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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흔적이 담긴 곳, 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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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흔적이 담긴 곳, 궁을 찾아서...>   서울에는 몇 개의 궁궐이 있을까? 어른들에게 물어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가 되어서 역사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피니 내가 살고 있는 서울 도시 한복판에 5대 궁궐과 마주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쁜지 모른다. 정부 정책에 따라 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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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흔적이 담긴 곳, 궁을 찾아서...>

 

서울에는 몇 개의 궁궐이 있을까? 어른들에게 물어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가 되어서 역사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피니 내가 살고 있는 서울 도시 한복판에 5대 궁궐과 마주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자랑스럽고 기쁜지 모른다. 정부 정책에 따라 다르지만 해마다 조금씩 복원이 되어가는 궁궐의 모습이나  성곽을 볼 때면 뿌듯하기도 하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궁금해지고 모르는게 더 많아지니 희안한 일이다. 5대궁궐만 알면 임금이 살았던 곳에 대해서 다 알거라고 생각했는데 서울 곳곳에는 내가 모르는 궁의 이름을 가진 곳이 참 많더라. 간혹 문화 해설사에게서 듣는 이야기 속에 궁금한 것들이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궁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풀 수 있었다.

 

우선 궁궐에 대한 개념부터 정리해야지 싶다. 궁이라고 하면 임금이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고, 궐이라고 하면 망루를 뜻하며 이는 정사를 보는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궁궐은 왕의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이 함께 있는 곳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길 이름에서도 흔히 접하게 되는 궁은 왕족이 사용하는 장소란다.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장소도 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면 장자가 왕이 되는 것은 흔치 않다. 반정을 통해서 왕의 자리에 오른 이도 있었고 왕위를 이을 이가 없어서 엮고 엮여 멀리 강화도에 살고 있는 이를 왕위에 오르게도 한다. 왕이 아니더라도 왕족이 사는 곳까지 이르니 궁이라고 할 곳이 참으로 많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 빌딩 숲에 사라져 남아있는 궁도 적고 흔적 찾기도 쉽지 않다.

 

문화해설사로도 활동한 저자는 국유화 사유화 되면서 변해간 조선시대 왕실 가족의  궁들의 흔적을 더듬고 있다. 목차에서 이미 누가 살던 궁인지 나와 있어서 더 기억하고 찾아보기 쉽다. 직접 그곳을 가지 않고 주변을 잘 알 수는 없지만 상세한 설명과 더불어 왕실 관계를 알 수 있도록 조선 왕조 관계도가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결코 간단하지 않은 관계도를  살피면서 파벌의 다름도 함께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부록에 서울의 궁에 대한 간단한 약도가 나와있어서 한눈에 들어온다.

 

단순히 왕 하나만이 아니라 왕의 가족사를 아는 것은 또 다른 역사의 이해가 아닌가 싶다. 길을 따라 걷지는 못했지만 600년 도읍지 서울에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역사가 숨어 있어서 더 가슴 뛰는 이 기분, 정말 좋다.

c******u 2013.06.29. 신고 공감 1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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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평단 이순자 글. 사진   책을 보더니 남편이 말하네요. 너는 맨난 역사관련된 책만 보냐 라고 합니다. 그러면 문화유산해설사나 되바라 라고 하니다. 그럴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연세드신분들이 소일거리로 하실수 있는 유일한 일일수도 있다 우리가 그곳까지 침범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책을 보면서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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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평단

이순자 글. 사진

 

책을 보더니 남편이 말하네요. 너는 맨난 역사관련된 책만 보냐 라고 합니다. 그러면 문화유산해설사나 되바라

라고 하니다. 그럴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연세드신분들이 소일거리로 하실수 있는 유일한 일일수도 있다

우리가 그곳까지 침범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책을 보면서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책까지 쓰신 필자분에서 경의를 표하고 싶고 또 그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자료를 찾았을 거 부지런함에 존경을 표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너무나 우습고

가볍게 보았던 문화유산해설사라는 직업을 다시한번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이현궁 광해군의 잠저로 지금 공빈김씨의사당이 되었고, 연주부부인이 살았고 숙빈최씨의 소유이기도 했고

지금은 종로 플레이스, 인의 빌딩이 들어서 있다. 본영도형이라는 책에는 은행나무의 수령이 465년으로

나온다(1981년기준). 은행나무를 기준으로 비교하면 이현궁의 위치가 나온다.  차남이지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의 잠저이지만 지금은 은행나무만이 지키고 있다.

 

창의궁은 영조의 잠저이다. 효종의 딸 숙휘공주가 결혼해 살았고, 숙종이 연잉군에서 하사했다. 그이후에는

사당의 역활을 주로 했다. 영조는 51년정도 왕위에 있으면서 창의궁에 출입을 자주했다.그러니 당연히

규모가 커질수밖에 없다. 글이나 어필도 많다. (배사묘흥감이작, 어제구저기, 어제어필 이안와시병서등)

지금은 표지석과 백송이 자리를 지키고있다. 금융감독연수원과 주택가가 들어서 있다.

 

운현궁은 고종이 잠저이며 흥성대원군의 집이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가례를 치룬곳이고 한양내의 궁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다. 현재 봄,가을로 명성황후의 가례의식 재현행사를 하고 있꼬, 노락당마당에서는

주말이면 전통혼례를 할수 있도록 빌려주고 있다. 규모가 크고 볼만한곳이 많으니 주말에 찾아가서

살펴볼만한 것이다. 도로명주소로 종로구 삼일대로 461에 위치하고 있다.  

 

칠궁은 육상궁-숙빈최씨, 연호궁-정빈이씨, 저경궁-인빈김씨, 대빈궁-희빈장씨, 선희궁-영빈이씨,

경우궁-수빈박씨, 덕안궁-순빈엄씨를 모신  사당이 있다. 매년 10울 넷째주 월요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날에만 공개를 하니 칠궁을 거닐고 싶다면 또 드라마의 주인공(장희빈과 동이)이 되고 싶다면 꼭

기억하라고 했던것이 기억이 난다. 도로명주소로 종로구 창의문로 12에 위치하고 있다.

 

책을 보면서 아쉬운점은 지금의 흔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고 나무아니면 표지석만이 있다. , 도로명주소를

도입하면서 좋은점도 많겠지만 고유의 지명이 없어지는 상황이어서 필자의 아쉬움이 컸다.


 

k*****7 2013.03.0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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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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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둘러보다가 과거에 읽었던 역사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 제목은 『조선의 숨겨진 궁가 이야기』. 어려서부터 답사여행을 좋아했었던터라, 답사에 도움이 되는 역사책을 자주 사곤 했었다. 이 역사책을 구입한 이유도 답사였다. 특히 이 책을 구입할 즈음엔 조선 궁궐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던 바로 그 시기이기도 했다.분명 조선의 궁궐은 5개(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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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둘러보다가 과거에 읽었던 역사책이 눈에 들어왔다. 책 제목은 『조선의 숨겨진 궁가 이야기』. 어려서부터 답사여행을 좋아했었던터라, 답사에 도움이 되는 역사책을 자주 사곤 했었다. 이 역사책을 구입한 이유도 답사였다. 특히 이 책을 구입할 즈음엔 조선 궁궐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던 바로 그 시기이기도 했다.





분명 조선의 궁궐은 5개(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인데, 왜 일반적으로 경희궁을 제외한 4대 궁으로 이야기하는지


종로에는 운현궁이, 강화도에는 용흥궁이 있는데 이 저택들도 내가 생각하는 ‘궁궐’이 맞는건지


역대 조선 왕들은 자신의 아들, 딸이 결혼하면 궁 밖에 저택을 하사했는데, 그럼 그 많던 저택은 다 어디로 갔는지 


예컨데 구로 궁동은 선조의 딸인 정선옹주가 살았던 곳이며, 그 저택이 궁궐과 같다하여 지명도 ‘궁동’으로 남았는데, 그럼 수많은 왕자군과 공주, 옹주 집들은 전부 궁궐같은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는지


기타 등등등!!



조선의 궁궐과 조선 왕실 가족들이 살던 곳에 대한 궁금증이 폭발하던 때였다.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읽었던 책이었다. 물론 책을 읽은지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기에^_T. 겸사겸사 이번에 다시 읽어보았다.




 







주의사항 ! 이 책은 조선 역대 왕들이 거주했던 5대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왕으로 즉위한 후 거주했던 5대 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보통 조선에서 왕이 되는 방법은 왕의 아들로 태어나 세자 시절을 거쳐, 부왕이 죽으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세자시절을 비롯해 왕위에 즉위해서도 경복궁 내지는 창덕궁에 거주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사를 통틀어서 정상적인 방식으로 왕위에 오른 왕들이 몇 없었다. 대다수의 조선 왕들은 세자가 아니었지만 반정을 일으켜 왕이 되거나, 선왕이 후사가 없어서 지명되어 왕이되거나, 세자였던 형님이 나가리(?) 되면서 왕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고로 왕이 되기 전까지는 세자가 아닌, 그저 왕의 아들로 궁 밖에 나가서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궁 밖에 나가서 살던 왕자들이 갑자기 왕이 되었다. 자연스레 왕자시절에 살던 저택은 ‘왕이 살던 곳’이 되었고, 그렇게 ‘궁’이라는 글자가 붙게된다. 하지만 즉위한 왕이 사는 궁궐은 아니다. 대신 궁에 준하는 집, 집 가(家)라는 자를 붙여서 ‘궁가’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함정은 궁가가 왕이 살던 곳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왕이 대군 및 왕자군, 공주 및 옹주들에게 하사하는 저택들 역시 궁가라 불리었다. 뿐만아니라 왕을 낳은 후궁이라던가, 대원군 등의 신주를 모신 사당도 ‘궁’이다. 




고로 이 역사책은 ‘궁’이라 붙여진 저택에 살았던 조선 왕실 사람들의 이야기다. 왕이 되기 전이었던 대군들이나 왕자군 이야기도 당연히 포함이다. 예컨데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조선 왕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이후 왕실 가족들이 떠난 궁가들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현재는 어떤 모습인지도 확인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조선의 궁가들은 한성, 지금의 ‘서울’에 포진되어 있으므로 서울 답사 여행 역사책으로 추천한다. 다만 이 책이 발간된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현재 내가 소장한 책은 절판되었다. 대신 2013년에 동일한 내용으로 개정판이 나온듯 하다.





어의궁은 한성부 서부 인달방에 있던 궁가로 인조가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상어의궁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 있던 궁가로 효종이 태어난 곳이고, 하어의궁은 한성부 동부 숭교방에 있던 궁가로 인조와 효종이 살았던 곳이다. 상어의궁은 ‘잠룡지’ 라고도 부르고, 하어의궁은 ‘어의동궁’, ‘용흥궁’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어의궁이라고 하면 하어의궁을 말하는데, 이곳에서 인조 이후 14명의 왕비와 왕세자빈의 가례를 올렸다. p 048




하어의궁은 1638년(인조 16)부터 효종, 현종, 숙종 대를 거쳐 영조, 순조, 현종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실의 가례소로 중요시 되었다. 특히 숙종의 세 왕비는 모두 이곳에서 가례를 올렸고, 1757년 6월 영조는 15세의 정순왕후를 이곳에서 맞아들였다. 영조의 두 아들과 손자 정조 가례식도 이곳에서 올렸다. 조선 후기 왕비와 세자빈들의 가례소인 이곳에 오늘날 웨딩프라자가 들어섰으니 확실히 땅의 기운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p 053




창의궁은 한성부 북부 순화방에 있던 궁가로 영조가 연잉군 시절에 살던 곳이다. 이곳은 원래 효종의 딸 숙휘공주와 부마 정제현이 살았는데, 숙종이 연잉군에게 하사했다. 경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세제 연잉군이 경종의 뒤를 이어 영조로 즉위했다. 그후 효장세자가 죽자 이곳에 효장묘를 세우고, 의소세손이 죽자 의소묘를 세웠다. 순조 때는 효명세자의 사당인 문효묘를 세우기도 했다. 1900년에는 의소묘와 문희묘(문효세자 묘)를 영회전으로 옮기면서 창의궁은 폐궁되었다. p 063




영조 즉위 4년 후인 1728년, 효장세자가 10세로 요절하자, 영조는 다음 해 11월 5일 “창의궁은 곧 사저로 동궁에 속한 것이니, 만일 지금 그 궁에다 사당을 세운다면 어찌 사세가 둘 다 편리하지 않겠는가?” 하며 세자가 어린 시절에 살던 창의궁에 사당인 ‘효장묘’를 세웠다. p 068




일제강점기에 비어 있던 창의궁은 1908년 동양척식회사가 소유하면서 2층 건물의 직원 사택이 들어섰다. 1912년 토지조사사업 당시 동양척식회사 소유의 1필지였는데 이후 최창학의 소유가 되었다. 광복 후 필지가 분할, 매각되어 2011년 현재 108개의 필지로 나뉘었다. 종로구 통의동 35번비 15호에는 ‘통의동 백송’이 있어 이곳에 고택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p 073






영조의 후손들이 줄줄이 요절했다. 정확히는 후계를 이을 후손들이. 아들 효장세자를 시작으로 손자 의소세손, 증손자 문효세자, 고손자 효명세자 까지. 왕위에 즉위하기 전까지 영조가 살았던 그 저택이, 요절한 영조의 후손을 모시는 사당이 되어버린 운명의 장난인걸까?





운현궁은 한성부 중부 정선방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집이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 태어나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살았던 궁가다. 이곳은 구름재, 즉 운현에 있어 ‘운현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고종이 명성황후와 가례를 치른 곳이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며 나랏일을 보던 곳이기도 하다. 한양 내의 궁가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있고, 소규모 궁궐과 같이 4대문을 갖춘 곳으로 궁가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 p 077




흥선군이 부친의 묘를 이장하느라 살고 있던 안동별궁을 정리했기 때문에, 남연군의 아들들은 운현 근처로 이사를 했다. 이때 흥완군 이정응은 계동에, 흥선군은 운현 아래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묘를 옮기고 나서 7년 후인 1852년(철종 3년) 드디어 운현 집에서 둘째 아들 명복이 태어났다. 풍수지리에서는 묘를 쓰고 얻은 자식이 그 묘의 발복을 얻는다고 하는데, 명복은 조상의 음덕으로 태어나 운현 언덕에서 뛰어놀며 큰 소나무를 타고 놀던 12세의 소년이 되었다. p 080




고종은 왕위에 오른 후 대원군 궁가의 면세 전결 1,000결에 대한 토지 값으로 은 2,000냥을 실어보내고, 궁장이 갖춰지기 전에는 국가에서 콩 100석과 선혜청에서 쌀 100석을 5년 동안만 실어보내라고 했다. 또한 호조에서 집을 수축하는 비용으로 1만 7,830냥을 보냈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살던 집을 수리하면서 신축을 하는데, 전국 일류의 목수들과 최상급의 자재들을 동원했다. 운현궁의 규모가 가장 컸을 때는 약 3만 3,058제곱미터(1만 평)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규모와 화려함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p 085




일제강점기에 운현궁은 구황실 재산으로 압류되었으나 그 후손들이 거처하고 있었다. 1948년에는 미 군정청이 운현궁은 왕실 재산이 아닌 개인 재산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개인 소유로 등기되었다. 이때부터 개인 재정으로 운현궁을 유지했는데,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예식장도 운영하고, 땅을 분할해서 팔기도 하며, 도로변으로 상가를 지어 운영하기도 했다. p 092




종로구 운니동 114번지 7호는 덕성여자대학교 종로 캠퍼스다. 운현궁이 팔려나갈 때 이 터와 양관 건물은 덕성학원의 소유가 되었고, 현재 양관은 덕성학원 법인사무국으로 사용하고 있다. 종로구 운니동 114번지 8호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헌병초소가 있던 자리로 운현궁의 움직임을 감시했던 곳이다. 1968년 운현궁의 뒤뜰 약 3,074제곱미터를 일본대사관에 매각하려 했으나, 시민들의 반대로 취소한적이 있었다. 1975년 일본문화관이 입주하여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종로구 운니동 114번지 9호와 114번지 31호는 김승현의 소유로 9호는 서울빌딩이고, 31호는 운현궁의 별당인 영로당이다. 1948년 9월 4일 박찬주는 운현궁의 소유권을 이청에게 이전하고, 9월 7일 영로당 권혁을 김승현에게 팔았다. 현재는 김승현의 셋째 아들 김영무가 소유하고 있는데 그는 법무법인 김앤장의 대표 변호사다. p 094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궁가는 몇 개 없다. 운현궁, 용흥궁, 칠궁 정도다. 그 중에서도 운현궁에선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운현궁은 흥선군 이하응의 저택이다. 흥선군은 뛰어난 정치능력으로 자신의 차남을 왕으로 만들었다. 조선의 마지막 왕 고종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다. 이미 망국 열차를 탔던 나라였고, 왕이된 고종마저도 백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뭐 고종에 대해선 할말이 많으나, 워낙 관련 포스팅을 많이 했으니 각설하고. 




운현궁의 역사만 봤을 때, 흥선대원군이 처음부터 운현궁에서 산 건 아니었다. 부친인 남연군 묘를 예산에 이장하는 과정에서 돈이 부족하여, 자신이 살던 곳들을 정리하고 이사 온곳이 바로 운현궁이다. 운현궁 역사의 시작점이 남연군 묘 이장이라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알았다. 약간 좀 새로운 느낌이랄까? 이 외에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이 되는 과정에서 운현궁이 지금 모습이 되기까지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운현궁 역사의 끝에 김앤장이 나올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누동궁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 있던 궁가로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이 살았고, 철종이 태어난 곳이다. 철종은 왕위에 오르고나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형 영평군을 이곳에 살게 했다. 1869년에는 안동별궁에 있던 전계대원군의 사당을 이곳으로 옮기며 ‘누동궁’이라고 했다.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박영효의 혼례가 이곳에서 거행되기도 했다. p 115




1752년 사도세자의 승은을 입어 승휘에 오른 임씨는 은언군과 은신군을 낳은 후 양제가 되었다.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 임씨도 폐서인되어 두 아들과 함께 궁궐을 나와서 전동에 살게 되는데, ‘양제궁’이라 불렸다. 영조가 은언군의 행방을 탐지할 때 ‘전동의 집’을 언급했던 적이 있다. 영조는 죄책감에서인지 사조세자의 서자들에게 관대했다. 그러나 은언군과 은신군은 젊은 나이에 늙은 재상이 타는 남여를 타고 다니고, 시전 상인들에게 수백 냥의 빚을 지고 갚지 않는 등 방자한 행동을 하여 1771년 제주도 대정현에 안치되었다. 그해 은신군이 제주에서 사망하자, 이에 놀란 영조는 즉시 은언군을 석방하라는 명을 내리고, 은언군이 살 두어 칸의 집을 사서 지급하도록 하고 생모 임씨와 노복의 왕래를 허락했다. p 116




은언군은 정도 등극 후 홍록대부에까지 올라 세 아들 이담(상계군), 이당(풍계군), 이광(전계군)과 편안히 살았다. 그러나 1786년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이자 정조의 후궁인 원빈이 죽자, 은언군의 장자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 그리고 상계군을 가동궁이라 하며 왕위를 잇게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홍국영이 쫓겨나 병사한 뒤로도 그 일당들은 계속 역모를 꾸몄고, 상계군은 자신이 역모에 연루되자 자살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언군도 연루되었다 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인으로 순교하자, 향년 48세로 강화도 귀양지에서 사사되었다. 송씨와 신씨는 신유박해 때 유일한 왕실의 순교자가 되었다. p 117




은언군이 사약을 받아 죽고 난 후 풍계군과 전계군은 강화도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1822년(순조 22년) 순조는 사촌동생들이 살고 있는 강화도 집의 가시울타리를 철거하여 일반 백성처럼 살게끔 했다. 그리고 혼사 비용을 챙겨주고 종친부가 주관하여 혼사를 거행하게 했다. 전계군은 이 때 세 아들 원경, 경응(영평군), 원범(철종)을 낳았다. 이 때는 순조의 배려로 전계군이 누동궁과 강화도를 오갈 때인데, 철종은 누동궁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자랐다. 그런데 1844년(헌종10년) 안동 김씨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하급 무사인 민진용 등이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발각되었고, 이 일로 원경이 사사되었다. 따라서 경응과 원범은 또다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p 119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순조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19세의 강화도령 원범이 입궁하여 덕완군에 봉해지고 왕위에 올라 철종이 되었다. 따라서 원범이 살던 곳은 왕이 살던 잠저라 하여 ‘용흥궁’이라 불렸다. 본래 용흥궁은 ‘철종조잠저구기’라고 쓴 비석과 비각이 있는 초라한 초가집이었다. 이것을 1853년(철종 4년)에 강화도 유수 정기세가 기와집으로 개축하고, 1903년 전계대원군의 사손 청안군 이재순이 보수하여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규모의 ‘용흥궁’이 된 것이다. p 120






철종의 잠저는 누구나 다 알듯 강화도에 있는 용흥궁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 즉위 전,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으로써 강화도 유배시절 살았전 잠저다. 철종은 즉위하기 전까지 한양에도 거주했다. 바로 철종의 부친, 전계대원군의 저택인 누동궁이다. 철종은 누동궁에서 태어났다.




개인적으로는 운현궁의 역사도 흥미로웠지만, 누동궁의 역사도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뭐랄까? 은언군이 사도세자의 서자라는 것도 알고있고, 정조 때 상계군 역모 사건도 알고 있고, 그로 인해 은언군과 은언군의 아들들이 강화도로 유배간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다 왕실 후사를 이을 사람이 없어서 은언군의 손자 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했다라는 내용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내용만으로는 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강화도에서만 살았던 이원범이 진짜로 왕이 될 수 있는건가? 글자는 알고 있는건가? 뭐 이런 의문들 말이다. 




하지만 이 책 덕분에 그 의문이 풀렸다. 애초에 철종의 부친인 전계군은 순조의 배려아래 한양과 강화도를 자유로이 오갈수 있었다. 그 덕분에 원범이 한양 누동궁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랐다. 이복형 원경의 역모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복형 원경의 역모사건으로 인해 강화도로 유배간 것일 뿐, 원범은 한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순진무구한 강화도령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담이긴 하지만, 왕위를 이어야할 영조의 후손들은 줄줄이 요절하고, 영조가 직접 죽인 아들 사조세자의 후손들은(정확히는 방계지만) 줄줄이 역모죄에 휩쓸려 죽어나갔다는게 참 아이러니하다.



c******0 2024.03.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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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역사 연구의 단비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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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로 들춰보았을 때는 가벼운 입문서일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책을 읽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불필요한 부분은 일절 없이 문헌과 고증, 답사를 통해 조사된 내용과 출처가 빼곡하게 붙어있습니다. 미리보기 중에 상상해 본다는 구절이 있어서(도정궁(都正宮)의 사진들을 마음으로 새기며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후략) -<제2장 왕을 낳은 부모가 살다 ‘도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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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기로 들춰보았을 때는 가벼운 입문서일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 책을 읽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불필요한 부분은 일절 없이 문헌과 고증, 답사를 통해 조사된 내용과 출처가 빼곡하게 붙어있습니다. 미리보기 중에 상상해 본다는 구절이 있어서


(도정궁(都正宮)의 사진들을 마음으로 새기며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후략) -<제2장 왕을 낳은 부모가 살다 ‘도정궁’> 중에서 p. 110)


아무래도 저자의 생각이 들어간 부분이 있는게 아닐까 내심 걱정했는데(요새 나오는 인문서적의 경우 어디에 연재하던 것이나 읽기 쉽게 서술하려다 보니 사실이나 내용와는 관계없는 저자의 생각이 들어가는 책이 종종 있습니다)그런 부분은 각 항목의 맨 끝에 들어있었고 그나마도 철저한 조사를 통한 가설을 기반으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해보는 정도였습니다. 학술서적에 가깝게 정보를 눌러담은 책이지만 그렇다고 책 전체가 딱딱하진 않습니다. 서술은 읽기 편하게 되어있습니다.


또한 사료 조사와 현지 답사에 등기부등본과 건축물관리대장까지 조사하여 건물이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 가능한 최대한 조사해놓은 부분에서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진 자료와 도판, 연대표 역시 적재적소에 충실하게 실려있습니다. 글자 하나 그림 하나까지 꼼꼼히 챙겼다는게 눈에 들어옵니다.


마음에 걸렸던 것 중에 하나가 수빈 박씨의 표기문제인데 이 또한 설명이 붙어있더군요(순조의 모친 綏嬪 朴氏는 지금까지 수빈이라고 읽어왔습니다만 몇년전에 장서각 소장품 중 진향문에 한글로 유빈이라고 표기된 것이 발견되어서 유빈으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본 도서에서는 기본적으로 수빈 박씨로 표기하고 경우궁의 설명 부분에서 이 진향문의 사진과 설명을 붙여놓아 이해를 쉽게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장 최신의 정보, 사건들을 정리하여 소개하는데 노력한 흔적이 책 곳곳에서 묻어납니다.


또한 도서의 맨 마지막 부분에 책에서 다뤘던 서울 시내의 궁들을 표시한 지도를 삽입하여 이 책 한권만 있으면 그 장소를 직접 찾아가 그 흔적을 짚어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책의 정보량은 거의 전문서적/조사 보고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을 대상으로 한 인문 서적에서 이만큼의 정보를 눌러넣기도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사료와 관련 문헌, 답사 등 발굴조사를 제외한 모을 수 있는 모든 정보가 이 책에 다 모여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시발점이 되어서 언젠가는 각 궁에 대한 전문기관의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합니다.

d*****i 2013.03.0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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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숨겨진 역사 조선 왕실 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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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숨겨진 역사 조선 왕실 가족사를 알아본다.왕이 살았던 궁궐은 아는데 왕가는 뭘까? 궁(宮)은 왕족이 사용하는 장소로 왕가, 궁집, 궁가,궁방이라고도 불린다.그리고 기능에 따라 잠저,사당,제택으로 나눌 수 있다.잠저는 왕의 서열이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말한다.만약 세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궁궐 밖에서 살다가 궁궐로 들어오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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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숨겨진 역사 조선 왕실 가족사를 알아본다.왕이 살았던 궁궐은 아는데 왕가는 뭘까?





궁(宮)은 왕족이 사용하는 장소로 왕가, 궁집, 궁가,궁방이라고도 불린다.그리고 기능에 따라 잠저,사당,제택으로 나눌 수 있다.잠저는 왕의 서열이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말한다.만약 세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궁궐 밖에서 살다가 궁궐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때 왕이 살던 옛 집을 잠저라 한다.저자의 깊은 고증과 귀중한 자료들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세조가 혼인하여 살던 영희전, 광해군이 살던 이현궁, 인조가 살았고 효종이 태어나 살던 어의궁, 영조가 살던 창의궁, 고종이 태어나 살던 운현궁이 잠저에 속한다.사당은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가 왕이 될 경우 왕의 어머니는 왕비가 아니므로 죽은 후에 신주를 종묘에 모시지 못한다.또 왕위 계승자가 아닌 왕자가 왕이 되었을 때 그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왕이 살았던 영희전,이현궁,어의궁,창의궁,운현궁이며,왕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셨던 경모궁,육상궁,연호궁,저경궁,대빈궁,선희궁이고,출가한 왕의 자녀들이 살던 용동궁,계동궁,사동궁,창성궁,죽동궁이 바로 왕가다.


이 때문에 왕의 어머니와 아버지,즉 사친(私親)을 모시는 사당을 궁이라 불렀다.궁에는 어머니의 사당인 육상궁,연호궁,저경궁,대빈궁,선희궁,경우궁,덕안궁과 아버지의 사당인 도정궁,경모궁,누동궁이 있다.




제택은 혼기가 차서 출가한 왕의 자녀들인 왕자가 살던 집과 공주나 옹주가 혼인 후 남편과 살던 집도 궁이라 불렀다. 그 예로 용동궁,계동궁,사동궁,창성궁,죽동궁 등이 있다. 그리고 왕가의 특별한 행사를 위해 지은 별궁으로 안국동별궁이 있고,요절하거나 후사 없이 죽은 왕자와 공주를 위한 수진궁도 있었다.




그 많던 궁은 왜 사라졌는가?




고종은 1904년 궁중에 황실제도정리국을 설치하여 황실의 재산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1907년에는 대부분의 황실 재산이 국유화되었다. 자식이 왕위에 올랐으나 종묘에 들지 못하는 후궁들의 사당이 한곳에 모여 칠궁이 된 것도, 선농단과 선잠단이 사직단에 합쳐진 것도, 역대 어진을 모신 전각들이 선원전만 남기고 사라진 것도 이때였다.더불어 한양의 궁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특히 황실 재산을 국유화하기 위해 전 국토의 소유권을 조사하고, 조사 결과 황실의 재산으로 판명되면 국유화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 시대 한양의 왕실 가족들이 사용하던 궁들은 국유화되거나 개인의 소유가 되면서 그 모습이 변해갔다.귀중한 자료들이 소실되고 도시의 개발로 흔적이 모호하다.






한시대를 풍미했던 조선시대의 역사적 산물인 왕실의 흥망성쇄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시대에 함께있다 .권력의 무상함 결국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고 또 사라져간다.역사 속 숨겨진 역사 조선 왕실 가족사 이 책을 읽는 내내 유한한 인생의 무상합을 본다.
s********k 2013.02.2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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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한 축 왕가를 이해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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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한 축 왕가를 이해하는 길 텔레비전 드라마의 단골 메뉴 중 하나가 왕과 왕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무엇이 그 이야기를 안방 깊숙한 곳까지 끌고 들어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일까? 지나간 이야기이기에 지금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흥미도 있겠고 역사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보통의 사람들로써는 가지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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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한 축 왕가를 이해하는 길

텔레비전 드라마의 단골 메뉴 중 하나가 왕과 왕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무엇이 그 이야기를 안방 깊숙한 곳까지 끌고 들어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일까? 지나간 이야기이기에 지금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흥미도 있겠고 역사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보통의 사람들로써는 가지지 못한 권력에 대한 근본욕구도 작용하지 않을까 싶다. 수많은 드라마를 통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왕과 그 주변 사람들의 생활 모습들 중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왕가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을까? 이런 호기심을 풀어줄 책이 출간되었다.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역사공부가 개인의 흥미를 넘어서 서울시문화유산해설사로 활동하는 저자 이순자가 궁(宮)이라는 문화재에 호기심을 갖고 조사한 결과를 결집한 책, 역사 속 숨겨진 역사 조선 왕실 가족사의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는 바로 이런 왕과 왕의 가족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그들이 살았던 집인 궁(宮)에 주목하여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져 버린 흔적들 속에서 ‘사라져가는 왕가와 묻혀진 그 역사를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출간한 책이라고 한다.

 

영희전, 이현궁, 어의궁, 창의궁, 운현궁과 경모궁, 육상궁,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그리고 용동궁, 계동궁, 사동궁, 창성궁, 죽동궁 이 모두는 왕과 관련된 궁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어떻게 구분되는지 알고 있을까? 저자의 발품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며 역사와 문화재에 대해 더 깊은 관심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앞서 세 가지로 구분한 영희전를 비롯한 경모궁 그리고 용동궁은 당연히 왕과 왕의 가족들의 주거와 관련이 된다.

 

그렇다면 이런 궁과 관련된 저자의 발품을 따라가 보자. 우선 궁(宮)은 왕족이 사용하는 장소로 왕가, 궁집, 궁가, 궁방이라고도 불리며 기능에 따라 잠저, 사당, 제택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명칭은 익숙한 역사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기에 그 구별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바로 왕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이야기이기에 드라마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이야기를 접한다면 더 실감나지 않을까 싶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 왕가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현장을 찾아보는 것이리라.

 

1937년 헬렌 켈러가 방문한 서울맹아학교는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사당 선희궁이었고, 고종의 정치 고문 묄렌도르프가 살았던 곳은 순회세자의 궁가였던 용동궁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태화관 별유천지는 영응대군의 딸 길안현주와 사위 구수영이 살았고,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가 나와 살던 순화궁이었다고 한다. 이런 공간들이 점점 사라져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건물 말고는 이젠 그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 별로 없다.

 

역사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남겨진 흔적들을 통해 재구성된다. 이렇게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흔적들이 후손들에게 기억되지 못한다면 역사의 재구성도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저자가 궁의 현장을 찾아다니며 안타까움을 떨치지 못하는 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주소를 새롭게 정비한다면서 기존에 사용하던 길거리의 이름을 아애 바꿔버리 이젠 그런 흔적조차 찾아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개인소유이거나 국유화된 문화재들이 향후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궁금하다. 역사인식 없이는 그 무엇 하나도 올바른 모습으로 후대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문화재 뿐 아니라 역사 전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m*****8 2013.03.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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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서 바라 본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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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일반인이다. 그러나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면서 역사를 공부하더니, 지금은 서울시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고 있다. 이렇게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궁’ 에 대한 공부를 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해서 많은 책을 읽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역사적인 고증을 위주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왕조실록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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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는 역사를 전공하지 않는 일반인이다. 그러나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면서 역사를 공부하더니, 지금은 서울시문화관광해설사로 일하고 있다. 이렇게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궁’ 에 대한 공부를 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해서 많은 책을 읽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은 거의 대부분 역사적인 고증을 위주로 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왕조실록을 기반으로 여러 역사책을 섭렵하고 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관점을 기반으로 한다. 하나는 인물 중심으로 서술하는 역사, 다른 하나는 사건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TIME” 과 ‘New Week’의 를 두 가지 잡지는 각각 인물 중심, 사건 중심으로 뉴스를 전한다. 그러나 이 책은 또 하나의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건물은 중심으로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왕가가 살았던 집, 즉 ‘궁’을 기반으로 하여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에게 생소한 ‘도정궁’은 덕흥 대원군의 궁이자 선자의 잠저 라는 것이다. 마치 추억이 있는 장소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때의 생생한 느낌을 느낄 수 있도록, ‘궁’ 이라는 역사적인 장소를 통하여 저자는 우리에게 그 속에 어린 역사적인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래서 나에게 “아 조선시대에 이러한 궁들이 있었구나. 그리고 이 곳에서 이런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었구나.” 라고 말해주고 있다. 저자의 독특한 접근으로 다시 한번 ‘궁’에 대하여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서는 ‘궁’의 과거와 지금 현재를 잘 알려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책의 곳곳에서 사진 자료와 도판을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책의 말미에 ‘궁’의 주소와 지도에 표시해 주었다. 이렇게 역사적인 이야기가 있었던 ‘궁’이 없어진 것도 있으며, 아직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정말 역사적인 장소는 잘 보관했다면, 그 속에 많은 역사적인 이야기를 좀 더 생생하게 우리의 후손들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는 아쉬움을 금할 길 없다. 우리 인간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만, 건물들은 남아서 우리의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는 영상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아쉬움이 있다면 ‘궁’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해 주었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즉, 최대한’고증을 살려서 ‘궁’의 모습을 그림을 재현하여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궁’을 기반으로 한 역사적인 이야기가 더 멋지게 우리에게 다가왔을 것으로 생각한다. 차후 저가가 이 책에 대한 2판을 낸다면 이러한 것을 첨부하고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3차적인 모습의 ‘궁’을 보여준다면, 우리에게 읽는 역사 책에서 보는 역사 책의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역사의 비 전공자인 저자가 이렇게 많은 노력과 공부를 통해 멋진 책을 내준 것에 대하여 감사하며,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l******l 2013.03.1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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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王家)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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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과거는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의 공간은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많은 시간과 더불어 잊어진 기억처럼 보이지만 어느 새 과거의 숨결은 우리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과거의 숨결이 현재의 숨결로 바뀌었고, 그 시대의 사람사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는 삶을 이어가지만 과거의 숨결은 현재의 숨결로 이어 미래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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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과거는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의 공간은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많은 시간과 더불어 잊어진 기억처럼 보이지만 어느 새 과거의 숨결은 우리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과거의 숨결이 현재의 숨결로 바뀌었고, 그 시대의 사람사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는 삶을 이어가지만 과거의 숨결은 현재의 숨결로 이어 미래의 숨결로 바뀔 것이다.

 

우리가 서 있는 이 곳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이라는 건물 속에 숨쉬었던 우리들의 조상들의 이야기. 그 은밀한 모습을 보고 싶어진다. 뿌연 안개와 같이 왔다가 사라진 사람들처럼 궁궐들도 역사의 뒷안길로 사라지고 있지만, 그 속에서 살았던 이들의 발자취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왕이 왕세자로서 교육을 받아 왕위를 이어가지만, 조선의 왕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채 왕위를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을 잠저라고 말한다. '영희전, 이현궁, 어의궁, 창의궁, 윤현궁' 이다.

 

왕의 부모들이 살았던 집도 궁이라고 불렀다.  '도정궁, 누동궁, 경모궁, 칠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 이다.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이 있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어머니를 위해 상당을 짓는데, 처음에는 '숙빈묘'로 그 후에는 '육상묘'로 1753년에는 '육상궁'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왕을 낳은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시게 되어 '칠궁'으로 불렀다. 육상궁(숙빈 최씨), 연호궁(정빈 이씨) 저경궁(인빈 김씨), 대빈궁(희빈 장씨), 선희궁(영빈 이씨), 경우궁(수빈 박씨), 덕안궁(순빈 엄씨)을 말한다.

 

왕자와 공주가 결혼해서 궁에서 나가 살았던 집이 '자수궁, 안국동별궁, 순화궁, 용동궁, 창성궁, 죽동궁, 계동궁, 사동궁, 수진궁' 이다. 수진궁은 왕자와 공주를 모신 사당으로 한성부 중구 수진방에 있던 궁이다. 세종의 아들 평원대군이 살던 곳이자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평원대군의 제사를 봉양하던 곳이다. 그 후 인성대군, 용성대군, 양창대군, 숙신공주, 명혜공주 등 어린 나이에 죽은 대군이나 공주, 자식 없는 후궁 등의 제사를 봉향하는 사당이 되었다.

 

궁은 수리하여 재 사용되기도 하고 팔려나가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의 궁의 모습은 사라졌다. 있었던 기억조차 희미해고 역사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건물속에 우리가 몰랐던 역사의 사실이 숨쉬고 있었다. 화성에 10년 후에 다시금 오고 싶다고 정조를 기다리고 있는 남겨둔 그릇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지 궁금해 진다. 궁은 자신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 보이고 싶어할 것이다. 그런데 시간은 자꾸만 흘러, 조용히 사라지고 말았다. 

 

1박 2일에 나왔던 화성을 보면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정조의 모습이 떠오른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조상님들의 생활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다. 

a****5 2013.03.04. 신고 공감 0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