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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힘이 될 수 있는 세상 열망하지 않으면, 파시즘 도래...
"정의가 힘이 될 수 있는 세상 열망하지 않으면, 파시즘 도래..." 내용보기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 아무리 여러 번 들어도 실제로 한 번 보는 것보다는 못하다)이란 말이 있지만, 우리 옛말에 "서울 안 가 본 사람이 서울 가 본 사람을 이긴다"는 말도 있습니다. 며칠 전 지인들과 김용준 전 국무총리후보자 낙마 이유 중 하나인 두 아들 병역문제를 비판하면서 저는 우리도 이제 모병제로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를 제외한 세 사람이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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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 아무리 여러 번 들어도 실제로 한 번 보는 것보다는 못하다)이란 말이 있지만, 우리 옛말에 "서울 안 가 본 사람이 서울 가 본 사람을 이긴다"는 말도 있습니다. 며칠 전 지인들과 김용준 전 국무총리후보자 낙마 이유 중 하나인 두 아들 병역문제를 비판하면서 저는 우리도 이제 모병제로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를 제외한 세 사람이 모두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아직 모병제는 성급하다는 논리를 폈고, 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토론하다가 다른 일행이 와서 더 이상 토론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병영국가', 황군장교 유산...

제가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를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폭력 문화가 군대에서 왔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편견과 단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87년 5월부터 1989년 9월까지 군복무를 하면서 경험한 것은 폭력이 폭력을 낳는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저보다 먼저 군복무를 한 분들은 더 심각한 폭력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저도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을 당했고, 동기 중에는 선임병에게 구타를 당해 중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군 폭력 문화는 일제잔재 중 하나입니다. 독재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17년 동안 '병영국가'로 통치한 이유 중 하나가 일본군과 황군장교로 살면서 몸에 물든 '폭력성'이 한 몫했습니다.

"후배들을 다잡기 위한 일본 군대의 폐습인 기합 문화. 이런 무조건 적인 폭력 문화는 박정희 통치 기간에도 역시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만화 박정희 1> 87쪽(백무현 글 ㅣ 박순찬 그림 ㅣ시대의 창 펴냄)

독재자 박정희를 칭송하는 이들은 그가 산업화와 경제개발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거뒀다는 논리를 폅니다. 하지만 이 빛나는 성과 뒤편에는 폭력이 폭력을 낳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음은 애써 외면하거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독재는 필요악이라고 주장합니다. 배불리게 했다는 이유로 폭력도 가능하다는 민주공화국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폭력은 그 어떤 논리로도 정당성이 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독재자 박정희가 통치한 방식인 '병역체제'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더 교묘하고 은밀하게 국가는 폭력을 자행합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비판세력을 감옥에 가두어버렸지만, 이명박 정권은 '밥줄'을 끊었습니다. 용산참사는 아직 진행형이고,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 노동자는 죽음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공권력이 오히려 국민을 보호하기보다는 국민을 테러리스트로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잔혹사
ⓒ 한겨레출판

 

이 같은 일이 이어지는 이유는 폭력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무지 때문입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한겨레 21>에 2년간 연재한 글을 모은 <대한민국 잔혹사>(한겨레출판)은 마르크 블로흐(Marc Bloch)가 말한 "과거에 대한 무지가 현재의 이해 부족을 초래한다"는 주장을 되샘질시켜주며 폭력을 반성하지 않으면 폭력은 반복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은이는 힘이 정의를 지배하고, 군림해온 대한민국 역사를 하나하나 살피면서, 폭력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파악합니다. 그래야 대한민국 과거사는 '잔혹사'였지만 현재와 미래는 잔혹사가 반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4·3 사건'여순 반란, 빨치산, 그리고 용산참사는 6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 사건으로 전혀 관련성이 없는 것 같지만, 지은이 생각은 다릅니다.

이승만 정권이 양민을 '적'으로 규정한 것처럼 이명박 정권 역시 용산철거민들은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적'이었습니다.

4·3 사건' 양민과 용산참사 철거민은 공권력 '적'...

"망루에 올라가 강제 진압을 당하지 않으려고 화염병을 준비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생존을 위한 버티기를 국가와 국민에게 공격을 가하는 테러 세력의 폭력으로 간주한 사고방식이었다. 폭력 기구로 무장한 채 도심에서 버티는 농성자들은 이명박 정부에는 신속히 제거해야 할 '적'이었던 셈이다. 용산 참사는 한국전쟁 전후 시기와 마찬가지로 토벌의 논리,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 후방 영역에 '적'을 그냥 둘 수 없다는 생각, 혹은 대항 폭력을 방치할 수 없다는 다급함과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산 농성자들은 비록 정부를 공격하지 않더라도 존재 자체가 위협이었다"(본문에서)

하지만 권력자로부터 폭행을 명령받은 자들은 "상관의 명령이므로 복종했을 뿐"(1951년 거창 학살 책임자 이종대), "나는 철저히 '상명하복'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고문 기술자 이근안)면서 자신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변명한다고 지은이는 지적합니다. 즉, 국가와 권력이 명령했기 때문에 자신의 폭력은 정당하다는 논리입니다. '절대복종', '상명하복'이 인민의 자유와 인간존엄성 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논리는 결국 잔혹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은이는 "옳은 자를 강하게 하는 일은, 정치의 무대에 누가 서는가, 어떻게 정치를 하는가의 문제다"라며 "그러자면 우선 옳지 않으면서도 힘을 갖게 된 사람들의 이력과 연유를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탄핵당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위로하며, 그들의 아픔에 공감해주는 일도 그만큼 중요하다. 관심, 앎, 연대, 공감은 옳음에 힘을 부여하는 무기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정치를 힘이 정의로 군림하게 된 한국 사회의 메커니즘 속에서 다시 읽어야 하고, 힘이 정의가 된 역사를 반추하면서 정의가 힘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열망해야 한다."(본문에서)

정의가 힘이 될 수 있는 세상 열망하지 않으면, 파시즘 도래...

정의가 힘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열망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1980년대로 돌아갈 수 있음을 지난 5년 동안 경험했습니다. 불의와 국가폭력에 저항하지 않으면 유신독재로 회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유신헌법이 이렇듯 국가를 신성시하며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원칙을 깡그리 무시하고도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라는 내용을 헌법에 집어넣은 사실이야말로 오늘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집어넣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즉 유신헌법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는 '자유+민주'가 아니라 '자유민주'이고 정확히 말하면 '자유(민주)'다. 이 '자유(민주)'는 공산 독재는 배격하나 반공 독재와 자본 독재, 더 나아가 파시즘까지 용인할 여지를 남긴다.(본문에서)

지난 30일은 20세기 '도살자'이자 가장 완벽한 독재자인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오른지 꼭 80년(1932년)이 된 날입니다. 이날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인권은 스스로 주장하지 못하고, 자유는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며, 민주주의는 스스로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한겨레>는 지난 31일 보도했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또 "독재자가 독일사회의 다양성을 모두 쓸어버리는 데 고작 6개월이 걸렸다"며 "나치의 부상은 함께 한 독일 엘리트들과 이를 묵인한 사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영원히 경고가 돼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히틀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가능합니다. 박정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박정희식 통치행위를 그리워하는, 아니 거의 '종교성'을 지닌 존재로 추앙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히틀러와 박정희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양성이 없는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그것은 독재이자, 파시즘입니다.

박근혜 당선인이 '100%대한민국', '국민대통합'을 강조하는 것이 심히 우려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100%는 없습니다. 민주주의에서 대통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대통합은 모두가 같은 생각, 모두가 같은 마음, 모두가 한 목표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김용준 전 후보자 검증을 "사적인 공격"이라고 분노한 것은 비판기능을 인정하지 않는 박 당선인의 정치인식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다양성은 비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을 탄압하고, 배척하면 독재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도래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국가권력 폭력을 넘어 자본권력 폭력 도래...

국가폭력을 넘어 자본권력 폭력이 그 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 7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서 '현대판 사병'이 등장한 사실이 <오마이뉴스> 보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컨택터스(CONTACTUS)'라는 용역업체입니다. 이 업체는 MBC, KEC, 유성기업 등 파업 현장뿐 아니라 여주 4대강, 제자교회를 비롯해 울산유치권, 마포공사장, 군산공사장, (천안)골프장, (용인)유치권, 재개발 총회 등 각종 분쟁 현장에 용역이 투입됐습니다. <오마이뉴스>는 국가권력이 아닌 자본권력의 폭력을 낱낱이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용역업체 직원 중에는 가난한 대학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은이는 이들 대학생 논리가 과거 우익 테러 조직이 주장한 논리와 비슷하다고 탄식합니다.

과거의 우익 테러 조직이나 오늘날 파업 현장에 투입되어 농성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용역 직원들의 행동의 동기는 거의 동일하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용역업체에 들어왔다는 한 대학생은 "긴급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살기 위해 봉을 휘두른다"라고 말하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떳떳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을 안 하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라고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토로한다.(중략)예나 지금이나 우익 테러의 명분은 동일하다. 과거의 '공산당 때려잡기'가 오늘의 '종북 때려잡기'로 변했을 뿐이다. 우익 테러 세력이 이제 합법적으로 설치된 회사의 직원이라는 점이 과거와 달라진 점일까? 사설 테러 조직이 공권력을 대신하는 나라에서 국가란 도대체 무엇일까?(본문에서)

국가 폭력 철저히 반성과 성찰, 살림누리를 열어가...

그리고 올해 들어 <오마이뉴스>는 특별기획 '헌법 위에 군림하는 이마트'를 30일 현재 19번째 보도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잔혹사가 자본권력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제 할 일은 대한민국 잔혹사를 반성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잔혹사를 반성하면 폭력은 중단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폭력으로 스러져간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잔혹사가 되풀이 하지 않도록 반성과 성찰을 몸에 녹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앞날은 잔혹함이 아니라 살림누리입니다.


k****e 2013.02.11.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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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모르는 권력, 공감할 줄 모르는 사회
"부끄러움을 모르는 권력, 공감할 줄 모르는 사회" 내용보기
밀양, 제주 강정 마을, 백남기 씨 등 최근까지도 우리는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 어째서 국가 권력의 기반이 되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국가에 의해 가혹할 정도의 폭력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또 왜 우리 사회는 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에 이리도 둔감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답을 구하다 김동춘 교수의 <대한민국 잔혹사>를 뒤늦
"부끄러움을 모르는 권력, 공감할 줄 모르는 사회" 내용보기

  밀양, 제주 강정 마을, 백남기 씨 등 최근까지도 우리는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을 경험하고 있다. 어째서 국가 권력의 기반이 되는 국민들이 자신들의 국가에 의해 가혹할 정도의 폭력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또 왜 우리 사회는 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에 이리도 둔감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에 답을 구하다 김동춘 교수의 <대한민국 잔혹사>를 뒤늦게 만났다. 김동춘 교수는 이 책을 통해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로 계속되고 있는 정의롭지 않은 국가 권력에 의한 잔인한 폭력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저자는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단죄하고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에 현재까지도 행해지는 국가폭력의 근원이 있다고 보았다. 


우리 사회에 정의로운 권력이 사라진 이유


  우리는 힘이 곧 정의였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지내오면서 정의로운 자들이 불행해지는 시대를 살아왔다. 이 시대엔 정의롭지 못한 국가 권력이 국민들에게 드러내놓고 직접 폭력을 행사했다. 가혹한 시절이 지나고 민주화를 얻어낸 이후에도 법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자, 자본 등 강자에 편파적인 국가 권력기관들이 정의로운 자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었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정의롭지 않은 힘을 존경하지는 않았지만 생존을 위해 그 힘에 복종해 왔다. 관심, 공감, 연대를 통해 옮음을 추구해 볼 수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국가폭력의 거대한 힘은 저항하는 자들을 손쉽게 억눌러 왔다. 국가를 위해 명령에 복종한다는 정당화 아래 고문, 학살도 죄의식 없이 저지르는 잔혹한 동조자들이 오히려 득세하는 경험은 우리 사회에 무기력함을 더해왔다.


  독재, 군사 정권 하에선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거나 국가범죄와 내부 비리를 말하는 이들은 가혹한 처벌을 당했지만, 태연히 복종 범죄를 저질렀던 이들은 출세해 왔다. 저자는 해방 후에도 항일 운동가들은 죽음을 당하고 해방 후엔 좌익 딱지가 붙어 고통받고, 친일 밀정과 경찰들은 유지가 되었던 과거 장면들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불행의 역사를 보여 준다.


  저자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비리가 일상화되었으며, 사욕에 찌는 기회주의자와 출세주의자가 공적 대의에 헌신한 사람들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지적한다. 포악한 권력 앞에 저항하던 이들이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검찰과 경찰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 했던 정부는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이런 사회에서는 국가 폭력이 사회 폭력으로 전이되는 양상이 나타나 사회에 폭력이 창궐하게 된다.


대표적인 국가 폭력 사례들


  이명박 정부 시절 쌍용차와 용산 철거민 사태를 기억하는가? 저자는 시민의 안전에는 무관심하고 시위 진압엔 잔혹하고 강경했던 경찰들의 모습을 빨치산 토벌대와 대비시킴으로써 최근까지도 행해지고 있는 국가폭력 동조자들을 비판한다. 파업현장에 용역 폭력배를 고용하는 모습은 반공시대 서북청년단을 연상시키며, 장악한 언론을 통해 이어지는 종북 때려잡기 프레임은 공산당 때려잡기와 겹쳐진다.


  저자는 계속해서 박정희가 약탈한 정수 장학회와 같이 사유재산을 강탈했던 국가 권력의 역사적 사례를 언급하고, 과거에 대한 반성이 없는 현재의 권력에 대해서도 비판적 관점을 유지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5.16 쿠데타를 인정하지도 않을 뿐더러 당시 행해졌던 각종 조작 살해/탄압 사건들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도 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국가 기관이 직접적 폭력을 가하지는 않지만 사법부는 각종 정치재판을 통해 폭력을 행사해 왔다. 곽노현 전 교육감이 그랬고, 미네르바 재판이 그러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의 최대 게이트였던 국가 수사기관을 사적 용도로 활용했던 불법 사찰 사건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 고문 전문가였던 이근안은 목사가 되어 설교를 하고 고문을 당했던 당사자 김근태 선생은 후유증을 겪다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이 죄인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도 권력자와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정치 재판을 일삼고 있는 판사들, 상부의 지시라는 정당화 속에 평화적 시위에서도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경찰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권력의 시중 노릇을 자처하는 국정원 직원들 등 우리 사회에는 책임을 물어야 하는 동조자들이 여전히 곳곳에 산재해 있다.


정의로운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김동춘 교수는 우리 사회가 피해자들이 겪는 사회적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권력에 더해 우리는 심각한 국가 폭력이 만연해도 책임자를 찾아 죄과를 묻거나 사죄하도록 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오늘 날 한국사회가 이토록 망가져 버린 것이리라. 잔혹한 역사를 여전히 살아내고 있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어디일까?


  정의롭지 못한 권력자와 조력자들, 그리고 대중의 침묵 혹은 동조가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저자의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 진다. 앞의 두 세력은 결코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각자가 사회의 변화를 위해 먼저 시작해야 하는 것은 공감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이다. “나와 내 가족의 고통을 통해 다른 가족의 고통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공감의 범위를 확장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저자가 역설한 것처럼 “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 의로운 일을 하다가 죽음을 맞은 사람들을 애도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될 수 없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최근까지도 국가의 태만 앞에 가족을 잃은 세월호 유족들, 탄압을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밖에 없던 노동자들, 마지막 저항의 수단으로 망루로 철탑으로 올라가는 노동자들의 눈물을 본다.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데에서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e*******7 2016.06.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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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공동체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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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과 4.19를 기념하기 위한 독서....괜히 한 번 이유를 붙여봤다.ㅋㅋㅋㅋ이 책은본래 <한겨레21> 지면에 약 2년 동안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저자는 인권침해가 반복되고 있는 현실 때문에 분노와 허탈감을 못 이겨 공권력을 다소 과도하게 비판하거나 재단한 점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p.8).그러나 근본적으로는과거 공견력의 잘못을 제대로 단죄하기 못했기에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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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과 4.19를 기념하기 위한 독서....
괜히 한 번 이유를 붙여봤다.ㅋㅋㅋㅋ
sally_special-1


이 책은
본래 <한겨레21> 지면에 약 2년 동안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
저자는 인권침해가 반복되고 있는 현실 때문에 분노와 허탈감을 못 이겨
공권력을 다소 과도하게 비판하거나 재단한 점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p.8).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과거 공견력의 잘못을 제대로 단죄하기 못했기에 오늘날 이 잘못이 되풀이되고 있으며
미래에도 그렇게 될 위험성이 크다(p.15)는 전제 아래 쓰여졌다.

먼저 저자는 일제 식민지 상황 분단 이후 한국 정치를 예상이라고 한 것 같다며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힘이 정의라고 떼를 쓰는 일처럼 우리를 분개하게 하는 일은 없고,
정의가 힘의 뒷받침을 받지 못해 정의로 의연히 서지 못하고 불의로 몰리는 일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다"

옳은 자를 강하게 하는 일은,
정치의 무대에 누가 서는가, 어떻게 정치를 하는가의 문제다.
그러자면 우선 옳지 않으면서도 힘을 갖게 된 사람들의 이력과 연유를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
그러나 옳은 일을 하다가 탄핵당한 사람을 기억하고 위로하며,
그들의 아픔에 공감해주는 일도 그만크이나 중요하다.
관심, 앎, 연대, 공감은 옳음에 힘을 부여하는 무기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정치를
힘이 정의로 군림하게 된 한국 사회의 메커니즘 속에서 다시 읽어야 하고,
힘이 정의가 된 역사를 반추하면서 정의가 힘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열망해야 한다. (p.33)


<자유민주주의는 어떻게 독재와 결부되었나>에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를 외친 사람들에게 총검을 들이댄 자유(민주)주의였다(p.55)는 글을 보면서는
자유라는 게 시장경제와 권력자를 위한 자유를 말하는구나 싶었다.
이런 자유는 힘을 뒷받침하는 수단이 된다.

예를 들어 <평화의 이름 빌려 폭력은 반복된다>에서는
제국주의 국가들이 말하는 평화 개념은 기만성이 있다면서
폭력 지배가 완벽해서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 노예는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존재이고,
그러한 지배는 폭력이 아니고,
그러니 저항이 없는 식민지 지배나 인종차별은 곧 '평화'인 셈이란다(p.250).
이걸 보면서는 19세기 아프리카의 질서를 찾기 위해
정작 아프리카 국가의 대표는 한 명도 초대하지 않고
유럽 강대국들을 베를린으로 초대한 회의가 떠올랐다.
아... 역사는 반복된다.

이렇게 자유가 왜곡된 가운데, 대항하는 세력을 용납하지 못하는 현상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국민에 대해 약점이 많고, 대항 세력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고 의식하는 정권일수록 그럴 것이라고 한다.
이에 저자는 발터 베냐민의 '폭력 비판론'을 끌어 쓰고 있다.
저항 세력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기존 질서를 중지시키는 것(예: 노동자 파업)이 지배 세력에는 체제 위협으로 간주된다고 본다는 것이다(p.107).


글을 계속 보면서 부끄럽고 분노하고 답답했다.
그러나 이게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쉽게 선진국은 이러한다며 선례를 들지만,
세상 곳곳에서 이기적이고 억압적인 모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저자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공감의 공동체를 이야기하며 글을 마친다.

보통 사람의 처지에서도 이웃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로 행복한 상태다.
특히 본의 아니게 국가 폭력의 피해를 입은 사람은 당연히 이웃의 공감과 배려를 받을 자격이 있다.
공감과 배려에는 억울한 피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정이 전제된다.
인정은 인간 존엄의 극대치이며, 사랑은 최고의 인정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려면 가족, 이웃,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정신이 살아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과 제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인간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다가 외롭게 죽을 수밖에 없다.

공동체란 무엇보다 공감의 공동체다.
국가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사람들, 권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
의로운 일을 하다가 죽음을 맞은 사람들을 애도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좋은 사회가 될 수 없을 것이다(p.266).


s******2 2015.04.18. 신고 공감 0 댓글 0