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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는 지금까지도 심심찮게 테러가 일어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이라크와 미국 등 간의 문제이고 멀리 떨어지고 했거니와 자주 일어나는 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냥 지나가는 뉴스 쪼가리에 불과할 것이다. 만약 그 테러리스트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1972년 5월 말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에서 세계를 경악시킨 테러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텔아비브 공항 습격 사건’ 그 주인공은 3명이었는데, 모두 다 일본인이었다. PELP(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의 이름으로 행동하였다. 그들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는 둘째 치고(당시에도 테러사건은 종종 있어왔다.), 왜 일본인이 그곳에서 테러를 자행했는지가 초미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들 3명의 무차별 습격(자동 소총과 수류탄 등)으로 26명이 사망하고 80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범인도 2명이 죽었다. 1명만 살아남은 것이다. 그의 이름은 ‘오카모토 고조’이고, 일본 ‘적군파’였다.
이 당시, 정치적 신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날, 정치적 신념에 따른 행동 때문에 감옥에 있는 사람을 찾아가 그가 자기 처지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연구하고 싶어 했던 <적군파>(교양인)의 저자 ‘퍼트리샤 스테인호프’는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 있는 오카모토 고조를 찾아간다. 남편의 권유와 이스라엘 총리의 허락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본래 일본의 급진 좌파 운동을 연구하던 저자는 적군파 연구에 뛰어들어 독보적 길을 걷게 되는데, 그 시작이 텔아비브 습격 사건과 유일하게 살아남은 범인인 오카모토 고조와의 인터뷰인 것이다.
그녀가 오카모토 고조를 인터뷰하기 전에 그에게 듣고 싶었던 테러의 원인은 아마도 어떤 심오한 이유였을지 모른다. 반대로 지금 흔히 범죄 사건을 말할 때 쓰이는 ‘사이코패스’, ‘어린 시절의 아픔’ 등의 짜깁기 혹은 적당한 예측 따위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사이코패스도 아니었고, 중산층 집안에서 아픔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에게서 나온 말은 ‘세계 동시 혁명, 그리고 부르주아 권력 분쇄’였다. 이를 위해 그는 레바논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상관의 명령을 받고 한 명의 병사로서 습격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는 개인 차원에서 습격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조직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며 습격의 목적을 말하였다.
“첫 번째 목적은 세계에 충격을 가해서 분노를 일으키는 것, 그리고 혁명의 힘, 적군파의 힘을 알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전 세계 혁명 운동과 일본 적군파가 연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본문 중에서)
여러 가지 모순이 존재하고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하고 결정적으로 그의 뒤에 ‘적군파’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챈 저자는, 적군파의 실체를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다. 오카모토 고조는 수감 13년 뒤인 1985년 석방된다. PELP와 적군파가 이스라엘인 병사와의 교환을 성사시킨 것이다. 그는 여전히 일본적군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적군파의 실체를 알아야 했다.
1.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1950년대 일본의 거의 모든 대학을 산하에 둔 학생연합 조직 전학련(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이 있었다. 50년대 후반까지 일본공산당의 지도를 받았는데, 이후 중대한 노선 전환이 생기면서 가입 문제를 놓고 분열한다. 이후 분트(공산주의자동맹)는 1960년대 안보투쟁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고, 와중에 1968년 관서 분트 안에서 ‘적군’이라는 군대 결성이 꾀해졌다. 1년 후 조직 내 당파 투쟁을 계기로 적군파는 분트와 결별해 독자적 길을 걷게 된다. 그들의 투쟁방침은 폭력제일주의였다.
적군파는 곧바로 투쟁을 시작했는데 여지없이 처참하게 끝나고 만다. 또한 총리의 방미 저지 투쟁을 위한 군사 훈련도 발각되어 많은 피해를 받기에 이른다. 이듬해인 1970년에는 적군파 멤버 9명이 일본항공의 국내선 여객기 ‘요도호’를 납치하여 북한으로 망명한 ‘요도호 사건’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다. 적군파에 세상의 시선을 모으고, ‘혁명적 나라’에 적군파의 근거지를 건설하기 위한 이 행동은 사실상 실패로 끝난다.
결성 1년여 만에 수많은 투쟁을 이끌고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끄는 데 성공한 적군파이지만 그 과정에서 지도자들을 많이 잃고 만다. 차세대 지도자가 필요했다. 제2세대 지도자 ‘모리 쓰네오’의 출현이다. 그는 탁월한 이데올로기 이론가였는데, 이가 곧 이어질 나락의 주된 원인이 된다.
1971년 적군파는 같은 계열의 ‘혁명좌파’와 결합한다. ‘연합적군’의 탄생이다. 적군파는 잇따른 은행 습격으로 상당액의 자금을 확보했으나 무기가 부족했고, 혁명좌파는 무기는 충분했으나 자금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들 세력은 통합의 첫 단계로 공동 군사 훈련을 실시하기로 한다. 31명의 비극의 시작이다. 훈련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혁명좌파 지도자이자 여자인 ‘나가타 히로코’가 적군파의 여자 멤버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여자이기 전에 먼저 혁명가여야 한다며, 스스로 여성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적군파 수장이자 연합적군의 수장인 모리 쓰네오는 독창적인 이론을 만들어 온다.
‘공산주의화’라는 이론으로, 더욱 훌륭하게 공산주의화한 혁명 전사가 되기 위해 자신의 부르주아적인 행위를 자기비판하자는 것이었다. 각 멤버의 약점을 집단적으로 검증하고 개개인이 지적받은 약점을 뛰어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단순히 이론적으로 판단했을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는 이론이었다. 하지만 이 이론은 브레이크도, 기준도, 출구도 없었다. 집단적 검증이 과도한 공격으로 쏠리지 않도록 제동을 걸 수단이 없었고, 검증과 자기비판의 기준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모리 쓰네오의 명령으로 완전한 공산주의화를 획득할 때까지 아무도 산에서 내려갈 수 없었다.
초기의 자기 변혁은 정신 단련으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자 과도한 자기비판과 폭력으로 까지 치닫는다. 처음 자기비판의 당사자가 된 두 명 중 한명이 다른 한명의 공산주의화를 위해 때리라고 시킨 것이다. 폭력을 통해 자신의 약점과 대결함으로써 약점을 극복해 공산주의화를 획득하라는 모리의 이론이었다. 연합적군의 이론이 폭력주의, 무장주의였기에 당시에 이는 충분히 합당한 이론이었을 것이다.
결국 한 사람의 공산주의화를 위한 폭력에 전원이 참가한다. 죽지 않고 버틸 도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모리는 그 공포를 극복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가 뱉었던 말이니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죽은 멤버를 두고 모리는 또 한 번 획기적인 이론을 내세운다. 이른바 ‘패배사’ 모두들 그 멤버를 돕기 위해 폭력을 행사했지만, 결국은 그가 도움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힘없이 패배해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론이었다. 모두들 이 이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이 그 멤버를 죽인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후 이 폭력은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된다.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고 때려죽이는, 모리에 의해 ‘합법적’으로 변모한 폭력이 계속된 것이다. 최초 31명 중 12명이 죽임을 당한다. ‘연합적군 숙청 사건’의 전말이다. 이 사건이 끝나고 언론은 단순 권력 쟁투의 결과라고 말했고, 이후 수많은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도출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다는 걸 말한다.
그들은 단지 과격한 학생 운동을 했을 뿐 모두 평범한 젊은이였다. 그들은 악마가 아니었고, 이 사건 또한 유래를 찾기 힘든 이례적 사건도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 자리에 있었다면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모리같은 특출난 사람이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2. 해를 넘겨 1972년 2월 두 지도자 모리와 나가타가 급한 용무로 자리를 비운다. 이후 잔류 부대는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한다. 새 지도자인 ‘사카구치 히로시’는 이 ‘숙청’을 혁명적인 활동에 의해 극복해야 할 불행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 혁명적인 활동을 위해 그를 비롯한 5명은 아사마 산장으로 피해 경찰과 대치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이 농성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숙청 사건의 불행은 외부와의 대치가 필요했던 시점에 그 힘이 내부의 폭력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인데, 이제 그 불행을 ‘올바르게’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었다.
남은 19명 중에 몇몇은 체포, 몇몇은 도망가고 5명이 아사마 산장에 이른다. 경찰은 가까스로 그들의 거처를 확인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퍼붓는다. 천 명이 넘는 경찰이 투입된 것이다. 이에 다섯 멤버는 항전을 거듭해 두 명의 경찰과 한 명의 일반인이 희생당한다. 결국 열흘 후 이들은 체포되고 만다. 이 대치 상황의 마지막 광경은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9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들은 숙청 사건 비밀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였을까?
“숙청은 그 나름의 방법과 논리를 지닌 완전한 내부 문제였다. (중략) 연합적군에서 도망친 사람들마저 경찰에 출두하지 않았다. (중략) 숙청 사실은 체포와 함께 막을 연 적과의 직접 대결에 직면하여 내부에 묻어 두어야 할 극비 사항이었던 것이다.”(본문 중에서)
하지만 몇몇 멤버가 분리 감금을 원했고 숙청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고 만다. 그 와중에 모리는 편집증적인 자기비판 끝에 자살을 택하고 만다. 숙청의 주원인을 제공했고 앞장서서 숙청을 실행했던 모리의 비극적 최후였다. 다른 멤버들은 어떠했을까? 몇몇은 ‘전향’을 했고, 몇몇은 ‘자기비판’을 지속했으며, 몇몇은 ‘묵비를 통한 투쟁’을 계속했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텔아비브 습격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연합적군이 팔레스타인의 눈에는 피에 굶주린 경솔하고 무모한 집단으로 보인 것이었다. 이에 적군파 레바논 지부는 명예 회복을 위해 과감한 투쟁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다. 적군파가 여전히 건재하다는 걸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오카모토는 이 문제를 두고 1975년에 기고한 잡지 기사에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만약 연합적군 사건이 없었다면, 텔아비브 공항 습격도 없었을 것이다.”(본문 중에서)
3. 저자는 책에서 연합적군의 평범함에 주목하며 말한다. 평범한 젊은이들이 행한 비정상적이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일련의 사건, 그 중에서도 연합적군 숙청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고 파헤쳐서 얻은 결론일 것이다.
“내게 이 사건이 주는 진정한 교훈, 진정한 공포는 지극히 일반적인 사회 상황이 뜻밖의 이변을 낳았다는 사실이다.”(본문 중에서)
왜 그들은 서로를 끔찍이 살해했을까 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이 사건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누구라도 같은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라는 명제로 끝난다고 할 수 있겠다. 부르주아 권력에 맞서 세계 혁명을 꿈꿨던 그들의 비극. 아무것도 모른 채 내부에 갇혀버렸던 젊은이들의 ‘순수한’ 의지와 열망이 외부로 분출되지 못하고 내부를 향해 썩어 들어가고 말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순수한 폭력에의 의지와 열망은 ‘아사마 산장 사건’으로 분출되고, 이는 ‘텔아비브 습격 사건’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 세 가지 일련의 사건은 일본 적군파와 관련되어 있다. 저자는 그 일련의 과정을 되새기며 사건의 본질에 가까이 가려 한다. 그 이면에는 객관적이라기보다 주관적이기까지 한 시선이 보인다. 따뜻하다고나 할까? 저자가 젊은이로서 1960년대를 보냈고 신념을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을 존경했고 학생들의 활동 내용 또한 높이 평가했기에 그랬을까? 지독하고 참혹한 사건들의 면면이 결코 추악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저자의 이런 시선 때문일 것이다.
그 따뜻한 시선의 진면목은 에필로그에서 볼 수 있다. 20년이 지나 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둘러보며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굉장히 서정적이고 감미롭기까지 하다. “죄를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라는 말처럼, 저자는 죄인을 미워하지 않았다. 수많은 인터뷰와 정확한 자료를 통해 대상의 입장에서 사건을 이해하려고 했고 연구했다. 그녀의 성실한 연구의 결과물인 <적군파>를 통해 적군파와 연합적군을 조금 더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려고 애쓴 연합적군 숙청 사건의 비극에 한 발 더 다가가는 독자가 있기를 바란다.
덧1. 훌륭한 저작에 비난 아닌 비난을 조금 가해 생채기를 냄으로써, 서평의 질을 떨어뜨릴 수도 있음을 감안하고 한마디 하겠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반복에 있다. 큰 세 줄기의 사건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언급되고 있다기보다, 동어 반복이 조금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던 부분을 다시 반복하고 또 다시 반복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 덕분에 확실히 각인되었다는 점도 말해둔다.
덧2. 적군파 및 연합적군의 활동을 모티브로 삼은 영화 한 편과 유명한 소설 속 단체를 간략히 소개해본다. 이 책을 읽고 ‘적군파’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故 와카마츠 코지 감독의 <실록 연합적군>이라는 영화인데, 2008년 이 영화로 제58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최우수 아시아 영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09년 출간된 베스트셀러 소설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문학동네)에는 자본주의에 좌절한 젊은이들로 구성된 해방구 공동체가 나오는데, 이는 적군파를 연상시킨다. 아니, 적군파를 모티브로 차용하였다고 한다. |
총괄을 완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실패했다. 자기 변혁을 못했다고 희생자를 다그치면서도 남은 멤버들 중 더 의지가 강한 사람들도 같은 고통을 극복할 자신이 없었다. 이러한 불안을 는끼는 것 자체가 나약하다는 증거라고 규정되었기에 누구나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노동 작업에 열심히 매달리면서 자신의 나약함을 지적받기 전에 누군가 다른 사람의 나약함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유일한 자기보호 수단이었다. 1970년대 초반에 벌어진 연합적군의 아사미 산장 농성과 그 전에 발생한 내부 숙청 사건을 다루는 책이다. 결국 폭력 혁명을 시도하려 했던 일련의 공산주의자 세력이 왜 그 폭력의 방향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향하게 했을까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책이다. 스탈린 시절의 소련이나 모택동 시절의 중국, 그리고 유명한 모의 교도소 실험까지 일련의 역사적 사실들이 보여주는 것은 감시, 처벌, 비판, 통제, 억압을 기반으로 구성원을 통제하는 공동체는 빠르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되고 결국 몰락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소한 서로에 대한 선의를 가지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 그게 인류가 지속과 번영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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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교 강의 말고 외부(이 말도 좀 웃김. 학교는 내부가 아닌데..내외부) 강의 12개 중에서 8개가 취소되었고, 아마 두어 개도 취소 연락이 올 듯하다. 모두 지역 강의인데 어찌 될지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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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개인이 어떻게 세상에서 참혹한 일들을 벌이게 되는지 치밀하게 기록하여 보여주고 있다.일본 현대사의 여러 사건들중 큰 충격을 준 적군파의 이야기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적군파를 통하여 내부적 폭력이 얼마나 큰 나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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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이념 또는 이론이 인간을 규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론으로 무장한 인간은 과연 인간사회 안에서 하나의 본보기가 되거나 지도자로서 역할할 수 있을까? 이론의 추구는 현상에 따른 반응으로 길을 찾아가거나 방향을 고민하던 인간 역사에 대하여, 반대의 방식으로 하나의 틀을 세운 뒤에 그 틀에 맞추어 현상을 만들어내려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현상에의 반응은 그 결과가 너무도 불투명하여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을 주기도 했지만, 근대 인간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이지 못한 면만이 부각되어 왔기에 이론을 고민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론에의 추구가 결과는 만들어내지는 못했더라도 그 과정에서 긍정적이었던가.. 사실 이도 그렇지는 않았던 듯 하다. 자본론을 바탕으로 한 맑시즘은 대공황 이후의 전세계 노동자 대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출현을 예언했지만, 노동자들은 자국 안의 정치적 움직임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식민지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에도 외면한 나머지, 공황에의 극복을 대투쟁을 통하기는 커녕 세계대전이라는 자본의 방식안에서 모든 것을 굴복하고 말았다. 또한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히틀러의 광기는 하나의 이론으로서 유대인들과 정치적 좌파와 사회적 소수자들의 학살을 불러 일으켰다. 공산주의 이론 역시 현실 공산주의는 냉전이라는 체제경쟁과 내부의 계급갈등 그리고 변형된 독재형태로서 의도가 변질되며 결국엔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추구했던 이론이 원래부터 결점과 오류를 지니고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자본주의 체제의 원리와 이를 바탕으로 한 권력이 너무 유혹적이고 강력해서 그러했던 것일까? 답을 내기는 어렵다. 기대가 가능한 지는 모르겠으나, 완벽한 이론은 없더라도 완벽에 가까우며 현실성 있는 이론은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군파라는 조직은 19세기 중반의 생디칼리즘 또는 아나키즘 적인 노동자 투쟁을 닮은 면이 있다.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에 인민을 설득시킨다는 전술을 사용했던 무리들은 알다시피 또는 당연히 실패했다. 이는 인민에 대해 사후설득이라는 이론적 오류를 지니고 있었던 탓인지 모른다. 폭력을 통해 전세계 동시혁명을 이루고 그 선봉에 자신들이 서야 한다는 적군파의 이론적 오류는 어쩌면 자명하기에 조직안에서의 참극을 불러일으켰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론의 심화와 공고화를 위해 동료의 죽음을 초래하고 그것을 패배사라는 말까지 지어내며 합리화하는 과정은 지도자의 이론적 리더쉽을 넘어서는 어떤 공포스러움이다. 동시에 조직원 개개인이 이론을 위해 자신의 이성과 사고를 철저하게 개조해내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합리적 방향성을 상실한 채 스스로가 파국의 길로 접어들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은, 조직심리 또는 사회심리는 과연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아이히만처럼 무념의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유태인을 말살하는 작업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개개인이 이론을 통해 몸과 마음이 무장되기를 요구당하고 스스로도 바라고 있던 상태였다. 스스로 죽여지기를 바라고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까지 마음의 혼란속에서 몸이 움직이고 나중에는 그것을 어떠한 형태로 합리화시킨 이론이 제시되면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그 심리는 독자의 입장에서나 바라보는 타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기는 하나 한가지 의문은 떠오른다. 내가 저들 안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저 심리상태에서 박차고 나와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인가... 일본의 적군파나 독일의 적군파를 사상적 투쟁으로만 보기엔 좀 더 깊은 지점에 대한 아쉬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극좌파적 의미에서는 국가주의와 부르주아에의 대항이라는 신념을 존중할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보여준 결론은 이론을 우선적으로 추구한 조직이 보여준 심리학적 기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창때를 낭비하고 있는 젊은이들에 대한 안타까움부터 시작해서 인민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전술로서 이론안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재증명했다는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사회에서 좌파의 투쟁과 학생운동이 완벽한 무관심과 허약함으로 빠져들었음을 생각하면 적군파의 비극적 결과는 사상적 동일진영 안에서도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 암적 존재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한국사회에서 최근에 벌어진 이석기를 중심으로 한 사태는, 물론 정권차원에서의 교활한 정치적 활용수단으로서 철저하게 이용당함으로 마무리되었고, 자체적인 역량도 무척 허약하기는 했지만, 진보진영 안에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사안이었고 집단이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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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적군파와 혁명좌파가 연합해 '연합적군'이라는 새 조직을 결성했다. '총을 이용한 섬멸전'이란 기치에 공명한 이들은 바로 31명의 대원들을 모아 산속에 들어가 훈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두 달 뒤, 아사마 산장에 고립되어 경찰 천여 명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진압되었을 때, 이들이 거쳐온 은신처 주위에서 시신 12구가 발견되었다. 평균 연령 23.3세의 젊은 혁명가들은 왜 자신의 동료를 죽이게 되었을까? 저자인 퍼트리샤 스테인호프는 일본 전전 공산당원들의 전향을 연구하던 중에 72년 5월,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에 주목한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 혁명군이 기획했지만 테러를 실행한 건 일본 적군파의 분파 소속 대원들이었다. 유일한 생존자인 고조의 심리, 재판 과정과 그 이후 사상의 변화 과정, 즉 전향 과정을 연구하려던 저자는 텔아비브 테러에 앞서 일본에서 벌어진 연합적군 숙청 사건에 주목하게 된다. 저자는 국가 체제가 개인에게 전향을 강요하던 억압을, 동지들 사이에서 사상의 순결을 강요하기 위해 행해졌던 '총괄 의식'에서 발견한다. 적군파의 리더이자 연합 후 연합적군의 리더가 된 모리는 동지들에게 철저한 공산주의화를 위해 자기 비판을 강요한다. 그 누구도 공산주의화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갖지 못한 상황에서 말의 폭력은 곧 육체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고, 급기야 고문에 의한 죽음도 '총괄'에 철저하지 못한 탓에 비롯된 '패배사'로 규정하게 된다. 마치 섬에 고립됐던 <파리대왕>의 아이들처럼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이데올로기로 자신들의 혁명의 토대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이야기하거나, 모리와 같은 일부 지도자의 성격 결함을 들추지 않는다. 대신 저자는 누구라도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같은 결과에 봉착했을 수밖에 없는 구조와 맥락을 짚어낸다. '전향'이 이데올로기라는 거푸집을 허물어 그 이데올로기로 타당성을 보장 받던 모든 행동의 실행의지를 무너뜨리는 거라면 연합적군은 반대로 실행할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때 이데올로기의 거푸집을 만들면서 그 안에 동료 고문, 살해를 채워넣은 셈이다.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수직의 위계구조에서 한 인물에게 이데올로기를 정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할 수 없었던 구조가 바탕을 이룬다.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세상을 좋게 바꾸려했던 선한 의지를 품었던 이들이 스스로에게 괴물이 되었기 때문이고, 이런 일들이 비단 44년 전 일본의 어느 산속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도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추구할 비전이 없기에 그저 동료들을 괴롭힐 수밖에 없는 학교와 군대가 그렇고. '모호한 인간'을 용납하지 않고 이념의 날카로운 선명성을 강요하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에게 '총괄'의 순결을 요구하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다면 <제국의 위안부>를 옹호할 수는 없다고 하고, 여성주의를 지지한다면 중식이 밴드를 옹호할 여지는 없단다. 민주당과 국민의 당 사이에는 어떤 흐릿한 경계도 있을 수 없다는 듯이 한겨레 신문은 양쪽에서 십자 포화를 맞고, 하종강은 전교조의 적이 되어 버렸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도 '전향'의 문제가 나온다. 신부는 후미에를 거부한다. 후미에는 예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을 밟고 넘어가는 의식으로, 배도의 증거가 된다. 신부가 끝내 후미에를 거부하고 사형을 앞둔 어느 날 밤, 옥 엽에서 코를 고는 소리에 역정을 낸다. 그때 그는 그 소리가 코고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이 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문을 받으며 죽어가는 신도들의 신음 소리라는 걸 알게 된다. 그때 신부는 후미에를 받아들이고 비로소 신의 음성을 듣는다. '밟을 때에 네 발이 아플 것이니 그것으로 족하다'
모호한 인간, 모자란 인간의 자리를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