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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전에 ‘춤’이란 없다! 모차르트와 괴테를 좋아하며, 쾌락주의적으로 변해가는 현대 사회를 싫어하는 사회 부적응자와도 같은 50대 가까운 중년의 남자, 하리 할러.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사상과 감정과 문화의 세계이자 길들여지고 순화된 천성을 지닌 ‘인간’의 세계와, 본능과 야성과 잔혹성과 순화되지 않은 야만적 천성과 같은 어두움의 세계 즉 ‘황야의 늑대’를 발견한다. 그는 사회 질서에 순응하는 시민적 세계를 혐오하고 법과 미덕과 상식을 경멸하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한다. 결국 내면에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황야의 늑대’를 품고 살아가지만, 외면적으로는 시민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오직 죽음에서 구원을 보며 인생의 목적이 자신의 해체에 있다고 믿는 '자살자'로서의 삶을 선택한 그는, 50세 생일을 맞아 결국 자살을 기도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하리 할러의 수기'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하리 할러는 한 남자에게서 우연히 얻게 된 ‘황야의 늑대에 관한 소논문-미친 사람들만을 위해’ 라는 소책자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을 발견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경험하게 된다. 젊은 교수의 집에 초대받은 할러가 괴테의 초상화를 보며 ‘잘난 체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는’ 틀에 박힌 그림이라고 혹평하는 모습은, 그런 괴테를 닮은 자신의 모습에 대한 싫증과 혐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검은 독수리’라는 클럽에서 만난 소녀, 헤르미네. 그녀는 할러에게 둘도 없는 대화의 상대가 되어 준다. 할러는 헤르미네에게 황야의 이론을 알려주고 헤르미네는 춤을 가르쳐 준다. 그녀는 어두컴컴하기만 하던 할러의 마음에 작은 창문을 내어 주고 밝은 빛을 비춰준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공감하고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 준다.
자칭 ‘황야의 늑대’라는 이름으로 걸핏하면 ‘면도칼’을 운운하며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자살할 것처럼 자신을 내던진 채 살던 할러였지만, 사실 그는 누군가에게 공감받고 싶은 ‘외로운 영혼’이었을지 모른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내면의 슬픔과 비참함을 누군가가 알아봐 주고 어루만져 주기를 기다리는, 그저 평범하고 여린 ‘인간‘으로서 말이다. 할러는 헤르미네에게 춤을 배웠고, 삶을 배웠다. 그의 고독을 깨뜨리고, 지옥문 바로 앞에서 붙잡아 자신의 눈을 뜨게 한 헤르미네를 그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하리가 자신 안에 두 개의 영혼이 있다고, 두 개의 개성이 살고 있다고 여기는 건 단지 하리의 상상에 불과할 뿐이고, 사실 인간은 누구나 열 개의, 백 개의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고.”p.181
할러는 인간과 늑대라는 두 개의 영혼만을 생각했다. 그 중 어느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삶은 늘 고독했고 심각했으며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상상에 불과했다. 인간 안에는 두 개가 아닌 열 개, 백 개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좀 더 즐겁고 유쾌하게, 소소하고 가벼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만들어 둔 틀 안에 인생을 가두려 했다.
“이제껏 춤 배우는 것을 게을리했듯이,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게을리했어요. 당신은 다소 일반적이고 인간적인 사랑을 배워야 해요.”
미국 댄스음악이 나오는 축음기가 금욕주의적 정신으로 가득 차 있던 할러의 음악 세계를 초토화시키고, 이제껏 엄격하게 차단되어 있던 그의 삶 속으로 들어와 모든 것들을 해체시켜 버렸다. 그는 인간이 천 개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황야의 늑대에 관한 소논문>과 헤르미네의 이론을 그렇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마음속에 삶의 그림을 한 장 그려 놓고 있었어요. 믿음과 요구라는 그림을. 당신은 행동과 고뇌와 희생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점차 깨닫게 되었죠. 세상은 나의 행동이나 희생 따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삶이란 건 영웅이 필요한 서사시가 아니라, 음식과 음료수와 커피와 양말과 타로 게임과 라디오 음악 같은 것들로 충분한 별실과도 같다는 걸요. 때문에 영웅적인 것과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자는, 위대한 시인이나 성인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자는, 바보나 돈키호테가 될 뿐이죠.”p.215
할러가 좋아하는 모차르트도, 그가 위대하다고 여기는 시인들과 성인들도, 살아 있던 당시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남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원’이다. 무시간성의 세계, 영원한 가치와 신의 본질 담겨 있는 세계이다.
사람들이 소망하는 그 ‘영원’이라는 시간의 개념은 어떤 것일까? ‘영원’이라는 것은 결국 오늘,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을 마음껏 누리며 사는 ‘순간’의 흐름 속에서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 ‘영원’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할러는 처음으로 괴테의 웃음을, 불멸의 위인들의 웃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한 진실한 인간이 번뇌와 악습과 실수와 애욕과 착오를 모두 경험한 끝에 영원의 세계에 진입했을 때 비로소 얻게 되는 웃음이었다.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으로부터의 해방’, 즉 순수로의 복귀이자 우주로의 귀환임을 그는 깨닫는다.
‘마술극장’에서 경험한 가상의 갤러리를 ‘현실’과 혼동하여 살인까지 저질러 버린 할러를 향해 모차르트(파블로)는 ‘유머를 배워야 한다’고 깨우쳐 준다.
“자네는 살아남아 웃음을 배워야 하네. 이 저주받은 인생의 라디오 음악을 감상하는 법을 배워야 하네.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정신을 존중하고, 그 속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을 비웃을 줄도 알아야 하네.”p.311
인간과 늑대라는 두 개의 영혼 사이에서 삶을 무겁게만 바라보던 할러에게 찾아온 인생의 가르침. 그것은 캄캄한 내면의 어둠을 뚫고 비춰오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어느 날 헤르미네라는 영혼의 친구 같은 존재가 찾아와 아이처럼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사랑하고 웃는 법, 춤추는 법을 가르쳐 줬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지금까지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읽기 힘들었던 작품이다. 실제로 50세가 되어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헤르만 헤세가 50세의 하리 할러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켜 그 내면을 분석해서 쓴 자기 고백서와 같은 작품이라고 한다. 전쟁에 반대하고, 시민 생활을 그리워하면서도 그 속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과 체제에 반항하고자 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이고도 진지하게 그려낸 작품이라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헤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자네는 유머를 배워야 해.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네. 자네는 인생의 유머, 삶이라는 교수대 위의 유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네.”
마치 교수대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시대의 불안 속에서도 부디 자신을 죽음과 파멸로 내몰지 않기를, 그 속에서도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춤출 수 있기를, 지금 이 순간 누릴 수 있는 ‘영원’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아니었을까. ‘인생의 유머를 빼앗기지 말고, 순간순간 찾아오는 영원을 마음껏 살라’라는 자신을 향한, 시대를 향한 그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