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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모든 추상화에 대항하여 자본주의 균열내기 - 『크랙 캐피털리즘』을 읽고
도대체 왜 자본주의는 멈추지 않는 것일까. 왜 그 숱한 반란들, 저항들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간 걸까.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나라들의 붕괴, 중국의 자본주의화, 맑스주의의 종말. 우리는 왜 이런 결론에 이른 것일까. 우리는 엔클로저의 폭력을 애써 망각하고 원시 시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의 노동을 감내하고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자본주의를 지속 시키는 것일까. 대학생들은 점점 더 보수화되어 가고 학생 시절 운동권이었던 부모들은 자식을 일류대에 보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있다. 젊은이들은 맑스를 그저 교양으로 읽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우리에겐 설명이 필요하다.
존 홀러웨이는 과거의 혁명들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왜 실패했는지를 추적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국가 중심 혁명이나 혁명 정당은 총체성의 관점으로, 그들의 논리에 맞지 않는 것들을 배제하고 짓밟았다. 총체성에서 벗어나는 것, 빠져나가는 것, 나머지,를 무참히 살해했다. 그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혁명은 총체화하거나 추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에 저항하고 그것을 멈추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것은 국가나 당이라는 추상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는 그저 하나의 노동력이고 여성이며 학생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만 정의되지 않는다. 나는 자본에 종속된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을 넘어서며 여성이지만 때론 여성이 아니기도 하다.
추상화된 사회, 자본주의 사회는 나를 여성으로 라벨 붙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로 이름 붙이지만 나는 항상 그것을 넘어선다. 나는 억압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억압된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 되돌아온다. 되돌아오는 그것, ‘흘러 넘치는 것’이 바로 ‘균열’이다. 우리는 이 균열을 통해 자본주의를 주저 앉혀야 한다. 여성이나 남성, 임노동자로서가 아니라 그 동일성에 갇히기를 거부하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정체성을 거부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안만을 가져다 줄 것인가. 아니면 다른 가능성의 새로운 흐름을 열어 줄 것인가. 우리가 보지 못했던 세계, 이미 여기에 와 있지만 우리 눈에 띄지 않았던 세계를 향한 열림은 아닐까. 남성이나 여성으로 구분된 세계가 아니라 무성적이라서 성적 소수자를 박해하지 않는 세계를 꿈꿀 수는 없을까. 보르헤스가 꿈꾸었던 이름 붙이지 않는 세상,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이루어진 세상, 항상 변화해서 무엇도 가둘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쩌면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왜 우리는 늘 혁명 정당에 갇혀서, 노동 운동 조직에 갇혀, 그 외부의 것들을 모조리 말살하면서 자족하고 있었을까. 우리가 그렇게 반대하려고 했던 지배 세력이 했던 일들을 똑같이 반복하면서 안일하게 혁명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혁명 정당은 위계적이었으며 인간을 ‘객체화’ 했고 ‘독백적’이었다. 그들은 인간을 존중하지 않았고 대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혁명이 ‘모든 사람의 일상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과제를 자신의 첫 번째 목표로 생각하지 못했을 때, 그것은 억압에 무기를 제공’했다.
억압적으로 우린 어릴 때부터 반공 교육을 받아야 했다. 자유가 절대적 가치라고 배웠으며 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체제를 상상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가르치는 대로 낙오자가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뭐든지 열심히 해서 짝궁을 제쳐 놓아야만 칭찬을 받곤 했던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크게 달라진 건 없다. 회사에서는 실적을 내야 하고 열심히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본주의에 참여하며 그것을 창조하고 지속시킨다. 과연 이 흐름을 끊어낼 수 있을까. 왜 늘 나는 동료를 주시해야 하는 걸까. 우리에겐 정말이지 더 이상 인간적 관계라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 자본주의, 즉 이익이라는 가치가 다른 가치에 비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회는 생각하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인간은 이익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랑으로 움직이고 우정으로 움직이며 아름다운 음악과 한권의 책에 의해 움직이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자본주의를 균열내는 것들이다. 그것은 잡히지 않는 것이며 그래서 추상화하거나 수량화하여 이름붙일 수 ‘없는’ 것들이다.
더 이상 시를 읽지 않게 된 시대, 합리적이며 과학적이라고 자랑하는 시대, 우주를 탐사하고 생명을 연장할 만큼 진보된 세계의 한편에 영양결핍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치욕이 아닌가.
우린 분명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인간을 소외시키고 인간의 의지를 넘어서 미친듯 질주하며 물을 비롯한 모든 공통적인 것을 사유화하려 한다. 자본주의의 미래는 없다. 자본주의 너머에는 ‘이익과 착취가 없는 이상적인 사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파국만이 있을 뿐이다. 이 파국을 면할 수 있는 길은 자본에 대항한 노동 운동도 아니고(노동은 자본을 유지한다. 그것에 저항해야 한다) 혁명적 지도자나 엘리트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위계를 재생산할 뿐이며 폭력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성격 마스크로서의)을 고집할 뿐이다. 실제 자기를 소외시키는 동시에 바로 그가 구현한 정체성에 갇힘으로 인해 타자에로 무한히 나아가지 못할 뿐이다.
자본주의라는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에 균열을 내자. 모든 추상화에 대항함으로써. 나는 여성이다. 나는 동성애자다. 나는 코뮤니스트다. 라는 동일성들은 ‘경찰이 일하기 쉽도록 만들 뿐’이다. 나를 명사로 부르는 모든 것들에 대항하자. 추상화되지 않는 나를 이웃과 관계 맺게 하고, 이름 붙여지지 않는 모든 것들을 활성화 시키자. 우리가 애매모호하고 비합리적이고 마법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내팽겨쳤던 것들. 그것은 시이고 음악이며 사랑이고 동료애이다. 그것은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우리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로부터 다시 시작하자. 혁명은 일상에서 온다. 아니 이미 도래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잡느냐 다시 놓치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혁명으로서 실천으로서 책을 읽자. ‘행위’를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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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 캐피탈리즘’은 철저히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현장에서 쓰여 진 책이다.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맑시즘에 대한 재성찰을 불러 일으켜 다양한 논쟁과 실천들이 있어 왔고 남미의 실험이 주목을 받아왔다.
이러한 자본주의가 가진 구조적 모순과 그 해결방법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움직임 중 가장 중요한 요약이 바로 이 책 ‘크랙 캐피탈리즘’이다.
구체적으로 홀러웨이는 '런던 작곡가, 멕시코 정원사, 버밍햄 자동차 공장 노동자, 치아빠스 원주민 농민, 바르셀로나 출판업자, 꼬차밤바 주민들, 서울의 간호사들, 사빠띠스따 혁명가들...'의 행위들 속에서 자본주의를 균열내는 행위를 규정하고 더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그간 있었던 투쟁들 속에서 공통성을 추출하고 조심조심 한걸음 더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우선 그는 "노동에 대해 재규정함으로써 새로운 인식틀을 제공"하려는 시도를 한다.
"소외된 노동은 소외되지 않은 노동과의 대조를 함축"하며 "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관계가 노동자의 자본가에 대한 관계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유용노동이 교환 가능한 가치로 치환되어 추상노동화 하는 지점을 주목하라고 한다. 유용노동은 추상노동 속에서 즉 "단지 양적으로만 계산되는, 다른 노동들과의 관계 속에만 존재한다. 상품들이 교환될 때, 중요한 것은 그것들 사이의 양적 관계"이고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은 ... 추상노동, 즉 그것의 구체적 특징의 추상 속에서 이해된 노동"이며 따라서 "노동의 추상화는.. 노동의 소외"이다. 이러한 것들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사회적 종합은 행위의 노동으로의 추상”을 통해 이루어지며 “자본주의적 노동의 추상적 질은 사회적 상호관계가 사회통제의 모든 형태를 넘어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가 완전히 추상노동에 포섭되지는 않으며" 흘러넘치는 부분에 자본주의를 균열내고 새로운 “대안적 사회관계의 구축”이 가능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새로운 사회는 오직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될 때에만 생성될 수 있다. 그와는 반대로 하나의 체제의 다른 체제에 의한 혁명적 대체는 불가능하기도 하려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세상을 바꾸는 것을 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특수한 것에서 유래하는 틈새 운동들의 증식으로 뿐이다....좌절과 반격으로 끝난 반자본주의 실험들도 너무 많다. 가능한 세계를 위한 너무나 많은 미완의 실험들이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혁명과정에서 나타난 민중들의 창의적 조직 형태인 코뮨, 소비에트 등을 발전시키고자 새롭게 시도한다. “코뮤니즘은 미래의 발전단계가 아니라 직접적 필요성”이 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만들기를 중지하고, (혁명은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기를 거부하는 것) 우리가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여 노동에 대항하여 “행위” 해야 하며 벽을 부수고 자본주의를 균열시키며 거부하고 창조하라고 외친다.
최근 ‘협동조합’기업의 폭발적인 증가가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사망 후 더욱 주목 받으리라 생각하며 조합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행위”로 승화하여 미래의 “대안세계화운동”으로 자리 잡기를 희망한다. 또한 ‘크랙 캐피탈리즘’이 철탑에서, 구럼비 앞 도로에서, 바람막이 천막에서 또 모든 현장에서 몸으로 자본과 맞서며 체제를 넘어서려는 모든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기본 도서로 읽히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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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서평자로 선정되면 출판사에서 택배를 통해 서평 도서를 보내주기 마련이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일반화된 서평-교환형태다. 출판사와 서평자는 그런 추상적인 관계로부터 그들의 만남을 시작하게 된다고 익히 알고 있었고 그런 식으로 몇몇 서평들을 쓰곤 했다. 그런데 이상한 메일이 날아왔다. 출판사로 직접 와서 책을 받아 가라는 내용이었다. 생소했고 물론 그리 달갑지도 않았다. 하지만 택배로 책을 보내달라는 메일을 쓰는 것도 겸연쩍어서 그냥 한번 가보기로 했다. 책의 편집을 담당했던 편집자의 얼굴을 보고 잠깐 환담을 주고받으며 책을 건네받았다. 일 분도 안 되는 순간을 위해 거의 두 시간에 가까운 이동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성적으로 보자면 그 행위는 분명히 비효율적이며 소모적인, 여가시간의 낭비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소한 그 행위 덕분에 직접 책을 건네받고 즐거워하던 만남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택배로 배달된 책으로는 불가능했을 만남이다. 『크랙 캐피털리즘』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행위의 반란’에 대한 책이다. 여기서 행위란 특별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앞의 작은 사례처럼 택배를 통해 책을 배송받지 않고 사람에게서 직접 책을 건네받는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도 포함된다.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실천이,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는 행위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지금 당장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저자 존 홀러웨이의 독특한 관점이다. 그것은 반딧불의 춤을 닮았다. “‘조명된’ 절망에 대립시켜야 할 것은, 반딧불의 살아 있는 춤은 바로 어둠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것은 ‘공동체를 만들려는 욕망의 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반딧불의 잔존』(조르주 디디-위베르만, 길, 2012) “반자본주의적 혁명가라는 것에 뭔가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많고 많은 사람들, 수백만 명의, 아니 아마도 수십억 명의 이야기다. (…) 이것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다.” 『크랙 캐피털리즘』(존 홀러웨이, 갈무리, 2013, 28~30쪽) 홀러웨이는 자본의 도덕을 거부하고 자기결정의 몸짓을 지향하는, 다시 말해 노동의 도덕에 항의하고 행위의 윤리를 향유하는 모든 몸짓들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붕괴는 그러한 작은 균열들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다. 파국과 절망과 멘붕의 시대에 실로 ‘힐링’이 되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사회 비판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와의 싸움이라는 것이 작은 일상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고 또한 그것이 결코 다른 혁명적 실천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그는 강력하게 밝힌다. “중요한 것은 구분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연속의 선을 발견하는 것이다. (…) 하이킹을 가거나 앉아서 좋은 책을 읽는 것, 혹은 야생적인 밤샘 파티에 가는 것은 사빠띠스따 반란이나 2001년 12월 아르헨티나 봉기와 나란히 놓일 수 있는가? 이것은 거듭해서 반복되는 결정적 문제이다.”(57쪽)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무엇에 대한 행위이며 어떤 것에 반대하는 행위인가? 홀러웨이는 행위 자체의 현상을 보여준 뒤에, 우리가 어떤 것으로부터 행위를 되찾아야 하는지를 마르크스의 저작들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저작들을 경유하여 찾아낸다. 그는 자본주의가 ‘행위의 노동으로의 추상’을 통해 굴러가고 있음을 밝힌다. 이는 마르크스가 이미 지적했던 것이지만 오랜 세월 잊혀져왔다. 홀러웨이는 노동가치론의 기원을 탐색하며 노동-가치의 결합관계 자체를 문제시한다. ‘노동-가치’의 기원에는 가치화되기 이전의, 추상화되기 이전의 ‘구체적 행위’가 존재한다. 이것은 이른바 시초축적 단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추상노동 속에 실존하는 것으로서, 추상화된 노동가치 속에 존재하는, 그것에-대항하는-그것을-넘어서는 행위다. 이것은 추상노동에만 집중하며 노동의 투쟁에만 힘을 기울였던 과거의 혁명론들이 은폐했거나 알아채지 못했던 부분이다. 홀러웨이는 이제 노동의 투쟁이 아니라 ‘노동에 대항하는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사회관계 속에 실존하는 일상적인 투쟁이다. “모든 사회관계는 활동적인 전장이며 살아 있는 적대이다. (…)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투쟁이다.”(243쪽) 그는 모든 곳에서 균열을 발견하고 모든 사회관계 속에서 투쟁을 찾아낸다. 흔히 비관론자들이 보듯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에 잠식당하고 물화되었다고 그는 결코 보지 않는다. 우리가 노동을 그만둔다면,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창조의 행위를 지향한다면, 이미 자본주의는 멈추어 서게 된다. 이것이 홀러웨이의 급진적인 비판이자 동시에 대안이다. 실로 발본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의 강조는 쉽게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이는 자율주의적 맑스주의 운동을 펼치는 마이클 하트와도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마이클 하트는 부록의 서한에서 홀러웨이에게 이렇게 의문을 표명한다. “달리 말해, 교환가치에 대해 사용가치를 긍정하는 정치적 기획은 내게는 전자본주의 사회를 다시 붙잡으려는 향수에 젖은 노력처럼 보입니다. 내가 이해하는 바의 맑스의 기획은 이와는 달리, 다른 쪽으로 나오기 위해 자본주의 사회를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마이클 하트, 401쪽) 확실히 홀러웨이의 대안은 이러한 비판에 취약해 보인다. 그는 자본주의를 거부할 수 있는 행위의 잠재력으로 우리의 눈길을 되돌려 놓는 데는 성공하지만 자본주의 자체를 우리의 생산력으로 전유할 수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일종의 목가적인 문명 비판가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행위할-힘의 발전은 사회화의 거부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 도전은 오히려, 균열을 통해 다른 사회화를, 우리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활동의 특수성에 대한 즉 자기결정을 향한 경향에 대한 충분한 인식에 기초를 둔, 자본주의의 종합보다 훨씬 느슨하게 짜인 사회화를 구축하는 것이다.”(355~356쪽) 그는 고립된 단위로의 낭만적 복귀가 아니라 사회적 상호접속의 다른 종류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수평성, 존엄, 대안경제, 공유지 같은 것들이 그 예시다. 그렇지만 그는, 다시 한 번 강조하기를, 언제나 그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이 ‘지금여기에서의 우리의 행위’라고 말한다. 그 어떤 사회화의 구축도 행위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결코 파괴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자본주의에 의한 삶의 물화에도 불구하고 삶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자본을 넘어서는 것을 창조한다. 추상노동으로 환원되지 않는 구체적 행위는 가치법칙을 넘어서, 흘러넘치면서 실존한다. 우리는 그 어떤 순간에도 모든 억압에서 이탈할 수 있는 자기결정성을 갖고 있다. 실패하고 좌절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절망과 멘붕과 파괴와 파국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둠의 한복판에서 하나의 반딧불로서 살아 있는 춤을 출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무기, 곧 행위다. 여담을 하나 붙인다. 올해 시작한 것이 하나 있다. 세미나다.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를 읽는 세미나를 네 번 했다.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참고도서도 스무 권 정도 읽었다. 우리는 다시 세미나를 하고 또 뒤풀이를 할 것이다. 이것은 과연 자본주의를 균열 내는 일일까? 확실치는 않다. 홀러웨이 역시 언제나 불확실성을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자본주의의 훈육을 거부하고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창조하는 운동이라는 점이다. 세미나의 공간에서 우리는 이윤 생산을 거부하고 담론 생산에 참여함으로써 균열-창안을 우리의 행위로서 만들어내고 있다. 세미나가 혁명적 행위라면, 그 이유는 이것이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기를 거부하는 것에 관한 것”(363쪽)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세미나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순간들이 인생의 충만한 순간임은 스스로 느낀다. 행위는, 균열은, 미래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하늘을 밝히는 것은 저 장관적인 폭발만은 아니다. 별들을 바라보라. 맨 먼저 당신은 가장 밝은 별들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오래 바라보라. 그러면 당신은 빛나는 수많은 점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2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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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랙 캐피털리즘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자본, 자본은 항상 나에게 비현질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만질 수 없기에 추상적이며 어쩌면 형이상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것으로의 자본이 실재의 사물을 사고 팔 수 있는 것, 더 나아가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 것들까지 가치 안으로 포섭되게 하는 것. 지금의 자본주의가 아니었던 시절부터, 말하자면 금세공상에서 처음 예탁증서를 발급해주었던 시절부터 자금은 그저 종이 위에 쓰여 있는 허상의 불과했다. 실제로 금고에 있는 금보다 훨씬 많은 양의 금이 유통되었고 금고에 있는 금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그저 상징으로서의 금이었다. 그것들은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그 인정은 어느새 실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자본의 창조는 곧 자본에 의한 종속이다. 은행에서 유통하는 자본의 시스템은 태생적으로 불공평하다는 것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텐데 왜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지 않는가? 언제부터 우리의 삶이 종이쪼가리에 종속되었으며, 언제부터 우리가 그것에 의해 감정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하지만 이미 상황은 너무 악화되었고 어쩌면 되돌릴 수 없다, 라고 애기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이후로 공산주의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혁명으로 자리 잡음과 동시에 다시는 시도하지 말아야 할 이데올로기가 됐으며 자본주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결점을 극복할 것처럼 변화했다. 그 변화는 언제나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내포했지만 기대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현실적인 대안은 존재하지 않고 언젠가 도래할 미래혁명 말고는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종교인들처럼 현실의 고통을 묵묵히 참으며 버티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지젝의 추상적인(이해하기 어려운) 제안과 유토피아적 넋두리> 두 가지의 제안이 있다. 하나는 지젝의 제안. 그의 '실패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는 대한민국에 살기 때문에 레드 콤플렉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던 나에게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해준 제안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의 글은 너무 어렵다.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나에게는 이해하기도 힘들뿐더라 너무 철학적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제안으로 들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또 하나는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의 프레데리크 로르동이 말하는 하나의 대안이다. 그의 칼럼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써 코뮤니즘 밖에 떠오르지 않던 나에게 자본주의 안에서 어쩌면 새로운 자본주의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만큼. 그러나 매력이 큰 만큼 실현가능성은 낮아진다. 그가 말하는 사회는 그저 하나의 공상으로 존재하는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나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그래서 조금의 부담은 감수 할 수 있지만 삶을 포기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이대로 당할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존 홀러웨이의 균열혁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아니오, 우리는 하지 않겠소'에 대한 불가항력으로써의 바틀비와 슈퍼트램프 또는 순수성의 문제> 조금 과장을 해본다면, 자본에 온 몸으로 대항하는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우선 허먼 멜빌의 바틀비는 '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월가에서 그들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을 택함으로써 균열을 만들어낸다. 그의 언행은 이해 불가능하다. 그의 선택하지 않음은 자본에 대항하는 반-자본으로써 저자가 말한 행위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는 인 투 더 와일드의 슈퍼 트램프, 즉 일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바틀비보다 조금 더 나아가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며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나서고 타인에게 그것을 권하기까지 한다. 이것 또한 행위에 해당할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책을 읽고 바로 떠오른 이 두 인물은, 그러나 결말이 그리 좋지 않다. 그들은 어떻게 되는가? 굶어죽거나 독사한다. 이것은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지만, 어쩌면 자본에 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또 다시 자본으로 편입되어버리는 동일화과정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패배주의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순수성의 문제이다. 그들은 결코 자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가 비자본적인 순수성을 가지고 있을 때 더욱 빛난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순수성은 없다. 순수성이 있다면, 균열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우리는 무인도에 사는 것이 아니며 좋든 싫든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자본주의라는 것을 받아들여야한다. '우리의 균열들은 순수한 균열들이 아니다. 우리의 존엄은 순수한 존엄이 아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와 단절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의 단절은 여전히 그것의 모반을 갖고 태어난다. 우리가 뭔가 다른 것을 하려고 아무리 애쓸지라도, 자본주의의 모순들은 우리의 반란 내부에 그 자신을 재생산한다. 우리가 아무리 반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순수한 주체들이 아니다. 자유화의 공간이자 고통스런 파열로서의 균열들은 우리 내부조차도 횡단한다." <중요한 자기 결정의 탐구, 자본과 비대칭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균열은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위이다. 우리는 균열을 일으킬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더 이상의 추상노동을 거부해야 한다. 추상은 개별적 예들에서 하나의 동일성을 추려내(추) 사물의 특징을 그 동일성으로 규정(상)하는 것으로써 간편하게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추상은 필연적으로 개별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며(동일성이 중요시되면서 차이들이 제거됨으로써) 동시에 동일성의 강제를 만들어낸다. 이 강제는 차이를 언급한다는 자에게 몰상식, 비상식적이라는 비난을 가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폭력의 양상이다. 추상은 이렇게 이중의 폭력으로써 작용한다. 노동은 초역사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개별적인 ‘행위’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의식적인 삶-활동으로, 구제적 행위로 돌아갈 시간이다.” <보다 나은 가능성을 위한> 여기에 하나의 전환이 있다. 노동을 위한 투쟁과 노동에 대한 투쟁의 차이점.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것과 자본주의 만들기를 그치는 것. 이것은 이 책에서 내가 느낀 가장 값진 경험이고 이론이다. 너무나 간단하지만, 사실 그렇기에 자본에게 속고 있었던 것을 저자는 정확하게 지적한다. 자본을 만들어내는 것은 노동이다. 그렇기에 해고를 위한 투쟁 - ‘우리에게 일자리를 달라, 우리에게 일할 시간을 달라’ - 의 형식은 반-자본이라기보다 자본적이다. ‘우리는 노동력을 팔아 자본을 만들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일거리를 달라.’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반-자본이라는 것은 아니다. 균열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일을 할 것이다.’ 혹은 ‘아니오. 당신이 바라는 식으로는 하지 않을 것이오.’ 노동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투쟁. 이 차이는 크다. 노동이 자본을 만드는 것이라면, 결론적으로 자본을 만드는 것은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하는 우리이다. 이 사유가 매력적인 것은 자본에 대항하는 행위는 우리 앞에 서 있는 거대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절망한 나머지 희생적인 영웅을 그리며 미래의 혁명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 그저 우리가 노동하기를 멈추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자본을 만드는 것을 멈추기만 하면 된다. 저자는 그렇다고 그게 혁명이 쉬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현실을 과장할 필요도, 왜곡할 필요도 없이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 시선에서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 각자의 실험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단지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단지 창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거부하고 - 창조하는 것. 이것이 현실에서 조금씩 나아가는 방법이다. <다가올 미래> ‘균열이 확장되어 거대한 금이 되었을 때, 차가 더 이상 다니지 못할 정도로 도로에 잡초가 무성해졌을 때, 오게 될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이 질문은 분명히 멍청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반드시 어떤 것(자본주의를 대체한 어떤 것)으로 존재함으로써 동사적 행위에서 다시 명사로의 흡수, 동일화 과정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균열을 일으킨 후에 오는 세상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다. ‘어떤 세계’ 단순히 공간적인 것만을 지시하고 있는 반면, ‘어떻게’ 라는 질문은 공간과 시간 그것의 존재 자체에 질문들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금이나 다가올 미래에나 중요한 것은 새로운 공간의 창출이 아니다. 창조하기- 이다. 가능한 세계를 위한 미완의 실험을 계속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행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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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디에서 반란을 시작할 것인가.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사치에가 운영하는 카모메 식당에 각자의 사연을 가진 미도리, 마사코가 차례로 식당에 들르게 되고, 이들과 함께 식당을 운영해 간다는 소박한 이야기다. 그들은 일본을 떠나 핀란드에 도착한다. 이 영화에서는 왜 이들이 일본을 떠났는가가 그렇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것처럼, 왜 이들이 핀란드을 선택했는가 역시 중요하게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딱 한 번 그 이유에 대해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 식당에 처음 오게 된 날 마사코가 주문한 커피를 마시며 던진 질문이 그것이다. 마사코는 식당을 휙 둘러본 후, 사치에와 미도리에게 “당신들은 여기서 어떻게 식당할 일을 하실 생각을 하셨어요?” 라고 묻는다. 미도리는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답을 회피한다. 사치에 역시 멋진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농담으로 질문에서 비켜선다. 정말 중요한 장면은 지금부터다. 마사코는 그들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정말 부럽군요.”라고 지나가듯 말을 던진다. 사치에는 마사코의 말을 얼른 받아 정정한다. “아뇨, 그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뿐이죠.” 그 말을 들은 마사코는 순간 날카로운 표정을 짓는다. 바로 이 장면, 사치에와 마사코가 주고받는 대화가 이 영화의 가장 난해한 부분인 동시에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원하는 일을 하는 삶’과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삶’은 동의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결은 정반대다. ‘원하는 일을 하는 삶’이란 삶에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가지는 삶을 말한다. 그러한 목적과 목표에 자신의 삶을 맞춰 나갈 때 비로소 원하는 삶이 될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한다. 따라서 ‘원하는 일을 하는 삶’이란 싫은 것을 무릅쓰는 삶이다. 이와 반대로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삶’은 그러한 목적이나 목표를 내려놓는 삶일 것이다. 삶의 목적이 사라진다고 해서 이것이 곧 절망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목적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간다. 사치에가 말하는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삶이란 목적이나 목표가 중심이 아닌 삶이다. 삶 그대로에 열중하는 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 그러할 때 피조물인 우리는 삶 그대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삶의 형식 속에서 납작해지는 삶이 아니라 삶이 곧 형식이 되는 그러한 삶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소박하고 개인적인 저항이지만 ‘균열’ 만들기의 일부다. 문제는 ‘균열’들이 왜 여기가 아닌 저기에서, 일본이 아닌 핀란드에서야 가능한 것처럼 그려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카모메 식당>만의 문제는 아니다. 소로(Henry David Thoreau) 역시 월든(Walden)의 호숫가에서야 자본주의적 제도의 문제를 깊이 있게 통찰할 수 있었다(월든). 김씨는 밤섬에 표류해서야 자본주의와 단절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며(<김씨 표류기>), 최해갑 역시 남쪽의 섬에 정착한 후에야 국가체제와 공권력에 맞서 본격적으로 저항하게 된다(<남쪽으로 튀어>). 그런데 왜 여기가 아니고 저기일까. 이러한 것들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는 이러한 변혁이, 반란이, 혁명이 불가능할 것처럼 말하고 있다. 크랙 캐피털리즘은 바로 여기에서의 투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지금여기에서’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삶이 가능하며, 주위를 둘러보면 그러한 저항과 반란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존 할러웨이(John Holloway)는 말한다. 이 책의 중요성은 그런 것들에 대한 방법론과 실천론을 동시에 이야기한다는 데 있다.
핵심 문제는 지금여기에서의 선명한 논리를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특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은 일상적 삶의 일부이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성, 품위, 존엄 등으로 생각하는 것의 반-논리이다. 심지어 가장 무해해 보이는 사례들에도 언제나 그 근저에는 불복종이나 비복종이 놓여 있다(58면).
2. ‘지금여기에서’의 반란의 공통점 자본에 대한 반란은 어떤 형태로든 가능하며, ‘지금여기에서’ 그런 반란은 행해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 책의 1장에서 총 26명의 혁명가를 나열하고 있다. 이를테면, 오늘은 일하러 가지 않겠다며 책을 들고 공원으로 가는 소녀도,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간호사도, 살인하기를 거부하는 병사도, 그 중의 한 명이다. 이 완전히 달라 보이는 투쟁의 방식이 어떻게 동일할 수 있을까, 할러웨이는 바로 이 지점을 사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 서로 다른 저항의 형태에 흐르고 있는 연속성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위에서 언급한 반란의 방식은 두 가지 점에서 공통성을 갖거나 가질 수 있다. 먼저 이 반란들은 자본에 대해 거부하고 불복종한다, 둘 이것은 다시 ‘추상노동’이 아닌 ‘유용노동’ 또는 ‘행위(doing)’를 창조하는 일로 연결된다.
① 자본에 대한 불복종과 거부하기 자본에 대해 거부하는 일은 단순한 일일는지 모른다. 교사는 언제든 자본이 요구하는 사항들에 대해 거부할 수 있다. 노동자 역시 언제든 일을 그만 둘 수 있으며, 병사는 살인하기를 멈출 수 있다. 혁명은 이러한 거부에서, 단순하고 일상적인 거부에서 시작된다. 책을 챙겨 공원으로 가는 소녀를 따라 우리 모두가 공원을 향한다면 자본은 금세 주저앉고 말 것이다. 자본은 그 얇은 막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고 거기에 우리가 동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본의 공모자다. 이에 맞서서 거부하고 불복종하며 더 이상 시중들지 않겠다고 결심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즉각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아니오!”라고 외치기만 하면 된다. ‘하나, 둘’이라는 구령에 맞춰 ‘셋’에 동시에 우리가 짊어진 짐을 내려놓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지금 자신만 내려놓을까봐 겁이나 모두 눈치를 보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너 때문에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고 핑계를 대는, 짜라투스트라가 비판해마지 않는 ‘낙타’다. 그런데 우리가 동시에, 비록 동시가 아니더라도 동시에, 자본에 대항하거나 거부하려는 몸짓을 보인다면 자본은 또는 (자본에 기생하는) 국가는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낼 것이다. 고문, 성희롱, 협박을 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를 당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결국 투쟁은 혁명은 반란은 진압되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그 진압이 일어난 자리를 자본은 더욱 세련되고 정치한 이론, 정책 등을 도입하여 덧대고 다시는 뜯어지지 못하도록 꿰매 버릴 것이다. 68혁명이 그러했고, 한국의 4·19가 그러했다. 여기서부터는 저자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
저 모든 분노, 저 모든 창조성은 단지 자본주의의 새로운 스타일을 위한 기초를 놓았을 뿐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반란으로 출발하여, 약간의 고상한 보조금과 약간의 전문적 자문 및 훈련의 도움을 받은 후에 비정부기구로,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의 핵심요소로 끝나고 마는, 저 모든 자치적 그룹들을 보라. 노동시간에 대한 엄격한 시간관리에 대항하는 저 모든 바란들이, 노동시간의 유연화에 의해, 그리고 사람들의 삶 전체에로의 노동시간의 확장을 통해 흡수된 것을 보라. 너무 순진하지 말라, [고 그들은 말한다.] 어떤 도피구도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125면).
자본과 자본의 동학은 모든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단호하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하나, 반란은 미래에 의존하지 않는다. 68혁명은 하나의 축제였고, 기쁨과 창조성을 풀어놓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이것이 실패라고, 4.19혁명, 촛불시위, 점령하라(occupy)를 실패라고 말할 수는 없다. 둘, 자본주의는 무한히 유연하며 무한히 흡수적이지 않다. 마치 자본은 어떠한 반란도 흡수하여 동질화시키고 자기 변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우리는 오해하고, 반란은 그런 식으로 오해된다. 생활 속의 반란은 어디에서든 가능하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은 거부와 순응의 얇은 막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한다. 이것이 자본이 무한히 유연할 수 없다는 뚜렷한 증거일 것이다. 셋, 무엇보다 우리의 반란은, 자본이 획책하는 비인간화에 대항한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것이기에 더욱더 그렇지 않다. 비록 자본이 대부분의 것을 흡수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보다 더 앞으로 이동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존엄은 자본에 맞서는 발 빠른 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존엄의 춤을 배워야 한다. 이 춤이 ‘지금여기에서’ 흘러 저기에 닿을 수 있도록 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노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②‘추상노동’과 ‘유용노동’(또는 ‘행위doing’)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간호사가 어떻게 반란하는 자일 수 있을까. 이 간호사는 자신의 근무시간을 분배하여 환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한 분배된 균일한 시간을 거부하는 일은 자본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실현하는 일이다. 이것은 살인하기를 거부하는 병사의 그것과 같으며, 오늘 일을 쉬고 공원으로 책을 읽는 소녀의 그것과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본과 국가가 강요하는 ‘추상노동’을 거부하는 일이며, 그리하여 ‘존엄’을 실현하는 일이며 ‘행위’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추상노동’이란 ‘유용노동’이 추상된 일정한 노동량으로서 단지 양적으로 전이됨으로써 생겨난다. 할러웨이는 ‘추상노동’과 ‘유동노동’을 다음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케이크를 굽는다. 나는 케이크를 굽는 것을 즐긴다. 나는 그것을 먹기를 즐긴다. 나는 내 친구들과 그것을 나누는 것을 즐긴다. 나는 내가 만든 케이크를 자랑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케이크를 구우면서 살겠노라고 결심한다. 나는 케이크를 굽고 그것들을 시장에 내다 판다. 점차 케이크는 내가 살기에 충분한 소득을 얻는 수단이 된다. 내가 그것을 팔기에 충분히 낮은 가격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 나는 일정한 속도와 일정한 방식으로 케이크를 생산해야 한다. 즐김은 더 이상 그 과정의 일부가 아니다. 얼마 후에 나는 내가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는 케이크 만들기가 어쨌든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고 충분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이상, 더 잘 팔릴 다른 뭔가를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나의 행위는 그 내용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되었다. 그것은 구체적 특징으로부터의 완전한 추상이었다. 내가 생산하는 대상은 이제 나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서 나는 이제 그것이 팔리는 한에서는 그것이 케이크인지 쥐약인지 상관하지 않는다(146~147면).
케이크를 굽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이것을 함께 나눠 먹을 때까지, 그리고 이것을 팔아서 수익을 얻을 때까지도 이 노동에는 목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목적과 수단에 구분이 없었다. 여기까지가 ‘유용노동’이 또는 ‘행위’라 불릴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 케이크를 굽는 것이 삶에 충분한 소득을 얻는 수단으로 변해 버릴 때, 그러니까 더 많은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려 할 때, 케이크를 굽고 즐겼던 그 수단과 목적의 행복한 조화는 파괴 되고 만다. 남는 것은 케이크를 굽는 행위와 그 행위의 내용과는 무관한 화폐가 목적의 자리를 잡게 된다. 할러웨이는 이것이 ‘추상노동’이라고 말한다. ‘추상노동’에 기반한 “자본주의는 우리에게서 기획과 수행의 통일성을, 목적과 행위의 통일성을 빼앗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고유한 인간성을 빼앗는다.”(147면) 간호사, 소녀, 병사는 이러한 추상노동을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엄을 찾기 위해 나아간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행동은 ‘행위’이며 ‘반란’이자 ‘혁명’이다. 문제는 이러한 혁명이 나에게서 끝나지 않고 흐르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혁명의 규모를 평가해서는 안 되며, 그 흐름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제도를 구축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할러웨이는 혁명의 제도화를 거부한다. 3. ‘지금여기에서’의 혁명 현실은 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 현실은 우리의 인식의 범주를 늘 벗어나 존재한다. 한국의 프로게이머는 프로그래머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길을 뚫는다. 이를 테면, 프로게이머는 ‘드론 비비기’를 통해 프로그래머가 막아 놓은 길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그 막힌 부분을 투과해버린다. ‘영의 이중 슬릿 실험’(Young's double-slit experiment)에서처럼 파동의 성질을 보이던 전자는, 관찰자라는 매개 변수가 끼어들면 입자의 성질을 보인다. 이러한 자연 혹은 사건들은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초과하여 과잉의 형태로 존재한다.
우리의 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행위’는 ‘추상노동’ 위로 흘러넘친다. 그러한 흘러넘침은 정식화 될 수 없다. 혁명은 이 세계의 강렬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규정할 수 없는 형태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제도화하고 정식화할 수 있겠는가! 할리웨이 식의 비유대로라면, 혁명을 제도화는 일은 사랑의 시간을 결혼의 시간으로 전이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은 균열시키고 거부하고 창조하는 일이다. 이 책에는 할러웨이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가 나눈 서간문이 부록의 형식으로 실려 있다. 하트는 “우리의 자율적인 생산적 실천들, 즉 우리의 행위가 어떻게 대안적 사회형태로서 조직되고 또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 할러웨이는 매우 완고하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부분을 거론하는 것으로 갈무리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사랑이 제도화될 수 있나요? 나는 사랑의 혁명적 힘에 대한 당신의 참신한 생각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때 당신은 물어야만 합니다. 사랑이 제도활 수 있는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혼인계약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단지 ‘반복되는 사회적 실천, 즉 습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의 경험에 따르면, 사랑은 습관과 부단히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반복되는 사회적 실천의 맥락 속에서 잘 살아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부단히 그것-속에서-그것에-대항하며-그것을-넘어서 움직일 때에만 그렇습니다(391면).
*제목에 관해 비겁하지만 변명을 해야겠다. 처음부터 이 서평의 제목을 이렇게 어정쩡하게 정할 생각은 없었다. “반란 사용설명서”나 “반란 안내서” 따위의 제목을 부칠 생각이었다. 이것도 썩 매력적이지 않지만, 위의 제목보다야 나은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반란이나 균열을 제도화하거나 정식화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러한 노력들 속에 이러한 미세한 균열들의 갈라짐이 포획되어 버리며, 그 갈라짐은 다른 균열들과 연대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이유로 저자 역시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인 ‘행위’를 설명하는 장에 “틈새혁명의 멜로디들”이라는 제목을 부치고 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멜로디는 규정되지 않는 멜로디이며, 반(反)문법으로서의 멜로디이며, 생성의 멜로디다. 그러므로 새로운 멜로디다. 그러한 의미로 ‘멜로디’라는 말을 썼다. 그 사이의 ‘(가)시적’이라는 말은 이러한 멜로디를 한 번 더 설명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멜로디는 가시적(可視的)일 수 있으나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하며, 정식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시적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엄연히 존재하고 현실화 되는 혁명을 보이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 ‘가’에 ‘()’를 쳤다. 이렇게 하면 ‘시적’이 詩的으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라는 야무진 생각을 했다. 시의 형태야 말로 가장 반문법적인 형태일 것이니 멜로디를 수식하는 말로 가장 적절할 것이다. 결국 이 서평의 제목은 “균열 혹은 반란을 향한 멜로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제목을 어정쩡하게 만든 것은 저자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책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