리가 소설의 첫 이야기다. 이후 아들이 일하는 출판사의 사장인 아버지 한진규, 아들이 자신을 언제부터 싫어했는지 모르겠다는 고등학교 역사 교사였던 어머니 민경화, 한민형의 아내이자 고등학교 수학 교사인 서현주, 어머니의 친구였던 민경화에게 입양되어 키워졌지만 식모(?)처럼 일을 했고, 이후 한민형의 반항으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한영미, 오빠가 영미를 자신보다 더 예뻐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던 한민주, 한민형의 대학후배이자 같은 출판사에서 일하는 이정석, 서현주의 어머니이자 한민형의 장모인 강희숙, 한민형의 딸 한지현 그리고 한민형의 누나이자 이젠 이 세상에 없는 한민희까지... 각자의 입장에서 독백형식으로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
다복하고 화목해 보이는 이들 가족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읽는 동안 왜라는 질문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았다. 한민형과 어머니 민경화가 왜 사이가 좋지 않은지? 그리고 한민형은 왜 누나인 한민희와 관계를 가진 것인지, 어떤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아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가족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그들은 침묵으로 사건을 덮어버린다. 그들 가족은 언제부터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언제부터 그 감정의 골이 생겨난 것인지 알 수 없다. 조금만 더 그 부분이 친절했다면 한민형과 한민희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사건을 벌여 놓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민형이나, 큰 일이 벌어졌지만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던 이름뿐인 가장, 친구의 딸을 입양해 놓고 가정부처럼 대하는 민경화의 모습을 보면서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그림 같은 화목한 가정을 꿈꾼다. 언제나 웃음꽃이 피고 아이들은 구김살이 없으며 부모는 인자하다. 아이를 때리거나, 상처 입히는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가정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의 거짓 없는 이야기를 들어보게 된다면 우리 집은 화목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가끔 친정집에 가면 엄마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우리 집 정도면 화목한 거라고..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나에게도 동생에게도 심지어 많은 혜택을 받았다는 오빠나 언니도 불만이 있다.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가능했을 자신만의 인생이 부모님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는 원망 아닌 원망을 듣게 된다. 부모님은 결국 겉으로 보이는 화목이 집중했지 그 안에서 아파했을 자식들은 생각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우리 집 정도면 화복한 거리고 위안 삼으며... 가족들안의 평화는 어쩜 건들이면 터질지 모를 폭탄을 가슴에 않고 서로 견주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폭탄은 있지만 터지지 않도록 최대한 숨기려는 모습이라고 할까?
책을 통해 내가 꾸린 우리 가족을 생각한다. 나는 어떤 엄마이고 어떤 며느리이고 어떤 딸인지.. 그리고 어떤 아내인지... 한 사람이 화목한 가정을 만들 수 없다. 모두가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쉽지 않을 화목... 그럼에도 우리는 가족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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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진 시대를 살고 있지만 혈연에 대한 애정이 가장 크지 않을까 싶다. 가까운 친구나 주변에 입양을 했거나 재혼을 한 경우가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가족 구성원의 조건이 있다면 최우선은 무엇일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한 공간에서 함께 살고 가족이란 제도에 속한 구성원을 모을 수 있다면 말이다. 배우자가 아닌 가족에 대해서다. 고종석의 『해피 패밀리』는 그런 걸 묻는 것 같기도 하다.
한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들도 성장하면서 가족보다는 자신을 중심으로 생활한다. 당연한 일이다. 직업을 갖거나 결혼을 하면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고 본가를 찾는다. 그러나 소설 속 한민형처럼 부모를 가족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분명한 건 그럴만한 계기가 있다는 것이다. 한 씨 집안에서도 금기가 된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부모와 아들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그 사건이 무엇일까,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다. 저마다의 시선으로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소설은 그것을 수수께끼처럼 던져놓는다.
출판사를 하는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 4남매가 있다. 첫 번째 화자는 집안의 아들인 한민형이다. 낙하산으로 아버지의 출판사에 다닌다. 성실한 사람은 아니지만 직원들에게 나쁜 소리를 듣지는 않는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사장과 직원일 뿐이다. 자신이 부모에게 되돌릴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걸 알지만 그에게 부모는 가식덩어리로 존재한다. 특히 막내 여동생 영미를 입양한 어머니는 참을 수 없다. 가장 친한 친구의 딸을 입양했지만 결코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어머니의 지독한 위선에 한민형을 치를 떤다. 한민형은 가족에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소설 곳곳에서 죽은 한민희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알려주면서도 정작 그 이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글을 쓰든 안 쓰든 나는 위선자다. 나는 그걸 안다. 내 가족에 대해서도, 내 술친구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나는 위선자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나는 위선자다.’ (한민형, 26쪽)
부모는 부모의 입장으로 자식은 자식의 입장으로 상대에게 서운함을 토로한다. 아들의 생일에도 함께 밥 한 끼 먹지 못하는 시어머니가 며느리 서현주에게 전화를 걸어 마음을 털어놓는 부분은 묘한 감정을 발생시킨다. 한 씨 가족은 서현주에게로 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죽은 한민희의 친구였던 서현주가 며느리로 들어오면서 그나마 한 씨 가족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장모를 부모 그 이상으로 여기며 살고 있어서 서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민형에게 가족은 아내와 장모, 그리고 딸이 전부다. 남편과 시댁 사이를 조율하는 서현주, 그의 위선은 정녕 옳다.
‘내 위선은 지혜로운 위선이다. 가족들 사이에 평화를 만들어내는 위선. 가족들 사이에 사랑을 만들어내는 위선. 비록 그 평화가 당장이라도 바스러질 듯 위태위태한 것이고, 그 사랑이 보기에만 아름다운 치장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서현주, 82쪽)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가족 구성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들려주는 건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공통된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가족. 비밀이라는 독을 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 과연 그들은 서로를 해피 패밀리라 부를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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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소설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지금껏 읽은 고종석의 소설 작품들을 관통하는 몇 가지 키워드가 있다. 자기 연민과 자기 혐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인간에 대한 혐오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손윗 누이에 대한 (근친상간적) 사랑이다. 『해피패밀리』를 관통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언해피한’ ‘패밀리’의 이야기지만, 결국 저류에 흐르는 핵심 서사는 손윗 누나를 사랑한 한 남자 이야기이고, 이 남자가 겪고 있는 자기혐오(와 인간혐오), 자기 연민(인간에 대한 연민)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작가의 창작물이기 때문이 창작물인 소설과 소설가를 분리해야 하지만, 적어도 이 작품만은 충분히 작가의 이야기로 읽힌다. 자기 연민과 자기 학대 사이를 쉴새 없이 오가는 고종석 씨의 최근 행보를 보고 있자면 한민형이라는 극중 인물에 많은 부분을 이입하고 있는 걸로 보이기 때문이다. 민형 형에게는 세상에 대한 연민이 있다. 꼭 사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꼭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숨탄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p.144)
세상과 숨탄것들에 대한 그의 연민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그에게 자기 연민이 거의 없는 듯하다는 점이다. 때때로 그는 자신을 학대하는 것 같다. 그의 연민은 오로지 그의 몸 바깥으로만 향한다. (p.145) 민형 형은 자신의 우익됨을 허무주의에서 찾는다. 그가 그렇게 술에 기대어 사는 것도 그의 허무주의가 강고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략) 빌어먹을! 결국 민형 형은 갈데없는 우익이다. (pp.145-146) 민형의 대학 후배이자 함께 출판사를 꾸려가고 있는 후배 정석의 입을 통해 주인공인 민형을 평가하는 부분인데 기실 이것은 고종석 씨가 스스로를 자평하는 걸로 읽힌다.
이에 의하면 고종석은 세상의 모든 숨탄 것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자기 연민이 없다는 데 기인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학대한다. 연민은 오로지 자신을 제외한 것들만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그는 허무주의자다. 허무주의자인 그는 우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자기 고백이다. 고종석 씨가 모든 숨탄 것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시인 황인숙에 대한 그의 깊은 우정과 애정, 그리고 그녀가 키우는 고양이들에 대한 살뜰한 마음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 ‘모든’에 모든 인간들이 다 포함되는 것 같지는 않다. 어떨 때 그는 매우 극단적인 인간혐오를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설명 가능할까? 모든 숨탄 것들을 연민하며 인간을 혐오하는 것은 위선인가? 이율배반인가?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모든 숨탄 것들을 연민하기 때문에 (일부) 인간들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플루트의 골짜기」를 참조할 것. 이러한 점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도 그 자체로 ‘고종석’이라는 현존하는 인간의 대리물이다). 자기연민이 없다는 점은 어떤가? 그렇다면 고종석은 자기연민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학대하는 걸까? 트위터 상에서 보여주는 그의 행태는 극단적인 자학처럼 보인다. ‘왜 구태여 저런 식으로 자신을 학대하는 걸까?’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고종석은 자기연민이 없다기보다는 오히려 매우 자기애가 강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니깐 실상 자학처럼 보이는 행동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의도로 읽힌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기학대이기보다는 자기애의 발현이다. 암튼 모든 인간들이 나름 복잡미묘한 부분을 다 가지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참 복잡한 인간 중 한 명이 고종석이라는 ‘문제적 인간’이다. 이 ‘문제적 인간’은 자기 혐오와 자기연민, 자기학대와 자기애 사이를 쉴사이 없이 오간다. 그래서 도대체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다. ‘글이 사람’이라는 말은 확실히 과장된 격언이다. 글쓰기는 그 주체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심지어 자학적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자학적 글의 저자는 그 자학으로써 자신을 미화한다. 자기혐오를 제 윤리성의 증거로 내세우는 것이다. 글을 보고 반한 사람은 많지만, 만나본 뒤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사람은 좀처럼 없었다. 거의 예외없이 실망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제 고작 서른을 조금 넘겼을 뿐이지만, 사람이라는 종에 대한 신뢰가 점점 옅어진다. 물론 나 자신에 대한 신뢰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나 역시 자학을 윤리의 증거로 내세우는 글쟁이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듯하다. 비록 나는 글쟁이가 아니지만. 그래서 글과 사람을, 책과 사람을 분리하는 것이 내겐 삶을 순탄히 이어나가는 데 중요한 방어기제다. (p.12)
어느 쪽이든, 책과 삶을 포개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그것은, 술 마실 때를 빼곤 오직 책 속에서만 어렵사리 생기를 유지하는 내 삶을 바스러뜨릴 수 있는 짓이다. 나는 사람보다 책이 좋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유년기를 되돌아보면, 책 읽는 나보다 동무들과 뛰노는 내가 더 선명히 기억된다. 아마 십대의 어느 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책을 사람보다 더 좋아하게 된 것이다. (p.12) 책보다는 아닐지라도, 내가 사람을 좋아하긴 하는 것일까? 선뜻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pp.12-13)
아니 오히려 술 마시는 시간이 더 늘어났다. 그것은 내 자학의 포즈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다는 뜻일까?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은 그저 포즈일까? 그것도 모르겠다. 아,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뾰족하게 웅크리고 있는 자기혐오를 누가 이해하라? (p.14) 이 자기혐오도 위선일까? 최소한 내 마음의 치료제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는 일이 없을 테니, 적어도 이 자기혐오로 나 자신을 미화할 염려는 없다. (p.15) 그러니깐『해피패밀리』는 고종석의 공개적인 일기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일기라는 점에서는 매우 사적인 글이지만,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공개적이다. 물론 이 글은 여느 소설처럼 ‘근친상간적 사랑’으로 포장하고 있지만(하지만 이 역시 자기혐오와 자기애 사이에 있는 것이다 아니, 그것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형태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고종석적 딜레마. 고종석의 문제의 핵심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본적으로 복잡다단한 한 인간의 내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본인에게도 이 문제는 매우 고민인 듯하다. 그리고 그런 인간이 쓰는 글이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는 듯하다. 생각해보면 그런 복잡다단한 사람들이 가장 원초적인 감정까지 드러내가며 모여 있는 곳이 ‘가족’이니 ‘패밀리’에 ‘해피’라는 수식어가 붙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겠다. 인간혐오와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인간의 가장 추한 모습을 가감 없이 볼 수밖에 없는 가장 원초적인 장소에서 그 감정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경험하게 될테니 말이다. 『해피 패밀리』의 표지가 밝은 노란 색으로 얼핏 화사하게 보이지만, 그 노랑이 ‘empty yellow’로 보이는 것도 그 까닭인 것이다. 극단적인 혐오가 유감 없이 드러나는 장소가 바로 가정이고, 따라서 인간이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해피’란 기실 ‘empty yellow’처럼 허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쯤 고종석 씨를 에세이로 만날 수 있을까? 자기혐오와 자학의 포즈로 점철된 소설 말고 단단한 문장들로 쓰여진 정결한 에세이로 고종석을 만나고 싶다. ‘질풍노도의 방황’은 이제 그만 하고, 자기애도 자기혐오도 이젠 좀 내려놓고, 거울 앞에 선 누이와 같은 모습으로 독자들을 만나면 좋겠다. 현재의 고종석의 행보를 안쓰럽고 우려하며 바라보고 있는 독자로서의 바람이다. 이전의 고종석의 글을 아끼던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애나 자기혐오는 말하자면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운 소쩍새 같은 것이니,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운 천둥 같은 것이니, 이젠 거울 앞에 돌아와 노오란 꽃잎을 피울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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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패밀리> 해피, 해피, 패밀리.
해피 패밀리의 가족들은 지나치게 담담하고 이성적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매일매일 소리 지르고 던지고 악다구니를 써도 결코 과하다 할 수 없을 만큼 미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일 텐데도 조용하다. 그 사건 이후 이미 시간이 흘러서 모든 게 잠잠해진 탓일까. 그렇게 큰 상처를 모두들 잘 교육받은 지성의 힘으로 꾹꾹 눌러 담고 위태위태하고 감추어 두고 살아간다. 이야기는 가족 구성원의 각각의 독백으로 이야기는 전개되어 나가는데, 그나마 사건의 심각성에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중심인물로 여겨지는 한민형의 어머니 민경화 뿐이다. 서양 귀족들의 우아한 식사시간을 방불케 하는 장면. 기다란 식탁 끄트머리에서 얼굴을 마주보며 우아하게 대화를 하자고 아내 민경화에게 청하는 한민형의 아버지 한진규. 끝에 가서야 겨우 밝혀지는 감질나게 궁금한 사건의 씨앗을 발아시킨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모 세대의 어쭙잖은 위선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식탁 대화 씬은 이 소설의 중요한 한 장면이면서 우리 시대 중상류층 사람들의 의식에 깔려 있는 암묵적인 생각의 덩어리가 여실히 보여지는 장면이라 할 만하다. 너무나 아름답고 흠잡을 데 없어 아도니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한민형. 그의 가족은 남들이 보기에 완벽한 것 같다. 남부럽지 않은 부모에다 아들 딸 고루 잘 성장해 주어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가족. 그러나 가족 각각이 쏟아내는 독백에서는 냄새가 난다. 썩은 냄새. 자신이 못다 이룬 고위공직자의 꿈을 아들 한민형에게 투사한 아버지. 옛날 친구가 죽자 그 딸을 데려다 친딸처럼 키운다는 칭송을 받지만 실제로는 하녀처럼 부려먹는 역사교사 어머니. 그 부모에게서 난 자식들과 길러진 자식은 어떻게 자랐나. 그렇게 자라난 자식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나. 끝으로 갈수록 드러나는 그 삶이란 것은 소설적 장치를 통해서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다.
소설책 표지의 무채색 거실 사이에 피어있는 노란 꽃 한 송이. 절망 속의 희망을 말함인지, 희망마저 시들해 보이는 가족의 분위기를 극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인지. 읽는 이에 따라 달리 해석될 일이다. 가족이기에 감싸 안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한계가 있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도 내게는 상처이고, 내게 상처를 준 부모님은 나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한 번쯤은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불효자, 불효녀 이전에 부모 세대의 잘못이 내게 영향을 미쳤으면, 나도 아프다고 나도 불행했다고, 한 번쯤 속시원히 털어놓을 때가 분명 온다. 가족이니까 넘어가주고 덮어주고 무조건 효도해야한다는 말. 그 말 때문에 상처받고 산 세월이 얼마인가. 한 번쯤 털어놓고 원망할 건 원망하고 속시원히 쏟아내고 나면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울까? 아니. 홀가분하다. 가족과의 관계 단절이 두려워 쓴소리 못한다면 질러라! 너무 잘 단련된 도덕성 교육 탓에 내 정신이 피폐해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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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지막으로 읽은 소설.
(하필)이 책을 읽은 이유는.. 1. 김훈 작가와 함께 언론계에서 미문(美文)으로 명망이 높은 이다. (난 문단이나 학계의 작가 보다는 언론계의 인물에게 더 마음이 간다.) 2. 모국어에 대해 쓴 그의 글을 몇편 읽고 새롭게 깨달은 바도 있다. 3. 친구의 지인이기도 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전해듣고 흥미로웠다. 4.요즘 고종석씨가 하는 한국어강좌의 내용을 열심히 올리는 어떤 이의 트위터 글을 보면서 강의가 범상치 않다고 느꼈다.
소설가가 아닌 작가들이 왜 소설을 쓰려고 할까.. 글쓰는 이들은 소설에 대한 막연한 로망이 있지 않나 싶다. 글 좀 쓴다 하면 소설을 써보고 싶어지는.
하루키의 말대로 소설은 대단히 비효율적인 이야기 전달 방식이다. A4한장 분량으로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를 자신의 방식을 찾아 돌고 돌아 몇백페이지의 이야기를 해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방식으로 전달해야만 하는 것이 있겠지.
연기력 없는 배우가 1인 다역을 하는 것 같다. 스토리텔링이 형편없다.
혹시 '라쇼몽'에서 처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이 펼쳐지나 싶었던 기대가 무안하다. 내용을 요약해서 A4한장에 줄인 것을 읽는 게 나을 듯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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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소외를 경험하고 있다. 산업화와 물질문명의 발달로 개인은 파편화되고 마침내 이것은 개인주의라는 이름으로 현대인들을 외롭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을 비단 사회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어쩌면 개인주의는 모든 현대인들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선택한 것에 불과하며 우리는 개인주의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고치려들지 않는다. 고독하지만 그것을 그냥 체념하며 받아들인다고나 할까. 그래서 현대인은 더 괴롭다. 고종석의 <해피 패밀리>는 개인주의로 점철된 현대인, 그 중에서도 가족을 중심으로 한 개인들을 차례차례 보여준다. 반어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현대를 살아가는 가족들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피상적인 관계를 맺는지 까발리는 소설이다. 오늘날 우리를 외롭게하는 비혈연적 인간관계, 즉 친구나 연인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리라 믿고 있는 가족에 대해 말한다는 것만으로 이 소설은 충분히 흥미를 끈다. 소설은 30대의 출판사 편집장인 한민형부터 시작하여 그의 부모, 아내, 남매 등이 화자가 되어 각각의 상황을 들려준다. 같은 한 사건을 가지고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이 구성은 독자가 소설을 읽는다는 행위 면에서는 아주 재미있다. 특히 이 세상을 떠난 한민형의 누나, 한민희에 대한 비밀이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드러나지만 책이 끝날 때까지 그 비밀이 공개되지 않아 독자로부터 큰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족 구성원 각각의 목소리는 아주 차갑고 건조하다. 한민희에 대한 사건을 계기로 틀어진 한민형 가족 분위기는 화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시리도록 냉랭하다는 것이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증명된다. 거기에 한민형 집에 입양된 한영미를 대하는 가족들의 상반된 태도로 인한 갈등 등이 덧붙여져 소설은 현대사회에서 가족이란 진정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되묻는다. 그러나 <해피 패밀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속한 현대인들의 심리가 섬뜩하리만치 잘 표현되었지만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우선 각 화자가 내는 심리상태의 표현 방식이 지나치게 일관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도중 한 명의 작가가 썼기 때문에 그렇다는 느낌을 문득 들게 만들 정도로 설명적이고 각 파트의 분위기가 비슷하다. 또한 이 소설에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독자를 끝까지 몰입할 수 있게 하는 한민희와 한민형의 관계에 대한 진실이 드러나는 마지막 부분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눈치빠른 독자라면 어느 정도 예상가능했을만한 사실같기도 하다. 그리고 현대 가족 속에 파묻힌 개인의 위선을 드러낸 이 소설에서 그 사실은 오히려 소설의 주제를 묵직하게 마무리짓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것이 지금의 한민형 가족을 파멸로 이끈 원인이라기보다는 한민형 한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더 가까운 것같이 보인다.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가족에 대한 냉소주의가 오늘날 모든 가족을 대표하는 문제의식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다소 자극적인 개인의 문제로만 국한되어 나타난 것이 아쉽다. 읽기 전엔 고종석이라는 작가에 대해 잘 몰랐는데 알고보니 트위터상에서 과격적 발언을 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것을 알고나니 오히려 이 소설이 심심하다는 느낌이 든다. <해피 패밀리>는 소설로서의 몰입감은 대단했지만 다소 허약한 결말로 소설의 묵직한 전반적 분위기를 끝까지 끌고가지는 못한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표지디자인은 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다. 책을 전적으로 표지를 보고 구매하지는 않지만 저건 너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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