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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제로섬 게임인가, 플러스섬 게임인가? 한국소설문학상 수상작가 이정은 최신 화제작! "플러스섬 게임"이 독자들의 세상과 만나게 되었다.
2017년 〈왕이 귀환하다〉로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한 이정은 소설가가 2018년 베스트셀러 《피에타》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2019년에 장편소설 《플러스섬 게임》을 완성했다. 2018년 소설집 《피에타》를 출간한 이후 1년여 만에 새 책을 낸 것이다.
모두 6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 《플러스섬 게임》을 관류하는 분위기는 ‘처절함’이다. 자전적 소설의 분위기를 풍기는 이 소설은 주인공인 박수희의 처절하고 치열한 삶이 치밀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남편 안문혁과의 애증, 시어머니와의 갈등, 중풍환자 시아버지의 간병, 여동생 박다미와 남편 안문혁과의 미묘한 관계 등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플러스섬 게임》에서는 소설가 박수희, 그녀의 남편이자 기업가인 안문혁,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여동생 박다미, 아들 안승민, 딸 안지혜 등 여러 작중인물들이 등장한다. 효자이며 강인하고 도전적이며 가부장적인 안문혁과 지적이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탈출을 꿈꾸는 박수희는 각각 스물네 살, 스무 살의 다소 어린 나이에 혼인한다. 결혼 생활은 험난한 현실이었다.
박수희는 시어머니의 질투에 시달리고 중풍 든 시아버지 병시중으로 고생하고 남편의 무심함에 괴로워한다. 두 사람이 비로소 사랑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한 것은 시부모가 별세한 후, 비로소 여행, 골프 등으로 부부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부터였다. 안타깝게도 박수희가 남편에 대한 사랑을 뚜렷하게 확인한 계기는 남편이 췌장암 발병으로 시한부 생명이란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죽음이 다가올수록 사랑은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소설에 대해 쓴 《커튼》이란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이 세상에는 인간이 보고 읽고 느끼는 모든 존재 앞에 마법의 커튼이 쳐져 있다.’ 사람들은 커튼 너머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커튼 위에 장식된 자수刺繡만 주시한다는 것이다. 명작은 그 커튼을 걷고 진실을 보여준다고 한다. 문학사회학자 뤼시앵 골드만은 “소설은 타락한 세계에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야기”라고 갈파했다. 쿤데라와 골드만의 소설관을 들으면 소설은 사실 기록 위주의 글과는 다른 차원에서 가치 있는 글임을 알 수 있다. 자전적 소설은 이래서 의의가 있다. 작가의 사적 체험을 넘어서는 작중인물이 나타남으로써 공감의 폭을 넓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중인물의 창조자다. 전지적 관점에서 작중인물의 심중을 훤히 꿰뚫어본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도 작중인물이 3인칭으로 묘사되면서도 ‘생각’을 통해 1인칭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새로운 감각이지만 전혀 혼란스럽지 않다. 작가는 주인공 박수희에 빙의돼 남편 안문혁의 내면세계를 마구 파헤친다. 이렇게 처절한 사부곡思夫曲이 탄생된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에게 이런 물음을 던진다. ‘우리의 삶은 플러스섬plus-sum 게임인가?’
이정은 작가의 작품들은 작가 자신이 가톨릭 신자의 입장에서 쓴 종교소설이라는 법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특정 종교의 범주에만 머물지 않는다. 보편적 삶과 내밀한 인간성의 폐부를 꿰뚫는 깊은 통찰력으로 독자들을 흡입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한 복합적인 시각을 갖게 되며,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성찰해보게 된다.
최근 직장에서 은퇴 후 글쓰기를 시작한 시니어 작가의 첫 책들이 눈에 띈다. 노년의 일상을 담백한 언어로 그려내며 비슷한 연배의 시니어 독자들에게는 공감을 얻어내고, 젊은 독자들에게는 격의 없는 어른의 모습으로 다가서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담백하고 진솔한 맛이 있는 시니어 작가들의 글에 매력을 느끼는 독자들이 앞으로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정은 소설가의 《플러스섬 게임은》인생의 특별한 순간을 포착해낸 작가의 섬세한 시선이 돋보이며 급속도로 고령사회로 가는 우리나라 현실에 세대공감을 할 수 있는 소설이다.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관계를 그린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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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섬 게임/ 이정은소설가/ 문학사상/
요즘 숫자 82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3년 전 출간된 82년생 여자 이야기가 베스트셀러이자 최근엔 영화로도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누구나 그 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출간된 ‘플러스섬 게임’의 주인공 박수희도 82, 82연령이다. 82연령이 82년생 보다 더 주목되는 까닭은 누구나 될 수 있으면서도 그러나 아무나 될 수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리라.
82년생은 남성과 대등한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약하며 인정받는 시대를 산다. 그럼에도 여자에 대한 고정관념은 여전하고, 결혼과 임신으로 경단녀가 되면서 졸지에 ‘집순이’, ‘맘충’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진행형인 여자의 삶이다.
그렇다면 82년생 보다 두 배는 더 되는 세월을 견뎌온 82연령의 여자는 어떠한 삶을 살았겠는가. 82년생에선 희생했다, 대우해달라, 댓가를 달라, 남자가 왜 그러냐, 원망이나 애원이나 비판도 하지 않는다지만 박수희는 쏟아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섬기는 하느님에게까지 원망과 애원과 비판을 토해내며 대든다.
하지만 박수희는 결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삶의 상황이 그녀를 더욱 세차게 흔들지라도 기어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으로 풀어내려 한다. 중풍으로 쓰러진 시아버지 대목만 해도 그렇다. 시아버지는 박수희에게 ‘부처님을 살찌우든 마르게 하든 그건 석수장이 손에 달렸다’며 석수장이가 되어 당신을 건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매달린다. 대소변을 받아내며 하루가 멀다 하고 이부자리를 빨아대는 기약 없는 병간으로 절망했던 박수희였으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이 된 시간이었다’며 고통의 세월을 은총의 시간으로 바꾼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자기 자신을 깎는 석수장이가 되리라, 있는 그대로, 현재 이 순간을 감사하게 받아들이리라 마음먹는다. 결혼으로 엮어진 시어머니와 남편, 여동생 등 폭풍처럼 몰아치던 애증의 관계도 그렇게 떠나보내고, 희생은 더 이상 희생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로 변주된다.
종국에는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해야하는 제로섬(zero sum)이 아닌, 둘 다 얻어지는 플러스섬(plus sum)으로 흐른다. 그래서 그 시대 누구나 될 수 있으면서도 이제 아무나 될 수 없는 여자의 이야기 ‘플러스섬’이다. 읽는 이에게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깊이 다가오는 까닭은 주인공 박수희가 소설을 쓰는 여자라서만일까. 플러스섬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감내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렇듯 가슴을 파고들지 못할 절절함이 작품을 관통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82연령과 82년생 사이, 고통과 좌절과 외로움의 길에 가이없이 놓여있는 이들에게 지금 Now, 여기 Here ‘플러스섬’으로 향하는 위로와 희망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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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섬 게임/ 이정은 저/ 문학사상
이정은 플러스섬 게임-사랑은 지독한 혼란, 기도(260쪽)
사랑이신 주님!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그리고 불리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자신의 정당성을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유혹에 번번이 굴복하고 마는 것이 저 자신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화가 치밀 때는 감정을 그대로 폭발시켜야만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커다란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시며 묵묵히 앞장서 가시는데, 저는 작은 십자가마저 무겁다고 불평하고 살아왔습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고 앞장서 가신 주님, 십자가를 거부하고 싶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하여 매일매일의 십자가를 불평 없이 수용할 수 있도록 성숙시켜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의 응답이 들려오는 듯했다.
순간 순간 네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위에 내 표지가 찍혀 있음을 굳게 믿고 신뢰하면서 네게 다가오는 매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니 먼데서 찾지 말라. 나는 바로 네 옆에 있다. 너의 가정, 네가 만나는 사람들, 부엌이 네가 사랑을 바치는 제대이다. 그리고 내가 거기 너와 함께 있다. 이제 가라. 그리고 네 삶으로 너의 길을 완성하여라.
나는 새로운 세계에 포함된 듯한 느낌을 받았고, 모든 바람이 이루어질 것 같이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전능하신 주님께 매달릴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나의 기도는 한순간에 보상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예수의 무한한 사랑을 배반한 유다야말로 사랑하려 몸부림치면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상차를 입히고야 마는 자신의 약함에 대한 유다의 절망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 던지는 조롱! 인간은 조롱을 받을 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피가 솟구치는 분노와 견딜 수 없는 굴욕감이 그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반응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에 대한 예수의 한없는 연민과 자신의 약함에 대한 유다의 절망이었다. 기도는 기도에 그칠 뿐, 마음을 착하게 다스리려고 하면 할수록 의심과 분노만 쌓여 갔다. 세상은 마치 나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잘만 굴러갔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있지도 않은 신에게 매달렸을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어쩌지 못해 몸부림친 것에 불과했다.
신, 옳고 정당한 심판자로서 언젠가 선이 이긴다고 인간을 세뇌 시킨 그 이름에 저주를 내리고 싶다. 나쁜 놈의 신.
신은 개인의 사정 따윈 관심 없으니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네가 원하는 삶은 어디 있는가? 언제나 착한 사람도 없고, 언제나 나쁜 사람도 없다. 처한 상황, 서 있는 곳이 사람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한다.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께 가시관을 씌우고 예수를 때리고 침뱉고 조롱한 로마병사들이 특별히 악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몰이해에서 연유될 수 있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내게 악하게 대한다면 그는 나쁜 사람이다. 세상 사람에게 정신적인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해도, 나에게가 아니면, 신은 아무 소용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신은 없다고, 내 편이 아니라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내 마음속에서는 신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결코 너를 버리지 않으리라. 나는 항상 네 옆에 있다." 아직 희망을 놓지 말라고, 더 성숙해지라고 다그치는 소리였다.
어느 날 주일미사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커피를 뽑아 드는데 ‘성서공부’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그것을 발견했을 때 내가 구원받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일주일에 세 번씩 성서공부를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마포 절두산성당에서 해방신학, 명동성당에서 베소라 성경 및 성서 40주간 등. 인생을 반추하며 겸손을 배우려고 애썼고, 삶을 어떻게 견뎌낼까 고민도 했다. 공부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성경공부에서 얻은 지혜를 실생활에 적용하리라고 결심했다. 나는 아침마다 남편의 구두를 닦아 가지런히 놓았고 아침인사를 다시 시작했다. 조급하게 굴지 말자고, 대가를 바라지도 말자고 자신에게 다짐했다. 그러나 남편의 태도는 냉담했다. ‘잘 다녀오세요’라는 내 목소리는 현관문의 금속성 울림에 잘려져 나갔다.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을 잡기엔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성령 세미나 네 번째 시간, 그날 주제는 봉사와 회유였다. 강사의 간증 내용은 남편을 회유시킨 이야기였는데 듣고 있노라면 희망이 생긴다. ‘그래, 좀 더 잘해 보자!’ 우현은 술을 마시지 않으니 주정도 안 한다. 애인을 두고 딴 살림을 차리지도 않았다. 부족하지만 생활비도 준다. 나만 마음을 풀면 간단한 것 같다. 간증 강사 남편에 비하면 우현은 착하다. 친정 식구들이 있다고 불평도 하지 않는다. 이번에도 나는 ‘나 자신’을 죽이리라 결심한다. 예수께서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저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무게를 가늠해보면서 그분께 내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기도했다.
사랑하는 주님! 나는 손해 볼까, 누가 나를 업신여길까봐 늘 경계하고, 경계하며, 단 한번도, 나를 먹거리로 내어 놓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가진 것 얼마를 내어 놓으라면 할 수는 있겠습니다. 약간의 봉사 활동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나를 음식으로, 먹거리로 내어 놓아 씹히고 먹히는 것을, 쪼개어지고 바수어지고 먹히는 것은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도와 주십시오. 때어지고 나누어지는 당신처럼 타인에게 나를 먹거리로 내어 놓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의 응답이 들려오는 듯 했다.
지금 네가 걷고자 하는 길은 너 홀로 걷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걷는다. 그러나 이 차이를 기억하라. 내가 내 생애를 내 죽음으로 장식하기 전까지 내 생애는 미완성이었다는 것을. 너의 '길'은 네 삶으로 장식할 때 비로소 완성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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