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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금니가 설원과 같아서 화이트 팽이라 불린 늑대개는 살기 위해 자신을 숨긴다. 아니, 자신의 마음을 적셨던 어미로부터의 따뜻하고 다정한 느낌들, 세상의 따사로운 빛들을 지워버린다. 지워버린 그 자리에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잔인하고 포악한 근성을 채워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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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는 듯한 본래 잭 런던의 본명은 존 그리피스 체니( John Griffith Chaney)이다. 그의 세 번째 장편 소설 <야성의 부름 The Call of the Wild)(1903)은 그의 나이 27살 때 쓴 작품인데, 황금광 시대를 맞아 클론다이크 골드러시에 합류했다가 알래스카에서 황야의 고독과 늑대개를 만난 잭 런던은 자연, 그리고 야성을 발현하는 대표적 상징으로 황야의 늑대개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이 소설의 첫장에는 소설가이며 시인였으며 영화감독이었던 제임스 디키(James Dickey)의 서문이 실려 있는데, 즉 “‘원시’라는 단어는 잭 런던의 작품, 존재에 대한 그의 태도, 그 자신의 삶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된다. 그는 십 대에 집중적인 독학을 시작할 때부터 40세로 삶을 마감 할 때까지, 자신의 ‘동물성’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스스로 선택한 토템인 늑대와 자신을 동일시 했다.” 이렇게 잭 런던은 육식성의 상남자로 명명지워도 무방하다고 하겠다. 소설의 첫 제목 원시에 이러한 구절이 짧게 소개되어 있다. “방랑을 향한 오랜 갈망이 관습의 사슬에 성내며 뛰어올라 겨울잠 자던 야성을 다시 일깨운다.” 그리고 첫 문장은 “벅은 신문을 보지 않았다. 신문을 봤다면 문제가 일어나고 있음을, 자기뿐 아니라 퓨젓사운드에서 샌디에이고까지 따뜻하고 긴 털이 있고 근육이 튼튼한 모든 개들에게 문제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이 길지도 않은 문장에서 쉽게 야성의 부름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 직접적으로 ‘야성’과 ‘개’, 그리고 소환되는 대상들이 그리 얌전하지만은 않다. 이 거친 단어의 숨결에서 인간의 본성을 깨우친다. “싸움에서 중간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상대를 지배하거나 지배당해야 했다. 반면에 자비를 보이는 것은 나약하다는 뜻이었다. 원시의 삶에서 자비란 없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오해받기 마련이었고, 그런 오해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죽이느냐 죽느냐, 먹느냐 먹히느냐, 그것이 법칙이었다. 태초부터 내려온 그 법칙에 그는 복종했다.” 라는 테마는 다윈의 적자생존의 법칙과 유사하다. 타인의 지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나의 신체를 변화하는 것이 말로 적자생존의 제일 법칙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1895년, 19세 때 〈공산당 선언〉에 감명 받아 사회노동당에 입당했고, 1901년에는 사회당에 입당했다. 사회당 시절 잭 런던은 다윈, 스펜서, 마르크스, 니체의 책들을 애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인물들의 공통적인 사상은 사회개혁이었다. 특히 마르크스는 모든 관습에 대해 맹렬하게 반대하며 새로운 시도를 한 정치경제학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문명사회를 다시 원시사회로 복구하는 그러한 야망이 있던 인물이었는데 이것야말로 잭 런던이 원하는 이상향의 결정체이다. 그러면서 그가 자연에 대해 묘사하기를 “ 황야는 움직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명은 황야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황야는 언제나 움직임을 죽이려 한다. 그것은 물이 바다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얼려 버린다. 나무의 수액을 타고 들어가 그들의 강인한 심장까지 얼어붙게 만든다. 황야가 하는 일 가운데 무엇보다 잔인하고 끔찍한 것은 인간을 짓밟고 깔아뭉개 굴복시키는 것이다. 인간, 인간이야말로 가장 부산스러운 생명이었고, 모든 움직임은 결국에는 움직임을 멈추어야 한다는 금언에 항상 반항하는 생명이었다.” 언제나 황야를 드는 순간 떠오르는 심상은 건조함과 그 메마름이다. 그러므로 한 생명체가 우연하게 거기에 놓이게 된다면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을 준비가 돼야 한다. 세상의 법칙은 저임금의 고강도 노동으로 전환한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여기에 모자라는 것을 채울 준비는 언제나 야성의 부름을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부름에 대한 준비에 대한 사고의 은유이다. 인플레이션이라는 야성에 뛰어든 우리에게 자비란 없는 황야와 같은 사회에서 그 용기를 얻어야 한다. 간절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