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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달리 해서 헷갈렸던 것 같습니다. 스캇 펙의 <이젠, 죽을 수 있게 해줘>는 <Denial of the soul>을 원제로 하여 1997년에 출간된 책입니다. 우리나라에는 2001년에 민윤기님의 번역으로 <영혼의 부정; http://blog.yes24.com/document/6206177>이란 제목으로 김영사에서 나왔지만, 지금은 절판된 상태입니다. 불과 6년 전에 읽은 책인데 번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없었으니, 아무래도 저의 책읽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도 제목이 달라진 책을 샀다가 다른 책으로 바꾼 적이 한 번 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아내와 결혼도 하게 되었으니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란 생각도 합니다.
이 책은 안락사와 자살 같이 자연의 순리에 따르지 않는 죽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안락사의 문제는 벌써 15년도 전의 생각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는 현재의 안락사의 개념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 한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전혀 새로운 책을 읽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리뷰 역시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 것 같습니다.
먼저 저자는 자살은 물론 자비로운 살인이라고 미화되는 의사조력자살, 나아가 적극적 안락사에 이르기까지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1950년 14살의 나이로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고백이 웬지 낯설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1장 ‘플러그를 뽑다’에서는 젊은날 그는 아직은 뇌사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다른 의사의 견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생명유지장치를 꺼서 죽음에 이르도록 한 경험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이는저자가 적극적 안락사를 찬성하는 것처럼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들이 해결 불가능한 고통을 느끼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안락사라는 말은 아니다. 내 말은 어디까지나 이미 유용한 방법들을 활용하여 육체적 고통을 완화하는 의료적 행위의 연장선상에서의 개선을 지칭할 뿐이다.(89쪽)”라고 적고 있어 안락사에 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1938년에 설립된 미국 안락사협회에서 안락사를 ‘심각한 육체적 고통을 끝낼 목적으로 통증 없는 수단을 통해 인간의 생명을 끊는 행위’라고 정의한 것이 ‘지극히 부적절한 정의’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안락사는 현재 앓고 있는 치명적인 질병의 마지막 단계에서 육체적인 죽음에 처한 경우, 고유한 생존적, 정서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도움을 받거나 또는 도움 없이 자살하는 행위다.(173쪽)”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내 삶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내가 내 삶의 창조자니까. 나는 자 자신을 파괴할 권리도 있다.”고 하는 자살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매우 교만한 생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창조자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의 2부는 ‘인간의 영혼은 존재하는가’입니다. “영혼은 하느님이 창조하고 기르시는 고유하며 발전적인 영원한 인간 정신이다.(196쪽)”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영성에 대한 깊은 믿음은 저자가 쓴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http://blog.yes24.com/document/6304224>에서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심지어 죽음이 배움과 영혼의 성장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논하는 가운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죽음의)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안락사를 선택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락사는 결국 영혼의 성장과 학습의 기회를 차단하는 일이다. 안락사를 선택함으로써 바로 인간의 존재의 의미 그 자체를 부정해버리기 때문이다.(225쪽)”라는 저자의 주장은 ‘안락사는 신으로 향하는 길을 단절시킨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속이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우리 자신을 속인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저자는 안락사를 재생산하는 것, 적어도 불필요하게 적용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락사 대신에 집에서 호스피스의 간호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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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의 원제목은 [Denial of the Soul], 영혼의 부정이다. 그러나 번역본의 제목은 [이젠, 죽을 수 있게 해줘]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또는 어떤 형태의 세속주의자라고 이 책에서는 표현하고 있다)에게는 현세의 삶을 제외한 그 이후의 삶에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 현세의 삶의 이유 또는 가치를 상실했을 경우 살아가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 또는 안락사를 선택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위의 두가지 제목은 같다.
2. 이 글의 저자는 스스로 글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현 세태의 흐름을 따르자니 그 자신이 살아온 삶의 근본적 방향과 어긋난다는 것을 느끼는 듯하다. 반대로 그동안의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려니, 현실적으로 너무나 비합리적이며 때로는 비인간적이기까지한 현실적 상황들에 직면하게된다. 특히 정신과의사로서 오랜 세월 만난 환자들을 통해서 그 환자들에게 원론만을 주장하기에는 난감함을 느낀다. 저자 스스로 자신의 신념과 현실에서 답을 알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3. 이 글을 읽고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한가지 제시를 해 주고싶다. 먼저 생각하고 읽어 보길... "저자는 안락사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 책을 만들었을까? 아니면 안락사를 반대하는 입장에서일까..." 이 제목을 화두로 잡고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러면... 머리가 빙빙 돌테니까...
4. 최근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이라는 책을 먼저 읽었다. 19년 동안 서울의 한 대형병원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겪었던 내용을 소재로 한 책이다. 이 책 또한 인간의 죽음과 관련하여 매우 현실성있는 글을 전개했다. 그 책에서 주장하는 바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비교하면서 읽어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5. 나는 최근 1~2년 사이에 삶에 태도와 신념체계에 적지않은 변화가 있었다. 다시말해 1,2년 전에 [이젠 죽을 수 있게 해줘]를 읽었다면 지금의 느낌과 전혀 상반되는 기분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세계관, 삶의 태도, 신념체계 또는 종교관이 어떠냐에 따라서 이 책에 대한 태도도 극명하게 갈라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글 내용에 대한 언급은 피하고 싶다. 독자가 직접 느껴보길 희망한다. 어쩌면 당신의 신념체계를 뒤흔들게 만들지도 모르니까...<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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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부분. 안락사. 뉴스에서도 종종 접하게 된다. 당장의 내일이 아니니까 타인의 삶이기에 뭐라고 긴 이야기를 할 수 없는것 같다. 직접 느끼지 못했고 그러한 환경, 모습을 눈으로 오랫동안 지켜봐오지 않았기에 병상에서 고통과 싸우는 환자의 마음, 그러한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 하는 가족의 아픔은 더이상 알 수가 없다. 단순히 서로가 힘들겠다, 너무너무 고통스럽겠다, 안쓰럽다등등 흔히 할 수 있는 쉽게 건네는 말 한마디 뿐이지 그이상의 무엇을 그들에게주고서 아픔을, 고통을 달랠길은 없다.
안락사. 아직까지 안락사를 놓고서 서로 찬반대는 이야기들이 많이 오고가고 있다. 정말 여기에는 어떤 정답도 없다. 문제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없기에 긴긴 시간동안 이슈가 되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긴 싸움을 하고 있는것 같다. 종교적인 부분까지 합세 한다면 문제는 더 크지지 않을까라는 짧은 생각이 든다. 종교적인 힘을 받으면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또 다른 이면이 있기에 그들의 생각이나 영적으로 느끼는 무언가에 무조건 잘못되었다, 말도 안된다, 무슨 저런 생각을 할까등등 일반인들의 생각들이 덧붙게된다. 무조건적으로 종교를 가진 그들에게 색안경을 끼고서 봐라보는것도 잘못된것이라고 본다. 일반인들이 힘들고 괴로울때 사람이나 아니면 또 다른 취미생활, 자기만의 방식으로 의지를 하듯 그들 역시 종교에 의지를 하고 믿고 마음을 달래기 때문에 방법을 찾는 길만 달랐다고 보면 될 듯하다.
안락사에 대한 의견, 찬성이냐 반대냐.. 언젠간 다들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 병상에 누워 눈을 감게 되는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시간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한번씩은 겪게 될 시간들..당장 나에게 닥친 일이 아니기에 찬성! 반대!라고 과감하게 말을 꺼내기가 조심스러워진다. 안락사라는 그 깊은 내막에 대해 잘 모를뿐더러 안락사를 선택하게되는 절차에 대해서도 그과장을 겪은 후 다음 과정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안락사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있었더라면 또 다르게 바라보지 않을까 생각된다. 책을 한장 한장 읽으면서도 내용이 와 닿았기 보다는 서로 교차되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정말 누구를 위한 선택인것인지 누구의 결정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입원을 하고 계실때 중환자실 병동에 검은 옷을 입은 여러명의 사람들이 조용한 발걸음으로 들어갔다 몇분 후 하얀 침대 시트를 덮어 다시 조용하게 나오는걸 봤다. 새벽시간. 느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과연 그분의 선택은. 아니 가족의 선택은 뭐였을까라는 살짝이 궁금증이 생긴다. 물론 병상에 누워 아무런 의식없이 지내는 환자의 선택은 아니였을테고 가족들의 결정이였는지 자연스런 마지막 시간이였는지는 ...만약 안락사를 선택했더라면 환자분과 가족분들의 서로의 무거운짐을 내려놓았을것 같다. 긴긴 시간을 병상에서 아무런 의식없이, 때론 고통을 느끼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것 보다 편안한 시간을 보내시라고 가족들이 보내드린게 아닐까라는 생각..그것 또한 작은 배려로 보여진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안락사에 대한 매듭. 어쩜 더 더욱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환자 , 가족, 의료진, 의료기술, 사회배려등등 잘 조합이 되어 서로의 마음을 잘 읽어줄수 있는 그날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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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시설의 놀라운 발전으로 인간의 생명은 끊임없이 연장되어 왔다. 그에 따라 우리의 의지에 반해 이어지는 생명의 연장 문제도 같이 논의되어 온다. 전에는 그저 죽음을 맞이 할수 밖에 없는 질병도 놀라운 의료기술로 생명이 연장되고 치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때는 과연 이것이 치유의 과정인가, 그저 같은 상태의 연속선상에 놓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로에 설때도 있다. 그 끝을 알수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아무도 그 결말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런 상황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안락사라는 주제는 복잡하다. 심지어 안락사의 일반적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안락사란, 오로지 환자나 죽어가는 누군가에게 의사나 가족중 한 사람이 행하는 하나의 행동일까? 또는 환자나 죽어가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을 죽이는 행위에 사용되는 용어일까? 안락사에는 환자의 동의가 필요한가? 또 가족의 동의는 어떠한가? 안락사는 다른 평태의 자살 및 살인과 분리될 수 있는가? 단순히 생명유지장치의 플러그를 뽑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과도한 조치 사용의 제한이 안락사의 한 종류라면 과도한 조치와 일반적 조치의 차이점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안락사와 고통의 관계는 어떠한가? 육체적 고통과 정서적 고통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는가? 고통의 정도는 어떻게 평가 하는가? 무엇보다도 윤리적인 문제가 왜 관련되며 윤리적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지은이는 민감한 안락사의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 또한 이 질문에 심각하게 고민하고, 고뇌한다. 그것은 지은이의 죽음에 대한 두가지 경험담 때문이었다. 펙 박사는 자신의 할머니가 위중한 상태에서 각종 의료적 행위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연장하게 되는 것을 보고 회의를 느꼈었다. 연세도 드시고, 약간의 치매 증상까지 있으신 분에게 그런 의료적 행위로 삶을 연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모든 치료를 이겨내시고 건강을 찾으셨다.
이후 5년동안 할머니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며 투정을 부리거나 불평하는 일도 없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행복해 보였고 재치나 유머감각도 그 어느때보다 좋았다. 그러므로 나는 의사들이 할머니를 살리기 위해 정맥 절개술을 감행하고 당시 내게는 과도한 조치로 보였던 방법들을 사용한것에 대해 감사할 수 밖에 없다.
다음의 한 예는 거의 신체적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어 각종 약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 로저라는 환자의 경우다. 펙 박사는 하루가 다르게 신체가 죽어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이렇게 고통스럽게 로저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과연 그를 위한일일까 하는 회의가 든다.
과장이 기계를 가지고 나간후 나는 거의 15분동안 토니를 쳐다보며 잠자코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나서 정맥 주사기 튜브의 죔쇠를 조절하여 주사액 유입량이 반으로 줄어들도록 했다. 거의 들이붓다시피하던 주사액은 이제 빠른 속도로 방울져 떨어지는 정도가 되었다. 그런 다음 나는 의사 휴게실로 가서 담배 한대를 피웠다. 10분이 채 안돼서 병실로 돌아왔을때 토니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지은이의 손으로 로저의 생명선을 끊은것이다.
과연 펙 박사는 안락사에 대해 찬성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것일까?
우리들은 모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사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죽음 맞을 때 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려움은 안락사 운동을 촉진 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는 과정이 오로지 공포스럽고 길며 쓸데없이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전에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건 합리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공포증의 대부분은 이런 기본적인 생존적 두려움에 기인한다. 인간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두려움은 의식적 존재인 인간의 고유한 고통이다. 그러나 이 두려움을 어떻게 다룰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다. 이런 점에서 펙 박사는 현대의 의료인들이 환자에 대한 고통에 너무나도 둔감함을 지적하고 있다.
진단이 끝나면 서둘러 통증을 안전하게 줄일 수 있도록 약을 처방해야 한다. 만약 의료진이 환자의 극심한 통증을 쓸데없이 오래 지속되도록 놓아두게 되면 환자를 고문하는 것과 다름없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통증에 대해 적절한 처치를 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가장 널리 자행되는 의료 범죄다. 그러나 펙 박사는 여러가지 면에서 안락사를 찬성하지는 않고 있다.
나는 안락사를 비판하는 두가지 이유를 서술했다.
하나는 명백히 신학적이며 보통 모든 자살과 관련된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창조자이자 양육자인 하느님이 우리의 삶에서 우리 자신만큼 상당한 이해당사자가 된다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있는 피조물로서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죽일수 있는 힘이 있다. 그렇게 할 윤리적, 도덕적 권리가 있느냐에 관한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자살을 통해 인간은 자신에게 삶을 부여한 자와 관계없이 자신의 죽음의 때를 결정한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부정이자 그 영혼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부정이다. 안락사를 비판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신학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특별히 내가 정의했던 안락사와 관련된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는 과정에서 상당히 많은 것들을 배운다. 그러나 늙어가고 죽는 과정에 수반되는 생존적 고통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행위는 스스로 그 배움의 길을 막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그런 학습의 기회를 설계한 하느님을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이유가 주된것이긴 하지만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의지와 선택권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실명이나 그밖의 질병, 노화나 죽음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자면 대단한 의지가 필요하다. 하느님은 우리는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선 또는 악을 선택할 수 있다. 심지어 하느님도 인간의 의지를 반영하여 치유한다.
아내와 나는 둘 다 낙태를 찬성하지만 버스라이트라는 단체에도 약간의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버스라이트의 목적은 낙태한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낙태를 선택하지 않도록 여성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단체에 가입한 이유는 선택권을 믿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책의 목적도 바로 그러하다. 안락사를 선택하거나 심지어 이를 돕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사의 선택을 장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선택을 한다는 것을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옳은 결정이라고 누가 확신할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이문제에 대해 단숨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많이 생각하면서 각자의 의지와 선택권을 넓혀가야 한다.
안락사의 논의가 뜨거워지면 뜨거워질수록 사회는 건설적이면서도 빠르게 두 근본적인 문제를 더욱 쉽게 공론화 할 것이다. 그 문제 중에 하나는 결점 많고 예측 불가능한 미국 의료의 특성으로서 특히 통증 관리와 자연사를 돕는 일에 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세속주의다. 만약 이 두가지 병폐를 뽑을 수 있게끔 사회를 자극할 수만 있다면 안락사 논의는 커다란 희망의 불씨가 되는 셈이다.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며 안락사나 자살을 이해, 찬성한다거나, 반대한다는 그런 입장을 정리하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어느 한 쪽을 택한 사람들을 비난 하지는 않게 된것 같다. 물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신중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약간의 분노감(공인인경우 그것에 대한 파장을 생각해)도 일어나기는 하지만 일방적인 나의 잣대로 바라보는 것은 잠깐 멈추게 될것 같다.
그리고 내가 만약 나의 상태에 대해 이런 판단을 해야 하는 때가 온다면 나 또한 힘들고 고통스럽게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결정이라면 쉽게 판단하기 어려울것 같다. 그래서 평소에 이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이 책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자살과 안락사에 대한 문제를 지은이의 전문적인 분야를 살려 잘 풀어나갔다고 볼수 있다. 다만 전체적인 내용이 조금 산만하여 정리가 잘 안되고 맥이 끊기며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것은 지은이의 오랜 경험을 통한 수많은 사례들이 읽는이의 이해를 도와주는데 많은 역할을 했고, 그 사례들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지은이의 주장은 마지막 까지 읽지 않으면 무엇을 즉, 안락사에 대한 찬성인지 반대인지 알수가 없도록 모호하다. 물론 이 주제가 단칼에 무 자르듯이 말할수 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그래서 지은이 또한 많은 예외와 개인의 선택에 자율성을 두며 말하기도 했다. 또 지은이의 종교성때문에, 그리고 지은이의 주장은 이 종교성에 무게를 많이 두고 있기에 이 책의 뒷부분은 상당히 종교적이다. 그러나 책 표지 어디에도 그런 내용을 가늠할수 없기에 같은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다 보면 뒷부분에서 조금 난감해 할것 같다.
그래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조금은 고민하게 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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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자살”이 많은 관심이 되고 있다. 유명 연예인의 자살, 어린 학생, 일반인의 자살등 많은 자살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요즘, 자신을 죽이는 행위인 안락사는 상대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는 문제이다. 그래서 안락사에 관한 <이젠, 죽을 수 있게 해줘>는 약간 생소하면서도 조심스러울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안락사에 관한 책이자 안락사에 관한 사항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더 깊게, 인간의 영적인 부분, 영혼 문제에 관한 내용을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1부는 안락사를 의학적, 정신질환적 관점에서 보고, 2부는 영적, 영혼부분에 치중하였는데 1부는 그런대로 읽혀지는 반면 2부는 좀 이해하기 난해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저자가 의사가 아닌, 신학자나 신비주의자인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주변에서 심각한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환자를 직접 본적은 없지만 말기의 환자가 생명연장 장치에 의존해 병원에서 하루 하루 버텨가고 있는 모습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종종 보아 왔다. 환자도 환자지만, 그 옆에서 간호하는 보호자 가족의 모습은 더욱 안스러운데, 환자뿐 아니라 가족의 삶도 경제적으로나 질적으로 누려야 할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사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이런 말기 환자에게 다 안락사를 권고해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안락사의 양면성, 상황에 따른 예외를 인정하면서 의사로서 저자가 만난 수많은 경우의 환자들을 예로 들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환자를 포기하는 행위로 안락사를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고통의 실체조차 없는 정서적 고통까지 함께 다루어 안락사를 살펴본다. 실제로 안락사의 주요 동기는 정서적 고통이 안고 있는 심리적 현상들이다. 안락사를 찬성한다 반대한다 하기 이전에 안락사는 정말 복잡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환자마다 처한 고통의 정도, 의료적 도움 여부, 생명 연장의 불확실성등 상황이 다르므로 기본적으로 환자나 환자 가족의 선택권을 믿는 것이 필요하다. 말기의 환자가 의술에 의해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이 상책이 아니라 자연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는 것을 장려하고 과도한 의료 조치는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되어야 한다. 이 책의 목적은 안락사를 선택하거나 안락사를 돕는 사람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사의 선택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안락사 논쟁 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죽음에 이르러 생각하고 배우게 되는 영적부분이라고 한다. 종교가 없는 사람은 이 부분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책을 읽으며 내가 느낀 점은 이 책의 목적이 안락사 논쟁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이 영혼에 관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